허무의 심화학습 전도서 8:7 260514
수요설교요약음성
안양20260514a전8장7절(허무의 심화학습)-이 근호 목사
137페이지. <전도서와 한국교회>. 전도서의 내용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삶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별 개 아니고 허무하다. 인간은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가 있었어요. “함께 살자.”
이걸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되면 “함께 살자.” 하나님과 인간의 조인트가 뭐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말씀 안에서 살자.” 인간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말씀 안에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위치가 어디입니까? 어느 위치지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아주 고집이 대단하시지요. 무조건 말씀 안으로. 말씀 안에서 이게 구체화 되면 이게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 그리고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십자가 안에서. 왜? 십자가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으니까. 십자가 안에서 살자. 어떻게 살자? 함께 살자.
개인으로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지, 개인으로 사는 것은 인간일 수가 없어요. 전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 없이 개인으로 살 때, 인간의 적나라한 그 모양새는 어떠하냐, 열심히 살기는 사는데, 백날 살아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삶뿐인 거예요. 함께 살자. 임마누엘이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관된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살아온 그 자세, 습관이 혼자 살게 되어있어요. 혼자 살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요걸 그림으로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에요. 혼자 사는데 혼자 살면서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혼자 살면서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두꺼운 벽 같은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허무에요.
“니가 혼자 살고 싶어? 그렇다면 이 허무를 감당할 수 있겠어?” 이리되는 거예요. 인간의 허무를 더욱더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현상들, 바람, 강물, 햇빛, 이 모든 것. 인간이 동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을 더욱더 허무하게 만드는데 하나의 재료로서 하나님이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공기 없이 혼자 살래.” 안되지요. “나는 햇빛 없이 혼자 살래” 안 되지요. 그럼 햇빛과 공기가 있다는 것은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가중하게 되는 겁니다. 더욱 힘들게 허무를 가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만물의 피곤함.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장부터 나오게 됩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의 말로 다 할 수 없다. 적어 볼게요. 이게 왜 중요한지 적어 볼게요. 사람의 피곤함이 그다음에 뭐예요? 사람의 뭘로? 사람의 말로 다 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 끄집어내겠습니다. 피곤함, 두 번째는 말.
인간이 말을 통해서 나는 나 위주로 사는 것에 나는 의미를 둔다. 이게 말로 동원해서 하는 거예요. 말로. 인간의 말은 모든 게 자기를 변명하는 거예요. 모든 말은. 그때 내가 정신이 없었다. 실수해서 금3돈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말이 동원돼요. 말이.
그런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게 뭐예요? 피곤함이지요. 금 3돈을 잃어버렸는데 갑자기 어디서 선물로 금 10돈이 들어왔다. 그때 안 피곤합니까? 피곤함은 금으로나 은으로나 다이아몬드나 애가 공부를 잘하는 걸로 회수가 안 돼요. 인간의 피곤함은.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에 둘러쌓인 거예요? 허무에 둘러쌓여있어요. 인간이란 그것보다 더 넓게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허무라는 두께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이 허무를 가르쳐요. 허무 속에서 인간은 몸부림칩니다.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쳐요. 그런데 그 몸부림치면 칠수록 허무는 더 꼬여요. 꼬입니다.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자질은 다 동원해요. 훌륭히 산다든지, 완벽하게 산다든지, 정신 바~짝 차려서 산다든지, 어디 갈 때 슬슬 흘리고 안 다닌다고 정신 바짝 해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정신 바짝 차리는 이 뇌세포가 자체가 함몰돼요. 이게 치매 현상입니다. 치매 현상이에요.
치매 들린 환자가 늘 치매는 아니고 가끔 정신있잖아요. 그럴 때 이런 이야기해요. “야, 야, 내가 너희들한테 미안하다. 내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똑똑하고 야무락지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데 내가 왜 이리 됐노.” 가끔 정신 돌아올 때 지금 그 사람은 회개하는 거예요? 반성하는 거예요? 뭔가 후회하는 거예요? 아니면 뭐예요? 자기 변명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요, 혼자 살기 달인 됐어요. 혼자 살기 달인. 기껏 어떤 솜씨를 발휘해 봤자 혼자 사는 거예요. 혼자 사는 거. 자기 곁에 하나님이 안 계셔요.
자,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압니까?” 또 이런 질문 들어오겠지요. 그럴 줄 알고 제가 방금 여기 적어놨지요. 하나님과 어디서 산다? 내가 하나님을 골라잡아서 붙들고 사는 게 아니지요. 어디서 산다?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산다. 말씀이 뭔데? 언약. 언약이 뭔데? 십자가.
십자가에서 나는 죄인 되고, 누구는 의인 되고? 주님은 의인 되고. 나는 죄인인데 주님의 의가 내 속에 그 나라와 그의 의가 사랑의 이름으로 밧줄로 꽁꽁할 때, 나는 죄인인데 나를 휘감고 있는 그 넝쿨은 뭐가 돼요? 주님의 의에 팔뚝. 나를 안아주는 그 의의 팔뚝. 팔뚝에다가 나의 의라고 문신을 새겨서. 숨 막히도록 감아주는 하나님의 의.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
어제 수요설교 같으면 “이 밤의 끝을 잡고” 모든 것의 끝을 잡고. 모든 것이 끝나고 마감이 된 상태에서 우리에게 거져주는 것은 하나님의 그 나라와 천국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하여금 우리는 하자 없는 존재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겁니다. 함께. 이게 함께 사는 거예요.
함께 사는 것은 신약에 문제잖아요. 성소는 어디입니까? 구약이지요. 구약이 정확하게 현실을 솔로몬이 현실을 지식과 지혜를 동원해서 봤을 때, 현실은 뭐다? 인간은 어디에 갇혀 있다? 허무 안에 갇혀 있다. 요게 바로 지식이 아니고 요게 바로 지혜다.
나는 허무 안에 꽁꽁 갇혀 있는 존재지요. 이것이 신약에 와서 이 전도서를 다시 보게 되면 나는 매사가 허무하다가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금 차나 안 차나 마찬가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뭔가 된 양 여기는 것.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딱 허무한 증거물이에요.
허무를 허무되기 위해서 우리는 날뛰고 설쳐야 되고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반성하고, 때로는 자책하고, 이것이 평생가도록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예상 못한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풍겨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전도서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고린도후서2장을 한 번 봅시다. 2장14절~16절까지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6절에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이것은 인위적으로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허락해 주신 거예요.
차 안이나 집 안에 향기 나는 거 제품 사잖아요. 다이소 가면 팔지요. 할 때, 그 향기 나는 상품 자체가 고민합니까? 그 현장에 놓이기만 하면 거기서 뭐가 나와요? 향기가 나오잖아요. 주께서는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어요. 허무하게 만들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우리가 있는 그 꽂아놓으면 거기서 뭐가 나와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안 허무하려고 통밥굴리고 “아이고, 내가 좀 완벽했었으면.” 이리 나오면 무엇이 죽어요? 십자가에 안에 함께 있음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이 우리로 인하여 막히게 되겠지요. 그럼 누가 좋아합니까? 마귀만 대따 좋아하는 거예요. 좀 더 완벽해. 좀 더 철저해. 다음에는 그런 실수 없도록. 마귀가 계속해서 쑤시는 것은 마귀는 이 영적인 것을 알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마귀는 성도를 알아요.
여러분, 문제 한 번 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설교를 누가 제일 열심히 듣겠습니까? 마귀지요. 영적인 존재니까. 누가 못 알아듣습니까? 인간들이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안 깨달아도 괜찮아요. 모든 말씀은 마귀와 마귀에 잡혀있는 자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마귀한테 속했는데 주에 속한 사람은 성경 말씀하면서 내가 허무한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나올 때 그게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오늘 남방 몇 장 팔았어요? 지금 석달째 한 장도 못 팔았어요. 마귀는 “차라리 죽어라.” 하는데 죽고 사는 것도 내 맘대로 안된다. 한 장도 못 팔아도 하나님의 의로 포근하게 감기는 데서는 남방 한 장도 못 팔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남방을 한 2000장 팔았다. 갑자기 독립선언해요. 이제는 주님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안에 살겠습니다. 주님의 의, 주님의 사랑,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겠습니다. 이거 누구 향기입니까? 이건 향기도 아니네. 자기 뽐내는 거죠. 이건 향기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아니에요. 십자가 증거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니보다 잘났다. 그것뿐이에요. 경쟁의식일 뿐이지요.
그다음에 계속 성경 봅니다. 피곤하지요. 그다음에 8절에 보면,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다. 1장 8절에 전체 내용이 다 나와요. 보기 때문에 내부에 욕심이 생기는데 그 욕심을 채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다음에 11절에 보면 치매 현상 나오지요.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알아달라고 설치지 마. 우리 후손은 내가 여기 있었나. 후손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 같은 시대의 동기들은 서로 알아줬다. 알아줬다 큰소리치지만, 약간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동기부터 해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요.
인간세계에서 기억함이 없다는 것은 그냥 없다가 돼요. 태어난 적도 없다. 살아온 적도 없다. 따라서 고로 죽은 때도 없다. 결론은 없다. 없다. 남는 것은 내 이름은 없다. 누구 이름만 영원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만 영원하기 때문에. 내 이름은 없다가 됩니다. 이제는 이름을 바꾸세요. 이없다. 최없다. 김없다. 없다.
2장에 넘어가 봅시다. 2장 2절에,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웃음은 미친 짓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왜 웃는데?” 이리되는 거예요. “니 허무한데 왜 웃어? 허무한데 왜 웃느냐고? 너 바보 아니야?” 이리되는 거예요.
내가 웃음에 관하여 논하기를 미친 짓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영화도 있지만, 웃는 것도 미친 짓이지요. 다른 말로 세상은 모르고 미쳐있기 때문에 웃는다. 이리되지요. 희락에 대하여 논하기를 저가 무엇을 하였는가, 아, 나는 기쁘다. 뭐? 몰라. 논했는데 무엇 때문에 기쁜지를 몰라요. 일시적으로 기쁜 것은 오래 갈 기쁨이 아니거든요.
희락이라 하는 것은 신약에 오면 성령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목날릴 때, 경상도 말로 모가지 날릴 때, 우리의 몸과 욕심과 모든 감정을 없는 것으로 취급할 때, 그때에 희락이 나온다고 되어있어요.
뭐 불교의 이차돈은 모가지 날릴 때에 흰 피가 나왔다 했잖아요. 우리의 모든 눈이 박혀있고 정서가 있는 두뇌부터 칼로 쳐버리면 함께 있는 주님의 기쁨이 모가지 날아갈 때 그 구멍을 통해서 솟아난다 이 말이지요. 영화 찍으면 요거 AI한테 이미지를 하게 되면 잔혹사되겠는데요. 잔혹사.
우리가 아는 것이 주님의 희락을 프레스 억압하고 있었다 말이지요. 내 계획과 내 꿈과 이런 것은 모가지 날려버리면 주님의 다 이루었다의 기쁨이 샘솟아 나오는데 전도서에 보면 그런 게 많이 나오거든요. “니가 왜 계획해? 니가 왜 설계해? 니가 미래에 대해서 알아? 모르잖아. 왜 미리 걱정하고 있어?” 이런 거요.
그다음에 2장에 보면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장4절에 보면,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그 당시에는 목축 또는 재배, 농사, 과수농사 이런 것이 주종이 되기 때문에 사업을 과수농사에 대해서 한 겁니다.)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사업에 실패했어요? 성공했어요? 성공했지요.
자, 이걸 오늘날 자본주의의 상황 속에서 이 사업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함께 말씀 안에서’ 이걸 기억하시고. 오늘날 사업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 아이디어, 기술, 은행 대출 자본이지요. 거기에 시장정보, 이런 것들을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하는 게 이게 사업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업이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다는 말은 결국은 아이디어, 기술, 자본, 시장정보, 수익, 이 모든 것도 뭐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거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 기술을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얼마나 들볶아가면서 1등, 2등 따져가면서 학원 보냅니까. 애들 교육하는 이유가 뭐예요? 오늘날 창의적인 아이디어, 든든한 정보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 이것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상품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르크스라는 사람은 상품이 요런 것을 해가지고 제품이지요. 시장에 내어놓으면 제품이 상품이 아니고 이걸 시도하는 나. 나라는 인간 자체가 시장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상품이 되고 제품이 된다는 거예요. 마르크스라는 사람은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 스스로가 하나의 상품이라는 것을 ‘물신숭배’라고 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종교고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최후의 종교.
최후의 종교는 내가 진열된 쇼윈도우에 진열되어있는 자본주의 거리에 나를 진열해 놓고 나를 상품화시켜서 제발 나를 당신이 구매해서 가져가세요. 구매해서 가져가게 되면 어떤 재벌에 손자가 3명 있다. 그럼 그걸 알고 어떤 여자분이 온갖 옵션과 컨셉을 완전무장해서 나 같은 여자는 재벌의 레벨에 맞습니다. 하고 자기를 상품화했을 때, 그리고 시집갔을 때, 그때 여자분이 얻고자 하는 노림수는 뭐예요?
자기를 상품화해서 재벌에 팔려 가고자 할 때 얻고자 하는 떨어지는 것은 뭡니까? 돈이지요. 그게 바로 물신숭배에요. 그걸 무슨 주의? 그걸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최후의 종교에요. 요한계시록에 최후의 종교.
예수님도 했잖아요. 하나님과 재물은 라이벌 관계에요. 두 개를 가지는 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할래? 돈을 선택할래? 그리돼요. 최영 장군이 그런 말을 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요. 금보기를 뭐 같이하라? 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그게 바로 이방 종교의 한계지요. 나를 보기를 돌같이 하라. 내가 나에게 보물이 될 수 없는 구조에 우리가 이 허무한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게 전도서 마지막에 나와요. 내가 있다고 여겼는데, 내가 있는 그 현장에 나중에 나이 들어보니까 내가 없어지고 무너지는 골조만 있어요. 나라는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하나의 칼슘으로 되어있는 뼈의 골조가 된 사물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게 전도서에 보면 흙이 되는 거예요. 흙이 되는 과정에서 허구가 뿜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분명한 사실을 보고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된다? 기쁘고, 감사하고, 특히 고마워요. 고마워하는 거예요. 전도서라는 말씀 안에 있기에 이게 고맙고 감사하고, 기쁜 거예요. 말씀 안에 함께 있다는 의미가 이런 겁니다.
제발 이 허무한 것아! 계속 허무해 다오. 중요한 것은 니가 독자적으로 안 허무하면 안 되고 충분히 허무해 줘야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 빛이 나잖아요. 허무한 것까지라도 주님께서 천국의 사람으로 심어놨다는. 이게 뭐냐, 허무의 심화학습. 이야기하니 재미있네요. 이걸 제목으로 해야겠다.
허무의 심화학습은 평생토록 진행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 허무하고 싶어도 주께서 허무 거리를 우리 육체에다가 쏟아붓지요. 외부에서. 내가 원치 않는 허무가 찾아오면서 그때 우리는 허무라는 이것이 말씀의 일종으로 인식되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그다음에 2장 20절에,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 실망입니다. 그다음에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밤은 내 밤이야.” 아주 꿀밤을 줘버려요. 낮이고 밤이고 내 거는 없어요. “오늘 밤은 쉬어야지.” “누구 마음대로 쉬어? 누구 마음대로?” 못 쉬지요. 나는 밤이고 낮이고 그냥 자. 그건 특별한 혜택이고. 밤에 자도 잠이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양 한 마리, 양 백마리. 양 백한마리... 밤 다 새우고.
자, 허무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그게 3장에 나옵니다. 3장에서 단어 하나 뽑으라고 하면 뽑히지요. 때. 시간은 카이로스. ‘때’ 시간은 3종류가 있어요. 크로로스라고 해서 역사. 우리가 보통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 임진왜란이 어떻고, 이순신 장군이 어떻고 다 과거. 앞으로 2030년도에는 무슨 도로가 개통되고 이게 다 뭡니까? 그게 그냥 시간이에요. 시간. 보통의 시간이 있고.
그다음에 이건 성경에서 나온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그 시간들이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집한 거. 종합한 걸 ‘세대’라고 해요. 세대. 시간이 3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그냥 시간. 우리가 아는 시간. 시간의 흐름. 두 번째는 뭐냐, 세대라고 하는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했지요. 세대. 세대라는 것은 사건들의 집합. 이건 뭉태기에요. 뭉태기. 시간은 촘촘히 흘러가는 것. 째깍 째깍 흘러가는 반면에 세대는 지나간 세대를 한뭉큼 해보면 옛세대. 앞으로 오는 것은 새세대.
지평선에 흐르는 것은 시간, 지평면 위로 흘러가는 것은 세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1번하고 2번하고 상관은 없는데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카이로스는 뭐냐, 때. 때는 세대를 넘어서서 위에서 알 수 없는 곳에서 이걸 그냥 직선으로 내려꽂을 때 요 지점이 바로 때. 때가 돼요. 때를 다른 말로 하면 우발, 우연.
시간과 세대는 인간이 어느 정도 기억력이 있기 때문에 좀 감을 잡아요. “아, 요새 세대 아이들이!” 이렇게 하잖아요. “요새 젊은 세대들이” 이렇게 하잖아요. 우리 늙은 세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대는 감이 있고, 시간은 당연히 매일같이 시계를 보니까. 시간을 느끼는데.
때는 예상도 못해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날 때 예상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은 과거 인물이에요. 과거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었잖아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런데 그 사울에게 누가 나타났어요? 갑작스럽게 영광중에 빛가운데서 예수님이 다메섹 가는 길에 나타났지요.
그게 뭐예요? 그게 때지요. 요 때는 어디서 오는가, 이미 여기에 완료된 사건이 모든 세대와 시간을 쪼개고 홈을 따라서 지평까지 사울이 있는 곳까지 침투할 때 그때 이미 여기서 시간이 고정된 시간, 완료된 시간, 멈춘 시간이 돼요. 완료함이 미완료 시간 위에 때라는 이름으로 꽂혀버린 거예요. 구원받았습니다. 그게 구원받은 거예요. 예상도 못했어요.
세대에서의 구원은 인간이 기대하는 구원이에요. 주께서 재림하실 때 어떻게 하고, 어떻고. 십자가는 다 알고. 여기서 나의 예측이 살아있잖아요. 나의 예측이 살아있음은 나의 살아있음. 이런다고요. 앞에 자꾸 나가 붙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주동인물 중에 한 사람이지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장담했어요. 우리가 예수를 처형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정당한 것이다. 어떤 개인의 원한이 아니고 전부 다 다수의 의견을 수집할 때 옳다고 해서 내린 결론이거든요. 나는 거기에 동의한다. 여러 수렴이 잘 되어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죽을 만해서 죽은 거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여호와의 무구한 전통. 시간이지요. 무구한 전통은 예수라는 그 존재에 의해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메시아는 역사 끝에 오기 때문에. 역사 끝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이게 사울이 철썩같이 믿었던 거예요. 이게 자기의 믿음이지요.
갑자기 사울에게 죽었으면 끝날 문제잖아요.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왔을 때, 얼마나 사울이 놀랬겠습니까. 놀란 동시에 사울은 뭘 잊어버렸어요? 자기 예측, 내가 살아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엉터리였어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나는 살아있다,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갈라디아서2장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십자가는 못 박힌 사람이 몇 명이나 돼요? 2명밖에 없어요. 하나는 지옥 간 강도, 하나는 천국 간 강도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사건화되어버리면 그 안에 누가 끼었다? 사울 본인이 거기에 끼어들었다는 거예요.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과 세대 가운데 사람들은 무엇을 찾느냐 하면, 교회를 찾지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의 사건은 무엇을 부셔버립니까? 이 교회 활동을 완전히 작살내고 말아요. 교회의 활동이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되고 구원이 안돼요. 왜? 교회 활동은 인간의 예측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측 속에서. 자식들 4대째 기독교 집안 이거 아무 소용없어요.
나의 악함, 내가 사람을 열 명 죽였다. 아무 소용없어요. 하여튼 아무 소용없어요. 야곱은 거짓말했다. 거짓말해도 괜찮아요. 야곱은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 된 사람이니까. 바로 신약에서 이런 십자가를 알리기 위해서 구약의 노선을 뭘 한다? 허무의 무슨 학습? 허무의 심화학습. 그게 현실로 계속 이어지지요.
때. 때는 여러분이 아시지요.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그런 거. 마치 우박 떨어지듯이 전부 다 성도한테는 주께서 날카로운 창으로 시간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우리의 머리 위에다가 침놓듯이 여기 놓고, 저기 놓고 갑자기 쓱 들어와서 침을 놔버려요. 심지어 배에도 놓고.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꽂혀들어오지요.
그럼 우리는 침을 뺄까요? 아니면 침을 꽂은 채로 있을까요? 꽂은 채로 있어요. 나는 시간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세대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어디에 속한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 속한다. 이게 총괄 사건. 이 총괄사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있다.
그다음에 3장 16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악의 편재성. 악은 어디에도 있다. 악이 없는 세계를 아예 고대하거나 기대하게 되면 이건 크로로스고 아이언 사고방식이지요. 카이로스 사고방식 아니지요.
18절~21절에 보면, 인간은 뭐라고 표현했는가, 인간은 짐승이다. 19절에 인간은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다.
그다음에 4장 봅시다. 2절에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가 복되다. 부러워해라. 바보야, 니는 아직도 살아있나.
8절에 보면 고생이 끝이 없다.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낙은 낙대로 얻고.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왕 고생하는 거 고생해도 같이 고생해라. 같이 해라가 10절에서 13절에 나와요. 이왕 고생하는 거 방 혼자 쓰지 말고, 동거인이랑 같이해서 찔찔 울면서 같이 죽자. 이리 살아라 이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동거인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감사할 일입니다.
그다음에 5장 봅시다.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나와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거예요. 니가 뭘 안다고 입을 놀리느냐, 그 이야기가 2절에 나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니가 뭘 아는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인간은 뭘 안다는 말은 이건 소극적으로 이리 봐요. 간단한 수학인데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낼게요. =1, =2˟2=4,=2˟2˟2=8, 1을 무한승하면 뭐가 나오겠어요? 1나오지요. 1+0.000000..., 있으나 마나 한 거 미세한 거, 미세한 것을 무한대로 했을 때, 여기 뭐가 나오겠습니까? 이거 뭐 붙어있으나 안 붙어있으나 마찬가지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 붙었을 때 뭐가 나오겠습니까?
이걸 컴퓨터로 계산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나와요. =2.7182818... 나와요. 2.7182818이 나와요. 수학에서. 아니 뭐 무시해도 되는데 정답은 무시가 2.71이 됐어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의 숫자로서 딱딱 끊어서 생각하고 자투리, 천 긋다가 남은 자투리있잖아요. 이건 보통 버리잖아요. 우리가 자연 가운데 이건 필요 없어. 버려도 좋은 그것이 남아서 2.7182818에 접근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학자는 이걸 발견하고 이걸 e라고 합니다. e=자연상수 라고 해요. 자연상수. e=2,7182818..., 세권의 정식이라든지, 복리이자계산이라든지, 방사능 확산 속도라든지 계산할 때, 자연상수라는 게 있어요. 상수.
어떤 상수? 자연 세계에 있는 인간이 미쳐 다 카바 못하고 정복하지 못한 게, 이게 인간이 접수한 1의 무한대는 1이다. 하는 기껏 안다는 게 이거 말고 나머지가 너무 넘치도록 많이 있는 거예요.
이걸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뭘 아냐?” 니가 장래에 대해서 뭘 알고 니가 강보에다가 뭘 던져놓고 어떻게 흐를지 니가 뭘 아느냐, 다시 말해서 니가 안다는 것 그 자체 때문에 더 많은 너의 모름이 현재 너의 인생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남탓, 니탓, 특히 남탓을 하지 마라. 너 탓도 하지 마. 너도 니가 정신 바짝 차린다고 니가 원하는 니가 되는 게 아니야.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허무한 거예요. 인생은. 어떻게 좀 위로가 되십니까.
5장 11절에서 16절 보면, 재산이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는 것. 12절에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어제 저녁에 그냥 먹는다 하는데 그냥 쳐먹었어. 에슬리 뷔페에 가서 너무 먹었어. 신라호텔 뷔페에 가서 너무 많이 먹었어. 돈이 비싸서. 잠을 못 자.
노동자는 일에 치어서 뻗어버렸어. 뻗어가지고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도 안 될 때 가장 행복해버려. 편히 잠을 자니까. 잠이 나를 지배하니까. 부자는 자기가 잠을 지배하려하니까 불행이 오니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6장. 내가 가진 것이 계속 내 것이 된다는 것이 보장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6장 2절에 패단이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내가 어떤 재물과 부요과 부족함이 없어서 금까지 찼는데, 이게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렸네요. 내 기뻐하라고 금을 찼는데 이게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이 차고 있어요. 그 사람 얼마나 기분 좋을까.
그다음에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한쪽으로 집결된다. <이 밤의 끝을 잡고> 김조한이가 불렀던 노래 있지요. 솔리드. 6장6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 다 어디로 간다? 한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걸 장례식으로 보면 되는데 장례식장을 봐도 모든 말씀은 모든 세상의 일어나는 일은 십자가로 이미 모아졌는데, 십자가에서는 딱 두 개의 길이에요. 천국 아니면 지옥. 히브리서9장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땅에 살지만,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확정된 일이다. 이마에 도장 파요. 시체 하나요! 시체 둘이요! 이미 이마에 도장을 팍 찍었어요.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학문들은 기어이 살기 위해서 사는데, 살기 위해서 하는 기껏 아이디어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하나의 스스로 자기를 상품화되는 값진 상품화로 제시되고 진열되고 스스로 자기를 팔려나가는 상품으로 하는 거예요. 맨날 그래봤자 결국은 천국 아니면 지옥. 지옥 아니면 천국.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림자가 나와요. 그림자가 나올 때마다 늘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요. 인생은 나그네길.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6장12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자연 상수를 인간은 빠트렸지요. 인간은. 요기까지는 내 것, 요거는 내 자랑, 내 솜씨. 이거 자랑하다가 놓친 게 자투리 놓친 게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이걸 알면, “어떻게 온전합니까?” 물으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허무의 기쁨을 더 만끽하겠습니까?” 질문이 이렇게 바뀌어야 되겠지요.
7장에 봅시다. 7장에 보면 초상집에 가라. 아주 상당히 과격합니다. 잔치집에 가지 말고. 요새는 잔치집에 가도 비싸요. 서울의 호텔 잔치집에 가면 이십만원 들고 가도 욕 얻어먹는다니까요. 잔치집에 가지 말고 어디 가라? 초상집에 가라. 왜? 이유가 나와 있어요.
마지막은 누구든 관속에 있는 자나 관속에서 그걸 지켜보는 자나 결국은 똑같이 자신의 대기표 뽑고 기다리는 미래의 모습은 관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나에요. 지금은 아직까지 여분의 시간이 있어요. 관까지는 있는데. 그래도 결국은 그쪽으로 끌려갑니다.
신자나 신자 아닌 자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미리 앞당겨서 그리스도가 찾아오는 사람만 두 번째 부활에 참여한다. 천국 간다 이 말입니다.
그다음에 3절에 보면, 슬픔이 뭐 보다 낫다? 웃음보다 나으면 얼굴에 근심하므로 마음을 좋게 함이라. 그래서 3절의 해석이 4절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파티집)에 있느니라” 여기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은 두 패로 나뉜다. 그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60514b전8장7절(허무의 심화학습)-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전도서7장9절부터 하겠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세상이 얽히고 설킨 모든 원인과 결과가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에서 지금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는지를 그걸 다 체크 안 된 상태에서 “니 때문에 그렇다.” 라고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화를 내 버리면 그 순간 화낸 사람은 뭐냐, 세상만사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우기는 게 되지요.
“세상에 어떤 일도 나를 좋아라고 있어야 되고, 나를 행복하도록 있어야 돼.” 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세상의 모든 일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어요.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냥 울 때 울어야 되고, 웃을 때 웃어야 되고, 아플 때 아파야 되고, 건강할 때 건강해야 되고, 사랑할 때가 있고, 헤어질 때는 헤어져야 되고, 그리고 살아있을 때 살아야 되고, 죽을 때 죽으면 되지. 주께서 죽이는데 니가 무슨 권리로 “살려주세요.” 할 수가 그럴 수가 없어요.
그걸 9절에서는 급한 마음이다. 조급한 마음이니까 자기의 꽁꽁 숨겨 놓은 본성이 튀어나온 거예요. 드라마에 이런 드라마가 있는데. 제목이 <허수아비>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 수사관들이 범인도 아닌데 범인으로 몰아세워가지고 구치소에서 죽게 하니까 그 형사를 붙들고 “살려내! 살려내! 살려내!” 꼭 세월호 나오는 거 같아요. 살려내! 그게 급한 마음에 분노하잖아요.
그럴 때 만약에 형사가 전도서를 안다면 “죽을 때가 됐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왕산에 가서 휴대폰도 없이 올라갔지요.” 죽을 때가 된 것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미리 사전에 예방하거나 말릴 수가 없어요. 앞으로 배 탈 때 기관부터 조사를 다 해야 돼요.
애가 운동장에서 넘어졌다. 다쳤다. 그래서 그 학부모가 교사에게 고소한 거예요. 자기 애 관리 안했다고. 그러면 내가 교사 같으면 이렇게 합니다. 애를 우리학교에 보내기 전에 사전에 운동장에 와가지고 측량하라고. 사전에 측량하고, 소풍 갔을 때 내 아이가 소시지 알레르기 있기 때문에 먹이지 말라고 어떻고 저떻고 한 소리 하거든 그냥 애만 소풍 보내지 말고, 사전에 그 회사 알아가지고 일단은 식단이 어떤 게 들어가는지 중국산이 들어갔는지 그것부터 당신 몫으로 하란 말이죠.
모든 탓은 누구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현대인이. 남 탓 돌리잖아요. 정말 미쳤어. 완전히 세상이 미쳐 돌아가요. 미쳐 돌아가는데 그게 안되니까 자기가 자기로 미쳐요. 우울증. 세상에 마음대로 안되니까 누구를 학대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학대하는 거예요. “오늘 밥 먹지 마! 너 꿇어앉아.” 분노를 주체를 못해요. 분노를.
그래서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치료하는 방법이 뭐라고요? 죽여버리는 것. 세상 모든 것은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성경의 언어는 우리를 죽이는 언어입니다.
반면에 신학은 우리를 살려달라고 아주 환장한 게 신학이에요. 그러니까 신학이 얼마나 성경과는 반대가 되는지. 죽으라고 말씀을 줬는데 우리는 그 말씀가지고 살려고 하니까 이게 눈이 감긴 거예요. 아니 눈이 감긴 게 아니고 눈이 밝은 거죠. 눈이 밝은 게 정상이 아닙니다. 그게 마친 짓이에요. 마귀 짓이에요.
그다음에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아~~ 중요하지요. 앞으로 주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넣은 펀드가 지금 환매할까요? 뺄까요? 더 오래 놔둘까요?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카이로스, 시간의 장래에 대해서는 일체 모르는 쪽으로 모든 것이 때가 되매 이루어지는 것이지, 니가 감 잡아가지고 니가 예측을 잘해서 그런 거, 성립되지 않게 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끝까지 허무해야 되니까.
허무 안하려고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어요. 허무해야 돼요. 그래서 형통한 날은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고. 기쁨과 생각을 병행하게 하시는 거예요. 병행한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인간 선에서 통합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통합은 없어요. 인간에게는 통합의식이 없다. 왜? 이 인간은 죽는 것이 통합이다.
“죽어라. 내가 살려줄게.” 이거잖아요. 주의 뜻 간단하지요. “살려주세요!” 아니에요. “내 손에 죽어. 이 말씀으로 죽어. 내가 살려주면 될 거 아니야.” “못 믿겠습니다.” “믿지 마!” 우리 함께해야 되는데 니는 벌써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니는 독자적으로 나만, 나만, 나만,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참, 이 가족이라는 게 하나님께서 가족을 붙여준 이유는 병행하기 위해서에요. 주와 함께 할 거냐, 아니면 같은 아는 인간들끼리 함께 할 것이냐, 둘이 병행해가지고 맨날 형통하고, 맨날 우울하고, 이건 뭐 좋았다가 싫었다가 화냈다가 기뻐했다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요. 우리 인생을. 장래 일을 능히 헤아릴 수 없게 만든다.
7장을 한마디로 말해서 이거에요. ‘예측 불가’ 택시 탔는데 분명히 요리 갈 것이다. 아닙니다. 지 맘대로 가요. 7장20절, 21절,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없어요? 아주 없다. never. 전혀 없다.
그래서 21절,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 두지 말라. 이걸 저는 자주 이야기했지요. 제발 주님하고 사귀어야지 같은 사람하고 기대하거나 사람에게 고대하거나 기대하거나 말을 사귈 생각을 하지 말아라. 가족이 그만큼 짐이 되는 거예요.
가족이 잘 되면 갑자기 가족에 의존하려는 성향이 확 올라오고, 가족이 뭔가 안되면 갑자기 짐처럼 느껴져가지고 발로 저리 가! C. 가족이 물귀신이야. 같이 죽겠다 이거. 목이 안 좋은데 갑자기 이렇게 큰 소리를. 덥다. 좀 떨어져라. 지금 서울에 날씨 30도인데. 떨어져. 나라도 살자. 다 같이 내 모가지 쥐고 물속에 들어가려고. 우리 가족 아닌가, 가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도움 될 때 가족이지. 도움도 안되는데 무슨 가족이냐.
22절,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가끔이 아니고 종종. 23절,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내가 지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는데 지혜가 누굴 떠나요? 지혜가 굿 굿바이. 우리 쿨하게 헤어지자.
지난 부산강의 때 제가 2개의 노래를 했잖아요. 하나의 노래가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 우리 다시 사랑하면 이렇게 만나지 말자. 경상도 말로 한 번 디어봤으니까 다음에는 거리를 두고 만나자. 그런데 두 번 째 노래는 뭐냐 하면, life's storybook cover. 자기만의 소설을 쓰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 카바에는 내 인생은 이렇다. 제목부터 이미 정해져서 인생은 살아간다. 내 젊음의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하나. 유미리가 불렀던 거예요. 자칭 이선희의 라이벌.
왜 그리 생각하는 것이 내 노트에 뭘로 찬란하게 채울 것인가, 거기에 누가 흠집내면 발작으로 화를 내고, 거기에 약간 도움된다고 하면 좋아라 춤을 추고, 아이고, 누가 허무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한 거예요.
7장28절에 약간 이상한 일이 있어요.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자가 수능이 낮고 IQ가 낮다는 뜻이 아니고, 여자의 생활 환경이 폐쇄된 가정이에요. 남자는 바깥 생활을 하다보니까 경우의 수를 많은 허무의 경우를 많이 아는데, 여자 같은 경우에는 애하고, 개하고 논다고 경우의 수가 적다는 뜻이에요. 지금은 여자도 바깥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남자 못지 않게 ‘아, 세상은 헛되고 헛되구나!’ 그런 것을 알지요.
자, 8장을 계속 보면, 왕의 존재에 대해서 왕은 왜 있는가, 왕은 없어야 되는데 왕이 있는 거예요. 없어야 되는데. 같은 인간인데 지가 자기한테 권력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백성들하고 자기하고 차이를 두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제가 강의 준비하면서 그걸 언급하는데. 힘이라는 것을 규정하는데 말로 설명하는 게 굉장히 복잡해요. 힘이라는 게. 첫째 힘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두 번째 놀라운 사실은 영향력이 있다는 거예요. 영향력이 있는 거예요.
경주에 가니까 옛날부터 KBS1 방송국만 보고 저쪽의 좌파는 무조건 싫어하는 아주머니가 이제명 대통령이 오니까 완전히 북한의 김정은 환영하는 것보다 격렬하게 환영하는 거예요. 김정은은 눈물을 마구 흘리겠지만. 이게 뭐냐 하면 힘은 안 보이는데 영향력을 느끼는 것.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제명 대통령 우리 집에 갔다 왔데. 그 다음부터 사진 크게 붙이고요. 뭔가 추가적인 힘이 나로 하여금 격하게 나를 힘을 할당받은 자로 새로운 힘의 묘미에 맛을 들게 하는 거예요.
힘의 정체는 배후에 누가 있어요? 악마가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힘을 빼는 거예요. 힘이 빠지면 뭐가 됩니까? 풍선인데 바늘로 쑤시면 뭐가 돼요? 푸르르르~~~ 해가지고 뭐 개뿔도 아무것도 없지요. 성경에서는 이게 뭐냐, 심령이 가난한 자.
격하게 좋아할 일도 없고, 격하게 실망할 일도 없는 거. 주와 함께 있을 때 다른 평가, 다른 기준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은 뭡니까? 힘이잖아요. 힘이 있고, 없고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13절에 봅시다. 임금이 있다는 자체가 벌써 이 세상 꼴이 문제 있다는 거예요. 악이 뭐냐, 전도서에서 악한 것이 뭐냐, 그 규정이 8장 13절에 나옵니다.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 앞에 뭐 하지 않음이라?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않는 것.
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보다 더 시급하게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경외할 여분의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건 뭡니까? 본인이지요. 본인.
그러니까 흉내내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폼은 내는데 진심은 아니에요. 진심은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살짝 이용하는 거예요.
14절에 보면, 역전이 나와요. 완전히 반전이 나오는데.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세상이 왜 허무하냐, 내가 은근히 기대했는데 기대한 게 뒤집어진 거예요.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땅에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착한 일할 때 있고, 나쁜 일할 때 있지만, 아주 죄없는 자는 아주 없느니라. 결단코 그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9장 1절,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의인이나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래서 아까 교재 <뒤에서 본 한국교회> 137페이지에 전도서 내용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삶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별개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담겨 있지요. 아까 카이로스, 크로로스, 아이온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아는 한계는 크로로스 시간, 그리고 세대라는 그 아이온. 그거 뿐이에요. 때는 인간의 고난 밖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다음에 9장 2절에,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똑같다.
3절~5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만, 하나님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은 인간들은 그 기회마저도 없기 때문에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뭘 감지한다는 말입니까? 카이로스. 때를 감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작용을 인생 가운데서 소나기 맞듯이 우박 맞듯이 감지하니까 살려주심에 대해서 주와 마주치는 기회가 있음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허무한 걸 허무하다고 인지하는 것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이런 뜻입니다.
이걸 말씀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해야 된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상하게 사람들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든지 말씀 안 들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 거예요.
18절에 보면, 참 실망스러운 결과까지라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이거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여호수아 7장에 여리고성에서 비밀리에 빼돌린 사람이 있지요. 하나님의 물건을. 아주 간사하기 짝이 없는 아간. 지금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사태야? 모르는 거예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갑자기 그 벌은 이스라엘 전체가 다 받는 거예요. 주께서 색출해내지요. 거기에 대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더라도 같은 한 몸둥아리로 움직이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아차려야 되는 거예요. 하나의 악인이 전체 선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늘 감안해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개인 구원은 없고, 집단구원이 있습니다. 내 잘나서 구원되는 거 없고, 주님이 잘 나서 우리가 그 덕을 보면서 구원될 수 없는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 보따리 내놔라 하지 마세요. 우리는 원래가 보따리가 없어요. 떠내려 가는 것을 일방적으로 작대기로 건진 겁니다.
자, 10장을 봅시다. 2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주께서 인도할 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거예요. 방향. 지금 내가 잘했나, 못했나가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서 나는 어느 쪽을 보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왼쪽, 오른쪽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와요. 하나님이 심판할 때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 오른쪽의 양은 천국쪽, 왼쪽의 염소는 지옥쪽. 놀라운 사실은 천국과 지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중간에 두고 서로 같이 묶여져 있다는 거예요. 같이 묶여져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있는 천국, 내가 없는 지옥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굳이 지옥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여기는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니까 “아이고, 뭐 지옥 가든 말든 나만 천국 가면 되잖아.” 이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이 같이 연결되어있다고 봅시다.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지옥에 없게 했느냐가 주님의 일방적인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천국에 있는 나는 아는 거예요. 그런데 지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라요.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역량껏 살아가요. 천국가려고. 기도, 헌금, 봉사 다해요.
그런데 뭘 잊어요? 자기한테 너무 신경 쓰다 보니까 이게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이 자기에 대한 신임과 자기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해서 이게 안 먹히는 거예요. 내 문제는 나로 닫혀버린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 있는 사람은 나를 이쪽(지옥) 방향과 저쪽(천국) 방향과 방향을 아는데 지옥에 있는 사람은 방향을 모르고 내가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천국 가는 방향은 누가 정한다? 믿을 것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정한다. 가 바로 이게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의 교회라는 것이 사람을 집단적으로 지옥 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허락한 셈이 돼요. 교회가 망해야 그 배경에 천국이 나타나요. 교회가 망하는 것을 도리어 기쁘고 즐거워해야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안 돼! 우리교회 문 닫으면 안 돼!” “왜? 왜? 안 되는데? 왜?” “이 교회를 있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누가?” “내가” “지옥에나 가라.” 내 결정이에요. 내 결정.
자기의 결정이 주님의 결정을 어떻게 했습니까? 철저하게 봉쇄한 거예요. 오른쪽, 왼쪽은 얼마나 행했느냐, 착했느냐가 아니라 방향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더 쉽게 말해서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어떤 자가 지옥 가고 있느냐가 드디어 주님의 시선과 안목을 가지고 주님과 바라볼 수 있게 된 사람이에요.
얼마나 재산이 많으냐, 자식이 공부를 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방향이. 얼마나 내 인생이 풀어나가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방향. 내가 얼마나 몸이 아프고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방향, 천국 가는 방향과 지옥 가는 방향이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가를 아는 그걸 간파하게 된 그 인식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대로 하셨습니다, 천국. 열심히 가도록 노력했습니다, 지옥.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네요.” 지옥이지요. 또 뭘 의지합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할래.” 이게 지금 누구를 바라보는 거예요? 주님의 결정을 이용해서 지 편한대로 결정하잖아요. 인간은 결정이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결정을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11절,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데 “자, 여러분, 내가 피리를 불면 뱀이 요렇게 모가지를 흔들면서 올라옵니다.” 하는데 지가 먼저 물려버렸어. 쇼 무대 막 내려야 돼요. 안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우리가 솜씨를 부리는 것도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부리는 거다 이 말이에요. 어떤 솜씨. 우리가 대입시험을 친다든지 아니면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친다는 것도 이게 안 아파야 되는 거예요. 아프면 1등 못해요. 2등해야 돼요.
어떤 것도 주께서 허락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원래 몸이 튼튼해. 원래 나는 잘해. 나는 조금만 더하면 돼. 이건 경솔한 생각이에요. 주어진 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돼요. 특히 이렇게 모인 것도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게. 다음에 또 당연히 모일 거다. 아니요. 당연한 것은 없어요. 또 주께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신 거예요.
20절에,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이야기했지만, 힘이라는 게 참 설명하기 힘들어요. 보이지도 않는데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니까 도대체 이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예요.
어디서 나왔겠어요? 인간은 악마의 힘에 눌려 사니까, 왕이라는 계급도 제도도 마찬가지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 고린도전서6장에서 너희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성경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뭐합니까? 실지로 사회에 나가면 있는 사람에게 가진 사람에게 굽실거리기 마련이지요. 다만 성도는 “이 땅에서 힘이 작용하고 있구나. 그것은 우리를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구나.”라는 감을 잡는 거죠.
11장 1절,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건 니가 장래일에 대해서는 니가 손을 떼라는 이야기에요. 때. 카이로스가 있으면 크로로스나 아이온에 대해서는 니는 결과물로 통지를 받는 식으로 쉽게 말해서 선물을 받는 식으로 하루, 하루를 선물로 여겨야지.
‘요거는 내가 잘 단도리해가지고 요거는 내 노동의 댓가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힘들어 못 삽니다. 자꾸 잘해주면 권리인 줄 알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했으니까 할거라는 그러한 기대는 감사와 고마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11장1절부터 6절까지 내용은 뭐냐,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11장2절,“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니가 모른다.
3절, 4절,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나무가 쓰러지면 쓰러진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무가 내가 어느 쪽으로 휘어질까,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나무야! 너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그런 생각할 권한조차 없다. 어느 쪽으로 하든 니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5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현대 생물학은 철저하게 수정란에서 세포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서 어떤 특정 형태가 일어나는 구면을 크로로스 시간적으로 재어가지고 줄기세포에서 어떻게 해서 뼈가 되고 척추가 되고 그걸 추적을 해요.
그런데 축적을 하는데 그 현대 생물학은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1+0.00000...을 놓친 거예요. 그 0.0000...을 놓치기 때문에 알수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의학적인 시도나 연구는 결국 누구를 유용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자본시장에서 상품화되는데 유용화하기 때문에 투자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지식과 정보를 돈 주고 사세요. 이미 우리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죽느냐,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10절, 청년의 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에 잘 나갔지요. 그러나 10절에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뭐다? 헛되다. 다시 말해서 식언덩어리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이지요.
지나가 보면 그때는 굉장히 충실했고 확실했고 성실했고 꽉찼고 빈틈없이 살았다고 하지만, 시간을 잡아보니까 자연상수를 놓친 거예요. 0.00000...이 그것이 내가 1이라고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컸던 겁니다.
12장. 드디어 이제 나이가 좀 됐어요. 나이가 좀 되니까 여기에 12장2절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다루겠다는 거예요. 자연의 일부로. 해처럼 다루고, 빛처럼 다루고, 달처럼 다루고, 별처럼 다루겠다. 그들도 언젠간 다 어둡다.
놀라운 사실은 주께서 십자가 질 때, 해가 어떻게 됐습니까? 해가 어둡게 됐지요. 마치 조의를 표현한 것 같아요. 잠시 운명! 햇빛아 좀 쉬었다 가자. 주님의 죽으심. 창조자의 죽으심을 피조물들이 대표해서 까만 리본을 다는 것처럼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잃은 해 덕분인지 그 때 십자가 달린 예수님은 죽어가고 있는데 무덤에 있는 자는 성도는 다시 살아났어요. 그리고 예수님 부활 후에는 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돌아다녔어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요.
따라서 자연이 허물어지면 우리도 자연의 일부로 흡수통합되는 거예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그 하나님의 원칙은 인간의 어떤 몸부림에도 양보 없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12장3절에서 7절까지는 그 이야기에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동안 손댔던 하나님의 손길은 다시 하나님으로 회수된다.
3절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이것은 뭐냐, 패가를 철거할 때 폭약 심어놓고 터트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체에다가 일찌감치 태어날 때부터 시한폭탄을 심어놓은 거예요. 째깍! 째깍! 10층짜리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고, 그 현장을 방문한 후대 세대는 우리를 잊어버리지요. “여기 뭐가 있었나?”
결국 우리는 자체가 헛된 거고, 내가 여기 있었다, 조차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부모님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고 남편 죽고 난 뒤에 남편 사진 걸어나야 봐야 나중에 그것도 빛바랜 먼지만 쌓이지요.
어떤 분은 그렇게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 싸웠는데 싸우고 난 뒤에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매일 남편 무덤에 가는 거예요. 그렇게 니 죽고 내 죽자 싸우다가 장례치루고 난 뒤에 계속해서 남편 무덤에 간 게 그 사는 아내의 일과였습니다. 그래서 1년쯤하다가 지금은 1주일에 한번씩 간데요. 그래서 우리집 사람이 전화해가지고 엄마보고 해라. 앞으로는 1주일에 한 번도 많다. 빨리 주민자치단체에서 하는 놀러가는 거 이런 것. 꽃꽂이 하는 거 배워가지고 니 살아야지. 죽은 남편 왜 그리 찾나.
왜 죽은 남편 그렇게 싸우다가 니죽고 내죽자 싸우다가 죽고 난 뒤에 왜 그리 찾는 거예요? 왜 찾습니까?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에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것은 몸이 있다고 나가 아니라 나와 관련지었던 사람들의 몸이 일종의 앨범사진처럼 그 몸이 내가 기억하는 나에요. 그래서 남편의 무덤에 가야 내가 잊어버렸던 옛날의 나를 계속 유지를 시켜줄 수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미친 거예요. 몸만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몸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인간은. 아! 정말 참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관리하기에는 너~무 힘들어요. 몸은 주님이 관리하는데 있지도 않은 나를 관리하는데는 내가 너무나 힘들어요.
그래서 전도서는 12장8절에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야기해줄까? 헛되고 헛되도다. 그 다음에 Everybody 모든 것이 헛되도다.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이 밤의 끝을 잡고, 모든 걸 들었으니 오직 남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명령만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끝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께 나눠주는 교재를 봅시다. “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전 8:7) 장래 일을 모른다는 말은 지금 현재 너의 니가 누군지도 니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은 아는데 장래일은 모른다. 그런 거는 없어요. 장래 일을 모르면, 마지막을 모르면 지금도 모든 것이 다 헛방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은 “당신 죽고 난 뒤에 어떻게 가냐?” 나는 그런 것은 몰라도 되고. 왜 그게 몰라도 되는데?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은 허무해야 한다.” 인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 야~~ 이거 중요한 문제지요. 인간 없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지는가, 주님은 인간을 제끼고 말씀이 인간을 되게 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그 분만 건집니다.
건지는데 그 딸려 나온 자가 있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브랜드가 붙은 것은 다 딸려 나와서 천국 가요. 자기 이름이 그냥 있는 사람은 탈락입니다.
살아있을 때 내 이름은 탈락되고 주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금반지든 뭐든 다 내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의 소유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 전도서는 얼추 했잖아요. 자연상수. 2.71828...빼놓고 얼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했다 치고 전도서에는 단 몇 가지가 없습니다. 뭐가 없느냐, 하나님의 지시가 없어요. 왜냐, 주께서 때가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지시가 있어요. 지시 없어요. 만남도 없어요. 인간과 인간끼리 좋다고 만나지 주님과 만남이 없어요. 눈물이 없습니다. 울기만 해봐라. 약속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신앙이 없어요. 믿어라, 있던가요? 없어요. 기적이 없습니다. 사는 거 자체가 허무인데 허무면 충분하지 무슨 기적이 필요해요. 들 허무하려고.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진리가 없습니다. 모른다는데. 모르는 게 진리입니까. 모르잖아요. 도덕이 없어요. 바르기나 악이나 똑같이 끝나는 데는 똑같이 되는데 도덕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이상 국가, 이상사회 없어요. 더불어 잘해보자. 그런 거 없습니다. 모델들 인물이 따로 없어요. 사람들 자체가 사라지는데 모델이 될 게 없지요. 영원한 분이 있어야 모델이 되지. 영원하지 않는데 모델 값을 못하지요.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허무가 있어요. 여러분, 허무가 있는 걸 좋아해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학교 선생님께서 집에 가훈을 가져오라 하면 이렇게 해야 돼요. 두 자로 하면 돼요. 허무. 다 같이 허무하자. 우리집안의 가훈입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그러면 너희 집은 매일 우냐? 아니요.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흐뭇해합니다. 선생님이 “미쳤구나!”
그 다음에 확실하게 있는 게 있어요. 뭐냐, 죽음이지요. 살아있을 때부터 죽었으니까 죽음이지요. 세 번째 심판. 말씀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죽이니까. 주의 심판이 있지요. 네 번째 끝. 끝이 있어요. 잔치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끝.
다섯 번째, 야~ 요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한데 허무 자체가 우리 인간을 향하여 때를 어떤 때를 말씀 준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그림자로서의 흔적입니다. 그림자로서 흔적. 여섯 번째, 차이가 있어요. 차이. 차이가 뭐냐,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의 방향을 정해줘요. 차이.
그리고 육신 있지요. 흙이 될 육신이 있지요. 여덟 번째 이 사회가 허무한 사회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힘. 시간관계상 오늘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못했어요. 수련회 때 할 수도 있어요. 힘 있는 자가 등장했을 때, “야, 니가 뭐가 힘이 있어. 까불지 마!” 이리 나와야 이게 이 상황상 맞은 이야기인데. “아이고, 힘이 있습니까.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이리 나오는 게 왜 우리가 그렇게 나오느냐 이 말이에요.
힘 있는 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힘을 자신도 모르게 그리워하고 힘에 의존해서 나도 한 번 힘 덕 보자. 하고 나서는 내가 나한테 말릴 수 없는 민망스러운 내 태도가 이게 뭐냐 이 말이지요. 나한테 이런 거지 근성이 있었어? 이렇게.
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결합해서 무엇이 되겠는가, 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 성전에 갈 때 어떻게 하라했습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했지요. 그 성전이 되시는 것은 성전은 장소인데, 하나님과 우리와 말씀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 성전이지요.
그 성전이 나중에 뭐가 돼요? 인격이 될 때 그리스도가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3장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죽었는데 어디서 죽었지요? 땅에서 죽었지요. 너희가 살았다면 어디서 살았어요? 하늘에서 살았지요. 나는 죽고 몸은 이미 하늘에 가있고, 하늘에 내 몸이 가있기 때문에 땅에 있는 내가 나보고 말씀으로 죽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신기한 묘기를 발휘하는 겁니다.
땅에서의 문제점의 나의 동질성 문제인데요. A, B, C, D 사이에 동질성 문제. 그게 2페이지에 보면 있습니다. A와 B사이에 질이 동일한데, 동일하지 않습니다. 수입이 좋을 때는 좋다고 하다가 수입이 좀 적어지만 막 낙담을 하지요. 그 낙담의 정도가 수입이 많이 있을 때보다 차이가 난다는 말은 이유가 뭐냐, 자신의 동질성을 어떤 경우라도 자기의 동질성을 붙잡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을 해놨어요. 이 교재는 내가 십자가마을에다가 올릴게요. C, D 하는 것은 읽어보면 되고요.
그럼 허무한 내가 성전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때를 통해서 빠져나옵니다. 때가 있습니다. 구원 받을 때가 있고, 구원 받지 못할 때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결정하는 그 인물이 3번에 새로운 중심이 등장하지요. 하나님이 그 중심으로 오시는데 그게 바로 4번에 그게 성전입니다.
성전은 사람의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되고 안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성전이 되면 성전이 바로 성령으로 지은 성전이 곧 성령으로 짓는 성전이 즉 종료다. 절대 중심, 절대 공간이에요. 그 이야기가 에베소서2장 20절에서 22절까지 나와있지요. 성전안에서 하나님의 같이 거할 처소가 되어서 예수와 함께 지어져가느니라.
끝으로 시편84편 그 대목보고 마치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친히 기르시기 때문에.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놓여 있는 지점이 무지랭이인지 내 집은 아니고 주의 지어진 집에 합류되어 있는지 내 소유는 있건 없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이게 카이로스에요. 새로운 시공간이지요.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의 특징은 자기 소유가 없다는 거예요. 돈 몇 푼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주님한테 인수인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안에서 주와 함께 있기에 말씀은 우리를 니가 죽어야 내가 너를 살린다는 그 소식으로 우리에게 꽂히게 하여 주옵소서. 카이로스 늘 때로서 말씀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은 다 찢어지고 없어지고 해체되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천국에 도달했다는 기쁨이 저희에게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