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 38강( 하나님의 앞마당) 복음이냐 교회냐(8강) 260427설교신명기

대전-신명기(38강) 신명기17:19(하나님의 앞마당)20260427a(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16장 16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空手)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그렇게 나오죠.

이걸 아주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시간을 통해서 공간을 만드는데, 이 공간은 뭐냐 하면, ‘여호와 앞에’라는 공간이 만들어져요. 여호와 앞에. 아, 이게 성립됩니까? ‘여호와 앞에’라는 것은 공간에 관한 단어죠. 누구누구 앞에, 신약에 ‘예수 안’ 그건 뭡니까? 공간 개념이잖아요. 공간 개념.

이런 ‘여호와 앞에’라는 공간 개념이라든지 이런 것은, 여호와 앞에 가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해요. 인간이 이민을 간다든지 이사를 갈 때는 그냥 옮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앞은 몇 번지입니까? 몇 번지예요? 3번지입니까? 이건 어떻게 옮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걸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에는 인간의 의미가 섞이면 안 된다.” 율법에는 인간의 의미가 섞이면 안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율법의 이야기가 사람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된다.” 율법 이야기가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을 준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 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방 민족은 어떻게 돼요? 이방 민족은 율법 안의 이야기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 이야기하겠어요? 자기들 이야기하겠죠. 이게 잘리는 거예요. 이게 배제되는 겁니다.

너희들 생각이, 의미나 이야기도 생각이잖아요, 너희들의 스토리, 너희들 생각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 왜? 율법은 모세로 인하여 이 땅에 없는 거였어요. 없는 거. 이게 신앙의 근본 토대 아닙니까?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사람의 철학이나 노력이나 지식으로 생겨날 수 없는 그 구조에 속할 때, 이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내밀 수 있는 모든 의미와 이야기를 초과하는, 초월하는 세계의 등장이죠.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안에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러한 개념들이 그 안에 주어졌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한테 당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 당했어요. 이 당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이걸 ‘복’이라고 이야기하죠. 이걸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창12:3) 이런 이야기를 심지어 아브라함 본인도 못 믿었어요. 내가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나를 인정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것은 아브라함 본인도 인정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저 인간 대 인간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비멜렉 추장 만날 때 알아서 기고 들어갔지요. ‘이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창26:7) 그게 요즘 말로 하면 뭐냐? 텃세라는 거예요. 텃세. 전원생활을 하겠다고 갔을 때는 일차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부페 한번 쏘고 들어가야지요. 그냥 들어가면 나중에 자기 텃밭에 식초를 뿌리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나이 많은 모친 이사 왔다고 노인정 그냥 갔다가는 요구르트 먹는 수가 있어요. 독(毒)든 요구르트요. 처음 끝발이 나중 끝발까지 되려면 잘 보여야 된다, 이 말이죠. 굽신거려야 돼요. 이게 나그네 설움이죠. 외지 사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시비를 못 거는 이유가, 공간이라 하는 것은요 그냥 ‘어, 자리 좋네.’ 그러면서 들어가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공간에 선조들, 선배들의 정성이 이만큼 쌓여 있어요. 얼마나 많은 투쟁과 희생과 그리고 돈들이 들어갔는데, “이 동네 느티나무 좋다.” 느티나무는 본인이 키우지도 않았는데 가서 느티나무 좋다고 즐길 때, 얼마나 그 토박이들이 안 좋은 시선을 보내겠어요? 그래서 나온 게 주민 발달기금, ‘100만 내라.’

뭐 이렇게 텃세 부리는데, 아브라함은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본인이 그걸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거니까요. 그래서 이쯤 하고 다시 근원적으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요거는 약간 빨리 하겠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율법은 모세로부터 시내산에서 주어졌지요. 그러면 율법 앞에서 율법이 주는 시간, 아까 신명기 16장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거쳐서 그 다음에 공간, 여호와 앞에 나올 때, 여호와 앞에 나올 때는 이건 반드시 그냥 못 나와요. 율법이라는 기계 속에 들어가서 납작한 쥐포나 오징어포가 돼야 돼요. 율법 속에 들어가서.

율법 속에 들어갈 때 납작하게 되는 이유가, 그냥 들어가 버리면 나의 이야기, 나의 의미가 그대로 산채로 율법 세계에 들어가는, 진짜 이거는 뭣도 모르고 그냥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더 합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율법 안에 존재는 못 들어온다.” 율법 안에 존재는 못 들어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존재 말고 다른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에게 존재 말고 다른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 네가 있다. 존재뿐인 세계에서 존재 말고 다른 방식으로 율법 세계에 들어간다면 그거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사건. 지겹도록 했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존재에서 뭐로 바뀌어야 된다? 사건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존재는? 네 존재는 유월절 어린 양이 대체하지요. 그게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하나님이 보낸 무서운 천사가 와서 그날 밤에 맏아들 다 죽일 때, 그 맏아들은 존재잖아요. 우리 집에 큰아들 있다. 예, 그건 뭐 인정하죠. 있는데 그 존재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 존재가 죽어요, 없어져요. 없어진다고요.

“우리 맏아들 하나님 앞에서 없애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 아들 존재 대신에 무슨 존재가 앞으로 네 집안을 새로 이끌 장자노릇 할래?” 하면, “우리 집에 키우는 어린 양이 있습니다.” 여기 ‘어린 양이 내 아들 대신해서 죽었다.’ 하고 어린 양의 피를 어디에 바릅니까? 문설주에 발라버립니다.

발라버리면 그다음부터 율법은 어린 양의 피를 향하여 달리는, 그걸 이제 ‘질주한다’ 또는 목적을 가지고 그쪽으로 달리는 function, 그 기능이 ‘어린 양’부터 시작해서 그다음 신약에 누가 나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 끈이 이어져 가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은 그냥 당한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존재가 있어서 당한 것이 아니고, 당하도록 사건이 만들어낸 존재 집단, 그게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 속에는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되는 겁니다. 존재보다 사건이. 그러면 사건에 들어왔다, 납작하게 되었다. 그게 뭔데?

납작하게 되어야 율법 안에 있는 새로운 시간과, 율법 안에 있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주께 허락받습니다. 그걸 그 공간에 수용하죠. 시간이라는 출입구를 통해서, 절기라는 출입구를 통해서 딱 들어가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앞마당’, 아, 이거 제목으로 적절한 것 같네요. ‘하나님의 앞마당’ 그래야 ‘하나님 앞에’가 성립되니까, 하나님 앞에 도착됩니다.

‘이리오너라’ 또는 ‘어서오너라’ 나는 하나님이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너희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미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이제 없어졌어요. 그냥 없어지지 않죠. 그래서 율법이라는 기계를 가지고 쫙 짜버리죠. 쥐포는 뭐 기계가 짠다고 치고요, 오징어포도 기계가 넓게 펼 수 있는데, 어떻게 물질도 아닌 사람을 납작하게 한다는 게 성립되느냐?

그게 된다고 보여주는 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제사장의 특징은 땅을 소유하지 않는 자, 제사장이 사는 번지수는 여호와 앞이에요. 주소지가 3번지가 아니에요. 이 땅에 주소지가 없어요.

그 주소지 없는 특수한 땅을 이스라엘 레위 지파에게 줬는데, 그 레위 지파에게 준 48 군데 중에서 여섯 군데 특수한 장소가 공개됩니다. 그걸 세 자로 하면, ‘도피성’. 도피성에 누가 살고 있는가? 그 지역의 제사장이 살고 있죠. 그 지역의 제사장이.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에 살인하게 된 사람, 본의 아니게 하나님에 의해 살인하게 된 사람이 이 세상에 살지 못하고, 왜 살지 못하냐 하면은 가족들,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혈육 중심이거든요. 철두철미한 혈육 중심이기 때문에 내 혈육을 건드렸다 하면 이제는 ‘네가 죽어야 내 성이 풀린다.’ 이게 부모의 심정 아닙니까?

엄마는 누구 힘으로 살지요? 엄마의 특징은요.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자슥(자식) 때문에 살아요. 특히 남편이 있는 여자 말고, 남편이 돌아가셨거나 또는 이혼을 한 분에게 있어서 여자의 사는 힘, 추진력은 자식이에요. 자식 하나 보고 산다. 딸도 딸이지만 아들 같은 경우는 더 애틋하지요.

이 아들 장가가기 힘듭니다. 이 아들하고 결혼하려 하면, 상대방 여자 쪽에서 상견례 할 때 말조심해야 돼요. “아이고 혼자서 애 키운다고 고생했습니다.” 이러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요. ‘남편 있다고 자랑하나?’ 이러면서 기분 더럽다고 결혼 파토 내버리죠. 그만큼 인간에게는 지독한 혈육 중심이 있어요.

연약한 여인이지만 아들만큼은 내 목숨 바쳐 지킨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자세에 대한 이 정당성, 이게 무슨 세계? 존재 세계예요. 이게 존재 세계예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본능이고, 아담에서 내려오는 그러한 충동들이죠.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고의든 아니든 간에 내 혈육을 죽였다면 그냥 살려두지 않죠. 그러면 그 남을 죽인 사람은 이 땅에서 뭐냐 하면, 살아 있어도 복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가 되죠. 이미 죽은 자. “네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너 가만두지 않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조치를 합니다.

이미 죽은 자로 하여금 도피성에 피신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에는 누가 있느냐? 제사장이 있죠. 제사장은 땅에 소유권이 없어요. 자기 땅이 없어요. 그냥 기거할 땅은 있지만, 대대로 소유되는 땅은 없어요. 땅 대신에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안’이에요. ‘여호와 앞’이라는 공간이 주어져요.

여호와 앞이라는 그 공간, 땅과 기존의 인간들이 혈육 중심으로 살아가는 땅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역할이에요. 제사장들은 땅은 없어도 뭐는 이야기할 수 있는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 신명기 17장 9절 봅시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재판장들이 있는데, 이 재판장 제도는 구약 때부터 조금씩 그 제도가 발전한 거예요. 옛날에 각 성읍마다 일곱 명의 재판장들이 있었는데, 그 재판장의 머리는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후대에 와서 120가구 이상의 재판에서는 23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법정이 임시적으로 설치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산헤드린이 있어서 그때는 전국 지역의 80명의 국회의원, 장로들이라 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그런 모임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는 바로 대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누가 돌아가셨죠? 그 공회의 결정에 의해서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죠.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한 것이 그 당시 로마 군병들만이 아니고, 거기에 형성되어 있는 배후의 산헤드린 80명의 장로들이 있죠. 그 당시의 국회의원들이 있지요. 그런데 80명의 장로들이 어디서 뽑힌 겁니까? 그 지역에서 뽑힌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는 가담 안 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습니다.

이걸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기획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발을 뺄 수 없는 그러한 체계를,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적으로 그걸 형성시킨 겁니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하면 뭐냐? 권력 구조예요. 권력 구조. 이 권력 구조에서 예수님보다 앞서서 살해당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이었어요.

촘촘하게 어떤 인간도 혈육을 바탕으로 한 권력 구조에 의해서 ‘나 거기에 해당 안 된다.’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이 현실 세계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가도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의 헌법에 대해서 통치를 받게 돼 있어요. 벌써 거기에 대한 증명서까지 마련돼 있습니다. 그 증명서가 뭐겠습니까? 주민등록증이죠. 일종의 통행증 같은 거죠.

심지어 차 사고 나도, 접촉 사고 나도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게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입니다. 외국 사람인지, 아니면 말소된 사람인지, 안 그러면 중국인이 범죄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건지.. 하여튼 모든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당신의 주민등록을 보겠다.’ 그 발급을 누가 하죠? 국가에서 하죠. 그게 사람의 이야기잖아요.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죠.

그러니까 이 율법이 의외로 어려워요. 왜냐하면 율법도 천천히 따져보게 되면, 세상 권력을 닮았어요. 여기 17장에 보면 재판하는 거 나오잖아요.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이렇게 돼 있고, 그 뒤에도 보면 여러 가지 재판거리가 될 만한, 시비 거리가 될 만한 여러 가지 조항이 촘촘히 그물 같은 구조가 있는데, 그 거미줄을 율법이라 했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그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의 정신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의 상식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안일하게 봐 버리니까, 율법을 대하면서 이미 없어진 자기의 존재감이, 율법을 지켜서 나라를 만들게 돼 버리면 어떻게 돼요? 없던 존재감이 새로 생기면서 뭐가 뒤로 빠져 버립니까? 출애굽 사건의 의미가 퇴색돼 버리고,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누구한테 재판받지 말라? 세상 법정에 가지 말라 했다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상 법정에다가 고소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아주 화를 내는 겁니다. 세상 법정, 그들이 뭘 안다고 그들에게 호소하느냐? 세상 법정의 판사들은 엘리트 아닙니까? 서울법대, 연대법대, 고대법대, 수능 최상급에 속하는 문과 출신들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뭘 안다고!”

그들이 모르면 더 똑똑한 사람은 누가 있느냐? 세상 지혜라는 그 차단막을 돌파하고 뚫고 나온 지혜로 너희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찮은 인간들이 머리 굴리면 나올 수 있는 인간 지혜, 인간 이야기, 인간 의미들, 그런 것들한테 네가 참조를 해서 재판받으려고 하느냐? 그거는 말이 안 되지, 이런 뜻이에요.

더 중요한 것은 자, 세상 법장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칩시다. 집사끼리 고소해가지고 땅덩이, 내 땅 돌려받았다고 칩시다. 그렇게 했다 칩시다. 그래서 뭐? 그래서 천국 가는데 그 속도가 더 빨라집니까? ‘나는 이제 재판 이겨서 땅 받았으니 빨리 죽어야지.’ 뭐 이런 투입니까? 아니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재판이긴 보람을 느끼고 오래 살아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분명히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뭐가 있는 것은 다 쓰지 못한 줄 알고 가라. 심지어 부부도 아내 있는 자는 뭐 같이 하라? 없는 자 같이 하라.(29절) 이건 진짜 어떤 사람한테는 복음이다. 남편 있는 자는 남편 없는 것 같이 하고. 그 이유가 뭐냐? 오래 자유를 누리라는 말이 아니고요. “떠나버려. 빨리 떠나버려” 후쳐서 나가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도피거든요. 이거는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도피당하면 그때는 누굴 만나느냐 하면, 제사장을 만나는 거예요. 땅 없는데 율법에 의해 재판하는 것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 세상 법률이 아닙니다. 헌법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 아니에요. 그거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하는 거고, 이거는 율법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재판이죠. 그런데 거기서 율법이 멈추는 게 아니에요. “아, 나는 이제 율법한테 재판받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옳았대. 아유, 기분 좋아. 나 이제 이 땅에서 오래 살래.” 뭐 이렇게 되잖아요. “아우 나 억울해. 재판에서 졌어. 또 하면 이겨야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17장 12절 봅시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천자라는 것은 경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네모, 그 사람을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그냥 죽여 버려!” 이 말이거든요. 야, 이거 뭐 여기서 이게 딱 나오면요, 그 다음에 우리의 울컥하는 본심이 나오죠.

네 글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죽여 버려라.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민중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죽였잖아요. 결정은 대제사장하고 장로들이 내렸고요. 그 실행은 본디오 빌라도의 군사들이 했고. 예수님에게만 그렇게 했습니까? 이 권력 체제가 있는 한, 스데반 집사도 그렇게 해서 죽었잖아요.

율법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이 납득되는 율법으로 잘못 해석된 법에 의해서 죽지 말아야 될, 율법을 이미 통과해서 율법에 저촉이 안 되는 사람을 그들은 엉터리 율법의 이름에 저촉된다고 짱돌 들고 쳐 죽였고, 거기에 맞아죽은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같이 그 편에 서서 잘했다고 동의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사울.

도대체 주께서 세상일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지 스데반 집사님을 죽게 한 그 주동자 중에 한 사람을 주께서는 13번째 사도, 사실은 13번째가 아니라 통합된 사도, 12사도를 대표해서 단 한 명의 사도로 정해 놓고, 12사도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담당자라면, 한 사도, 사도 바울은 누구 담당자냐면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세움을 입었다,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등장이 왜 이렇게 화려하냐, 이 말이죠. 사울이 공부 열심히 했더니만 뭐 밤중에 천사가 와서 창문 두드리면서 ‘이제부터 너는 사도라.’ 이렇게 할 수도 있잖아요. 왜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가담된 그 자에게 주께서 찾아가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도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에서 뭘 통과했는가? 존재에서 십자가 사건을 맞이하여 존재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건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절차를 주님이 이 땅에 와서 떠났던 그 절차를 사울에게 그대로 카피(copy)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입니다. 지금 다시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 하면, 이 공간 문제, 하나님의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제사장이 시범이 되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자, 모세는 어디서 나왔다? 출애굽 사건. 모세는 출애굽 사건에서 나왔다. 모세가 둘로 갈라지죠. 모세와 뭐가 갈라지는가? 아론이 나왔다. 아론은 뭐냐 하면은 대제사장이 되죠. 모세는 뭐가 됐냐 하면 선지자가 됩니다. 선지자.

율법이 자기가 불렀던 인간들을 통해서 율법 내용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 내용의 다양화. 율법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내용? 선지자 내용도 있고, 제사장 내용이 있다. 여기서 더 나가요. 제사장과 선지자, 이 율법이 계속 나오면 뒤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왕이 등장해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신명기 17장 15절.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 다음 16절 “왕이 된 자는 말(horse)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에 돌아가게 말 것이니..”

왕 자체에서 주께서는 그 왕의 무늬를 뭐로 이렇게 조명발 세웁니까? 보통 무대 보면 디지털 화면 막 띄우잖아요. 그러면 제사장이라는 이 육체에다가 화면을 띄우는 거예요. 조명발 세워서. 그러면 여기서 왕은 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을 조명발로 받는 자가 왕이다, 이 말입니다. 출애굽 사건.

본인이 분명히 신체가 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뭐가 덮쳐진다? 사건, 사건의 전말이 그 왕에게 덮쳐지게 되면 그 왕은 율법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전에는 선지자 모양으로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다가, 그다음에 제사장으로 드러내다가, 그다음에 유다 지파에 와서는 왕이라는 직분을 통해서 율법이 품고 있던, 잠복돼 있던 내재적인 내용이 왕의 행동들을 따라서 그 진위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왕의 그 행동이 드러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등장하냐 하면, 잘된 왕은 뭐 주고? 복 주고, 못된 왕은 뭐 주고? 저주 주고. 이렇게 되죠. 율법이 왕에게로 중력이 한곳에 모이듯 모이게 되면, 나머지 백성들은 왕의 활동의 여파가 되고, 왕의 활동을 보완하는 또는 보완이 아니고 이걸 배경으로 깔고 있는 환경, 율법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무슨 언약? 왕 단독자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무슨 언약이라 하냐 하면, 다 알죠? 무슨 언약? 다윗 언약.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란 말은 하나님은 직접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께서 물으십니다.

“너 어떻게 살았어, 어떻게 행동했어?”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네 왕이 있어? 없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또 묻죠. “네 왕이 있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았나?” 나에게는 나의 모든 것을 대신할 왕이 있다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평소에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았느냐를 물어요. 답변은 ‘예’ 혹은 ‘아니요.’

“저는 왕만 쳐다보고 살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네 왕이 너한테 뭘 해 주었니?” 이렇게 묻죠.. 여기서 하나님의 그 언약의 율법에 인간의 의미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대단한 단어가 좀 전에 나왔어요. 그 단어가 뭐냐 하면, 나는 왕의 뭡니까? ‘배설물’ 이게 신앙인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비슷한 단어가 ‘지옥 장려금’. 나라에서 공짜로 준 거 아니고, 꽁으로 준다고 했죠. 공이 아니고 꽁. 네가 지옥 같은 세상에 더 살라고 주는 거예요. 세상을 보는 의미를 나의 스토리, 나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그 율법의 완성,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내 입에서 나오는 그 의미가 주님이 나한테 안겨 준 안목을 가지고 보는 거예요. 그 까짓 공것, 약간 사투리로 하면 꽁것.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16장 1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그다음에 뭐라 되어 있어요?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 빈손으로. 자,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 보세요. 한 번 구분 지어 보세요. ‘뇌물과 제물의 차이점’, 뇌물과 제물의 차이점은 뭐냐? 5초 드립니다. 1 빨리빨리. 1 2 3 4 5 끝났어요.

뇌물은 주고 난 뒤에 내가 멀쩡해지는 것, 내가 알던 내가 ‘휴우~’하고 다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 내가 멀쩡한, 이게 뇌물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많이 하죠. 하나님께 뇌물 바치죠.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우리 아들 장가만 보내면 기꺼이 헌금 드리겠습니다.” 이거 뭐예요? 뇌물이죠, 뇌물.

제물은 뭐냐 하면, 나는 죄이기 때문에 나를 하나의 배설물로, 이 죄만 받으시는 분에게 처리해 달라고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제물과 예물을 같은 말로 보면 되고요. 이 예물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기존 교회 목사들은 내심 흐뭇해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뇌물을 받는 자는 바로 교회에서 받아요. 교회가 운영되니까. 그런데 제물을 받는 수용자가 없어요. 수용자가 없다고요. 이거 좋아할 입장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뇌물일까요? 제물일까요? 뇌물이죠. 그러니까 교회는 좋아하는데,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런 말씀은 참 어려워요.

6장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20)”라고 돼 있습니다. 자 다시 5초 드립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1초 2초 3초 4초 5초,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방법은?

땅에는 쌓아둘 수 있어요. 확인이 가능하거든요. 금융거래, 통장 내역을 휴대폰으로 볼 수 있잖아요. 확인이 돼요. 그러나 하늘에 쌓아두면 이게 하늘에 얼마나 쌓았는지 적금 얼마나 부었는지, 이자 얼마나 되는지 전혀 확인이 안 됩니다. 확인이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쌓느냐? 그 뒤에 나온 말씀이 그걸 정리해 줍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늘에 쌓아둘 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사는 방향이 지옥이 아니고, 그 벡터 방향이 하늘로 가도록 보게 하는데, 하늘에 누가 먼저 가 있느냐 하면, 바로 모든 율법을 아까 마태복음 6장을 다 이루신 주님이 이 땅을 거쳐서 승천하여 하늘로 갔잖아요.

그 하늘에 누가 있느냐? 나를 몽땅 가져가신 나의 보물이 주님 품 안에 있다. 그러면 이 죄를, 새로운 죄 없는 인간으로 바꾸어진 그게 보물이거든요. 천국에서는 반짝반짝 빛난다고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천국 건물의 특징이 뭐냐? 빛나요. 영광스러워요. 반짝반짝 눈부시도록.. 그걸 달리 표현 못 해가지고 지상에 있는 보석이란 보석은 전부 다 끌어당겨서 그렇게 표현했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너무 눈부셔서 못 볼 정도로 빛나요. 그 빛난 곳에 우리 주님이 가 계시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시시하기 짝이 없는 명품 샤넬, 외제차 포르쉐, 그런 모든 것은 마음을 어디다 두게 합니까? 땅에 둔다고 하지만 그걸 또 강조해 봅시다. 하늘을 못 보게 만들어요. 하늘을 못 보게 합니다.

오늘 첫째 강의하면서 이거는 여러분 한 번 적어 놓으세요. 이거 뭐 강의들은 보람이 있어야지요.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위험하다.”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위험해요. 왜냐하면 마귀가 자꾸 이거 목에 디스크 걸리게 만들어가지고 마귀가 땅에 좋은 것을 보게 하고, 혈육만 쳐다보게 하고, ‘주님보다 네 자식이 낫지.’ 뭐 이렇게..

취직했다고 기세 올리는 자식이 내 죄 사해주신 주님보다 더 세게 들어오지요. 다 같이 배설물의 입장에서...내가 하늘을 쳐다보게 되면,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어요? 하늘에 가 있기 때문에 누구의 공격 표적이 되냐 하면, 땅을 쳐다보는 자에게 우리가 위험인물이 됩니다. ‘너는 같은 인간인데, 왜 말이 안 통해?’ 이런 거요. ‘말이 안 통해.’

그게 이스라엘 내에서는 율법으로 장려돼요. 참 재밌는 게 신명기 16장 18절에서 누가 지금 우대되는 걸로 보입니까? 일반인보다 누가 우대된다? 제사장과 재판하는 자가 우대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몇 장 넘겨서 사사기에 가 보세요. 누가 가장 천시 받습니까? 제사장, 레위인들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 십일조 안 해요.

땅도 없는데다 십일조도 안 내니까 자기도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 집에 가서 아무에게나 복 빌어주는, 그냥 복 빌어주는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교목, 원목, 이런 거 있잖아요. 군목, 회목, 교회 목사, 신학교 나왔으니까 거기서 배운 지식 가지고 밥 빌어먹고, 애들 피아노 레슨은 또 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 사모님이 뭐 보고 결혼 하겠어요? “나 안 굶게 해 달라.” 마찬가지잖아요, 마찬가지. “우리 애 교육시켜야지. 난 당신만 쳐다본다. 난 당신 믿습니다.” 아내가 남편 보고 당신 믿는다고 하면 그다음부터 남편은 기절해요. 뭐 어쩌라고? 내가 내 한 몸도 건사 못하는데, 뭐 어쩌라고? 왜 짐을 그렇게 지워요? 그게 혈육적 관계 아닙니까?

바로 율법은 이런 현실의 난맥상을 통과하면서 율법이 욕 얻어먹고, 율법이 신음소리 내고 고통 받아요. 왜?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버림받고 천대 받는 게 뭡니까? 율법 그 자체죠. 그러면 누가 그 율법을 아주 정치적으로 핍박하느냐? 그게 열왕기 상하에 누가 나옵니까? 왕이 나오죠, 왕이.

이제 슬슬 이스라엘 역사가 눈에 들어옵니까? 17장 다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17장 18절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18)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서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9)” 20절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했잖아요.

끝없이 끝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는 왕은 누굽니까? 이 율법에 의하면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왕들을 세운 것은 뭐냐 하면, 그 장차 오실 마지막에 진짜 겸손하고 겸손한 예수님과 그 앞선 왕들과 비교해 보라, 이 말이죠. 단순히 비교해 보고 끝나는 게 아니고 ,비교해 본 결과는 뭡니까? 이스라엘 폭망했죠.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언약이 이 세상에 다 퍼졌잖아요. 그럼 누구의 폭망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율법이, 출애굽 때 율법이 애초부터 예언한 내용이에요. “모든 세상은 망한다. 필히 망한다. 이유 알려 줘? 이스라엘 역사를 봐.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어떻게 됐어? 망했잖아. 그다음 차례는 이방인 너야.” 이러한 사실을 흔쾌히 기쁨으로 받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빠져 있는 보궐로 들어가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게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이게 인류의 역사예요. 아담의 자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율법을 줘버렸다. 율법을 줬는데 율법의 무늬가 특정 인간 모세와 아론에게 무늬가 입혀지는 거예요. 조명발을 받는 거예요. 그걸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무늬’라 했죠. 펄럭이는 천, 율법의 천의 무늬로 들어갔지요.

율법의 정신은 이렇게 들어간 것을 모세 아론에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대로 율법이 통치하고 지배하기를 원했지요. 광야에 있을 때는 얼추 비슷하게 가다가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는 꼭 애들 놀이동산에 풀어놓은 거 같아요. “와~ 좋네. 율법 없이 사는 게 이렇게 편한 걸..”

율법의 부담을 안 느낀다는 것은,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지요. 그러면 그들은 뭡니까? 마귀 들려가지고 각자 내가 신이잖아요. 내가 신이 되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뭘 필히 버려야 돼요? 이 두꺼운 성경책을 버려야 돼요. 안 봐요. 보지를 않아요. 교인들도 성경을 안 봐요. 왜? 부담되니까.

부담되니까 성경책 대신 빈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세상의 철학과 선행학습으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선행학습으로 그걸 다 집어넣는 거예요. ‘출세해야 돈 번다.’ 뭐 이런 걸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는? 교회는 다니죠. 왜 다니냐?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교회는 뭐 합니까? 빈손으로 안 오죠. 공수로 안 오죠. 뭘로 공수를 채운다? 예물이 아니고, 제물이 아니고 뇌물을 바치는 거예요.

이것은 로마서 12장에 어긋나요. 네가 이 세대에서 네가 산 제사를 드려라. 우리 자체가 제물이 돼야 돼요.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되지요. 성령께서 하십니다.

첫째 시간 끝나면서 아직 찝찝하게 남아 있는 미진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데, 그걸 받을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땅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하늘에 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제가 이거는 지난 강남 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전에는 ‘내 돈은 내 돈이다.’ 어렵지 않죠?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음 안에서 기계가 돼요. 기계가 되면, 주인이 바뀌어요. 누가 주인이냐? 내 돈은 누구 돈이냐? 주님의 돈이 돼요.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자기 돈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이게 그 나라 의인데, 뭐 여러분 꿈속에 주께서 나타나셔서 ‘한 달 동안 네가 지중해 크루즈여행 다녀와라.’ 하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랄라라~하면서 산토리니 구경하는 거예요. 그건 무슨 일입니까? 주의 일, 그 나라 의가 되는 겁니다. “네 사촌이 와서 돈 빌려 달라고 하지? 빌려주지마.” 왜? “네 돈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자유(부담)로부터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8강) 마4:6(아마추어 세계)20260427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92페이지 하겠습니다. [5강 육의 해석, 영의 해석]. 여기 ‘해석’이라는 말이 나오죠. 육과 영의 차이를 아시는 것은 간단해요. 구약에서는 ‘육’. 육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러면 신약에서는 ‘영’,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전에 구약 때 했던 육은 어디로 갔죠? 구약 때 육은 이제는 주께서 안 받죠. 왜 안 받느냐 하면,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예수님이 가져가셨기 때문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1장 14절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됐다’고 했다고요.

그걸 광주 강의하면서 ‘주님은 말씀의 흡입기’라는 말을 했죠. 쑥 빨아들이는 흡입기. 남이 가져갈 수도 없어요.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니까. 빨아들이면 율법이 알아서 주님 안으로 들어가요. 주님 안에 들어가면 주님은 단독자가 돼요. 여러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

이런 게 어려운데요. 단독자가 되면서 예수님은 인간(다수)에게도 단독자가 되고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에게도 단독자가 돼요. 하나님에게도 단독자에요.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 아니고 ‘우리의 형상대로(1:26)’, 다수죠. 다수인데, 인간도 예수님께 집중되고 하나님도 예수님께 집중되면서 예수님, 이 단독자를 ‘주(主)’님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왜 바로 주님이 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십자가 져야 주님이 되는가? 그 과정이 왜 필요한가? 소위 신학자들은 이걸 몰라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끝.” “왜?” “그걸 묻냐? 주님이 주님이지.” “그럼 주님이면 처음부터 주님이지, 십자가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다는 과정, 절차가 주님 되는 데에 꼭 필요한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간단해요. 간단합니다. 천국은 지옥을 짝으로 해서 만들어져요. 아까 방향 이야기했잖아요. ‘어디로 가느냐’는 말은 ‘어디로 안 가느냐’와 같은 말이에요. ‘이 버스타면 어디로 갑니까?’라는 말은, ‘이 버스 말고 다른 버스로 갔을 때는 내가 가는 방향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것 맞죠?’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한 일은 방향 정하기에요. 첫째는, 주께서는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면서 뭐를 배제하느냐 하면, 주님이 가시는 곳에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자를 배제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듣기는 들었어요. 듣기는 들었는데 깨닫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에요. ‘천국 만들기’는 동시에 ‘지옥 만들기’와 같은 말이기 때문에. 이것도 제목으로 할 수 있어요. <지옥 만들기>. 적어놔도 또 잊어버릴 거예요. 내가 모르면 다수가 알겠죠. 지옥 만들기. 주께서 하는 일은 지옥 만들기에요. 지옥 만들기는 천국 만들기에요. 이걸 합쳐버리면, ‘지옥에 들어가야 천국이 나온다’. 저주 안에서 사랑이 나오는 방법을 주께서 사용했을 때, 그게 바로 주님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육적 해석을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망했다. 육적 해석하지 말고 바로 영적 해석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역사라는 것은 왜 필요하냐? 영은 바로 육과 짝을 이루고 육은 영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1장 17절. 아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된다.’ 17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모세로 주어졌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참, 어려운 말이에요. 이것 설명하는데 한 시간 걸립니다.

율법은 모세로 주어졌다는 말을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 속에 은혜가 있기 때문에 모세가 은혜를 주러 오셨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것을 세분화시킵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 뭐로부터 인수인계 받았다는 뉘앙스를 줘요? 왜 율법을 인수인계하느냐 하면,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에 뭐가 달라붙느냐? 육의 해석들이 달라붙어요. 두 번째 시간은 자꾸 어려워지는데, 감당하고 참아내야 됩니다. 여기서 또다시 구분해야 돼요. 육의 해석과 인간의 해석이 달라요.

인간의 해석은 인간의 대표자가 했던 해석.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해석, 그게 인간의 해석이죠.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한 해석이 인간 전체로 확대될 때, 주님의 은혜의 시대에 와서 인간을 육으로 표현한 그 육은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개념이에요. 인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

인간의 특징은 다수고 각 개성이 있겠죠. 개성마다 이름이 다 붙어있습니다. 인간은 같은 이름이 별로 없잖아요. 다 이름 붙어있죠. 그것은 개별자 또는 독자적인 것을 뜻하고 다 인정을 합니다. 육은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은 육 하나로 끝났어요. 너는 육이니 육이다.

육은 육이니 뭐는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라는 말은 뭐는 아니라는 말입니까? 너는 영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 내가 공부가 모자라서 실력이 없고 내가 게을러서 이래서 영이 되지 못합니까?’ 그게 아니고, 육은 기어이 육 됨을, 배설물이 됐든 뭐가 됐든 육 됨을 드러내야 될 사명과 역할이 있는 거예요.

영이라 하는 것은 육과 또 한 쌍을 이뤄요. 방향이 천국과 지옥은 또 한 쌍을 이루고. 인간과 주님은 또 하나의 쌍을 이뤄요. 그럼 쌍을 이룰 때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다. 끊어졌다. 단절이 되었다.’ 그게 확 부각이 되죠. ‘아, 다리 끊어졌네. 그럼 육은 육대로 맴돌 수밖에 없겠네.’

이 취지가 요한복음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들어있습니다.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또, 빛 따로 있고 어두움 따로 있고. 섞이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새로운 용어를 육과 영으로 요한복음에서 해석했고, 사도 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 교재에 의해서 절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율법과 육의 만남이에요. 처음에는 율법과 사람의 만남이었습니다. 율법과 사람이 만나게 되면 히스기야, 요시야, 솔로몬, 다윗 같은 경우와 아사, 여호람 등 유다 민족의 초반기에 있는 왕들은 선한 일을 많이 했던 왕들이었죠. 그 왕들은 메시아는 아니지만 어떤 효과를 냅니까? ‘이야, 율법대로 말씀대로 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는구나.’

착한 왕들의 특징은 뭐냐? 자기가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심부름꾼이고 실제적인 왕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다. 그리고 특히 솔로몬 같은 경우도 그래요. ‘왕과 나 사이에는 율법과 언약으로 늘 지휘, 통제를 받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우상적이지 않아요.

우상적일 경우에는 언약이 없는데, 이 착한 왕들은 본인이 지시를 안 내려요. 그게 솔로몬의 기도잖아요.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이 내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이라면 나라는 이 파이프 관을 통해서 주님의 언약이 현실로 바뀔 때 율법이 현실로 바뀔 때 어떤 복된 결과를 남길지, 그것을 저를 통해 그대로 실시해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솔로몬 왕은 율법이 통하는데 막혀야 돼요, 안 막혀야 돼요? 막히면 안 되죠. 막히지 않고 내가 있어도 없는 요량으로 그냥 나를 통해서 사용하는 그것을 잠언서, 전도서, 아가서, 시편에서 ‘지혜’라고 합니다. 그것을 지혜라 하는 거예요. 특히 잠언, 전도서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얼마나 당부합니까. ‘너는 지혜를 배워라. 지혜가 있으면 생명나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을 고려해서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지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태초에 지혜가 있었느니라. 그 지혜가 만물을 만들었다. 따라서 만물의 결과 같이 파도를 타지 아니하면 너는 만물의 속성에 의해 잘린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 같은 경우 지혜란 우리로 하여금 결국 세상 보는 관점을 격상시키죠. 그러면 말씀에 의해서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독수리처럼 점점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는 것이고 그것이 지혜, 또 다른 말로 하면 지혜에 입각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떤 새로 시작한 드라마에 보면 20대 후반의 두 남녀 커플이 이런 대화를 해요. ‘우리가 젊었을 때 참 무모했다.’ 하거든요. 그걸 집사님이 들으면 같잖죠. 저거 뒤통수 쳐버릴까? 저게 인생 몇 년 살았다고 무모하니 마니. 그게 네가 무모한 거야! 나이 사십 돼봐. 그 생각이 무모하다고.

철딱서니 없는 20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참, 우리는 그때 철도 모르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 이야기를 20대에 한다고요, 20대에. 그럼 나이 40되면? 그 생각 자체가 부정당해야 되죠. 그럼 40대가 보고 ‘아이고, 철없는 인간아. 네가 인생을 몰라.’라는 그 이야기를 바로 뒤에 있는 60대가 들었다 칩시다. ‘이거 뭐, 나이 60도 안 되어서 세상을 뭘 알아?’라는 이야기를 나이 85된 노인이 들었다 칩시다.

그런데 60대가 노인정에 오니까 80된 고참이 와서 “야, 이리 와. 초짜 이리 와. 어? 걷네? 어? 보이네? 너 보이네? 네가 의자에서 그냥 일어서네? 우와~ 아주 젊구나.” 노인정 가면 전부다 짚고 못 서고 이러는데 아직 걷는 거 보니까 자기 보기엔 새파란 청춘이죠. 그래서 하는 말이 “이 나이 60만 되도… 아, 진짜 60만 되도….” 이건 70을 넘어서야 돼요.

믿음이 뭡니까, 그러면? 믿음이란? 그 시건머리(철), 그 식견의 최종 정점이 뭐겠어요? 믿음이고 구약적으로 하면 곧 지혜죠. 지혜. 그 차원에서 샤워기에서 물 쏟아지듯이 쏟아 부은 책이 잠언. 그게 잠언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이 땅에서 고난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욥기. 이 땅 자체가 모든 것이 헛된 꿈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한 하나의 절차고 과정이다, 그것이 전도서. 그리고 결국 궁극적 지혜는 죽음에서까지 지옥에서까지 끄집어내는 것. 그것도 질투심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아가서.

욥,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까지 포함해서 그걸 완성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잖아요. 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솔로몬 때는 남방 여왕이 왔다(42절). 스바 여왕이죠. 지금의 예멘에서 여인이 막대한 선물을 들고 와놓고는 ‘내가 올 때 기대한 것보다 더 월등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스바 여왕이 내린 결론이 중요해요. ‘당신이 받은 지혜는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지혜는 어디서 온 거예요? 인간의 세상에서 없는 지혜죠. 사도 바울의 편지나 요한복음에서 그걸 영이라 하는 거예요. 영을 받았다는 것, 성령 받았다는 것은 시건 났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시건 났는가? 예수님 갖고 있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 때 어떻게 살았는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20) 했어요. 왜? 어차피 전셋집이고 어차피 떠날 동네 아니니까. 살 동네 아니니까. 살 동네 아니잖아요. 이것을 먼저 겪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성경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7장 29-32절.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율법에서 어떻게 교회가 되나’ 그 이야기를 이번 시간에 해요. 율법에서 어떻게 교회가 되느냐? 상당히 난해해요. 복잡합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교회 말입니다. 반석 위에 교회 세우는 것.

누가복음 17장 29-32절에 보겠습니다. 27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 했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것은 편평한 땅 위에서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면서 서로 마주보면서 최선을 다할 때, 그 차원이 몇 차원이냐? 면적 위에서 노는 차원, 2차원이죠.

위에서 우리들 사는 걸 어떻게 지켜보는가 하는 안목이 날아가버렸죠. 자기들끼리 다수잖아요. 그때 육이 아니에요. 인간이에요. 인간들은 차이나는 게 있어요. 네 개성, 내 개성, 네 DNA, 내 DNA, 지문이 다 다르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하면, 그것을 위에서 보면 누가 잘났다, 못났다가 의미 없어요. 의미가 없다고요.

저는 처음 들었는데, 권투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점이 뭐냐? 프로는, 강해야 된다는 게 프로에요. 아마추어는, 잘 해야 된다는 게 아마추어입니다. 오늘 아침 인간극장에서 이 말이 처음 나와서 제가 아주 새롭게 들렸어요.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권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강하다는 특징이 뭐냐 하면… 거기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제가 설명 붙이는 거예요. 프로에서 강하다는 것은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거예요, 나만. 내가 최고 강자여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마추어에서 잘한다는 것은 점수제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해요. 서로서로가 필요하다고요.

그럼 아마추어에서 잘하면 어디로 갑니까? 프로로 가겠죠. 그럼 ‘프로’ 앞에 붙는 게 뭐냐? 프로의 세계는 ‘냉혹한’ 프로의 세계죠. 아마추어는 취미니까 취미하려면 더불어 같이 친하게 지내야 되죠. 운동이 취미니까, 목숨 걸고 하는 게 아니니까. 목숨 걸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프로에 가야 되죠.

여러분들이 잘 모르겠지만 바둑대회가 있잖아요. 바둑대회에서 총 상금 5억 걸렸다, 이 말은 우승자에게 3억 준다는 뜻이에요. 우승자에게 3억 주면 여러분들이 아마추어 입장에서 2등은 얼마쯤 줘야 될 것 같아요? 1등 3억 주면 2등은? (1억.) 5천만 원 줍니다.

우리나라에 프로 기사가 367명인가 그래요. 제일 잘 두는 사람이 신진서이고 세계에서 제일 잘 둬요. 이 사람은 1년에 10억 벌어요. 나머지 366명 중에 나이 많은 바둑 기사는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법니다. 그게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요. 골고루 주면 되지 않느냐? 그러면 그 게임을 재미없어 안 보죠. 재미없어서 안 봐요.

하늘에서 보게 되면 인간은 전부다 아마추어에요. 아까 제목을 뭐 한다 했어요? <지옥 만들기>. 바꿀게요, <아마추어 세계>. 이 세상은 전부다 아마추어 세계에요. 좀 잘한다, 못한다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전부다 아마추어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혜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지혜는 단독자 우리 주님만 갖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을 주님이 끌어당겼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마귀가 내놓는 처신을 보세요.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마귀가 프로 아닙니까. 왜? 위에서 보니까. 이미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길 때부터 위에서 봤거든요. 마귀 빼놓고 인간들, 철학박사, 노벨상 탄 사람들은 아래서 보여요. 아래서 봐요.

좀 어렵지만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이 여기 있다. 우리 이 땅에 살자.’ 아마추어입니다. 아마추어에요. 그러나 성경의 언약으로 프로 입장에서 보게 되면 ‘땅이 있다’가 아닙니다. ‘땅이 있다.’가 아니고 ‘언약이 있다. 땅의 지형도,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움직이면 언약의 굴곡대로 곡면을 만든다.’에요.

요한계시록에서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는 이유가, 든든한 땅, 든든한 하늘이 주가 아니고 언약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 자리배치, 자리 이동이 막 생기는 거예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해가 자기 궤도를 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해 스톱!” “저 서산 너머 져야 되는데…” “까불지 마. 그 자리 있어.” “왜요?” “지금 내가 벌인 전쟁은 아직까지 안 끝났으니까.” 해 지면 전쟁이 마감을 못하니까. 마감시간이 없어요. 다 죽을 때까지 해는 중천에 떠올라야 돼요.

그다음 동방박사. “아휴, 메시아 올 때가 되었는데…” “어이, 별! 움직여.” 별이 움직이니까 동방박사가 별 따라 갔어요. 별이 얼마나 세밀하게 네비게이션 해주는지. 예루살렘에 와서 별이 잠시 없다가 베들레헴에 가서 없어진 별이 또다시 나타났잖아요. 별 따라가니까 누굴 만났어요? 아기 예수를 만났죠.

그러니까 모든 말씀을 누가 잡아당겼어요? 예수님이 잡아당겼죠. 그럼 동방박사는 별 따라 온 게 아니고 예수님께 쏠려 들어가는 모든 변화, 파도, 물결에 같이 휩쓸려서 와보니까 아기 예수죠.

아기 예수가 어디서 태어나는지를 동방박사가 인간의 지혜로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몰랐는데 인간 말고 별이 움직이는 주님의 지시 따라 가보니까 주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지혜의 원천은 예수님을 믿는 내가 지혜의 원천이 아니고 누가 지혜의 원천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지혜의 원천이 되어서 지금도 세상의 모든 무늬와 주름을 보이지 않는 주님이 지금도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보이는 것들은 제켜버린다. 제켜버리고 보이지 않는 분을 세워놓고 그때부터 이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씀이 무엇인지를,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 이야기가 개시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외모? 보이는 것들의 외모 있죠. 보이는 것들의 외모, 다수에요. 평가 대상. 보이지 않는 것의 외모, 이것은 왜 생각 못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외모는 구약 때 누가 미리 보여줬는가?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모세를 통해서 보여줬던 모세 얼굴에 나타난 광채, 이것이 보이지 않는 외모죠. 모세 너무 부러워하지 맙시다. 우리도 죽으면 해와 같이 빛나는 거예요. 해가 우리 얼굴에 비치는 빛보고 ‘형님, 졌습니다.’ 너무 빛나니까.

수소 융합 활동에 의해서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차이로 에너지가 방출되고 탄다는 놀라운 태양의 활동이 누구한테 빛을 잃어요? 성도의 빛 앞에서는 빛을 잃습니다. 그걸 생각해볼 때, 이 땅에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관절염, 류마티스, 우울증, 그리고 허리 틀어진 것, 디스크 조금만 참으세요. 죽여주십니다.

다시 눈물도 없다는 거예요. 죽었다가 부활했으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마귀가 이 점을 알아요. 지금 이걸 다 마귀가 안다고요. 마귀가 아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그냥 두면 안 되죠. 이 세상의 지형도를 마귀가 쥐고 있는데 이게 주님으로 바뀔 참이니까 사전에 제거해야 되겠죠. 마귀는 영이니까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예수님도 영이고 마귀도 영이고 나머지는 육이고. 믿음도 시건도 하나도 없어요, 그들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전쟁하고 돌아다니는 거죠. 뒤에 마귀는 웃고 있고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의하면 마귀가 예수님께 두 번째 시험을 해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립니다. 이 세상 지형도에서 제일 높은 위쪽이 그 당시에 성전 꼭대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땅에서 나름 위쪽으로 가죠. 위쪽으로 간다는 것은 마귀에 물든 모든 육적인 인간들에게 높은 자리가 인생 성공한 자리라는 인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거예요. 그 자리는 누구나 원하는 자리에요.

데살로니가후서를 봐도 그 성전 자리는 나중에 누가 앉느냐 하면, 적그리스도가 앉아요(2:4). 그 자리에 왜 앉습니까? 이 세상 모든 육적 권력이 결국은 바벨탑의 끝자락,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했던 구약 율법의 취지에 대해 육의 해석이니까 육적인 해석이 추가되게 되면 그 성전 자리가 이것은 단순히 권력 자리가 아니고 권력을 초과한 인간의 정신까지 장악한 최고의 자리가 되겠죠.

‘과연 그 자리에 꾸준히 올라왔다면 예수 당신이 이 자리를 앉을 만하다면 그동안 꾸준히 그 자리를 위해 하실 능력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능력을 보여라.’ 그걸 어떻게 보입니까? ‘뛰어내려라. 차근차근 밟아왔던 그 모든 능력을 내 앞에서 한번 보여 봐라.’ 차근차근 밟아서 위로 올라간다, 인간의 육의 해석에서 나올 법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의 방향이 높은 곳이 아니고, 거꾸로 된 성전이에요. 지형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최고를 희망하는 그 자리에 숨어있는 반대편으로 쌍이 된 채 있어요. 아까 천국과 지옥은 같이 만들어진다 했죠.

벌써 지옥이 만들어졌다는 말은, 천국이 지금 그와 반대편에서 인간이 제일 가기 싫은 십자가 죽기까지 -십자가 죽는 것은 죄에서 죽는 게 아니고 억울해 죽는 거예요. 억울한 죽음의 자리에, 자진해서 억울함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왜 하필이면… 이래서 안돼요. 인간의 마음은 억울한 걸 제일 싫어해요.- 자진해서 억울함을 딛고 맞은편 제일 낮은 자리에 주님께서 가도록 창세 전에 아버지와 계약이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악마는, 뛰어내려라. 시편 91편입니까, 그러면 천사가 받들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2절) 어디 위에서? 그거 땅 위에서 받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은 주님으로 하여금 무덤까지 내려가게 해요, 무덤까지. 안 죽으려고 받는 게 아니고 꼭 죽어야 돼요.

꼭 죽어야 산다는 이 희망은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 뚫어낼 수 없고요. 가룟 유다가 그거 뚫으려다 실패했잖아요. 주님만이 제대로 죽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 해석은 죽더라도 못 죽어요. 그 죽음이 아니에요. 마귀를 뚫어낼 수 있는 죽음은 우리가 자살을 백번해도 안 죽어요.

어떤 사람은 다섯 번 자살한 사람도 있어요. 다섯 번 자살시도하다 결국 성공해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인간실격』이라는 1948년도 일본 작가(다자이 오사무)가 자기 자서전 형식으로 쓴 게 오늘날 현대에 아주 잘 읽혀지는 이유가 뭘까요?

타인에 대해서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남이 뭘 원하지? 웃는 걸 원하는구나.’ 타인에 대한 존재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그저 남한테 웃는 모습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 입꼬리가 올라가도록 해요. 원숭이처럼 웃으면서 그 고통을 자기가 혼자 다 감당하고요. 점점 더 자기 내부적으로 봉쇄한 채 술로 달래고 그런 내용들이 있어요. 다섯 번 자살 시도하다 기어이 다섯 번째 성공해서 시건 없이 죽어요. 지혜 없이. 죽기는 죽었는데 지혜를 품고 죽은 게 아니고 지혜 없이 죽는 거예요.

얼마 전에 자살했던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씨 유서는 제가 안 봤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남겼다는 거예요. ‘나는 미지의 곳으로 간다.’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그럼 태어나서 공부는 하고 일류대학 나오고 하면서 결국 남긴 것은 무슨 발자국이냐? 나이키 신발 신고 발자국 내면 나이키 신발 발자국이 찍히잖아요. 인생사는 게 전부다 발자국 찍고 돌아서서 보면,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뒤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다’로 나오는 거예요.

‘전쟁기금 한 사람당 60만원 드리겠습니다.’ 정부에서 한다 하죠. 공무원들 지금 밤새가며 바쁘죠? 왜 그럽니까? 답변은 간단해요. 뭡니까? 국민 70%에게 일인당 60만원씩 왜 줍니까? 주는 이유가 뭐겠어요? 방금 나왔는데. ‘모르겠다’에요. 이스라엘 왜 깝니까? 당신 이스라엘을 왜 깠어요, 그래? 경제협력국가를 왜 까느냐? 정답은 뭡니까? 몰라! 김정은이 왜 그러나? 몰라요. 트럼프는 왜 그러는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시건이 없어 그래요. 위에서 보는 영적 안목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걸 성경적으로 말하면 마귀의 시험 들어서 그래요. 마귀한테 지배받아서 그런 겁니다. 누구든 마귀한테 다 넘어갔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한테도 자신만만했던 거예요. 이거 다 인간한테 먹힌 건데 너도 한번 해보자.

누가복음 17장에서 롯이 등장합니다. 28절, “롯의 때와 같으니”. 롯의 때와 같다고 했는데 롯의 때가 어떤 때냐 이 말이죠. 아까 했던 공식을 해봅시다. 모든 천국과 지옥은 짝을 이룬다. 신앙과 불신앙도 짝을 이룬다. 신앙은 그냥 등장하는 게 아니고, 불신앙과 동시에 같이 생산되기 마련이에요.

자, 롯이 있다. 그럼 맞은편은 뭐냐? ‘비(非)-롯’이라 합시다. 롯/ 비-롯. 롯이 영이라면 그 당시에 비-롯은 롯이 아닌 모든 자들이에요. 신약 용어를 사용한다면 육이 되겠죠. 그러면 아까 사람의 해석은 역사가 필요해요. 역사에서 얻어맞아봐야 돼요. 유황불을 맞든지. 얻어맞아봐야 ‘아, 나라는 것은 지혜가 없구나. 모른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이 정치적인 지형도, 그리고 자연적인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이 전부다 왜곡되게 설명하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때 창세기 하잖아요. 창세기를 할 때 이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될지, 안 해야 될지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요. 창조에 대해서 언급할 때 누구든지 바로 성경으로 들어가잖아요, 창세기 1장 1절. 과연 그래야 되느냐? 이미 기존 인간세계에서는 창조에 대해서 뭐로 설명하느냐? 물리학으로 설명합니다, 물리학. 자연에 대해서. 이걸 빼놓으면 안 되죠. 이걸 빼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물리학도 알고 성경도 믿습니다.’ 이렇게 된다고요.

육과 영은 단절되어야 되는데, 인간이 자기 합리화한다고 육과 영이 섞여버렸어요. 난 과학도 알고 과학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창조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느냐? 이것은 자연의 변화로 설명합니다.

비-롯, 제가 처음 지어낸 말이에요. 롯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거주함으로써 그들은 새롭게 규정받게 돼요. ‘너는 롯이 아니잖아.’ 각자의 네 이름이 있든 없든 간에 성경은, 이쪽은 이름이 ‘롯’이고 저쪽은 ‘롯 외에 모든 이, everybody 모든 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참 비정하죠. 참 냉정하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 인정치 못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사상이 있고 인생경험이 있고 인격이 있다, 이런 것은 주께서 아예 안 본다니까요. 중심 보고, 중심 외에 나머지. 중심의 여집합이에요. 중심 말고…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읽어보세요. 이 말씀 자꾸 거론하면 그다음부터는 돌로 치려 할 것 같아요. 아직까지 돌까지는 안 맞아봤습니다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왜 저주가 거기서 나옵니까, 목회 망치려고.

모든 사람은 자기를 사랑해서 교회 나와요. 거기다가 저주를 퍼부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뭐라 하는 줄 알아요? ‘아니, 이 정도 주님 섬기고 이 정도 헌금하고 이 정도 봉사했으면 됐지, 더 뭐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나와요. ‘어쩌란 말인가?’는 뭐냐? 아직도 누굴 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

그게 바로 오늘 이 강의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베드로를 사랑해요. 주님께서 이름을 새로 지어줬잖아요. 아주 신났어, 신났어요. ‘나보고 반석이래.’ 이게 교회에 대한 육적인 해석부터 출발시킨 거예요.

여러분이 교회입니까? 그럼 그 절차를 밟으세요. ‘내가 교회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생각했던 육적인 안목의 베드로부터 출발시켜야 됩니다. 육은 역사를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배설물이고 쪼다고, 내가 영적 해석이라 했던 것이 나중에 보면 육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롯과 비-롯에서 주께서 여기를 심판할 때, 심판은 이겁니다. ‘배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믿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믿지 않는 자에게 저주 내린다 했잖아요. 이것은 구분 짓기고 배제고, 아까 두 번째 시간 처음에 했던 것처럼 방향을 서로 다른 반대방향, 반대 벡터-방향을 가진 힘을 벡터라 해요- 두 개의 방향으로 쪼개기 위해서 주께서 언약으로 일하는 거예요.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을 통해서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교회에 적용시켜 봅시다. 교회라는 것은 어떻게 드러나고 어떻게 구성되는가? 간단하죠. 세상과 무슨 방향? 반대방향이죠. 왜 그런데? 시건이 났기 때문에. 마지막, 세상의 끝이 어떻게 끝난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린 거예요. 세상 모든 것이 불로 탄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렸어요.

베드로후서 2장 7절에 보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그다음에 뭡니까? “상함이라”. 상하죠. 의로운 롯이 고통하죠.

그러니까 이 절차가 뭐냐 하면, 주께서 롯을 건질 때 장차 오실 예수님이 받는 고통을 그 시대에 앞당겨서 주님께서 언약으로 누구한테 집어넣었어요? 롯에게 집어넣었어요. 롯에게 집어넣고 롯을 천국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쌍으로 짝으로 롯의 말에 대해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런 것에 해당되는 롯 외의 많은 다수를 소돔과 고모라에 소복이 모아놓은 거예요.

그럴 때 롯은 ‘일찍 온 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일찍 온 교회. 교회, 다른 말로 성도는 이 시대에 ‘말썽꾸러기’에요. 새로운 현실을 몰고 다닙니다. 분위기 좋은 거? 우리 가정 분위기 좋-다,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 ‘천도제 지내지 말자.’ 이건 분위기 확 버려놓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결론으로 해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천국과 지옥은 쌍으로 이루어진다 했죠.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성도와 쌍을 이루는 것은? ‘다른 사람은 절에 간다, 교회 다닌다’ 이게 아니고 성도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아까 롯 반대말은 비-롯이었던 것처럼 성도 반대말은 비-성도가 되겠죠.

비-성도가 살아가는 모습은? 이건 좀 어렵기 때문에 객관식으로 1번-핍박한다, 2번-무관심하다, 3번-핍박과 비슷한 건데, 조롱한다, 4번-? 1번, 2번, 3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자본주의’에요. 사람들이 점잖아요. 자본주의니까 본인이 육이고 지옥 간다는 것을 눈치 챕니까, 눈치 못 챕니까? 눈치 못 채요. 교회 전체가 자본주의화 되었으니까요.

어제 오후설교 때 했죠. 하나님의 집을 뭐로 바꿔요?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잖아요, 장사하는 집으로. 장사할 때 측정을 어떻게 한다고요? ‘재방문율’로. 오늘 대전 모임의 재방문율이 많이 떨어져요. 경제 어려울 때 단골이 있어줘야 버텨내거든요. 고객을 붙들기 위해서 각양 서비스를 하는 거죠.

자본주의로 인하여 공동체가 형성돼요. 자본주의 정신에 합당한,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철두철미한 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면 이 방향이 어떻게 돼요? 땅에 보물을 쌓는 방향 쪽으로 이것은 하나의 큰 탁류가 되어서 어리버리 하다가 여기 다 휩쓸려가겠죠. 인간의 힘으로 이 자본주의에서 발을 못 뺍니다.

그런데 주님의 지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이들의 작태를 비-성도의 작태라고 주께서 알려주니, 우리가 뭐 압니까, 주께서 알려주니 같이 자본주의에 휩쓸려 좋다고 돈벌이하면서도 속으로 ‘이 시건머리 없는 것들. 돈밖에 모르는 것들. 그게 철딱서니 없는 건데.’

주께서는 성도에게 뭐를 박아주느냐? ‘너 때문에 내 아들 죽었다’는 십자가의 언약을 성도에게 박아주니까 그 다음부터는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자가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하는 분 쪽으로 시선이 옮겨지죠.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 위태롭죠. 위태롭지만 너무나 소중한 위태로움이 돼요.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안 되는 거죠. 그렇다면 성도가 성도답다는 것은? 끝으로 말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결과를 보여주세요. 내가 생각지 못한 결과를. 그런 현상이 여러분 주변에 들끓게 될 때,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복 받았다, 이 주제야. 축하한다, 이 주체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그게 바로 우리가 노래 부를 영원한 찬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를 위에서 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안목으로 보게 하옵소서. 주의 성령을 받았다 하면서도 얼마나 철없이 굴었는지. 하지만 그때마다 성령께서 특공대 파견하듯이 주의 지혜로 다시 우리를 흔들어서 그들과 똑같은 생활, 똑같은 삶을 가면서도 차이나는, 방향이 다르다는 그 생각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