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7강( 절기의 연결), 복음이냐 교회냐 7강(임계점) 260330
인공지능(음성)
인공지능에 대해서(동영상)
대전강의 260330 인공지능에 대해서 -이 근호 목사
지금 AI(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해서 제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AI라는 것은, 인간들이 각자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알고 싶은 것, 얻고 싶은 지혜를 다들 내놓고, 인간이 혼자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는다고 해서 AI를 만들었어요. 그 다른 사람의 정보를 AI 정보창고에 저장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 정보창고 자체가 ‘나’라는 주체를 대신하는 큰 어른, 큰 주체가 되고 만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큰 주체에 종속되고 의존적이 되겠죠. 그럼 내가 자아가 됩니까, AI가 자아가 되겠어요? AI가 자아가 되면서 내 자아를 삼키죠. 그 AI가 내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원하는 내 결혼 문제라든지 장래 문제, 돈 버는 문제, 주식 문제 이 모든 문제는 시시한 개체적인 주체하고는 의논할 가치가 없어져요. 당연히 가족 관계라 하는 것은 육으로 식구 되면 그냥 ‘식사 같이하면 가족이다, 정을 나눈다’ 이렇게 하지만, 정도 좋고 다 좋은데… 아이는 실익, 실제 이익을 뭐로 판정 내리느냐? ‘가족 단위(unit)에서 나는 이렇게 사랑 받는다’라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커가면서 알아요.
‘우리 집안에서 귀여움 받으면 나는 행복해.’ 그것은 일곱 살 정도까지면 끝나고, 초등학교 가게 되면 선생님이 날 어떻게 보고 친구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가족 단위보다 더 중요해져요. 가족 단위보다 더 큰 단위에서 인정을 받아야 돼요.
그 큰 단위에서 인정받을 때, 인정받은 이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었다’고 되는 거예요. 나의 주체됨에 있어서, 가족 단위에서 인정해주는 그 범위를 넘어서 보다 폭넓은 그쪽 단위에서 이익을 준다 이 말이죠.
지금 AI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AI의 실체가 뭐냐? 가족 단위에서 벗어나서 큰 단위에서 인정받을 때 ‘나의 주체성, 내 자아는 더욱더 공고화되면서 실 이익을 봤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주변에 있는 큰 단위보다 더 큰 단위가 AI라는 주체 단위잖아요.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AI를 매개체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어요. 매개체로 집어넣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친구들도 다른 사람들도 다 AI를 집어넣고 하니까 이 정보의 바벨탑에서 공통된 절대자가 발생되는 겁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이것을 ‘데이터 종교’라 했어요. ([…가장 흥미로운 신흥종교는 데이터교이다. 이 종교는 신도 인간도 우러러 보지 않는다. 이 종교는 데이터를 숭배한다.…]『호모 데우스』中) 정보로 교류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
그런데 AI에게 의존하고 종속된 인간들에게 뭐가 빠져 있느냐? ending point, 마지막 최종점을 그 누구도 몰라요. 정보만 계속해서 쌓고 쌓을 뿐입니다. 바벨탑이니까. 바벨탑은 목표가 어딥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창 11:4) 하잖아요. 이미 하늘에 닿은 이름이 있어요. 그게 AI 이름이에요. AI가 벌써 신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 AI가 인간들의 모든 정보와 의식과 기대와 희망과 포부를 집대성했어요. 그런데 인간은 AI를 객체로 만들었거든요. 내가 이용하려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사물로 봤단 말이죠. 인간은 명령하고, 명령을 수용하는 그러한 객체로서의 AI이어야 하는데, 정보가 모이니까 어느 날부터 이 AI가 명령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왜 명령하는 자로 바뀌었냐 하면, 이걸 인간들이 원해서 그래요. ‘나 앞으로 어떻게 살면 돼?’라고 자기 안에 빈칸, 괄호를 마련한 거예요. 괄호를 마련하면 그 괄호 내용은 AI가 채워주는 거예요. ‘너는 예술적 기질이 있기 때문에 미술 쪽으로 가라. 디자인 쪽으로 나가라. 너는 음악해라.’
자기의 장래 문제까지 지배했다면, 그 AI한테 조언을 받는 자는 ‘나중에 내 장래 문제에 필요한 모든 정보까지 나보다 AI가 벌써 알고 있다는 뜻이구나.’ 그럼 점점 더 가스라이팅 당하겠죠. 의존적이 돼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AI의 말을 듣는데요. 이제 문제가 발생해요. 사달이 나는 게 뭐냐 하면 AI끼리 경쟁을 해버려요. 특히 바둑 둘 때 알파고가 나왔었잖아요. 그때는 알파고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지금은 수십 개가 되거든요. 바둑의 신들이 수십 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둑의 신과 신끼리 바둑을 둬요. 거기서 인간 바둑 기사는 완전히 소외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수(手)에 대해서 알아듣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재미가 없어요.
결국은 인간은 AI 시대에 자기가 점점 더 배제당한다. 어려운 말로 ‘소외당하는 존재’가 돼요. 소외당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붙잡아야 되고 의존해야 되고. 자기가 결정하더라도 AI한테 묻지 않으면 이것은 미결정사항으로 남겨두고 나보다 더 어른… 아까 어른이란 어떤 사람이라 했습니까? 정보를 보다 많이 알고 있는, 더 똑똑한 것이 어른이에요. 그게 AI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AI 이전부터 더 똑똑한 것, 지식이 많은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착함’으로 봐요. 이미 ‘더 똑똑한 것=착함’으로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착하다? 똑똑한 사람이 착하다. 정이 많은 사람이 착한 게 아니고요. 정이 많은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한테 이익을 줘야 그게 착한 존재에요.
그래서 하다하다 제일 편한 것은 나의 모든 주체적 결정이나 판단을 아예 AI한테 넘기고 나는 AI의 종이 되는 그것으로 점점 길들여져 가는 거예요. 가스라이팅 되고 그것이 왠지 편안해지는 그런 시대에 왔습니다.
방탄소년단이 광화문에서 공연했잖아요.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 기성세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같이 동조하는 아미 팬들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방탄소년단은 작곡을 할 때 이미 그걸 간파하거든요. 비트만 주면 돼요. 박자만 주면 돼요.
인간은 점점 더, 생각하는 것은 AI가 대신 다해주니까 자기는 들썩들썩하게 돼요. 박자에 맞춰서 춤추고 싶을 때 춤추고 박자가 따르는 대로 할 뿐이죠. 방탄소년단 노래를 작곡하는 사람들은 그 박자를 어떻게 맞추면 되는지 누구한테 물어보겠어요? AI한테 물어보죠.
그러니까 현재 AI시대는 인간들이 그렇게 고대했던 천국이에요. AI의 나라가 바로 그 천국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어요.
대전-신명기(37강) 신명기16:9(절기의 연결) 20260330a (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6장 9절부터 하겠습니다. AI 시대에 AI가 죽어도 못 따라오는 게 성경입니다. 죽어도 못 따라오는 게 성경인데, AI가 따라붙으려고 지금 정보를 모으고 있어요. 왜 못 따라오느냐 하면, 십자가 지식은 따라와요.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건 다 따라와요.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단절이거든요.
십자가의 능력은 단절입니다. 어제 오후 설교에서 했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죽으리라.” 이건 출애굽기 33장에 근거합니다. “나를 본 자는 죽으리라.”
출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래서 살아 있는 자는 주를 만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정말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자는 ‘일단 죽자.’입니다. ‘좀 맞자’ 하듯이 ‘일단 죽자. 이 말은 주님이 새삼스럽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방식입니다. “너는 나와 상관없어. 너는 끊어졌어.” 그 끊어짐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 안에 칼이 있다고 합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칼의 용도가 뭡니까? 등짝 긁어주는 게 아니잖아요. 칼은 죽이는 용도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죽입니다. 죽일 때, ‘하나님이 참 우리 인간을 죽이다니..’ 뭐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시는데, 말씀이 우리를 죽일 때 우리를 뭐로 보느냐, 무엇을 겨냥해서 보느냐 하면, 괴물을 찔러 죽이죠. 괴물의 특징은 어둠에 속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란이든, 아프리카든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러한 분위기가 점점 커지는 동네의 특징이 뭐냐, 종교 제도가 없어요. 기독교 제도라는 게 거기엔 없어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다 보자기 쓰고 다녀야 되고, 히잡 쓰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거 벗고 기독교 사회운동 해서 예수 하나 믿고 그런 거 없어요.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곧 어두움이었습니다.’라고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면 신자가 돼요. “내 안에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사회를 비난하고, 우리 가족을 원망하고 국가가 어떻고...이런식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자체가, 십자가가 말씀의 완성이니까, 십자가로 우리를 찔러버리면, 본인 안에 누가 있었는지 몰랐다가 그제야 간파가 돼요. ‘아,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괴물’ 귀신이죠, 마귀죠. ‘내 안에 귀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각당할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경로, 새로운 발전의 모색, 이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그걸 ‘자기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킨다.’고 하는데, 여기 신명기 16장 9절을 봅시다.
신16:9-10 칠 주를 계수할찌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9)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이렇게 되어 있죠. 9절에 곡식에 낫을 대는 이 날을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절기를 지키라.” 율법은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절기라는 것은 시간 장판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보통 인테리어할 때 장판을 드드득 뜯어내잖아요. 장판을 뜯어낼 때, 그 때 붙어있고, 묻혀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이해하는 시공간이 같이 묻혀있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나는 이런 식으로 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인생이란 뭐라고요? 인생이란, 지나온 길, 이게 전부예요. 인생이란 지나온 길이에요. 미래는 인생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과거의 집대성일 뿐이에요.
인생이란 지나온 길이 전부니까, 100살을 살아도 결국 인생은? 미완성이죠. 그리고 지나오고 지나온 길의 마지막은 뭡니까? 죽음이죠. 그래서 이것을 공식으로 압축시키면, 인생은 뭐다? 인생은 죽음이죠. 탄생은 뭐다? 죽음의 탄생이에요.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는 채로 결국은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
이걸 간단하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무기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 절기를 통해서 시간 장판을 뜯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 장판에 붙어 있던 우리 인생도, 인생이라 하는 것이 시간을 배경으로 해서 인생이 있잖아요. 그런데 시간 장판 자체를 뜯어내버리면, 시간 바닥에 있는 그 원판과 분리가 되겠죠.
그 분리되는 행사, 그게 바로 절기입니다. 뜯어내는 행사. 인테리어 작업하는 거죠. 뜯어내는 행사,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공사판. 이판사판 공사판. 공사하는 거예요. 왜 공사하는가? 하나님과의 대화 상대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안에 있는 절기를 통해서 대화 상대자를 주께서 새로 생산해요. 이야기의 상대가 되는 대상을 새로 만든다고요. 그게 절기예요.
그렇다면, 그 말이 맞다면, 절기 안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감안해서 생각해보세요. 그 절기 안에 어떤 행사를 벌이는데, 그 행사의 스케쥴, 프로그램이 뭐로 채워지겠어요? 나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행사죠. 하나님은 나를 받지 않고 다른 것을 받는다는 것, 나를 제치고, 나를 배제하고, 나대신 다른 것을 받는 행사가 절기입니다.
뭘 받느냐? 오늘 신명기 16장 9절에는 ‘곡물’을 받지요. 초실절이 언제인가 하면,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을 무교절이라고 하고, 하루 전인 1월 14일이 유월절이에요. 초실절은 딱 하루인데, 무교절 기간 안에 들어있는 안식일을 일컬어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무교절의 특징은 역시 분리예요.
무엇을 분리하는가? 이 날은 빵에서 누룩, 이스트(yeast)는 다 떼어내라, 섞지 말라는 거예요. 빵을 말랑하고 먹기 좋게 만들 때 누룩을 집어넣잖아요. 너희들이 먹기 좋은 빵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 이유는? 너희들이 그것을 양식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는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인간과는 대치됩니다. 인간이 옳다하는 것은 하나님은 다 싫어하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사람을 좋게 하면 뭐는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갈1: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목회를 한다, 설교를 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설교, 삶의 자세에서 행여나 교인들을 좋게 하거나, 사람을 좋게 하는 게 있느냐 없느냐를 살펴봐야 되죠.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으니까요. 사도 바울이 목회 몇 명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런 데에 신경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사도바울은 전혀 신경 안 썼어요. 똥배짱이에요.
왜냐 하면, 자기는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자기에게 손해될 게 하나도 없어요. 그 말은 내가 하는 일 중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은 하나도 없는 일에 종사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 것이 안 된다는 즐거움, 어떤 것도 내 소유가 안 된다는 즐거움이 있어요.
왜냐 하면, 어느 것이라도 내 소유가 된다면, 그 다음부터 내 소유의 무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려요. ‘저 인간을 내가 책임져야 되는데..’ 갑자기 책임지는 게 중요한 것보다도 자신이 무거워 지는 거예요. “딸이 시집가는 거 보고 눈 감아야지.” 이거는 뭡니까?
딸에 대한 책임감, 그 동안 키운 보람을 내가 영광으로 얻겠다는, 그 동안 딸 잘 키웠다는 것이 들어 있으려면 그릇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그릇의 무게는 진공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무거워집니까? 무겁지요. 본인이 본인을 무겁게 만드는 거예요. 딸이 시집을 가든, 노처녀로 늙든, 갔다가 헤어지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까 강집사님께서 아주 복음적인 이야기를 하셔서 제가 적어놨어요. 지난달에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동생분도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옆에 계시던 분이 동생이 왜 죽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집사님이 모르겠다고 답변했어요. ‘동생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복음적인지요! 내 알 바 아니라는 겁니다. 주께서 죽였는데 내가 굳이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죽은 동생을 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은 죽은 이유가 삽입된 이유를 부활시키는 거거든요, 우리를 부활시키는 게 아니고. ‘너는 죽을 수밖에 없어.’라는 이유가 담길 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대상 목록에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가 죽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증거 때문에 죽기 때문에, 그 증거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우리를 살리신다, 이게 성령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일입니다.
초실절부터 숫자를 카운트해서 49+1=50일째에 지키는 절기가 오늘 본문 10절에 나오는 ‘칠칠절’입니다. 보통 현대 달력에서는 6월에서 7월 사이에 칠칠절이 있는데, 인간의 역법으로는 정확한 날짜를 고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49+1 해서 칠칠절이 되는 거예요. 49일 다음부터 1주일 동안 지키는데, 칠칠절을 카운트하기 시작하는 날이 뭐냐? 무교절도 아니고, 유월절도 아니고, 초실절부터 카운트를 합니다.
초실절에 하는 행사는 레위기 23장 9절에서 14절에 나와요.
레23:9~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 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행사를 요약하면, 번제 플러스(+)소제 플러스(+),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나와요. ‘전제’ 이 순서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요제, 초실절은 보리가 처음 익을 때예요. 맥추절은 밀을 추수하는 때고, 초실절은 보리를 추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름을 맥추라고 해서 보리 맥(麥)자를 쓰니까 보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밀입니다.
요제라 하는 것은 이삭을 흔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주인공이냐 하면, 첫 보리가 주인공이고, 흔들어야 한다는 말씀에 의해서 첫 이삭이 흔들어지는 거기에 매달려서 보조적으로 흔드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인간이 주체에서 배제되고, 분리되는 거예요.
‘내가 드리겠습니다.’에서 배제되면서 말씀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동적 존재, 그 관계가 율법과 이스라엘의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에서 나올 때 대신 흘리는 피가 없으면 애굽에서 나올 수 없는 대상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장판 밑에 그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뜯어내면 그 아래 뭐가 깔려있어야 돼요? 유월절의 피가 깔려있어야 돼요. 그 피는 인간의 피가 아닙니다. 인간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러한 초실절의 제사에서는 인간 대신 번제, 짐승의 피가 들어가고요.
그 다음에, 소제는 고운 가루에요. 그냥 완전히 갈아버려요. 갈게 되면 주체가, 실체가 없어져요, 가루가 되니까. 따로 입자가 되지 못하도록, 입자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입자의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모든 의미 있는 것을 갈아서 뭐로 만듭니까? 무의미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을 대신하는 제물과 이런 식물성 가루 같은 것은 오실 메시아의 요소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현재 그 율법의 지시를 받는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인간이라는 것도, 그 요소도 제물 안에 들어 있어서, 제물을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어떻게 그 제물이 하나님 앞에 다루어져서 살아있는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고, 연기가 되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그 절차가 뭐냐 하면, 괴물 들어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천국에서 주님의 대화 상대로, 백성으로 만드는, 전환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가 있어요. 전제에 대해서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잘 표현한 게 있어요. 디모데후서 4장 6절 누가 읽어보세요.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6) 내가 선한 싸움을 사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7)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8)
소제 다음에 전제거든요. 번제, 소제 안 드리면 전제를 못해요. 순서를 맞춰서 해야 됩니다. 소제는 완전히 가루가 되죠, 실체가 없고. 사도바울은 갈릴대로 다 갈렸다, 이 말입니다. 갈리고 마지막 남은 것은 액체를 부어요. 주로 포도주를 부어요.
내가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괴물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대화 상대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양자가 돼요. 성령을 입어서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그 순서에 본인이 끌려들어갔다, 말려들어갔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했다.’가 아니라, 옛날 이스라엘 율법의 틀에 맞추어서 나는 여기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해야 될 것은 전제에 해당된다, 왜냐 하면, 예수님 오심으로 마지막 제사는 마감이 되었기 때문에. 마감이 되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제사 쪽으로 이야기한다면, 초실절 내부에서 시작해서 내부로 끝나버려요. 누가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읽어보세요.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죠? 초실, 첫 열매. 사도 바울은 제사로써 예수님의 전체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분이 빌립보서 2장 17절 읽어주세요.
빌2: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관제는 전제와 같은 뜻이에요. 지금 자기가 어디에 끼어들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메커니즘에, 천국 백성 만드는 메커니즘에 자기가 끼어들었으니까 여러분들도 성령 받았으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했다.’고 설명하지 말고,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표현해줘야 이 율법의 말씀을 누가 이루었다?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예수의 증인 노릇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이유가 되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구약을 다시 바라보게 되면, 그 동안 풀리지 않던 구약이 다 풀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초실절 안에 번제 소제 전제와 같은 이러한 행사가,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 작업을 연이은 절기, 아까 이야기한 칠칠절이죠. 초실절은 첫 번째 실과, 열매잖아요. 첫 번째, 열매, 이삭을 할 때, 이삭의 토대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피에서 나왔어요.
이 피를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유월절, 그 다음부터 무교절이 되면서 무교절이라는 것은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이 원했던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의 의미는 무의미로 바꾸고, 무교절, 누룩을 빼니까, 누룩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 동안 알았던 모든 죄에 대해서 누룩이라고 표현해요. 누룩, 죄를, 인간 자체를 배제하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나가는데, 피에서 이삭이 돋았다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 양의 의미로 그냥 땅을 덮어버리면, 이게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의 땅이 돼요.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어떤 이삭이든지 그것은 유월절의 의미를 품은 열매로서 이삭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것이 초실절이라면, 그 다음 절기들은 뭡니까? 초실절의 취지가 확대되겠죠. 어디까지 확대되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고, 인류의 역사를 결정지어 버려요. 제사가.
그러면, 처음에 무교절까지 합쳐서 1월이니까 큰 뭉치로 뭉쳐서 유월절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맥추절이에요. 이게 칠칠절인데, 이게 또 오순절이에요. 정리하면, 크게 봐서 첫 번째 절기가 유월절, 두 번째가 맥추절 또는 칠칠절 또는 오순절, 세 번째가 바로 초막절, 다른 말로 하면 수장절, 최종적으로 다 추수가 되는 수장절.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빵 사러 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추수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들은 말씀은 ‘나는 양식을 이미 먹었다.’는 것이었죠.(요4:32) 그러니 제자들은 누가 빵을 드렸는가 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요4:35)
요4:32~35-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건지는 것이 주님의 수장절의 의미예요. 초막절의 의미는 뭐냐 하면, 임마누엘이에요. 마태복음 1장에 나오죠.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갈 대화 상대를 생산해내는 일을 내가 기어이 마무리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거든요, 현상. 절기는 뭐냐, 절기란, 하나님의 지상적인 표현법입니다. 하나님의 내막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절기가 주어진 겁니다.
수장절=추수하는 것, 초막절=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것,(수장절=초막절) 어디에서 함께 있다? 땅에서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땅에 정착해 있는 게 아니고 분리되어 있는 거예요. 분리되어 있으려면 광야 생활이죠. 광야 생활에 필요한 것은 전원주택입니까, 아니면 텐트입니까? 텐트죠. 그 텐트가 초막 아닙니까?
초막의 특징은 이동용이라는 거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거죠. 어디서? 땅에서부터 하늘로, 하나님께로 이동하는 것. 인간은 이동하지 못하죠. 인간은 기존의 시공간이 있기 때문에. 이동해 봐야 시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동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공간이라는 장판을 뜯어내는 거예요.
어디까지 뜯어내느냐? 온전한 피가 나올 때까지. 뜯어낼 때 인간과 같이 붙어서 같이 뜯기는 대상이 뭐냐? 양, 염소, 그리고 고운 가루, 또는 비둘기, 수소 또는 암소. 이게 전부 다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고, 장차 올 인간 따라 오실 메시야, 하나님 자신의 요소가 같이 중첩되어서 있는 인간을 대신하는 그러한 짐승 플러스 곡물, 그러니까 식물, 동물은 되지만 뭐는 안 받는다? 여기서 인간은 안 받습니다.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괴물이 있기 때문에. 괴물이 있기 때문에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교회인지, 어머니교회인지에서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벌써 죽어있다는 것을 대체물들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너 안 받는다. 나는 양 받고, 염소 받고, 소 받지..” 대제사장도 안 받아요. 안 받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오른 귓부리, 오른 손가락, 오른 발가락에 뭘 발라요? 피를 발라버려요. 피와 기름을 발라버린다고요. 네 자격으로는 나와 대화 상대가 안 된다. 말씀을 줘도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이미 다른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십계명 제 1계명이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인간들은 이미 다른 신을 유통하고 있다는 것을 주께서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기라는 거예요. 섬기는 방법은 인간을 대체해서 이런 짐승이나 곡물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절기에 대해 해 봅시다. 유월절 피에 의해서 이삭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피를 머금은 이삭이 계속 49일 동안 자라고 나중에 초막절까지 계속 이어지겠죠. 그런데 49일 다음에 오순절이 있죠. 오순절은 드디어 시공간이라는 장판이 다 뜯어졌단 말이죠.
이 시공간이 왜 문제가 되는가? 시공간 자체가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위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시공간이라는 장판 자체가 위에 하나님이 있고, 우리는 땅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이 그래요. 땅 아래에 음부 있고, 그 위에 땅 있고, 땅 위에 하나님 계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뜯겨져 나가는 거예요, 자체가 뜯겨져 나가면 뭐도 같이 뜯겨져 나가요? ‘밑에 음부 있고, 위에 하나님 계시고, 나는 땅에 있다.’는 자체가 폐기처분 당하죠. 그걸 폐기처분하는 기능이 뭐냐 하면, 오순절날 왔던 성령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이 오게 되면 기존에 인간들이 이해했던 시공간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요. 왜냐,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까. 헌금 반 하고 죽은 부부 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자기 재산을 사도의 발 앞에 두면서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주 특이한 현상이에요.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다 같이 나누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질문 나갑니다. 거기 가난한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죠. 거기 공짜 생겼다고 오픈런 한 사람들이에요. 교회에서 공짜로 뭐 준다하니까 아침 9시 오픈 전에 미리 줄 서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내는 사람이 중요하지, 얻어먹는 사람은 구원과 아무 상관없어요.
왜냐 하면, 다시 한 번 자기를 주체화시키고, 내 소유가 있어야 내가 산다는 기존의 시공간의 원리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거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냥 세상적으로 성령의 혜택을 입을 뿐이지, 구원받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걸 내놓으나 안내놓으나 관계없이 이것은 누가 하셨다? 성령이 그렇게 하셨다.
왜냐 하면, 장판이 뜯겨져나갈 때 누구도 뜯겨져나간다? 자기가 뜯겨져 나가요. 그러면 본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효과? 십자가의 피가 만들어낸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그 효과가 내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게 만든 거예요. 그러면 그 오순절이 마지막인가? 마지막은 초막절이 마지막이죠. 초막절이 어떻게 마지막이 되는지를 요한복음 7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7장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은 초막절이죠. 그 전의 명절은 큰 날 아니죠.
요7:37~39 -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절기가 뭐냐 하면, 7장 2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라고 되어 있죠. 유월절의 피, 낯선 피입니다. 피는 시공간을 뜯어내니까 거기에 생명이 있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레위기 17장 11절에 나옵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가 죄를 속한다.’ 용서한다는 뜻이거든요. 피에 뭐가 있다? 생명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생이라는 것은, 율법대로 찾아온 낯선 인물의 피가 생명을 주거든요. 그럼 여기에서 누가 방해가 되겠습니까? 인간은 안에 괴물이 있으니까, 인간이 다루는 피가 자기 속의 피, 짐승의 피가 낯선 인물, 예수님의 피를 방해하겠죠.
그래서 17장에 보면, 짐승을 잡을 때, 성전에 와서 잡고, 피는 먹지 말라고 했단 말이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인간 속에는 생명이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죠. 인간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인간 쪽에서 드리는 제사가 인간을 구원하지를 못해요. 피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이 파급되어야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제사 드리고 절기 지킨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생명을 얻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절기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바로 인간이 아는 이 시공간을 뜯어내게 되면 그 바닥에 그동안 인간 세계에서 감추어져있고, 덮여있던 그것이 뜯겨져 나가면, 거기에 생명이 있는 거예요. 제가 질문을 하나 할테니까 여러분들이 답변을 해보세요. 다니엘 6장에 나오는 질문인데요. 6장 16절에서 왕이 명해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었거든요. 다니엘 6장 17절
단6:17-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인을 쳐서 봉해서 법 실행에 변경이 없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가보니까 다니엘이 살아 있잖아요. 질문합니다. 다리오 왕이 잔인합니까, 다니엘이 잔인합니까? 누가 잔인해요? 지금 다니엘이 어느 정도로 잔인하냐 하면, 다리오 왕이 자기를 사자 굴에 넣을 때 그냥 집어넣은 게 아니고 봉인을 하게 했어요. 이것은 절대로 누구든지 구하지 못하도록 청저하게 막아놨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이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다리오 왕이 우습게 되었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 그 철조망을 타고 넘어왔단 말이죠. 이게 오한계시록에 보면 나와요. 일곱 가지 봉인을 해놨잖아요. 봉인을 했다는 말은 예수님 빼고 누구도 이 봉인을 철회하고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된 사태에서 주께서 부활해버렸다는 거예요.
누가 잔인합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가 잔인해요? 아니면, 주님이 그 잔인을 제대로 영원까지 지옥까지 영원까지 그걸 지적해주기 위해서 지옥을 만든 하나님이 잔인합니까? 주님이 더 잔인하죠. 이거는 잔인 정도가 아니고, ‘좐인’, 성도는 아주 독하게 잔인한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구원됐는지 설명은 안 되는데, 이미 세상의 모든 혈육과 모든 종교와 제도의 봉인을 타 넘어버렸으니까. 누구냐 너? 너 뭐야? 설명을 해봐! 하지만, 설명이 안 되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이야기했죠.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성도와 하여튼 하나님 쪽에 속한 사람, 주님 쪽에 속한 사람은 다 잔인해요.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사람의 가치를 철저하게 짓밟는데 아주 능통한 자들이에요. 누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요. 어제도 어떤 목사님의 예를 들었잖아요. “나, 가짜 목사입니다. 그리고 진짜 복음 안다 하는 사람들 다 가짜입니다.”
거기서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 설교를 듣고 있는 교인들은 뭐 어쩌란 말이죠? 목사 본인은 가짜라는데, 그러면 진짜는 어디 있는데요? “구원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기 위해서 나올 이유가 없어요.
여기서 절기는 1년마다 반복되잖아요. 왜 반복되는가 하면, 제가 어릴 때 문방구에서 이런 걸 본 적이 있어요. ‘매직 메모지’ 다른 말로 ‘무한 메모지’라는 게 있었어요. 뭔가 하면, 밑에 보드에 왁스를 발라놓고 위에는 얇은 종이를 덮고 글씨를 쓴 다음에 지울 때는 장판 들 듯이 들면 지워지는 거예요.
‘내 인생은 이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장판 들어버리면, 장판 들리면서 그 안에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 고스란히 그냥 드러나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돼요? ‘매직’이라는 게 뭡니까? 말할 수 없는 기적이죠. 이미 기적에 종속된 자가 누구다? 이게 성도고, 진짜 이스라엘이고, 주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반복해서 절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시공간이 뜯겨져 나가면서 새롭게 새롭게 주의 피의 능력을 보게 하는 거예요.
여기 여성용 파우치가 하나 있죠. 제가 강의 전에 강의 시간에 예로 좀 쓰겠다고 했더니 주인 되신 집사님께서 저의 취지를 모르고 파우치에 연결되어 있는 인형을 분리시키려고 했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 안에 종속되어 있다는, 아무리 손으로 쳐도 매달려 있어서 도망갈 수가 없어요.
인형 이쁘죠? 이쁘고 안 이쁘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끈이 중요한 거예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시집을 가든, 노처녀로 늙든 관계없어요. 중요한 것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런 관계는 신약에 와서 이 절기의 취지를 오롯이 다 완성하신 분이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초막절에 성령을 부어주듯이 한없이 부어주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 여인 자체를 하나의 우물로 사용하듯이요.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갑자기 동네 사람들 보기에는 하나의 매직 메모지가 되는 거죠. 물 길러 왔다가 아주 돌아버렸어요. 물 길러 왔으면 물을 길러야지 왜 양동이를 버리고 갑니까? 나중에 양동이 찾아갔지 싶어요. 지금 정신이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물 길러 갔으면 물을 길러야지, 얼마나 놀랐으면 양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 만났다고 외쳐버렸단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절기라는 것은, 시공간에 묻혀있던 모든 것은 무효가 되죠. 절기에 있었던 율법의 취지가 마치 연못, 연못이 있다고 치고요, 아주 큰 연못에 돌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퐁당 하고 잠시 흔적 있다가 사라지죠. 흔적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같은 데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 자체를 죄로 간주해서 죄를 바다에 빠뜨려버리면 남는 것은 우리 죄가 빠졌다는 그 연못, 그 바다만 부각이 되겠죠.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미 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어제 낮 설교 끝에 그런 이야기 했죠?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당신은 나를 어떻게 봐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이렇게 묻지 말고 내가 어느 공간에,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가? 그것을 남에게 전하라는 거예요. ‘네가 단독적으로 잘했느냐, 못했느냐’가 아니고요. 자꾸만 소총을 소총으로 상대하지 말고, 대포로 상대해야 돼요.
다시 정리하면, 절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현법인데, 그 표현법이 상당히 살벌하다는 것, 피가 튀기고, 기름 나오고, 제물 죽고, 곡식은 아주 가루가 되고, 아주 살벌한 표현법, 그 이유가 뭐냐? 바로 시공간에 붙어서 자기 인생을 내 인생으로 ‘나’라는 신체에 담으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뜯어내는 그 작업이 굉장히 살벌하죠.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피에서 나온 것이 뭐였다? 이삭이었다. 하나의 곡식, 첫 열매다. 첫 열매의 특징은 7 곱하기 7이니까 플러스 1까지 하니까, 완성된 수를 묶어야 거기에서 비로소 천국에서 필요한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절기의 모판, 바탕은 유월절의 피로서 이미 갖추어져 있는 거예요. 유월절 취지의 반복이 절기로 확대되고, 그것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하나의 원칙, 또는 청사진이 되고, 설계도가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절기 이름
시기 (유대력 기준)
핵심 내용
의미
1.유월절
1월 14일
어린 양의 피
🔴 모든 것의 출발점→ 인간 대신 “피”가 기준→ 인간은 배제되고 대체물로 시작
2.무교절
1월 15~21일 (7일)
누룩 없는 빵
⚔ 인간의 기존 의미 제거→ 누룩 = 죄, 인간 중심성 제거→ 하나님 기준만 남김
3.초실절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 다음 날
첫 이삭(보리) 드림
🌾 “피에서 나온 첫 열매”→ 인간이 아니라 열매가 중심→ 인간은 수동적 존재
4.칠칠절 (맥추절,오순절)
초실절부터 50일째
수확 감사, 제사
🔥 시공간 ‘장판’ 제거→ 성령 임재 (사도행전 2장)→ “내 것” 개념 붕괴
5.초막절 (수장절)
7월 15일 ~ 22일 (7일+1일)
초막 생활, 최종 추수
🌊 최종 완성→ 하나님과 함께 거함 (임마누엘)→ 땅(시공간)에서 분리된 존재
대전-복음이냐 교회냐(7강) 단6:17(임계점)20260330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78페이지 중간부터 하겠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에스겔을 보세요.]라고 했어요. [이들이 늘 계시 받습니까? 아니지요. 계시를 받을 때는 사람이 몸이 아파요.…] 다니엘도 포함되는데요. 특히 다니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죠. 계시를 받을 때 사람 몸이 아파요. 마치 신병이 걸린 것처럼 몸살을 앓고, 일주일간 아프고 이렇게 아파요.
아픈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통을 앞서서 같이 공감하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혈육적인 관계를 뛰어넘고, 혈육관계 말고 다른 관계가 있다.’ 이 말입니다. 혈육관계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잘해보자는 관계 아닙니까.
사람들이 평소에 무심코 하는 말…, 아까도 집사님 가족 중에 한 말을 끄집어냈는데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렇게 신앙 좋고 교회 잘 다니고 열심히 충성하더니만 지금은 왜 나이 들어서 마치 ‘아무 소용없다, 다 그냥 하나의 놀이였다’ 이런 식으로 하느냐.’ 그때 내가 얼른 말을 던졌잖아요? 보이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한 거죠. 메이크업한 거예요.
보이는 것들로 좋다는 것은 다 끌어서 뭐 종교생활이라든지 교회생활, 신앙생활, 좋은 것으로 덕지덕지 자기를 덮었다고요. 덮었는데, 덮는 작업도 힘든 노동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본인 정신도 희미하고, 교회를 챙기고 했던 자기가 만든 규칙이 자기에게 짐이 되니까 꼭 필수적이 아니면 좀 놓고 싶은 거예요. 그런 것까지 다 감당이 안 되니까 못 하겠다 이 말이죠. 그럼 치장했던 것이 좀 뜯겨져나가도 본체인 내 몸만 있으면 되잖아, 이렇게 되죠.
여기서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자, ‘인간이 보이는 것만 챙기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이 거울을 보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거울을 보면서 보이는 것에 굳히기 들어가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있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다. 그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말고 다른 나는 있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할까요?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쪽에서, 역시 보이는 거죠, 누가 봅니까? 보는 나한테 보이는 것. 자기 시선의 연장이고 자기의식의 확대에 불과하죠. 거기에 추가적인 나타난 것,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히 11:3)는 나타난 것의 계열에 끝까지 합류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낌새를 알아채질 못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 말고 다른 걸로 되어있는 관계망에 접근이 안 되는 겁니다. 접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선지자 보세요. 그들은 계시 받을 때 아프잖아요. ‘선지자는 아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네가 평소에 생각했던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이 그게 너의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광주강의의 제목이 <우연의 폭력>이라고 되어 있죠. ‘폭력’이라는 말을 저는 우연의 ‘폭격’이라는 말로 쓰고 싶었어요. 그러면 더 난해할까 싶어서 ‘폭격’을 ‘폭력’으로 고쳤는데요. ‘우연의 폭력’이라는 것은 ‘낯선 기호들의 폭격’이라고 보면 돼요. ‘낯선 기호들’이라는 것은 낯선 기호니까 하나님께서 뭐 문자를 보낸다는 뜻은 아니고, 광주강의에서 욥기의 예를 들었다고요.
욥기에서 하나님이 예를 든 것은 인간들 보기에 다 보이는 것이에요. 평소에 욥은 자기 모습은 거울에 비치니까 똑똑하게 보는데, 왜 보이는 것들 속에서 놓친 것이 발생하는가? 욥 자기 자신이 ‘나는 어떻게 보이는데 어떻게 앞으로 더 좋게 보일까?’에 신경 쓰는 그 관계망에서 누락된 것, ‘이것은 나의 나됨에 별 의미가 없어.’하고 배제시켰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섬주섬 주워서 “너는 이걸 어떻게 보는데?”하고 질문을 던진 거예요.
분명히 보이는 것인데 내가 구축한 보이는 것의 관계망에 흡수되지 못하고 합류되지 못하고 탈락된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욥은 선지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를 구축하는 것과 상관없는 것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에 보이는 것이 나타나요. 뭡니까? 별. 상당히 참 신기해요. 사람은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게 되어있는데 동방박사는 누구 말을 듣습니까? 별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뭐 미국 태극기입니까? 별이 왜 움직여요? 별은 생물체가 아니잖아요. 그전까지 별이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요.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 움직이죠. 동물이나 인간이 움직이죠. 그것만 조심하면 돼요. 그러나 별을 조심할 필요 없죠. 별은 그냥 고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별 따라 움직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놓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특이하게 움직이는 존재가 나타나게 했으니 그들이 뭐냐? 선지자다. 선지자는 보이는 자기 자신의 관계망을 헐어버리고 그것과 전혀 연관이 안 된 다른 관계망을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누굴 만납니까?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동방박사는 너무나 순진했어요. 현재 세상의 권력자가 유대인의 왕을 죽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자기의 관심사는 이쪽 계열이 아니고, 나타난 자의 계열만 챙기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났죠.
거기에 보이지는 않는데 나타난 관계를 조정하는, 그걸 연결시키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꿈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천사가 등장해요. 두 번째 시간에는 천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절에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여기에 대해서 구약의 신학자들은 바벨론으로 봐요. 거의 이구동성으로 이 ‘계명성’이 바벨론이라고. 실증적으로 역사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신학자들이 거기서 멈췄어요. ‘바벨론이다. 이것은 마귀가 아니다.’하고 멈췄는데 거기서 멈추면 안돼요.
어디까지 나가야 되는가? ‘이방민족을 주도하는 존재는 누구냐?’ 이것까지 물었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짐승’입니다. ‘옛 뱀’이에요. 신학자들이 이걸 바벨론으로 한정시켜버리면 에덴동산에 나타난 뱀의 후손은 누가 돼요? 뱀의 알인 뱀 새끼가 된단 말이죠. 그걸로 멈춰야 되잖아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웁니까? 뱀 잡는 사람을 뭐라고 하죠? 땅꾼. 땅꾼이 돼요. 그럼 오늘날 성도는 누구와 싸운다? 뱀하고 싸우려면 우리는 모두다 땅꾼이 되어서 막대기하고 올가미 들고 다녀야 되죠. 그러면 영적 싸움입니까?
신학자들 중 신앙인이 없다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래요. 신학자들은 자기가 신학이라는 이성적 결과물을 가지고 예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러면 돼요. 신학을 하되, ‘신학하는 이게 전부다 사기다’ 이러면 돼요, 어떤 목사님처럼. ‘신학, 이것도 사기다’ 이러면 문제가 굉장히 간단한데, ‘내 신학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옳은 것이다’ 이러니까 이것은 뭐 자기의 악마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거죠.
이방민족은 배후에 마귀, 악마죠, 천사가 있어요. 천사가 있고, 천사의 졸개 귀신이 있고. 이것이 바로 나타난 것들의 계열이에요. 그리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계열의 그림자, 흔적으로서 인간세계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말이죠.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블레셋 이들 이방민족의 특징,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다 뭘 노린다? 성전을 노려요, 성전을.
앗수르 같은 경우 산헤립 왕이 있을 때 랍사게 장군이 와서 유다 나라의 모든 성들은… 옛날에는 성이 있었잖아요. 군데군데 성이 있었다고요. 중세 봉건 사회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요새 같으면 도시죠. 기존의 성, 도시는 다 점령했어요. 서양의 성이라 하는 것은 숙소용이죠. 농사는 밖에서 하다가 안에 들어와서 거기서 잠을 자고. 혹시 적군이 오면 안 된다 싶어서 성 옆에다가 해자, 도랑을 파서 쉽게 정복 못하도록 조치하는 그게 성이잖아요.
모든 성은 다 점령했는데 마지막 남은 성, 히스기야가 있던 성 예루살렘 성은 점령 못했어요.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었고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누구한테 보여줬습니까? 성전에 가서 하나님한테 보여줬어요. ‘하나님, 이런 내용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이 왔는데 응답해주세요.’ 응답은 이사야 선지자가 해줬어요. 응답을 어떻게 하는지 왕도 모르고 다만 응답은 이거에요.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이게 응답이에요. (왕하 19:1-7, 대하 32:20)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미가 7장 7절을 봅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지금 성도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이걸로 성에 찹니까? 일반 사람들은 이게 성에 안 차요. ‘어떻게? 어떻게 하실 건데? 구원하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어제 오후기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버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행함이 되어버려요. 내가 소망하는 것이. 그럼 은혜 안에 뭐가 섞입니까? 우리 행함이 섞여버리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 주님의 피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진짜 오늘 이것은 꼭 알고 계셔야 돼요. 우리는요, 용서받을 자격이 없기에 용서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굳이 저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요소가 포함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보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너를 대신한 주를 생각해서 너를 용서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용서를 받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그래야 우리의 행함이 주님의 온전한 공로에 안 섞이게 돼요.
이 원리를 그대로 보는 거예요. 미가 7장 7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오직 바란다. 우리는 이걸로 성에 안 찬다니까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건데요? 그 방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구체적으로. 납득이 되도록.’ 이렇게 요구한단 말이죠.
시편 123편 2절,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이걸 보면 그동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엉터리로 해왔는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제 주일에 제 아내한테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연세가 76세나 되는 여자 목사님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동안 사람들 지옥만 보냈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본인이 설명을 해요.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갔는데, 자기는 하나님께 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시편 25편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너무나 모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어떠세요? 시편 보면서. 이런 시편 기도는 평소 교회에서 새벽기도마다 전부 다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다 하는데, 지금 정작 궁금한 것은 뭐냐? ‘도와줄게.’라는 응답 받아도 문제가 되는 게 ‘어떻게? 어떻게? 뭐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서 귀인을 만나가지고 ‘나는 당신을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나 죽고 난 뒤에 유산을 25억 남기겠다.’ 이런 거. 뭐 그런 거라든지 획기적인 거, 깜짝 놀랄만한 어떤 거, 주께서 준비하신, 입 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쁜 그런 걸 줘야 되는데, 여기 미가 7장 7절에 ‘나는 하나님을 바란다.’ 그래, 바라면 뭐? 막연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우리 신앙에 활력소, 박카스가 되겠어요. 차라리 우황청심환 하나 먹는 게 낫겠다.
지금 이방민족은 짐승이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짐승이 다루고 악마가 다뤄야 되느냐 하면 패가 갈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누가 다루느냐? 여호와가 다뤄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라는 인간은 빠져야 돼요. 빠지고 대기하고 있고 싸움은 누가 하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에요. 어떤 국가의 운명은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어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그다음 뭐가 나옵니까?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 사자 누가 풀어놨어요? 주님이 풀어놓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그 상황, 그 틀이 끝까지 가요. 중간에 변동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이스라엘만 노리는, 예루살렘만 노리는, 예루살렘이 없는 쪽에서 예루살렘을 노리는 쪽을 붙여요.
예루살렘은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성소에서 제단이 있는 곳이에요. 그게 성전이고. 그것을 시기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방민족의 우두머리 마귀가 그게 시기 나는 거예요. 얼마나 그게 샘이 나고 질투 나고 시기 나는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나가면서 귀신이 하는 말이 “당신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막 고함을 지르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미 잘렸으니까. 초나 치자 이 말이거든요. “입 다물어.”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를 빼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마귀, 귀신이 하는 것은 ‘어떤 위인이 와서 인간을 건진다.’ 이걸 강조했지, 구원자가 맥없이 이 땅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이 요소를 빼버리는 거예요. ‘좀 더 힘센 사람 없어? 아, 와서 우리를 건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마귀의 아이디어에요. 인간의 종교적 아이디어라고요.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는 길은 뭐냐? 종교로 해서 구원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종교마저 날아가 버려야 돼요. 종교가 마지막 인간의 희망인데 그 희망이 절단 나야 돼요. 어두움은 일체 어두워져야 돼요. 빛이 오매 어두움은 철저하게 절대적 어두움이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어두움에서 빛을 발견할 수가 없고,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아파요. 그리고 메시아가 아파요. 그리고 너무 아프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을 안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고백했다면… 오늘날 된통으로 진짜 주님이 찾아온다면 ‘제발 구원이고 뭐고 간에 그것은 싫고 이 고통에서 면제만 해주길 나는 소원합니다.’라는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겠죠.
두 번째 제목을 미리 정해보면 이렇습니다. ‘임계점’. 한계가 임하는 지점. 임계점, 거기서 탈출해야 되고 벗어나야 돼요. 그러면 임계점을 우리가 느껴야 되고 알아야 되겠죠. 마귀가 우는 사자라 할 때, 마귀가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임계점이거든요. 마귀를 돌파하면 되는데, 돌파하기 전에 마귀는 ‘이래도 돌파할 수 있겠어?’하고 마귀가 제안을 하는 거예요.
인간이 마귀를 돌파한다? 이거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꿈쩍도 안 합니다. 인간이 어떤 묘수를 쓰고 자기의 낮춤과 어떤 절대적 자기부인을 한다 할지라도 마귀는 ‘더하지 왜? 그 정도야, 네 수가? 그 정도밖에 안 돼? 턱도 없어. 너 그래가지고는 나의 임계점을 못 뚫어.’
인간이 마귀의 임계점을 못 뚫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하고 이렇게 해서 예수의 피를 믿었습니다.’ 그 자체로서 마귀의 손아귀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럼 벗어난 사람은 뭐냐? 내가 한 게 아니고 누가 하셨다? ‘주님이 하셨다.’ 듣고 보니 굉장히 간단하죠?
‘주님이 하셨다’를 주님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악마의 시험과 악마의 임계점이 더욱 두껍게, 더욱 완벽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덮친다는 사실을 성도만이 기뻐합니다. 그것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행여나 우리가 ‘나는 이렇게 기도했고 이렇게 이렇게 신앙생활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구원해줬다.’ 그게 평생 동안 우리에게서 늘 올라오기 때문이에요.
이게 유명한 노래 <싹 트네>에요. ‘싹 트네~ 싹 터요~’하는 애들 교회 노래 있죠. 싹 튼다는 거예요. 싹 트기만 해봐라. 마귀밥이 돼서 싹 튼 거 아주 군화발로 밟아버리죠. 언제 싹 텄지? 할 정도로. 그러니까 젊을 때 신앙생활 잘 한 싹 있잖아요, 싹 다 마귀가 밟아버렸어요. 그 싹에 마귀의 군화발 자국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지난 날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다는 자체가 그게 주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게 마귀 일이에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자,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49페이지에도 나왔듯이 ‘혈육적’이라 했는데, 결국 혈육적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나에서 떼낼 수 없다는 논리에 들어가죠. 떼낼 수가 없어요. 떼낼 수가 없는데, 그러면 선지자는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계시가 임하는가? 임하는 그 근거, 계열은 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계열이 있고, 나타난 계열과 인간이 보이는 것이 똑같은 현실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은 나타난 것은 모르고, 즉 실상은 모르고 보이는 것으로 짜여진 짜임새 있는 이 허상이 실상인 줄 알고 있는 이 임계점, 한계에 전부다 막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백성이 이렇게 막혀있는데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겠어요? 지금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거에요. ‘내가 거울을 본다’ 여기에 있어요. 내가 거울을 본다. 거울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거울이나 연못이나 하여튼 비치는 게 없으면 내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인간은 외부의 것으로 반사시켜서 자기를 파악해요. 자기규정을 그렇게 해요, 외부의 것에 반사시켜서. 모습으로는 거울이고, 의견으로서는 타인이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방해물이 뭐냐? 마귀가 지금 나를 장악하고 있잖아요. 마귀가 나를 노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해요. 뭐만 없애면 됩니까? 나를 없애면 되죠.
나를 없애면 되는데, 이 ‘나를 없앤다’는 말은… 자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타인이 있었고 거울이 있었어요. 어릴 때는 거울이고 나중에 커서는 타인이에요. 더 커서는 AI가 있고. 그러면 나를 없애는 방법은 뭐를 없애면 돼요? 타인과 나와 형성된 이 관계망을 없애면 되겠죠. 이것을 무의미화하면 되겠죠.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방법을 찾아봅시다. 나와 타인 사이에… 타인은 누구냐 하면 어릴 땐 아버지, 어머니죠. 아버지, 어머니가 ‘너는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어요. 이게 ‘나’가 된 겁니다. 나는 ( ). 이 괄호에 (천하보다 귀하다)가 들어가겠죠. ‘나는 (천하보다 귀하다)’.
괄호가 자꾸 바뀌어요. 이것을 ‘인간은 변위체’라 해요. 자꾸 바뀌어요, 안의 내용이. ‘나는 ( )다.’ 바뀔 때마다 타인이 교체가 돼요. 아버지, 어머니가 ‘너는 (귀하다)’하다가, 청소년 때는 친구가 ‘너는 (둘도 없는 친구다)’가 돼요. ‘친구’가 들어가겠죠.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없애는 차원에서 이 괄호 안의 내용도 같이 없애주는 겁니다.
어떤 타인이 와서 ‘참 좋은 친구다, 친구다’ 하는데 그 친구로 인하여 뭘 당할 때 내가 없어집니까? 배신당할 때.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때.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가 내가 어떤 조그마한 건물주 되는 것을 그렇게 방해해요. 또 자기 남편이 여자와 바람이 났는데, 그 아내가 자기 남편과 바람난 여자한테 상담하는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드라마 보는 하나의 팁이 있는데, 이런 팁은 필요도 없는 팁이지만,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는가 보면 돼요. 내가 지독하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독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것을 용인하고 협조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친구 중에서 갑자기 결혼할 상대자가 나타났어요,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안했고 한눈에 반해서 연애하는 사이라 합시다. 그때 남자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무의식도 골치 아픈데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발언이 나와요. “당신(여자)하고 엄마가 물에 빠져도 엄마는 안 건지고 당신을 건지겠다.”
왜냐? 그런 질문을 또 하거든요, 마지막 단계에서. 프로포즈가 될까, 안될까 결정되는 마지막 최종 면접시험에서 이 질문을 한단 말이죠. ‘당신 엄마하고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지겠는가?’하는 질문이 나오기 때문에, 선수 쳐서 그 질문에 답변을 미리 하는 거예요.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그럼 죽잖아.” “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괜찮아. 당신만 산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 이게 프로포즈의 꽃의 단계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비싸서 안되고, 3만원짜리 꽃에 담겨있는 진심이 되는 거예요. 하여튼 요 임계점만 넘으면 ‘넌 내 거야’ 되니까 무슨 수를 안 쓰겠어요. 다 한단 말이죠.
여러분께 질문을 하겠어요. 엄마하고 아들하고, 결혼도 안한 아들인데 둘이 너무 잘 살다가 갑자기 엄마가 암에 걸렸어요. 엄마가 암에 걸려도 곱게 걸린 게 아니고 지독한 고통 가운데 걸렸어요. 그때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가 너무 지독한 고통 가운데 있으니까 엄마는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나는 엄마와 내가 함께 사는 관계가 너무 좋아서 고통스럽더라도 엄마가 계속 고통 가운데 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이기주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이 아들 말이 할 말입니까, 안 할 말입니까? 둘 중에 하나다. 1번-할 말이다, 2번-안할 말이다. 지금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 대사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Hope Gap)>이라는 2022년도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요. 주인공 여자가 암에 걸렸을 때, 아들은 엄마를 사랑하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 엄마 없으면 못 사니까 너무 보고 싶으니까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계속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엄마를 욕보이는 건지….
자기는 진심이죠. 인간의 진심은 무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옳다, 옳지 않다’는 것은 의식 차원에서 판단되지만, 무의식 차원은 충동이라 해서 ‘옳다, 그르다’가 적용이 안돼요. 취중진담이라고 그게 적용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대사나 주변에 있는 모든 이야기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 뭐가 없다? ‘해답’이 없어요. 해답 자체가 없어요.
해답이 없다는 말은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거예요.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자기 나름대로의 진실이고 진리고. 보편적인 진리와 진실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되는 자아가 무의식까지 통제가 안 되고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부부생활에서 제일 갖춰야 될 덕목은 뭐냐? 반드시 휴전선, 중립 지역을 만들어놓고 서로가 이 선을 넘으면 안돼요. 선을 넘기 전까지는 의식으로 통제가 되지만, 선 너머는 충동의 지역이기 때문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요. ‘갈라서!’ 이렇게 할 때,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는 이 선을 넘었는데 저쪽에서 안 넘을 경우에는 대화라는 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훈민정음을 만들든지 해야지… ‘나라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저 홀배이셔도… ’ 이런 까닭에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여도 서로 맞지를 않으니까 전화 통화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주장하기 바빠서.
아까 프로포즈한 남자의 경우도 의식적으로는 ‘나는 없어도 당신을 살리겠다. 나는 죽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뭡니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통제,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자기가 죽일 수 없습니다. 이게 육입니다.
자, 그럼 해결점은? 결국 정리해보면, 인간의 자아는? 자아 덩어리가 실타래라면 엉켜있고 뭉쳐서 얽혀있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다 들춰보면 이건 타인의 인정이죠. 타인의 지시, 타인의 명령입니다. 타인의 명령으로 자아를 만드는데 이렇게 타인의 말을 듣고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인간의 욕망, 충동, 인간의 무의식을 놓치는 거예요.
욕망, 충동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이건 누가 쥐고 있죠? 마귀가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어요. 마귀의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의 이성, 윤리, 도덕, 착함은 자아 수준이기 때문에 자기를 수정하고 정신 차려서 바짝 하지만, 인간의 충동은 우연적 요소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다룰 수 없어요.
그래서 20년 동안 바르게 살아도 21년 째 무슨 일이 폭발할지 본인도 모르는 거예요. 술 한 잔 먹고 무슨 짓을 할지. 뭐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라 하는데, 평소에 점잖지. 마그마가 짓눌려 있으니까요. 이게 폭발해버리면 소용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 타자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이 타자, 자아 이걸 다 죽여 버려요. 하나님이 타인과 자아를 부정한다고 해서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까요? ‘졌습니다’ 이렇게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패배했습니다. 손들고 나옵니다.’라는 말을 누가 하느냐? 인간 내부에 있는 마귀가 시켜서 ‘이때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다시 해봐.’하고 찬송가까지 불러요. ‘천부여 의지없어 손들고~’ 손들고 부르니 뭐합니까? 그때가 5초 내지 6초인데 내일 되면 내일 또 몰라요.
아예 무의식까지 합쳐서, 그리고 자아까지 합쳐서, 타자까지 합쳐서, 육까지 가족까지 합쳐서 몽땅 없애는 방법은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인데, 왜 사랑이 되느냐 하면 사랑의 출처가 기존에 인간과 엮인 출처에서는 일체 사랑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를 사랑의 내용으로 품어버려요. 너는 내 사랑받고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는 사랑한 적이 없다’를 둘둘 말아서 포장지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사랑 대목을 한 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그다음 2절로 뜁시다. “내가 예언하는 능”,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 야, 대단한 믿음이다. 그다음 뜁시다.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내 거다 하지 않고 다 내놨다 했죠.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갔다 했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그리고 그 다음 봅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심지어 문둥병자가 먹던 음식을 먹고 문둥병자를 치료하면서 자기도 문둥병 걸리는 천주교 성자라 하는 사람, 리스트에 많죠.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인간의 행함과 섞입니까, 안 섞입니까? 안 섞이는 거예요. 보이는 것과 섞이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절단되고 끊어져 있는 거예요. 그다음 13장 13절 봅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했죠. 그러면 소망과 믿음, 소망과 사랑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니죠. 믿음과 소망이 있더라도 그 원천은 뭡니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선물이다. 없다는 뜻이에요. 사랑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랑은 중앙시장에 안 팝니다. 장날에 안 팔아요. 사랑은 없는 겁니다.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가 되어버려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가 돼요. 그럼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내가 새삼스럽게 사랑을 받아서 나오는 그 행위와 행세와 마음가짐은 뭐냐? ‘무엇이 사랑이 아니었다.’를 신나게 드러내는 행동이에요. 신나게.
“이거 성심당 빵인데 좀 드세요.” “아이고, 웬 사랑.” “사랑 아니거든요.” “돈 아쉬워요? 그럼 내가 오만 원 빌려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웬 사랑을…” “사랑 아니거든요!” 내가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아니고, 설교해도 강의해도 사랑이 아니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도 사랑이 아니거든요. 내 목숨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 선교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랑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사랑이냐? 이걸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떠밀어요. 수넴 여자를 뒤에서 떠밀듯이, 엘리야가 떠밀듯이. 자꾸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셨어요. 뭐라고? ‘사랑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라고.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특징은 유한이 아니고 무한에서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와요.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혹시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더 보태드리겠습니다.”(35절)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이 사람이 치료받을 때, 현재 시점에서는 모르겠는데 비용이 더 들면 그것까지 제가 대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사, 엘리야 이야기에서 밀가루통과 기름통에서 밀가루, 기름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처럼, 오병이어처럼 유한을 통해서 무한이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유한한 존재의 임계점을 가졌지만 무한은 사랑의 무한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 백성을 천국까지 반드시 이끌고 가십니다.
정리하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거울 보세요. ‘저건 내가 아니야.’ 이러면 돼요. 내가 아는, 내가 파악하는 나는 전부다 가짜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아는 그 가벼움, 즐거움. 가짜기 때문에 어떤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까, 안 집니까? 책임을 안지죠. ‘가짜가 가짜 값 했다’로 끝나는 문제에요.
보통 여자들이 시집가면 뭐라고 얘기 듣습니까? 시집와서 며느리 값하라 하잖아요. 며느리 값하죠. 가짜 며느리, 가짜 아내. 가짜 남편. 왜? 진짜는 내 소관 아니니까. 어차피 보이는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허상이기 때문에. 실상은 따로 있거든요. 허상을 보여줌으로써 자기의 임계점을 보여줌으로써 실상을 간접적으로 소개하는 기능, 이게 성도의 남은 삶입니다. 이게 선지자의 모습이에요.
선지자의 특징은 이거에요. ‘모든 것이 오류다’. 왜? 뭐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안 있겠대. 임마누엘 안 하겠대. 나 너하고 상대하지 않겠대.’ 이렇게 돼요. 그럼 인간하고 상대할 사람은 누가 있느냐? 여기에 한나 예를 들어봅시다.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한나가 어떤 식으로 변환되는가 한번 보세요.
1장에서 한나가 아기가 없다? 뭐 별 문제없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누굴 붙여주는가?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브닛나가 아들을 낳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성태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니까.
브닛나는 아들 있음의 존재가 되고 한나는 아들 없어요. 아들 없으니까 인간이 자기가 안다고 여기는, 있다고 여기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인간들로 봐서는 보이는 것으로 판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태케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존재는 아들이 있고 ‘너는 필요 없어.’하면 아들이 없다,라는 쪽으로 판정을 이미 내려버린 거예요. 그런 판정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요.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찾으니까요. 여기 ‘대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대적. 대적이 그런 식으로 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요.
그렇다면 보이는 세계에서 나타난 세계와 끊어져있는 임계점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런 수모를 한나가 다 받는 거예요. ‘그래, 나 저주받았다.’ 한나가 처음부터 이랬습니까? 원통, 절통, 분통해서 통곡의 기도를 하러 갑니다. 따지러 갔는데, 2장을 봅시다. 2장에서 한나가 뭘 알고 있느냐 하면 6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누가 빠집니까? 인간 본인의 기대나 소망이나 소원은 여기서 완전히 접촉이 끊어졌죠. 보이는 계열이기 때문에 나타난 계열에 합류되지 못하고 끊어졌죠.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난 것을 증거하기 위해 보이는 것을 쓰셨잖아요. 그래서 1장에서 한나가 기도해서 낳은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자기와 분리시키죠. 자기와 분리시킵니다. 자기 소유가 안 되게 해요.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한나가 떠났다는 말은 한나에게 사무엘이 소유물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럼 어떤 상태입니까? 원수가 조롱했던 상태하고 똑같은 상태인데, 그때는 원통, 분통, 절통했었는데 이쪽은 도리어 감사하죠. 왜냐하면 ‘너는 보이는 것들과 접속하고 같이 놀아.’ 그런데 주께서는 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사무엘을 잉태하는 비밀의 계열, 하나님의 언약 계열에 속해서 거기에 사용당해졌다는 것. 소속이 이미 주님 소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죠.
따라서 이와 같은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우리 생각할 필요 없고 진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롭게 만든 우리로써 다루는 방법이에요. ‘나는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나는 오류입니다.’ 그걸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게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칼이 되어서 우리를 찌를 때 참 아프지만 그게 과정인 것을, 필히 그래야 천국 백성이 된다는 그 과정을 우리는 이제는 받아들여서 계속해서 주의 하는 일로 인하여 다른 종족의 사람으로서 주의 사람의 증인으로서 가볍게 세상을,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