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7강( 마귀의 허세), 복음이냐 교회냐 6강(동행자) 251229
대전-신명기(37강) 신명기16:9(마귀의 허세) 20251229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하겠습니다. 신명기 16장 9절부터 11절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찌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스케줄을 누가 짰느냐 하면은 주님 쪽에서 짜서 지시를 내립니다. 그 스케줄이라고 하는 것은 바닥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시간이 있어야 돼요. 시간은 뭐냐? 변화입니다. 시간은 변화예요. 그 변화를 계산한 사람, 원칙을 세운 사람이 뉴턴이에요. 시간의 변화는 이 대자연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변화한다는 것, 여기서 시간이 생겨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없어요. 못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 자체가 없어요. 맞죠? 우주도 그렇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16일 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이 본인은 ‘한 이틀 지났나?’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가, 건물이 무너져서 자기가 갇힌 곳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심리적으로 시간이 늦어지거나, 거의 없거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수학 시험에 몰두하게 되면 ‘벌써 끝났나?’하면서 감을 잡지 못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학자의 문제 또는 우리 인간들의 문제인데, 이 변화를 측정하는 '나', 나도 이 변화와 똑같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이걸 놓치는 거예요. 내가 변화를 보고 측정해서 거기서 법칙과 원리를 만드는 것, 이것에서 나를 의도적으로 뺀 겁니다. 빼면 뭐냐? 이건 반칙이 돼요.
방금 제가 과학 이야기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물론 마찬가지고, 종교, 과학을 하면서 자꾸 누굴 빼요? 나를 뺀다고요, 나. 몸까지 합치면 '나'가 되고, 몸은 제쳐두고 ‘나’라 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자아'가 되죠. 보통 종교에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영혼은 너무 귀신 냄새가 나서 싫고, 현실적으로는 자아예요.
자아를 일방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건 뭐 반칙이죠. 그래서 진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나를 고려해야죠. 내가 달라지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 그거는 주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우리는, 이 자아가 끌려가요. 어디로 끌려가는가? 첫 번째로 나오는 중요한 겁니다. 자아라고 할게요. ‘나’ 대신에. 이 자아는 어디로 끌려가는가?
주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자아는 해체됩니다. 자아는 해체돼요. 자아가 해체될 이유는 이 자아가 없어야 되는데 생기게 된 이유가, 마귀 때문에, 악마 때문에 자아가 주어졌고, 이 자아를 인간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소유 못 하고 자아가 인간의 몸을 통제하고 지배를 해버린 겁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성경 구절 우선 한 번 찾아볼게요. 요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대단히 중요한데 어디를 보느냐 하면요, 창세기 3장 14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뱀에게 먼저 저주를 했어요. 첫 번째 저주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에요. 첫 번째 저주는 인간 저주가 우선이 아니고 악마에 대한 저주가 순서상 우선입니다.
마귀를 저주함으로써 마귀에 종속된 인간 저주는 어디에서 흘러나온 저주다? 마귀에게 확정된 저주가 인간에게 들어오는 것인데, 그 들어오는 통로가 자아입니다, 나예요, 나. 내가 출발점이 아니라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출발점이 아니에요. 그런데 악마는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 악마 자신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이미 영원한 저주의 형벌, 지옥에 집어넣기 위해서 주께서 악마라는 피조물에게 이미 일을 벌였다는 거예요. 유다서에 보면 나옵니다. 어두운 음부에 가두기 위해서 악마를 만들었다고요.(유1:6-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는 악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지옥은 만들어 놓고 누굴 집어넣는 게 아니고, 누구 꼭 집어서 "너, 너, 너" 네가 있어야 지옥이 지옥답게 되고 저주가 저주답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악마라는 피조물을 사용하신 겁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그런데 마귀 입장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지는 이미 확정됐죠. 변동이 없어요, 자기 운명은. 귀신이 예수님 만났을 때, 그 귀신이 스스로 고백했어요. "아직 우리가 망할 때가 안 됐는데 왜 벌써 오십니까?" 그리고 마귀 쪽에서 고백을 했어요. "예수여, 당신은 나와 상관없잖아요."
아...이 발언요, 이 발언이 49제 지내는 일가친척 입에서 막 나와요. "너나 교회 가, 나는 이미 종교 있어. 이 불심 깊은 집안 네가 뻔히 알면서도 배신은 네 쪽에서 했지,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리 불도를 지켰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죠. 그 말을 줄이면 뭡니까?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하고 볼 일 없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상관이 없는 그에게 만약에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것 같은 넉넉한 집안이 후원을 해주면서 교회를 다니라고 권했다 칩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면, 그 사람은 교회 다니는 귀신이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귀신이 되니까 그 속에 뭐가 있느냐? 악마의 근원적인 본성이 교회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걸 여섯 글자로 하면, ‘신에 대한 증오’. “내 인생 조진 거 다 당신 때문이다.” 증오. 악마는 확정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악마는 이미 저주 받기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저주받은 악마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충분히 악마 심정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악마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러운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악마라면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뭐라고 자기 분노를 표현하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나 조졌다. 당신이 뭔데 나를 심판해?" ‘당신이 뭔데 나를 심판해?’라는 말은 오히려 주님을 정확하게 증거합니다. 자아인 내가 자아인 나를 심판할 수가 없고, 심판주는 따로 있어서 그쪽 결정에 우리가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죠. 자인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는 확정되어서 오는 거예요. 확정적이에요. 결정된 데에서 자유가 옵니다. 변동과 변화가 삭제될 때 자유가 와요. 오전에 구름이 껴서 비가 약간 왔다고요, 지금은 또 맑다고요. 이렇게 자연은 변화가 심하잖아요? 구름 낄 때도 있고, 그럼 자유는 뭐냐? 아예 그 변화 요소가 다 삭제되고 결정된 것을 바로 직통으로 바라볼 때 그때, 자유입니다. "아, 끝났구나.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이 자유예요. "끝났네. 내 행동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었네."
내가 내 결정을 하겠다는 건 자아예요. 이건 마귀의 품성이고 마귀의 본질입니다. 지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거기에 놀아나고 있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당 가고 교회 갈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결정 안 하면 달리 결정할 자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해야 될 그런 부담을 지고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자기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보통 믿는다고 하잖아요? 이미 인간은 믿어요. 누굴 믿습니까? 나 외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지옥 가도, 지옥 갔을 때 위로할 자는 나밖에 없어요. 내 곁에 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밖에 없어요. 이런 뜻입니다. "감히 나를 심판해? 좋아, 그러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빠이빠이다."
그것이 인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자아는 자아의 본성을 티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친척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의 신앙관을 나타낼 때 마귀가 교회 갔을 때 어떤 고백을 하면서 자기를 사수하느냐를 그대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고 소망합니다. 됐지요?“ 끝에 이럽니다. ”이러면 됐잖아.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이러면 됐잖아."
그런데 주님의 스케줄은 율법이 투입되면서 주님의 스케줄대로 되는데, 성도한테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자아'가 없어져 버려요. 너와 나의 관계도 자아가 있을 때나 성립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면, 자아는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내가 답답할 때 찾는 대화 상대가 타인이에요. 이게 없으면 개라도 키우든지 하죠.
그래서 개를 개로 보지 않고 사람처럼 다루는 이유가, 답답할 때 해소할 곳이 없어서 그래요. 이거는 종교하고 상관없어요. 답답하고 아쉬우면 누구나 찾아요. 그런데 찾으려고 하니까 모양새가 빠진다, 위신이 안 선다, 그러면 좋게 말하는 게 아니고, 욕을 해버리죠. "자식이 돼가지고 전화 한 통 없다. 내 너 키울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부모한테 이렇게 섭섭하게 대하다니." 이러면서 하루 24시간 계속 보내는 거죠.
그러다 아들, 며느리가 "어머님 잘 계십니까?" 하고 양손에 선물 보따리 들고 오면 앞에 욕했던 거 전부 다 무효. "아이고, 바쁜데 왜 왔냐, 전화만 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요. 방금 욕했던 건 다 취소에요. 방금 욕했던 건 옆에 강아지가 다 듣고 있어요. 앵무새 키우면 안 돼요. 내 본심을 상황 파악 못하고 다 이야기해버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니까 율법이 투입되는 것은 마지막에 저 자아라는 게 성립이 안 되면, 자아가 없으면 뭐가 없어요? 타인이 없지요. 근데 이 타인이라는 것은 남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주인인 자아가 기분 좋으라고 타인을 투입하는 거거든요. 심지어 안 찾아오면 돈을 들여서라도 타인을 만들어요.
대표적인 게 술친구 같은 거. 술친구는 돈 떨어지면 끝나는 겁니다. 기마이 쓰고(선심쓴다, 한 턱 낸다) 하는 건 내 자아를 외롭지 않게 너희들이 주변에 좀 깔아달라는 말이거든요. 일종의 자기 자신을 조선시대 왕처럼, 왕 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왕 노릇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자아가 없어지면 타인이 없지요.
그래서 율법을 압축하면 뭐냐 하면, “네 이웃을” 그 다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것 빼놓고, 두 번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데 이것을 왜 할 수 없느냐 하면, 이웃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출발한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에 의하면, 나에게서 출발한 것은 반드시 어디로 소환되느냐 하면, 내게 유리한 쪽으로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웃은 아무리 사랑해도 내 사랑의 한도를 못 넘습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식으로 ‘네가 율법을 지킬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울법을 가지고 지적해 주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은 기본적으로 안 되고, 무슨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합니까? 목숨 버리면 소용이 없는데. 목숨을 버리기까지 신을 사랑한다면, 신이 주시는 대가는 뭐냐? 아니, 내가 없어졌는데 대가가 나한테 돌아올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위치, 신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식사할 때 본인은 서 있든지, 밥을 안 주든지 관계없이 주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종, 또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말로 하면 '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주인의 상에서는 아들도 같이 먹어요. 주인과 아들이 같이 밥상머리 하고 있는, 거기서 떨어져서 갖다 버리는 쓰레기라도 혹시나 나한테 떨어져서 건질 수 있을까봐서 딱 자리 잡고 있는 개, 개는 어떤 경우라도 떨어지는 것만 주워 먹어도 감지덕지해야지, 감히 개가 주인 상 옆에서 "우리 겸상합시다." 하면 호되게 맞아야 돼요. “네 위치 지켜!”
종의 위치에 가지 않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아들은 종의 위치에서 양자로, 있을 수 없는 호적 정리에서 등장한 거예요. 호적 정리가 되려면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종이 아들 되는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던 자리가 마귀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만약 아들이라 한다면, 악마도 천국에 넣어줘야 돼요. 그게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를 배제하면 그건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종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율법의 정신이에요. 아들이 없으면 아들 없는 거예요. 없는 아들이 새로 생기는 것은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혼인을 해서 그것도 여자가 생기면 안 되고,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를 해야 아들이라는 명분 자리가 생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아들 없는 자가 천국 가고, 아들 있는 자는 지옥 가고,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들 자리에 하늘나라 호적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제가 호적상이란 말을 했잖아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다른 호적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왜, 그 이름이 호적이 되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확정된 아버지고, 확정된 아들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사이가 호적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걸 제가 어제 천문 단위, 영적 단위라 했잖아요. 정확하게는 언약이죠. 언약이 바로 하나의 단위를 구성해서 그 구역, 곽이 짜인, 구역에 짜인 아버지 자리에 아버지, 아들 자리에 아들 오게 되면 그 곽 자체를 딱 들어버리면 그게 바로 구원되거든요, 그 관계가.
그래서 그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아들 자리가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 부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자는 그건 저 지옥 갈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불러요.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누가 와야 되느냐 하면, 보통 성령이라 하잖아요? 정확히 이야기합시다. 아들의 영이 와야 돼요, 아들의 영이.
아들의 영이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오게 되면 이거는 신기한 일이고 놀라운 일, 기적적인 일이에요. 성령이 와야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은 성령 오지 않으면 뭐가 된다?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들이 될 수 없어요. 이미 확정 난 거예요. 그냥 종입니다. 그 대목을 여러분들이 아는 대목이니까 뭐 찾지 맙시다.
로마서 8장에 있잖아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아들 같으면,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만약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경우가 동일하게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 아들의 영광, 아들의 영광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을 너도 함께 받아야 되느니라. 섭섭하냐?” 섭섭해 하실 필요 없어요. 왜?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족히 비교가 안 돼요. 비교가 안 되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와요.
요한복음 16장, 여자가 해산할 때 상당히 힘들고 아파도, 해산하고 난 뒤에는...16장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반드시 무슨 코스를 거쳐야 돼요? 애통이죠.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근심이 도리어 뭐가 돼요? 기쁨이죠. 그 기쁨 바닥에 뭐가 있어야 돼요? 근심이 있어야지, 근심 빠진 기쁨은 이거는 가짜 기쁨이에요.
근심하면서 무엇의 무능력을 느끼는가?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걸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구원이 내 일이 아니라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책임감 자체가 뭐 책임질 수도 없어요,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구원 될 능력이 애초부터 안 되는 신분이었으니까 절망할 것도 없지요.
뭐 기대해 볼만해야 절망하겠는데, 우리는 기대하지 말라고 태어났거든요. 천국 같은 건 아예 우리한테는 허용도 안 되고 그럴 권한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근심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 다음에 그 근심하는 이유는 뭐냐? 주의 나라 다 좋은데, 문제는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라든지 그러한 재주가 나한테 없다 하지 말고, 자아한테는 없는 거예요, 자아한테는.
그런데 기쁨이 되고, 21,22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은 네가 나에 대한 기쁨을 네 능력으로, 네 수완으로 유지하려는 쓸데없는 짓은 할 수가 없다는 거, 이게 왜냐하면 자아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고 내가 잘 갖춰야 될 문제가 아니라, 시작이나 끝이 다 주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일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에게는 들이닥친 것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악마한테 저주를 내리죠. 그러면 악마의 저주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4절에 의하면 ‘땅의 밀착성 삶’입니다. 땅의 밀착성 삶, 갈수록 땅에 쫙 들어붙어 있는 삶, 그게 극단화되면 뭐냐? 너는 흙이니 어디로 돌아간다? 흙으로 귀환된다, 또는 흡수 통합된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없고 뭐가 있느냐? 사라짐이에요. 문제는 아래쪽으로, 우리가 익숙했던 삶, 땅 쪽으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전혀 예상도 못한 천국 쪽으로 사라지느냐 그겁니다. 땅으로 사라지게 되면, 그 땅에 사라지면 땅은 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냐? 악마가 먼저 와서 기다려요.
악마의 종으로 태어나서 악마가 시킨 대로 하는 너희 패거리끼리 영원토록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아라. 그러니 이 자아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 본래의 자리, 누구의 종의 자리로 자아가 주어지는 거예요. 천국 가도 우리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불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교는 뭐라 하냐 하면, 인간은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사라지면 자아도 사라진다, 이렇게 해가지고 자기의 마음의 고통을, 번민을 여기서 잠재우려고 해소시키려는 하나의 수완이죠. 그 방법이 불교 철학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에요. 모든 고통이 나한테 오니까 나만 없어지면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도 없어지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죠.
그런데 성경은 슬픔이 없으면 안 돼요. 잃어버림이 없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그것과 연관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안 돼요. 죄가 있어 줘야 의가 되는, 그 의가 되는 그 권한은 내 선에서 넘어섰다는 것을 알거든요.
천국 가면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종으로서 천국에서 주인님이 누리는 것을 같이 누리면서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이거는 자식이 될 수도, 아들, 형제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맏아들로 자처하는 동시에 맏아들이니까, 맏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누가 있단 말이죠? 둘째 셋째 있겠지요. 양자들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친히 마련한, 자신이 맏아들로 들어섬으로서 없었던 형제, 주님의 형제 자리가 생기면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전에 악마의 종, 죄의 저주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죄 사함을 통해서 그 자리를, 예수님과 연장된, 연속된 주님의 세계 안에 이렇게 포함, 합류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죠.
요건 좀 억지스러운 예인데요, 좀 억지스러워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 아이 다 키우고 "나도 뭐 조금만 사업 한 번 해 볼까?" 이래 가지고 만약에 대전에 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나는 저 지하의 분식집 하나 챙겨 볼까?’ 했다고 칩시다.
만약에 신세계 백화점이 불나면 같이 불나죠? 신세계가 멀쩡하다면 내 분식집도 같이 있죠? 그러면 신세계 백화점에 종속된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 관계는 자유가 돼요, 자유가. 왜? 어디 가도 나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소속이, 자아가 있는데, 이 자아 소속이 자아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싱싱 고향별곡>이라고 대구 지방 방송의 시골 노인네들 이야기 하는 프로인데, 지난 토요일에 아주 특이한 사람이 나왔어요. 보통 이야기하면 누구 자랑하냐? 자식 자랑해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통 "우리 애가 서울 가서요, 용돈 보내주고 자주 전화 오고, 또 우리 애는 국문학 박사고..“ 하면서.
그런데 이번에 나온 80 넘은 어머님은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 시동생 자랑을 해요. 사회자가 시동생 말고 아들 자랑하라고 해도 무조건 시동생이에요. 시동생이 자기 키운다고 고생한 거 알아줘가지고 지금도 매달 돈을 보내준대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 그러면서 시동생 자랑을 하는 거예요. 자식 이야기는 묻지도 않고, 나중에 물어도 이야기 안 해요. 그저 그 시동생 이야기를 해요.
첫 번째 이유가 뭐냐? 남편이 무능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무능함을 시동생이 채워줬기 때문에 이거는 시동생을 남편처럼 섬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할머니의 자아는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시동생이죠. 이 할머니는 누구의 증인? 시동생의 증인, 무슨 영을 받았다? 시동생의 영을 받은 거예요. 인생은 시동생이 알아서 다 해줘요.
평소에 그런 약속을 했겠지요. "형님 나이가 이제 팔십 아홉인데, 돌아가시면 우리가 책임져 줄게." “고맙다, 시동생아” 이렇게 된 거예요. 타인은 내게 필요한 거예요, 내게.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를 사랑하는 보조 배경이 타인이에요. 만약에 나한테 돈 떨어졌다, 그럼 돈 떨어진 인간은 쓰레기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욕이 아니에요.
그럼 남이 돈 떨어진 인간을 부담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겠습니까? 느끼죠. 밀어내죠. "어디 짐이 나한테 찾아오나, 우리 좀 자주 만나지 맙시다." 하면서 밀어낸단 말이죠. 뭐 ‘좋았습니다, 훌륭합니다.’ 하는 건 나중 이야기이고, 일단 돈 떨어지면 사람 아니에요. 끝까지 아파트 하나라도 버티고 있어야 효도 받는 겁니다.
그 돈 많은 시동생한테 나중에 나이 많아가지고 요양병원 갈 돈이라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시동생을 주로 섬기고, 자기 자아는 끽소리 내지 말고 기어 들어가야 되거든요. 율법은 이룰 수가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종, 마귀의 심보, 마귀의 심정이 인간 속에 들어왔지요. 종이니까.
이걸 자꾸 제 얘기라 생각하지 마시고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종이었더니’, 또는 ‘죄가 왕 노릇 하고 있으니’ 우리는 신하죠. 죄를 쥐고 있는 것은, 시작은 저주는 마귀부터 했으니까 마귀가 왕이잖아요. 왕은 반드시 누가 필요해요? 신하가 필요하잖아요. 그 졸개가 누굽니까? 인간이잖아요.
그 관계가 뭐냐? 선악 체제 관계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도 했는데, 잠깐만 설명하겠습니다. 선악 체계는 ‘나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이런 의식, 좋은 면 나쁜 면 둘 다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 왜? 좋은 면이 있으니까. 내가 아주 나쁜 짓만 한 건 아니니까. 좋은 것을 내가 왜 버려? 나는 좋은데. 그리고 내가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그 점도 얼마나 장점으로 추가가 되겠어요? 이게 선악 체계예요.
이게 선악 체계니까 이 선악 체계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에 선악 체계가 다 덮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했는데, 그걸 오히려 써먹고 있어요. 다 덮어버리고 세밀한 데에. ‘거실 등을 끄는 게 놓을까요, 켜는 게 좋을까요?’ 이것도 선악체계 아닙니까? 매사에 있어서 내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그걸로 도배를 하는 거예요.
식사 준비한다든지, 물건 고를 때 전부 다 좋은 면, 나쁜 면, 다시 말해서 ‘이 좋은 면이 나한테 어떤 유익한 미래로, 나한테 복으로 돌아올 것이냐’를 계산하면서 행동하는 거, 이게 바로 선악 체계입니다. 그 선악 체계가 누구의 본심이라고요? 악마의 본심, 마귀의 본심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을 해야 되는데, 마귀가 그 선악 체제 정보를 빼돌려가지고 "네 심판은 네가 알아서 하면 돼. 하나님이 아는 선악 체계를 네가 알고 있으니까 굳이 누구로부터 심판받을 필요 없고, 네가 알아서 행동하면 돼." 이게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아닙니까? 그럴 때 뭐가 높아진다? 자아의 주체성이 높아지겠죠.
선악체계에 대해서 이미 마귀의 본성이 주어졌단 말이죠. 그러면 창세기 3장 15절에 마귀만 있습니까? 또, 여자의 후손이 있지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기존 노선의 자손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말은 주께서 기존 노선을 부정하는 거예요. 남자 계통의 자식들을 안 받는다고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여자의 자손이 등장해서 생명나무의 원칙을 거기다가 적용합니다. 하려면 먼저 뭐부터 해야 되느냐? 이 자아가 마귀 종이잖아요. 자아에 대한 해체를 해버리는 거예요. 해체하는 방법은 7입니다. 칠칠절, 7. 오늘 본문 신명기 16장 앞에 보면 안식일이 며칠마다 돌아옵니까? 7. 왜 자꾸 주님의 스케줄에 의해서 율법의 7을 활용하고 적용시키는가?
7을 적용해 버리면 7일 만에 한 창조가 어디로 돌아가느냐, 환원되느냐 하면, 혼돈으로 돌아가요. 혼돈. 왜? 주님이 창조할 때 어디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혼돈에다가 창조, 또는 질서, 또는 창조질서라 할 때, 중간에 뭐를 집어넣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을 집어넣어서 혼돈에서 질서가 됐죠.
그러면, 세상이 혼돈 쪽으로 간다는 말은 뭐가 빠졌다? 말씀을 품어야 될 질서가 말씀을 배격해 버린 거예요.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어 버렸어요. 그러면 이 질서는 뭐로 환원됩니까? 혼돈으로 환원되는 거예요. 혼돈은 무질서가 아니고, 악마와 단짝이 된 것이 혼돈이에요.
자, 그럼 그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혼돈부터 출발해 봅시다. 인간은 이미 혼돈되었습니다. 혼돈부터 출발하게 되면, 1번, 2번, 3번 순서로 질서가 잡힙니다. 1번은 뭐냐 하면, 혼돈에 있을 때는 악마의 종이라 했지요? 그럼 악마의 종이 뭐가 주인이 되느냐? 내가 나한테 주인이 되는 거예요. 주인이 하는 일은 뭐냐? 측정이에요. 측정 다음에 판단하게 되어 있어요.
측정하고 판단하는 거, 아까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 보여주면 믿겠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 나왔죠. 이게 뭐냐? 측정할 때 자아는 절대자가 돼요. 판단자가 되고, 심판자가 돼요. 측정, 측량할 때, 이걸 뭐라 하느냐? 이걸 과학이라 합니다. 과학의 근거는 뭐냐? 과학은 합리성과 이성이에요. 판단하는 이성. 합리성의 판단, 이게 과학입니다.
과학에서 7이라는 것은 의미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 없어요. 과학에서는 60분이에요. 왜 60분, 60초냐? 자연 현상, 천문학, 과학이 천문학에서 나왔으니까 그것이 농사짓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12, 열두 달. 점점 과학이 발달하니까 자연 세계에서 농사짓는데, 고기 잡는데 필요한 숫자들을 발명했습니다.
처음에는 1부터 10까지, 12345678910 그리고 더 발달하다보니까 앞에 0이 하나 더 붙었어요. 0보다 더 발달하니까 현재는 허수 i가 있습니다. 제곱해서 마이너스가 나온다. 이건 있을 수가 없지요. 모든 수를 제곱하면 플러스가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2를 제곱하면 –4가 아니라 +4예요. 그런데 제곱했는데 마이너스가 나온다?
이건 현실에선 있을 수 없지만, 이 허수가 없으면 오늘날 로켓을 쏠 수가 없고, 컴퓨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의 신약(新藥), 신제품이 만들어지지가 않습니다. 모든 과학은 이제는 없는 것도 내 머릿속 이성에서, 자아에서 만들어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밀착형 생활에서 편리하고 유리한 게 만들어진다, 이게 과학입니다.
그런데 이 자연세계를 측정하는 과학에다 의미를 보태는 것이 인문과학입니다. 철학, 종교, 신학, 법학, 언어학, 그리고 예술, 인문학, 이 모든 것은 의미를 갖다 붙이면 이렇게 돼요. 측정된 것에 의미를 갖다 붙이면. 그런데 과학적으로 측정된 것, 곧 진리에다가 의미를 부여할 때, 깊은 허무에 빠져요.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 언어거든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수많은 언어를 생산해내고, 온갖 용어, 테토녀(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는 여자, 남자 같은 여자, 드센 여자) 그런 용어도 막 사용하고, 자꾸 만들어 내는 이유가 점점 더 허무하기 때문에 그래요. 허무함의 늪에 빠지는 겁니다. 땅은 있고 자연은 있는데, 그 땅과 자연에 사는 나는 자연에 없는 의미를 내가 만들어 냈잖아요.
내가 만든 의미가 자연 현상과 자꾸 어긋나니까 허무함을 느끼는 거예요. 자연을 정복하려는, 정복했다고 우기는 나는 나의 허무를 정복 못 한 입장에 있다, 이 말입니다. 공부하고 돈 벌고, 친구도 많고 제 하고 싶은 거, 파크골프부터 해서 하고 싶은 거, 놀 거 다 해봐도 왜 자꾸 모든 게 허무하지? 친구와 웃을 때는 그렇게 즐거웠는데, 돌아서면 헛되고, 헛되고, 허무한 거예요. 이게 언어의 허무성입니다.
첫 번째, 과학은 측량하죠. 두 번째는 언어로 분석해요. 누구 분석? 나를 분석해요. 분석하는데, 분석하는 자체가 정신병이 되어가지고 더 허무해져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혼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드디어 말씀이 투입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니라.(요1:14)” 육신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창조주가 와요. 창조주는 숫자로 7이죠.
그 창조주 앞에서 “나는 7인데, 다 이루었고, 나는 완성인데, 너는 6이고, 5고, 4고, 3이고, 2고, 1이고..” 혼돈의 자투리예요. 만약에 우주에서 미사일이 인공위성과 충돌하면 인공위성은 조각조각 파편이 되듯이, 인간은 말씀 앞에서 뭐가 되어야 돼요? 자아로 다시 조합하기가 곤란한 파편 조각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그 파편 조각을 보면 다 추억 조각이고, 그때 내가 그렇게 애를 썼던 의미 조각이고, 내가 모았던 돈 조각이에요. 말씀이 오지 않으면 허망하니까 이런 나의 의미의 조각들, 돈들을 모아서 절에 갖다 바치고, 종교 놀이를 합니다. 종교는 허망한 나를 다시 무언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자아의 굳건함, 곧 자아의 굳건함은 ‘내 속에 악마 있다! 내 속에 마귀 있다. 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것.
심지어 개도 인간하고 같이 살면 자존심이 생겨요. 사람 침대에 누워 자다 보면 개집이 제 집이 아니라 자기가 침대의 주인이라 생각해요. 자기를 신으로 모시는 데에 그 돈, 제 돈도 아닌 엄마 돈을 자기를 위대하게 하는데 과감하게 쓸 때는 쓴다는 그 허세 있잖아요, 허풍, 허풍을 발휘하는 거죠. 마귀 놀이죠, 마귀 놀이. 아주 신나는 마귀 놀이.
그래서 나오는 것은 ‘나는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다, 나는 이겼다.’ 이게 바로 의미 분석이에요. 자기에 대한 의미 분석. 그런데 말씀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네가 죄의 종이라는 것을, 너는 소경인 것을 까발려 주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자아의 굳건함은 성립이 안 되죠.
7이라는 율법을 가지고 계속해서 7이라는 안식으로 쪼개고 쪼개면 우리는 하나의 부스러기이고, 조각, 파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깨져야 마땅한 주님이 오로지 하나 되셔야지, 그 앞에서 내가 내 자아를 조립할 가치도 없는, 주님이 깨뜨려 주시는 그 자체만으로 영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그러한 관계, 나의 세계는 날아가고, 변화산에서 봤던 주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같이 임하게 되는, 그것이 복음이 자아를 해체해줄 때, 진리가 나를 해체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10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6강) 창6:9(동행자)20251229b(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복음이냐 교회냐』 72페이지, [죽음으로 이끄는 삶]이라고 했는데, 사실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게 없고 진짜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만이 진짜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 죽음의 그림자’. 그림자의 특징은 본체와 헤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이 죽음에 의해서 그림자가 생겼으니까 죽음 쪽에서 동력, 힘이 나와요. 예수님이 죽어서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 있잖아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주님이 감출 이유가 없죠.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죽음에서 힘이 나오고, 그 힘이 나온 그림자, 결과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꼼짝 마라’죠.
주님이 일하기 때문에 성도가 일하지 않을 수 없고, 그건 성도의 일이 아니에요, 본인이 결정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결정한 일이 새롭게 우리의 삶의 상황 속에서 불쑥불쑥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노아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노아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노아가 홍수 이전에 분명히 자기의 터전이 있었어요. 땅이 있었어요. 가족들이 살아야 되니까. 노아도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야 애를 낳죠. 장가가고 다 했는데 주님께서는 노아 있는 그 시대를 물로써 심판하면서… 그들의 죄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한 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아, 이건 뭐… 아예 심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동안 너희들은 주님 심판은 필히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재료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의미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망발이죠. 억지스러움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슬픔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죄다.’ 여기서 ‘슬픔’이라고 표현했잖아요. 이걸 ‘희생’이라고 표현하게 되면 성경에서 전체적인 핵심 된 노선이 이 노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희생’이라는 말을 해도 되는데 왜 ‘슬픔’이라고 하느냐?
희생은 다 아는데 희생을 백날 이야기해봐도 우리는 안 슬퍼. 뭔가 말은 알고 희생된 건 아는데 우리는 신나. 재밌고 즐겁고. 뭔가 괴리된 느낌, 따로따로 노는 느낌이죠. 그게 노아와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인데, 노아는 ‘동행’이 된 사람이에요. 노아는 주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동행했으니까 노아는 주님의, 하나님의 그림자처럼 밀착해서 항상 같이 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른발 내밀 때 오른발 내야지 왼발 내면 이건 어긋나잖아요. 저쪽에서 먼저 주가 되시고 이건 보조가 되어야 돼요. 메인이 되고 서브가 되어서 메인이 움직여야 같이 움직일 때 누가 봐도 ‘동행’이라는 상황이 성립되는 겁니다. 동행. “누가 했어?” “보이지 않는 주님이 했어.” 이렇게 되어야 동행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했어.”하면 안 되죠. “내 아이디어야.”하면 안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 보이는 것은 노아가 보이잖아요. 하나님이 안 보이죠. 그럼 하나님 입장에서는 보이는 노아를 통해서 노아가 한 게 아니고 노아와 동행하는 주님이 했다는 그 의미를 이전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 자기의 뜻이 땅에 분명하게 드러나거든요.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노아를 평가하고 측정하고 판단하는 것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 못할 일이 노아를 앞장세워서 일어나죠. 그게 노아 홍수입니다.
노아를 빼고 홍수를 일으킨 게 아니고, 노아를 앞장세워서 홍수를 일으키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이 신약시대에 보편적으로 하면 성령의 일이에요. 성령의 일이 분명히 성령 혼자 해도 되는데 누구를 앞장세워요? 못난이, 자기밖에 모르는 고집스러운 죄인 우리를 앞장세워서 주께서 이전을 시도하는 겁니다.
분명히 남들 보기에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나오는 건 거기서 거기지, 뭐. 의식, 의도? 나도 같은 인간이니까 이해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의미에 포함되지 않는 낯선 사태와 사건을 성도를 통해서 일으켜버립니다. 이걸 고급 용어로 표현하면 두 자입니다. 두 자로 하면 ‘실성’. 네 자로 하면 ‘실성했다’. 미쳤구나.
사회적 공유라 하는 것은 의미가 통할 때 사회적 공유가 돼요. ‘어머니 제삿날에 오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영어입니까? 뭐 우즈베키스탄 말이 아니잖아요. 의미를 아는 거예요. ‘아, 어머니 제삿날에 오라고 하는구나.’ 의미를 안다고요. ‘그런데 안 가.’ 이건 실성한 거예요.
분명히 저쪽에서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를 아는데, 만약에 참석을 해버리면 사회성이 그대로 공유가 돼요. 그러면 누구하고 동행하죠? 가족과 일가친척 형제들과 공유하는 게 돼요. 공유하게 되면 거기서 특이하고 기이하고 낯섦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지요. 이미 한통속이니까. 이미 같은 바벨탑을 쌓고 있으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집안이잖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맨날 무슨 슬픔이냐? 자기 슬픔에 대해서 ‘누가 위로해주지?’ “형님, 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돈으로 해결 안되는 게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위로해왔던 거예요. “형님, 동생 돈 많은 걸 자랑해도 괜찮아요. 이런 동생입니다. 형님 인정해야 되죠?” 이런 거. “그래, 네가 우리 집안의 영웅이다.”할 때 이게 의미의 공유가 돼요. “야, 형님 값한다. 형님 값을 하네. 이 동생을 알아주네. 아이고, 내가 형님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특히 형수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고. 형님은 틱틱거리는데 형수님이 다 처리하고 중간 매개과정을 아주 원활하게 해서… 우리 떠나지 맙시다, 이 집안을.” 뭐 이런 식으로 잘해주니까 되는데….
지금 낯설고 새로운 원칙이 안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희생에 대한 어떤 의미의 모독이에요. 주일 낮 설교한 것처럼 눈을 거기로 못 돌리게 해요. 힘들어도 어려워도 하니는 달리듯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 인간끼리 해결하면 돼요, 인간끼리. 그럴 때 가족의 정은 더욱 더 돈독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낯설지 않아요. 이미 경험치로 우리는 몸으로 습관화되어서 무슨 말을 하면 다 납득이 되는 거예요. 야, 집안이라는 것이 함부로 떠날 자리가 아니구나.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온 것은 불 지르러 왔다고 해놓고 그 다음 나온 말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렇게 나올 때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조치는 어떠했습니까? 바로 그런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자기 사회에서 추방시켰죠.
추방시킨 그것이 희생의 성취가 되고 말았어요. 희생의 성취. 너희들은 왜 내 슬픔에 참여할 의사가 없느냐? 인간은 기뻐하고 싶지, 슬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죠. 슬픔의 추방됨을, 자진해서 추방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죠? 상식이죠.
그런데 그 상식을 로마서 8장에선 깹니다. 로마서 8장 한번 봅시다. 8장 36절,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보세요. 도살할 양 같이 취급받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집안 떠나기 싫어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우리는. 남한테 쓸데없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칭찬받고 싶어요. 그것 때문에 타인이 존재하거든요. 타인이라는 것은 내가 답답할 때 하소연할 수 있는 대상이에요. 그게 친한 사이 아닙니까. 친한 친구 아닙니까.
사람한테 그렇게 못할 때는 교회 아래층에 있는 데에 새벽기도 드리는 그때 가서 하나님한테 하소연을 해요. 그때는 기도 수준을 떠납니다. 오열이에요, 오열. 오열은 뭐냐? ‘제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녀서 교회에 충성, 봉사 다하고 있는 여자 분이 결혼한 지 19년 동안 애가 안 생겼어요. 시험관을 5번 했습니다. 이번에 애 생겼어요. 그래서 이번 주 <인간극장>에 나옵니다. KBS에서 7시 50분에 합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만났어요. 본인 입으로 ‘나는 기도를 한 게 아니고 오열을 했다.’ 어떻게 나보다 믿음 없는 여자는 순풍순풍 애만 잘 낳는데, 어떻게 성가대 봉사부터 봉사, 봉사 다하고 헌금하고 충실하게 십일조 다 했는데, 내가 원하는 애는 없습니까. 내가 한나도 아니고.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슬픔은 모르고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들처럼 인간 사회에서 기뻐하는 것 나도 기뻐하고 싶고 남이 기피하는 슬픔은 나도 기피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 몸 자체가, 성경적으로는 뭐 주의 종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동행하고 있다는 감이 전혀… 나도 원하지 않고 그런 낌새도 못 느끼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그 자기 백성에게 어떤 조치를 하겠습니까?
딴 거 안 해요. 동행이라는 사실을 현실화시키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하겠죠. 동행을 집어넣습니다. 동행을 집어넣으면 주인이 바뀌어요. 자아가 주인이 아니고, 동행하시는 분의 종이 되고 나는 시다바리가 되는 거죠. 내 인생은 없습니다. 발을 맞춰야 되니까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동행하시는 분이 가는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아버지 계신 곳으로. 천국으로 결정되었어요.
이게 바로 죽음으로 이끄는 삶이에요. 곧, 영생으로 이끄는 삶. 나의 죽음을 죽음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자신의 죽음만 죽음으로 간주할 때 내 죽음의 의미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의 의미를 대체해버릴 때 그 끝은 뭐냐?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걸 알고 뭐라고 하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권능은 율법에서 나온다고 언급되어 있거든요.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 말은 죽음의 의미는 율법이 전달해줘야 죽음의 의미가 종착점에 이르러요. 최종 의미가 발생돼요. 그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 제대로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뭐냐? 예수님의 죽음이 주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이 강조점이 돼요. 예수님의 죽음이 없다는 게 아니고, 강조점을 부활로 두었습니다.
제대로 죽으신 분이 제대로 살아야 부활의 나라에 입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개코도 죽음도 아닌데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사로, 야이로의 딸도 죽었죠.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소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 소생한 사람들은 부활에 이릅니까, 아니면 어디에 이르렀어요?
부활의 세계에 간 게 아니에요. 단회적이고 최종적인 그 세계에 간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는 그걸 ‘낙원’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이 있다는 말은 부활과 차별을 두는 거예요. 최종적으로 도착 지점은 부활의 세계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의미를 충족해야 성립되는 세계에요.
그러나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대기된 상태인 낙원 상태는 기다려야 돼요. 기다리는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변화산에서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는 대화 주제가 그거였어요.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이건 아직까지 주님 돌아가시고 난 부활의 세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거예요.
동행하시는 분이 하신 그 일처리로 인하여 동행된 우리가 그 혜택을 받는 원리인데, 혜택을 받을 때 동행한 분이 어디에 도달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동행해주신 분, 예수님이죠, 어려우니까 적을게요, ‘예수님이 끝이 되지도 않았는데 끝이 되셨다’. 인간적 시간에서는 끝이 아닌데 중간에 끝을 만들어버렸어요.
끝을 만들었으니까 만약에 40세에 성령을 받았다면 41, 42, 43,…, 50, 60 더 살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자체적으로? 왜 없느냐 하면 의미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죽고, 나는 동행하시는 분과 함께 죽고 동행하시는 분과 함께 살아났다는 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로마서 6장에 나온 부분이잖아요. 그게 세례 아닙니까.
과학의 반대말은 세례에요, 세례. 과학은 단독자가 측정하지만, 세례는 동행자가 본 세계의 안목을 우리도 같이 성령을 통해서 공유받는 동행이 ‘세례’라고 표현돼요. 세례가 된다고요. 그걸 좀더 쉽게 알기 위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이다’라고 이렇게 긍정적 서술을 내놓잖아요. 이게 바로 동행이 안 된 상태에요.
‘나는 누구냐?’하면 세례 요한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나는 ~이 아니다’고 생각해야 돼요. ‘나는 저기에 있지 않고 나는 그때 있지 않고 나는 여기 있으며 이때 있다.’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있고 이 시간에 있다는 것은 따로 규정하는 분에 의한 일방적 조치이고 결정이지, 내가 그걸 가지고 내가 마치 주인인 양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자꾸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내 곁에 계신 분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곁에 계신 분을 소개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마귀고 이 세상은 자꾸 물어요. “너 누구야?” “너 체중이 얼마야?”하면 “나 체중이 62입니다.” 이러면 안 되고 “61은 아니고 63은 아니고 61.7은 아니고…” “아니, 그렇게 부정적으로 대답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답변하면 안 됩니까?”
나는 긍정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안 됩니다. 왜? 나는 보조니까요. 내가 증거해야 될 것은 내가 아니고요, 내 주인 되시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 옆에 붙어있는 입장에서는 나는 아니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예를 하나 들게요.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채우는 것은 우리가 아니에요. 동행자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내용이 채워져야 되는데 그 만든 내용이 뭡니까?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입니다.
그럼 듣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수고와 슬픔 뿐인 거 왜 살아? 빨리 죽지.” 이러거든요. 그 사람 말은 잘못된 거예요. 칠십이고 팔십이고 살아온 것이 너 보기에는 내가 노력해서 산 것 같지만 수고와 슬픔을 계속 겪게 하기 위해서 칠십 년 걸렸고 팔십 년 걸린 거예요. 앞으로 또 한 이십 년 더 걸릴 수도 있어요. 아이고, 이십 년 안 된다. 실례다. 삼십 년으로 바꿀게요. 백 살까지 사세요. 나란히. 있는 돈 다 까먹고. 제주도 오렌지 밭 다 팔아먹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살아봤자 주님이 이 땅을 경유할 때 수고와 슬픔 뿐이었잖아요. 그것을 동행자가 맛본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동행하고 있느냔 말이죠. 그래서 노아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물 심판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어요. 자기가 살면서 가꾸었고 경작했던 그 토지, 논밭 있잖아요, 홀라당 다 날아갔습니다.
‘아이고, 노아 너는 봐줄게. 네 밭 빼놓고 물에 잠기게 할게.’ 이런 거 없어요. 그들이 당한 것 똑같이 다 당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이유가 노아도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똑같은 입장이에요. 동행자가 있느냐, 동행자가 없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네 주인이 따로 있느냐, 아니면 네가 주인이냐 그 차이점이에요. 그 차이점입니다.
그러면 뭐 교회 나와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또. 그 주인님이 겪었던 그 슬픔과 수고를 동행자 되는 나에게 안겨줄 때 그걸 감사히 기꺼이 받을 용의가 되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걸 어제 마가복음 10장 39절에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잔을 너희가 마시려니와.” 내가 마신 잔을 마시는 것을 세례라 했어요.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같이 그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이제 얼추 알죠. ‘나는 누구 종 되는 것은 귀찮고 나는 뭐든지 내가 주인 노릇하고 싶다.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도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그렇게 가고 싶다. 내가 알아서 주님을 사랑해서 가고 싶다.’ 그런 게 있죠. 그러나 그건 아니라는 걸 여러분 아시죠?
동행자가 없이 단독자거든요. 우리는 단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단독자 성품이 우리에게 맞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많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서 ‘나한테로 너는 오지 마. 너는 와.’라고 우리가 선택한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희망사항인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이러한 단독자에서 동행자로 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오겠습니까? 원치 않는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됩니다. 원치 않는 상황이.
그럼 우리는 그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강력하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옛날 식으로 살았던 것,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 인생이 뭐가 어때서? 뭐가 문젠데? 나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팔았다. 나는 단독자 입장에서 아무리 따져도 이게 하자 있다는 것, 이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난 못하겠다. 뭐 회개하라 하는데, 대전역에서 회개해야 구원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한 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애 키우고 이거 뿐인데 이거 회개하라 하면 하지 말라는 말이랑 똑같은 말이거든요. 이거 말고 할 게 뭐가 남아있는데? 없잖아요. 없죠.
그러니 회개가 성립이 안 되는 거죠. 좀 나쁜 짓한 거 이런 건 반성하지만 회개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지금껏 해왔던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앞으로 할 것도 연속선상에서 계속 나쁜 짓만 할 거라는 걸 네가 인정하라는 이야기인데 그게 어처구니없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수고와 슬픔으로 늘 이끌겠다는 것에 대해서 그 말씀을 듣는 내 쪽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수고와 슬픔, 나 그만 할랍니다.’ 이렇게 되죠. ‘나 이 수고와 슬픔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러면 원칙은 세워졌습니다. 동행자는 이미 이 땅을 살아오면서 슬픈 자입니다.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살할 양같이 처분당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도도 도살할 양같이 처분당한다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해놓고 그 다음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 칼” 이 공통점이 뭐에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이 공통점은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과 정반대 상황이 되는 겁니다.
행복은 기쁜 거죠. 기쁨의 반대는 뭡니까? 슬픈 거죠. 우리를 언제든지 슬프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들이닥쳐 놓고 동행해서 뭐라고 하느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했다 이 말이죠. 아, 주님 잔인하시죠. 주님의 사랑을 등장시키는데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남들이 나를 칭찬하고 잘한다 하고 ‘형님 최곱니다’하는 그런 이야기와 병행해서 주님 사랑은 사랑대로 챙기고 세상에서의 인기는 인기대로 한 몸에 다 얻고 상은 모조리 다 휩쓸고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는 방법이 되면 주님의 슬픔과 주님의 희생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 내가 그동안 끌어 모았던 돈과 인기와 체면과 남들의 칭찬, 그것이 너무 아깝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뒷전이 되고 희미해지고 나 몰라라가 되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3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경계선보다 70평짜리 아파트의 경계선이 훨씬 더 길고 챙길 것이 많죠. 경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다는 이야기에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가 양보 못하는 내 것인데 내 것에 왜 두려움이 찾아왔어요? 두려움은 경계가 지어졌기 때문에 저쪽의 미지의 것이 두려움으로 오는 거예요.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두려움이란 내가 미처 감당할 마음준비가 되지 않는 표현’ 이게 두려움이에요. 아들이 자기와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여자가 재벌이에요. 두려워요, 안 두려워요? 두렵죠. ‘도대체 어떤 선물을 해야 저 여자가 성에 차겠느냐? 내가 선물 준 거 다 있을 건데.’ 그런데 여자가 너무 예뻐요. 예상보다 너무 예뻐요. 두려워요. 안 두려워요? 두렵죠. 내 아들 갖고 놀다가 차버리고 또 언제 다른 남자랑 바람피울지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요리를 너무 잘해요.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나 이제 엄마 밥 먹기 싫어. 아내 밥 먹을래.’ 이렇게 아들이 내 품에서, 내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떠날 수가 있는 문제에요.
그러니까 두려움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이미 사전에 뭐가 있다? 단도리 할 내 것이 이미 있는 거예요. ‘여기는 손대지 마세요. 이거는 내 겁니다.’ 하는 게 있음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는 들락날락 더 찾아오는 거예요. 참 내… 그것도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수고와 슬픔과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럼 이게 동행이 아니잖아요. 내 것 내가 지키는 식으로 나는 죽을 때까지 그냥 밀어붙이겠다는 자기에 대한 결의죠. 결심이란 말이죠. 요지부동. ‘하나님이라도 이런 내 결심에 시비 걸지 마소.’ 이걸 아예 선언하고 들어가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개입은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예수님의 개입은… 마귀의 이야기는 ‘벌써 우리를 멸할 때가 아닌데…’ 마지막이 아니고 아직도 내 것으로 즐겨야 될 내 때가 남아있는데 그 마지막이 예상 밖으로 미리 찾아와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반드시 너는 내가 선언한 이 예언대로 도살할 양같이 되게 해주는 쪽으로 내가 너를 이끌 것이다.” “싫어요!”하면 “내가 너와 동행할 건데?” “그러면 지금까지 내 원칙,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내가 너를 죄로 규정하겠다.” “그럼 죄에 대한 대가는?” “심판이지, 뭐.”
그게 노아 심판이에요. 노아 심판. “그럼 나는 심판 받는다는 말입니까?”하면 “옛날의 네가 심판받는 모습을 네가 볼 수 있도록 따로 하나 chamber, 방을 준비했다.” 그 방이 뭐냐? 방주에요. ‘방주 전체가 물에 덮힘. 내가 방주 안에서 냄새나는 동물과 함께 있음.’ 이것은 옛날에 노아가 터 잡고 농사지을 때는, 경작할 때는 생각도 못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심판하는 건 알지만 어떻게 심판한다는 소관은 완전히 동행자에게 일임되어야 돼요. 내가 종인 주제에 거기에 대해서 한 수 훈수하고 이러면 안돼요. 심판하는데, 불 심판하는 건 아는데 어떻게 하느냐? 아무도 거기에 관여 못합니다.
그걸 관여하면 아주 코미디가 돼요. 쇼가 돼요. 주님께서 오실 때 공중으로 끌려갈 때 흰옷 입은 자가 간다 하니까 그때부터 이장림 패들이 흰 여자 소복이 완전히 거덜 났어요. 흰옷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흰옷입고 간다고. 수치 재서 소복 입으면 주께서 부르신다고. 왜? 문자대로 봐야 되니까. 여호와의 증인 따로 없습니다.
인간은 단독자로서 살아온 그 버릇 때문에 자기의 생을 본인이 연출한 거예요. 한 자로 말하면 뭡니까? 쇼. 모든 게 쇼, 모든 게 가짜입니다. 가짜 인간이 가짜 인생을 꾸역꾸역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꾸미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동행자의 눈에서 보면요, 같잖지도 않아요. 웃기지도 않아요.
그러한 예를 제가 하나 들겠습니다. 그 예를 들고, 옮겨지는 방법이 또 성경에 있어요. 단독자에서 동행자로 옮겨지는 방법은 조금 이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말씀드릴 것은 성경 마태복음 25장 25절에 종이 나와요. 세 명의 종이 나오는데 하나의 악한 종이 나와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나와요. 그 종은 주인이 자기를 떠나면서 맡겨준, 주인에게 재산이 있거든요, 주인의 그 돈, 투자분을 오해했어요. 투자를 하라고 준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는 뭐냐 하면 나를 찢기 위한 돈이었습니다. 악한 종이 말하기를 ‘나 여기 있고 주인님 여기 있잖아요. 그러니 주인님이 나한테 돈을 줬잖아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그 종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 ‘나 여기 있는 것 주인님한테 중요하고, 주인님이 거기 계신 거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가 충분히 동의합니다.’ 뭐는 빠졌죠?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주인이 준 한 달란트의 의미가 빠져있죠. 한 달란트의 의미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나, 단독자 나를 찢기 위해서 주인 쪽에서 투자한 희생분이에요. 희생분.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주인님은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동행자입니다.’라는 그 의식을 위해서 투자한 거예요.
‘다섯 달란트 남겼습니다. 열 달란트 남겼습니다.’ 백날 남겨봐야 그거 내 것 아니에요. 누구 거예요? 주인 거예요. 주인으로부터 와서 주인으로 말미암아 주인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에 단독자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한 종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투자한 달란트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졌어요. 뭐냐 하면, 돈보다 뭐가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하잖아요, 주인님.’ 주인은 그걸 동의할 의사가 없어요! 너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뭐가 중요해요? 너를 없앨 돈이, 나한테 나왔던 돈이 더 중요한 거예요. 뭐 돈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요? 그거는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고요.
주님의 투자는 주님의 희생이 들어있는 투자에요.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피가 들어있는 투자입니다. 이제는 너 혼자 사는 것 그만두라는 이야기에요. 우리의 주어진 모든 살림살이가 이게 내 것이지, 네 게 아니라는 그런 식으로 준 거예요. 남긴다는 말은 내 걸 남기는 게 아니고 ‘주님 것이 알아서 주님 것을 남기기 때문에 아무리 남겨도 그 중에서 내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자세를 주께서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악한 종이 ‘난 주인을 너무 무서워해서 땅에 숨겼습니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런 악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 가서 처리해버리는 거예요. 저거는 주인의 종이라고 할 자격에서 박탈당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이 세상의 삶은 우리를 해체하고 우리를 찢어버리는 것으로 있는 겁니다. 찢는 건 뭘 찢느냐? 우리가 그냥 있으면 어떠냐? 있으면 우리가 쇼를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한 삶이 연출되고 인위적으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이런 인간을 용납하실 수가 없죠.
실제로 이 세상의 삶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어제 설교에서 했듯이 이 대지에서 가장 낮은 음, 최저음에는 뭐가 있어요? 슬픔이 깔려있어요. 슬픔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 낮은 슬픔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 까불락대면서 억지로 거기서 떨어지려고 애를 쓰죠.
위선이 되는 거예요. 단독적인 자랑질을 하면서 슬픔과 나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허세를 떠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나 진짜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은 그 허세가 없어지고 솔직하게 그걸 노래 가사로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노래 가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쓴 조동진이라는 사람이 얼마 전에 죽었어요. 나이가 안 많은데…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고 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슬프죠. 우리 사랑은 그냥 있어도 계속 사랑, 사랑, 이어지면 참 좋겠는데. 계절은 자연스럽게 계절이 또 찾아오고 찾아오고 하는데, 한 번 떠난 내 사랑은 다시 이으려하면 왜 그리 힘든지…. 이건 잠언에도 나와요. 잠언에 보면, 성을 뺏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18:19) 성은 뺏을 수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다시 예전처럼 못 돌리는 거예요. 더 힘들다는 거예요.
우리가 속해있는 계절, 자연은 이렇게 쉽게 쉽게 바뀌는데 그때 우리 헤어질 때 마음이 바뀌어서 이제 우리 사랑하면 안 되니? 이 노래 제목이 <나뭇잎 사이로(1986)>에요. 같은 사람이 썼던 가사와 노래를 보면 <제비꽃(1985)>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이 가사가 중요해요. 이것 때문에 이 가사를 보는 거예요.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방금 이야기했던 이런저런 노래 가사를 더 아주 직설적으로 언급한 노래가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아예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파괴해서 슬픔의 원인이 되는 나를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노래가 있어요. 아주 노골적으로 제목을 달았어요. <먼지가 되어(2001)>. 김광석 노래에요. 이건 들어봐야 돼요. 중간만 한번 들어볼게요.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현재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게 슬픔이에요. 격리고 단절된 겁니다. 단절되었으니까 단독자인 나로서는, 내게 필요하니까 나한테 슬픔을 준 게 아니고 행복을 줬던 그 상대를 내가 놓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바로 내 이 몸 가지고 못 가니까 차라리 뭐가 된다? 내가 먼지가 되고 싶어요. 먼지가 되어야 바람에 잘 날리니까.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되어서라도 너에게 접촉될 수 있다면 나는 옛날처럼 온전한 행복을 다시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노래를 이렇게 보게 되면 인간의 근원은 뭡니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그 자체가 뭐에요? 비극이고 불행이고 슬픔이잖아요. 슬픔인데 거기에 대한 인간의 대처방법은 그 슬픔과 비극을 회복하는 방법에서 내가 이미 알던, 빠져있는 결핍된 부분을 채우는 식으로, 옛날식으로 어떻게든 노력해서 채우는 방식이 인간의 방식이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슬픔을 당하는 우리에 대해 주님 쪽에서 준비한 방식은 뭐냐? 이제 이걸 생각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18장. 18장 1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천국 가도 자기가 최고 자리에 있지 않으면 본인이 슬프다 이 말이죠. 남을 꼭 꺾어야 내가 행복해지겠다는 것은 기존에 단독자로 살았던 그 버릇이 계속 이어지니까 천국에서는 이걸 끊어줘야 되죠. 이거 안 끊어지면 천국에서 살 수가 없어요. 49제를 드릴까? 아니죠. 이걸 완전히 끊어줘야 돼요.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돌이켜’가 나오죠. 이 ‘돌이켜’가 요한복음 3장에서는 뭐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6절). 그럼 어떻게 돌이키느냐?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납니까?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방법은 내 쪽에서 끄집어내어서 주의 말씀의 최종 목적에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이게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아무 쓸데없고 쓸모짝없는 요소가 말씀을 접하는 순간 발악을 하면서 기어이 말씀에 부합되어서 실천에 옮겨서 나로 하여금 천국에 이르겠다 하는데 이르러봤자 그건 동행이 아니고 뭐에요? 그건 단독자로서 가는 나라, 그건 천국이 아니고 그런 사람 지옥에 다 가죠. 자기 욕망을, 결핍을 채우겠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지옥 가지 누가 지옥 가겠어요?
어제 제가 낮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가 따라간 것은 자기가 만든 환상의 예수지, 자기가 자기를 따라간 것이지, 예수를 따라간 게 아니에요. 따라가면서 어떤 기쁨과 어떤 행복을 지금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에 참여해야 돼요? 십자가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슬픔과 동행하고 주님의 희생과 동행하는 식으로 동행해야 천국에서 받아들여집니다.
그걸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죠, 피로. 이 피가 내 피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아픔과 슬픔과 예수님의 희생이 압축된 게 피잖아요. 내 피를 마셔라. 내 눈을 바라봐, 이거 아니에요. 내 잔을 마셔라.
예수님의 피는, 내 잔을 마시는데 이것이 재산으로 가난하고 몸이 아프고 그런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단독자로서 내 행복과 내 성공을 계속 붙들고 싶다는 나에게서 나를 끊어낼 수 없는 데서 오는 이 허망함, 그 허망함을 주께서는 말씀으로 내가 솔직하게 다 끄집어내게 만드는 거예요.
너 어린아이 되기 싫지, 그치? 어른 되고 싶지? 어른 돼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지? 돌이켜. ‘돌이켜’가 뭡니까. 거꾸로 가세요. 반대로 가세요. 도로 어린아이가 되세요.
자, 그럼 이미 어른 된 사람은 어린아이로 못 돌아가죠. 그럼 예수님 말씀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되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돼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지금 보여주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 말 속에 나의 유언, 나의 죽음을 담는 방법이에요.
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에요. 나는 그냥 ‘죽었다’에요. 죽었는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죠. 그러면 죽은 나를 주께서 뭐로 바꿔줍니까? 어린아이로 바꿔주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부모가 시장가거나 어디가든지 반드시 누구 손을 잡아야 돼요? 어른 손을 잡든지 잡히든지 해야 돼요. 우리는 잡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잡히죠.
잡힐 때 고생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고생 많이 한다고 그게 고난이 아니에요. 내 존재가 있으나마나 한 자유를 느낄 때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주님 가신 길. 주님은 이 땅에 살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았어요. 우리는 지금 마귀 종으로 태어나서 내 뜻을 아주 우기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고집하고 있어요.
그러나 주께서는 필요하면, 늘 그런 게 아니고 필요하면, 이상하게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목요일에 내 시간 있을 때 49제 드린다 했제? 주일에 왜 49제를 드려? 토요일에 식구들 다 바쁘다 해서 옮겼지만 하필 아다리가, 시어머니 제삿날이 하필, 이상하게 하필 그날이에요. 시어머니 제삿날이 하필 주일이에요.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니고 멀리 제주도까지. 왜 그렇게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죠.
슬프나? 아파? 나도 아프다. 나도 아프다. 주께서 돈이 없고 몸이 아파서 그게 고난이 아니고, 그건 낭만적인 이야기고요. 실제적으로는 뭐든지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야 될 이유는 동행자의 세계에 우리가 이미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남들 앞에 나설 때 내가 누구냐를 앞장세웠습니다. 이제는 나의 동행자가 누구냐를, 내 인생을 이렇게 이 꼴로 만드신 주님이 따로 계신 것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