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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 35강( 어린양의 가족), 복음이냐 교회냐 4강( 사건의 지점) 251027설교신명기

질문하나 음성

대전강의 20251027 질문 하나-이 근호 목사

질문: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씀에 있어서 그게 늘 걸리거든요. 사람들한테 친절해야 된다는 게 항상 몸에 배어있다 보니까 ‘야, 이게 참 예수님 편은 아니구나.’ 늘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해주십시오. 살면서 어떻게 사람들과 척 질수가 없어요.

답변: 그건 진짜 쉬운 문제에요. 어떻게 쉬운 문제인가? 내가 하나, 1이라고 하면 걱정이 늘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걸 포기할 수도 없고 방치할 수도 없고 이걸 관리해야 되는데, 성경말씀은 나에게서 나를 뚫고 다른 나를 만들어요. 다른 나를 만든다고요.

만들 때, 빠져나온 나는 이미 말씀으로 다 이룬 나에요. 말씀의 성과물로 ‘나’가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나’가 아까 얘기하셨던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이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기존의 나는 폐기처분 대상인 것을 놀리면서, “꼴좋다. 뭐 당연한 거 아니야? 말씀에 네가 부합되지 못하잖아. 일치 안 되지. 그거 당연한 거지.”

시편 2편의 말씀(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처럼 내가 나를 비웃으면서 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 속을 뚫고 나가는 거예요. 내가 나를 비웃으면서. “너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뭐 있어?”

만약에 말씀을 안 보게 되면 자아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기 때문에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말씀대로 살라고 자꾸 숙제를 내잖아요, 숙제. 머리가 지끈지끈해요, 숙제 때문에. ‘이 과외 그만둘까?’ 할 정도로 힘든데, 자아가 두 개 같으면 한쪽은 합격했고 다른 한쪽은 합격한 자아에 대해서 ‘따라오지 마. 너 좀 꺼져줄래?’ 하는 식으로 배격하는 거예요.

질문: 그럼 나에 대해서도 소외대상이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답변: 네, 배제대상, 소외대상이지요. 소외는 어려운 말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됐을 때 빠져나오는 이걸 저는 두 개의 자아라 했잖아요. 이 자아는 주님 자아의 그림자입니다. 주님 자아의 그림자에요. 옛 자아는 아담 소속이고요, 새 자아는 마지막 아담 예수님 소속이에요.

이러면 돼요. 세상 살면서 남 비웃지 말고 본인 비웃으면서 쉽게 갑시다. “뻔하지 뭐. 네가 뭘 할 줄 아는데 그래?” 보통 이 자아가 두 개라는 걸 모르고 자식들이 뭐 아버지 아프다 하면 “아버지, 힘들죠?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백세까지 사셔야죠.” 구십에 부르러 오거든 못 간다고 말해라 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할 때에 그 때 비로소 타인을 통해서 ‘아, 자식들이 복음을 모르는구나.’하는 것을 아는 거죠. “너는 날 위해 울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울어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괜히 예수님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너나 걱정하세요. 그것을 말씀으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전-신명기(35강) 신명기15:19(어린 양의 가족) 20251027a(강의: 이근호 목사)

자, 신명기 15장 19절,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냥 읽어서는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19절을 먼저 읽어봅니다. 신명기 15장 19절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죠.

왜 하나님께서 자기가 필요한 게 있다면 자신이 직접 관리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양을 바치게 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초반부터 어렵게 하더라도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을 긋게 되면, 나중에 이 선이 뭐가 되느냐 하면, 데생(dessin, 주로 선에 의하여 어떤 이미지를 그려 내는 기술, 또는 그런 작품)이 돼요. 선들이 모여야 데생이 돼요. 형체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아도 똑같아요. 살다보면 희미했던 자아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걸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것저것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선을 하나씩 그어나가는데, 살아가면서 그 많은 도구를 사용하고 다루면서 자아라는 그 속에 ‘나는 이런 도구도 다룰 줄 알고, 저런 도구도 다루었다.‘의 집합체가 자아입니다.

그러면 이 도구라는 것은 톱, 낫, 숟가락, 그런 것만 도구가 아니에요. 타인과의 모든 관계, 자식과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그러니 여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봐야 엄마의 아픔을 안다고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자식은 나의 자아를 구체화하는데 도구로써 개입된다는 그러한 현상을 말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 잡아라, 뭘 해라.‘ 율법 가지고 뭐 하고, 뭐 하고, 15장 전체가 율법 아닙니까?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율법이니까, 전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율법을 다루면서 뭐가 형성되고 굳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상대하길 원하고 하나님이 받아주기를 원하는 진짜 인간상은 어떤 형상으로 뚜렷하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을 본인이 느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완성품이다.‘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한 환경과 그 상황 속에서 뭐라도 하는 것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내가 뚜렷해지는 그 여정과 과정을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허락하신 거예요. 데생,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왜 어린 양인가? “네가 양이야. 나는 너를 양 만들 거야, 양.” 어떤 양? ’희생양‘, 희생양을 잡으라는 것은, 양이라는 것은 짐승이잖아요. 짐승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의 출발점의 모델은 사람에서 사람이 아니고, 같잖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람 같은 인간 없으니까, 출발점을 양, 그것도 희생양, 그것도 인간에 의해서 희생되는 양, 그것도 하나님이 시켜서 인간에 의해서 희생되어야 될 그 양, 그걸 하나의 원형, 모델로 삼아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이 나오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걸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빌립 집사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엘리야도 그렇고, 빌립 집사님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선지자들 보게 되면, 어디까지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어디부터는 우리가 고개를 저어야 되는지, 이런 것이 굉장히 난감하게 섞여서 나와요.

뭐냐 하면, 주의 사자, 천사가 개입해요. 사도행전 8장 26,27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39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물세례 받고 난 뒤에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이 대목, 무슨 내용인지는 대강 감은 오는데, 문제는 이렇게 주의 영이 임해서, 주의 능력이 임해서 천사가 임해야 꼭 이 일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회의감, 왜 빌립 집사 자신의 믿음과 평소에 하는 것으로 주의 복음을 못 전하게 하느냐?

믿음도 좋고, 신앙도 좋고, 성경도 많이 아는 빌립 집사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주의 성령이 임하여 이끌어 간지라.’ 갑자기 이끌어 가서 그 동네에 같이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어요. 공중에 끌려갔는지.. 우리가 평소에 상식적으로 아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왜 굳이 개입되어야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그 이유는 성경은 ’내일 신문‘이기 때문이에요. 매일신문이 아니고, 대구에 있는 매일신문이 아니고, 내일 신문이에요. 보통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일 터지고 난 뒤에 그 소식을 전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어제 일이 아니고, 인간이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미리, 오늘 이렇게 개입되니까, 주입되니까, 이 일을 당했던 빌립 집사 같은 경우에는 지금 성경의 이사야 부분을 펴놓고, ’어린 양‘ 그 대목을 같이 보면서 이것을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미 준비된 일을 지금 그냥 받는 거예요.

그럼, 내일 되면? 내일 치 하나님의 일을 또 받을 것이고, 한 달 뒤에는? 또 한달 뒤에 미리 준비한 하나님의 일을 받을 것이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렇게 위에서 계속해서 할당하도록 성경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게 되면, 내시가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이 이래요. 32절에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선 그 대목이요.

지금 내시가 질문한 게 이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그, 그가 누구냐?” 그가 누구냐? 빌립 집사가 ’그가 예수님이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돼요. ’그가 예수님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는 여기 있는 그분에게 같이 합류돼있다.” 라는 내용까지 설명을 해줘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냥 ’그가 예수님이다.‘라고만 하면, 나 따로 있고, 그 분, 예수님 따로 있어서 둘이 결합될 수 있는 요소가 빠지게 돼요. 그 분이 있는 조건 하에 내가 새롭게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계시다‘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계심에 내가 여기 있다.‘라고 같이 그 토대가 연결돼 있어 줘야 돼요.

그래야 성경 해석이 제대로 돼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하셨다? “예수님이 하셨다!”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지금 궁금해. 이 성경책에 나오는 이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야.” “아,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럼, 빠이빠이” 그러면 뭡니까? 그건 이미 예수님은 뭐냐? 옛날 신문이에요. 매일신문, 내일 신문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내 기억에 담을 뿐이에요. 이순신 장군 따로, 나 따로, 그렇잖아요. 뭐 엮이는 게 있어요? 이순신 장군 영 받은 무당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주님의 영이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영이.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주의 영이 함께 있어,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봐야한다 이 말이죠. 말씀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어디 뭐 신학교나 가라 하세요. 말씀 외우고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 가지고 진행하시고 사용하시는 그 일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현재 나는 그걸 알고 있어야 돼요.

현재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려워도 계속 갑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시공간입니다. 대전 올 때마다 시공간 이야기를 해서 ‘이게 뭐 단골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런 겁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죠. 마음도 쓸쓸해지고, 낙엽이 떨어지는데, 여러분, 가을이 돼서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를 한 번 보세요.

나무가 어디 갑니까? 나무 어디 안가지요. 가을 되고, 나중에 눈 오고, 봄 되어서 꽃 피고, 여름 되어서 연녹색 새잎 나고, 또 가을되면 낙엽이 찬 서리에 멍들어서 땅에 떨어지죠. 특징이 뭘까요? 나무의 특징은 갇혀 있다는 것이죠. 이게 자연이잖아요. 자연은 우리에게 갇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자연 안에 나무를 보고 있는 우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이 가을에는 바바리코트 깃 세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훌쩍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갑니까? 갇혀 있는데! 인간은 떠날 데가 없어요. 나무의 처지나 인간의 처지나 똑같아요. 떠날 곳이 없습니다. 갈 곳이 없어요.

이 자연 안에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 바깥에, 나무를 이렇게 낙엽지게 하신 그 바깥의 세계, 그런 일을 하신 바깥 분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가 이사 갈 수가 없어요. 거기로 이주가 안 돼요. 이주가 안 된다고요.

그런데 이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그 무엇이 자연을 뚫고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 율법의 기능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가 “너는 필히 실패한다.” 두 번째는 “율법이 추구하는 구원에 어느 인간도 참여할 수 없다.”

율법이 뚫고 자연에 갇힌 인간에게 왔으면 좀 기쁜 소식을 전해 가지고 ‘너는 율법 따라가면 구원 받는다.’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갇혀 있는 이유를 설명해요.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첫 번째, ‘너는 필히 반드시 실패한다.’는 거예요. 반드시 인간은 실패한다.

‘실패한다.’라는 율법의 고유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이제 원치 않는 실패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을 강요받게 돼요. 실패 안 하고 싶은데, 계속 실패해야 돼요. 매사 실패해야 되고, 실패하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는 실패대로 실컷 하고 구원은 구원대로 안 되고, 이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의 기능이에요.

바깥에서 온 소식이 있는데, 그 소식은 ‘너를 구원해 줄 게.’가 아니라 오히려 너는 구원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바깥에서 소식을 전했는데, 그 소식의 매개가 뭐냐? 율법입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는 매개 존재죠. 어떻게? 인간은 도구를 통해서 자아가 점점 더 구체화된다 했죠.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줌으로써 율법대로 이것저것을 해요. 율법에 보면 ‘하라, 하지마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 이것저것을 하면서 뭘 느껴요? 실패를 느끼고,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는 것을 근거로 구원받는 일은 없다. 애당초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데,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우리는 실패해야 되고, 구원되지 말아야 되는 것’을 제대로 아는 유일한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이 되는 겁니다.

사사기 17장 1절,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이거든요. 그거 하기 전에 아까 사도행전 8장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그 희생양에 대해서, 희생하신 분에 대해서 이분은 누구냐고 묻는 것은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세례 받아야 돼요. 물세례 받아야 됩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지식으로 ‘이 분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아이고, 알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되면 이게 내 안에 지식이 돼요. 갇힌 자 안에 들어 있는 또 갇혀 있는 그런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갇혀 있음에서 빠져나오려면 내게 찾아온 그 성경 말씀의 지식을 품고 넘어가면 안 돼요.

그건 선악과 체계입니다. 아는 걸로 넘어가면 안 되고, 나로 하여금 이 이사야 53장이 예수님의 일이고 그걸 통해서 (빌립 집사가 여러 가지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되어지는 상황이 바로 그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인 것의 일부로서 당신과 내가 이 광야, 사막에서 만났다.’가 돼야 돼요.

그러면 이것을 한꺼번에 표현하면, “나는 주님 안에 속할래.” 그게 뭐냐? 물세례예요. 그게 물세례입니다. 합류가 되는 거예요. 합류되는 것은 인간의 육의 능력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빌립 집사에게 누가 옵니까? 천사 왔지요. 그것도 모자라서 누가 옵니까? 성령께서 오셨지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전에 말했던 ‘우리가 독주한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이순신 장군 독주회처럼, 이게 막혀 있으니까,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물세례 주시고,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할 일 했지? 파견 근무했나?’ ‘예.’ ‘그럼 내가 데려갈게.’ 하면서 데려가고, 에디오피아 쪽은 에디오피아로 가고, 저쪽은 저쪽으로 가고, 어디에 가더라도 모든 일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포함이 된다, 이 말이죠.

그거는 이제 신약에서 율법 말고 복음이 갈라디아서의 의미에서 율법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를 범법자로 만드니까, 율법이 아니고 복음으로 주께서 일을 하실 때는 율법을 찢어버리고 일하거든요. 율법을 찢는 것은 우리가 찢으면 안 돼요. 우리가 제 맘대로 살려고 지가 찢으면 안 돼요.

율법을 찢어야 율법에 의해서 우리 자아도 같이 폐기가 되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가 자연 안에 갇혀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그냥 갇혀 있는 게 아니고 실패해야 되고, 그리고 실패하는 느낌을 준다 할지라도 그 실패한 걸 근거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닙니다. ‘어, 그래 망하게 되었어.’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끝나고, 조치도 율법 말고, 율법을 주신 그분에 의해서 율법 말고 주님이 자체적으로 아버지하고 이미 의견 타결 본 게 있어야 돼요. 우리 쪽은 완전히 소외되고 배제되는 거예요.

주님하고 아버지하고 쑥덕쑥덕해가지고 협의, 타결 본 게 있어야 돼요.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아들을 통해서 다 이루어져야 돼요. 그 이루어진 것을 율법을 통해서 절망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복음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기쁜 소식으로.

지금 우리가 하는 게 구약이잖아요. 구약이니까 같은 구약을 봅시다. 사사기 17장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이니까. 사사기 17장 1절,2절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렇게 시작하죠.

아까 여러분들이 신명기 보고, 사도행전도 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어디 안에서 이루십니까? 율법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지요. 율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적은 바로 희생양, 이스라엘로 하여금 희생양이 되지 않는 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상황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 여기에서 이렇게 먼저 전제를 합니다. “사람하고 상대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하고 사람이 관계한다.” 먼저 사람하고, 사람하고, 사람하고 상대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하고 관계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할 수가 없어요. 사람하고 상대해야 돼요.

사사기 17장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머니하고 아들이 나오죠. 어머니라는 한 사람, 아들 한 사람이 일반적인 지나가는 사람의 만남이 아닌 겁니다. 어머니이고, 아들이니까. 어머니가 어느 날 자기가 끌어 모았던 돈이 잘 있는지, 도둑은 안 맞았는지 조사를 해 보니까, 은화 일천일백을 잃어버려 가지고 엄마가 화가 나서 저주를 해요.

"내 돈 가져간 인간 죽어 버려라."라고 저주를 했어요. 엄마가 돈 잃어버렸는데 왜 저주하고, 화가 나 있죠? 돈을 잃어버렸는데 왜 화가 납니까? 이상하잖아요. 그걸 좀 길더라도 여러분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시고 한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머리 큰 아이가 어느 날 한 살쯤 돼서 거울을 봤어요. 거울을 보니까 거기에 또 다른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럴 때, 이 거울 속에 있는 아이는 본인이에요, 본인 아니에요? 본인 아니죠. 왜냐 하면, 내 모습이 비친 것이 거울에 나타나니까, 이것은 이미지지 내가 아니에요. 내가 둘이 되면 안 되니까.

난 여기 있고, 저것은 비친 이미지죠. 그런데 이 이미지라는 것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것은 내가 아니다.’가 성립이 안 돼요. ‘저것은 내가 아니다.’가 만약에 성립이 된다면, 비로소 그때부터 자아가 성립돼요. 나는 여기 있고, 그 외는 ‘내가 아니다.’가 돼요.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정신분석학의 '방어 기제'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게 확립이 됐잖아요? 그럼 내가 할 일은 뭡니까? 여기 있는 내가 나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지켜내죠. 지켜내는 겁니다. 지켜내는데, 거울을 보면서 아이에게 나, 소위 자의식이라고 하는 게 이제 시작됩니다. 생후 1년에서 1년 6개월이 되면 그렇게 된다고 해요.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거울에 비췄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점점 더 이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본인이 알게 돼요. 이 비치는 사물적인 거울 말고, 이 거울에다가 어머니를 대신 세워 봅시다. 그러면 아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어머니의 욕망이 자기 내부로 다 집어넣어 놓고 이게 누구냐 하면, 이게 바로 나예요.

길 가는 아주머니 보고 다 의식하지 않아요. 애들은 적어도 길 가는 이웃집 아주머니하고 어머니는 구분할 줄 알아요. 왜냐 하면, 내 안에 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욕망, 어머니의 요구 사항이 들어 있어요. 그리고 엄마도 자기의 아들이 자기의 거울이에요. 자식 없는 내가 있을 수가 없어요.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웠다 하는 것은 밥 주고, 잠 재워주는 것은 보육원에서도 할 수 있어요. 요양사도 할 수 있어요. 치매 걸린 부모를 요양사가 돌보는 거 하고, 딸이 와서 돌보는 거하고, 며느리가 돌보는 거 하고 달라요. 며느리는 가라고 합니다. 딸은 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나니까! 내 안에 내 딸이 들어있으니까요. 나는 걔를 보고 나를 새롭게 구축했고요. 딸은 나를 보고 ‘나’라고 이미 확정을 지어 놓고요. 그 관계다 이 말이죠.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히스테리, 그러니까 원인도 모르는데 신체가 발작을 하는 그런 환자들을 많이 접했어요. 접했는데, 어느 날 그 증세가 없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뭘 했느냐 하면 최면을 거니까 그 발작 증세가 없어졌어요. 최면을 걸면서 그 환자에게 뭐라 하냐 하면, ‘레드 썬!’ 하면서 “지금 당신은 조선 시대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폭군의 쉐프입니다."

이러면서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연희궁이 보입니다." ”그래요. 무슨 요리를 했습니까?“ ”맛있는 어떤 요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최면을 거니까 자기가 반 수면상태에서는 말하는 대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꿈속에 있지요.

꿈속에 있는 대상에게 최면을 걸면서 정신과 의사가 물으니까 묻는 대로 답변이 술술 나오는 거예요.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오니까, 억압되어있던 말을 실제로 말을 통해서 터뜨리니까 증상이 없어졌던 거예요. 바로 저거다.

지금 히스테리 환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눈에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일 때는 무의식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요. 의식은 무의식을 또 억눌러요. ‘지금 내가 중요한 손님 만났는데, 너 가만히 있어라, 발작하지 말고.’ 그렇게 억압되어 있으니까..

할 말 하고 성질을 터트려야 이게 몸이 안 아픈데, 중간에 신체가 힘들게 된 거예요. 패고 싶은데 못 패고 ’참자, 아이고 내 탓이요.‘ 이렇게 하다가, 최면 걸면 이 증상이 없어지고, 다시 현상에 돌아오면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 자기 그 의식 세계에 돌아오니까, 무의식적으로 이거는 짐승도 아니고 함부로 행동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의식보다 무의식 세계가 더 세다. 모든 병은 무의식에서 차마 못할 그 모든 내용을 의식은 강제로 억누르고 있으니깐 이게 마음의 병이 되었다. 따라서 치료 방법은 환자 본인에게 의사는 질문만 하고, 혼자 자신의 이야기를 카우치라고 하는 긴 소파에 누워서 제 할 소리를 다 내뱉음으로써 자가치료, 셀프치료가 될 수 있도록 정신과에서 도와주고, 정신 분석학의 시작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보통은 정신과 가면 돈이 드니까, 술을 먹죠. 술 먹고 집에 들어가서 자는 마누라 깨워서 "내 이야기 들어 봐라.“ 듣기 싫다고 하면, 자기 혼자 이야기 하면서, 지 혼자 술 먹고 이야기하면서 증상이 완화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술을 안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제단에 가서 울고불고, 울고불고 상담해 달라고 가는데, 상담은 무슨? 불 속에 집어 넣어버려야지. 불속에 들어갈 게 무슨 상담이 돼요?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이미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있고, 그게 주님 보시기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지독한 엄마의 사랑 "엄마, 돈 내가 가져갔어." 이렇게 하니까 갑자기 엄마가 자기가 저주한 그 저주의 대상이 자기의 분신인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 가져가는 놈은 어느 인간인지 죽어 버려라".

이게 사사기 입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승리케 해 주신다면, 제일 먼저 우리 집에서 튀어나오는 그것을 제가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몰렉 우상을 섬기던 분위기라서. 그런데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나올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만약에 이 딸을 안 바치면 어떻게 되느냐? 이거 승리한 거, 하나님 덕분에 승리한 거 물어줄 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가족 관계, 엄마 아빠 가족 관계, 의식 무의식 관계에 갇혀 있습니다. 탈피하지 못합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벌써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닙니다. 전부 정신병자들이에요.

그래서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 사사기 17장에 보면, 그 수습하는 방법으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우상이 동원돼요. 17장 3절,4절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신상을 만들어서 집에 두고, 그 신상을 섬기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도 저주 안 받고 아들도 저주 안 받고, 보호 차원에서, 그걸 수호하는 차원에서 어린 레위 족속 제사장 한 사람을 고용해서 연금 주고 복지 혜택주면서 자기 집에 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옵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율법을 준 세계에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사례를 이렇게 쭉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구축한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꼭 낙엽 지는 나무 한 그루 신세와 똑같습니다. 낙엽 져 봤자 겨울 되면 또 눈, 그래 봤자 봄 되면 또 피고, 그 나무가 자기는 살았다 생각하겠죠. 뺑뺑이 도는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자연 안에 갇혀 있어요. 자연 자체도 갇혀 있고, 갇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신명기 15장 19절에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여호와께 드린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성립하느냐? 여호와께 드리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서 탈출이 되어야 드림이 돼요. 탈출이 되어야. 그런데 뭐가 드림이 되느냐 하면, 어린 양, 수컷의 어린 양은 탈출이 돼요. 왜?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했기 때문에.

여기에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네가 네 가정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첫 번째 수양은)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절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의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찌니라” 라고 돼 있어요. 여호와 앞에서 먹어라.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4절을 보면, 주님께서 영생을 이렇게 표현해요. “영생이란, 네 안에 영생이 들어 있는 방법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되어 있죠. 기억하시죠? 안 찾아도 아시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가 있잖아요. 여기에 외부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를 접수하고 점령해야 되고, 내 살과 피를 대신해야 너희에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생명이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안 들어온 상태가 되면 이건 뭡니까? 우리에게 뭐가 없어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율법은 있으나 생명이 없어요. 생명 없는 율법이 있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를 실패로 만듭니다. 실패한다고 해서 영생 얻는 건 아니에요. 뭔가 외부에서 새로이 들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야 생명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거기 왔던 제자들이 뭐라고 했냐 하면,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만약에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세요. 영생 얻기 위해서 주님한테 왔는데, 주님께서 뭐 ‘십자가 믿으라.’하면 그거야 믿지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문제를 제가 한번 내 볼까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가 어렵습니까? ‘십자가 믿으라.’가 어렵습니까? 둘 다 어려운 거예요. 둘 다 어려운데, 사람들은 십자가 믿는 것은 그냥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산입니다. 잘못 생각한 거예요.

15장 17절 보겠습니다.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 18절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게 남자하고 여자하고 달라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남자하고 여자하고 차이 나게 했는데, 어떤 가정에 노예가 들어왔어요. 노예로 들어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없어 노예가 된 거죠. 밥 먹고 살 돈이 없어서 노예가 된 거예요.

자, 이 문제는 이겁니다. 노예가 같은 식구입니까? 하는 거예요. 노예는 식구가 아닙니다. 타인이에요. 타인인데 노예가 식구가 되는 경우를 율법을 통해서 알려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는 거예요. 문에 대고 뚫는 겁니다. 누가 뚫어요? 주인이 뚫고, 누가 뚫린 겁니까? 종이 뚫린 거죠.

노예가 노예일 때는 같이 한 집에서 일해도 내 소유는 아니에요. 그냥 일꾼이에요. 그런데 노예에게 구멍을 뚫어 버리면 이제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아들같이 대하라’, 또 ‘딸같이 대하라’, 만약 어떤 노예가 이 집을 떠나기 싫고 이 집에 온다고 하면, 아들과 딸같이 하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집이 원래 두 집이죠. 두 집이었는데, 두 집이 어떻게 됐어요? 한 집 되었어요. 한 집 되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외부인이 내부인 되는 방법까지 주께서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가진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노예에게 "됐다, 나가라" 하면 또 살 수 없어요. 왜? 가진 게 없으니까.

의존해야 되고, 기대야 되고, 와야 됩니다. 살기 위해서 무조건 자기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와야 돼요. 이게 출애굽기 21장 이야기를 신명기 15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 그 다음에 이렇게 우양의 처음 난 수컷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그 양을 잡을 때 그 양은 누구 소유였습니까? 소유주가 원래 누구예요? 자기 집이죠. 자기 집의 소유를 이제는 반대로 내 집에서 하나님 집으로, 하나님이 받겠다니까, 우리가 준다고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받겠다고 했으니까, 이 집안의 수컷 양을 하나님께 드리면, 이 자연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연락 체계, 연락 장소가 만들어진 셈이 되죠.

연락 통로가 만들어졌지요. 그러면 여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야, 너 참 좋겠다. 너는 하나님한테 가니까, 우리는 뭐 가지도 못하고, 뭐 양만 바치고 우리는 가지도 못하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양 바칠 때 그냥 바치지 않고, 죽여서 바치죠. 죽은 양을 도리어 부러워하고 “좋겠다, 야, 너 죽으면 거기 가잖아. 네가 하나님 집으로 소속이 되잖아. 우리는 언제쯤 하늘나라에 같이 소속이 되고, 합류하게 돼?" 이래야 정상이 되겠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 못 하고, 이미 자기가 하나님과 한 통속인 줄 알고, 시킨 대로 양 바치면, 자기가 자기 선을 떠나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된 걸로 그렇게 오해를 했던 겁니다. 자기는 꿈쩍도 안 하니까 오해를 했던 거죠.

그런데 여기 지금 바치는 게 양의 첫 새끼죠. 그리고 흠이 없어야 돼요. 여기 신명기 15장 21~23절에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같이 할 것이요,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을찌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15장의 율법대로 준행한다면 "이거 한 마리 없어도 우리는 뭐 상관없어" 이런 종류입니까? 아니면, "참 아깝다. 아이고, 참 귀한 거다. 내가 지금 탐나는 건데, 탐나는 건데 내 게 아니네." 하고 "그래, 너라도 내 집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가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연락이 왔다 이 말이죠. 연락이 왔다는 말은 본인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감수를 해야 돼요. 그걸 인정을 해 줘야 돼요. 지금 내가 양을 바쳐서 하나님께 받은바 된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 있는 곳과 우리가 있는 곳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 줘야 됩니다. 아직도 율법으로 뭔가 행할 것이 남아 있다는... 제사를 드린다든지.

그 다음에 그 양의 피는 어떻게 합니까? 피는 어떻게 하고? 먹지 말고, 그 양을 잡고, 양고기 먹고, 그 양의 피는 먹지 말고, 고기는 먹을 수 있되,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으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양의 신체와 피 부위를 따로 차별 나게 구분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죠.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상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다. 사람과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노예 상대하는 거 있죠. 그리고 집에서 제일 탐나는 양을 상대했듯이 그 상대한 속에 깊숙이 누가 거기에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입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이것으로 끝납니까? 율법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율법을 보면서 자꾸 낌새, 뭔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그 의도, 취지에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젖어가야 되겠죠. 아까 얘기했듯이 선을 계속 긋다 보면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이게 데생이 되죠. 기초 데생이 된단 말이죠.

율법이 자꾸 들어오게 되고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나의 자아는 ‘복합 자아’가 돼요. 복합 자아가 되면서 이 복합 자아는 내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아이기 때문에 무슨 자아냐 하면, 매개 자아가 되겠죠. 이 매개 자아로서 아까 빌립이 만났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매개자가 돼요.

매개자란 말은 전달자, 전달자가 되죠. 전달자가 되면, 아까 성령, 또는 천사의 개입처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합류된 존재로 인식되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합류가 되기 때문에 이 화살표 방향을 거꾸로 한번 돌려 보세요.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까? 내 구원? 아니! 뭔가 전달하는 거예요. 무슨 전달? 모든 상황과 모든 일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라는 상황을, 사실에 거기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나라는 자아가 내가 ‘나는 이게 나다.’라고 알았고, 그동안 내 이미지를 내가 골랐는데, 그게 아니고 복합자아로 변신돼야 돼요.

내가 원치도 않는 일들 속에서 만나면서 우리는 도저히 내가 ‘이거는 나야.’라고 규정할 수 있는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쓰시고 사용하기 나름이에요. 한국화를 그릴 때도. ‘이게 바로 나야.’ 금상 받을 때도 ‘이게 나야.’ 일할 때도 ‘이게 또 나야.’ 제주도 갈 때도 ‘이게 나야.’

계속 이루어지는 그 모든 일이 어디서 나왔고, 어디에서 비롯되는 겁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미 합류된 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시는 게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사세요. 제발 좀 편하게 사시고, 그런 의미에서 10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4강) 요20:27(사건의 지점)20251027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49페이지 위에서 넷째 줄부터 하겠습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할 때 ‘하나’. 자, 셋 중 하나에요. ①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없다, 제로(0). ②하나밖에 없다, 1. ③다수. 몇 번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밖에 없다 할 때, 0이 되겠어요? 1이 되겠어요? 다수가 되겠습니까?

아, 참 어렵죠. 정답은 제로, 0. 없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없습니다. 없는데 복의 근원은 있잖아요. 그게 1이에요. 근원이 하나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1이 1이기 때문에 1이 되는데, 인간들은 다수기 때문에 이 다수 중에서 하나가 아니라 모든 다수를 제로(0)로 만드는 그 하나, 그 하나가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이 알파요 오메가요, 그 근원이 마지막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복의 자손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뭐를 거부하느냐? 관찰자로서의 우리의 무능성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내가 복의 근원을 알아서 누가 복의 근원인지, 내가 그걸 믿을 거야.’ 이 자세가 무슨 자세입니까? 측정하고 관찰하고 ‘내가 잘 살펴서 누굴 믿으면 되겠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죠. 이것이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건 다수가 되는 거예요. 다수가 돼요. 제로가 되어야 되거든요. 제로가 되어야 되는데 다수니까, 이 다수는 탈락이죠. 탈락이고 없어야 되고. 없으면서, 다수를 제로로 만드는 데에 개입된 그 1, 그 1이 정답이 되겠습니다. 1이 되는 거예요.

복잡한 절차를 이렇게 설명해놨어요, 49페이지 중간에. 뭐 간단합니다. 그건 이제 어렵지 않아요.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나온 자식은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이건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인간입니다. 그걸 ‘혈육에서 나왔다’ 해요. 그래서 신약에 오면 “육으로 난 것은” 무엇일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은 절대로 영이 될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에요. ‘육에서 난 것은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그 육은 나중에 한 줌의 재가 되어야 될 육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제가 질문하면, 내 육 이건 쓸모없기 때문에 내 육을 내가 버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버리지 못합니다. 내 육을 버리겠다는 것도 뭐에요? 육이에요. 이것도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천국 못가. 그러니까 뭔가 조치를 해야 돼. 내가 나를 포기하겠어.’ 이것도 육이에요.

어제 오후 설교 때 제가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타인에게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주님만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타인을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남을 욕할 수 없는 이유는? 또는, 우리가 남을 저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복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복과 저주의 근원은 우리 말고 다른 분이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닌 거예요. 사기 당했다고 ‘저주 받아라’ 이렇게 할 수 없어요. 아까 사사기 17장에 뭡니까? 자기 돈 잃어버렸다고 ‘저주 받아라’ 할 수 있는 그런 권한 자체가 우리한테 성립 안 됩니다. 예수님한테만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따라서 우리 인간들 내부에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남을 평가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없는 이유가, 예수님을 우리 모든 인간이 전부 다 합세해서 밀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없애버렸잖아요. 그러니 우리 가운데 남에게 복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복수심만 없어도 우리는 정말 행복해요. 정말 행복합니다.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것은 ‘내 인생 조진 것은 다 네 탓이다.’하면서 자꾸 남 탓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실효성도 없고요, 실제로 저주가 임하지도 않아요. 괜히 속만 썩고 있어요. 마치 내가 남을 정죄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뭔가 된 양 여기고 있는 거예요. 너나 나나 다 잘린 입장에서. 복의 노선, 라인에 우리는 애초부터 육이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 있지도 않아요. 배제된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잘했다, 못했다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새로운 출생을 이야기해요. 새로운 출생이 되려면 우리가 아는 어머니 말고 다른 어머니가 있어야 되죠. 우리에게 죄를 넘겨준 어머니 말고 죄가 없는 어머니에 의해서 우리가 새롭게 출생되어야 되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잉태해야 된다.’ 그럼 잉태하는 방법은? 주님이 배 불룩하게 해가지고 하나 낳고 또 불룩하게 돼서 낳고 이러는 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듭니다. 죄인 안에 주님이 잉태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잉태하는 게 더 쉬워 보여요. 이 죄 많은 우리가 주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일단 우리가 잉태하게 되면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우리 안에 잉태된 것도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결과를 낳잖아요.

그 방법,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오히려 추가적인 죄를 더 짓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이 사실을 하나님은 충실하게 이용합니다. 구원받아놓고 나 잘했다고 될 수가 없게 만들어요. 구원된 것도 잘한 짓이 아니에요. 구원된 것도.

이 복잡한 작업을 위해서 갈라디아서 3장이 있습니다. 3장을 봅시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사도 바울 성경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요. 3장 보기 전에 다른 것 먼저 보고 3장 들어갑시다. 사도 바울의 글 하나하나가 정말 누구 말대로 정신 나간 소리하는 거예요. 정말 도저히 인간의 지혜로서는 접근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죽으려고 환장하는데 그냥 자살하는 게 아니고 지금 뭐를 시도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던 그 십자가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합니까? 이게 왜 불가능하냐 하면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십자가를 어떻게 규정했느냐? 무엇이 십자가냐 하면 나를 미워하는 게 십자가에요. 나를 미워하는 것. ‘나를 미워하는 것’ 이 표현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쉽게 하려고 하면 이렇습니다. 기도로 하게 되면 ‘하나님, 결코 나의 의가 생성되지 않고 나의 의가 족족 파괴되는 상황만 주시옵소서.’ 이 말이에요.

“나의 의가 생성되지도 않을뿐더러 생성된 의라면 족족 부서지고 무너지는 상황만, only 그 상황만을 제 인생에 허락해주옵소서. 어떤 경우라도 나의 의가 나올 수 없는 상황만 덮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너 왜 그래? 왜 그런 기도하는데?” “제가 미우니까요.” “그럼 내가 죽여줄까?” 아니, 죽이지 말고 내가 미워지는 내가 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죽이는 것은 가룟 유다가 한 짓이고요. 자기가 미워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자살 말고 ‘내가 미워지는 나로, 현재 나를 너무나 미운 나로 바꿔주옵소서.’ 이거에요. 바꿔주옵소서.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하지 않은데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누가복음 7장. 갈라디아서는 너무 어려워서 좀 이따 봅시다. 갈라디아서 한 구절 한 구절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누가복음 7장 38절요. 초청하기는 바리새인이 초청했어요. 죄 많은 여인이 초청한 게 아니고 바리새인이 초청해서 있는데 죄인인 한 여자가 불쑥 등장해서 예수님한테 달려들어 향유를 발에 부었죠.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했어요. 그렇죠?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하면 내가 구원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생각했겠어요?

‘믿지 않으니 행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행하는 행동들이에요.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가만있어봐. 성질이 나서 뭔가 해야 돼.’ 믿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나라도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이걸 적용해보면 이 여인은 자기가 너무 미워서 행동에 나섰죠. 나섰는데 여인은 ‘역시 난 지금 믿음으로 행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없고 그냥 터져 나온 거예요. 터져 나왔는데 해석은 누가 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 행동에 대한 관찰자가 아니에요. 평가자도 아닙니다. 평가자는 따로 있어요.

관찰하시는 주님이 따로 관찰하시되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저 여자의 행동은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사랑을 많이 받은 행동이라고 추가적으로, 여자가 미리 예측도 못했는데 추가적으로 주님의 해석이 그 여자에게 덧붙여져서 여자는 예수님의 행함에 합류되는 매개 존재가 돼요. 주님이 주님 일을 하는데 곁들여서 같이 움직이는 주님의 말씀의 전달자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럼 이걸 보고 또 어떤 수녀나 예수 잘 믿는다는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려가면서 일부러 백화점에 가서 향수 사가지고 주님 발 앞에 엎어지는 이런 행동 하는 거, 그건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죠. 지금 여인은 사랑이고 뭐고 그딴 것은 자기한테 있을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밉다는 거예요. 내가 밉다는 것.

주님께서 그 순서를 바꿔요. 내가 미워서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미워진다.’라고 순서를 바꾸는데, 그 순서에 대해서 여자 본인이 그것을 사전에 받아들인 적이 없죠. 자기는 미울 수밖에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인 해석으로 “너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해석을 붙여버린 겁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울면서 자기가 미워지는 것. 이런 행동은 주님이 의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는 걸로 이렇게 정리가 돼요. 그렇다면 그런 입장에서 아까 빌립보서 다시 봅시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뭘 아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삽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지 않아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동은 자기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로 귀속이 돼요. 자기가 믿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의 일부가 현재 자기의 삶으로서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해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자기를 매개자로 사용해서 지금 계시로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매개자로 해서. 우리 성도도 그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걸 확인할 뿐이죠.

그런데 빌립보서 3장 8절 같은 데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빌립보서 3장 8절에.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한 일이 뭐로 해석되어야 옳으냐 하면,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는 일인 줄 모르고 나는 하나님 일을 하는 줄 알고 했다는 거예요.

사도가 되기 전에 이 사람이 나쁜 짓했습니까? 나쁜 짓 골라가며 했습니까? 도적질하고 이랬습니까? 아니죠. 순결과 순수를 추구하면서 ‘인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의로운 의가 뭐냐?’ 그걸 했는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짓거리들의 시리즈였다는 거예요. 연속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8절에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뭐로 여겼느냐 하면 “배설물로 여김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바로 버려져야 될 쓰레기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쓰레기라는 사실을 새롭게 주님의 안목으로 측정 당하게 되기 위함이다.’ 이렇게 돼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럼 남은 것은 뭡니까?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사용하실 주님의 그다음 절차가 뭐냐? 그다음 절차가 아까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다 이루려함도 아니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려 한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 때 한 것을 잠깐 언급하면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광야에서 누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사흘 뒤에 가보니 시체가 없어졌다.’ 이 이야기 뒤에 시놉시스(synopsis, 이야기 줄거리), 여러분들이 작가라면 그다음 무슨 내용으로 이어질지 한번 채워보세요. ‘사흘 뒤에 시체가 없어졌다.’ 그 뒤에 줄거리.

여러 가지가 있어요. 외계인이 찾아왔다든지 아니면 사흘 뒤니까 없는 사이에 누가 시체를 치웠다. 또 어떤 경우 있어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인간의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서 독자들이나 관객들,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납득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바보같이 여기다가 ‘그 시체는 사실은 부활해야 될 시체다.’ 이러면 그건 드라마가 안돼요. 그건 연결하는 데 있어서 반칙이라.

‘우리가 안다, 안다, 안다,…’로 계속 가야지 ‘우리가 안다, 안다, 안다,…, 우리가 예상 못 했다.’가 되어버리면 이거는 단절이에요. 이야기가 끊어지는 거예요. 끊어지면 그 드라마는 우리가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황당무개한 거예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 드라마 속에 우리는 몰입하여서 ‘저게 내 인생이야.’라고 지금 일치시키고 싶은 마음준비를 하고 있는데….

‘했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죽은 사람의 친척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어? 총 맞았네!’ 죽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을 뻔했는데 어디서 약초를 구해다가 그 약초로 몸이 건강해지고 난 뒤에 어떤 도사를 만나서 권법을 배워가지고 그다음부터는 ‘기다려. 딱 기다려. 싹쓰리 나 죽인 인간을 복수한다.’’ 이래줘야 우리의 관찰하는 마음가짐과 끊어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은 뭡니까? 완전히 쫑난 거죠. 완전히 끝난 거예요, 끝난 것. ‘하나님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게 바로 인간의 육이다.’ 이것을 결정짓는 것이 부활입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부활되어버렸으니까 따라오려다가… 심지어 제자들도 못 따라갔어요.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거기까지 엔간히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막달라 마리아도 못 따라갔어요. “시체 잘 있겠지. 썩으면 안 되니까 향수나 바르러 가자.” 향유 들고 갔을 뿐이지,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제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바알종교죠. 아세라, 바알종교. 서로 보호를 할 수 있는 신. 내가 지켜줄 수 있는 신. 그래서 보호했다는 그 공적, 공과, 불교에서는 업보라 하죠, 그 업보가 신의 장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좋은 관계로 유지되는 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우상밖에 없습니다. 우상에 대한 주님의 공격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들어가기 전에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너는 너를 뚫고 지나가라.’ 이건 설명하기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이 비슷한 경우가 인간 세상에 있기는 있어요. 스웨터를 벗을 때 보통 목 부분에서 위로 뽑아내잖아요. 그런데 성질 급한 어린애들은 어떻게 합니까? 스웨터를 그대로 빼는 게 아니고 자기가 빠져나오기 급해서 뒤집어서 벗을 때 그 뒤집혀진 옷. 그게 약간의 유사성을 갖고 있죠.

내가 나를 뚫고 지나가면, 뚫고 지나간 나는 그 출처가 어디냐? 뚫으려고 하는 내가 출처가 되죠.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게! ‘내가 나를 뚫고 지나간다.’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거죠.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했죠? 마태복음 성경에 나오잖아요.

나를 미워해서 뚫고 지나가는 그 자체를 주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건 온전히 미워하는 게 아니고 꼼수 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휴, 답답해 죽겠네. 정답이 뭡니까?” 이쯤 되면 짜증이 나야 돼요. 이것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그럼 뭐냐?

정답 말씀 드릴게요, 여기서 미리.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니까. ‘제발 나를 죽여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여라 이 말이죠. 왜 그러느냐? 내가 너희에게 찾아왔잖아. 너 대신 내가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이고 뚫고 지나가라 이 말이죠. 나를 뚫고 지나가게 되면 ‘예수님 빠이빠이’가 아니라 네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의 새로운 주권자 주도자가 되어서 너를, 나 죽고 난 뒤에 내가 얻은 생명에 너로 하여금 참여되도록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겁니다. “날 좀 죽여줘! 잘난 체하지 말고. 죽여줘!” 왜? 어떤 인간도 자기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의로 생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미움이라는 이야기했죠? 내 의가 행여나 나타난다면 그걸 깨부수는 새로운 상황이 나를 덮쳐주옵소서. 우리 머리는 그렇게 돌아가요. 실제로요. 손톱 하나만 문제 있어도 ‘이럴 수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손톱이 이렇게 갈라집니까.’

제가 지난 토요일에 목욕탕에 갔는데요. 목욕탕을 아침에 안 가야 되는데 괜히 또 아침에 갔어요. 머리 완전히 깎은 중들이 떼로 들어오는 거예요. 아침 먹기 전에 신나게 왔어요. 방금 염불하고 와서 기분이 업 됐어요. 은혜 받아서 업 되가지고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것도 탕 안에 들어가서 “안녕하십니까! 잘 계셨습니까?” 이제 영업을 하는 거예요. 꼬셔야 되니까 영업을 해야 돼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 해줘야 돼요. 50대도 있고 60대도 있는데 나이들이 있으니까. “할아버지, 여기 사랑방 아닙니다.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해주세요.” 또 한 오지랖을 내가 했다고요. 그런데 내가 늘 오는 게 아니고 두 달에 한 번도 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없을 때 자기들끼리 얼마나 떠들었을까요. 실제로 그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게 아니고 탕 안에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 거예요, 떠들면서. 물론 옛날에는 더 했어요. 탕 안에서 노래 불렀으니까요. “어~ 좋다.”하면서 노래까지 불렀으니까. 옛날에는 그걸 용납했거든요, 우리 어릴 때는. 지금은 그러면 안 되거든요.

그때 뭘 느꼈느냐 하면, 중들은 왜 자꾸 아침에 목욕을 오느냐. 그리고 그들은 왜 환한 얼굴을 해서 오느냐. 그게 바로 ‘희열’, 행복입니다. 행복한 이유가 부처하고 자기 관계에서 뭐를 획득했습니까, 오늘 새벽 염불을 통해서? 뭘 획득했죠? 자기 업보를 획득했잖아요. 업보가 뭡니까, 성경적으로 하게 되면? 자기 의죠, 자기 의. 자기 의에요.

인간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뭐를 한다? 논리가? 행하죠. 그 행함으로 뭐가 생긴다? 자기 의. 자기 의가 생기니까 그다음부터는 자기 가치가 높아졌죠. 가치가 높아지니까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킬 빌이 아니고, 킬 지저스.

명령을 하나 안 하나 간에 모든 인간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신자든 신자 아니든 성도든 성도 아니든 간에 다 마찬가지에요. 이걸 눈치 챈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성도는 구원받는 거예요.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죽으셨고 주께서 부활하실 때 죽은 나와 함께 하셨다는, 대신 죽으셨다는 그것 때문에 나도 같이 부활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기 의라는 것이 나한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육은, 없어요. 제로에요. 어떤 누구도 복의 근원은 없는데 제로를 제로 되게 하신 분이 등장함으로써 그분이 1이 되고 그 1이 성령을 통해서 다수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그 많은 숫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아까 빌립보서에서는 얼추 정리가 됐죠? 사도 바울은 자기 행함이 아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반드시 이렇게 해준다. 그 자체가 주께서 계획하신 계시이고 그 계시가 나를 통해서 발현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3장.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을 보고자 하는 이유는 이겁니다. 불가능한 일인데요, 이거에요. ‘육이 어떻게 영이 되느냐’ 이 문제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서 4장까지 계속 이어져요. 육이 어떻게 영이 되느냐? 육은 육이라 했잖아요. 끊어져 있어요. 막혀있어요. 육은 육이에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고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분명히 언급했단 말이죠. 그럼 막혀있는 거예요.

막혀있는 것을 뚫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니고데모가 한 제안은 “내가 엄마 몸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됩니까? 거듭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라고 했을 때 주께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이기 때문에 육에서 천 번을 태어나도, 타임 루프를 해서 조선시대로 돌아가든 뭐든 백날 해도 육에서 죽고 육에서 태어난 것뿐이지, 육에서 죽고 영이 태어나는 것은 육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육이 영이 되기 위해서는 육과 영 사이에서 끊어주는 게 있어야 돼요. 끊어져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를 분명히 한 가운데 육에서 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안에 어떤 매커니즘을 집어넣으면 되겠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언급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만 자꾸 예언적인 말씀을 했어요.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줄 테니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이제부터는 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나 그 사이에 ‘어떻게, 어떻게’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말씀대로 될 거야. 말씀대로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에서 우리가 약간의 힌트는 얻어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나오잖아요. 주께서 도마보고 “도마야, 봐. 잘 보이지? 나야 나. 나 보이지?” 이렇게 자기 몸을 보여주면 될 텐데 왜 도마에게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느냐 이 말입니다. 아니, 전체를 보여주면 되지 전체의 일부를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못자국도 예수님 몸의 일부고 창자국도 몸의 일부라면 전체를 보여주면 돼요. 왜 그 자리를 보여주느냐 이 말이죠. 그 자리를.

도마가 “나는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 하면 (두 팔을 쫙 펼쳐서) “자, 그럼 봐봐. 자, 봐. 이제 믿어?”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인간 육의 한계에요. 보고 믿는 육의 한계라고요. 도마한테는 인간 육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요소로 네가 나의 몸을 볼 때 주목해서 봐야 될 그 지점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하면 바로 육과 영을 끊어주는 사건의 지점이에요. 사건의 지점. 이걸 제목으로 할까? 사건의 지점. 무슨 사건이냐? 죽음을 몸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몸의 등장.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건화 시켜서 그것을 자기 몸으로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영체의 등장.

부활 같으면 아예 말끔해야 되거든요. 부활인데 뭐가 들어있어요? 자기 죽음 사건을 내포한 부활체에요. 이 부활체는요, 장차 오실 주님의 재림하는 부활체하고 또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그 부활체는 창자국, 못자국 없습니다. 뭔가 중간지점, 경계지점을 묘사하고 있어요.

경계지점. 인간 육의 한계와 영의 시작을 영이 되시는 분이 그것을 사건화 시켜서 몸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기다려. 너 봤지? 이제는 누구 차례냐?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서,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너희의 목숨 바쳐서 내 가는 코스대로 너희들도 이제 육 된 인간한테 죽임을 당해야 될 거야.” 요한복음 21장으로 끝나요.

그러니까 성경은 요한복음도 그렇고 끝이 이상하게… 드라마가 남아있는 것 같이 아직 일이 마감되지 않은 그러한 찜찜함을 자꾸 남겨두는 거예요. 저는 그 이유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서 계시가 완결되었다고 보지 않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처럼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 더 필요하다는 것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마지막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했거든요. 그럼 그 한 일을 다 적으면 그게 계시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걸 압축시켜서 다른 사도의 이름으로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편지라는 형식으로 그 안에 함축이 되어야 돼요.

그럼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지금까지 하신 모든 비밀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하고 에베소서를 내놔요. “창세 전의 비밀까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럼 창세 전의 비밀이 뭐냐? 그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쭉 편지로 나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가는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계시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사도행전보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보면 이해가 안돼요. 사도행전은 뭐냐? 사건으로 부딪치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골로새서에서 “너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 이 말들… 사도 바울 말고 인간들이 똑같은 사건을 일으켜도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없는 내용들이 편지에 있어요. 이 편지는 영원하게 현실화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매일신문이 아니고, 내일신문이에요. 내일일보.

이제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어떻게 육이 영이 되느냐? 이 말은 ‘육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반드시 육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되어 있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습니다. 그려보죠, 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보인다.” “어디 보이는데?” 이렇게 나오겠죠. 십자가를 예수님 몸 안에 새겨진 십자가로 보게 되면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몸은 부활해서 지금 안 보이잖아요. 하늘나라 가서 안 보이죠. 안 보이지만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안 보이는 형식, 머리라는 거예요, 안 보이는 형식으로 이 세상에 사건화 되는 주님의 일이 나타나는데 그 모든 일은 어디로 집중되는가?

전부다 십자가의 의미로 집중이 되어 있고, 이 말은 달리해서 앞으로 남아있는 모든 현실세계는 십자가 의미에서 파생되어 사건화 된 자체로서 이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다 십자가에서 출발한 그런 의미에요.

문서 발송처럼. 우체국에서 문서를 발송할 때 서울 광화문 우체국에서 발송된 것이 제주도까지 퍼지는 것처럼 현재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시작한 일이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품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려면 어디를 밟아나가야 돼요? 십자가까지 가야 비로소 그 의미가 파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 대 인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끝났어요. 하나님과 인간은 이스라엘 멸망으로 실패로 끝났어요. 그다음 뭡니까? ‘하나님과 아들’,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아들과 성도의 만남’, 지금 이 이야기에요. 네 번째 관계, 아들과 성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3장이 여기서 투입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서 성도를 모집하는 거예요. 성도는 모집책이에요, 모집책. 마약 거래하는 것처럼. ‘캄보디아 가시겠습니까? 좋은 직장 있습니다.’하는 것처럼 모집책. 성도는 모집책이에요. 성도는 답답한 게 없어요.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모집책이 되었으니까 성도는 자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다고요.

아들에서 성도가 될 때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될 때 관계는 성령이었습니다. 이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아들의 영으로서 성도에게 주어져버리면 하나님이 아들에게 한 일이 성도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러분 아시죠? 그럼 계속 나가봅시다. 복잡해요, 이게.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은 첫 번째, 예수님은 실제로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에요. 허깨비가 아니고 실제로 육신이 되어야 십자가 질 거 아닙니까. 두 번째, 예수님은 실제로 저주받을 죄가 본인한테 넘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세 번째, 죄가 뭐냐? 육이에요.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육에서 어떻게 영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십자가 사건의 내막이 뭐냐?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버렸으니까 우리는 나 몰라라 에요. 우리는 육의 한계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십자가 의미가 뭐냐? 그건 십자가 지신 분의 영이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는 십자가지지 않고서는 너는 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 같은 육신을 지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성사될 때만, 성사되고 확립된 그 해답지만 우리한테 넘겨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는 거죠.

“목사님, 왜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십자가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 증거하면 행함이 되고 행함은 필히 자기 의를 낳는다고요. 그럼 자기 의가 있다는 우리를 우리가 온전히 미워할 수 없고 미워할 수 없으면 우리가 온전한 십자가 졌다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는데 미워하는 척하고 십자가 지고 이건 안 되거든요.

그럼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이 뭡니까?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밟아요. 철저하게. 3장에서. “예수님 왜 죽은 줄 알아?” “저주받아 죽었지.” “너희는 저주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그러니까 넌 탈락이야.”

자꾸 예수님과 비교해보세요. 예수님은 저주받았거든요,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사람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저주를 원하지 않는다고요. 인간은 사랑을 원하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은… 주일 낮 설교하면서 단어 하나만 끄집어내라면 이걸 끄집어내고 싶어요. ‘돌이킬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바르게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 터져버린 이상, 저주가 보편화된 이상 어느 누구도 어떤 영웅이나 거인이 와도 이것은 ‘돌이킬 수 없잖아~’ 돌이킬 수 없어요!

그냥 우리는 이 사태에 밀려갈 뿐이에요. 애들 노는 워터파크에 가면 재미나 있지. 우리도 재밌게 삽시다, 저주에 밀려. 돌이킬 수 없어요. 나 안 해!? ‘안 해’가 어디 있어요, ‘안 해’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에서는요, ‘나 이제 성도 안 해. 나 천국 안 갈 거야.’ 이게 안 돼요, 이게. ‘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천국 가야 됩니다.’ 이거에요. 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당신 주도가 아니고 성령이 주도권을 쥐어서 좋으나 싫으나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됩니다.’ 이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철저하게 우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우리를 저주받는 자 되게 하죠. 저주받는 자. 그래서 복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430년 후에 저주가 찾아옵니다. 아, 이건 예상도 못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 자부했는데 돌아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저주가 오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저주받는다. 복인 줄 알아라.” ‘주님이 하시는 코스에 같이 참여된 것만 해도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그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죠.

그래서 그 이스라엘적인 안목을 가진 자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3장 16절 같은 경우에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럼 여럿 중 하나냐, 모든 여럿을 배제한 하나냐? 당연히 배제한 하나죠.

그 증거는?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버림받았잖아요. 대표로 버림받았잖아요. 버림받은 자리에 예수님 딱 한 분 등장했어요. 제대로 저주받은 분이 딱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의 믿음은 다 사기였던 겁니다. 믿음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믿음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죽은 자를 살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해내십니다.’라고 받아들이는 믿음이에요. 내게서 난 믿음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해내는 그 행함, 결과로서의 원천인 그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선물로 받은 믿음, 성령을 통해서 받은 믿음이 바로 그 믿음입니다.

26-29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 됐죠. 이 믿음이 다수입니까, 하나입니까? 그렇죠. 하나죠. 예수님 믿음. 예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되시니까 지체한테 믿음이 관통해서 내려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다음부터는 너희들끼리 측정하거나 평가하거나 복수하거나 심지어 너 자신도 너를 평가하지 말라. 잘했다, 못했다 네가 그 입을 뗄 자격이 없다. 주께서 나의 의를 파괴시키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것만 증거하면 돼요. 나의 잘남과 멋있음과 신앙 좋음을 깨부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오후 때 기도한 것처럼 우리는 엑스트라니까, 엑스트라 임무가 뭡니까? 주인공만 돋보이는 일을 하면 되거든요.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아들이 받는 영광, 천국)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했죠. 그럼 ‘너희’니까 이건 다수잖아요. 분명히 다수가 아니고 하나라 해놓고 여기서는 다수다 이 말이죠.

그 모든 다수라도 그들이 갖고 있던 믿음은 선물로 받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관계가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인수인계된 거예요. 육에서 영이 된 것은, 영이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서 ‘우리는 육이었습니다.’는 고백이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입니다. 말씀대로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를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었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주의 믿음을 받고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감사하고 주님이 하신 것만 드러낼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의 잘남과 의가 부서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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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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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