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2:16-17 (정혼의 가치)
정혼의 가치
2005년 4월 10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2:16-17
22:16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22:17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하는 일례로 돈을 낼찌니라
인간은 욕구대로 삽니다. 정상적인 이성이란 자신의 신체적 욕구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성보다 감정이나 기분은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밝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완벽하게 끊을 수 없는 감정입니다. 비록 주체하지 못한 욕구로 인해 처녀를 범해서 참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후회를 해보지만 과연 그것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욕정이 중지되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또 새로운 계기가 생기면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작렬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이성적으로 '안해겠다'해서 멈춰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여자를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에게 최종 책임이 있는 양 둘러 댈 것이 분명합니다. 이같은 불같은 욕정은 인간이 이미 타락의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저지될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들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감정을 주체못하고 바깥으로 푸는 쪽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따라서 인간 사회란 감정과 감정의 충돌로서 구성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도 이런 감정의 충돌로 인해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맨 처음 남녀 관계는 어떠해야 한단 말입니까? 창세기 2:24-25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두 사람이 결코 두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미 범죄한 이상으로 다시 이런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범죄한 욕정은 마구잡이로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여자로 보고 음욕을 품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욕정들은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해서 이 사회는 각자 자기 중심으로 보는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충돌과 만남으로 인해 각가지 고통이 발생됩니다. 만약에 밥그릇은 일인 분인데 굶주린 형제 10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거기에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것은 다 거짓임이 드러날 뿐입니다. 착한 일 해야한다, 희생해야 한다, 봉사해야 한다는 이성적 결정보다 나의 욕구부터 채우라는 본능이 먼저 작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녀를 범한 남자의 문제점은, '사랑'이 빠진 상황이 유발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나름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덤벼들겠지만 이미 타락한 이 후의 '사랑'이란 인간의 개인적인 욕정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두 사람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즉 어느 정도도 수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잠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잠언 5:15-19에 보면,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한 아내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이미 인간에게는 상실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자나 여자는 자기 남편으로나 자기 아내만으로 만족감을 갖는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 못해 사는 겁니다. 형편이 안되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바입니다.
신약의 예를 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부부가 되기에 더욱 난감합니다. 에베소서 5:22-25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원래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그 부부 사랑의 원칙에는 조금도 달라짐이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이런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동원해도 자신의 근원적인 죄성을 극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자인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성의 정조를 돈으로 환산해서 갚으면 그만인 것처럼 느껴지신다면 이는 자기 감정에서 나온 행동을 여전히 정당화하는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자 가정의 아품에 처녀를 범한 남자가 동참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주체 못할 자신의 감정 발산이 결국 주변사람에게 아품과 고통을 발생시키는 식으로 이어짐을 우리가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말도 안되는 변명쪼의 사랑은 하나님의 참 사랑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가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로 잇습니다.
이것은 부부가 생활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남편으로서 부족하고 아내로서 부족하다는 절실하게 느껴서 예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에 마음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이 모세 시대에는 여성이란 경제적으로 비자립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즉 여성으로서 피해보는 것은 곧장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식으로 하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진정한 사랑도 모르는채 나름대로 사랑행각을 벌리는 남성들로 인해 오늘도 십자가에서 고통이 흘러나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런 고통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때만 파악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욕심만 차리며 살기 않게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