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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전달 입자250813우리교회열왕기상

전달 입자(열왕기상 16:8-13)

전달 입자

2025년 8월 1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6:8-14

16:8 유다 왕 아사 제이십륙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을 위에 있으니라

16:9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16:10 들어가서 저를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 왕 아사 제이십칠년이라

16: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16:12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16: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16:14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바아사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죽을 때에 그냥 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격노케한 행위와 같이 본인도 하나님을 격노케 하면서 시므리라는 장군에게 살해 당합니다. 바아사와 그 아들 알라 왕이 본인만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격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왜 이런 사실을 이스라엘 왕 역사책에 굳이 기록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6:14) 보통 세상 역사책에 있어 왕가의 변고들은 인간들의 현 자신의 국가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 인간들의 왕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록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사용되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의 일부로서 이스라엘 왕가에 변고가 발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인간보다 약속이 먼저임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나타난 민족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존재 원칙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미리 주어진 바가 있습니다. 그 언약이 창세기 12:2-3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약속에 의할 것 같으면 이스라엘 민족이 지상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기능이 확립되어져 있습니다. 무조건 아브라함은 복을 받고,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복을 전달받은 민족도 자동적으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없는 다른 민족은 어떻게 될까요?

그 이방민족은 저주받는 것으로 역시 확정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 복은 나타났는데 그 복이 아브라함 자손의 나라인 이스라엘 안에 굳건하게 들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이라는 조상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라는 조건에 합하여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복을 받는게 맞을까요? 신명기 28:6과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즉 저주가 이스라엘 외의 민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복과 저주를 완성시키려는 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율법을 위배하게 되면 복 대신 집에 들어가도 저주받고 집을 나와도 저주받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율법을 완전하고 늘 지키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 2:10-11에 보면,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율법 자체가 하나로 단결되어 있기에 하나를 어기면 자동적으로 나머지 다른 것들을 다 어긴 것으로 규정지어집니다. 줄곧 잘 지켜왔더라도 어느 때 한 순간의 감정으로 ‘원수를 미워했다’면 그동안 지켜진 모든 율법 지킨 것으로 소용없게 되어 들어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에서 약속하신, ‘아브라함 자손인 너희들은 복된 민족’이라는 것은 무효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그냥 날려 보내신 헛바람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말씀의 활동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도 결국 죽습니다. 있다가도 없는 겁니다.

이점은 이방민족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벌리는 활동‘이란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나타내기 위한 계시 활동의 결과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 어떻게 해서 율법에 의한 저주에서 복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구성 요소에는 인간이 끼어들 수 없고 언약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과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러한 구성 요소를 전달하는 ’전달 요소 기능‘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가 이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후 선지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언약을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이 ’전달요소‘는 성도를 통해서 수행되는 기능입니다. 이점을 예수님께서는 ‘회개’로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이 말씀에 보면, ‘죄인’과 ‘의인’이라는 상반된 규정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 존재는 저주가 마땅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복의 구성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저주의 구성요소가 될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약의 성도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전달받게 됩니다. 자신을 천국의 구성요소가 되기를 노리고 회개를 해버리면 그 회개한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의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바리새인이 정기적으로 금식하면서 엄청나게 회개하고 반성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성하고 회개해도 ‘나 여기 있음’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함과 연관된 나를 어떻게 하든지 살려내겠다는 시도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 우상화일 뿐입니다. 진정 전달요소는 홀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은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자들인데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홀로 자기를 위한 힘을 모으는 자들입니다.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자기가 모은 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회개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분노가 왜 일어났는지를 보이는 ‘저주 전달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선행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3강-열왕기상 16장 8-14절(전달 입자) 25081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6장 8-14절입니다.

열왕기상 16:8-14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륙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위에 있으니라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들어가서 저를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이라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바아사’의 아들 ‘엘라’ 그리고 그 집안을 몰살한 ‘시므리’, “이런 이야기가 역대지략 곧 왕의 역사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4절)라고 나타나 있는 이유는, 결국은 ‘사람은 없다’라는 거예요. 사람이 없다.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기거든요. 또 자기를 사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겁니다.

만약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사람이 있던 그 자리에서 이 세상에 뭐가 나타나는가? “엘라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6:14). 다시 말해서 말씀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 민족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하고,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말씀이 우선이고 사람보다 약속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있어 버리면 존재가 되는데 그 존재를 제껴버리면 비로소 거기에서 약속이 나옵니다. 인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있다가도 하나님께서 없애버리면 그 현장에 인간으로 가로막혔던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계획이 그 현장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압축해서 한꺼번에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없다’가 돼요. ‘인간이 없다’가 되면 근심 걱정도 없지요. 모든 괴로움과 근심 걱정이 어디서부터 오는 겁니까? 인간 대 인간이 존재하기에 생긴 거잖아요. 주부가 하는 일이 뭐예요? 남편 섬기고, 자식 키우는 그게 주부지요. 만약에 남편이 없다, 자식이 없다 한다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아예 없지요. 아예 없는 거예요.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사람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거운 책임감과 더불어서 뭔가를 꼭 해야 한다는 것, 억지로라도 안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런 과업, 그런 일들이 자꾸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바아사’라는 사람이 ‘여로보암’과 ‘나답’이라는 그 집안을 작살냈습니다. 그런데 ‘바아사’왕의 아들 ‘엘라’가 2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그 엘라를 ‘시므리’라는 사람이 또 작살냈습니다. ‘시므리’는 그 당시 군대의 반을 통솔하던 사람이에요. 그 나머지 반은 누가 통솔했는가? ‘오므리’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뒤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6장 16절에 나오지요.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므리’가 ‘시므리’를 작살낸 겁니다.

그러니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무엇도 살아 있는 그것만큼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인가?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하다가 또 다른 군인한테 당해서 죽을 때 중간에서 누굴 죽이고 누가 왕이 되었든 그것은 다 빼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 그것뿐이에요.

그러면 사람이 깊은 산골에서 감자 캐면서 살았더라도 한 50년 뒤에 보면 그 사람이 죽었어요. 깊은 산속에 혼자 살았어도 있다가 없어지고, 군사쿠데타 일으켜서 계엄선포하고 뭘 해도 그것도 죽고,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그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그렇게 마찬가지라면 성경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열왕기상 16장 14절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 기록할 만한 일을 다른 나라에서는 일으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나게 하신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어요. ‘태어났다, 죽었다. 태어났다, 죽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뭐냐?

“다른 이방 나라에서는 ‘태어났다, 죽었다’라는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스라엘도 그들이 태어나서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결국 죽었다. 하지만 그 벌어진 일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그 취지에 해당되는, 곧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과 관련된 일이 일어나서 죽었다. 따라서 그들이 행한 것은 왕의 역대지략. 왕의 역사책에 기록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기록된 것이 바로 열왕기상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다른 나라는 말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말씀을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야 하고, 거기에서 살아야 할 자들이 태어나야 하고, 죽어야 할 자는 죽어줘야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서는 ‘태어났다, 그리고 죽었다.’ 해서 허무하지만, 개인과 개인의 그 만남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고 이스라엘이 보여줘야 할 말씀의 진실, 말씀의 본질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그런 안목으로 봐야 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임금이 등장했다. 군인으로서 왕을 처단하고 왕이 되었는데 후임자에게 그대로 당했다.’ 이것이 이방 나라 같으면 별 의미가 없는데 ‘이스라엘에서의 그 일은 무슨 의미와 뜻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책, 성경책에 기록을 꼭 하셔야 했는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제부터 그 의미를 알아가면 되겠지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특수성, 다른 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성, 하나님이 택했다는 그 내용 안에 왜 군사쿠데타 같은 것이 일어나고, 죽고 죽이는 그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신명기 28장 6절과 19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6절과 19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제가 여러분 집에 심방을 갔는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야, 이거 뭐, 봉투가 막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라는 이 구절을 선택하면 되는데 눈이 나빴는지 하필 19절을 선택했어요.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이것은 ‘심방 안 온 것만도 못한 것’ 이렇게 되는 거지요. 자 여기서 다른 이방 민족에게는 없는 이스라엘 그들만의 특수한, 곧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모습, 현상을 이스라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너는 이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보통 가정에서는 집안에 있으면 좀 안심이 되고 바깥에 나가면 ‘애가 길 건너다 차 사고 나지 않을까, 애가 혼자 가다가 길에서 자빠지고 엎어지지나 않을까…’ 하여튼 집 밖에만 나가면 온갖 염려 걱정이 늘어지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 의하면 집 안에 있어도 복되고, 집 안에 있으면서 강냉이 삶아 먹어도 복되고, 차가 싱싱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서 걸어가도 복되고, 어딜 가도 주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 432장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그 다음에 나오는 가사가 “…아무 때나 어디서나…” 나이트 클럽에 가든지 어딜 가든지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기도 안 했는데 아들이 월남 파병 가고서는 자식 걱정 때문에 새벽마다 집에서 잠을 자지 않았어요. 교회에서 아예 주무시면서 자식이 무사히 귀환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 장모님. 저는 월남전에 안 갔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괜찮다는 거예요. 월남에 전쟁하러 갔든, 다낭에 놀러 갔든 어딜 가든, 집에 있어도 복이고 나가도 복, 복덩어리라는 거예요. 조건이 있습니다. 율법대로 다 지키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 2장 10절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기를 원했던 인간을 아주 약 올리는 것 같은 말씀이 나와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키면 집에 있어도 나가도 복인데 그 많은 율법 가운데 단 하나라도 어기면 집에 있어도 저주고 나가도 저주’라는 거예요. 99퍼센트를 지켜도 1퍼센트 어기면 99퍼센트 지킨 것이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어떤 인간도 복 받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복 받을 인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없다는 말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정답, 오답이 아니고 정답, 복 받을 만한 답을 알고 있는 자,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없으면 결국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더라도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있으나 마나 “있었나? 내가 보기에는 없어.”라는 하나님의 안목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없고 뭐가 있느냐? “네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라는 말씀 자체만 달랑 남아 있지요. 지킬 인간이 없으니까요. 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저주 대상이지요. 인간은 저주 대상이지 복의 대상이 애초부터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앞에 창세기가 있어요. 창세기 12장에서 두 개의 말씀의 어떤 차이성을 발견해야 해요. 신명기 28장에서의 말씀은 뭐냐? 복을 언급해서 ‘아무도 복 받을 자가 없고 모두 다 저주받아야 합당하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신명기 28장에서 복과 저주를 거론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신명기 28장에 의하면 복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아브라함 자체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브라함은 무조건 복!” 이렇게 찍었어요. 아브라함은 무조건 복이에요.

인간세계에 복이 없어야 마땅한데 복이 덜렁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브라함에게 복이 나타났으니까 아브라함 안에 들어 있는 그 복이 확산되면 그것이 천국이 돼요. 아브라함의 복이 누구에게 전달되고 또 전달되는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매개로 인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복을 또 전달받는 식으로 해서 그들은 복된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축복해서 복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누구든지 말씀대로 사는 경우에만 복 받는다는 그 말씀은 그 사람에게 해당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는데 신명기 28장의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어느 날 율법 하나를 어겼어요.

맘속으로 누굴 미워했다 그 말이지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데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누가 내 발등을 밟는 순간에 “에이 씨(C)!” 거기에 비타민 C, ‘씨’가 들어가서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옴으로써 지금까지 원수를 사랑한 것은 허물어지고 갑자기 나가도 저주, 들어와도 저주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을 축복해서 받은 복이 과연 취소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있느냐, 아니면 복과 저주가 있느냐?”를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있느냐, 아니면 복과 저주가 있느냐.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이 있느냐, 아니면 복과 저주라는 말씀의 결과가 있느냐? 둘 중에 어느 게 있고 어느 게 없느냐?”를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답을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은 없습니다. 그리고 복과 저주만 있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아브람’으로 시작해서 ‘아브라함’으로 넘어가면서 ‘아브람’이 죽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성립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에게 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준 약속이었어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님이거든요, 여럿을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명의 자손만 있다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3장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자손’이라고 한 거예요.

하나의 자손 되신 분은 예수님이거든요. 갈라디아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러 명이 아니고 오직 단 한 명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 바로 그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니까 나는 율법을 다 온전히 안 지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복의 전달, 전수 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받고 천국 백성’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들, 이 하나의 자손과 자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자손들’이 하나의 ‘자손’을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브라함 조상을 숭배하고 존경하고 축복한다고,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복을 받은 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중 단 하나도 아브라함의 자손 되시는 예수님과 연결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참된 인간은 오직 예수님뿐이고,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주께서 지금 뭘 테스트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복의 기준인데 그 기준에 혈통으로 자손 된 자라고 자부했던 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어요. ‘그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은 하나님의 복에 부합하는 합당한 천국 백성이 아니라’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만드시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열왕기상에 나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에 합당한 짓거리를 해서 본인들이 남을 죽이고 본인들도 또 다른 사람에게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습니다. 이방 민족한테는 “태어나봐야 인간은 없어져.” 이스라엘도 태어나봐야 인간이 없어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까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 점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하고 다를 바 없이 자기가 복되다고 간주하지만 예수님이 보기에는 전부 저주의 대상이거든요. 그렇다면 굳이 이런 일들, 군사쿠데타 일으켜서 왕위를 뺏고 하는 그런 일이 이스라엘에서 왜 일어나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열왕기상 16장 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이스라엘 민족에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자부하는 열두 지파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하심, 하나님의 저주하심이 얼마나 그들에게 합당한 조치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어차피 있다가 없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 저주하고 심판하는지의 그 경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찾아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하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러면 이스라엘 말고 오늘날 신약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기 위해 있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오겠죠?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온 율법을 다 못 지키니까요.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가도 저주받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래도 차 사고 나야 저주지 집 안에서 편안하게 단잠 자고 있을 때는 저주 아니’라고 느끼죠. 사람은요, 자기가 살아있는 걸 당연한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이 살아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걸 이상하게 여겨야 해요. 왜 율법을 어기고 말씀 하나 제대로 못 지키면서…, 물론 지키려고 애써도 못 지켜요. 말씀을 하나도 못 지키면서 기어이 또 살아야겠다는 그 고집은 또 어디서 나오는 고집인지 몰라요.

이런 말이 있죠. 잘해주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짓고 있는 인간을 살려주니까 인간은 그걸 권리인 줄 알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생각한 게 온통 밥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해요. 하나님과의 관련성? 언약의 관련성? 이런 건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살아나면 됐지, 뭐 그걸로 난 족하다.’ 혼자 족하죠. 지금 저주의 대상인데요. 집에서도 저주고 나와서도 저주인데 뭐가 족해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이 땅에 왜 있는가? 그것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누가복음 15장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되어 있어요.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99마리의 양과 1마리의 양을 구분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지금 100마리의 양 가운데 1마리의 양과 99마리의 양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면서 두각을 드러내는, 뽑아내려는 취지,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 뭐냐? 다 같은 죄인이지만 회개할 게 없는 의인 99과 회개한 하나의 양을 극대로 대비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서 오늘날 죄인을, 성도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을 살려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게 있어요.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것 그걸 제일 기뻐해요. “내가 말씀 지켜서 나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 그런 잽이 못 되고 그저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그 회개, 회개를 찾고자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살려 주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명한 탕자 이야기도 있어요. 탕자도 회개하고 돌아왔잖아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라는 게 있어요. 그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왜 주님께서 하셨는가? 누가복음 16장 3절에 보면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지금 이 불의한 청지기가 그 신세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 부끄럽게 됐어요. 그리고 땅을 파서 농사지으려고 하니까 힘이 없고요. 모든 게 절망적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볼 때 절망적으로 보는 것, 이걸 지금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도에게서 찾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내가 내세울 게 없어 부끄럽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구나. 내 힘으로 살 수가 없구나.”라는 고백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기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걸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걸! 마태복음 9장 17에서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라고 하시는데 새 술을 담는 새 부대가 어떤 부대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라고 했습니다. 내가 죄인 되는 그 부대에 예수님이라는 새 술을 담으면 그게 오롯이 하나님이 기뻐하고 영광이 되는, 복이 되는 그러한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게 회개를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냐? 뭘 어떻게 하는 걸 회개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 반성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회개는 뭐냐? 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내용에 그렇게 쉽게 접근을 못 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자기 의로 축적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방지되어야 해요.

회개했으면 그 회개한 것이 자기 자랑거리가 되고, 자기의 잘난 일이 돼버리니까 인간은 회개를 천번 만번 해도 이걸 없앨 수가 없습니다. 회개 천만번하고 지옥 가요.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를 해낼 재간도 재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존재가 있다고 살아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과학의 힘을 좀 빌렸습니다. 과학에 보면 최종적으로 원자보다 더 작은 걸 입자라고 하는데 입자를 과학자들이 둘로 나눴어요. 하나는 ‘페르미온’(fermion)으로 또 하나는 ‘보손’(boson)으로 나누어서 최종 입자를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페르미온’은 힘을 이루는 ‘구성 입자’라고 했어요. 사람들은 ‘원자를 쪼개면 입자가 되는데 그 쪼개진 입자가 뭐냐? 원자를 구성한 입자잖아. 원자를 쪼개면 쪼개진 하나하나가 구성 입자가 되니까 입자는 구성 입자 외에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무슨 말이냐? 내가 만약에 하나님 말씀대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나는 가망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 봤자 그렇게 이야기한 그 회개가 주님에게 가는 게 아니고 도로 나에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동전이 떨어지는데 하늘에서는 작게 보이다가 나한테 떨어질 때는 크게 보이잖아요? 내가 한 회개는 나의 공로로 나한테 도달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 존재의 문제성입니다. 백날 회개해도 ‘네가 회개했나? 내가 회개했지.’ 그래서 내 존재가 있는 한 회개한 내가 구원받는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이 안 되죠?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뭘 발견했느냐? ‘보손’이라는 걸 발견했어요. 보손은 원자가 깨진 입자는 입자인데 그것은 ‘전달 물질’이에요, 전달 물질. 그 전달 물질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6장 12절에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이 ‘예후’라는 자가 선지자예요. 선지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에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말씀이 먼저 있고 그 있는 말씀을 우체부처럼 그냥 전달하는 겁니다. 말씀이 내 게 아니에요. 자기는 말씀을 실어 나르는 존재에 불과해요.

물리학에서 페르미온이라는 구성 입자 따로 있고 보손이라는 전달 입자 따로 있는데, 구성 입자의 특징은 자기 외에 어떤 외부의 것을 배타해요. 이걸 물리학에서 ‘배타원리’라고 합니다. 페르미온에는 나만 들어있고 나의 짝도 못 들어오도록 밀어내는 이 ‘배타원리’가 작용합니다.

그런데 보손, ‘전달 입자’의 특징은 중첩이 가능해요. 하나님과 내가 중첩이 가능해요. 회개 했으니까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짓눌러 버려요. “이제는 네 존재가 아니고 내 존재다.” 주님의 존재가 내 존재를 없애고, 빵꾸 내고 그 자리에 주께서 우리의 존재로 들어 와버립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약속대로 모든 율법을 홀로 다 이루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집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으나 어딜 가도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고, 심지어 지옥 가도 복 받고 천국 가도 복 받고, 복 받는 이유가 유일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죠. “열왕기상은 왕과 선지자 사이의 전쟁터다.” 전쟁 이야기에요.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된 왕들의 모든 허점과 문제점은 어디에 비추어서? 선지자가 전달하는 말씀에 비춰볼 때 “왕 같은 왕은 하나도 없었더라”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왕들이 있고, 그 왕의 계열을 좇아서 진짜 다윗의 자손,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중간에 엉터리를 깔아놓고 그 엉터리 되는 왕들의 의도가 뭐냐?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 천국의 구성 입자로서 본인을 계속 우기는 거예요. ‘나에게도 힘이 있어야 한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구원받을 힘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본인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 못 하고 나는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나에다가 하나님이 구원하는 힘을 실어서 있는 내가 천국에 합격하는 나 되기를 원할 때 그런 것은 바로 ‘구성 입자’지 ‘전달 입자’가 아닙니다. 이건 이스라엘 왕이 했던 오류를 반복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회개하고 얼마나 금식하고…, 그냥 회개하지를 않아요. 굶어가면서 회개하고 “부족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맨날 이랬어요. 주님께서는 “많이 부족하세요! 지옥 가서 또 그 짓하세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성경에 있는 말씀을 참고로 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 내 것으로 끌어당기면 그것은 나를 위함이지 주를 위함이 아니에요. 그러면 회개란 뭐냐?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죄인인데 예수님은 의인이 됐다’라는 그 복음을 전달하는 그 전달의 모습이 회개에요.

“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인데 주께서 찾아와서 나를 주의 어깨에 메이게 하고 주께서는 더덩실 춤을 추며 나를 자신의 나라로 데려갔다.” 이게 동행이잖아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4-6절에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요? 말씀 되시는, 곧 말씀을 예수님이 이뤘으니까 이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말씀도 누가 이룹니까? 예수님이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이뤘다는 것을 전달하는 자체가 회개이며 이것이 오늘날 성도에요. 그래서 성도는 혼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접붙임을 받아야 해요.

그게 로마서 11장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데 조건이 있어요. 접붙임을 받는 거예요. 홀로 다 이루어내신 그 예수님의 의에 염치불구하고 죄인 주제에 접붙임을 당하면 그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의가 이 죄인 속에 흘러들어와서 주님의 공로만 남한테 전달될 때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서는 회개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복의 기준점이 되는 사람입니다, 택한 백성.

아브라함, 택한 백성이죠? 아브라함에 주신 그 말씀을 이제는 예수님이 확보하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그 출발점을 예수님으로 해서 예수님이 자기 의를 분배해버리면 예수님의 의를 분배받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그들이 천국 백성을 이루는 겁니다.

그 기능을 이방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엘라’ ‘시므리’ 또 다음에 나오는 ‘오므리’ 이 사람들은 동행이 없어요. 본인이 힘을 가져야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궁극적으로 “넌 없어. 오직 말씀만 있어.” 말씀만 활동하는, 하나님의 언약만 활동하는 그 현장에서 소위 내가 있다고 우기면서 설쳐대는 그 꼬락서니의 인간들, 군상들이 ‘바아사’였고 ‘엘라’였고 ‘시므리’였고 다음에 ‘오므리’ 나오고 ‘여로보암’ 나오고, 이런 군상들이 불쑥불쑥 나왔던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이 세상에 나가서 자기 혼자 살겠다는 그 군상들을 많이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뿐이고 우리는 말씀의 기능대로 전달할 이 마지막 때의 선지자인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내 것 안 받으시고 주님의 것만 받기에, 주님의 것만 우리가 바라보면서 매일 같이 감사하면서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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