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성
히브리서 11:30-31 여리고성
단단한 여리고성, 인간 힘과 지혜의 집결체. 인간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안전을 스스로 보장합니다. “나오라”를 거부합니다.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리고성을 무단으로 침투한 정탐꾼의 존재는 기생 라합에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여리고성은 ‘무너졌음’의 사인같이 느껴졌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등장은 이미 ‘이 세상은 멸망했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입장에서 평소의 삶은 이렇게 됩니다. “멸망하는 곳에서 멸망될 때까지 나는 무엇하면 되지?” 정답은 이러합니다.
그 멸망하는 모습을 들추어내는 정탐꾼적인 활동을 실시하면 됩니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멸망하는 모습을 찾고 발굴하는 정탐꾼의 삶을 살면 됩니다.
기생 라합은 이미 정탐꾼은 한패입니다. 기생 라합은 자신의 보존보다 정탐꾼의 안전이 더 중요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탐꾼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의 멸망과 정탐꿈의 출현이 연관성을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모든 사회 영역과 활동이 이 세상 멸망의 징후로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하고픈 일이 개성있게 갖게 마련입니다. 소위 말해서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이 곧 자신의 평생 직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의 일을 통해서 멸망의 소식 증거들이 속속 눈에 들어오도록 조치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 29-31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삶이란 이런 겁니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라 멸망이 기정사실화 시킨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