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3강(십일조) 복음이냐 교회냐 2강(유령과 성령) 250721
대전-신명기(33강) 신명기14:22(십일조) 20250721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4장 22절,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것이며" 여기에 ‘마땅히’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누가 누구한테 마땅히 준다는, 제공한다는 말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라는 의사 표시겠죠.
내가 노동해서 내 땀과 희생이 들어갔다고 한다면, 이 세상 법적으로는 소유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땅이 내 땅이 아니라, 남의 땅에 내가 땀 흘려서 농사지었으면, 거기에 대해서 그 토지 임대비용을 땅 주인에게 줘야 되겠죠.
십일조를 언급하면서 레위기에 나오는 그 점을 먼저 전제로 하시는 게 좋은데요, 레위기 25장 5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땅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땅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민족이거든요. 약속의 민족이니까, 이건 계약한 민족이죠. ‘계약을 했다.’
그 계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살게 해주겠고, 약속의 땅에 살게 해주겠다는 그 조건으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되는 겁니다. 이게 계약 조건이에요. 이 계약 조건, 이스라엘의 첫 번째 계약 내용이 뭐냐 하면, “땅이 있다.” 땅이 있다는 말은 "내 땅에 살게 해 줄게." ‘살게 해 주겠다’는 조건이죠.
두 번째 조건은 뭐냐, "모든 계명과 율법을 지켜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계명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그 정신 자세는 너 자신의 구별됨, 타인과의 다름, 너의 특수성, 특이성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것은 먹고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 했잖아요.(11:2-8) 굽이 갈라진 것과 되새김질하는 것을 먹으라는 이유가 네가 애굽 사람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차이점은 애굽에서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투입시킨 하나님의 그 특이성,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이 바로 구체화되면 유월절 양이었죠. 유월절, 그냥 넘어가주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특별 혜택이고, 이 특별 혜택을 신명기 내내 이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질투를 낼 정도로 사랑했다." 질투를 낼 정도로.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지독히 사랑한 거예요.
어느 정도로 지독히 사랑했는가를 미리 보여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독하게 사랑했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자식이 없는 데서 나왔고 그랬으니까. 그 없는 데서 나왔다는 사랑에 추가적인 사랑을 더한 것이 뭐냐 하면, 죽은 데서 살렸습니다. 죽은 데서 살렸으니까 자식이 아브라함 본인보다 더 소중하게 돼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브라함의 임무가 달라졌죠. 하나님의 계약에 의하면, 언약에 의하면, 또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시에 의하면, 어쨌든 간에 이삭은 지켜줘야 된다. 이삭은 내 장자이기 때문에. 십일조는 바로 맏이, 장자에 관한 거예요. 십일조는 장자에 관한 것. 하나님의 율법 안에 십일조 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압축됐다, 응축됐다, 완전히 이렇게 꽉 들어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덩어리, 그 사랑의 덩어리를 이스라엘은 계속 운반해야 하고, 이것을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고, 바로 그 마음 자세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가지고 마음적으로 이 계명을 대하는 그 태도, 자세가 "주님은 어찌 이렇게 저를 사랑해 주십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계명에 접근해 가고 그 계명과 말씀을 다룰 때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게 되는 거예요.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게 돼요.
그래서 그 말씀과 계명을 다 지켰을 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은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나랑 같이 특이성을 부여받은 내 형제가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그 결과물들이 천국 백성이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죠.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이제는 파악을 해야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계약 조건이 뭐냐 하면 "땅을 주겠다." 무슨 땅이냐? 그냥 땅 아니고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은 땅이 있다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땅 자체가 변질돼야 돼요. 땅의 성격 자체가 변질돼야 돼요. 땅의 처음 성격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와, 땅이다!" 이게 뭐냐면 에덴동산을 포기하고, 사실은 포기한 게 아니라 쫓겨났지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마지막 하나님이 허락한 곳은 뭐냐 하면, 대지였어요.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의 『대지』 있죠? 우리나라 작가 박경리(1926~ 2008)의 『토지』나, 펄 벅의 『대지』가 뭐냐 하면,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산다는 거예요.
성경 창세기 3장에 한 줄로 돼 있는 것을 가지고 열 몇 권의 대하소설을 만들어서 한 얘기가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산다.’, 거기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 땅에 나는, 몸은 죽어도 대대로 이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그게 소설 내용입니다. 그게 소설 내용이에요. 종족을 이어가는 것, 어디에서? 땅 위에서.
그 말은 ‘땅이 있다, 종족 보존한다.’ 합치면 무슨 뜻이냐 하면은 "땅은 우리 인간 것이다" 이겁니다. 그게 흔하고 흔한 땅에 대한 인간들의 본성적인 인식이 그런 거예요. 그 인식을 하나님이 엎어 버립니다. 너희들의 그런 ‘땅은 우리 땅이다, 우리 종족의 땅이다’라는 것은 특이성이 없고, 그건 일반 애굽 사람들이나 일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특이성이 있는 이스라엘은 땅에서 살기는 살되, 그 땅은 어떤 땅이냐? 기존에 없는 땅, 없는 땅인데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면 비로소 없는 데서 생긴 땅, 신약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의 땅인데, 거기서 부활이 되는 땅, 그게 부활의 땅, 또는 없는 데서 생긴 땅, 그것을 합치면 무슨 땅?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
옛날에 KBS에서 드라마도 했어요. 목사가 개발해서, 충청도 쪽에서. 서울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 모아 가지고, 뭐, 새벽을 깨운다고 했던가? 김진홍 목사가 새벽을 깨워서 거기서 개간한 땅 이름이 ‘약속의 땅’이라는 거예요. 뭐 이스라엘도 아니고요. 누구를 사랑하겠어요? 자기를 사랑하겠죠. 자기의 땀과 희생 이런 걸 내놓겠죠.
그러니까 이것은 특이성이 없어요. 인간들이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궁지에 몰린 인간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의지의 한국인’같은 모습이죠. 이건 그게 아니에요.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겁니다. 거저 주셨으니까 거기에 사는 인간도 자기 몸의 특이성, 자기 운명의, 확정된 운명의 특이성도 이것은 거저 주신 운명이에요.
확정된 운명, destiny라고 하죠. 운명, 확정된 운명. 이것은 변경 안 되는 운명, 결정 난 운명, 그걸 특이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그 확정된 운명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사랑이 있고, 질투가, 질투심을 낼 정도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너는 말씀대로 이 계명대로 해야“ 되는데, 그게 뭐냐면, 바로 ”나 말고 절대로 다른 신을 봐서는 안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호세아, 아모스쯤 가게 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내가 남편이고, 나 말고 다른 남편 찾지 마, 바알 찾지 마."(호2:16) 그런 식으로 호세아서에 나와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여호와를 네 남편으로 여겼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바알을 왜 네 남편으로 삼느냐?" 자꾸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심중에서 나온 계시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는데, 왜 그 사랑은 모르고 세상적인 사랑으로 네가 눈 돌리느냐? 그런 식으로 선지자가 나무라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주님의 사랑은 어디서 다 이루어졌는가? ‘사랑’ 하면, 아가서 8장에서 사랑의 정의를 말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세다." "내가 준 사랑은 죽음보다 센 거야."(아8:6)
‘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 나 사랑해? 그러면 내 사랑이 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걸 네가 알고 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서 나온 문장을 하나 쓴다면, 죽음보다 더 센 게, 더 좋은 게 사랑이라면, ‘구원해 주세요.’라는 말을 앞으로 하지 마라. 성경을 볼 때 ‘구원해 주세요, 구원하는 게 성경에 있다.’ 이런 식으로 성경 보지 마라는 거예요. 이건 다 이단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쓰실 건데요?” 다르지요? “내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당 차지할 수 있습니까?” 이거 하고, "주께서 어디어디 쓰실 건데요?" 이 자세 보세요. ‘구원해 주세요.’ 하는 것은 어디 편의점에 가서 돈 주고 담배 한 갑 사는 것하고 똑같아요. 구입해서 내 소유 삼는, 천국을 노력해서 얻어서, 천국을 내 천국 만드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디 쓰실 것이냐는 것은 완전 가족 분위기죠. 하나의 패밀리잖아요. 하나의 가족이에요. 혈통도 이런 혈통이 없다 이 말이죠. 가족끼리는 뭐 사랑만 있으면 되지, 네가 뭐 한 달에 수입이 얼마냐 그런 건 묻지도 않아요. 아들이 차를 가지고 가든 말든 묻지도 않는다고요. “어떻게 쓰시든 주께서 원하는 대로 쓰시옵소서." 그러면 끝나는 문제예요.
이게 방금 신약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나타냈는데, 십자가 사랑할 때, 요한복음에서 수차례 이야기했어요. 주님께서 제자들 발을 씻어 주려니까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 가지고 "아, 스승님이 왜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까? 이것은 가족끼리 하는 것이지, 스승님은 우리가 어려워해야 될 대상인데 어떻게 저희 발을 씻기십니까?” 하니까 예수님 말씀이 "너 지금 발 뺐지? 빼는 모습인데, 네가 발 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이 말은 "내가 발 씻어주는 사랑이 네 속에 삽입되지 아니하면, 너는 백날 날뛰고 뭘 해도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하고 아무 상관없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는 별개의 존재다." 그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얼른 "그러면 발만 씻기지 말고 샤워를 시켜 달라, 온몸에 그냥 물 퍼붓듯이 해 달라." 하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발 씻는 거, 이게 마무리인데?” 다 씻고 내려오면서 마지막에 ‘빨래 끝~!’하듯이 하는 게 뭐냐 하면 발 씻어주는 것.
일방적으로 뭔가 페인트칠을 하듯이, 인테리어 할 때 페인트를 도포하듯이, 덮어버리듯이 주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우리의 전체를 덮겠다는 그 의지를 가지고 주께서는 십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발을 씻기셨던 거예요.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면 십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발 씻기셨잖아요? 그럼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어떤 능력이 나온다? 아예 그 사랑으로 나를, 전체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거예요. 덮어버리는 것.
동상 제막식 하기 전에 안 보여주려고 어떻게 합니까? 뭔가 천 같은 것을 안 보이도록 덮어버리죠. 이슬람 여자들이 히잡을 쓸 때 방충망 같은 것으로 눈 가리고 나머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버리죠. ‘남성들로 하여금 어떠한 욕망이 생기지 않도록 여자 쪽에서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슬람 율법이 얼마나 무식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지, 감추면 더 각성되고, 약을 올리는 게 돼요. 그 사실을 이들이 머리가 나빠서인지, 그 정도는 알 텐데. 아무튼, 이렇게 사랑으로 도배를 한다고나 할까? 그냥 덮어버리는 거예요. 사랑을 운반하는 게 아니고, 사랑을 운반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랑이 그 사람을 이렇게 운반시키는 그런 식이 신약이라면, 구약은 주님 사랑을 과연 그들이,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주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지켜보는 거예요.
구약의 모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방금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신발 벗어라" 했어요. 모세는 신발 벗는 이유에 대해서 몰랐어요. "네가 신발 벗은 곳은 거룩한 곳이라."(3:5) 이 거룩이 어떻게 되냐? 나중에 확장돼요, 이 거룩의 의미가.
그런데, 신발만 벗느냐? 앞에 뭐가 있냐 하면 불이 붙었잖아요. 어디에? 떨기나무에. 떨기나무는 주께서 쓰신 거잖아요, 피조물인 나무니까. 쓰실 때 어떻게 쓰셨습니까? 불을 확 싸질러 버렸어요. 전체에 불이 덮었는데 이상하게 떨기나무는 멀쩡해요. 이것을 바로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일 동안 이 떨기나무를 경험합니다. 불붙는 화산 속으로 기어서 올라가죠. 그 안의 화산 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화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40일 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그 다음에 모세 형이 남아 있으니까 모세 형 아론 보고 닦달하면서 "자, 우리끼리라도 그 있다는 약속의 땅에 갑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여러분, 약속의 땅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약 자체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기 때문에, 약속의 땅은 없고, 있다 할지라도 못 들어가요. 왜? 죽지 않고서는 못 들어가요. 그 땅의 특징이 그런 거거든요. 천국이 있어도 못 들어가요. 천국이 없어서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고, 있어도 안 넣어줘요, 안 죽은 자는.
그래서 이 점을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돼요. 보통 성경에서 고린도전,후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죽었습니까? "대신 죽었다" 했잖아요. 과연 대신 죽은 거예요? 아니면 로마서 6장의 말씀이 맞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대신 죽었다"고 되어 있죠.(5:14) 로마서 6장에서는 어떻게 죽느냐 하면은 대신 죽는 게 아니고 with, 함께 죽어요(6:3-6).
함께 죽는 게 맞습니까, 대신 죽는 게 맞습니까? 우리는 대신 죽음이었으면 하죠. 지는 뺑뺑이 치고 놀라고. 주께서 너무 어진 분이고, 사랑이 많아서 대신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멀쩡하고. 그런데 대신 죽은 것은 시작이고, 기어이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함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있는 자를 없게 하고,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드는 그 작업을 주께서는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덮여지기 때문에. 사랑이 덮여져야 나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 “사랑이 더 소중하다." 나보다 사랑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죠.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랑으로 페인트칠을 해 버렸으니까. 나한테 덮쳐진 그것이, 덮침을 받는 나보다 더 소중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3장에 "율법에 그 많은 율법, 십계명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그 모든 것을 온전케 한다"(롬13:8-10)는 말. 그리고 "그 사랑이 없으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저주를 받는다"(고전16:22)는 말씀. 이 말씀이 비로소 다 뚫리는 겁니다. "아, 이게 덮쳐진 사랑이구나. 덮쳐진 사랑이구나!"
만약에 대신 죽으심에 머물러 있으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대신 죽으심과 나 사이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믿습니다.’ 믿음이 끼어들어서,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도 내가 믿음이란 통로가 없으면, 이 대신 죽으심의 효과가 나한테 적용이 안 되니까, 적용이 안 되면 주께서는 대신 죽은 게 맞지만, 그 정보가 나한테 유입이 안 되니까 나는 대신 죽으심의 혜택에서 배제된 사람이 되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뭐 해야 돼요? 믿어야 되잖아요. 여기서 또 상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그러면 요양원에 간 치매 환자는 어떻게 되냐?" 치매 환자가 믿습니까? 뭐 지금 지 자식도 못 알아보는데 뭘 믿어요? “밥이나 줘.” 이러고 있는데. 두뇌의 신경 세포가 다 망가져 가지고 이게 뭐 왼쪽 오른쪽 위아래도 없고, 혼돈 상태인데 "믿습니까?" “뭘 믿어? 그래, 나 믿어." 이렇게 되거든요.
대신 죽으심 플러스 내 쪽에서 끄집어낼 믿음, 이러면 합격, 패스, 합격.
문제는 예수님은 대신 죽으신 건 확실한데, 내 믿음을 내가 믿지를 못하네요? 내 믿음을 내가 믿지를 못 해 가지고 맨날 남한테는 ‘믿습니다!’ 해 놓고 집에 와서는 ‘어떤 느낌이 믿음일까? 내가 믿는 게 맞을까?’ 이러고, 옛날에 믿을 때는 느낌이 확 왔는데, 요새는 그 느낌이 떠나간 지 벌써 3년 6개월이 지났네.
처음 믿을 때는 뭔가 뜨겁고, 눈물 나고 뭐 그런 게 있었는데, 요즘은 눈물이 말랐는지, 인공 눈물이라도 집어넣어야 되는지, 왜 그 느낌이 안 와! 그러면 대신 죽으심 플러스 믿음. 믿음의 확정은 뭐냐 하면, 느낌, 느낌적인 느낌, 느낌같은 느낌. 도대체 이거 어디까지 끌어가야 됩니까? 어디까지 끌고 가야 돼요?
또 그러다 참다 참다 못 해 가지고 담당 목사한테 "목사님, 요새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거, 그거 처리 안했어요? 아직도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이 성립됩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야기했죠.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베드로에게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아, 떠날 때 그냥 떠났습니까? 배신 세 번 때리고 떠났지요. 수탉까지 동원해서 울게 만들었죠. "자, 이래도 너 헤어지기 싫어?" 헤어질 수밖에 없게, 헤어지게 해 준 것도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7~8).”는 말이 성경 창세기부터 끝까지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딱 염려되는 것이 그 사랑 속에는 무엇이 섞이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믿는다든지, 소망한다든지,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에 섞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믿을까요?" 말하지 마세요. 아예 섞이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은 게 아니고, 주님을 소망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나에게서 나왔던 것이 나를 경유해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내부 순환 시스템”, 이 시스템이 바로 선악 체제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거는 누가 집어넣은 건가? 악마, 악마가 우리에게 악마 자기의 마음을 할당해서 우리, 아담의 마음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종교 생활하고 신앙생활 해도 자기 안에서 뺑뺑이 도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뱅글뱅글 돌아요. 나중엔 어지러워요. 내가 따지고, 내가 거기에 대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반증하고, 그래서 결론은 자기 의가 축적되고, 맨날 이거 하면서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니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에요. 내부 순환 시스템.
이걸 누가 아느냐? 주께서 아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희 것 안 받을게. 이거 일체 안 받을게.“ 이 내부 시스템과 유사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는데, 뭐냐 하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주님의 내부 시스템을 여기다 우리를 붙들고 작동시킵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부 시스템은 뭐로 변하냐? 죄로 변하죠.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피가 이 안을, 내부 시스템, 우리가 가는 경로, 나에게로부터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것, 죄로부터 와서 죄로 말미암아 죄로 가는 이 경로를 피가, 피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의 내부 시스템을 알리고, 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피로 씻어 주셨음을 주께서 확인케 해주시는 겁니다.
자, 지금껏 이야기했는데 오늘 14장 22절 십일조는 뭐냐? 십일조는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서론 부분 이야기했으니까 본론이에요. “십일조는 나의 무능력” 십일조는 인간을 무능력으로 만들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못하게 하시고, 못하게 하심으로 십일조를 성사시키신다.”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게 하심으로 십일조를 성사시키신다.
십일조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안 받음으로써, 안 받는 그 인간을 십일조 되게 하시는 것, 십일조, 다시 말해서 맏물 되게 하시는 것. 주님의 생산을 하기 위해서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저지하시는 그 방법으로 율법이 작용해요. 십일조는..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문제인데, 아시는 분 먼저 손들고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박과 ‘수박맛 바’ 둘 중에 어느 게 맛있습니까? 어느 게 맛있어요? 수박맛 바가 훨씬 맛있어요. 가짜가 맛있어요. 가짜, 흉내 낸 게 맛있어요, 흉내 낸 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우리 내부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목적은 결국 누가 소중하냐? 나, 내가 구원받아야 되니까. ‘어떻게 쓰일까?’ 같은 것은 딱 싫고, ‘내가 획득했다’ 또는 ‘천국을 달성했다.’ ‘구원에 합격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 준 것을 참고로 해서, ‘이 정도 하면 구원 아니겠어? 이 정도 하면 십일조라고 얼추 십일조의 범주에 들어가겠지.’라고 십일조를 본인의 역량으로 만들어내요.
수박은 자연물이지만, 수박맛 바는 인공물이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 싫어요. 인간은 독자적으로 우리는 인간이고 싶어 해요. 구원받은 내가 되고 싶지, 이게 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구원받는데 아무 기여한 것이 없이 무로 돌아가고, 일방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흙 속에서 십일조라는 작물을, 십일조가 되는 작물을, 맏물을 키웠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개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떤 분노, 화딱지, 이런 게 나는 겁니다.
레위기 19장 23절에 보면 거기 약속의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는 인간만 받는 걸로 여기고, 인간 중에서도 약속의 땅의 아브라함 자손, 자기들만 받는 걸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계약했다 이렇게..
그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주 차별되는 민족. 그 차별되는 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기존의 인간과 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는 거룩한, 거룩이란 것은 구별된다는 것으로, "너희는 못 끼어들어. 우리는 특별난 거야,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고, 이것이 할례로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그렇게 약속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과목, 과수에 있는 과일나무에 할례를 행한다는 이야기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요. "할례를 인간에게 하지, 왜 과일에게 하느냐, 과수나무에게, 포도나무나 왜 여기에 이걸 하느냐?"
그 이유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든, 과일나무든 이 약속의 땅에서는 일단은 없는 데서 있어야 될 그런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는 인간도 없는 데서 새로 생겨나야 되고, 밀이라든지 보리라든지 올리브 등 이런 과수도 없는 데서 새로 생겨날 때에, 약속 자체에서 생명력이 나온다는 것을 확인해 줄 수가 있어요. 약속 자체에서.
왜냐하면 인간의 생산이라 하는 것은 일단 인간이 있고, 인간의 노동력이 첨가돼야 어떤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네 상식이잖아요. 토지가 있고, 인간은 토지가 있다는 데에서 “누가 있느냐?” 그거는 아무도 묻지를 않아요. 관심도 없고, 무조건 "야, 땅이다! 우리, 그 땅에 들어가자. 이제부터 남는 것은 땅이 누가 만들었는지 그건 난 모르겠고, 관심도 없고, 땅에 대해서 내 노동력과 내 노동으로 얻은 것은 다 내 것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생명 나라에서 추방된 자기의 본성을 그냥 드러낸 거예요.
"나 이래 살래. 나 이래 살래. 내가 힘들게 내 노동해서 살래. 왜냐하면 그거는 내 것이기 때문에. 네가 했어? 안 했지, 내가 했어. 그럼 내 것 맞잖아." 이게 존 로크(John Locke,1632-1704)의 소유권 이론에 나와요. 근대법에, 근대 국가의 기본은 뭐냐 하면, 소유권에 대한 법적인 조치가 있는 것부터 시작돼요.
근대국가 이전에는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하면 왕이에요. 왕 거예요. 그럼 백성은 뭐냐? 왕 것을 얻어먹는 신세예요. 왕 밑에 있는 부하들 있잖아요. 그걸 조선시대에는 부하라고 하지 않아요. 선비라 하는데, 깡패집단이죠. 선비들은 왕이 국가의 대표자예요. 상징적 대표자라고 하는데,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어렵고, 설명하려니 또 너무 길어요.
그냥 나라는 왕 거예요. 왕권을 유지하려면 문자 해독이 돼야 되기 때문에, 문자 해독이 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 과거 시험을 칩니다. 33명 모집하는데 보통 시험 보러 몇 명이 오느냐? 4만5천 명 와요. 과거 시험에는 양반 아니라도 큰 결격 사유가 없으면 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경쟁률은 한 1,500 대 1 보시면 됩니다.
뭐 요새 사법고시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보통 서른 살 넘으면 포기해야 돼요. 문경새재에서 봇짐 메고 아줌마 국밥집 들러서 밥 얻어먹으면서 서울 와봐야 땡! 하면 떨어지고 마는데요. 시험 문제는 왕이 내는데, 그 답안지는 어떻게 하느냐? 답안지 길이가 어떤 것은 18미터인가? 제가 본 게 있는데, 과거 시험 답안지 길이가 18m쯤 되죠.
18m인데 거기에 자기가 공부했던 유교경전들의 참고, 참조, 그게 완전히 차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육경 정도는 다 봐야 돼. 사서삼경 있잖아요? ‘그런 것은 나는 이미 애초에 다 뗐습니다.’를 티를 내야 돼요, 그 답안지에다가. 그래야 합격이 돼요. 문제는 딱 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백성이 가난할 때의 대책을 세워라." 또는 외교 문제 같으면 "다른 오랑캐가 왔을 때 외교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있느냐?" 그런 문제에요.
결국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부하예요. 왕의 부하란 말이에요. 왕은 과거를 안 봐요. 이미 왕족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게 아까 어렵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나라는 바뀌어도 한 인간의 혈통 이상으로 특수한 혈통이 하나가 변치 않아야 된다.’ 그게 세습제라는 게 있어요. 그게 상징이에요, 상징.
상징은 한 사람에게, 한 족보에게 다 줘버려, 상징적으로. 그러면 그 왕은 법을 안 지켜도 돼요. 법의 제정자이지, 자기는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제 여러분들이 왜 이 세상 왕국이 예수님 나라에 도전하는지 아시겠죠? 인간들이 상징적 대표자를 자꾸 거론하니까 주님하고 안 맞는 거예요.
"우리의 왕은 로마의 가이사입니다."라고 했죠. 예수님은 뭡니까? 예수님은 영화에 의하면 "킹 오브 킹스"(King of Kings, 2025), 왕중의 왕이죠. 왕중의 왕. 우리는 그의 백성이고.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습니다. 대립 상태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방금 이야기했는데, 누가 왕입니까? 소유권을 갖고 있는 자, 자기 소유가 있는 이상은 전부가 각자각자 왕이 되는 시대입니다. 소유권이 있어요. 따라서 십일조 해도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십일조를 안 받아요. 받지를 않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나중에 십일조를 해도 하나님께서 십일조로 간주하지 않냐 하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을 닮아 가지고, 이 땅이 자기 소유의 땅이 돼요.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 바로 신명기 26장이에요. 십일조가 그렇게 쉬운 내용이 아니에요. 굉장히 어려워요.
신명기 26장 12절에 "제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그 다음에 뭡니까?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 이 네 종류 사람의 공통점은 지상에 뭐가 없다? 지상에 뭐가 없어요? 땅이 없지요.
땅이 없으니까 뭐가 형성 안 된다? 자기를 위한 소유권 형성이 안 돼요. 소유권 자체가 형성이 안 돼요. 그런데 이들에게 뭘 줘라? 3년마다 하는 십일조를 이들의 몫으로 돌리는 거예요.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기존의 땅에서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게 "이건 내 소유입니다"라고 주장한 그것을 십일조를 안 받음으로써 십일조가 되게 하는 방법, 그것은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나온 과목들에 할례를 행해 버려요.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인간의 몫으로 따먹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까 본 레위기 19장 다시 봅시다. 레위기 19장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어떻게 해라? ”먹지 말 것이요." 먹지 마라. 텀을 두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땅에서 노동해서 얻은 내 것이라는 그 인식과, 하나님이 원하는 그 맏물, 십일조, 맏물과의 격차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은 내 것을 안 받는구나.“ 내 것을 안 받아요. 그럼, 신약에 와서 내 것을 안 받는다는 말은, "너, 죽은 인간을 내가 살리기 때문에 네 것이 다 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요, 약속의 땅에서만. 하나님은 자꾸 약속의 땅을 약속의 땅답게 만들려고 하고, 거기 약속의 땅에 사는 인간들은 애굽적인 근성이 남아 있어 가지고 ‘내가 애써 노력했기 때문에 이거는 내 거라고 쳐 주세요’라고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내 거로 쳐 주세요."
사사기에 보면 미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삼손 이야기 끝에.(삿17장) 그때 여호와를 섬길 때 어떻게 섬기냐 하면, ‘내 것을 더욱 더 잘 보존하고 지켜주는 신으로서의 여호와’에 대해서. 사사기가 하여간 엉망이에요. 이름은 여호와인데 완전히 우상이에요. 우상은 나를 지켜주는 신으로서 내 쪽에서 선택한 거예요.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요. 내게 유리한 신이라고 생각이 들면 그거는 ‘오늘부터 우리는 1일이다. 너는 이제 내 신이야. 내 시다바리가 되는 거야. 내 시다바리.’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십일조 드리고, 복 주고 하는 거예요. 말라기 3장 펼쳐 가지고(3:10) ‘창고에 들일 테니까 그 이상으로 나한테 보장해 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 인간이 어떤 율법을 지키고, 뭐 안식일을 지킨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의 땅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조치가 내려지면, 그거는 저 혼자 종교 놀이, 그저 종교 놀이 한 거예요. 성경 가지고 성경 말씀 공부하는 종교 놀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십일조는 고아와 과부와 객에게도 주어지지만, 핵심은 레위인에게 바친다는 거예요. 신명기 14장 22절에서는 그냥 하나님께 드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민수기 18장에 보면 그 하나님께 드리는 그 통로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8장 21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누구한테 주라 그랬습니까?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26절에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누구한테 드려라?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꼭 러시아 민속 인형 같아요.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 들어 있고, 작은 인형 안에 또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것처럼, 덮치고, 산사태 난 거 같이 덮치고, 덮치고. 맨 밑에 백성이 있고, 제일 위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덮치고 있는. 약속은 그 주체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주체가 그냥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여호와의 이름으로부터 율법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부터 율법이 주어진다는 말은 율법에 내내 여호와 이름이 거기에 관통하고, 나중에 관통하게 될 것이다. 관통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이 지킨 율법과 인간들이 지킨 율법이 어떤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지키는 율법과 주님이 지킨 율법의 그 차이점.
그 차이점이 나오는 것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산상 설교입니다. 산상 설교. "나는 모든 말씀을 일점일획도 다 지킨다" 하면서 관통해 버리는 겁니다. 그걸 관통한 것이 뭐냐? 마태복음 8장. 전혀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 저주받은 자가 된 문둥병자를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와서 일방적으로 문둥병을 고쳐 줘버려요.
고쳐주고 난 뒤에 "네가 고침 받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율법에 의한 예물을 제사장에게 보여라"고 이야기하거든요.(8:2~4) 고침을 받고 난 뒤에. 네가 예물을 바치는 조건 하에 고침을 받아라가 아니라, 이미 고침을 받고 난 뒤에.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처벌을 받고 난 뒤에 죄를 알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성도한테는 죄가 이미 사함을 받고 난 뒤에 도대체 우리의 바닥이 어느 정도 죄였기에 주님의 피만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특이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첫째 시간 마치면서 여러분께 물을게요. 십일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맏아들, 장자니까. 그 분이 할례를 받았으니까. 없는 세상에 나타났고, 죽고 난 뒤에 3일 만에 부활했잖아요, 확실하잖아요. 3년, 3일 텀을 둔다고요.
인간이 아무리 해도 쫓아올 수 없는 나라, 아무리 해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전체가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덮쳤을 때에 바로 주님이 십일조고, 이 십일조라는 러시아 인형처럼 십일조 안에 들어 있는 우리가 뭡니까? 우리가 또한 주님의 십일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교회에서 십일조 드리라고 하거든 "아나~ 여기 있다.“ 하면서 문방구에서 파는 리본 자기 머리에 예쁘게 꽂아 가지고 ”이게 십일조다. 됐냐?"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2강) 행4:10(유령과 성령)20250721b(강의: 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내린 결론에 더 추가한다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자신의 무능함을 감사하면 돼요. ‘아이고, 내가 이렇게 천국 가는 데 아무 것도 못하다니 이게 얼마나 기쁘냐.’ 그건 믿음이 있는 거고, ‘주여, 내가 뭘 해야 천국 갑니까?’ 이렇게 되면 이건 또 내부 순환 시스템이 가동되는 거예요.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제발 좀 무능해줘. 한 게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구원 받았냐 하지 말고 그냥 쓰이면 돼요. 그것도 무능자로 죄인으로 쓰이면 돼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자,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p.37부터 보겠습니다. 중간에 [교재 2쪽 중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교재를 한번 봐야 되겠죠. 교재가 p.188에 나옵니다. ‘2012년 겨울 수련회 교재’ 이렇게 되어 있죠. 그 교재 보면 제목이 ‘복음이냐 교회냐’로 되어 있지 않고 ‘죽음으로 이끄는 삶’. 이것은『목적이 이끄는 삶』그 책을 전제로 해서, 죽음으로 이끄는 삶.
그 본문이 누가복음 17장 33절,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잃는 자는 ‘살 것이다’가 아니라 ‘살리리라’. 그러니까 멀쩡한 목숨을 빼앗는 분이 바로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이라는 거죠.
죽고 싶은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런데 안 죽고 싶어도 죽음으로 가게 하시는 힘센 다른 주체자가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주체자가 죽은 나를 살리시는 주체자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우리 인생을 제가 ‘마모된 인생’이라 했죠. 마모된 인생. 점점 닳아 없어지는 것. 흐리멍텅해지는 거예요.
아까 p.38에서 교재 2쪽을 보라 했으니까 교재를 지금 한번 보는 겁니다. p.188 교재를 보면 [1. 살고자 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이다. ‘본능’이라는 말은 인간의 이성 이전이다.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따지기 이전에 인간이 살고자 하는 본능이 우선이다.
그런데 이 살고자 하는 본능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아주 제대로 말해줬어요. 살고자 하는 이 본능을 프로이트는 ‘죽음 본능’이라 했어요. 살고자 하는 본능=죽음 본능.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이 자꾸 잡아당기니까.
죽음이 없으면 살고자 하는 것도 없는데 죽음이 자꾸 ‘뭐하면 죽인다’ 하니까요. ‘이제 온난화 되면 죽는다, 소떼 막 떠내려간다.’ 이런 것들이 생기면 생길수록, 내가 살아있다는 의식이 평소에는 없다가 ‘참, 내가 살아있으니 어쨌든 간에 저 소를 건져서 살아야지.’ ‘살아야지’라는 의지가 나온다는 거예요.
의지가 나온다는 것은 뭐냐? 누구한테 지금 구박받고 있다? 누구한테 지금 압박받고 있다? 죽음한테 지금 많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심리적 현상, 정신적 현상이라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의 정신을 그냥 철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이건 타고났기 때문에 그래요. 죽는 게 무서운 걸 타고났거든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게 타고난 거예요. 그게 마귀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귀에 종노릇한다는 말이, 죽는 것을 자꾸 무서워하도록 마귀가 자꾸 부추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을 알고 성령을 알게 되면 죽는 것이 주님 자신의 과제에요. 주님의 과제에요. 이것은 주께서 나한테 하실 일을 나를 가지고 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서울에 유명한 호텔 일식집에서 싱싱한 방어를 잡았다. 그럼 여러분들이 하나의 누워있는 방어라고 상상해봅시다. 방어가 누워있다. 그러면 방어가 셰프한테 지느러미 흔들면서 ‘살려 주세요’ 이렇게 합니까?
요리사는 사람들 불러놓고 “여러분들 이 뷔페에 돈 많이 냈죠? 살아있는 생생한 것을 맛보여 드리겠습니다.”해서 지금 불빛에 번쩍이는 칼날로 치는데. 그럼 우리 방어가 할 일은 뭡니까? “주께서 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죠. ‘내가 죽음으로써 죽이는 자가 죽은 나를 살린다는 그 솜씨를 주께서 저를 통해서 보여 달라.’ 이게 우리 성도의 삶의 이유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이 한마디로 끝내요. 오늘 하나님이 부르셔서 돌아가시더라도 이 한마디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죽는 것도 기적이다. 감사하자.’ 자연스러운 게 아니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솜씨다. 셰프의 솜씨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시다.
수련회 끝났다. 전에는 뭐 어쩔 수 없이 ‘인생은 허무하니까 살다가 죽겠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방어회 뜨듯이 적극적으로 죽이는 솜씨를 발휘하는데 내가 거기에 걸려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영광스러우냐 이 말이죠. “누가 죽을래?” “저요, 저요!” 손들고 “오늘 제가 죽겠습니다.”
마귀가 그걸 막죠. 주의 작업을 막아요, 마귀가. 마귀가 왜 막느냐 하면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마귀는 어디까지 붙들어야 돼요? 어디까지? 주님이 심판주니까 악마는 ‘심판주가 심판주 값도 못한다.’까지 공격해야 자기 정당성이 서요. ‘예수님은 그럴 능력도 없어. 그냥 바리새인들이 가르쳐준 대로 율법대로 살면 거룩하고, 거룩하면 천국 간다.’ 이걸 마귀가 적극적으로 홍보해줘요. 홍보를 해준다고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뛰어내렸다가 다시 건짐 받으면 너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살 게 아니냐.” 이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마귀의 시험. “가난한 자에게 떡을 베풀어주고 기적을 원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고 세상의 영광을 원하는 자에게 영광을 주는 것. 그런 점에서 당신이나 이 마귀 나나 생각이 같잖아. 같은 편이잖아. 우리 같은 편 하자. 우리 악수하고 나한테 절하고 같이 종교라는 걸 만들어나가자.” 사람들이 그걸 원하잖아요. 마귀가 그걸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두 가지 해석을 우리가 다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요. 하나는 ‘마귀가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설교를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예수님은 그걸 엎어버린다는 것. ‘엎는 내용이 어떤 내용으로 엎느냐’ 하는 것. 이번 수련회 첫째 시간부터 그게 나올 거예요. 문제는 그때까지 내가 사느냐가 문제죠. 내가 사는 건 다른 분이 하시겠지만.
어쨌든 간에 이 교재에 보면 ‘살고자 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이다 해서 쭉 나와요. p.189 밑에서 7번째 줄에 보면 [언어 사용에 있어, 성경에서 등장하는 ‘교회’ 개념과 ‘성도’라는 개념도 항상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내가 성경을 통해서 죽음에 쫓기는 심정으로 어떻게든지 더 살고 죽어서도 천국가기 위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주께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죽이시는 그 취지가 빠진 상태에서 나온 교회 개념, 성도 개념, 그리고 성경의 모든 개념들이 왜곡되고 주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뒤 교재에 보면 아주 복잡한 내용들이 나와요. 여기 ‘동조현상’ 나오고 ‘내포적(comprehension) 관점’, ‘외연(extension) 관점’ 이런 어려운 용어들이 쭉 나오는데, 어려운 용어들이 나오는 이유는 기존에 살고자 하면서 살기 위해선 진리를 알아야 되고 그 진리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동원되는 단어들이에요. 죽기 싫고 더 살아야 되는데, 살 때까지 살더라도 진리에 대해서 눈치 챘고 진리를 확보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 단어들, 그 단어들을 제가 교재에 실어놓은 겁니다.
교재 계속해봅시다. p.193에 [2.십자가 죽음에로의 돌진]이라고 되어 있죠. 돌진. [(1) 땅으로부터 죽음]이라고 되어 있고 [노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그다음에 뭐냐? [‘죽음 속의 동행’] 이게 방주잖아요. 방주. 방주 안에 있는데 방주 잣나무 바깥에는 뭡니까? 출렁거리는 물결이 있죠.
아, 참. 그러니까 공이 넓은 바다에 동동 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노아는 양쪽을 다 알고 있어요. 나가면 죽는다, 안에 있으면 산다. 이걸 달리 말하면, 언약 밖에는 저주다, 언약 안에는 사랑이다. 이게 바로 언약 속에 있는 노아의 마음자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저 죽음의 바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죠.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적극적 의미가 벌써 탈락했죠.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언약을 어떻게 살리느냐? 말씀을 어떻게 살리느냐?’ 질문이 그렇게 나와야죠.
노아의 아들 함과 가나안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어서 저주받았어요. 너는 저주 계열이야. 이런 질문이 안 나오는 것은 저주 계열이에요. ‘주께서 언약을 어떻게 합니까?’ 이런 계열에 속한 사람이 셈, 셈 계열. 셈 계열에서는 아브라함이 나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나와요.
이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환경을 전제로 해야 그게 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성경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89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시편 119편 89절 이 말씀은 오늘 아침 우리교회 질문답변 게시판에 김종철 집사님이 올려놓은 거예요. 그 분이 이 말씀을 채택한 이유는, 물론 인공지능한테 물었겠지만, 창세전에 이미 모든 게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한 거예요.
그러니 이 말씀 올린 게 맞아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굳게 확정되어 있사오니. 그 확정된 말씀을 위해서 우리 같은 피조물이 동원된다는 이런 관점. 따라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죽이신다면 그것은 말씀을 드러내는 데에 필요해서 방어나 광어 잡듯이 참치 잡듯이 잡는 거예요. “오늘도 잡자.” “잡으세요.”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될 언약백성이 자꾸 말을 안 듣고 어깃장을 놓는다든지 자기 뜻대로 살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가만히 방치합니까, 아니면 말씀이 찾아가서 잘 요리해주는 겁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방치하지 않죠.
그게 아모스 5장 19절에 보면 나옵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진짜 재수 없어요. 사자 피했다고 좋아했는데 사자보다 더 센, 곰이 사자보다 더 세거든요, 곰을 만나고요. 휴, 이제 집에 왔다 했는데 집에 뱀이 장착되어 있을 줄이야. 암약(暗躍, 어둠 속에서 날고 뛴다는 뜻. 남들 모르게 맹렬히 활동함.)되어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18절에 여호와의 날은 말씀대로 확정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깜깜한 어두운 여호와의 날을 피할 자가 없다 이 말입니다. 너희는 완전히 갇혔어, 이 말이에요. 아모스 5장 20절,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그러니까 인간들은 말씀이 없는 것은 빛을 따르지 않는 거고 이것은 어두움을 헤매고 있으면서 ‘이렇게 한번 해볼까? 저렇게 한번 해볼까?’ 하다가 집에 와서 뱀 만나고 사자 피하다 곰 만나는 식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 식이에요.
노아의 물 홍수 있잖아요. 물 심판이 사실은 노아 때로 끝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그 어두움의 세력, 물 심판의 힘이 언약 바깥에 가득 차있는 상태라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동동 떠있는 상태고. 성경적 안목으로 보면 그렇게 보시는 게 좋아요, 언약 안에서.
바깥에는, 살아야 되겠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는 게 본능이니까 어쨌든 살아남아야 된다. 잘 아시다시피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소유가 있어야 되죠. 소유는 뭐로 표현됩니까, 한 자로? 돈으로 표현되죠.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너 하나님이야, 돈이야? 어느 것 할래?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주께서는 인간이 마지막에 어떤 식으로 몸부림치는가, 어떻게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가를 보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죽음에 대해서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에요. 아주 간절히 기도했어요. 죽음 안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중량이 들어있기 때문에. 저주의 무게가 들어있어요. 주님께서 저주받으신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이 무거운 잔을 내게서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다음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마저도 어떤 한 절차, 하나의 과정, 하나의 발자국 전부 다 하나님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 하나님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얼마 전 설교했지만 심지어 가룟 유다도 하나님 말씀대로. 토기장이 밭값이 가룟 유다와 관련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도 행동을 우리 마음대로 하지만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한 것처럼 인간의 행함이 이미 창세전에 결정된 행함을 풀어내는 식의 행함일 뿐이에요. 그런 행함이 나오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상황이. 따라서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의 일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 우리의 의도는 항상 묵살돼요.
우리의 뜻대로 안되고 기대대로 안될 때 여기서 성도에게는 인간이 예상 못한 게 나와요. 예상 못한 걸 뭐라고 합니까? 새로움이죠. 성도는 이 새로움으로 살아요, 새로움으로. 내 기대가 묵살되고 주께서 하신 일이 묵살된 현장에 나타난 그 새로움. 이걸 통해서 지금 내가 주인공이 됐다가 주인공이 그때그때 바뀌죠. 주님이 나의 행위의 주체자구나. 나는 내가 주체자인 줄 알았는데 주님께서 수박을 주고 먹게 하시는 상황을 만들었구나. 혀에 뭐 나보세요. 이거 못 먹죠. 항상 모든 상황은 우리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주님의 가신 그 길 따라 가야되기 때문에.
p.195 보겠습니다. [(2) 혈육으로부터의 죽음]. 아까는 ‘땅으로부터의 죽음’. 노아 홍수니까. 이번에는 혈육으로부터의 죽음. 땅에 있으면서 ‘살았다’하다가 땅에 물이 차버리니까 땅에 못살죠. ‘합천군민은 다 집 버리고 피신하세요.’ 어디로 피신할꼬? 대구로 올까요? 합천군이 다 잠겼어요. 물 빼는 게 40년, 50년째 고장 나서 다 잠겨버렸어요. 못살죠.
못살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살아 있잖아. (2)번에, 그 가족으로부터의 죽음. p.195에 가족으로부터의 죽음의 예로 든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이삭. 이삭은 후계자입니다. 아브라함의 합법적 후계자, 언약적 후계자가 이삭이에요. 그럼 이삭을 잡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산시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자기가 그냥 중단시킨 그 행위를 말합니다. 기절초풍할 일이죠.
이거 믿으면 구원한다 해놓고 믿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죽여버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저 사람 믿어라. 그러면 천국 간다.” 하면 우린 죽자고 믿죠.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죽는 그분이 말하기를 “내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있다가 “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안 죽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하죠.
사탄이 따라올 수 없는 곳이 천국. 어떤 인간이 상상해도 그 상상한 인간은 갈 수 없는 곳이 천국. 그러니까 천국은 새롭고 새롭고 새롭게 우리에게 새로움을 주죠. 예상 밖의, 기대하지 않는 것이 천국의 능력으로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이삭을 잡았다는 말은 이삭을 통해서 후계자가 이어질 것이라는 인간의 기대를 하나님께서 작살냈다고 보면 돼요. 예수를 믿는데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것을 열두 제자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야 이게 성령의 역사잖아요.
그러면 사도행전 4장 12절 한번 보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여기에 단어 하나 제가 뽑아내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구원’이에요, 구원.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거예요. 구원하심은 있다는 거예요.
아예 구원 안한다가 아니라 구원하심은 있는데 이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구원하심이 자체적인 또는 자율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말 되죠? 말 되는데 이상하게 말이 어려워요.
뭐를 배제하는 거예요? 주께서 구원의 하나님이니까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말라 이 말이죠. ‘호산나’ 불렀던 사람들 다 배반했어요. 불러도 소용없고 구원은 있는데 그 구원해주시는 주체자는 주님이고 주님이 구원을 해줄 때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 뭐를 처리해야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구원됩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됩니까?’를 차단하는 작업도 구원 작업 중에 일부로 포함되어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그 다른 이름 또는 다른 이와 예수님의 이름 또는 예수님과 지금 사도는 날카롭게 대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비교하고 있어요. 그러면 다른 이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인간류에 해당돼요.
보통 인간들 살아가는 것 있잖아요.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다른 이름이에요. 그럼 이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나도 들어있죠. ‘내 이름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또는 ‘나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를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네가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은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구원에 필요한 능력이 네 자체에서는 안 나오기 때문에. 십자가 지지 않는 자에게는 일체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옵니다. ‘십자가 믿으면 되잖아.’ 십자가 믿어도 십자가 믿는 너에게서는 구원의 능력이 안 나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십자가의 능력이 있을 때만 네가 구원되거든요. 그럼 십자가의 능력은 십자가 지신 분에게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수련회 벌써 시작한 거 같다. 십자가 지신 분에게만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십자가를 안 졌잖아요. 그러면 기다려야 됩니까? 기다리면 안돼요. 기다린다는 말은, 새로움이 아니고 내가 익히 아는 내가 예상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건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새로워질 때는 정말 내가 기다리는 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셨음을 감사하는 그런 새로움으로 다가와야 되죠.
내가 원하는 식의 예수도 아니고 십자가도 아닌 것이 느껴질 때, 그럴 때 필요한 말이 이 문장이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 말인지. ‘인간은 늘 뒷북친다.’ 뒷북쳐요. 첫째 시간 마치면서 꼭 기억하라 한 말이 뭐였습니까? ‘죽는 것도 기적이다. 감사하자.’ 죽는 것도 기적이다.
죽는 것도 기적 같으면요, 이 세상에 ‘나 이거 못해. 더러워서 못해.’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죽는 것보다 더러운 게 어디 있어요. 그게 제일 심각하잖아요. 심각한 것도 주께서 일으키신 일로 감사할 항목에 속한다면 그전에 나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해. 이런 거 안해.’ 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못할 게 없으면 공포와 불안감이 싹 날아가요.
‘우리 집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러면 작살나는데…’ 이런 불안감이 없어요. ‘난 그럼 인생 완전 망가지는데.’ 이러면 뭐냐? 심리적 방어체제에요. 방어체제가 정신병인줄 여러분 아시죠? 모든 정신병은 뭡니까?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어체제가 과도해서 정신체계가 무너지는 게 정신병이잖아요. 과도하게.
아무소리 안하는데 자기가 ‘나는 분노조절장애 있다’고 고함지르고 설치는 것은 누가 자기를 공격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방어체제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는 것도 기적 같으면 뭡니까? 정신병이 달아나죠. 죽는 것도 기적이니까. 그게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것이고 이번 시간에는, 인간은 늘 뒷북쳐요. 원인은 다른 데서 오고 우리는 결과가지고 다시 과거의 내 행태와 자꾸 대조하고 비교하게 돼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 솜씨입니까? 누구 작업이에요? 주님의 작업에 우리는 뒷북친 것이 ‘십자가 믿습니다’가 되어버려요. 십자가 이제 알았죠? 십자가 들어보니 뭐 별거 없죠? ‘십자가는 어떻게 되어 있고 내가 믿어야지’ 그러지 마세요. 그거는 뒷북치는 게 아니고 미리 예습하는 거예요. 예습은 필요 없습니다.
여기 4장 10절에 봅시다. 베드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자, 하나님을 묘사할 때 이렇게 합니다. 베드로가 소개한 하나님은 앞에 뭐가 붙어요. 형용사, 부사가 붙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죠.
그럼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안 되는 하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이건 우상이죠. 가짜죠. 만약에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마냥 기다리면 그것도 가짜에요.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 고대한다는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고도란 독일어로 신, ‘신을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거든요. 그냥 기다리기만 해요. 연극은 안 봤지만 하여튼 시나리오 보니까 그냥 마냥 기다려. 언젠가는 메시아가 올 거라고 그냥 기다려요. 기다리다가 볼 일 다 봐요.
기다린다고 자기가 변화됩니까? 기다리는 것은 새로움에 포함이 안돼요. 그래서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가, 본인 때문에 자꾸 조작이 일어나는 거예요, 본인 때문에.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게 소설이 돼요. 본인이 자꾸 기대하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 뭔가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탐구하고.
옛날에 김동리(1913-1995)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소설을 쓴 작가가 있어요.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1948-)이 지었죠. 『인간시장』은 김홍신(1947-)이고. 하여튼 소설가들이 자꾸 성경, 예수님 이야기하게 되면 전부다 이건 기다림이에요. 기다림이고 분석하고 사랑이 어떠니 저떠니 하고 있다고요.
내가 보기에는 마귀적이에요. 악마적이에요. 본인이 작살 안 났어요. 뭔가 탐구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뭐든지 탐구하면 얻을 것 얻고 건진다, 이 정신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강남강의에서 작가들의 할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족집게로 뽑아내는 것. 자기 힘으로 자아를 규정하는 것, 그게 작가라 했잖아요. 작가 하는 일이 그거에요. 소설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내가 누구냐를 집어내는 거예요. 모든 소설의 공통점이에요. ‘내가 누구냐’에요. 내가.
나 알아서 뭐하는데? 헤르만 헤세의『데미안』도 마찬가지고,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자기를 집어내는 거예요, 전부다. 이것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이걸 ‘진부하다’ 해요. 아이고, 지겹다. 진부한 것은 필수과목이 아니고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소설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심심할 때 보면 되지만 굳이 볼 필요 없어요. 내용이 뻔하고 진부하니까.
영웅 드라마가 뭡니까? 내가 영웅이고 싶었던 어릴 때 동화를 그냥 재현한 거죠. 그래, 내가 저 영웅이었어, 이런 거. 예를 들면, 일진 선생님. 여자 선생님이 처음 기간제로 학교 갔는데 팔에 시커멓게 용 문신하고 간 거예요. 제목이 ‘일진 선생님’이에요. 가서 초반부터 애들을 패버리는 거예요. 그게 재밌는 거예요. 왜? 하도 교권이 몰락했으니까 깡패를 선생님으로 뽑아서 애들 쥐어 패서 인간 만드는 거예요. 저게 우리 내부에 좀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 모습을 집어내는 거예요. 족집게로 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드라마고 소설입니다.
그런데 여기 4장 10절에서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이라고 할 때 죽은 자를 살릴 것을 고대하게 되면 이것은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하고 똑같아요. 네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데, 실제로 새롭게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려버리면 어떻습니까?
이미 결정난 거죠. 결정났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주님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이거는 지옥이죠. 어제 낮 설교에 물어보지도 않고 유월절 사건이에요.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했기 때문에 ‘아니야, 아니야.’ 그건 과거고 어떤 핑계를 대도 이게 계속 현실로 이어졌어요. 현실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죽을 자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설마 하나님이 이렇더라도, ‘저 죽음으로써 이거 확인해 볼랍니다.’ 확인해도 소용없고요. 이 확인은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그때그때 확인시켜줄 때 그 느낌은 새로움입니다. 새로움.
죽은 자. 예수님이 죽었죠.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냥 죽지 않고 뭘 품었어요? 자기 성도의 죄를 품고 죽었잖아요. 성도는 주께서 품었다는 죄를 갖고 있죠. 그럼 새로움은 어떻게 나옵니까? 이 죄를 지적하는 데서 그 죄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신 하나님의 살리심이 새로움이 되겠죠.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죄를 압니까? 우리 죄는 까도 까도 못 깔 정도로 엄청나게 지금 암약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주께서 살려내면서 계속 상황적으로 죄라는 것을 끄집어냅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죄란 무엇이냐? 죄란 기대하는 것, 고대하는 것. 구체적으로 죄란 계획하는 것, 미리 짐작하는 것, 목표를 세우는 것, 계획표 짜는 것.
이번 수련회갈 때 대전 터미널 어디에서 만난다, 이런 것 전부다 뭡니까? 이게 전혀 새롭지 않아요. 우리가 아는 것이기 때문에. 만나서 차타고 오면 되는데 오다가 빵꾸난 것은 계획한 적 없죠. 그러니까 주께서 늘 새로움을 주기 위해서 모든 걸 죄로 전환시킬 때의 그 기쁨이 주께 사랑과 감사로 이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서 계획되었다면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오늘 두 번째 시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ghost, 유령. 인간은 유령입니다. 유령+성령. 유령과 성령의 대비. 성령은 어디서 옵니까? 죽은 데서 살아났을 때가 성령이죠.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령이 안와요. ‘죽은 분인데 살았다’가 성령 안의 활동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죠.
우리는 뭡니까? 지금 아직 안 죽었잖아요. 안 죽었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유령과 성령 분류에서 어디에 속합니까? 자기 자신을 모르는 유령 부분에 속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죄 있는 유령이니까 이건 뭡니까?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거죠. 성령이 오게 되면 유령과 성령,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알면서 여기서 늘 새로움이 나와요.
목사님, 새로움이 어떤 겁니까? 제가 새로움을 알려주면 새로움이 아니죠! 그거는 각자가 느끼세요. 다른 사람의 새로움을 내가 말해줄 수도 없고 새로움을 느꼈다고 이야기해봐야 제대로 전달 안돼요. 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새로움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아휴, 집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죽을 뻔했어요. 가다 차를 박아서 진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집사님, 너무 새로워요.” “새로운데… 가만 있어보자. 내 시계가 왜 고장 났지?” 지금 남이 죽었다 살아난 그것보다도 가야 될 내 시계가 고장난 게 더 새로워요.
소통이 안되는 거예요, 새로움은. 새로움은 주님한테 뒷북치세요.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새로움 때문에 주님은 늘 살아계신다고 본인 고백으로 그냥 이야기할 뿐이고, 다른 사람은 자기가 경험했던 새로움이 있잖아요. 그 새로움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런 환경을 저는 간단히 말해서 ‘날마다 죄를 끄집어내시고 대화하시면 그게 바로 성령의 대화입니다.’ 이런 문장으로 여러 번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그다음에 p.197 [(3) 세상 국가로부터의 죽음] 야, 이건 뭐냐 하면 환경. 인공적 인위적 환경으로부터의 죽음. 인위적 환경의 출발이 뭐냐? 그게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 여러분, 가인에게 벌이 너무 무겁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 있지요? 인간은 누구를 만나도 공포스러워요. 인간은 항시 쫓기는 존재에요.
그러면 항상 쫓기는 존재인 인간이 안전한 공간으로 피신해야 되는데 제가 둘 이야기할게요. 피신한다. 1.전원생활, 촌에 산다. 2.도시에 산다. 어느 것이 안전할까요? 어느 것이 안전합니까? 도시가 훨씬 안전해요. 촌은 밤만 되면 무서워요. 무서운 이유가 정체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렇죠.
그래서 만약 전원생활을 하는데 열 가정 있는 데서 전원생활 시작한다 합시다. 그런데 약간 있다 보니까 윗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아들 왔다고 어디 다른 데 가고 해서 다 빠졌을 때, 이제는 세 가정 남고, 두 가정 남을 때, 그리고 한 가정 남을 때, 얼~마나 무섭게요.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람이 든든하다는 것은 주변에 아는 사람으로 배치가 될 때 안도감을 느끼는 겁니다. 똑똑, 왜 노크합니까? 내가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이미 내 안전망 속에 확인을 거친 자가 들어올 때 우리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데, 낯선 사람이 오게 되면 무서워요.
인간은 자기 빼고 다 낯선 사람이에요. 그래서 늘 무서워서 자기 안전을 위해서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피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좋다. 미국 안 좋아요. 좀 나이 들어서 미국 집 팔고 한국 들어오세요. 한국에는 안전한 곳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있어요. 동생도 있고 형제도 있고 일가친척이 있어요.
전원생활보다도 같이 묶여 사는 도시가 안전합니다. 이걸 누가 고안했는가? 가인이 고안했어요. 가인은 하나님께 쫓기기 때문에. 평생 쫓기는 인생이 가인이었습니다. 동생은 죽여놨지, 하나님은 사는 걸 벌칙으로 했어요. 가인이 존재하는 자체를 벌써 심판의 일부로서 조치해놨어요.
그러니까 이왕 심판받는 것 어떻게 하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는 거예요. 뭉침의 최초 사회가 도시였습니다. 도시는 살고 농촌은 죽어요. 왜? 도시에서 군대를 마련하기 때문에. 농촌들은 흡수 통합됩니다. 어느 동네에 농사가 잘 됐다. 도시가 가만두지 않아요. 군대 보내서 세금 내라 하고 깡패 보내서 나중에 모든 농토를 도시의 농토로 흡수 통합시키는 게 국가입니다. 그 국가의 횡포로부터의 죽음. 뭐라 해도 국가가 있어야 산다. 맞죠. 사는 건 맞아요. 그런데 그 국가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그다음 마지막은 p.203에 [(5) 성전으로부터의 죽음]. 성전.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졌습니까? 세상에, 거룩한 하나님이 특별한 주택에 산다는 것. 상상해보세요. 어떤 특정 인간이 만든 집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것. 뭐 제사장 이외에는 못 들어가지만, 못 들어가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합니까. 든든해요. 뭐 이 집에도 상에다 밥 한 그릇 가득 떠서 모시고 그런 거 없죠? 보이지 않는 주인이라고 모시고 그런 거 없죠.
든든한 사람이 부재하지만 있다고 치고 하는 것이 토속신앙 아닙니까. 제사 드리잖아요. 천주교 신자들은 큰 방에다 뭘 모십니까? 마리아상 놓고 성호 긋고 하잖아요. 성당 들어갈 때도. 성호 긋고 들어가고. 우리 동네에 성당도 있지만 절도 있어요. 절도 앞에 들어가면 보살한테 구부리고. 이게 마음의 든든함이거든요. 마음의 든든함.
쫓기고 있는 공포심에 대한 종교적 표현이에요. 나 쫓기고 있다. 든든한 분 아니면 내가 못 산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가 계셨던 성전을 자기가 부숴버렸어요. 이유는 뭐냐? 성전이 부서지면 성전이 보이잖아요. 하나님을 받쳐주던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죠. 그러면 보이는 모든 껍데기가, 성전이 깨지면서 모든 세상에 보이는 것도 같이 폭파되어버려요. 해와 달, 별까지 보인다는 것들은 다 폭파돼요.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실상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이제 펼치기 위해서 예수님 재림하실 때 구름타고 오죠. 구름은 택시가 아닙니다. 타는 용도가 아니에요. 인간이 아는 구름은 수증기가 올라가서 찬 기온에 먼지와 더불어 응결된 거잖아요. 손오공이면 몰라도 구름은 타는 용도가 아니잖아요.
구름 타고 오시고 천사들 대동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뭐냐? 모든 보이는 것은 재편성되어야 돼요. 뭐로? 지옥과 천국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신 곳과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양분되는 세계, 그 세계가 아까 시편 119편의 말씀처럼 이미 모든 말씀이 응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굳게 섰느니라.
이제는 그 말씀 속으로 고고! 우리 죄를 들춰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써 유령 같은 우리에게 성령 오심으로써 늘 새롭게 새롭게 주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탈출, 탈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탈출이 구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처럼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로부터 탈출해서 예상 못한 새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천국의 구원이 우리 힘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실시하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