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하라 시편 62:5 250714
20250714a 부산강의 : [시편]78(62:5)-잠잠하라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2편 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1절) ‘잠잠히’란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소리 나는 것, 요란스러운 것 다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에게서 나오지요. 거기에 비해서 하늘나라는 조용해요. 에어컨 꺼진 것처럼 조용합니다.
하늘나라에 누가 살고 있는가? 인간이 만들기 전부터 하늘나라에 누군가 살고 있지요. 하나님 말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시편 89편 7절 같은데 보면,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둘러 있는 모든 자’ 하나님 말고 둘러 있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해서 네피림이라고 그렇게 돼 있지요.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그래서 사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들 속에서 반역이 일어난 자들, 그게 사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욥기에 나오지요. 욥기, 스가랴. 욥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욥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거기 천상의 회의를 하는데 사탄과 회의를 하지요. 마귀의 의견을 듣고 하지요. 욥 같은 자가 없다 하니까 대뜸 누가 나섭니까? 사탄이 나섭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그러한 구조가 인간 구조보다 우선돼 있어요. 그런데 천사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건 아니에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어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특징이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특징이죠. 그럼 누가 귀하냐? 흙이 있는 게 귀하냐, 흙이 없는 귀하냐는 생각을 해보면 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자가 흙이 없는 자보다 더 위대합니다. 대단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육신을 입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온 하나님의 상속자, 주가 되시는 거예요.
이 땅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은 그 모델, 그 목표점은 하늘의 그 잠잠함으로 귀환되는 게 목표입니다. 하늘의 평화.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 보면 어떻습니까? 위쪽은 조용해요. 번잡스러운 곳은 어느 쪽이냐 하면 하늘 말고 땅 쪽에 그렇게 굉장히 복잡해요. 요란스럽고. 심판 받는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신명기 32장 8절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라고 돼 있지만 원뜻은 하나님의 아들의 숫자대로 만들었다, 아들의 숫자대로 민족이 구성된다.
제가 말한 것은 모델이 어디 있느냐 하면 지상의 모든 민족들의 모델은 이미 어디서 나타났다? 이미 하늘에 있는 모델로 해서 지상에 인종들이 번창하게 돼 있어요. 심지어 결혼해서 애 낳는 것도 계산에 있다 이 말이죠. 결혼한다고 애 다 낳는 게 아니에요. 그 숫자까지 이미 하늘에서 통제하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땅의 문제다. 우리 자손에게 이스라엘에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하늘의 모델이 처음부터 전체 인종에 나타난 게 아니고 우선 그 하늘의 모델성이 이스라엘에게 먼저 도달했지요. 도달할 때 그 연결고리가 율법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제가 글을 하나 써보겠습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죽음이란 땅에만 있고 하늘엔 죽음이 없어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당연한 것을 우리가 생각을 잘 안 하고 있어요. 살려면 하늘나라 가서 살라 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지옥 가서 살든지. 이 땅에만 죽음이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죽은 자도 부활되지요. 선한 부활, 악한 부활 나오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세계는 죽음 같은 게 없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에덴동산에 심은 나무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거쳐서 생명나무 쪽으로. 그 순서가 선악과부터 닥치고 그다음에 생명나무. 생명나무 닥치고 선악과가 왜 아니냐 하면 선악과 심을 때부터 하늘에는 없고 땅에만 있는 걸 만든 거예요. 그게 죽음이라. 정녕 죽으리라. 그다음에 어디로 가야 돼요? 생명나무 가서 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어떻게 했습니까? 선악과 따먹었지? 그다음 차례, 두 번째 차례가 생명나무 따먹기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거절하지요. 차단합니다. 방금 차단했단 말 나오지요. 어제 낮 설교에선 절단했단 말 나옵니다. 끊어버리는 거예요. 모세가 인생 절단 났잖아요. 차단했다, 절단했다 이 말은 ‘살아 있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전체를 ‘죽어 있다’로 바꿔요. 절단과 차단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죽어 있다고 여깁니다.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은 누가 주장하느냐 하면 옛 아담이 주장해요. 살아 있다는 인간은 죽어 있음을 안 믿습니다. 그것은 불신이 여기서부터 나와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에서 이미 모든 인간을 부정합니다.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안 죽는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멀쩡하게 살아 있고 숨 쉬는데 왜 죽어’ 이 사탄의 마음이 그 주장이잖아요. “너 살아 있어. 안 죽었어. 살아 있단 말이야.”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으로 해서 너의 죽음 뒤에 있는 일도 살아 있을 때 알아서 네가 노력해봐라, 이렇게 부추기는 겁니다. 종교적으로 부추기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 있다는 것은 사탄과 결부돼 있는 옛 아담의 일방적 헛소리, 거짓소리, 주장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죽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누가 읽어볼까요? 인간은 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어 있는가? 본문에 나와요. 하나하나 이런 말씀을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끝에 뭐라 돼 있어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죽었음으로, 그러니까 예수님이 육신으로 와서 인간세계에 개입된 것은 마귀한테 속아서 자꾸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살아 있는 예를 제가 들어보겠어요. 살아 있는 예는 수천, 수만 가지 댈 수 있습니다.
전시 공간, 뮤지컬, 백화점 1+1 행사, 할인행사, 그리고 파도치는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해수욕하기, 그리고 서울 대치동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기, 야구장에서 야구하기, 축구하기. 전부 다 뭐예요? ‘살아 있네’ 아닙니까? 결혼하기,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찾고자 하고 자주 모이는 것은 전부 다 살아 있는 그 공간에 모이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는 안 가려하느냐 하면 장례식엔 안 가려하지요. 어제 전도서 이야기했지요. 7장에 초상집엔 안 가려해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질문을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까? 티비 프로그램 중에서 많은 대목이 죽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해독주스, 새로운 비타민 개발, 여성들 칼슘 부족으로 인해서 골다공증 어떻게 수습이 되느냐? 건강식품 소개들.
전부 다 관심사가 뭡니까? 죽음을 지연시키고 빨리 안 죽는 방법, 살아 있는 것은 명확하니까, 그리고 죽는 것도 명확하니까 어떻게 살아 있음을 계속 끌어가고 싶다. 관심사가 ‘살아 있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늘의 관심사는 인간은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인간의 살아 있음이 예수님 오심으로써 인간은 죽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이 죽음의 길이니까.
이 ‘죽어 있다’를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여기다가 말씀을 꽂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죽어 있는데 어떻게 됩니까? 아담이 사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이 사는 겁니까? 중요한 것은 이게 말씀이 사는 거예요. 말씀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 마땅한 것을 하나님께서 겹치는 겁니다. 샌드위치 먹는 이유가 빵을 먹기도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속을 먹기 위해서 하지요. 만두도 마찬가지고. 밀가루 맛있어서 만두 사는 게 어디 있어요. 차라리 찐빵보다 못하지요. 속의 조화가 이뤄지지요.
우리 안에는 어떤 속이 들어있는가? 그 속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걸 말씀을 집어넣으면 말씀은 하늘에서 완성된 말씀, 완성을 향한 말씀, 또는 완성과 연관된 말씀이 오게 되면 이 말씀은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우리가 못 따먹는 생명나무와 관련돼 있어요.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가 생명나무 못 따먹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왜 못 따먹느냐? 죽어 있는 인간은, 땅에서 이미 흙이 된 인간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권한도 자격도 없다. 쉽게 말해서 ‘인간아 너는 말씀 들을 자격도 없다’ 더 나아가서 ‘너 말씀 듣지 마. 천국 오지 마’ 이 뜻이에요. 그래서 말씀의 기능은 이거에요. 간단해요. 오지 마! 구원받지 마, 이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어디서 살아 있는 게 기어서 천당까지 오려고? 너는 지옥 가!’ 이게 말씀의 기능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지 마, 천국 가지 마’ 하니까 ‘아멘’ 이런다고요. ‘그게 내게 합당합니다, 아멘’ 이렇게 하니까 그 아멘이란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죽어 있고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아는 이 자체가 말씀에 들어있었던 절차, 살아 있는 인간을 죽게 만들고 죽어 있는 걸 말씀을 통해서 살아 있다는 이 절차의 힘이 들어있는 사람은 ‘아멘’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옳소이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 예를 시편에서 보겠습니다. 시편 144편 3절,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렇게 말하는 톤이 어때요, 뉘앙스가? ‘아이고, 주님 때문에 살았다’ 이것보다도 오히려 반문하지요. ‘왜 살려줍니까? 제가 뭔데 왜 살려줘요?’ 이 말의 전제가 뭐냐 하면, ‘나 같은 것은 죽어 있는 게 확실합니다’ 전제로 깔릴 때 나올 수 있는 고백이죠. 그 외에는 이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저 같은 걸 왜 자꾸 매일같이 살려주십니까’ 이것과 ‘악착같이 살아야지’와 마음가짐이 정반대지요.
이사야 51장 12절에도 오늘 찾을 게 많기 때문에 제가 다 할게요. 찾지 마세요.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어떻게 사람을 상대하느냐, 살리는 것은 내가 살리는데? 어떻게 풀같이 소실될 인간과 협의하고 인간과 상대하고 저 인간이 나를 살릴 거라고 왜 그렇게 인간을 의지하느냐, 이 말입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데 왜 상대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쯤 했으면 여러분들이 도대체 불신자가 뭐냐? 어떤 것이 불신자인지 궁금해질 거예요. 불신자에 대해서는 이것도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던 구절인데요. 시편 73편 4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저희는 죽는 때에도’ 죽는 때니까 죽음이 원래 그 사람의 본모습입니까, 건강한 게 본모습이에요? 어느 쪽이 그 사람의 본질입니까? 죽는 게 본질이죠.
죽어야 되는데 왜, 자기는 거꾸로 생각한 거예요. 건강한 것이 나답고 죽는 것은 나답지 않다고 여기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고 의외의 상황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왜 자꾸 이런 것들이 나열돼야 되느냐 하면 세상 전체가 반대 사고방식이 퍼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코로나 그것 문제도 아니에요.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 코로나 전염병입니다. 하늘 생각과 꼭 정반대가 마치 모기약 뿌려서 온 동네가 허연 것처럼 온 동네가 허여요.
시편 82편 6절에는 방금 이야기한 두 가지 상황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소위 율법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 천사 같다고 우기더니만 어떻게 죽는 것이 똑같냐 말이죠. 이처럼 우리의 본질을 안다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잖아요.
아까 신명기 29장 29절 말씀처럼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나타난 것은 우리다. 오묘한 것은 생명이지만 나타난 것은 죽음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 즐겁지 않습니까? 표정 보니 별로 전혀 즐겁지 않은 것처럼 느끼잖아요. 이게 인간에겐 즐겁지 않습니다. 살고자 하면 즐겁지 않고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즐겁지 않은 게 아니라 놀랍지요. 놀라운 사실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28장 12절에 유명한 구절, 야곱에게 밤에 사다리가 나오지요. 사다리란 어디에 걸쳐있는 거죠. 어디로 걸칩니까? 위와 아래로 걸쳐있는 게 사다리입니다. 사다리에 누가 옵니까? 바로 이 땅에 나타난 것의 원래 모델이 되는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르락내리락 무슨 일을 하는지 되게 바쁘지요. 인간이 바쁜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백날 해봐야 죽음에서 죽음, 그 동네 돌아다니거든요.
물에 빠진 벌레들, 물에 빠진 날파리들이 접시 위에서 파닥거리면서 혼자 되게 바쁜데 해봐야 접시 물 안에서 파닥거려봤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어떤 것은 25년째 죽어 있고, 95까지 있다고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이래요. 애초부터 죽어 있던 인간이 실컷 사는 것과 관계도 없는 그냥 죽는 것을 재촉하고 독촉하는 그 죽는 일만 하면서 결국 죽지요. 그 죽는 일 중의 하나가 뭐냐? 생명보험 하나 더 드는 것, 그것도 죽는 일이에요. 보험하는 사람 관계없어요.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만. 모든 것 하나 안 죽는 일이 없어요.
어제 우리교회 예배 전에 한 집사님이 붙들고 시비를 거는데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하는 집사님이 선악과 따먹은 게 죄다, 라고 하는데 나보고는 안 물었어요. 답답하지요. 죄가 뭐냐? 다 죄지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모든 게 죈데 그걸 새삼스럽게. 모든 게 죄라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죄 값은 뭐라고요? 사망이고. 방정식 나왔잖아요. E=MC² 방정식 나오듯이.
사는 게 죄니까 그 방정식 끄집어내듯이 응용방정식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죄가 살아 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죄가 살아 있다. 그러면 하늘나라가 모델이잖아요. 하늘나라 특징이 뭡니까? 잠잠하지요. 하늘에서 까불던 사탄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미카엘과 전쟁에서 패배해서 어디로 쫓겨났습니까? 땅으로 쫓겨났어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이 세상의 신이 된 겁니다. 이 세상의 신. 이걸 율법 받은 이스라엘만 이야기해요. 이걸 우상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해요. 왜 구약에서 우상 섬기지 말라고 선지자마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왜 자꾸 뭐가 궁금하냐 하면 섬기지 말라 하면 우상을 안 섬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기어이 또 우상을 섬기고 왕부터 나와서 모든 백성이 왕이 섬기니까 백성들이 섬기고, 백성들이 섬기니까 왕은 권위가 없으면 권좌에서 쫓겨나잖아요. 북이스라엘 같은 쿠데타가 일어난다고요.
백성들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서 그들의 종교를 권장하면 왕이 솔선수범해서 나도 우상 섬기니까 괜찮다, 이래 되는 거죠. 여러분 우상 섬겨도 괜찮아요. 나도 우상 섬겨서 왕 자리가 든든하잖아요. 우리나라 든든하면 문제없지요? 우상 섬겨도 아무 문제없어요, 라고 우상을 장려하는데 유독 그것을 문제 삼아서 우상 섬기면 망한다, 저주받는다하는 것은 선지자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 대목을 보면서 봐도봐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실감이 안 나니까 아예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실감이 나야 되는데 우상 섬기지 말라 하는데 섬기는 이유도 모르니 그다음부터 진도가 나가겠어요? 안 나가지요. 말씀 드리겠습니다. 섬기지 말래도 그렇게 우상 섬기는 이유가, 우상이 없어요. 없는데 내 신이기 때문에 섬깁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에게서 나오고 내 안에는 죄가 들어있어요. 내 죄가 가만있질 않고 잠잠하질 않아요. 죄가 항상 나를 위하여 뭔가 부지런히 활동을 해요. 쉽게 말해서 죄가 나보고 가만있어 너 잘 되게 해줄게. 죽어서 천국 가게 해줄게. 항상 사탄이 우리를 통해서 일을 벌이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for me, 나를 위한 거예요.
성공한 자와 성공시키는 자, 여러분 누가 마음에 들어요? 나 성공했다, 자랑질보다고 누가 마음에 듭니까? 성공시키는 자. 성공을 시키려면 어떤 조건이냐 하면 성공한 자에서 일을 시켜요. 이걸 사역동사에요. make, let 영어에서 이걸 사역동사라 합니다. 어떤 주체가 대상에 대해서 지시를 해서 내가 모델로 내가 되는 그들도 나와 판박이로 만드는 그 동사가 사역동사.
사탄이 하늘에선 패배했지만 땅에선 장악했잖아요. 인간을 미혹시켜서 하나님에게서 떼어내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데 악마가 성공했잖아요. 성공을 했다고요. 성공을 했습니다. 그게 뱀의 후손 아닙니까? 온 천지가 뱀의 후손이에요. 성공을 했으니까 인간들은 어떤 모델이 있는 거예요. 그 모델 성공이 뭐냐? 모든 우상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이래 돼 있어요.
이건 여러분들이 여러 번 들었을 거지만 오랜만에 출애굽기 32장 봅시다. 출애굽기 32장만 나오는 건 아닌데 대표적으로 32장 8절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다음에 뭡니까? “자기를 위하여” 이 말씀은 어렵지 않은데 뭐냐 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방법은, 하고 마귀한테 이야기하면, ChatGPT한테 이야기하면 정답이 뭡니까? ‘너를 위해서 살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민족은 질투를 안 하는데 하나님은 질투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너를 위해서 사는 걸 용납하지 않는 특별한 민족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했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의 설립과 구출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이스라엘에게 기여할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나타나기 위해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세하고 동행하잖아요.
이게 모델이 하늘나라 처음에 있던 모델 닮아서 그대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걸 거룩한 나라라고 합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 지상은 맛이 갔어요, 없어요. 잠잠한 하늘나라는 아직도 그 거룩이 유지가 된다고요. 하늘나라에 있는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요. 이스라엘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이야기해요. 호세아 7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리고 이사야에 보면 내 아들, “나의 택한 여수룬아”(44:2)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형이 하늘나라 천사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들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애굽의 신들이 있었어요. 그 애굽의 신들이 무슨 신이냐 하면 자기에게 유익되는 신들이 애굽의 신이었고, 그 신들 열 재앙을 통해서 아주 작살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해서 시내산 갔고 시내산에서 금가락지 빼서 만든 신이 무슨 신입니까? 애굽의 신이었어요. 애굽의 신이 그렇게 친근한 거예요. 왜? 내가 나한테 둘도 없는 친구고 친근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 성깔, 그 성질 그대로 온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 9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딱)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자길 위함은 나도 한 고집합니다. ‘나를 위하지 말라고요? 그건 주님 생각이고요. 내 생각은 아닙니다. 나는 끝까지 나를 위할 겁니다.’ 이거는 인간의 타고난 고집이죠.
내가 주일날 권세라 했는데 인간의 어두운 권세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어요. 그래서 결혼식에서 한 맹세는 다 거짓입니다. “이제부터 아내를 위해서 살겠느뇨?” “예에.” 예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떻게 ‘자기를 위해서’가 자기에게서 빠져나가겠어요? ‘자기를 위해서’는 자기에게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또 그래야만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아주 신기하죠.
‘이상하다. 왜 나만 위해서 사는 나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영생이 뭘 보고 찾아왔는지, 왜 찾아오십니까?’ 서울강의에서 했잖아요. 베드로가 고기 잡고 난 뒤에 뭐라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뭐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니까 같이 합시다가 아닙니다. 뭡니까? 떠나소서. 주와 같이 상대할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시편 144편에 인자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나를 생각해줍니까? 시편 8편도 마찬가지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 존재에다 하나님이 침투하지요. 침투해서 이걸 절단내버리는 겁니다. 죄는 사탄은, 인간이 살아 있다고 계속해서 독려하고 격려해주고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율법, 말씀이 와버리니까 ‘너는 현 상태가 죽어 있는 상태다.’ 왜 죽어 있느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왜 죽어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죽은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논리가 보세요. 이상하죠. 가만있으면 본인이 죽은 채로 죽은 것도 모른 채 죽어 있는데 말씀이 오니까 내가 죽어 있다는 걸 그제야 아는 그 관계가 관계회복이 됐으니까 내가 죽어 있다가 곧 뭐냐? 내가 살아 있다가 돼버려요. 황송스러운 살아 있음이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뭐냐 하면 지금껏 내가 죽어 있었던 이유가 밝혀져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자꾸 뒤에서 부추기고, ‘네가 살아야 돼. 이유 묻지 마. 무조건 사는 게 남는 거야. 사는 게 성공한 거야’라고 자꾸 그동안 우리를 부추겨왔는데 그게 사역동사, 악마가 지상의 왕, 지상의 신이잖아요. 지상의 신이 자꾸 시킨 거예요. 그래서 그 악마가 만든 게 뭐냐 하면 우상입니다. 내가 믿는 신이에요. 내가 믿는 신은 반드시 어떻게 돼야 된다? 나를 위한 신이어야 한다는 공식에 맞는 신, 그 신을 율법에선 뭡니까?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 예수, 뭐 성령 졸지에 그게 뭐가 돼요? 우상의 리스트에 포함이 돼버리죠.
고린도후서라는 편지가 있잖아요. 이번 수련회는 고린도전서합니다. 고린도전서 보내주면 되는데 왜 또 두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를 써야 되는가? 이게 고린도가 얼추 교회가 됐거든요. 숫자가 두 명 있고 이게 아니고 많았어요. 3년 동안 있었으니까. 3년 동안 천막장사 했던가, 요새는 나도 나와 결별해서 못 믿겠어. 사도행전 18장에(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3절) 천막장사해서 사람들 꽤 모였단 말이죠. 근데 사도 바울은 거길 떠나서 다른 데로 갔잖아요. 에베소로 갔지요.
여러분 사람들이 모이면 사람들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죄가 들어있겠지요. 죄가 추구하는 것은 살아 있다 했지요. 아까 강의 들은 걸 잘 생각해보세요. 죄는 뭐냐? 나를 살게 하는 거죠. 살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힘이 필요하잖아요. 아까 불신자, 시편 73편 4절, 5절에 보면 불신자의 특징이 뭐냐? 죽는 것이 내 모습이 아니고 건강하고 풍부하고 많은 재산을 가진 것이 내 모습이라 하는 거예요.
시편 62편 오늘 하고 있습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찌어다” 재물이 늘어도 마음 두지 말라고 한 거예요. 이 말은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란 걸 전제로 다 아시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어떻게 살아간다? 재물을 원하고 건강을 원한다. 왜? 그게 좋거든. 왜 좋으냐고 물으면 내가 사는데 도움 되거든. 그다음 질문이에요. 왜 살아야 되지요? 이 질문에 모든 사람이 막혀버리는 거예요.
왜 살아야 되지요? ‘할 말을 잊었지만’ 김수희 노래(잃어버린 정)에 나오는 거예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왜 살아야 되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허리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 “허리가 안 좋습니다. 죽으세요.” 이러면 병원 장사 되겠습니까? “왜 저보고 죽으라 합니까?” “죽으면 낫고 평화가 옵니다. 샬롬”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한 의사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왜냐? 일반의사는 돈을 벌어서 돈 힘으로 자기가 살아야 되잖아요.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려야 되고, 자기 아들도 의대 보내야 되고 그럼 돈 들고. 골치 아픈 일 많잖아요.
간단한 문제인 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말씀은 뭐냐 하면 폭싹 속았수다. 전에도 했지요. 제주도의 ‘폭삭 속았수다’는 말은 속임을 당했다는 게 아니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하는데 하여튼 제주도 말고 다른 거로 속은 거죠. 완전히 속고 속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속임을 당한 그 의식, 그 의식만 내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죄 짓는 일 외에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일 외에는 하루일과 스케줄에 아무것도 섞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3시에 죽자, 이런 것 없어요. 계속해서 사는 일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라 하는 말은 인간의 논리가 들어가면 ‘나는 내 것이다.’ 이게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가 ‘나는 내 것’이 되어서 ‘나를 위해서’란 논리가 나오는 거죠.
나는 내 것이니까 내가 살고 싶어 한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본인은 하나님 믿는 백성이라 했는데 본인이 우상이고 마귀와 한 패인 것을 전혀 인식 못하다가 그다음에 말씀이 들어오죠. 말씀이 들어오니까 여기서 강한 저항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가만있습니까? 에이 죽어라 하지요. 그래서 말씀의 기능은 제일 먼저 뭐냐? 절단 내고 단절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를 다시 이야기하면, 모세의 혈육 엄마는 모세를 안 죽이고 살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요.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권세 앞에 모세에게서 엄마의 손을 그냥 놔버리죠. 그 순간 모세는 죽은 겁니다. 태어났으나 모세는 엄마 없이 그냥 홀로 살 수 없는 힘 속에 들어가 버리죠. 그런데 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돼 있으니까 분명히 죽어야 될 모세가 아다리가 된 거예요. 누굴 만난 거예요. 만나도 노숙자를 만난 게 아니고 권세자, 권세라는 것은 힘의 집중을 말합니다.
아까 고린도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왔을 때에 왜 이 고린도교회에 두 번째 편지를 보냈느냐? 쪽수가 많으니까 이게 힘이 되는 거죠. 쪽수가 많은 교회 거기에 사도로 들어가면 노후대책이 되고 생활비가 공급이 돼요. 밥 먹고 살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데 유리하고 죽는 데는 죽음은 빠이빠이 되는 사는 힘이 제공되는 교회로서 무슨 교회? 고린도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에베소에 있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냅니다. ‘마귀야, 마귀새끼가 왔어’ 이렇게 편지하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양의 탈을 썼으나 사실은 뭐냐? 사탄이야. 너희들 지금 사탄을 당회장으로 모셔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이게 나와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 그러니까 사탄이 설교할 때 성령, 복음, 예수 막 섞어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데 그게 전부 다 뭡니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 돼요.
어떻게 아는가? 그렇게 전하는 본인의 목적이 뭐냐? ‘좀 살려주소, 고만. 교인들 살려주소. 배운 가락이 이건데 좀 살려주소. 서로 윈윈합시다. 우린 당신이 복음 전하면 좋고, 나는 당신 돈 가져서 좋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힘 키웁시다. 힘을 키워야 되거든요. 그 힘 키운 게 큰 교회 아닙니까. 예배당 큰 교회 아닙니까. 교인도 마귀교인, 목사도 마귀목사. 죽이 맞아. 자기 사는 걸 긍정해주는 우상의 집단, 우상의 단체에요.
여기서 의문점이 뭐냐 하면 그러면 처음부터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 있을 때는 그렇지 않지 않았느냐 하거든요. 이게 세상에 있는 모든 단체는 시간에 예속됩니다. 그래서 이거는 고정적이지 않고 시간 지나면 어떻게 헷가닥 바뀔지 사람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고 어떤 단체도 모르고 집단 모르고 다 모른다고요.
미국이 기독교국가다. 언제 적 이야기? 18세가 말 이야기에요. 지금은? 지금은 뭐 마약 판이지 뭐. 마약이 상시적이고 하버드 대학 그쪽에서는 예수도 여러 신들 중에 하난데 골라잡아라, 이런 식으로. 하버드대학 신학교에서. 옛날 신화적 영웅에 불과한데, ‘신을 골라잡는 네가 신이다’ 지금 현대기독교가 이것까지 왔어요. 그럼 우리 보기에는 요즘 교회 엉망이라 하잖아요. 사실은 교회 진실이 지금 와서 폭로된 거예요.
애초부터 어느 교회도 교회가 아니었음을, 이것도 김광석 노래 가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교회가 아니었음을. 교회는 누가 만들어요? 교회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교회는 단일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밖에 없어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신앙도 하나요. 그런데 인간은 모조리 다 다양성이에요. 니 신앙, 내 신앙 다 다르고 네 믿음, 내 믿음 다 다르고 다양성.
이 다양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가 죽은 자 값했다’ 이렇게 보지요. 죽은 자에서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죽은 자를 해부해보니까 각종 죄는 죄다 들어있었던 거예요, 분해해보니까. 온 구더기가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예술분야에서, 종교분야에서, 과학분야에서, 물리분야, 철학분야에서. 인간 하나 마음을 갈라보니까 아담에서 지금까지 해태종합선물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사도 바울이 아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편지 12장에 이렇게 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는데 나와 나와의 결별이죠. 그는 삼층천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보았고 하나님의 천국을 보았다, 라는 이야기하면서 너는 봤냐? 이 삯꾼들아, 악마의 자식들아 너희는 봤어? 따라서 나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이 땅에서 받는 어떠한 고난이나 어떠한 핍박도 그것이 이미 확정된 내 신분, 말씀과 복음으로 확정된 신분을 변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나 같으면 나는 시시로 바뀌는데 시시로 바뀌는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변하지 않는 내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나는 죽었고 나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다. 완전히 목과 얼굴과 밑에 하체 부위, 서로 색깔이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자세입니다. 10분 쉽시다.
20250714b 부산강의 : [시편]78(62:5)-잠잠하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합니다. 그것은 지옥 속에서 천국 만들기. 지옥이 없으면 천국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지옥 속에서만 천국이 나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죄 속에서만 의가 나옵니다. 죄 속에 안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사람은 의에서도 배제되지요.
죄 속에 들어오라는 것을 인간들이 거부하는 이유가, 인간에는 선악의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설교를 해도 전부 다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나와요. 그래야 같은 마귀자식 대화가 되니까 이게 알아들으니까요. 딱 입구에 출구에 대기할 때 이거는 누가 요구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본성이 ‘자, 어떻게 하면 내가 착한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적어볼게요.
여기 뭘 꽂아 넣어요? 나라는 걸 뺄 수가 없어요. 왜?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나를 뺄 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첫째 아담, 옛 아담이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둘째 아담을 집어넣어요.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을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 앞에서 잠잠해질 수 있는가’ 그게 시편 62편 5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됐어요. 그냥 바라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냥 입 다물고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의 일이 뭐로 전환되느냐 하면 주님의 일로 전환되었어요.
나는 어디 출신이냐 하면 지옥 출신입니다. 지옥이에요. 지옥인데 지옥 속에서 주의 일, 천국이 내 안에서 제조되고 만들어지고 구성되고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발현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의 일 붙들 때 이것 아까 제가 마귀 일이라 하는데 흔히 우리가 충격적으로 듣는 이야기,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이단입니다. 이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천국이 안 나오는 거예요. 이단, 삼단, 오단, 육단.
그래서 제가 분류를 해볼게요. 제가 일부러 내 마음대로 정해봤어요. 이단인데 이단을 둘로 나눠봤어요. 시시한 이단과 진짜 이단. 시시한 이단은 신천지, 안식교, 여호와증인. 진짜 이단은 전부 다 모든 자가 이단이다. 왜? 나를 어떤 경우라도 내가 뽑아낼 수 없기 때문에 전부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단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시한 이단이 오거든 신천지나 전도하러, 엄마 교회, 어머니 교회 있잖아요. ‘너 이단 돼봤어? 초자 이단. 그건 이단 축에도 안 들어. 제대로 이단 돼봐. 우리교회 와봐. 진짜 이단 보여줄게.’ 이렇게 전도를 하는 거예요. 진짜 이단이 뭔지 보여줄게.
오늘 시편이 다윗의 시인데 다윗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자기 자신을 주께서 말씀으로 분해하는 그 여정이 다윗의 여정이었어요. 보통 수술할 때는 수술부위를 칼로 자르잖아요. 주께선 다윗을 가지고 이 땅을 뛰어다니면서 다윗 속의 죄를 끄집어냅니다. 그 끄집어내는 방법은 다윗이 자기를 위해서 싸우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모든 싸움은 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거든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도 자기를 위해서 싸우면서 자기에게 뭐가 나오느냐? 펄펄 죄가 나오는 거예요. 가만있으면 죄가 안 나와요. 자연인 되어 도 닦으면 죄가 안 나와요. 이단교회 다녀도 죄가 노골적으로 많이 나오지요. 너나나나 똑같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준 낮은 이단 있고, 우리는 무슨 이단? 수준 높은 이단.
어쨌든 간에 지옥의 특징은? 내 힘으로 못 빠져나온다. 이 고백이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에요.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온갖 것 다했어. 좋다는 설교 듣고, 유튜브 듣고 온갖 것 신학교 교재 사고 책 사고 성경 백독, 만 독하고 기도하고 어떤 경우라도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특징이 지옥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지옥다워야 되니까. 지옥은 세다. 나보다 세다. 지옥이 나보다 셉니다. 그래서 예수님 빼놓고 음부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도 사실은 악마가 예수님한테 말려든 거예요. 놀아난 겁니다. 주님께서 마귀보고 자기를 죽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이거는 일반사람들은 모르죠. 마귀는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문제가 다 끝났다고 돼 있어요. 끝났는데 사흘 만에 거기서 구멍을 냈어요. 구멍을 뚫고 예수님께서 부활을 해버렸단 말이죠.
이 사실이 놀라운 일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여자들과 제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다는 거예요. 듣기는 무수히 들었지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 무수한 부활소식을 들어도 그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부활을 믿는 그러한 혜택을 그전에 그러한 권세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게 완전히 들통 나버린 겁니다. 진짜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입장이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팔아넘기고 죽이고 했던 사울의 입장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입장이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초반에 이런 약간 되바라진 발언을 해요. 내가 저 사도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둘 다 쪼다면서 둘 다 자기 힘으로 구원 못 받는 주제에 내가 왜 너한테 기죽는데? 내가 왜 베드로한테 기죽어야 돼? 베드로, 당신 잘못이야. 그런 행동하면 안 돼. 할례 받은 자 왔다고 할례 없는 자들과 음식 먹다가 박차고 나가면 안 돼. 돈은 냈는지 몰라. 계산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나가면 안 돼.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뭘 염두에 두었는지까지 계산해보세요. 레위기 19장 33절에서 34절,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못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텃세가 있거든요. 이 세상에 어디 가도 텃세 없는 데가 없어요. 전원주택 지어 가봤자 텃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딜 가도 텃세는 대단합니다. 날아온 돌, 빼낸 돌 그 이야기, 텃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텃세는 뭐 기정사실이고요. 우리교회에 누가 오면 심사기준이 심사통과하려면 어디서 왔느냐, 네가 죄에 대해서 아느냐?
텃세를 한다는 것은 그 공간이 어느새 나의 공간이 된 거예요. 내가 빠진 게 아니고 더욱더 나를 공고히 한 겁니다. 강화시키죠. 나 있는데 플러스 하나님 되니까, 이게 어떻게 되느냐? 나의 세력의 확장이 돼요. 이 일을 누가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느냐 하면 야곱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독점한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 만나고 난 뒤 본인을 뭐로 보느냐 하면 나그네로 봐요. 그래서 야곱이 요셉과 축복하고 난 뒤에 죽을 때 난 나그네 인생을 여기서 끝낸다. 나그네 인생을 다른 말로 하면 난민이죠. 이 지역 사람이 아닌 거예요.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떠돌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요, 객이요, 떠돌이 생활하는 거예요.
나중에 우리는 그 뜻을 알지요. 왜 그러냐 하면 나그네처럼 오신 원형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다가 다시 본래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나그네에서 본래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특징이 뭐냐? 지옥에서 천국을 맞는 특징이 뭐냐?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이게 명백한 증거에요. 말이 안 통해요.
똑같이 피 이야기하고, 똑같이 천국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 다 해도 이상하게 말이 안 통해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천국 백날 이야기 두 시간 동안. 몇 년 동안 이야기해봤자 결국 마지막에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어떤 저장고가 있어요. 의미의 저장고. 의미의 저장고에서 지옥의 저장고는 뭐냐? 나에요. 그러나 천국의 저장고는 예수님이 저장고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가 예수님한테 다 쏠려야 돼요. 예수님한테 쏠릴 때 그냥 안 들어가고 나를 어떻게 하느냐? 나에 나오는 모든 의미를 주님께서 삭제시킵니다. 이 문장을 적어볼게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매일같이 겪고 매일같이 느끼는 바를 이 문장으로 설명해볼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취급할 때 인간의 모든 태도와 의식과 의미를 삭제시킨다.’ 왜? 지옥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지옥의 성품과 속성, 성질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절하신 우리 주님, ‘이것 지워줄게, 이것 삭제해줄게’ 다 삭제해요.
“우리 애가 또 시험에 세 번 떨어졌습니다.” “그 세 번 떨어진 것 삭제해줄게.” “우리 애가 공무원시험, 세관원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앞에 뭐가 붙지요? ‘우리’ 애, 나를 삭제시켜줍니다. “그것 네가 잘못해서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일부러 했다. 내가 일부러 떨어뜨렸어.” 네 자체가 무의미해질 때 이걸 오늘 본문에서 잠잠해짐으로 보는 거예요. 평화, 안식으로 보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시끄럽데이’ 좀 조용해라. 왜 그리 떠들어?
주님께 제가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이 상황에 불만 있어? 그러니까 인간에겐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큰일이 없다. 이것 좀 액자로 적어놨으면. 인간에겐 큰일 같은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죽은 자를 계속 살리는 입장에서 큰일 났네. 북한군이 쳐들어온다. 그게 뭐 큰일인데? 북한군 쳐들어온다고 천국이 파괴됩니까? 파괴되는 건 지옥의 나라나 파괴되지 뭐 딴 게 있어요?
여기 레위기 19장 33절, 34절에서 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특징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선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돼야 될 그 신세를 미리 앞당겨서 샘플로 그들 세계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과부가 뭡니까? 남편 없잖아요. 남편이 죽었다든지 이혼했다든지. 그 앞에서 누가 자랑질하겠어요. ‘나는 남편 있다. 한 달에 용돈 쓰라고 천만 원 주는 남편 있다.’ 남편 있어도 비리비리하면 짜증나고. 하나님 뜻이 왜 인간은 본래대로 예수님이 모델이잖아요. 왜 본래대로 돌아가지 않느냐?
마태복음 24장 37절에 노아 나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주님의 의미는 주님만 살아 있기 위한 의미고, 인간의 의미는 나 안 죽어야 된다는 게 의미고, 두 개의 의미가 한쪽은 천국을 이루고 영생을 이루고 한쪽은 지옥을 만드는 거예요. 얼마나 단호하게 대립됩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제부터는 날 위해 살지 않아야지, 쓸데없이 왜 그런 쓸데없는…, 그것도 걱정거리에요. 이러면 안 되지, 라고. 그 점에 대해서 필요한 말씀 또 있습니다. 성경은 얼마나 친절한지. 또 그런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말씀을 지금 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다시 말해서 내가 손대서 고칠 마음 같으면 이런 말을 안 하지요. 우리가 손대고 말씀으로 정화시킨다고 깨끗한 성도, 거룩한 마음 같으면 주께선 아예 이 땅에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알아서 천당 와라, 이래야지요. 그거는 마귀가 시킨 종교잖아요. 네가 정신 차리고 절제하고 경건하게 하면 된다고, 구원받는다고.
어제 낮 설교에 하려하다가 시간이 너무 지나서 안 한 대목을 이 시간에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너무 복잡하고 너무 큰 주제가 되어서 시간관계상 끊을 수밖에 없었어요. 절단나지요, 모세. 그다음에 뭡니까? 고난 나오지요. 그다음에 열매 나왔지요. 이 열매에 대해서 오분의 일도 설명 못했어요. 열매에 대해서 그냥 악한 열매, 선한 열매, 알곡과 가라지로 끝내버렸어요. 근데 이 열매에 대해서 신약성경 전체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어떤 열매냐 하면 지옥에서 맺히는 천국의 열매. 지옥에서는 지옥 열매가 당연해요. 그런데 특이상이 벌어져요. 지옥에서 맺히는 천국의 열매. 조건이 있어요. 지옥에서 맺는 열매, 쓰레기통에서 싱싱한 참외나 딸기 잡숴봤어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쓰레기통에서 싱싱한 장미꽃을 봤습니까? 있을 수 없어요. 죽은 데서 생명이 나오는 걸 구경해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을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열매를 맺어버리면 그 열매가 지옥에서 나온 열매가 되는 겁니다.
열매를 설명하면서 여러분 요한복음 15장을 먼저 생각해주시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 주께서 열매를 목표로 일을 계속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열매₁, 열매₂, 열₃ … 열매ₙ까지 필요한 내 백성을 건지는 열매의 작업은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명에서 넣지 못한 것은 뭐냐? 열매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지상의 열매가.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이거는 인간의 의미로서는 풀어내지 못한 책이에요. 그 한 예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를 보라 했잖아요. 십자가가 어디 있는데요? 십자가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눈으로 관찰대상이 안 됩니다. 십자가는 사건이 터져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지 어디 있어서 구경해서 보는 게 십자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냐고 돼 있다고요.
그럼 십자가 어디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각자 성령 받은 너희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잖아, 라고 본인의 마음을 지적해줘요. ‘내 마음속에 십자가 어디 있습니까?’ 반문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사용하는데 정과 욕심을 육신과 더불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욕심 많은 내 육신, 그 육신을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거울에 비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이미 십자가에 달려있는데 여기 보니 이름이 ‘이근호’라 해요. 황송하게도. 십자가에 못으로 박힌 거예요. 이 박힌 것을 우리가 여기서부터 열매가 나온다는 말은 이 육신을 살해하는 조건 하에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말씀으로 죽는 조건 하에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박혀 있는 육신이 어떤 것으로 조립돼 있고 조합돼 있어요. 갈라디아서 5장에 어떤 게 있는지 봅시다.
5장 19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어디서 나온단 말입니까? 우리가 의도한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여기에 장착돼 있는 육신의 요소에요. 육신의 요소가 이런 것들이에요. 우리 자신을 압시다. 우리는 어떻게 손댈 수가 없어요.
이것이 뭉쳐져서, 강정. 지금 주께서 보는 것은 네가 땅콩강정이냐 쌀강정이냐 깨강정이냐 묻는 게 아니고 그 깨, 땅콩이란 입자 있잖아요. 그 입자를 연결시키고 꼭꼭 엿으로 묶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육신의 힘이에요. 그게 마귀의 힘이라고요. 그게 정과 욕심, 욕망으로 돼 있어요.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대로 잘 사는 강정,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는 강정인데 전부 다 거기다 뭐냐?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사람은 물어요. 그럼 여기서 음행은 안 했는데 우상숭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꼭 질문을 이렇게 해요. 술수는 안 했는데 원수 맺는 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그림 그릴 때 물감을 어디다 짭니까? 팔레트. 팔레트에 칸이 있잖아요. 특징이 뭐냐? 이 전체를 손 하나로 잡을 수 있는 하나의 평면이죠. 똑같은 평면이에요. 같은 육신입니다. 때로는 이게 나오고, 때로는 저게 나오고 필요할 때마다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만 쓰는 건 아니잖아요. 노란색도 쓰이잖아요. 필요한 상황은 주님이 주시고 상황 따라서 인간은 자기 육신의 욕심으로 대처하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지금은 이게 안 나와요. 다음에 이 색깔 나올 거예요. 이걸 한꺼번에 표현할 수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하여’ 이 한 마디로 나를 위해서 남을 구제해도 뭡니까? 그게 바로 육신의 욕망이에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절단시키고 차단시키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네가 네 육신으로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못 오고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선악적으로 판단해서 내가 전에는 요것, 요것 했는데 요새는 이것, 이것 안 하고 나머지는 모아서 선으로 규정합시다, 이래 한다 이 말이죠. 나를 위해서 하면 그거는 로마서 13장에 의하면 이건 율법정신이 아니고 따라서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나를 위함이 아니고 아까 공부한대로 나는 잠잠한 채 있으면 뭐든지 뭐가 되느냐? 사랑이 돼요.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뭐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말씀을 전해야 그 사람을 죽이고 다시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 것으로 계속 살려고 해서 교회 나와도 누가 상담을 받아도 내가 이런 우울증이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해결합니까? 자식이 교회를 안 나오고 말썽을 부려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주께서 만약에 상담하면 제일 먼저 뭘 묻겠어요? 그 자식 누구 자식입니까? 남의 자식입니까, 내 자식입니까? 내 자식입니다. 당신 십자가에 못 안 박혔네. 당신 자체가 못에 안 박혔다. 그러니까 무엇과 경쟁했어요? 남의 자식은 교회 잘 다니고 훌륭한데 왜 내 자식은 망나니냐? 남과 나를 아직도 내 속에 내가 살아 있으니까 무슨 말씀을 총동원해서 상담을 해도 상담이 되겠어요? 상담이 안 되지요.
그냥 잠잠하세요. 잠잠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잠잠하면 주께서 시킨 일이 있을 거예요. 그동안 내가 잠잠 안 해서 주께서 일은 보지 않고 내 의미를 쫓아서 열심히 인생을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주님의 일에 방해자가 된 거죠. 내가 가장 잠잠한 방법은, 나는 죽었다고 인정하면 되지요. 나는 죽었는데 주께서 상황 따라서 나를 살게 하지요.
그러면 여러분 오늘 한 것 종합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시편 62편 5절 말씀은 잠잠하라고 돼 있지요. 잘 들어보세요. 이때 안 졸면 돼요. 잠잠하다 어디로 옵니까? 분주한 나에게 오지요. 우상, 나에게 옵니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말씀이 와서 작동하게 되면 무엇을 배제한다?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를 주께서는 이걸 배제해버려요. 배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돼요.
3절 봅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이게 누구냐 하면 다윗 본인을 말합니다. 나는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내 지조를 지키며 산다고 자부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어떻게 돼요? 이제는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벌써 신앙의 출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뭘 믿던 예수 믿는 나를 그다음부터는 신뢰를 못하는 거예요.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을 그동안 신뢰했는데 주께서 일을 만들어서 신뢰를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처음에 어떻게 됩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잠잠하라 해서 잠잠했는데 잠잠히 안 돼. 이제는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그때 뭐가 나오겠습니까? 육체의 열매가 나오겠지요. 육신의 열매.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내가 뭘 못했는지 나왔지요.
그러면 천사 쪽이나 하나님 쪽은 뭡니까?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십자가의 의미와 취지만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했다. 지옥 속에서 천국이 이렇게 나온다.’ 그 기회를 인간한테 십자가에 못 박을 기회가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못 안 박히고 바르게 살아서 천국에 넣으려했는데 막상 주위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주죠. 그 흔들리는 것, 아까 나오잖아요.
시편 62편 3절,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이게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다윗이에요, 다윗. 왜냐? 주위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4절) 이 상황이 뭐냐 하면 바로 지옥이죠. 지옥에서 천국이란 것이 나오려면 먼저 우리부터 나의 의미가 삭제되고 내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대상인 것을 흔들려야 되겠지요.
흔들린다는 말은, ‘나의 기초를 내가 구축한 그곳에는 더 이상 나를 둘 수 없다’ 이걸 두 자로 하면 ‘펀드’라 합니다. 은행잔금, 아파트, 부동산, 든든한 자식,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그런데 주께서 흔들기에 들어서면 이것이 나의 존재의 기초로서 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빨이 흔들리면 어떻게 됩니까? 뽑으면 되지요. 주께서 나에서 나를 뽑는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이렇게 아주 상당히 냉정하게 이야기해요. ‘죽어. 그럼 나처럼 부활해.’ 진짜 간단해요.
어제 오후예배에 하관예배 이야기했지요.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더 이상 썩을 것이 썩지 않게 되고, 나오지요. 썩은 이빨이 더 이상 안 썩는다 이 말이거든요. ‘정녕 죽으리라’가 뭐로 바뀝니까? ‘정녕 살리라’로 바뀌는 거예요.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믿던 나의 세계가 흔들려야 되는 겁니다.
흔들릴 때 우리는 나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느새 예수 잘 믿어서 이만한 것을 가졌다는 소유했다는 이 자체를 나의 새로운 기초로서 엉터리 기초를 우리가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 들통 나죠. 내가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예수 믿어서 받은 복음 위에 내가 거기서 굳건하게 세웠구나. 그래서 62편 6절 봅시다. 5절은 아까 했지요. 나의 영혼아, 주님의 뜻은 뭐냐? ‘입 다물라’죠. 잠잠하라.
그다음에 6절에,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은 내 이빨은 내가 기초한 곳에서 뽑혔을 때 더 이상 내가 그만큼 건사했던 기초에 대해서 이제는 정이 떠났고, 미련도 두지 않고 빠이빠이 했다는 거예요. 아직 어려운 게 하나 남아 있어요. 잘 들어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 이런 질문해야 돼요. “목사님, 며칠 갑니까?”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 가는데 ‘이제는 됐겠지’가 안 돼요. 왜냐, 뭐가 남아 있기 때문에? 육신이 남아 있기 때문에.
9절 봅시다.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이것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다윗,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나를 잉태한 아담보고 이야기해요. 옛날 아담보고, 또는 아담이 전달해준 내 육신, 혈육에 속한 육신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 육신의 한계가 몸이 약하다? 아니. 정신이 약하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뭔가 약하니까 10절에 보세요.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찌어다” 약하고 약한 내 기초를 담당하기 위해서 그다음부터 인간들이 뭘 하느냐? 뭔가 계속 쌓고 모으고, 계속 권력을 끌어당기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이렇게 정리해도 괜찮습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데요.
‘사람 상대하지 말고 하나님과 상대하라.’ 그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똑같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상대해도 이미 내가 익히 아는 의미만 나와요. 내가 예상한 그것만 나온다고요. 근데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인간들로 사탄에 속한 옛 아담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나와요.
같은 성경을 백 번을 봐도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 성령이 올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똑같은 성경구절 읽어도. 왜? 어제 읽었던 상황과 오늘 읽은 상황이, 주님이 주신 상황이 의도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에 어제 그 본문을 읽을 때 그 상황 속의 의미와 이 상황의 의미가 다 달라요. 공통점은 뭐냐? 입 다물라. 너의 일은 없다. 주의 일 밖에 없어요. “목사님, 이 에어컨 나갈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의 의미가 아니네.”
인간이 한치 앞을 모른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게 우리한테 기쁨이 오느냐, 아니면 우리가 서글프냐는 딴 문제에요.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새로움 안에 들어갔을 때 지옥 속에서 천국으로 옮겼을 때에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이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넘쳐나야 돼요. 나는 모른다. 여기 나오는 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것이 기쁨과 감사로 나오느냐? 아니면 할 수 없지 뭐 인간이니까, 이런 식으로 삐딱하니 다리 한쪽 떨면서 그래 나오느냐? 그건 천지차이입니다.
뭐 자식 때문에 고민이 많다, 돈을 사기 당해서 어떻다, 보이스피싱 열두 번 당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의미를 지옥 의미를 솎아내는 하나님의 특별한 새로운 작업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좀 아픈 건 맞아요. 그래서 이것을 종합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지옥 속에서 천국이란 말은 비-언약의 세계 속에서 언약의 세계, 비-말씀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 비-언약, 비-말씀은 내가 지키는 거예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언약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는 나를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자꾸 이게 방해가 되니까.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내가 제거당할 때의 기쁨,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레위기로 돌아와서 레위기를 이제 설명해야 돼요. 안 그러면 너무 어려워요. 레위기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이스라엘에게 딱 붙여준 거예요. 그런데 붙여준 그 처량한 신세를 이스라엘이 고스란히 그것을 나의 본질로 받아들이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무시했겠어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야 어디서 이방인들이 끼어들어’ 했는데 그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지만 자기가 하나님 나라의 이방인인 줄 몰랐지요. 그럼 하나님 진짜 아들은 뭐냐?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같은 이스라엘에 오셔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작업, 자기 작업이죠. 그것이 바로 말씀에 입각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몇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입장이 어느 정도 된다는 것을 마태복음 27장 봅시다. 이것 보면 여러분 쇼크 받아야 돼요. 날씨는 덥고 땀은 나지만 이 말씀으로 쇼크 받아야 돼요.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것 아시죠. 유다 자살한 건 알잖아요. 그런데 뭐가 쇼크냐? 7절에 보면,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무슨 밭이라?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인지 스가랴에 나오는 말씀인지 혼동되는데 스가랴가 예레미야에게서 가져왔다고 할 수도 있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서 누가 포함이 된 거예요, 운명이? 가룟 유다가 포함이 돼버렸잖아요. 예수님만 기록된 대로 가는 게 아니고 가룟 유다도 기록된 대로 가는 거예요.
말씀은 첫 번째는 소명이고, 두 번째는 선택이고, 세 번째는 운명이에요. 우린 이 코스를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뭐로 소명 받았어요? 사탄으로 소명 받았잖아요. 사탄의 자식으로. 그러니까 불신자든 신자든 전부 다 말씀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럼 말씀에서 못 벗어나면 우리는 뭐꼬? 의미도 없고. 우리는 그걸 의미라 하지 않고 역할이라 역할. 이 역할을 달란트라 해요. 우리의 기능.
우리가 하나님의 어느 편에 속하는가? 천국 양이냐, 염소 각자의 기능들을 하는데 우리보고 뭘 하라가 아니라 말씀대로 이끄는 것을 네가 느끼느냐가 중요해요. 네가 말씀 안에서 이끌려가고 느끼느냐? 그런데 이 세상은 분명히 말씀 안에 돼 있는데 비-언약이고 비-말씀이고. 왜냐하면 그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거든요, 나.
이 나는 악마가 심어놨기 때문에 악마의 힘보다 더 센 분이 안 오면 나는 안 뽑힙니다. 그럼 성도는 뽑히느냐? 안 뽑히기 때문에 성도는 육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지요. 그래서 말씀 들어올 때는 꽝꽝 소리 다 들려야 돼요. 죽어, 죽어 인간아. 네가 뭔데 따로 너의 의미를 찾느냐? 네가 의미를 가질 권한이 있어? 없어. 그동안 살아온 것도 고마운 줄 알아. 호강에 바쳐서 정말. 그것도 고민거리야? 근심거리야? 우울증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아이고, 얼마나 포시럽다.
우울증 하려면 김정은이, 지금 평양의 아파트에 전기 안 들어와서 엘리베이터 운행을 안 해. 선풍기도 못 켜요. 이 더운 37도에. 그런데 와서 우리 애가요? 선풍기도 못 켜고 더워 죽겠다. 포시러워서 그래요. 숨 쉬고 밥이나 먹으니까 딴 걱정을 계속 욕심이 개발되는 겁니다. 끝으로 그 장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시편 62편에 재물이 늘어나도 마음 두지 말라는 그것이, 이 말씀이 누가복음 12장에서 주께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하시는지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에서 21절까지 돼 있는데, 사실 13절부터 21절까지 돼 있습니다. 제가 읽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상담하러 나왔어요. 이건 또 무슨 상담이냐? 예수님이 ‘물어보살’이에요? 서장훈입니까? “선생님!” “왜?” 억울하다 이 말이죠. “내 형이 아버지의 내 상속분을 몽땅 가져갔습니다.” 참 진짜 현실성 있는 상담이죠.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현실성 있는 상담을 했어요.
자, 오늘 공부한 걸 적용해봅시다. 지금 이 동생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주님과 상대합니까, 사람과 상대합니까? 사람과 상대하는 그것의 연속성, 이어가면서 주님을 강제로 자기 일에 끼워 넣지요. 이게 상담이라는 거예요. 자기는 의롭다는 거예요. 억울하다는 겁니다. 참 인간에게 억울하다는 건 성립이 안 돼요.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무슨 억울한 게 있어요. 억울해도 주님이 억울하지 인간이 왜 억울해요.
그래서 상속분을 다 가졌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여기 탐심이 나와요. 이 탐심은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따라서 거기서 우리는 우상이란 것이 어디서 나온다? 내 마음에서 생긴 게 우상이다, 신이다.
내 마음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신을 인간은 ‘나는 믿습니다’ 하고 믿으면서 교회 나오고 있어요. 내 마음을 달래주는 예수, 내 마음을 달래주는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이거 붙들고 교회 나온 거예요. 교회 나와서 목사보고 여기에 맞춤 설교를 해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힘든데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진짜 설교는 입을 잠잠케 하는 설교에요. 우리 마음을 잠잠케 하는 거예요.
오늘 핵심이 그거잖아요. 좀 주는 대로 먹고 사세요. 그냥 오늘부로 끝내세요. 내일 살 생각 말고 그냥 끝내세요. 무슨 욕심이 많냐,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현실을 하려고 하면 이 과정을 거쳐야 되니까 예수님이 하신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으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라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부자가 있는데 부자로 들어갑니다. 복잡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것 모르면 이 자리에 안 왔으니까. 부자는 어디서 만들어준 겁니까? 상황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만들어주지요. 부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만든 거예요. 원숭이 세계에서는 펀드, 돈, 달러 같은 것 별로 안 중요해요. 어린아이 세계에선 사탕을 좋아하지 돈은 안 좋아합니다. 애한테 세뱃돈 주고 사탕을 초콜릿을 이만큼 던져줘 보세요. ‘할아버지 고마워요’ 이러고 있다고요. 오만 원과 만 원의 차이점을 몰라요.
자본주의란 뭐냐 하면 신이에요. 뭐가? 돈이 신이 되는 세계를 자본주의라 합니다. 돈이 신이 되는 거예요. 나는 뭐가 되느냐? 그 신 앞에 나는 신을 숭상하면서 경배하면서 그 신의 교인이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는 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이란 종교에 나는 신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버는 돈의 신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누가 돈 벌어주면 나의 신이 되는 거죠. 결혼할 때도 남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고 신랑이 돈이에요. 정확하게 돈 있는 신랑, 안정된 직장, 이것 없으면 솔로 백날 나와도 소용없습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하죠. 이것 중요한 이야기인데 사람과 사귈 때 누구와 결혼하려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남자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되게 당연해 보이죠. 근데 정답은 뭡니까? ‘네가 뭔데?’ 나는 너와 결혼하려고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거든요. 나는 내 의미가 있어요. 나는 내 결혼하려고 했지 네 결혼, 잘 들어보세요.
내 결혼을 위해서 너를 만났지 네 결혼을 위해서 내가 만난 게 아니잖아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둘 사이에 타협을 하는데 타협점이 엉터리에요. 정치적 양보지 타협점이 아닙니다. 평화가 아니에요. 평화로운 가정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본색이 드러나지요. 그때 하는 말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네 탓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너를 선택한 내 탓이 여기서 빠져있어요.
전부 다 내 탓이니까 입을 다물어야 돼요. 부자는 바로 대표적으로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 어떻게 했느냐 하면 농사지었는데, 19절 이것만 할게요. 그때 누가 이야기합니까? 어려운데 중요하니까 전에도 이야기했어요. 농부가 지금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자신의 영혼하고. 나오잖아요, 거기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내 영혼아” 그다음에 뭡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까 우상인 거예요. 내가 내 영혼, 내 마음을 따로 해놓고 평생 동안 내가 끄집어낸 내 마음을 경배하고 엎드리는 것, 이게 바로 마귀의 세계, 이게 인간의 타고난 세계입니다. 이 자리를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예수님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농사가 되던 안 되던 걱정은 내가 하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부름을 받았으면, 그다음에 이미 택했고, 택했으면 그것이 뭐냐? 확정, 확정. 여러분 ‘확정날짜’ 알지요. 아파트 살 때 해봤잖아요. 확정된 신분에 대해서 말씀이 들어오면 이미 확정되었으며 말씀대로 될 것을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들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말씀대로 태어났고 살아왔기에 이제는 말씀대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경로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우리의 육신적 속성 그때마다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마주하면서 십자가에 우리의 육신은 이미 죽은 채로 주께서 다룬다는 것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