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무효 역대하 16:10 250704
20250704a 울산강의-역대기하(14강) 16장 10절 : 신앙의 무효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6장, 역시 아사 왕 이야기인데요. 14장 9절에서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대군을 앞장세워 쳐들어왔을 때에 11절에서 아사 왕이 기도하기를,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어요. 누가? 아사 왕이 그렇게 기도했어요.
그때까지 사람들은, ‘아사 왕이 저렇게 기도해봤자 하나님이 도와주겠어? 신앙이 좋아야 도와주지’ 이런 생각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상 왕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셔서 백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이건 14장이고 15장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러니까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저희를 버리신다, 라고 이야기할 때에 11절에서 아사 왕이,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12절에 보면,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해서 모든 우상을 쫓아내고 산당을 부수면서 아사 왕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자, 이걸 보고 아사 왕은 신자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라고 사람들은 단정했을 거예요. 소 칠백에다 양 칠천 드리고, 거기다가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어른이든 애든 상관없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니라. 왕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 중에 아사 왕 본인이 그 안에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하나님 찾지 않는 사람은 다 지옥 간다 할 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천국을 갈까요, 지옥을 갈까요?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봐도 아상 왕은 신자라고 남들이 평해주지요. 소 칠백에다 양을 칠천 드리고 산당을 다 부수고 하나님 찾지 않으면 다 죽인다 했으니까 누가 봐도 신자지요. 신자처럼 보이지요.
관찰자. 인간의 문제가 뭐냐 하면 본인이 관찰자가 된다는. 백만 대군이 왔을 때 본인이 백만 대군을 봤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켜야 될 유다나라를 지켜야 될 책무를 지니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백만 대군이 온 것, 자기를 감당 안 되니까 자기는 기도했고 하나님이 도와줬다, 라는 것을 지금 아사 왕이 그것을 다 보고 있어요. 관찰자.
내가 관찰자가 되면 이거는 내가 뭐가 되냐 하면 내가 평가자가 된다고. 관찰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도와줬다, 안 도와줬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아니다’를 누가 하느냐? 내가 평가자가 돼요. 관찰자에서 평가자가 됩니다. 그래서 평가자 다음에 나오는 건 뭐냐 하면 내가 보기에 내가 신자로 변해야 된다는 각오, 결심, 오기 이런 것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게 되지요. ‘나 이제 하나님 믿기로 작심했다.’
그러한 고백이 불신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거예요. ‘어려울 때 날 도와줬고,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보시에 하나님 안 믿는 건 죽이라. 이거는 신자가 되어야 본인이 신자라는 확신이 있어야 단언할 수 있다.’ 아사 왕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역대하 16장입니다. 아사 왕에게 또 전쟁이 있었어요. 지난 번 전쟁은 구스 왕과 전쟁했잖아요. 이번엔 같은 동족인 북쪽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어요. 그전에 라마에다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전쟁하는 데 자기 백성들이, 국민들이죠. 북쪽은 바아사 왕이고 남쪽은 아사 왕, 이름이 비슷하지요. “아사왕 삼십 륙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1절)
그걸 지어놓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섭니다. 이때 백만 대군을 물리쳤던 아사 왕이 그 전쟁은 대승했거든요. 하나님이 이기게 해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북쪽이 남쪽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여러분이 만약에 아사 왕 같은 신앙이라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전쟁이 또 일어났어요. 지난 번 전쟁 땐 백만 대군이니까 감당이 안 되잖아요. 감당이 안 되니까 누구한테 하소연하고 누구한테 의지합니까? 하나님께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번 전쟁은 손 뗐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왔을 때는 백만 대군까진 아니잖아요. 그러면 똑같은 믿음이라면 이번 전쟁은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번 전쟁은 제가 대처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왔을 때는 백만 대군이 아니니까 어떻게 처리했느냐 하면, 아 이거. 이거는 하나님을 귀찮게 할 것 없이 내 선에서 처리해도 이 전쟁에서 승리가 되겠다는 그러한 꼼수가 생각이 나지요.
그럼 여러분들이 아사 왕이라 치고 내 선에서 전쟁에 승리했을 때 백성들이 나에 대한 왕에 대한 신임과 평판과 인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래가고 더 크게 되겠지요. “역시 우리 왕은 전에 백만 대군 왔을 때는 믿음으로 처리하더니만 이번에 북 이스라엘 왔을 때는 하나님 의지 안 해도 이미 자기가 신자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신자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신자를 안 도와주고 누굴 도와주겠어? 신자니까 하나님께서 또 우리 왕을 통해서 일처리 제대로 하셨구나.” 백성들이 그렇게 왕의 신앙에 대해서 더욱더 돈독하게 신임을 하겠지요.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한 번 크게 쓸게요. 오늘 역대하 14장, 15장, 16장까지 합니다. ‘지나간 신앙은 무효다!’ 왜? 지나갔으니까. 신앙은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이 신앙이거든요. 신앙은 내가 갖고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때그때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정하는 게 신앙이에요.
그러면 나는 뭐냐? 지나간 신앙은 무효라 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지요. ‘안 돼!’ 이런 사람이 있고, ‘당연하지요!’ 이런 사람, 두 부류가 생깁니다. '안 돼‘라고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옛날에 빡세게 신앙생활, 교회생활 잘했으니까 거기에 축적된 하나님의 보상체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열심히, 신앙을 착한 일로 본다면 착한 일한 장부가 있을 거예요. 나쁜 장부, 착한 장부.
착한 장부에 신앙 했다는 것이 거기에 빼곡히 담겨있으면 그다음에 지난 신앙생활 잘했으면 지금 어려울 때 거기에서 비축해놓은 신앙이란 선행에서 몇 개 뽑아내도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함이라‘ 해서 누적된 하나님께 받을 보상, 하나님께 맡겨놓은 그 보상을 어려울 때 써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지나간 신앙을 무효라 할 때 ’안 돼‘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을 이걸로 보는 거예요. 보험으로 보는 겁니다. 4대째 기독교 가정, 이런 거요. 오십 년째 교회 섬김, 이런 것 있잖아요. 일종에 보험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 보험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지나간 신앙은 무효가 돼버린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류 보세요. ‘안 돼’라고 질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건 ‘당연하지요.’ 왜 당연할까요? 신앙은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냐 하면 주님의 일이거든요. 주님의 일에 나의 신앙을 거기에 은근히 끼어들려고 해요? 내가 주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나 믿는 거예요. 나의 가치, 내가 얼마나 자질이 있는가, 내가 어떤 재주가 있는가? 나를 믿는 거예요.
나를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불신앙이죠. 불신앙은 신앙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길 믿는 걸 말합니다. 불신앙은 어디 가느냐 하면 불 있는 곳에 가지요. 지금 덥다고 난리인데 아마 지옥은 평균온도가 40도 넘을 거예요. 에어컨 없이. 그것도 영원토록 못 빠져나오고. 지옥 가는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분노해요, 하나님께. 왜?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후회해서 뭔가 좋은 결과가 오면 좋겠는데 이건 후회할 공간이 아니에요. 후회해서 뭔가 사태 전환될 세계는 지옥이 아닙니다. 기회라는 게 다 끝났거든요. 써먹을 기회를 다 썼어요. 최종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안다면 후회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영원토록 분노하지요. 대들고. 그게 본인의 본색이었습니다. 평소에 죽기 전에 본색이 그거였어요. ‘조금이라도 내 인생에 대해서 힘들게 하면 가만두지 않는다.’ 이게 인간에게 숨겨진 본심이었습니다. 주님의 특기는 우리의 본심 까발리기.
아사 왕은 자기의 본심을 몰랐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혜택을 입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고맙다고 여기니까 자기 자신이 인간이 달라진 줄 알았어요.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말기 암인데 나았다. 기도하니까 자식이 잘되더라. 뭔가 기도 응답되고 혜택 입으면 본인이 딴 사람, 뭐든지 하나님께서 계속 봐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인이 뭔가 착각을 하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아사가 신앙적으로 했던 것 나열했지요. 14장, 15장에서. 누가 봐도 뭐다? 이거는 신자 맞다. 여호와 믿지 않는 자는 다 죽인다 했으니까. 그건 뭐 극단적인 신자, 광신자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역대하 16장 봅시다. 신자인지 봅시다. 8절에,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묻는 거예요. 많다는 뜻이에요. 선견자 하나니가 찾지도 않았는데 왕한테 가서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8~10절)
여러분 하나니란 선지자가 지금 거짓말했습니까?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왕을 약 올리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니는 선지자에요. 지난 수요일에 했어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지, 그다음 뭐겠어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사람 같으면 속일까, 뭐 저 사람을 기분 좋게 할까, 어떻게 하면 위로해줄까? 사람하고 할 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선지자가 하는 말은, 선지자 대 그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대리자에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택배기사처럼 전달하고 손 털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지난 열왕기상 수요설교 때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이야기 나왔지요. 사람과 상대를 안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왜 상대를 안 하느냐? 사람이 없으니까요. 사람이 없어요.
가족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입니다. 자식도 있겠지요. 동생도 있겠고. 이 사람이 만약에 신앙이 없다면 이 사람들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신앙인이란 내가 없음을 믿는 자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상하게 들으시면 안 됩니다. 수천 번 이야기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논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신앙인은 언약 안에 있다. 맞지요. 언약은 어떤 능력이 있느냐? ‘있는 자를 없다’로 만들고, ‘살아 있는 자를 죽었다’로 만드는 게 언약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현재 언약이 없는 동네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면 있어요. 그리고 언약이 없는 동네에서 인간이 태어나면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면 뭐도 살아 있느냐 하면 인간의 아까 관찰도 살아 있어요. 관찰이 살아 있으면 그다음에 뭐가 살아 있느냐? 평가가 살아 있어요. 평가가 살아 있으면 그다음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를 위한 보상, 또는 보험이죠. 나의 관찰하고 평가하고 행동한 거기에 보상에 대해서 이게 살아 있어요.
그런데 방금 지웠습니다만 지나간 것은 무효다. 지나간 것은 무효에 대해서 제가 아까 14장 이야기했지요, 15장 이야기했지요. 지금 16장 이야기했잖아요. 14장, 15장에서 아사 왕이 얼마나 믿음 좋았습니까. 구스의 백만 대군이 왔을 때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리고 소 칠백 양 칠천 잡고, 그리고 뭡니까? 누구든지 여호와를 믿지 않는 자는 다 죽여 버린다 했잖아요.
여호와를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한다? 다 죽여 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된다는 약속을 믿지 않는 그것은 사람으로 취급하면 안 되고 살아 있는 것은 죽여 없애서 아예 인간조차도 없다고 봐야 된다. 이게 아사 왕이 결론을 내리고 통치를 했던 당자가가 누굽니까? 아싸, 아사 왕 아닙니까.
그 아사 왕이 백만 대군 왔을 때는 하나님께 의지했는데 북 이스라엘에서 오니까 이거는 의지할 것도 없이 어느 선에서 처리한다?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내 선에서 처리한 게 뭐냐 하면 그거에요. 북 이스라엘과, 북한과 그 위에 나라가 있어요. 러시아죠. 북한과 러시아, 김정은과 푸틴이 동맹을 맺은 거예요.
동맹을 맺으니까 남쪽에 있는 대통령, 누군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은행 금 끌어 모아서 러시아 푸틴을 만나는 거예요. 만나서 북쪽과 군사동맹 끊고 저와 계약 새로 합시다. 동맹 맺읍시다. 금을 선물로 가져왔잖아요. 한국은행, 대한민국 금 박박 긁어서 가져왔으니까 금 받으시고 북쪽 끊고 남쪽 유다와 동맹 맺읍시다. 그러니까 푸틴이 하는 말이, “뭘 도와줄꼬?” “러시아에서 북한을 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케이.” 쳤어요.
치니까 북한 김정은이 한국 치려고 전쟁하다가 갑자기 동맹관계 러시아가 쳐들어오니까 빨리 군대를 돌려서 러시아 막으려고 하니까 라마에 검문소 건축하다가 일꾼들 데려다가 전부 군대로 보내서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하니까 라마에 건축자재들 그대로 남아 있다 아닙니까. 시멘트, 철근.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북쪽의 러시아와 싸우는 데 정신 팔렸을 때에 라마에 가서 자재들 갖고 와서,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수운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16장 6절에 나옵니다.
어떻게 돈 갖다 넣고 외교적으로 전쟁 잘 해결했지요. 자, 묻습니다. 아사 왕이 왜 북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합니까? 자기가 신자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백을 믿었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든든한 백, 신자니까 누가 도와준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지난 일은 다 무효가 되는데요? 지난 잘 믿은 것 무효가 되는데요? 여러분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처리하려고요?
여러분들이 이제 궁금해야 됩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게 아사 왕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이 말이죠. 내가 교회 수십 년 다녔다. 내가 돈 내서 교회 예배당 했다. 이게 다 무효인데요? 어떤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안 돼’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집어넣은 밑천이 아까우니까.
생각해보세요. 교회 와서 헌금 한 푼 안 하는 사람 있고, 교회 와서 오십 년 동안 헌금한 것, 십일조 한 것 복리로 이자까지 쳐보세요. 얼마나 넣었겠습니까? 거기다가 교인들 하나하나 혼사나 장례식, 먹였던 부조금만 계산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 십오 년 다녀서 장립집사 했는데 교인들 대소사 찾아다니면서 부조도 하고 헌금 많이 했어요. 그런데 곧 교회에서 장로 투표를 하게 됐어요. 떨어졌어요. 이번에 떨어진 건 하나님의 뜻이라 해서 일 년 동안 믿음으로 견디고 그다음 장로 투표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그 교회 나왔습니다.
인간적으로, 신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너희들 나한테 결혼식에 내 돈 축의금, 조의금 받은 것, 인간적으로 그러면 안 되지. 그 사람 중소 기업하는데 형편도 안 좋아요. 은행이자 갚는다고 다…. 인간적으로 너 그러면 안 돼. 한 번 떨어질 땐 믿음으로 견뎠다고. 두 번째 떨어진 이건 말이 안 되지. “여보, 다른 교회 가자.”
이미 문제는 거기 안 다니고 다른 교회 다니는 게 문제가 아니고 천국을 어떻게 갈 것이냐? 이거는 천국 문제에요. 자기가 신을 믿었어요. 자기 자신을 믿었다고요. 아사 왕처럼. 성경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 문제를 한 문장으로 끝내겠습니다. ‘말씀을 보지 말고 말씀이 되어야 한다.’ 보게 되면 성경지식이 여호와증인처럼 많이 들어있게 돼요.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말씀이 되면 돼요. 내가 말씀 되는데 누가 방해 놓을까요? 말씀을 보려고 하는 말씀 되는 나를 방해하고 있어요. 성경구절 달달 다 외우지요. 그러면 말씀을 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 말씀 보고 있는 말씀을 관찰하고 있는 나, 내가 살아 있지요.
그런데 말씀이 돼버리면 누가 죽었어요? 말씀에 내가 방해물이 되는데 내가 말씀이 되었다는 말은, 나란 방해물이 죽었다. ‘내가 죽었다’가 될 때 나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럼 말씀이 되는 방법은 뭐냐? 말씀이 나를 죽이면 되는 거예요. 천사의 말이 아브람과 사래를 죽이면 돼요. 천사의 말이 아브람과 사래를 죽이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안 되는 천사 셋이 왔어요. “내년 이맘때 당신 집안에 아기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합심해서 웃었어요. 웃었다고요. 이게 웃을만한 이야기죠. 왜 웃습니까? 사래나 아브람이나 살아 있으니까 관찰이 있잖아요. 자기가 아는 지식이 있지 않습니까. 지식에 입각해서 볼 때에 천사가 하는 말은 이게 웃기지도 않는 말이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 때 제가 많은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자꾸 예수님 십자가 믿는다 하지 말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 예수님과 같은 그 시대에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구경하러 온 사람들, 주변에 있던 관계된 행정 공무원들, 청중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는 장면을 실제로 봤을 때 그들은 예수를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이거는 안 믿을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메시아다운지 전혀 없었어요. 제 정신으로 아무리 따져 봐도 메시아라 할 만한 구석이 어디에도 없어요. 지금 관중들이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은 뭐냐?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목격이에요. 제자들이야 도망치고 없지만.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우르르 십자가 현장에 갔다고 봅시다. 그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상상해서 예수를 믿지만 막상 예수님 십자가 믿는다고 하지만 십자가 현장에 오늘날 교인들이 갔다면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아니야. 저분을 살려야 돼’ 이런 결론이 나오겠습니까, 어떤 결론이 나오겠어요? 코미디에요, 코미디. 어느 정도껏 속여야 속아 넘어가지. 말도 안 되는 그런 자세를 취해놓고 우리보고 믿으라고? 신중을 기했던 유대당국자들은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하는가 보자. 안 구했어요.
이때 그들이 예수님 십자가 하고 난 뒤에, 여기 일본말이 들어가야 돼. 이 일본말 진짜 중요한 일본말인데 ‘시마이’(仕舞い/終い) 종교 자체가 코미디에요. 시마이였어요. 차라리 내가 상상한 하나님 믿고 복 주시길 믿는 이게 더 든든한 믿음처럼 느껴져요. 실제로 예수님 뭐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이라 했거든요. 아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자기가 하나님이래. 이 코미디를 누가 믿었겠어요?
‘당신이 하나님이라?’ 이걸 유대지도자들과 본디오 빌라도가 몇 번이나 물은 거예요. ‘당신이? 내가 굳이 이 말까지 해야 돼? 당신이 하나님이냐는 질문을 하는 자체가 나한테 수치스러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굳이 당신한테 확답을 받아야 되겠어? 나도 쪼다처럼 되어서. 딱 보면 몰라? 아닌 걸.’ 딱 보면 하나님 아니에요. 누가 봐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하늘을 만드시고 천사와 함께 누리시고. 지금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보고, ‘구름 타고 온다는데 당신은 구름 안 탔잖아.’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누구도 사람 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에요. 말씀이 없는 인간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같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냥 자기 상상력을 동원해서 교회라는 종교를 만든 거예요. 기독교란 종교를 만든 거예요. 뭐 도와주면 고맙고.
그래서 아사 왕의 이러한 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아사 왕이 구스에서 백만 왔을 때는 믿는 척하다가 지금 와서는 자기 선에서 외교동맹 식으로 처리해서, ‘그것 봐. 내가 다 처리했잖아. 자재까지 얻었다니까. 나 유능하지?’ 이렇게 아사 왕이 백성들에게 자기를 어필해서 유능한 왕으로서 군림하는 이것은 말씀이 아니고 내가 혜택을 입은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얻어먹은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줬다는 말은 그만큼 내 가치는 하늘에서 인정해준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은혜 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니들은 안 돼.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하고 나는 가치 있기 때문에 이거 인물이다, 쓸 만한 존재다 해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혜택을 입은 게 문제에요. 아무 혜택이 없어서 나는 완전히 하나님께 버린 자식이고 쓰레기구나, 이러면 계속해서 자기가 살아도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기 때문에 내가 변절될 이유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나는 세리, 창기고 도둑놈이고 내 존재 자체가 무가치한 가치가 처음에서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경우에는 이상하게 하나님 왜 저 같은 인간을 살려주십니까, 해서 하나님이 주신 신비로움이 살아 있단 말이죠. ‘나 같은 인간이 왜 살아 있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신비로움.
살아 있는데 아사 왕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내가 유다 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보기에 제대로 왕다운 왕이 돼 봐’라는 그 노림수, 그걸 제가 노림수라 하지만 보통 일상용어에선 고대하기. 기대하기, 목적의식, 목표의식. 나는 목표와 목적을 가질 자격이 된다는 그 의식, 역시 하나님은 사람 알아 봐, 이런 것. 나 같은 인간을 안 쓰면 하나님께도 손해지, 이런 의식. 이게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오실 예수님과 비교해보세요. 정말 결이 달라요. 완전히 결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고 노림수가 다르고 가는 길도 달라요.
창원에 가면 NC Dinos 야구 경기장이 있는데 관중석 보통 만 원인데 십만 원을 내면 같은 야구 관람을 하는데 구단 쪽에서 삼겹살에다 채소, 찍어먹는 된장까지 준답니다. 삼겹살 구워먹으면서 야구 관람할 수 있게 돼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지옥 가는 열차에 식당 칸이 있는데 거기서 삼겹살 구워먹어도 괜찮아요. 가는 목적이 지옥인데 지옥에 간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신나게 삼겹살 맛있게 구워먹는, 세상사는 게 이렇게 재밌네.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어요.
사는 재미를 만끽한다는 말은, 내가 이렇게 사는 재미를 누릴 가치가 나한테는 장착돼 있다고 본인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교회에서 말은 해요. 이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아사 왕이 그런 사람이에요. 혜택을 입었어요. 혜택을 입으니까 자기가 자동적으로 신자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신자라고. 이걸 어떡하면 좋아요? 이 문제를. 한 번 정리해드릴게요.
‘살아 있는 자는 천국 생활을 하지를 못한다.’ 구스의 백만 대군이 왔지요. 아사 왕의 반응은 뭐였습니까? 백만 대군 앞에서 아사 왕은 ‘이미 졌다!’였습니다. 이미 진 거예요. 내가 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자기의 목적과 기대를 넘겨주질 않아요. 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한테 맡겨요. ‘내가 졌어, 끝났어. 나 안 돼’ 이럴 경우에만 어떻게 합니까? 나의 일에서,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 처음 나왔습니다.
나의 일에서 주의 일로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행 열차를 타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바뀌면 여기서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좋은 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바뀌게 되면 지난 모든 일이 다 뭐가 되느냐 하면 주의 일이였음을 차후적으로 재해석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삼겹살 구워 잡수세요. 그런데 그게 누구 일이다? 그게 주님이 먹으라고 주께서 지시해서 먹은 삼겹살이에요. 야구장에 가세요. 하고 싶은 것 다 하세요. 사우나 하고 놀러가고 크루즈여행, 유럽여행 다 가세요.
그런데 이게 주의 일이라면 베트남에 가든 어딜 가든 ‘나 베트남 갔다 왔다’ 이러면 안 되고 ‘주께서 베트남 구경시켜주셨다’로 인식이 전환돼요. ‘나 베트남 가기 전에 진즉에 죽어야 돼. 베트남 비행기 타기 전에 죽었어야 돼. 그런데 안 죽이시네. 아이고, 신비로워라. 왜 하나님은 여행 전에 안 죽이시지? 아하 죽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 일이구나. 그러면 하나님께서 베트남 여행 가라면 갔다 오지 뭐.’ 이것, 이 마음.
그러면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 구원받아야지. 이건 자기 일이에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건 자기 일이고 십자가가 십자가 일 터지고 난 뒤에 그 십자가 일이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 일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멀쩡한 우리에게 성령이 와서 십자가 일을 믿게 하는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 것도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내가 말씀을 보는 것도 아니고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뭐가 되느냐? 말씀이 덩어리가 돼버리죠. 이건 하나의 신앙인의 요령인데요. 뭐든지 감사하지 않거든 하지 마세요.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이걸 극단으로 밀어붙이겠습니다. 극단으로 가야 돼요. 이래선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이걸 극단으로 집어넣으면 감사하지 않거든 살지 마세요. 아예 살지 마세요. 마지막입니다. 이걸 더 극단으로 합니다.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해요.’ 이걸 성경에서 뭐냐?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은 자기 고집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가치 있고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모르지. 내가 한 번 보여줘?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지. 나 대단한 존재거든. 날 무시하지 마.’ 이런 것. 따라서 성도한테는 결점이라든지 오류라든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돼요. 죽은 자가 무슨 오류가 있고, 죽은 자가 무슨 결점이 있습니까. 잘하는 것도 필요 없고 못 하는 것도 필요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사고 주님의 선물이에요.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제 첫 번째 시간 마치면서 한 마디하고 10분 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할 말은 이 문장입니다. ‘이 모든 언약의 일/주의 일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러면 전쟁인데 무슨 전쟁? 그 무슨 전쟁은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20250704b 울산강의-역대기하(14강) 16장 10절 : 신앙의 무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굉장히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기 쉬운데요. 잊어버릴 때마다 생각하기는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어요. 인간이 인간을 만든 게 있어요. AI(artificial intelligence)입니다. AI는 하나의 인격체가 돼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인간은 AI를 버리지 못하고 AI에게 점점 더 종속되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것에 종속되는 거죠.
네가 미는 AI와 내가 미는 AI를 서로 시합을 붙이면서 누가 승자가 되느냐, 앞으로 세상은 그런 판이 되는 겁니다. 자기들은 다 숨기고. 자기가 숨긴 AI를 내세움으로서 AI가 해결하면 자기는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것, 그걸 죄의 종, 종이라 합니다. 로마서 6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여기 오늘 역대하 16장 10절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그렇게 돼 있어요. 여기서 피해자가 발생됐어요. 피해자가 발생된 이유가 뭐냐 하면 전쟁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전쟁,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전쟁하는 그게 하나의 동기가 되어서 피해자가 발생됐는데 피해자에 선지자, 선견자 하나니가 포함돼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선지자는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다 했지요.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 하나니는 하나님 편에 선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편에서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난 게 선지자고, 그 선지자가 학대를 받았어요. 피해를 입었어요. 선지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누가 피해자로 등장하는가? 하나님 자신이 인간 세계에서 피해자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핍박받고 있는 겁니다. 이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설움 받고 있고 상처받고 있다는 이걸 경과로 이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전쟁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의 원칙은 창세기 3장 15절 끝부분에 나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 라고 돼 있고, 그러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뱀의 후손한테 이기겠지,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뭐가요? 악마가, 뱀이 누구의 발꿈치를 물어서 상하게 한다? 바로 메시아의 발꿈치를 문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뱀은 기어다니까 발쪽에 가깝잖아요. 발쪽을 무는 거예요. 메시아의 머리는 하늘에 있고 다리는 땅에 있는 형국으로 이 땅에 오시잖아요. 오실 때 땅의 세력을 장악한 악마가 메시아를 공격하고 예수님을 공격할 때 인간 쪽에 속한 것을 공격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본질은 악마가 못 건드리지요. 건들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걸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걸 계기로 해서 뱀은 정통으로 하나님 앞에 그 머리를 박살나게 돼 있습니다. 이 전쟁이에요.
이 전쟁이니까 이 원리가 역사 속에 진행되게 되면 하나님 편에 서있는 쪽은 상하는 발꿈치에 해당되는 일을 전쟁을 통해서 그만큼 당해야 되는 거예요. 피해 입은 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피해자가 누구냐? 선지자입니다. 그중에서 여러 선지자 많습니다만 그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사무엘이죠. 사무엘이 사울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이여, 당신은 망령되이 행했다.”
오늘 역대하 16장 9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왕이 망령되이 행한 거예요. 망령되이 행한 것이 무슨 뜻이냐? 여기에 대해서 사무엘상 16장에게 보게 되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가서 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제사 드린 그 이야기도 있고, 또 전쟁할 때 아각 왕을 쳐야 되는데 치지 않고 살려뒀잖아요. 그때 뭐라 했습니까? 왕은 망령되이 행했다. 사무엘상 13장 13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에 이렇게 나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나중에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 하지 말고 아예 망령되이 행하기 전에 그 일을 안 하도록 미리 사전에 차단하면 하나님도 좋고 왕도 좋고 이런데 왜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꼭 시간차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뒤에 와서 추궁하듯이 왜 그렇게 하느냐?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행한 것이 망령되이 행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 본질은 뭐냐? 망령되이 행한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로마서 6장 16절에 이 종을 ‘죄의 종’이라. 로마서 6장 16절에 죄의 종과 의의 종, 둘로 나눠서 인간은 죄의 종으로 시작해서 의의 종으로 가요. 누구든지 의의 종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고 자기의 추잡고 더러운 본질에서 나온 그것이 바로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추잡고 더러운 것, 비-거룩이죠. 추잡고 더러운 걸 제가 나열해보겠습니다. 뭐가 추잡고 더러운지. 세 가지만 이야기하죠. 간음하지 말자, 살인하지 말자, 도둑질하지 말자. 이게 추잡고 더러운 거예요. 이게 얼마나 추잡고 더러운 짓인지요. 해보세요. 아까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 되라 했잖아요. 인간이 말씀이 되기 전에 먼저 말씀을 지키는 자부터 출발해요.
그런데 인간은 뭐냐? 이미 죄의 종이죠. 죄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하는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죄의 종을 부정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감사, 감사는 안 나오지요. 감사가 나올 리가 있습니까. 자기 단도리, 바짝 긴장해서 핏대 세우고 실수하지 않는지 말씀에 위배되는 건 없는가, 이렇게 번들번들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감사입니까? 누가 건들기만 하면 와락 달려들 지경인데.
죄의 종은 죄의 종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걸 북돋아주는 게 뭐냐?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게 북돋는데 율법이 주어져요. 율법이 투입됩니다. 율법이 투입되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 그대로 현실이 되지요. 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3장 19절, 20절(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에 그렇게 돼 있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나와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죄에 가두었으니”(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2절) 율법을 통해서 죄에 가두는 방법은 율법을 줌으로서 죄에 가두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율법이 없을 때는 의인이었는데 율법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죄의 종이었다. 얼마나 성경이 명쾌하게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에게 뭐가 추잡고 더러운 겁니까? 율법을 거론해서 이 말씀을 지키겠다는 그 자세, 태도 자체가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눈 뜨고 못 볼 짓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 증거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등장하잖아요. 가인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잘 들으세요.
뭔가 내가 누군지를 모를 때에 내가 누군지 아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나님이 내 앞에서 피해자가 될 경우뿐이에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나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이 피해자가 된 가해자 자리에서 나는 그동안 줄곧 꾸준히 살아왔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나한테 애초부터 성립도 안 되고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고 싶은 거예요.
어떤 사람?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 천국 가면 어서 오라고 받아줄만한 깨끗한 사람, 하자 없고 실수 없고 오류 없고 뭔가 잘못을 하면 그때그때 회개하고 반성해서 계속 늘 안에서 자동적으로 정화처리가 되는 그런 깨끗한 사람, 내가 봐도 나한테 반하고 훌륭한 사람, 그런 사람이 무슨 종? 그게 바로 죄의 종입니다.
죄의 종의 특징은 감사가 없어요. 긴장돼 있어요. 행여나 누가 나의 약점을 훅 치고 들어오면 그때 어떻게 내가 방어를 할까, 이것에 몰두해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안다’고 하면 그걸 올 여름에 방어체제, 아이언 돔(Iron Dome, 이스라엘 첨단방어시스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방어체제처럼 항상 자기를 방어를 채비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마태복음 18장 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다.’ 네모가 뭡니까? 천국에 가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이거에요. 무조건 그 집안 식구에요. 엄마는 젖 내놔야 되고 나는 이 집안에 무조건 돼야 돼. 왜? 어린아이는 이 집안이 없었던 나를 창조했기 때문에. 무슨 관계가 계속 어린아이한테 유지된다? ‘아빠, 엄마가 나를 만들었잖아’ 이게 계속 유지가 돼요. 그래서 성경 전체는 구원받는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드는 작업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라 보면 돼요.
이사야 1장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입니까? 상식이 아예 없는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사람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해줄 때 나한테 최대한으로 유리할 수 있느냐? 그걸 깨우친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을 막 대하면 그 사람도 나한테 막 대한다는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의 사회가, 이번에 [다니엘 속의 그리스도: 꿈과 현실]이란 책 나오잖아요. 수련회 때 나올 것 같아요. 거기 제2강의 내용 전부는 이거에요. 인간사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내용을 2강 전체에 다 실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사회는 상부상조고 상호협조에요. 여기서 결속력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친구가 없어요. 왜 친구가 없는가? 그 친구한테 지가 뭔가 한 게 있어야 여기에 결속력이 생기잖아요. 맨날 욕하는 사람은 누가 친구 삼아요. 아니지요. 남에게 도움 되는 행동 안 할 때 누가 친구 하겠습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고, 필요할 때 도와주고 그쪽에서 아쉬워할 때 도움 되는 사람이 될 때 둘 사이는 뭐가 된다? ‘우리 친구 아닌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친구는 언제 생기는가? 상황이 둘 다 어려울 때 친구가 되는 거예요. 혼자 여유 있는데 잘 먹고 잘 사는데 친구가 왜 필요해요. 잘 먹고 잘 살면 먼 친척도 귀찮아요. ‘생전 안 오다가 뭐 뜯어먹으려고 찾아오나.’ ‘아재여’ 하고 찾아오면 아재고 뭐가 다 귀찮아. 그런데 본인이 지금 상황이 완전히 신용불량자 되었다. 근데 서울에 오촌 아재가 있다. 안 찾아가겠어요? 찾아가지요. 아쉬우니까. ‘더도 말고 딱 일주일만 재워주세요. 취직하면 나갈 테니까.’
요새는 부모 자식 간도 이게 없어요. 촌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뭐 들지 않으면 오지 말든지. 봉투에 넣지 않으면 아예 오지 마세요. 반대로 생전 연락 안 하다가 사위와 딸이 왔을 경우에 “왜 왔냐?” “엄마, 나 임신한 것 같아.” “어쩌라고?” “애 키워달라고.” 그것도 돈 한 푼도 안 주고. 사람은 상부상조, 상호협조가 뭐냐 하면 아쉬운 자가 찾아서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아쉬운 자가 되게 되면 무슨 관계가 되냐 하면 여기서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이게 창세기 4장, 이름도 라멕. 하나의 군주가 돼요. 왕이 등장하고 나머지 백성은 뭐가 되냐? 왕을 주인으로 섬겨야 될 종이 되지요. 가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가인이 자기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고 사람 만나면 때려죽이고 그런 사람이란 생각을 전혀 안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나타나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피해를 입는 피해자가 발생될 때 하나님이 이 땅에 발을 담그는 징후입니다. 증상이에요.
왜냐하면 뱀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발꿈치를 물려야 되니까.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동생 아벨이 해요. 하나님께서 둘 다 제사를 받으면 돼요. 하지만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둘 중에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한쪽은 피해자가 되는 역할분담이 발생됩니다. 가인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자기는 동생 죽일 마음이 없었는데 악마가 악이 가인의 마음을 지배하니까 죄의 종이니까 인간의 주인인 악마가 종을 종으로 다루겠다는데 종이, “주인님, 나 그것 거부합니다. 나는 그 일 안 합니다”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거부한다는 것은 종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독자적이란 뜻이잖아요. 그러나 이미 죄의 종이 돼버린 입장에서는 성질날 때는 성질이 나는 겁니다. 성질 중의 하나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성질을 성격을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걸 ‘질투’라고. 질투에서 나온 게 미움이 되고, 질투에서 나온 게 사랑이 돼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2장을 보겠습니다. 아까 어린아이 이야기 간단히 해보면, 어린아이 특징은, ‘내가 이 가정에 살면서 나는 숙제를 해야 이 가정에서 밥 빌어먹는다’ 이게 하나도 없어요. 어린아이 특징은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모든 상황이 무조건이란 조건에 의해서 이 집안사람이 된 거예요, 어린아이는.
나중에 어른 되면 뭡니까? ‘네가 그리 하거든 나가라. 너도 어른인데 언제까지 빌붙어 내 집에 살래?’ 어린아이는 그런 게 없어요. ‘너는 엄마 말 안 듣고 오줌을 딴 데 눴기 때문에 나가!’ 이런 명령이 어린아이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니까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안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주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천국이란 그런 곳이기 때문에. 하나의 하나님의 가족이고 가정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면 가족다운 모습을 보여야지요. 그게 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거예요. 내 의가 아니고.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왔을 때 아버지는 탕자를 가족처럼 여기고 옆에 있던 큰아들은 가족으로 간주를 안 했어요. 탕자는 들어올 때 자기 쪽에서 아버지께 효도한답시고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여, 나는 자식답지도 못하고 저를 종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그럴 때 그게 바로 내 쪽에서 제시하는 어떤 조건도 없다는 조건이 천국 백성이 되는 조건이에요. 내가 내세울 게 없어요. 뭘 한 게 없어요. 말씀 지킨 것도 없습니다. 합격입니다. Pass! 그게 어린아이 아닙니까.
소위 나한테 뭔가 있다는 것, 내 것이 있다는 이게 자꾸 어린아이 그걸 가로막는 그런 작용을 해요. 그래서 어려운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피해자를 우리 눈앞에 보이지요. 나의 배부름으로 인하여 억울한 소릴 듣는 피해자가 발생되는 거예요. 나의 착함과 깨끗함과 훌륭함과 우수함과 나의 완벽함으로 인하여 피해보는 사람을 우리에게 만나게 해주지요.
‘아이고, 인간아. 차라리 나 같으면 죽겠다. 그것도 사냐?’ 이런 식으로 비난받을만한 자들을 내세울 때 우린 어느새 천국 가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죄의 종으로 지옥 가고 있다는 것을 들춰내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출애굽기 32장 10절. 여기서 지금까지 말한 공식에 의하면 선지자가 등장해야 되겠지요. 왜냐? 선지자가 피해자니까. 간단히 적어볼까요. 이 땅에서 ‘선지자=피해자’ 하나님을 대신해서 피해 받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하나니.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를 위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어떻게 하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다음에 나온 말씀,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천국을 상으로 받았느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10~12절)
나의 잘남과 큰소리, 나의 오기로 인하여 어떤 사람이 피해보는지를 여러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있어요. 반드시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0절을 제가 해석까지 덧붙여서 써볼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모세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민족을 이루고자 하셨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이 이야기, 이 문장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명쾌합니다. 하나님의 우상을 섬겼거든요. 이 우상은 어디서 나온 우상이냐 하면 과거 애굽에서 섬겼던 신의 형상이 황소였습니다. 이런 것 보면 참 신기해요.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날 위해서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 했잖아요. 그 말은 ‘이제 형상 안 만들어야지’란 뜻이 아니고 ‘너는 반드시 형상을 만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앞당겨서 율법으로 너의 진짜 모습을 미리 알려준다’ 그런 뜻이에요.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말라.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거짓증거하지 말라. 그런 것도 마찬가지에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면 기생 라합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기생 라합은 아무것도 안 하고 구원받았어요? 뭘 했어요. 뭘 했습니까? 거짓말을 했지요. ‘왔는데 지나갔다고.’ 정탐꾼 숨겨주고 경찰에게 거짓말했지요. 그런데 야고보서 2장에서 그걸 믿음 있는 행함이라 본 거예요. ‘믿음이 없다면 거짓말 안 했을 것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거짓말했다.’ 그 말이거든요. 그럼 사람이 거짓말하면 내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거짓말했다. 거짓말쟁이 되잖아요. ‘거짓말쟁이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에요.
하나님께 속아 넘어간 자만이 구원이 돼요.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종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여기다 율법을 줬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인간보고 율법을 지키라 되거든요. 율법을 지키란 말은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라, 이 이야기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처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누구 자식입니까? 악마의 자식 아닙니까.
악마의 자식의 전형적인 모습이 바르게살기에요. 바르게살기, 딱 악마의 자식. 바르게살기가 왜 악마냐 하면 이거는 내가 그리던 나의 착함과 나의 의를 내 손으로 현실화, 구체화하겠다는 이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나는 워낙 착해.’ 이 착한 것을 말로 하지 않고 어떻게 한다? ‘이걸 실제로 내 행동으로 확실하게 보여줄게’에 평생에 모든 자기 자존심을 다 건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악마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그다음에 뭐다? 진실하려고 하지요. 자기에게 진실하려고 할 때 감사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자기에게 진실하려고 할 때 어린아이가 되겠어요, 어른 되겠어요? 그것도 성숙한 어른 되겠지요.
그런데 기생 라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바로 인간이 이런 식으로 무장돼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을 뭡니까? 속여 버린 거예요.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그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한테 속아 넘어갈 때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 자신의 모든 의미와 가치는 이거는 쓰레기만도 못한 거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에게 배설물 나온다 하는데 저는 그래 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배설물 나오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배설물이에요. 인간 자체가 배설물인데 뭔 배설물이 나와. 배설물 빼고 나머진 깨끗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철두철미하게 자기한테 철저해서 내가 나 보시게 완벽에 완벽을 기하겠다는 그 일념이 바로 극히 자기중심, 극단의 이기주의, 항상 긴장해서 혹시 남이 나를 험담할까봐 바들바들 떨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니고 자유하는 모습이 아니고 누가 나한테 욕하지 않는가, 늘 수사해야 되고 탐색해야 돼요. 그런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보면 모든 걸 다 죽이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단호함이에요. 그리고 모세 너는, 모세야 사십 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모세 중심으로 나라 하나 만들게.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 하나님의 뜻이 뭐라고요? 모세 빼놓고 다 죽이는 거예요. ‘저도 넣어주세요.’ 안 돼요. 나중에 모세도 죽입니다. 모세는 왜 죽입니까? 백성들 때문에 죽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는데 예수님이 왜 죽었지요? 죄 없는 분이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이에요. 인간세계의 논리와 철학과 과학으로선 이 문장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신학을 해도 이 문장 성립 안 됩니다. 제가 모든 신학을 마귀의 생각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신학 자체가 우리에게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래요. 저 신학만 알면 난 구원받는다. 이게 유혹이잖아요. 저 신학만 소유하면.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뭡니까? 죄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었어요. 그리고 이 죄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이 공간을 마련하고 우리를 그 공간 안으로 집어넣어요. 예수님만이 죄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는데 그 안의 공간은 뭐냐? 죄 있는 우리가 의 때문에 죽는 거예요. 이 의가 뭐냐? 이 의가 하나님이 유일하게 받으시는 여권입니다. 천국에서 받을 유일한 여권이, “너 의 있어, 없어?” “무슨 의요?” “예수님의 의 있어, 없어?”
인간이 죄 있는 자가 자꾸 성경연구해서 신학생활하면서 죄 없는 자를 생산하려하니까 여기서 나온 게 뭐냐? 뭐가 두려우냐 하면 수치와 창피를 당할까봐 겁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밥이에요. 이게 불안요소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살면서 우사당하면 안 되지. 창피당하면 안 되지.’ 혹시 나한테 험담할 사람 같으면 미리 찾아가서 ‘너 무슨 가방 원해. 너한테 좋은 선물 해줄까’ 이런 식으로 입막음해서 그걸 통해서 괜찮은 결과가 나의 의로 누적이 되는 작전을 벌이는 작업, 이게 네 자로 하면 ‘일상생활’ 이게 바로 일상생활 아닙니까.
‘저 선생님은 퇴직해서 말이지만 돈만 밝히더라. 저 선생님은 학교수업 안 하고 자기 성질만 부리더라.’ 이런 우수한 제자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어요. 따라서 죄 있는 사람이 내세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절) 왜냐하면 여권을 갖고 있는데 이게 왜 부끄럽지요? 하늘나라에서 유일하게 받는 게 예수님의 십자가 의인데 그걸 가졌는데 왜 부끄러워하지요?
그래서 수요일 설교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아히야를 보낸 이유가,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평생 살면서 하늘나라에서 보낸 변호사 없이 산다는 게 그게 바로 이단이잖아요. 왜 혼자 살고 있나. ‘변호사 있어요?’ 모든 자기를 주의 일로 변호해줄 사람, 변호사 없이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주님께서 분명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는데 주께서 친히 변호사 되시고 성령께서 변호사를 보내고, 보내신 이유가 혼자 살지 말고 성령과 같이 살라 이 말입니다. 우릴 변호해주는.
에덴동산에서 전쟁을 할 때 아까 창세기 3장 15절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뱀이 있었지요. 전쟁은 무슨 요소를 전제로 해야 돼요? 반드시 뱀이 살아 있다. 이 세상에 인간의 주인이 살아 있다. 죄인의 주인이 살아 있다. 죄인의 주인, 악마지요. 악마가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해서 세상을 다시 봐야 돼요.
사도행전 26장 수요일에 언급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눈에서 비늘 떨어져서 눈이 뜨인 것은, 그리고 내 말 듣고 눈을 뜨는 사람은 악마의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라 했지요. 사도 바울이 그 말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누구 권세 아래 놓여있단 말입니까? 모든 것이 악마의 권세에 놓여있는 거예요. 악마의 권세 대표자가 뭐냐? 완벽한 나의 자아의 구성이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할 이야기를 남기면 안 되지요. 악마의 권세에서 어디까지 온다 했습니까? 사도행전 26장에서 ‘하나님에게로’죠. 출발점은 뭡니까? 악마의 권세죠. 나 아니에요. 악마의 권세에 속한 나죠. 악마의 권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이걸 아셔야 돼요. 악마가 아담보고 뭐라 하느냐?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된다? ‘너는 신이다.’
이걸 전에 이사야 47장에선 뭡니까? ‘나만이 있다.’ 오직 나뿐이다. 이사야 47장 8절에,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모든 인간들이 하는 말, 죄의 종이니까 악마의 종이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이 마음을 모든 인간에게 할당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이걸 전제로 깔고 말을 해요.
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나의 이익, 손해가 안 되고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 당신과 관계를 지속시키겠다. 만약에 당신이 나한테 손해 준다면 당신과 관계를 끊겠다.’ 왜? 모든 목적의 의미는 오직 나에게만 있기 때문에. 이게 학교 교육 아닙니까. 이게 사회교육이고 직장교육이잖아요.
그런데 정신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걸 알아냈어요. 이 허점을. 이게 상상한 자아라는 거예요. 나에 대해 상상한 것, 이게 자아입니다. 나에요. 그런데 이 세상은 악마의 권세의 세상이잖아요. 권세 세상에서는 이 자아를 인정을 안 해줍니다. 입사시험 칠 때 “너 뭐야?” “나는 최곱니다.” 이런 걸 뽑질 않아요.
그럼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주체로 바뀌어요. 나도 나고, 주체도 뭡니까? 나. 영어로 subject, 주체도 나에요. 나도 난데 환경이 달라요. 나는 나 혼자 내 안에 이불 뒤집어쓰고 나 혼자 있을 때는 나에요. 근데 사회에 나가면 이 나는 주체가 되는데 주체는 뭐냐? 남이 나를 필요해서 부르는 것, 부르는 관계 이걸 주체라 합니다. 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부르는 것.
나이 사십 넘어서 취직하기 싫다. 사표내고. 또 취직하면 사표내고. 또 아는 사람 해서 취직하면 또 사표내고. 나이 사십 넘은 자식이 하는 말이, “아버지, 나도 사업하려하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안 해줍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파트 대출받으면 한 2억 받습니다. 아버지 자식 믿지요? 한 번만 2억 대출해주고 내가 끌어 모아서 카페하든지 파리바게트하면 성공할 것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할 때 돈 한 푼 없이 길거리에서 빌어먹으면서 ‘나는 나다’ 하고 길바닥에서 사흘 동안 굶어 죽으면 되잖아요. 나는 나다 하면서. 왜 그렇게 굶어죽을 생각 안 하고 갑자기 아버지 집으로 대출받아서 사업하려합니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나가 있어요. 신용도 같은 것, 은행통장에 얼마 있습니까? 혹시 몸은 아픈데 없습니까? 이런 것.
MBN인가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하는데 남자 여섯 명, 여자 여섯 명 해서 프로그램 합니다. 선봅니다. “정숙이는 누구십니까?” “나는 납니다.” 이러면 안 통하지요. “정숙 씨는 누구십니까?” “저는 약사입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 왜 해요? “우리 경수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강원도에서 의사하고 있습니다. 바쁜데 일부러 짬 내서 왔습니다.”
그 자기 직업과 자기 아버지가 옛날에 장관했다.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또 돌싱들은 애가 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해요? 이건 남들이 나를 요구하는 그 지점, 그게 주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내가 이 세상의 일원으로 공동체에 가입이 되는 겁니다. 그때 나는 사람 대우받아요.
이게 무슨 권세에요? 이게 바로 사탄의 권세 세계입니다. 쓸모없는 인간, 이거는 사람 취급하지 않아요. 돈 못 버는 인간,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몸 아픈 인간,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름달 뜨고 연초에 되면 포항 호미곶 거기 가서 비는 게 뭡니까? 그저 올해도 우리 집안 화목하고 우리 애들 건강하고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고,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회가 요구하는 요소가 그거거든요. 거기에 우리가 맞춘다고 평생을 피곤하게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그런 우리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요양병원에 가서 죽지요. 죽습니다. ‘내가 죽는다.’ 왜? 죽을 때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나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왜 나를 죽이지? 나는 왜 죽지? 몰라. 나이 아흔일곱 되어 왜 죽지, 이것도 있지만 나이 사십, 오십 되어 병들어 죽을 때 내가 죽으면 내 딸내미는 어떻게 설움 받고 살라고? 이런 식으로 있잖아요. 그럴 때 왜란 질문을 할 수밖에.
‘나는 죽는다, 왜?’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죽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언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모세 빼놓고 다 죽여 버려라. 하나님의 뜻은 죄 있는 인간을 다 죽여 버리고 새로운 선지자 중심, 완벽한 하나님의 의인 중심으로 새 나라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모세가 피해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중재자로 나서서 ‘하나님이여 절 봐서라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될 이스라엘이 모세 중심으로 근근이 새로운 모세 중심체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 출애굽기에서. 지금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은 예수님 중심체제로 완전하게 완전한 나라가 건설됐지요.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게 신비롭고 살아 있는 게 신비로운데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말씀 안에 들어있는 말씀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은 하나님의 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죄 없으신 분이 죄가 됨으로써 우리가 죄 있는 자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로마서 5장,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그 말씀(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 우리라는 결정체로 지금 여러분들이 이 땅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감사가 안 될 수가 없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과 성경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세상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경유해서 다시 정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대로 우리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이 생생한 성령님의 도우심을 함께 느끼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