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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 32강( 틈에서 나온 양식), 복음이냐 교회냐 1강( 혼돈속의 질서) 250630설교신명기

대전-신명기(32강) 신명기14:8(틈에서 나온 양식) 20250630a(강의: 이근호 목사)

어제 낮 설교(히브리서 11장 21절(야곱의 지팡이)250629)에서 ‘도약대’, 다이빙 도약대, 그게 중요한 게, 온전한 사망이 되지 아니하면, 온전한 생명에 못 들어갑니다. 온전한 사망은 예수님만이 가능해요. 왜냐하면, 아버지한테 제대로 마지막 저주를 예수님이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온전한 사망입니다. 온전한 사망이 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온전한 생명에 못 들어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어설픈 사망은 안 돼요. 온전한 사망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는데, 온전한 사망이 되어버리면, 여기 도약대에 딱 서거든요. 서게 되면, 온전한 사망이 뭐냐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롬3:10)이 발각되고, 폭로되는 그 지점, 그 위치에요. 다이빙 도약대 생각하면 됩니다.

온전한 사망이 될 때, 거기서 온전한 생명으로 가는데, 온전한 생명에 어설픈 사망은 안 넣어 줘요. “내가 나쁜 짓도 했지만, 뭐 착한 일도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어설픈 사망이기 때문에, 온전한 저주가 아니기 때문에, 넣어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망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될 때, 온전한 사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죄는 어설픈 죄예요. 제대로 된 저주는 성령 받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했던 그 체험을 같이 성령을 통해서 공감할 때, 더는 뭐 내놓을게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받은 강도의 모습이잖아요. 그 온전한 사망에서, 이 도약대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던 힘이 있어요.

그 힘을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 성령은 부활의 힘이죠.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왔던 힘. 부활의 힘이 아니면, 악마가 붙든 발목을 우리가 뺄 수가 없어요. 주님만이 온전히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 힘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 사망에 해당되는 자기 백성을 성령이 이렇게 받습니다. 꼭 죽을 때가 아니고, 지금 살아 있을 때요.

사망에 이르게 하고, 그걸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망과 생명이 우리 일상 속에 반복이 돼요. “이래서 너는 저주받아 마땅하지. 이래서 너는 죄 사함 받아 마땅하지.”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죠. 그러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어떻겠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이미 옮겨지는 겁니다.

그 생명은 죄에 대해서 씻어주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바로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귀는 이 생명에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생명에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겠어요? 자꾸 우리한테 뭐를 안겨 주면 되겠어요? 우리의 의를 계속해서 고취시키고, 격려하고, 독려하면 되겠죠.

왜? 온전한 사망이 되지 못하도록. 회개했다느니, 회개하고 난 뒤에 훌륭하게 살았다느니, 성령에 의해서 찬양했다느니, 이런 거 있잖아요. 하여간 온갖 것을 계속 나에게 악마가 주입시키면, 그래서 형성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의가 되죠. 나의 의, 그리고 나의 의미의 나라. 나의 의미의 나라, 이게 자꾸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누가 되느냐 하면 바로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없어요.

왜? 여기에 투자한 게 많기 때문에. 내가 너무 아깝고, 아까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압박감을 줘버렸죠.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스스로 자부했는데, 하나님께서 압박을 주니까 욥이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이러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그 욥이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욥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인간은 사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욥이 대변자니까. ‘사망에서 태어났다.’ 사망에서 태어나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온전한 사망이 된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의미를 온전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생명의 나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어설픈 불신자 말고 제대로 된 불신자, 정말 나에게는 믿을 게 전혀 없다는 거, 주님의 행하심과 주님 외에 내 것은 전혀 믿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조금도 내가 아까울 게 없다는 것, 언제 죽어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게 바로 감격이죠. 감격이고, 감사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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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게 했고, 계속 이어서 오늘 본문 신명기 해 봅시다. 신명기 14장, 여기 보면, 많이 봤다 싶은 대목이 나타날 거예요. 3절에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3)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4) 사슴과 노루와...”이렇게 돼 있죠.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 바로 레위기 11장에 나오죠. 그런데 신명기에서 또 나온다고요.

왜냐, 신명기라는 것은 ‘율법의 전체 내용을 다시 알려 준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들, 못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율법을 다시 알려줘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게 확정되었는데, 율법을 다시 알려 준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나, 하나님이 잘못한 게 아니고, 너희들 잘못 때문에 못 들어간다.” 이 말이죠.

“이제 못 들어간 상태에서 못 들어간 이유나 알아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감으로 그들은 이 약속의 땅이 뭐냐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가잖아요. 못 들어간 사람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모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도 못 들어가고, 나도 못 들어가.”

그러니까 이것은 나중에 그 광야 때 태어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선조는 약속의 땅을 바라봤지만, 율법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사람들이 아니고, 율법을 제대로 통과하지 아니하면, 우리라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율법과 우리 사이가 뭔지, 정리 정돈이 되고 난 뒤에 약속의 땅이 보장되겠죠.

약속의 땅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쪽 우리에 대한 모든 정신이 정리 정돈이 되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 어떻게 들어갈까를 생각하거든요. 현재 코앞에 있는 이 율법의 목표가 뭐냐? 율법의 핵심이 뭐냐?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두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 언약궤입니다.

신명기 27장도 그렇고, 여호수아 8장 33절에도 마찬가지인데요. 에발산과 그리심 산, 산이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거기 가운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를 놓고 이스라엘 지파를 반으로 나눠서 반쪽은 축복을 선포하고, 반쪽은 저주를 선포하는 거죠.

이 구조가 뭐냐 하면, 언약궤라는 이 물건, 상자에서 비롯되는 어떤 특정 백성들이 생산되고, 그 백성들의 임무는 율법의 현실화, 실제적으로 율법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고, 구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능자를 율법 언약궤에서 생산해내는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이 약속의 땅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죠.

여호수아 8장도 그렇고, 신명기 27장도 그렇고요. 그러면 그 점을 먼저 생각하고 오늘 본문 신명기 14장을 봅시다. 신명기 14장에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이렇게 4절에 나와 있죠.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이 먹을 만한 것은’, 하나님이 먹을 만한 것은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내가 먹는 것만 너희도 먹어야 돼.’ 이런 뜻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느냐? 이게 이제 궁금하겠죠. 하나님이 좋아하는 음식은 불에서 나온 음식입니다. 불에서 나온 음식, 제단에서 나온 음식을 하나님은 받습니다. 불에서 나온 음식이란 말은, 여기 나오는 제물은 불에서 나왔다 할 때, 이 불은 심판입니다. 심판 당했던 음식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심판 당했던 음식, 심판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러면 ‘심판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받을 음식도 없고, 하나님이 받을 음식이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럼 심판은 어디서 나오는가? 심판은 거룩과 비거룩의 그 틈에서 나와요. 틈, 사이에서 심판이 나와요.

거룩과 비거룩의 틈에서 심판이 나온다는 말은 ’심판으로 인하여 거룩과 비거룩이 두 그룹으로, 두 분류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거룩한 짐승의 특징은 뭐냐? 무엇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거룩한 것이 존재하고 있어요.

우리가 거룩한 것을 먹는다 할 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비거룩을 다 없애 버리면 되잖아요. 없애 버리면 거룩한 것만 남으니까, 거룩한 것만 먹으면 간단한 문제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제가 아까 그런 착오를 범할 줄 알고, 심판에서 나오는 것만 먹는다고 했어요, 심판에서 나온 거. 거룩한 걸 먹는 게 아니고, 심판에서 나온 걸 먹는다 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그러냐 하면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거는 비밀인데요. 인간 세계는 이미 악마에 휘둘려 가지고 악마가 쳐놓은 펜스, 악마라는 이 세상 신이 쳐놓은 펜스 안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귀가 시키는 종교, 마귀가 알려주는 삼위일체 하나님, 마귀가 말하는 메시아, 인간들은 그걸 전부 다 마귀의 공작에 의해서 그냥 수용해요.

그래서 마귀가 뭐라 하냐 하면, ”네가 이걸 믿으라.“ 하잖아요. 이 ’믿으라‘ 하는 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마귀가. 믿으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쉽게 인정하면 된다는 거예요, 인정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요.“

믿고 인정하면 뭐가 누락이 되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란 사실이 빠져 버려요. 왜? 인정하면 되는데! 믿으라 했으니 믿으면 되잖아요. 거기서 내 잘못을 굳이 동반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4장인가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히4:12)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쪼갤 때 어디까지 쪼개냐 하면, 뼈까지 쪼갠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뼛속까지 새겨야 돼요, 뼛속까지. 왔다 가면 안 돼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잖아요. 성경을 보면서 인정해요. ”천지 장조 인정해. 다 인정해.“ 인정하는데 어떻게 되냐, 결과는 뭐냐? 팅~하고 튕겨져 나옵니다. 앞에 뭐 에밀레 종이라도 있는지..

다 인정하는데,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네, 받아들입니다. 아, 나 성경에 이런 내용도 있는 줄 몰랐네. 아이고, 반갑습니다. 나 이제 성경 내용까지 내 인생에 추가다.“ ”아줌마, 여기 밥 하나 추가요~“ 하는 거처럼. ’이제 성경 내용도 추가다.‘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뭐냐, 뼛속까지 들어가지를 못하고, 뼈에 말씀을 새긴 게 아니고, 내 머리에다가 성경 말씀을 달달 외우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처럼.

달달 외워요, 네비게이토처럼. 내가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활용하는 주체자가 내가 돼 버렸어요. 이거 할 땐 이거 내밀고, 저거 할 땐 저거 내밀고, 전도할 때 이거 내밀고, 이사 갈 때 이 말씀, 자식들 군에 가면 이 말씀, 군대 갈 때 무슨 말씀 내미는 줄 알아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만사형통하고 싶어서..전방에 안가고 후방으로 빠질 것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런 거 막 외우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을 만한 음식으로 받아요. 그래서 말씀이 우리한테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우리를 말씀으로 심판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죠.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주님을 모를 때는 그냥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이 와서, 성령과 혼인하고 난 뒤에 이제 말씀이 성령을 가지고 치니까 하는 일이 이거 지켜라 저거 지켜라가 아니라, 그 말씀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나의 의를 캐내는, 파내는 작업을 성령이 다룰 때는 말씀이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죽여 놓고 수술시키는 거예요. 죽여 놓고 수술하면 괜찮지요. 이건 마취도 없이 그냥 쪼개요. 흉부 쪼개고, 다 쪼개서 ”그거 봐. 네가 하는 모든 행위가 너한테 기만행위잖아. 하나님 속이고, 네 자신을 속이는 행위잖아.“ 그래놓고, ”요기 있네~요거 있네.“ 다 뽑아내는 거예요. 그 뽑아내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의, 다시 말해서 악마가 심어놓은 자기 의인데, 자기 의의 구조는 뭐냐 하면, 선과 악입니다.

모든 드라마, 모든 소설, 모든 예술 작품, 뮤지컬 그리고 심지어 정치까지, 그리고 유치원 학예회부터해서 모든 분야에서 모든 테마, 스토리, 시나리오는 선과 악으로 묘사가 되고, 결국은 누가 이긴다? 선이 악을 이기는 그 줄거리로 되어 있어요. 그런 줄거리를 보면서 이렇게 살아오니까, 우리 자신을 이 줄거리의 주인공이라고 감정 이입을 할 때에, 우리 자신의 인생을 우리는 하나의 드라마로, 드라마틱하게 스스로 상상해요. 상상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끝내 이기리라.“ 왜 이기냐? 선하기 때문에! 선한 자는 뭘 받는다? 복을 받는다. 나는 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으로 자기 인생에 어떤 궤도, 기차라고 한다면, 철도 깔아야 하잖아요. 이미 철도 깔아놨어요. 이미 딱 깔아놓고 그 궤도를 가는데, 만약에 나의 선함과 나의 승리를 가로막는 게 있다? 그러면 용서치 않지요.

폭력이 나오고, 폭력적인 말이 동원되지요. 그리고 내 선함과 내 의로움, 내 인생 승리를 가로막는, 내게 방해되는 것은 다 이게 누구냐? 남 탓이에요. 내 탓이 아니고 다 남 탓이에요. 90살 먹은 시어머니 탓. ”나는 착한 며느리고, 나쁜 며느리 아닌데, 시어머니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천하의 못된 며느리로 돌변해버렸네. 이거는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시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그렇다.“ 모든 탓은 남 탓이에요.

아내는 남편 탓, 남편은 아내 탓, 부모는 자식 탓, 자식은 부모 탓. 그렇게 탓을 하는 근본적인 노림수가 뭐냐? 그렇게 남 탓 해야만 하는 그 이유가 뭐냐? “please, 제발, 누가 되었든 나를 심판하지 마세요, 제발.” 이 세상에 나를 심판할 권한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왜냐 하면 나는 신이기에, 내가 바로 신이기에.

신이란 말은 뭐냐 하면, 판단자가 신이잖아요, 내가 이미 최종 판단자잖아요. 그러면 잘못해도 내가 벌주고, 내가 알아서 회개하고 반성하지, 누구든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마라.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이미 인간은 악마의 밥이 됐습니다. 악마의 먹잇감이 된 거예요. 악마가 심심하면 우리를 횟감으로 여겨가지고, 쓰키다시하고 같이 분해해서 회 쳐 먹지요.

악마는 신을 흉내 내거든요. 인간을 마치 자기의 피조물인양 착각하고 있어요. 악마 자기가 다룰 수 있는, 자기 품성을 집어넣어 가지고 마음껏 요리하고 있어요. ”내가 신인 것처럼 너도 신 만들어 주면 되잖아.“ 그게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한 마지막 제안이었어요. ”나랑 같이 하자. 그러면 당신은 얻고자 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다.“

나를 위대하게 만든다는 그 악마에 대해서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그저 ‘한 방이면 된다.’ 지금은 내 주식이 맨날 떨어지고, 비트코인 맨날 털리지만, 단 한 방만 터져라. 이 한 방만 터져라. 한방블루스~ 진짜 한 방만 터지면 된다. 터져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때 내가 나답다는 거예요. 나의 목표가 그거였다는 거예요. 한 방 터져서 뭐 로또가 터지든지, ‘나 이 정도야.’라는 그걸 드러내게 하는 그것, 비록 지금은 구질구질하게 살지만 언젠가는 한방~, 오늘도 토요일을 기약하면서 또 로또 사고 이러잖아요. 로또 값 얼마나 하는지... 연초 되면 토정비결 보고, 한방, 한방만 터지라는 거예요.

주님은 ‘한방만 터져라.’가 아니라 ‘내가 한방 먹여줄게.’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한방 먹여주는 겁니다. 네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조차도 네가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돼야 됩니까? 장차 올 메시아가 하나님께 받으시는 것처럼 ‘메시아의 그 형국, 그 상황 속에 네가 율법으로 그 상황 속에 뛰어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메시아의 상황 속에.

그러면 메시아는 어떻게 되었는가? 메시아는 바로 이 세상 인간들 속에 완전히 압박이 되었죠. 사망에서 밀어붙여가지고 결국 터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그냥 곱게 죽은 게 아니잖아요. 피는 피대로 쏟아 버리고, 살은 살대로 찢겨나가면서 눌려서 죽었잖아요, 눌려서. 쉽게 말해서 찔렸지만, 손에 못 자국이 찔렸지만 인간의 그 평가에 눌려서 죽은 거예요.

그 평가, 인간의 평가,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의미의 세계, 언어의 세계, 인간의 언어의 세계에서 인간의 언어에 소통되지 않는 개념을 예수님께서 날렸거든요. 그러니까 기존의 언어가 예수님의 모든 말을 가지고 거기다 억압을 한 거예요. 묻잖아요. ”당신이 누구냐?“ ”유대인의 왕이다.“ 이게 언어 아닙니까?

”네가 사흘 만에 성전을 짓는다면서?“ 성전도 언어죠, 사흘도 언어잖아요. 그 안에 언어니까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다? 의미가 담겨 있죠. ”우리가 납득할 만한 의미를 제시할 때, 너도 거기서 우리가 납득되도록 알아듣는 의미로 대꾸하라.“ 요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죠.

이게 아까 이야기했는데, 이게 뭐냐, 비밀입니다, 비밀. 이 성경의 비밀은 나타나도 비밀이에요. 희한해요. 패를 까면 비밀이 안 돼야 되는데, 깐 패가 더 비밀이에요. 패를 깠는데 비밀이라. 이걸로 하여금 비밀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추구하는 나 자체에 벌써 문제 있음을 마중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만한 짐승인 소와 양과 염소 먹지요. 먹었는데 이 사람들은 저주받았어요. 율법대로 했는데 저주 받았다니까요. 뭘 놓쳤습니까? 의미를 놓친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아는 의미를 가지고 성경에 다가 갔으니까 성경에서 팅~하고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튕겨져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 ‘내가 이거 지키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 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나의 유리한 의미로 대튕겨 나옵니다. 그거는 의미 아니죠. 그걸 뭐라 하냐? 비밀로부터 배제당한 것이고, 또 어려운 말로 해서 비밀로부터 소외당하는, 쉬운 말로 튕겨져 나온 거예요. ”너 아니야 너 아니야.“

그러니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주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덥석 율법대로 살 거 아니겠습니까? 율법 지키는 게 별로 어렵지 않기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데, 결국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돼요? 율법대로 사는데, 배제되고, 소외되고, 튕겨져 나올 때 우리가 율법을 대할 때 뭔가 우리가 놓친 게 있구나, 놓친 게 있구나..

최종적으로 놓친 것은, 마지막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유대인들은 자기가 놓친 걸 알았어야 했어요. 이삭 죽을 때, 누구 손에 죽지요? 이삭 죽을 때 혼자 산에서 죽었습니까? 아버지 손에 죽지요. 이삭이 속을 때, 누구한테 속습니까? 야곱에게 속아 넘어가지요. 그처럼 네가 버린 분이 메시아라는 거예요.

그럼 메시아가 왔다고 했는데, 네가 왜 메시아를 버리게 되었는가? 평소에 그들이 알고 있던 메시아는 자기의 과오, 오류, 자기의 근원적인 문제,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열심히 노력하자, 나도 잘하면 선해질 수 있다.’는, 의롭게 할 수 있다는 그것으로 그냥 밀어붙이다 보니까, 진짜 메시아는 누구 쪽에서 배제했어요? 인간 쪽에서 배제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너 같은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니고, 싫어. 난 너 같은 메시아를 원한 게 아니야.“ 라고 인간 쪽에서 이미 물리친 거죠, 물리쳤잖아요. 물리친 분이 진짜 예수님이잖아요. 진짜 메시아였단 말이죠, 물리치신 분이. 물리칠 때 물리치고, 그걸 도로 거둔다? 거둘 수 있어요, 없어요? 못 거두지요.

그럴 때 다시 이 율법이 또 동원돼요. 율법을 지켰는데 배제당하고, 배제당하면서 배제당한 이유는 모르겠고, 율법대로 살았는데.. 여기 6절에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6)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7)“ 하면서 이렇게 나오고 그 이유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7절에 그렇게 돼 있죠.

그 두 가지 조건을 다 만족해야 돼요.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안 돼요. 굽도 갈라지고, 그 다음에 뭡니까? 새김질도 해야 된다. ”하지, 뭐? 돼지고기 안 먹으면 되지.“ 유대인들 돼지고기 안 먹잖아요. 정통 유대인들,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고. 그럼, 돼지고기 안 먹으면 되잖아요. 돼지고기 안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문제는 돼지고기를 아무리 안 먹고, 소하고 양고기 먹어도 그걸 자기가 먹는 행위를 통해서 내가 나로부터 배제되는 일은 없어서 그게 화근이고, 탈이 되는 거예요. 실천에 옮기는 내가 나를 부정을 못 하는 거, 그럴 수 있는 어떤 재주가 없어요. 8절에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한번 적어볼게요.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다, 더럽다, 추잡스럽다, 먹지 못한다.“ 이런 뜻이잖아요. 가까이 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귀신들을 갈 데가 없다 하니까 어디에 집어넣었습니까? 돼지 떼에다 집어넣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보고 이런 거, 돼지는 지금 구약입니다.

구약 때 그들 보고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한다.“라고 했잖아요. 이 말씀 자체가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거 누가 정했어요? 이런 규정을 누가 정했어요? 나에게서 안 나왔지요. 그래서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기함이에요, 신기함. 이 신기함이 있어 줘야 내가 나를 보는 것 말고, 신기함의 안목으로 나를 다시 볼 수 있어야 돼요.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내가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는데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먹고 싶다는 돼지고기를 왜 못 먹게 해? 굽이 갈라져도 난 잘만 먹을 거고, 새김질 없어도 나는 먹고 싶어. 왜? 내가 먹겠다는데, 뭐, 왜, 왜? 내가 먹겠다잖아!” 이런 마음으로 율법을 생경하게, 다시 말해서 내게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졌던 법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감각해야 돼요.

그렇지 않고 “아, 나 돼지고기 삼겹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니까 먹지 말아야지.” 이렇게 되면 이거는 신기함이 없어요. 신기함이 없다고요. 왜 하나님이 이 말씀 주는지를 의미도 모르고, 다만 하나님이 주셨다는 이유 때문에 이걸 지키면 내가 복을 받을까 하는 그런 내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면서 억지로 어떻게 합니까? 돼지고기를 안 먹는 거예요. 억지로, 억지로.

이걸 우리 주님께서는 다 아시고 있는 거예요. 주님 자체가 우리한테 생경한 거예요. 낯설고 신기하고 이상스러워야 돼요, 예수님 자체가. 돼지고기는 굽이 갈라져서 새김질을 못한다, 그래서 부정하다. 여기 인간들이 모여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부정하다. 이 논리가 어떻게 성사됐는지 인간들 모여서 회의해봤자 이 논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 논리가 ‘과연 그렇구나.’ 하고 증명될 수 있습니까? 증명 안 되죠.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이건 부정하죠. 그 부정하다, 안 부정하다는 것은 인간 선을 이미 떠났지요. 인간 본인이 거기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회의하는데 감히 끼어들어서 “돼지고기는 빼고요.” 이럴 수 없다 이 말이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회의하는데 “돼지고기는 부정한 걸로 치자.” “예, 알겠습니다.” 이러는데 문 열고 들어가서 “저도 한 마디 할게요. 돼지고기는 맛있기 때문에 부정한 게 아닙니다.” 이래 하면 “저거 누가 들어오게 했어? 빨리 쫓아내.” 하고 쫓아내 버릴 거예요. 이게 신기하고, 생경하고, 율법을 대하는 마음 자세가 늘 이렇게 놀라워야 돼요.

“참 희한한 일도 있다. 이게 왜 부정하냐? 왜 부정하냐?” 그 정답은 이 율법을 준 출제자에게 있어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낸 문제를 예수님 혼자서 그걸 풀이를 할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정석’ 아닙니까? ‘수학 정석’처럼. ‘정통 영어’처럼 ‘정통 예수님’.

예수님의 풀이, 그리고 예수님의 정답, 그 정답 풀이가 부정한 우리 속에 말씀이 뼈에 새겨져 버리면, 우리는 부정한 것의 생각과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정답 두 개가 다 같이 우리 뼛속 율법 말씀 안에서 이게 같이 만나면서 ‘아, 왜 나는 아니어야 되고, 왜 내 뜻은 개입되어서는 안 되고, 비밀은 주님께서 푸는 것이지, 내가 비밀을 푸는 게 안 되고, 주께서 홀로 다 해야 되는가?’

그 주님을, 이유를 알면 그 사람은 관심사가 나한테 있지 않고,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한테 가 있겠죠. 매일의 일상이 주님에 대한, 주님이 누구신가, 주님이 어떤 분이냐, 예수님이 누구신가? 거기에 관심을 두도록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한 번 적어 볼게요. “주님이 누구신가? 주님은 지금도 무슨 일을 하시는가?”

여기에 관심 둘 때에 그 순간 우리는 뭐냐? ‘나는 누군가, 나는 무슨 일을 하는가?’ 이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나를 소외시켜야죠. 지금 정신이 어디 팔려 있다고요? 주님에게 관심이 있다 보니까, 나에 대한 관심사는 그 순간만큼은 없어지죠. 이게 바로 그 나라, 의를 살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이게 바로 율법의 완성 속에서 지금도 헤엄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주에 대한 관심사입니다.

늘 관심 둘 수는 없지만, 주님을 내 선에서 배제가 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성도는 그걸 아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나를 배제할 수 없어요. 그거는 머리 깎고 중 되어도 소용없어요. 그러나 주님만 생각하니까, 내가 배제되는 거예요. 이걸 구체적으로 하면, ‘주님이 누구신가’ 여기 집약된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눈 돌리면 관심이 누구한테 옵니까? 나한테 오는 거예요. 관심사가 갑자기 나한테 오면서 ‘나는 잘하고 있는지?’ 내가 판단하니까. 나는 남이 보기에 어떤 욕을 먹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 칭찬을 받는지? 내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 나는 얼마나 내 가치와 의미를 어디까지 챙기고 살면 그다지 하나님한테 벌 받지 않을지,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지?

십자가에서만 눈 돌리면 우리가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 찬스, 그 찬스를 누가 노리느냐 하면, 악마가 덮치는 거예요, 악마가. “이렇게 하면 된다. 네가 이렇게 했는데 봐라, 어떤 사람이 너 보고 나쁜 평 하더라. 댓글 봤지? 그것도 설교냐고 이런 거 나오더라.”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신경은 어디에 씁니까? 더욱 더, 더욱 더 나에게 관심을 주는 거예요.

엄마가 자식한테 “야, 오늘 밥 어땠어?” “잘했어요.” “아, 그래.” 하면 되는데, “밥은 잘했는데, 반찬이 뭐 이래?” 이러면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십자가에서 완전히 눈 돌아가고, 그 다음부터 십자가는 없어요. 이제는 너와 나의 관계가 돼요. 이게 이스라엘이 더불어 살던 이방 민족과의 관계가 이 관계였습니다. 누가 세냐? 누가 승리하냐? 하나님이 왜 안 도와주냐? 이 관계입니다. 눈이 돌아가 버릴 때 그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미 ‘이것은 먹어라, 이것은 먹지 말라.’ 했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 해석 굉장히 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먹어라, 이것은 먹지 말라.’ 할 때, 이것은 정결한 것이고, 저것은 부정하다는 그 기준 있잖아요. 이건 우리가 안 정했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했지요.

근데 이런 기준을 왜 이것은 정결하고, 저것은 부정하냐? 그 정결한 것은 정결한 것이고,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정하는 이 틈, 이 틈에 뭐가 있기에 소와 양은 되고, 돼지는 안 되느냐, 그게 나올 거 아니겠습니까? 이 틈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언약이란 말이죠. 희생제물.

정결한 것은 희생제물이 가능하지만, 더러운 것은 희생제물로 안 받는다는 거예요. 더러운 것은 안 받는다. 그러면 우리가 돼지고기 편이 되어 가지고, 양돈 협회 회장이 되어 가지고, “돼지고기를 왜 못 먹게 합니까? 당신이 뭐 안식교였던 이상구 박사야?” 지금은 그 사람 그걸 이단이라고 하면서 떠났지만, 전에는 이상구 박사가 돼지고기 먹지 마라 했거든요, 율법에서 돼지고기 먹지 마라 했다고.

그러면 ‘돼지고기를 왜 먹지 말라 합니까? 우리는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것은 틈에서 나온 기준 있잖아요, 언약, 그 언약에 대한 저항이고, 도전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든다는 것을 알고 계세요. 일방적으로 정했다, 일방적으로 정한 예가 있어요. 그게 바로 노아 홍수 때,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 둘 놓고, 이게 왜 정결해야 되는지, 이게 왜 부정해야 되는지, 인간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했어요. “내가 거룩하다면 거룩하고, 내가 더럽다 하면 더러운 거야.” 나중에 엄마와 딸이 죽어서 딸은 천국 가고, 엄마는 지옥 갔어요. 그러면 딸은 이미 그리스도에 속해서 안 따지는데, 엄마는 따지는 거예요. “저 딸내미, 내가 키운 저 딸내미 저거, 행동이 나보다 못한데, 왜 내 딸은 천국 가야 되고, 나는 왜 지옥 가야 되는데?” 따지잖아요.

그럼 따지는 엄마에게 답변은 뭡니까? 따지니까 뭐가 돼요? 따지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따지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방적인 일에 대해서, 네가 지금 개기냐? 네가 지금 개길 군번이 아닌 거 같은데? 주님께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다 치워버리고 어긋맞게 한다는 말은, 어긋맞는다는 말은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건 다 내놔라.

형들의 생각, 꿈을 꾸지 않은 요셉의 형들과 꿈꾼 요셉의 차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그 야곱은 아들들에게 축복하기 이전에 먼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했어요. 요셉의 아들들에게요. 이 요셉은 야곱의 언약에서는 이미 죽은 자, 없는 자예요. 없는데 어디 가서 애 둘 놓았잖아요. 아스낫이라는 애굽 여자, 제사장 딸과 결혼해서 애 둘 낳았잖아요.

그래서 이 아들 둘은 뭐냐? 언약의 생산물, 소산물이에요. 없는 데서 있게 된 거죠. 없는 데서 있게 된 거. 그걸 보고, 바로 이 야곱이 본인이 받았던 언약이 현실로... 없어야 되는데, 죽은 자식이 무슨 자식을 놓아요? 그런데 자식을 이렇게 둘이나 낳아 왔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바로 지금, 자기 아들 요셉에게 있었던 이 과정이 이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사후에 고백하는 장면이 어긋맞게 하는 거예요.

“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고, 내 생각, 야곱의 생각은 작살내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나한테 퍼부었다는 것을 어긋맞은 것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창세기 그 대목 보면서, 두 아들의 자리를 바꿔서 축복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하면 되는데,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것은 근육 에너지 소모도 많다고요.

그런데 일부러 어긋맞게 하는 거예요. 야곱은 어긋맞는 것을 강조한다고요. 이 과정이 언약이에요, 이 과정이. 하나님?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요,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전제로 해서, 그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과 어긋맞게 오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을 따라 오신 예수님의 활동이잖아요.

모든 것이 인간의 생각과 반대로 행해버리는 거예요. 불신자가 신자이고, 신자라 하니까 불신자가 되는 거예요. 어긋맞음 때문에. 문제는 그러면 나도 신자 아니고 불신자라 하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 네가 기쁘냐를 묻죠. 네가 기쁘냐, 감사하냐? 바꿔치기 한 걸 고맙게 여기느냐?

”아이고, 내가 쪼다됐구나.“ ”방금 너 짜증냈지?“ ”아닙니다. 세상에, 내가 얼마나 쪼다이고, 무능한 자인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의 은혜로 알지요.“ 이게 바로 천국 생활하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하여튼 맞는 게 하나도 없고요, 제대로 한 게 아무 것도 없고요, 의로운 것도 하나도 없는 게, 이게 왜 그리 좋은지?

이게 왜 좋은 줄 알아요? 대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 했으면 이 정도 보상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 대가가, 아예 주님에 의해서 일찍 차단시켜 주니까, 그게 고마운 거예요. 부정한 것, 거룩한 것, 주께서 일방적으로 정해 놓으시고, 이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의 모든 기준, 그걸 정한 기준은 나중에 신약에 와서 틈으로 나타납니다.

틈으로 나타나니까 신약에 성령 받은 사람은 이 틈을 가지고 다시 율법의 더러움과 부정한 것을 다시 보게 되면, 왜 돼지고기는 더럽고, 소는 깨끗하냐? 이거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구분할 수 없는데, 틈을 통해서 보니까 ”아, 이 틈의 희생을 위해서 거룩과 부정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누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간다.’ 이걸 그대로 응용하면 이래요. 왜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왜 지옥 가는 사람이 있느냐? 그것은 천국과 지옥을 일방적으로 정하신 우리 주님의 결정만 높이기 위해서 천국, 지옥이 만들어졌다. 왜, 뭐, 또 신경질 나? 또,기분 나빠?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거 뭐, 예수님 지 마음대로네. 이거 예수님 지 혼자 횡포잖아. 피조물 우습게 여기고 말이야. 어, 자기를 위해서만 그렇게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결국 막 화내잖아요. 그러면 그게 바로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 모든 보이는 것과 마귀부터해서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거죠.

그리고 그 말씀은 ”너 방금 짜증냈어?“ ”아니요, 웃었어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 웃어야지.“ 성령께서 왔다 갔다 하면서 오륙도처럼 때로는 세속, 때로는 거룩 하면서 그 틈, 일방적으로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일방적으로 정했다는 이 주님의 한없는 이 자유함을 같이 만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결과물로서. 10분 쉽시다.

대전-복음이냐 교회냐(1강) 고전16:22(혼돈 속의 질서)20250630b(강의: 이근호 목사)

이 책『복음이냐 교회냐』를 교재로 하는데 이 책을 교재로 정해놓고 내용을 보니까, 이 교재의 근원적인 교재가 따로 있었어요. 그게 뭐냐?『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p.11에 나오는데 [이번 강의는『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를 가지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럼 이 대전강의는 앞으로『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전체를 전부 다 하는 셈이 되어버렸어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창세기는 이렇고 출애굽기는 이렇고 그런 것은 안양강의에서 하고 있으니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중간에 흐르는 맥이 있잖아요. 그 맥을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알프스 산 밑에 터널을 뚫듯이 터널을 뚫어나가는 겁니다, 쭉 하면서.

첫 번째 터널을 한번 보겠습니다. p.19 밑에서 5번째 줄에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가 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를 준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뚫으면서 그 추진하는 힘은 어디서 와야 하느냐? 마지막 결론부분, 마지막 도착지점을 미리 알게 되면 뚫을 때 힘 있게 뚫을 수 있어요.

어제 낮 설교 때 제가 온돌전선 까는 이야기했죠. 기억 안 납니까? 공사할 때 장판 밑에 기존 깔려있는 전선 한쪽을 힘 있게 잡아당기면 우두둑 터지면서 다 튀어나오잖아요. 십자가에서 당겨버리면 나중에 그 내막이 다 나오듯이 결론과 연결되어 있단 말이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결론부터 알게 되면 하나의 단선으로 연결 지을 수 있으면서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 첫 시간에 미리 결론 비슷한 것을 먼저 제시하겠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에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 저주를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쳐보겠습니다.

이게 말씀이잖아요. 성도는 말씀이 뼈에 새겨진 자라 했지요. 이 말씀이 새겨지면 성도는 저주가 박힌 존재가 되겠죠. 저주받는 조건이 말씀이니까 이 말씀이 성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저주의 조건이 박힌 존재, 저주의 조건이 박혀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예요, 성도는.

그래서 성도의 안목이라 하는 것은 저 박혀 있는 저주의 조건을 배제하고 세상을 보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누가 잘 되고 성공하고 뭐 자기 뜻대로 되고 할 때,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 망했다고 실망하면서 울고 뭐 자살할까 이렇게 할 때도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살해도 어떻고 성공해도 어떤데 저 사람이 주를 사랑할까?’

그 관점에서 상견례해서 사돈을 볼 때도 마찬가지고요. “아이고, 애 잘 키워놨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애 잘 키운 게 문제가 아니고. 이걸 또 발설하면 파혼될 수가 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돼요. 하여튼 종교, 정치 이야기는 절대로 상견례 때 하면 안 되고 서로 덕담하는 시간으로 보내야 돼요. 찻값부터 음식값 낼 때까지 마지막까지 신경 바짝 쓰고요. 그래서 상견례 마치고 집에 와서 한복 벗어던지면서 신경질 내죠. “너무 긴장해서 짜증난다. 두 번 다시 못한다, 두 번 다시. 점잖은 척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이렇게 하죠.

그러나 마음으로는 뭐냐? ‘주를 사랑할까?’ “교회 40년 다녔다고요?” 40년 다녔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아니, 4대째 기독교 가정이라고요?” 아하, 사랑 안하는구나. 어떤 것도 주를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사랑 안하더라도 나중에는 사랑하겠지’가 아니라, 그 자체가 뭐가 박혀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가 박혀서 저 인생을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가는 것.

“그래, 사위되시는 분은 뭐한다고요?” “안과의사. 공부를 잘해서 안과의사.” “그럼 며느리는?” “며느리는 3사, 변호사 다 되고.” “아이고, 공부 잘하셨네요.” “댁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럴 때 뭐가 빠졌어요, 지금? 그 현장이 저주의 현장이에요. 저주의 현장이 되죠.

제가 주일 오후설교 요약을 한다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뭘 하고 싶었느냐 하면 바로 ‘말씀의 숫자화’라는 것. 설교시간이 짧기 때문에 그걸 설명 못했는데, 사망에서 그다음에 어디로 간다고요? 생명으로. 생명에서 어디로 간다고요? 이게 바로 계시화 되는 거죠. 인간 자체가 계시가 되죠. 사망 → 생명 → 계시화(숫자화)

계시가 된다는 것은 숫자화 되는 것인데 요한계시록 21장 15-17절에서 척량한다는 거예요.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척량단위가 돼요.

척량단위를 설교시간에 잠깐 언급했었어요. cm, kg, L 이게 단위잖아요. 길이, 무게, 부피 단위. 이 단위들 중에서 3000cm, 200kg, 1L 단위 앞 숫자의 많고 적음을 논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나 앞에 붙은 숫자가 얼마나 적으냐 크냐 관계없이 단위만 같은 kg이고 cm라면 이건 예수님의 본질과 동일본질이 돼요.

인생 살면서 망할 수도 있고 인생 살면서 떼돈 벌수도 있어요. 앞에 붙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단위가 중요한 거예요. 이 단위의 척량, 이 척량 단위가 바로 천사의 단위고 천사의 단위=성도의 단위가 되는 겁니다. 왜 이게 단위냐? 냉동 동결시켰다 했잖아요, 낱개로.

인간이 생명이 되고 난 뒤에는 자아의 가치는 냉동되어서 자아의 맛은 더 이상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맛인데 그게 (말씀의) 코팅이에요. 말씀이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속에서 말씀이 어떻게 맛있게 나오느냐. 말씀이 어떻게 맛있게 달게 나오느냐. 또 어떨 때는 그렇게 쓰디쓰게 나오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지, 그 사람이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차를 어떤 거 타느냐 그거는 의미 없어요. 예수님과 똑같은, 아버지께로 받은 예수님과 동일한 본질로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척량의 건물 안에 있고 그 건물을 성전이라 이야기해요,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같은 성전.

이 성전에는 누가 못 들어오는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저주의 조건이 박혀있지 않은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냉동 동결처리, 코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은 들어오는 거예요. 그것도 우리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겁니다. 평소에 뭐 룰루랄라 건강하다 차사고 나서 납작해져가지고 죽었다 살아났을 때, 그때 뭐가 들어와야 돼요. 말씀이 들어와야 돼요. 말씀이.

p.19에 땅에서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차 사고부터 해서 모든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주도권이 없다는 거예요. 주도권이 없으면 뭐냐? 피조성을 갖게 돼요. 주께서 차를 굴리면 차가 구르게 되어 있고 주께서 아프면 아프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사고 나면 나게 되어 있고.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사고 난 거예요. 아프며 살든 차 구르며 살든 관계없이 그냥 편안히 산다는 것도 주께서 사고 친 겁니다. 사고 친 걸 ‘사건’이라 해요. 말씀사건. 이것은 우리가 아는 언약사건이에요. 십자가에서 깔아놓은 전선들, 여러 많은 전선들. 십자가에서 당겨보면 그게 다 십자가 예수님의 피 흘림과 관련된 사건들만 주께서 이 세상 현실로 만들었어요.

그런 이야기는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한번 할게요. 어렵지만 다시 해보겠습니다. ‘선지자의 존재가 그 상황을 만든다’ 이런 뜻이에요. 어떤 상황 속에 선지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의 존재가 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시편 105편 15절,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여기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17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9절, 요셉에게 뭐가 같이 덮여 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러면 애굽의 상황이라 하는 것은 요셉 한 사람의 개입으로 인하여 상황이 돌변해요. 애굽의 운명이 바뀝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 운명이 바뀌면서 애굽 나라에 히브리인들을 강제로 받아주게 되었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 어떤 데에서는 430년 동안.

출애굽은 언제 하느냐 하면 바로 왕이 요셉의 은혜를 모를 때 나가라는 거예요(출 1:8). 이제는 학대가 돼요, 학대. 요셉이 주신 은혜, ‘하나님의 선지자 덕분으로 우리 애굽이 이렇게 번창합니다.’는 은혜를 알 때까지만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제일 좋은 땅에서 대우받았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의 존재가 그 선지자가 속해있는 상황의 변화를 자아내는 동기가 된다. 핵심이 되는 거예요, 핵심이. 땅 있고 사람 사는 게 아니고요. 그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선지자를 보내게 되면 그 땅은 선지자 중심으로 선지자가 담고 있는 의미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벌써 예수님 중심으로 이미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걸 미리 아니까요. 그리고 최종적인 것이 아까 한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누구든지 everybody 누구든지 지위 고하 관계없이 사랑하는 가족 관계없이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요양병원에서 지금 돌아가시는 분이나 막 태어난 신생아나 누구든지 상관없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습니다.

이걸로 확정이 되었어요. 확정될 때까지 땅은 그분 중심으로 그분을 향하여 드디어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이 변화를 우리가 추적해봅시다. 이 변화에 대해서. 제가 먼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지구가 있고 달이 있는데 달 때문에 해변의 물결이 당겨졌다가 밀려나갔다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 달의 크기에 따라서 썰물, 밀물이 되는구나. 고기나 잡자. 달력이나 하자.’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뉴턴이란 사람은 희한하게도 해와 달이 뚝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아느냐? 밀물, 썰물을 가지고 뭘 만들어요? 질서를 만들어내죠. 법칙을 만들어낸 거예요. 법칙을.

바로 이 성경말씀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속에서 언약질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언약대로 하나님이 숨어있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걸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제는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하나의 질서체제를 파악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럼 그 질서체제를 파악하는데 앞으로 돌아가서 p.13 위에서 5번째 줄에 [말씀에 대한 거절은 반(反)창조로 내려가는데, 반(反)창조란 소멸이나 무(無)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전체 현실세계가 말씀세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아시겠죠.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안에 말씀이 없다. 그럼 그 사람 자체가 혼돈이 되는 거예요. 무질서가 되는 거예요. 술만 들어가면 무질서. 주사부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치워라! 해가면서 무질서 되는 거죠. 화장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아무데나 오줌 누고 이러죠. 담배피우고 담배꽁초 아무데나 버리는 그 자체가 무질서를 유발하잖아요.

놀라운 사실은 이 무질서가 혼돈이 이 세상에서는 왕질 한다는 겁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성도가 이 세상을 못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김이 없어요. 아예 져버려야 돼요. 져야 된다고요. 그것은 대칭성 때문에. 어제 오후설교에서 했죠. 거울 같은 칸막이 두고, 앞에 문턱 같은 사망을 두고 저쪽과 이쪽 세계의 대칭성 때문에 이미 이쪽 천국에 간 사람은 이 땅에서는 이 땅의 성공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요.

거지가 돼도 좋소. 빌어먹어도 좋고 자존심 다 상해도 상관없소. ‘없소’라 해야 돼요, 이게 시(詩)니까. 없소. 왜냐하면 이미 다 이루었으니까. 이미 본적(本籍, family origin)이 저쪽에 있으니까. 맏이가 저쪽에 있거든요, 맏이. 어제 설교에서는 체인(chain).

에브라임이라는 뜻은 ‘번성’이라는 뜻이에요. 므낫세란 ‘허무하다’는 뜻이에요. 아이고, 허무하구나. 번성했다.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완성되었다. 이제는 허무해도 좋소.’ 이렇게 되는 거죠. 체인, 성령으로 연결되어서 맏이는 위에 있고 우리는 아직도 연결된 채 아래쪽에 가있어요.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저한테는 그런 체인이 없어요.” 하거든요. “체인 있어요.” “어디 있는데요?” 하면 “마태복음 10장 20절.” 누가 후딱 체인찾아보세요. 찾아서 크게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아, 성령이시니라. 성령으로 체인되어 있죠. 그런데 그 말하는 분위기, 환경보세요. 혼돈이잖아요. 잡아가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를 잡아간다는 혼돈, 반(反)창조, 하나님의 은혜성이 없는 반(反)창조와 무질서가 활개를 치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요. 활개를 칠 때 여기에 대해서 성도는 어떤 찬스로 보는 거예요. 어떤 찬스냐? 평소에 관심 없었던 내 안에 있는 체인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조성하죠.

또 체인이라 해서 깡패들 하는 금목걸이 말고요. 꼴 보기 싫은 그런 거 말고, 진짜 맏이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로마서 8장 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아신 자들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 의롭다 하시고. 이게 체인 연결 때문에 그래요, 체인 연결.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다녀갔던 그 경로가 우리의 체인 하나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고리 고리를 형성하는 거예요. 주님이 다녀가신 그대로 다녀가서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겁니다. 주님이 먼저 시범을 보이셨으니까요.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까지 낮아졌잖아요(빌 2:6-8). 아무도 종이 되기 싫어한 거예요. 주님이 종 되었단 말이죠. 그 코스를 밟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내(예수님) 말과 이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지자들이 받았던 상을 네가 지금 받고 있는 중인 줄 알아라.

억울함. 사람들이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게 억울함입니다.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 할 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오죽 했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겠습니까. 너무너무 답답하고, 더 답답한 것은 이 답답함을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노인네들이 자꾸 자식을 불러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야야, 너 내 이야기 한번 들어봐라. 옆에 할아버지가 나한테 작업을 거는데 우야면 좋노? 자기 집에 아직 포도원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누가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주면 그 기억이 오래 남고, 또 반대로 뭐도 기억이 오래 남는가? 자기를 개무시할 때 그 기억도 오래 남아요. 그래서 나이 들면 마지막 남는 장기기억은 이 두 가지에요. 자기가 자식 잘 키운 거 하고, 자기 돈 떼인 거 하고 그 두 가지 남아요.

이왕 말 나온 거 계속 해볼게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죠. 이 말씀을 빼는 곳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빼는 곳이 어디냐? 교회가 되겠어요. 교회는 친목단체기 때문에 이걸 집어넣으면 안돼요. 친목단체기 때문에. 교회 나온 노인네들이 이야기하고 싶어 나오는 거예요, 세상 이야기. 교회에 성경말씀 이야기하러 오는 게 아니고 만났다 하면 손자 애들 이야기, 2부 예배 끝날 때까지 그 이야기하고 앉아 있다가 집에 가요. 자기한테 있었던 거, 답답한 일, 컬컬한 일 이야기 다 쏟아내야 되니까. 수다 떨러 교회가요. 그럼 교회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이게 빠졌어요. 이게 누락된 곳이에요.

자, 그렇다면 복과 저주를 바꿔놓고 이 저주를 자기 쪽에서 막아선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입니다. 희한하죠. 창세기 12장에서 복과 저주를 받아놓고 아브라함 본인이 저주를 막아요. 저주를 막는 이유는 자기 생계가 급하기 때문에. 생계가 급해요.

복과 저주, 둘 다 유일한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유지해야 될 텐데 아브라함은, 이삭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요셉도 마찬가지고, 복과 자기 안에 있는 이 말씀의 기준이 중요한데 인간이 육신이 있는지라 자기 밥 먹고 사는 게 급해요. 빨리 아부해야 되고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해서라도 일단은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가장의 역할 아닙니까.

저주를 누가 막는가? 본인이 저주를 막아버려요. 하나님의 저주의 조건을 막아버리죠. 그럼 저주의 조건을 막는 아브라함을 푸는 쪽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의 천사가 풀어버리죠. 하나님 쪽에서 풀어버려요. 조카가 어려웠을 때 아브라함이 나서서 전쟁을 벌이고 하나님이 나서서 도와주셔서 전쟁에 승리케 했어요. 그 조카를 무사히 끄집어내줍니다.

다섯 개, 네 개 민족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그 보물 같은 귀한 땅을 놓고 투쟁을 벌일 때 자기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가 보기 좋으니까 너 좌하면 나 우한다 했고 조카가 그걸 선택한 거예요. 그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는? 선지자가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상황이 선지자가 갖고 있던 질서체제에 맞추어서 그 지역은 완전히 작살나버리죠.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과 무관한 자는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다 죽어버리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요, 진공상태가 아니에요. ‘뭐 아무것도 없네? 그럼 인간들의 행함과 지혜로 채우면 되겠네.’ 이런 세상이 아니고 이미 선점한 분이 있습니다. 언약의 질서가 선점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갈수록 무질서한 세상이 돼요.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이 무질서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위배했을 때 모든 것은 무질서와 혼돈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어요. (되돌아간)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서 내린 기준이 처음의 기준과 또 달라요. 이런 게 어려워요.

처음에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잖아요. ‘빛이 있으라,라고 내가 명했는데 네가 지키면 빛이 빛 되게 해줄게.’ 이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선언이 곧 현실이 된 겁니다. 말씀 선언이 곧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2장에 가면 갑자기 말씀 선언이 현실이 안돼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누가 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 인간이 없을 때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그냥 있었는데 인간이 생기고 난 뒤에는 누구를 경유하느냐? 인간을 경유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버리죠.

그럼 인간을 경유하게 되면 이것은 새로운 차원의 혼돈이 인간을 통해서 새로 나오고, 새로운 차원의 질서가 인간을 통해서 처음에 있는 천지창조와 다른, 그보다 더 격이 높은 새로운 천지창조가 새롭게 발생되는데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의 천국이잖아요, 천국.

처음의 천지창조하고는 완전히 질이 달라요. 예수님 중심이 있어요.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 되신 분이에요. 사람을 경유해서 이루어진 그 영광이 처음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안돼요. 따라서 처음 질서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와해되고 파괴되고 다 부서져야 돼요.

지금 우리는 어디에 놓여 있느냐?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질서 속에 있죠. 예수님의 질서 속에.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로 처음에 있는 말씀이었잖아요. 빛이 있으라 하매. 그때 뭐였다고요? 혼돈이었다. 혼돈 색깔이 뭐였습니까? 어두움이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재밌죠?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주셔서 일을 해버리니까 어두움에서 뭐가 생겼어요? ‘빛이 있으라’는 효과와 동일한 효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긴 거예요. 안 믿는 표정들을 하고 계신데 요한복음 1장 봅시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일방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선포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에요.

“영접하는 자” 하니까 마치 인간이 영접해야 되는 것처럼 하지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영접이 되지 않는 영접. 영접해서 나 천국 가야지, 이런 영접 말고, 영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12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의해서 자녀가 되어버린 거예요. 권세에 의해서.

그래서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가 그대로 계속 부응하고 계속 살려내겠죠. 자기 거니까. 그 조건 중 하나가 아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뼈에 새기듯이 수시로 우리한테 일어나는 거예요. 수시로.

언제 일어나는가? 동창생 만났는데 나보다 빨리 출세하고 남편 자랑하는데 자기 남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떵떵거리고, 고등학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한 게 애들 다 미국 유학 보내고 잘 되었을 때, 갑자기 부아가 나서 우리 속에 나오는 말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나 받아라, 씨.”

이게 주의 뜻인지 아니면 자기 오긴지 애매하죠. 오륙도 아닙니까, 이게. 사랑이 임하면 섬이 다섯 개 되고 물이 빠지면 여섯 개 되는. 갑자기 덧니 나듯이 하나 더 생겨버리죠. 어쨌든 성도는 이 땅에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를 만지지 마라. 왜냐? 성도가 일어났던 질서 중심으로 세상은 재편되니까요. 재편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성도라는 것이 우리 쪽에서 보면 nothing, 아무것도 아닌데 말씀을 부여한 쪽에서 보면 천하보다 귀한 게 성도에요. 양 아흔아홉 마리 가라 해, 가라 해.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잃어버렸다 얻은 양 한 마리가 더 중요하죠. 양 한 마리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고 광주강의에서 했는데,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자신이 한 게 없어요. 큰소리치지만 전부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부터 해서 생일날 선물부터 해서 돌잔치… 전부다 자기가 아닌 쪽에서 온, 그냥 받아먹었다는, 받아 챙기고 산다는 그 증거물이 뭐에요? 어린아이, children. 어린아이 아닙니까.

외부에서 주어진 것밖에 없어요. 새벽에 나와 보니까 택배가 열 몇 개 쌓여있듯이, 전부다 새벽탁송 받아서 그냥 산 거예요. 내 목숨도 없고요. 내 것도 없고 내 자식도 없고. 어떤 자식이든 집에 노는 자식이든 어떤 자식이든 전부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선물치고는 좀 골치 아프지만. 밖에 안 나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선물이지만.

그렇게 구박을 하고 나가라 하다가 갑자기 언제 동정심이 오느냐? 애가 아플 때. 아이고, 내가 파스 붙여줄게. 담 걸렸어? 크로아정 주고 파스 발라주고 이렇게 하겠죠. 내가 아무소리 안할게. 그냥 튼튼하게만 살아줘.

늘 이처럼 우리는 혼돈과 질서를 왔다갔다 해요. 내 욕심 기준으로 왔다갔다 한다고요. 오후설교 때 했던 기도를 다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결핍 때문에 몸부림친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결핍 때문에 몸부림쳐요. 뭐가 빠졌느냐? 빠진 걸 모르겠다, 이게 정신분석학이에요. 성경은, 빠진 게 있다. 이게 바로 말씀이 빠진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빠지니까 힘든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뭐가 빠진 줄 모르기 때문에 결핍된 데다가 코인도 해보고, 주식도 해보고, 부동산 투기도 해서 사기당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직장생활 35년 하고 퇴직해서 퇴직금 4억 있는 거, 그 딸내미가 항상 공부를 1등하니까 4억 다 집어넣어서 딸을 미국유학 보냈어요. 보냈는데 나중에 딸은 거기서 적응 못하고 튀어나왔어요. 자기 퇴직금, 노후자금 다 날렸습니다.

왜 유학 보냈어요? 결핍 때문에. 자기 내부의 결핍 때문에 그래요. 말씀이 들어갈 자리에, 자기 딸 유학 보내서 애 잘 되면 나중에 성공해서 나한테 잘해주겠지. 이래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이상한 남자 만나서 문신한 남자 만나서 자기들끼리 잘 살면 부모는? ‘부모는 부모 할 일 했으면 됐지, 내가 또 도와줘야 됩니까? 우리 집 강아지 키우기도 힘든데.’ 이렇게 나오면? 지 강아지보다 못한 거예요, 부모가.

모든 노후대책이라는 게 결핍을 어떻게 채우느냐? 파리바게트냐, 아니면 카페냐? 둘 다 해도 다 망하니까. 뭐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몸부림치는 거예요. 카페 하니까 옆에서 또 훈수가 들어오네. 이왕 하는 거 크게 해야 됩니다. 작게 하면 안 됩니다. 고생만 할 뿐이죠. 크게 하니까 크게 다 망해버렸는데.

말씀으로 이 안을 채워야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채워야 되는 거예요. 그게 왜냐하면 두두둑 당기면 모든 질서는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그 내막이 완전한 내막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게 되고 성령은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나와요.

사랑 앞에서는 간음한다, 살인한다, 도적질한다, 이웃한테 나쁜 짓한다 그 모든 것은 뭐로 완성됩니까? 로마서 13장에 사랑으로 완성이 되죠(8-10절). 그럼 간음 안했다, 살인 안했다, 도적질 안했다 이게 뭐에요? 저주받죠. 지금 뭐가 없는 거예요? 사랑이 없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니까 부자 청년처럼 누구를 쳐다보고 있어요? 주님한테 영생 얻으러 온 부자 청년이 누구 쳐다보고 있었습니까? 자기는 주님 쳐다본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은 “지금 나를 쳐다보지만 나를 보는 게 아니고 네가 해온 업적, 율법적 업적을 쳐다보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율법에 의해서 너는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 근심하여 돌아갔어요. 어디서 나한테 사기 치려고.

그걸 보고 벌벌 떨면서 놀랐던 것은 부자 청년이 아니고 제자들이었어요. 아마 그 현장에 있었다면 더듬거리는 소리가 막 들렸을 거예요. “주,주,주여. 누,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부자도 못 간다 했으니까. 인간은 못한다. 그러나 누구는 한다? 하나님은 하신다. 두 가지가 다 들어있는, 두 가지 말씀이 다 뼛속까지 들어있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그대로 우리 안에 새겨져 있어 듣는 겁니다.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해요? 사랑 못해요. 그러나 사랑 못한다는 사실이 죄인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된 걸 기뻐하는 사람은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코팅되어 있으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자체가 사랑이니까. 나는 말씀 못 지키는 죄인, 그런데 그게 뭐로 둘러싸여있다? 사랑의 체인이 있으니까 모든 율법을 다 이룬 상태가 돼요.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다음에 봅시다. p.19 아까 했던 것을 다시 봅시다.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가 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를 준다] 여기 땅이 있잖아요, 땅. 땅이 하늘로 가는 게 아니고 땅에 하늘이 왔죠. 아,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하나님, 하나님 했는데 하나님이 직접 와버렸어요. 직접 와버렸다고요.

어떤 연예인이 직접 와보세요.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연예인보다 더 대단한 분이 오신 대목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과 일행이 가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죠.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3-4절)

이게 신기한 게 다른 사람은 이 음성이 안 들려요. 7절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뭐 꽝하는 소리 났겠죠. 구체적으로 사울을 부르는 소리는 안 들렸단 말이죠.

사도행전에서 이걸 몇 번씩 이야기했는데 22장에도 나오고요. 이게 땅이잖아요, 땅. 땅에 누가 왔어요? 땅에 우리 부활하신 주님이 와버렸죠. 사도행전 26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26장 13절에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했어요.

그리고 18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했다. 처음에는 눈에 비늘이 떨어졌다 했는데(행 9:18), 눈을 떴다.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 어떻게 알아요? 눈을 떴다 했는데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 어떻게 아느냐? 눈을 뜬 그 결과로 뭐가 보였느냐 하면 이게 보였어요. 사단의 권세가 보인 거예요!

눈을 안 뜰 때는 인간들의 힘으로 조성된 세상이 현실인데, 눈뜨고 보니까 이 세상이 인간들의 권세가 아니고 악마의 권세에 지배당하고 휘둘리고 있는 세상이라는 게 눈뜨니까 보인 거예요. 눈뜨니까. 악마까지 아울러서 세상을 보니까 제대로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예요. 무질서한 거예요. 돼지 속에 들어간 귀신들이 설치는 세계.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 20절에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사람의 입에서 성령의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는 그냥 사람의 소리가 나온다 했는데 눈뜨고 보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의 소리가 아니고 악마의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악마의 소리가.

죽여라, 죽여라 하잖아요. 부부 싸움할 때. 녹음해보세요. 죽,죽,죽,죽 이게 나온다고요.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머리 막 붙들고. 이게 미쳤나? 왜 이러노? 오늘 나 못산다, 니 때문에! 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한번 해보자, 오늘.

어떻습니까? 이렇죠. ‘억지’. 억지죠. 성령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성령은 부드럽죠. 물론 분노할 땐 분노하지만. “성내지 아니하고” 이런 것도 있죠, 고린도전서 13장에. 왜 그러느냐 하면… 오늘 이 법칙 하나는 꼭 새기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거 진짜 중요해요. 다른 것도 다 알아야 되지만. 이거 알고 오늘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십자가지지 않은 자끼리 싸우지 말자.’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핵심부분입니다. 파당이 어떠니 너는 아볼로 파니 뭐니. “너 십자가 졌어?” “안 졌어.” 사도 바울이 “나도 안 졌어. 우리끼리 왜 싸우는데? 미친 거 아니야?” 이미 질서가 십자가 지신 분 중심이잖아요. 모든 만물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십자가 지지도 않은 것들끼리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죽여라 죽여라 못 산다. 뭘 못 살아? 누가 살려줬는데요? 누가 살려줬어요? 남편이 살려줬어요? 주님이 살려줬잖아요, 주님이! 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살고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죽어요.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증인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 보내서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서로 잘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에 이걸 잠재울 수 있는 중재방법은 뭡니까? “그럼 너 십자가 졌어?” “안 졌어.” “그럼 강도야?” “응, 강도. 그럼 너는 십자가 졌어?” “아니, 나도 안 졌어.” 그럼 둘 다 강도에요. 둘 다 세리고 창녀고 둘 다 강도에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어깨동무하고 사랑하는 형제끼리~ 노래 부르고 이래야죠.

평생 동안 싸우는 게 십자가 지지도 않은 주체자 입장에서 싸우는 거예요. 하나님, 내 인생을 왜 이렇게 괴롭게 합니까? 힘들게 합니까? 이런 거. 십자가 지신 분이 너보다 고생 더 많이 했어.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남에게 살과 피를 제공하지도 못하는, 살과 피가 아니라 죄만 제공해야 될 인간이 고생한다고 닦달 내니까요.

누구야, 네 배후에? 이렇게 반말하면 돼요. “당신 누구야? 마귀지?” “아니, 나잖아.” “잠깐 잠깐 비켜볼래? 네 속에 말하는 자가 누군지 한번 보자. 잠깐만 보고. 오, 마귀네.” 성령이 안 나오니까 마귀의 말이 나오는 거예요. 마귀의 말의 특징은 이 땅에서는 성령 받은 자를 핍박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에, 육체로 난 자는 그 본성상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법칙이니까요.

이렇게 밀물, 썰물밖에 안 보이는데 뉴턴이 둘 사이에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성경은 보이지 않는 실상의 법칙을, 눈뜬 성도를 통해서 완전히 그 비밀까지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 역할을 성령께서 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다녀가신 이 땅에서 그런 활동을 하게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땅에 사는 것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골로새서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또 한번 휙 넘어가봅시다. p.30 <2강. 대신 죽으심>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하면, 인간 자체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음이 작동하는데, 이 죽음이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치는지는 몰라요.] 모르는데 드디어 전개됩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이기 때문에.

그 첫 번째 전개가 창세기 4장입니다. 가인 이야기 나와요. 가인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동생 죽이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었어요. 누가 불 질렀습니까? 주님이 불 질렀어요. 주님이 불 질러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가인에게 덮친 자가 있었는데 그게 마귀였어요.

마귀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역할을 맡았다고 천국 가는 건 아닙니다. 악한 역할도 역할이니까 맡은 배역대로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그 드라마에서 악한 역할을 마귀가 담당해야 되죠.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다 있어줘야 그 둘 안에서 모든 변화가 해석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갈등과 투쟁사. 뭣 모르고 같이 거기에 말려든 세상의 많은, 하늘의 별같이 많고 모래같이 많은 인간 군상들. 그래서 툭 치면 어떤 사람은 성령 나오고 툭 치면 어떤 사람은 악령이 나오고. 자기 의가 나오고 주의 의가 나오는 이런 사람으로 분류가 되는 세상.

이게 주님의 이미 확정된, 자기 자신만이 만유의 주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이렇게 천국과 지옥, 악인과 선인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분류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었다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가를 그게 어떤 질서가 확정된 것인가를 우리를 통해서 서서히 이제는 남은 인생동안 풀어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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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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