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 행위 사무엘하 6:16 250627
광주강의20250627a 사무엘하 6장 16절(기만 행위)-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p.194 <죄에 대해서 알자>. 죄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데, 죄에 대해서 알자고 하면서 1번째 줄 보면 골로새서 3장 1절, 2절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되어 있죠.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지 말라”, 명령이죠. 구약에 있던 명령.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이 ‘말라’의 명령이 뭐냐?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은 땅 자체가 통째로 죄가 되고 죄로 엮이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성공했다는 뜻이죠.
그러면 인간은 땅에 삽니까, 하늘에 삽니까? 땅에 살잖아요. 그럼 땅에 사는 전부가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집합이 땅이 되는 거예요. 그럼 땅에 있다는 나 자신도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하면 죄에 포함되는 겁니다. 이게 아주 속 시원한 이야기에요. 이게 복음이죠. 이게 복음이에요. ‘나 자신이 이미 죄가 된다. 나 자체가 죄가 된다.’ 정말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어떤 기대감이 있으면 뭔가 시도를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신약의 입장에서는 그런 시도할 건덕지도 이젠 없다는 거예요. 그냥 죄지, 죄는 죄이어야 한다. 딴 소리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골로새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이렇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위에서 볼 때 땅의 모든 것이 죄다. 다시 말해서, 이 글 제목이 뭐냐? ‘죄에 대해서 알자’. 앞에 주어가 필요하겠죠. 누가? 너희들이. ‘너희들이 죄에 대해서 알자.’ 그럼 이것을 ‘땅에 모든 것이 죄다’ 여기 안에 딱 집어넣으면 뭐냐? ‘너희들이 곧 죄인 것을 알자.’ 이렇게 되겠죠.
‘너희가 죄인 것을 알자.’ 이게 바로 신약의 복음인 겁니다. 복음 외에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이걸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걸 이야기하는 종교는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도 천주교도 이걸 이야기 안 해요. 참 희한하죠. 성경에서 나왔던 기독교, 천주교도 이 이야기를 안 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이야기하지….
죄인데 뭐. 죄는 죄다워야 되죠. 죄는 죄다워야 되잖아요. 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거예요. 자기한테 미련 있다 이 말이죠. 미련은 어떤 기대를 낳고 고대하게 되고 어떤 목표를 상정하게 되죠. 누가 좋아하겠어요? 마귀가 되게 좋아하겠죠. 저거 또 속았어. 또 속았어.
자, 그다음 문제. ‘그럼 우리가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 문제. ‘너희가 죄라는 것을 알라.’ 여기까지는 굉장히 쉬워 보이는데 ‘어떤 식으로 해야 내가 죄인 것을 아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또 난감해요. 왜냐하면 내가 죄인 것을 알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인식이 우리한테는 없기 때문에. 없어요.
내가 죄인 것을 아는 방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싸움을 통해서에요. 싸움인데 위와 아래의 싸움. 어떤 싸움이냐? ‘위와 아래의 싸움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는, 내가 곧 죄인이다.’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싸움이 없으면 죄임을 알 수 없죠.
이 싸움은 누가 거느냐 하면 위에 계신 분이 지상에 와서 벌이는 싸움을 통해서 내가 죄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 것을 안 사람은 위에서 와서 아래에서 벌이는 이 전쟁에 대해서 같이 더불어 안다는 뜻입니다. ‘아, 전쟁이 있었구나.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 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구나.’
그 전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앞장세우고 전쟁을 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전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전쟁인가?’ 이렇게 구분될 수가 있습니다. 아직 덜 피곤할 때 중요한 것 빨리 빨리 해치워야 됩니다. 나중 되면 복잡해가지고 혼돈상태에 있게 되니까.
신앙의 전쟁인가? 하나님의 전쟁인가? 신앙의 전쟁이라는 것은 누구의 전쟁이냐 하면 바로 나의 전쟁이 되겠죠. 내가 믿을 거냐 믿지 않을 거냐 이것이 문제로다. 믿을 거냐, 믿지 않을 거냐.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는 못하고 하나님만 벌이는 전쟁이 되겠죠.
신앙의 전쟁은 우리 자신에게 뭔가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믿을래, 안 믿을래?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요구하는 게 있죠.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은 요구할 게 없어요. 출애굽기 14장 13-14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그다음에 뭡니까? “가만히 서서” 대기하라 이 말입니다. 결과만 봐라, 결과만. 나대지 말고 결과만 봐라.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했어요. 이 대목 보면 구원받는 것 되게 쉽죠? 굉장히 쉽잖아요. 가만히, 그다음에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눈을 깜빡거리면 안돼요. 눈이 깜빡거릴 때는 인공눈물 집어넣어서 눈을 반짝 좀 떠야 돼요. 바짝 눈뜨고 구원을 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쉬워요.
그런데 쉬워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쉬워 보이지만 안 쉬워요, 이게. 애굽 사람이 없어요. 현재 우리에게 애굽 사람이 없어요. 애굽 사람이 없는 이유가 우리가 같은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는데 하나님은 패가 있어요. 하나님 편과 하나님 편 아닌 편이 있지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패가 없어요. 말만 잘하면 다 한 편입니다. 말만 잘하면.
애굽을 찾을 길이 없다니까요. 애굽을 찾기 위해서 애굽을 찾아 사바~ 이렇게 애굽을 찾아 나설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없어요. 애굽을 찾아 나설 마음이 없어요. 왜 애굽을 안 찾아나서냐 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적과 동지를 본인이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적과 동지, 그걸 본인이 결정해요, 본인이.
사회생활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 사람이 나한테 실제 이익을 줄 사람이냐, 아니면 나한테 손해를 입힐 사람이냐를 그때그때 결정하는 생활이 사회생활이에요. 그게 사회생활이에요. 심지어 유치원 애들에게도 그런 얘기하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이들은 벌써 심각한 사회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서로 연애하는 사이에 결혼 전에 여자가 남자한테 묻습니다. “시어머니가 물에 빠지고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건질 것이냐?” 훅 들어오죠. 훅 들어온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당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훅 내놓으라는 뜻이거든요, 생각하지 말고. 교회 다니면서 엎어지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이렇게 하잖아요. 불신자는 “엄마야” 하고, 신자는 “주여”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질문이 들어올 때는 제가 어떤 강의에서 답변을 이렇게 하라 했어요. 지금 질문이 뭡니까? ‘시어머니하고 나하고’ 이렇게 했죠. 거기다 한 분을 더 집어넣으면 그게 답변이 돼요. ‘하나님하고 시어머니하고 당신하고 물에 빠지면 누굴 건질 것인가?’라고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서 먼저 건져내는 사람을 나는 건지겠다.” 이러면 되죠.
논리가 좀 복잡하지만. 왜냐하면 물에 빠지는 상황은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러면 둘 중에 한 사람을 건진다면 건짐 받는 결과는 누구 몫이다? 하나님 몫이다. 그럼 중간에 나는 뭐냐? 내 결정은 빠지고 내 선택은 빠지고 내 생각 빠지고 주의 도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어린아이한테 “너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물으면 애는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주님이 좋아하는 쪽으로 좋아하겠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요.” 말로만 엎어질 때 ‘주여’하지 말고 실제 생활에서 주님을 거기다가 항상 집어넣으면 그것이 정답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정답이 돼요. 자빠질 때만 ‘주여’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 복음 아는 사람들은 독해가지고 자빠져도 ‘주여’ 안 해요. ‘어이구’ 이렇게 하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적과 동지를 이미 본인이 결정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결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결정하는 이것이 땅의 일이거든요. 하나님이 결정한 게 아니고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이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애굽에서 너희를 구원하는 걸 보라.” 할 때 이 말씀은 굉장히 쉬운데 막상 현장에서는 가만히 볼 사람이 없어요. ‘가만히 볼 때 고개를 요만큼이라도 돌리면 안 되겠죠?’하는 이런 방식 있잖아요. ‘위로 쳐다봅니까, 아래로 쳐다봅니까? 고개 각도를 얼마나 하고 몇 초 동안 중지해야 가만히가 되느냐?’ 그런 거 찾지, 정작 중요한 것인 애굽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걸 적용시킬 수 없어요. 본인이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가만히 있어. 애굽에서 건진다.’할 때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게 뭐냐? 이거에요, 기만(행위).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거죠. 속인다 또는 자기를 감춘다 그런 행위를 기만이라 해요. 타인을 속이는 것도 포함되지만 나 자신의 진심을 본인이 감추고 난 뒤에 타인에게 내보이려고 하는 것도 기만행위죠.
기만행위가 바로 죄가 돼요. 기만행위가 죄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한 게 아니고 기만, 속이는 행위가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창세기 3장에 나온 게 뭡니까? 기만행위잖아요. 기만행위라 하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죄가 있는데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는데 드러나지 않은 죄가 드러나는 그 모습이 바로 기만행위라는 거예요.
기만행위 없으면 죄가 없어요. 그러나 죄는 있어도 표가 안 나요. 그런데 죄가 있으매 죄는 감추지 못하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나쁜 짓 많이 한 것을 모아서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어요. 시편 51편에 나오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죄 중에서. ‘주여’ 한다고 죄 없어지는 게 아니고요.
나하고 시어머니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건질 것인가? 주님께서 건지는 대로 건지겠다. 이게 무슨 행위에 속합니까? 기만행위에 속하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기만행위밖에 없어요. 기만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해요. “내가 애굽 사람과 싸운다. 가만히 봐라.” 내가 애굽 사람 속에서 너희를 건져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죄가 있고 난 뒤에 기만행위 있듯이, 하나님의 싸움이 있고 난 뒤에 뭐가 있습니까? 구원이 있는 거죠.
이 대칭성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죄가 표 안 나는데 기만행위로 죄가 나타났듯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먼저 있고 그 결과가 구원이잖아요. 그러니까 기만행위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구원받고자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그게 뭐가 돼요? 기만행위가 되는 거예요. 그게 기만행위가 돼요.
기만행위에 대해서 하나 예를 들라면 지난 수요일 설교(250618 <중심부> 왕상 13:1-5)에서 “단아 단아”. 이 본문보고 제 아내가 갑자기 단이가 생각났답니다. 선지자가 사람보고 이야기 안하고 뭐보고 이야기해요? 단, 제단보고 이야기해요. 단아, 단아. 사람은 제켜버리고. 인간은 대화할 가치도 없어요. 그 단이 북이스라엘에 있던 벧엘의 단 아닙니까. 바로 인간이 내놓은 기만행위의 증거물이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뭐만 내놓는다? 기만행위만 내놓는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 속이고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이런 속이는 행위만 나온다. 이걸 너무나 감격스럽게 바라보는 거예요.
기만행위가 나온다는 말은 뭡니까? 내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의 전쟁이 나를 상대로 있었다는 거죠. 애굽인인 나를 상대로 하나님이 일을 벌였다는 거예요. 일을 벌였다는 겁니다. 왜? 나는 땅 그 자체, 죄 그 자체, 악 그 자체, 나는 애굽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고마움. 나 같은 것을 붙들고 전쟁해주시고 씨름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이죠.
구약에서의 전쟁은 이스라엘 전쟁으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데, 신약에서는 잘 예상 못하게 나타나요. 마태복음 9장 5절. 하나님의 전쟁은 이렇게 나타나있습니다. 제가 한번 써볼게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이미 결과가 다 끝나고 난 뒤에 하는 이야기에요.
‘죄 사함을 받으라’와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건 요구하는 거예요. 되어진 결과, 주께서만 알고 있는 결과를 가지고 주위 사람들, 바리새인들에게 묻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바리새인 중에서도 병 고치는 사람들 많았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들은 뭐만 생각해요? ‘걷지를 못하니까 기도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어떻게든 일어나서 걸어가는 이걸 해줘야겠다.’ 이것도 그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얼마나 공을 들이고 열성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금식을 해야 될까 말까. 그것도 환자가 호응을 해줘야 약간 될까 말까하는 그런 거거든요. 심리적인 치료니까요. 심리적으로 압박감, 억압된 것을 풀어줌으로써 그다음부터는 억압에서 풀리니까 신체가 말을 들어서 나는 못 걷는다, 못 걷는다 하다가 걸을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하니까 걷는 거예요. 이게 심리적 방법이잖아요. 그것도 어렵죠.
그런데 인간들에게 뭐는 포함 안 되어 있느냐? 저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갈 것이냐, 말 것이냐 항이 두 개밖에 없어요. ‘저게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병이냐, 안 그러면 못 고치고 못 걷는 쪽으로 갈 거냐’ 두 개밖에 없는데 주님께서 여기에 뭘 집어넣습니까? 죄 사함을 집어넣었어요.
일어서 걸어가는 정도는 땅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죄 사함은 어떻게 돼요? 유대인들에게 죄 사함은 어디서 결정되는 거예요? 이건 하늘에서 할 문제지, 땅에서 하나님 믿는 인간들끼리 공들여서 만들 결과가 아니에요. 죄 사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아무 대가 없이 무상으로 베푸는 자비가 아니면 죄 사함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둘을 딱 댔어요. 그러니까 일어나서 걸어가는 여기에는 기만행위가 자꾸 투입되겠죠. ‘하나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동안 지은 죄를 회개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것만 이뤄주신다면 앞으론 잘 할게요.’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죄 사함이라 하는 것은 왜 이 기만행위에 포함 안 되느냐 하면, 예상치 못했거든요. 예상치 못해요.
죄 사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용서함이잖아요. 주님께서 죄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기만행위에요. 기만행위로부터 용서를 받는 거예요. 기만행위 한 짓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는 거예요. 기만행위 한 자체에 대해서. 거짓말한 것에 대해서. 기만행위가 인간은 타고난 거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기만행위를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나는 할 수 있다!’ 이게 뭡니까? 목표죠, 목표. 목표가 있다는 말은 이미 나는 목표에 대해서 기만행위를 벌써 출발시켰다, 시도하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오신 주님의 목표가 달라요. ‘나는 죄 사함 받을 수 있다’ 이건 인간의 기만행위죠. ‘너는 죄 사함을 받으라’ 이건 뭡니까? 하늘에서 오신 주님의 선언이잖아요. 선언인 동시에 실제 현실로서 열매로 맺어졌고.
따라서 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선언과 인간의 기만행위가 대결상태에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이 전쟁을 구약에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과 애굽의 전쟁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겠다.
이걸 일반화시켜보겠습니다. 구원에 관해서. 신앙의 전쟁과 하나님 전쟁의 차이점이 있어요. 그걸 일반화시키면 기만행위가 언제 드러나느냐? ‘그러면 어떻게 살까요?’라고 물을 때 드러나는 거예요. ‘나는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질문이 하고 싶다 또는 이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자체가 기만행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한 모독이죠. 기만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모독, 조롱 또는 멸시, 웃기고 있네’에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고 자부했던 것이 마태복음 27장 40절에 있습니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입이 근질근질해서… 이 말을 주님이 안 듣고 돌아가셨으면 섭섭할 뻔했어요. 인간 자체가 자기 기만행위 자체에서 못 벗어나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하는 말이 전부다 기만입니다.
예수님이 사람 모습으로 오니까 자기와 같은 인간 레벨로 본 거예요. 본인이 남한테 기만적인 행위를 하잖아요. 본인이. 목표가 있으니까, 사는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고 그게 자기한테 의미를 생산해주니까요. 기대치가 있고 고대하는 것이 있고 자기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기 목표가 있어야 돼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뭔가 시도한다는 거예요. 그게 아까 무슨 행위라 했습니까? 그게 기만행위에요. 자기를 속이는 행위에요.
딱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아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평소에 남들 속이는 기만행위 하는 것처럼 뭐 저런 기만행위도 다 있었네? ‘웃기고 있네’보다 더 심한 말이 ‘웃기지도 않네’에요. 같은 뜻입니다만 부정형을 강조했을 때, 웃기지도 않네.
예수님보고 ‘아이고, 코미디도 저런 코미디가 없어.’라는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죠.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왜?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천성이 모조리 다 너나 나나 다 속이면서 속고 속는 세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뭐 메시아라 하는데, ‘니가 예수님이면 난 하나님이다, 씨.’ 씨를 붙여요.
그러니까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그다음에 붙는 말이 “만일”이죠. 이 ‘만일’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마귀가 운을 떼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땅이라는 나와바리는 누가 장악했어요? 누구 영역입니까? 악마의 영역이죠. 네가 내가 통치하는 영역에서…
모든 인간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기만’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짜 내가 누군지를 죽을 때까지 몰라요. 그냥 오늘은 이 가면, 내일은 저 가면. 가면 뒤에 뭔가 자기를 숨기면서 가면은 아는데 숨기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냥 가면 바꿔치기. 매일같이 가면 바꿔치기.
갓난애부터 마찬가지에요. 갓난애가 배고프다고 울잖아요. 애는 그것이 기만행위인 줄 몰랐죠. 나중에 좀 되니까 울면 약간 떨어져 있는 엄마가 내 가까이 오더라. 그 다음부터는 배고프지도 않는데 우는 이유가 엄마를 가까이 자기 옆으로 당기고 형이나 누나한테 안 가고 내 옆에 당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갓난애가 엄마를 당기면 약간 큰 첫째 애는 그다음부터 ‘아야~’ 하든지 ‘엄마, 나 배고파.’ 해서 엄마를 동생에게서 떼 내고 자기 곁으로 불러내요.
기만과 기만의 불꽃 튀는 현장. 그게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시험의 현장입니다. 악마의 시험은 이런 질문으로 나타나죠. 시험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살까요?’ 8월에 퇴직하고 난 뒤에 나 어떻게 살까요? 시험.
시험에서 벗어난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곳이 지옥이군요. 이곳, 하늘 밑에 있는 땅 자체가 바로 애굽이고 죄구나.’ 이것을 확인하고 파악하고 점검하는 것, 이게 정답이 되겠죠. 지옥을 떠날 때까지 지옥을 점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못 볼 동네거든요. 보고 싶어도 못 봐요. 우리 사이에 골이 있어서 경계선이 있어서 천국 가는 사람은 지옥을 못 옵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 가기 전에 실컷 지옥 생활을 죽을 때까지 원 없이 하는 거예요. 퇴직해서 할 일이 생긴 거예요. 안 그래도 퇴직하기 전부터도 이미 지옥을 경험했지만 퇴직 전의 지옥 모습과 퇴직 후의 지옥 모습이 또 다를 걸요? 퇴직 전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하는 지옥 생활이지만 퇴직 후에는 ‘어떻게 저 사람 가진 퇴직금을 뜯어내느냐’ 그걸 노리는 지옥체험을 이제 하게 될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요, 에베소서 6장 12절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혈과 육이 아니요. 인간의 몸은 이미 자아의 소유이고 자아의 바탕은 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육에서 나와서 육, 육된 몸과 육된 자아가 이걸 늘 마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혈과 육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굽 사람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뭐가 성립이 안돼요? 이 씨름이 성립 안돼요. 씨름은 육과 육의 씨름밖에 없어요.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적과 동지죠. 나한테 이익 되는 사람을 동지로 가까이 하고 손해되는 사람은 적으로 멀리하는 것, 이 싸움, 육에 관한 싸움뿐이지, 다른 영적 싸움이라는 것은 성립이 안돼요.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이라는 게 성립 안 됩니다.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맨날 이 계산해요.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이야기했죠. 사회적 계약. 사회 계약설. 계약이 성립되어 있어요. 법이 성립되어 있다고요. “우리 계약서 쓰자.” “날 믿으라니까. 친구 아이가.” “아니, 친구고 뭐고 계약서 쓰자.”
아버지, 나한테 유산 주겠다는 거 계약서 쓰세요. 법원에 가서 공증하세요. 동생한테 안 주고 1/n안하고 특별히 맏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한테 더 준다는 걸 공증해주세요. 안 그러면 나중에 돌아가시고 동생들이 1/n로 하자고 원인무효 취소소송 들어오기 때문에 가기 전에 살아계실 때 주민등록 있을 때 남겨야 됩니다. 안 그러면 동영상 찍든지 음성 남기든지 계약서가 필요해요.
나한테 동지가 될지 적이 될지 그건 몰라요. 그래서 동지라 여겼는데 적으로 바뀌면, 동지로 알고 있을 때 인간에게 자아가 성립됐었거든요. ‘저 사람은 나의 동지다. 난 저 사람을 믿는다.’ 이 신앙생활이 형성된 자아관이 있었는데 적이 동지, 동지가 적으로 바뀔 때는 이 자아관이 깨지면서 인간들은 과거에 좋았던, 너무 좋았던 그때 그 시절로 마음의 도피처를 과거로 돌려서 과거로 자기 마음을 달래고 위로받기 위해 피해버려요.
그게 자연인 하는 거예요. 우리 끝나고 집 지어서 자연생활, 전원생활하자 이런 거. 전원생활 해봐야 팔 때는 십분의 일도 못 받는데. 전원생활하자, 이런 거. 전원생활하려다가 텃세한테 되게 혼나라. 텃세, 모기, 파리, 온갖 벌레, 개미 다 달려들고. 하루 종일 잔디 약 친다고 볼일 다 보고. 생산성은 하나도 없고. 꽃밭 하는데 이천 만원 더 들어갈 걸요. 썩은 꽃은 잘라내야 되고 걸러내야 되고 그 노가다 수고를 해야 되고요. 무슨 그런 지저분한 전원생활이 다 있어요. 아름다운 전원생활은 없어요. 스스로 짐을 뒤집어쓴 전원생활밖에 없어요. 아프면 차비 들죠. 의료보험보다 가는 기름 값이 더 들어요.
전원생활하면 우선 그쪽 사람들한테 뭘 돌려야 돼요. 뷔페권이라든지 돌려야 될 거 아닙니까. 안 그러면 텃세 때문에 못 삽니다. 돌리고 나면 컴퓨터 모르겠다, 뭐 고장 났다 해가지고 온 동네방네 머슴짓 다 해야 되고. 이게 꿈꾸던 전원생활이었단 말인가, 뭐 이렇게 되거든요.
과거로 돌아가는데 과거는 없어요. 매일같이 지나가니까. 원천무효가 되고 과거란 건 없다고요.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실망감이 남아있죠. 내가 결정을 왜 그렇게 했던가. 바보 등신도 아니고 적과 동지도 왜 구분 못하고 이러냐.
결국 제가 전원생활 이야기한 것은, 인간은 자기 싸움밖에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싸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분명히 장담합니다만, 자기를 위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 천국을 간다? 미쳤어요? 천국은요, 천국을 위한 싸움을 한 사람만 가게 돼요. 무슨 자기를 위한 싸움을 한 사람이 천국을 가요? 그건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죠, 지옥으로.
제가 며칠 전에 은하수 유치원 운동회에 갔단 말이죠. 갔는데 학부모 게임 중에 줄다리기가 있어요. ‘아빠들 나오세요.’해서 우리 사위가 약한 몸체로 저 뒤에 줄을 잡고 있었단 말이죠. 상대방 백팀은 건장하고 청팀은 별 거 없었어요. 시작 호루라기를 부니까 이게 막 딸려가는 거예요. 막 딸려가요.
자기 싸움은 이미 자기 싸움이 있기 전에 하나님 싸움이 있잖아요. 하나님 싸움은 애굽이라 했죠. 마귀잖아요. 아까 신약 보면 마귀라. 마귀가 당기는 쪽으로 인간은 그냥 끌려가면서 무슨 싸움을 한다? 자기 싸움만 하는 거예요. ‘그때 잘 선택할 걸. 그때 후회 없이 살걸. 그때는 내가 조치를 이렇게 했으면 될 걸.’ 자기한테 목표를 두는, 자기가 목적이 된 그 싸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싸움.
그럼 그 싸움을 누가 했다고요? 악마가 잡아당기니까 우리 사위는 그냥 딸려가요, 딸려가. 뭐 당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힘없이 놓지도 못하고 딸려가고 있다고요. 싸움은 마귀 쪽이 당기든가-넓은 길이죠, 안 그러면 주님 쪽에서 당기든가. 주님 쪽에서 당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나라 의를 구하죠. 그 분의 의와 그 분의 나라잖아요. 그럼 좋다, 행복하다 하지 말고 뭐부터 알아야 돼요? 그분에 종속된 자기가 되어야 돼요. 그분에게 종속된 자기.
다시 말해서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그분이 나를 자기 싸움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것은 내 싸움이 아니에요. 주님 자기 싸움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바로 이것을 시킨 겁니다. 먼저 하나님이 용사가 되겠죠?
죄라는 것은 기만입니다. 그 기만 없이 구원되려면 무상으로 주면 되죠. 가만히 있어. 내가 싸울게. 그럼 구원받는 우리 쪽에는 방법이 없지만 주님이 쓰시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싸움에 말려들게 하는 거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님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인 거죠.
그 현장이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시험받았던 광야에요. 광야에서 저쪽 대장 악마가 항상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딱 보니 너는 신자 아니야, 이런 거죠. 자꾸 마귀는 우리를 상대로 싸우는 거예요. 우리 붙들고 싸우는 거예요.
마귀의 특징은 우리를 혈과 육의 수준으로 낮추는 거예요. 혈과 육의 수준으로 낮춰요. “병 고쳐주세요.” “그래, 걸어가라.” 항상 이렇게… ‘걸어가라’가 네 목표였잖아. 그래, 내가 걸어가게 해줄게. 복 받은 줄 알아, 이것들아. 이게 인간들이 원하는 수준이죠. 하나님 믿으면 항상 내 소원대로 무탈하게 잘 된다, 이게 무슨 수준입니까? 하늘 수준 아니고 땅의 수준이죠.
마귀가 항상 그 이야기를 해요. “예수 잘 믿었으니까 봐라, 세상 일도 잘 풀리잖아. 그러니까 하나님이 좋아, 싫어?” “하나님 좋아요!” “하나님 네 편이야, 누구 편이야?” “하나님 내 편이에요!” 졸지에 인간은 하나님과 한 패 된 거예요. 주선을 누가 했습니까? 친절한 마귀가 주선했죠. 친절한 마귀가 전도하고 마귀가 소개해서 예수 믿게 되고 하나님 믿고 성령 믿게 된 거예요. 그 결과는 뭡니까? 세상적으로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원했던 것을 제공하죠.
이렇게 보면 제대로 지옥 실감나지 않습니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은 지옥 같은 게 아니고 지옥이죠. 지옥에서 항상 하는 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에요. 만일.
“너 아닌데, 너 아닌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아닌데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거 이런 거 할 수 있느냐?” 그러면 또 “내가 성도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한다.” “그래, 응답해줄게.” 마귀 쪽에서 응답해줘버리는 거예요. 그럼 내가 신자라고 믿는 것은 마귀에 의한 무슨 행위? 기만행위에 속하는 겁니다.
전에도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지난 오후 설교 땐가 주기도문에 대해 아주 짧게 이야기했어요. 주기도문의 핵심이 뭐냐 하면 ‘내가 다 해줄게’ 거든요. 내가 다 해줄게. 주기도문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들은 왜 주기도문을 못 하는가? 자꾸 다오, 다오 하니까. 이방인의 기도. ‘내게 이게 필요합니다. 주세요. 이게 필요합니다, 주세요.’ 자꾸 달라고 하니까요. 이방인의 기도가 인간 기도의 한계이고 그게 범위에요. 그 안에 갇혀있어요. 못 빠져나와요. ‘이거 필요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주시옵소서.’ 그거 아니면 기도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거 왜 줘야 되는데? 내가 왜 너한테 응답을 해줘야 돼? 내가 응답받아야 하나님 영광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어디서 기만행위야? 이렇게 되거든요.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이 먼저 용사가 돼요. 출애굽기 15장 3절, 여호와는 뭐라 했습니까? “여호와는 용사시니” 용사라는 말은 전쟁하시는 분이 용사 아닙니까. 이미 주께서 전쟁을 시작한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주께서 용사가 됐죠. 자, 용사가 됐는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생긴 거잖아요. 이스라엘은 애굽이에요. 애굽인데 자기가 애굽에서 나오고 싶었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요’ 하는 말을 했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요’라고 요청한 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내 목숨을 없애주세요’라고 요청 안하죠, 아까워서.
한번 적어볼게요. 시간 좀 가더라도 중요해서요. 이런 기도 해본 적 있습니까? ‘주님 앞에 걸리적거리는 저를 좀 치워주세요.’ 쓰레기가 그냥 쓰레기하면 되는데 이 쓰레기가 못된 쓰레기가 되어가지고 주님 공로만 가리고 있는 쓰레기에요. 이 쓰레기 좀 치워달라고 기도한 적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 안하고 반대로 기도해요. 기만행위니까 마귀로부터 우리가 기만행위를 배웠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수치가 남한테 발각되지 않게 하옵소서.’ 본심은 이건데 이것을 감추는 방법이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에요. ‘복음대로 살게 하옵소서.’ 귀신을 속여라. 본심은 이거거든요.
나의 수치가 발각되지 않으면 뭐가 유효하게 남아있어요? 나의 의가 유효하겠죠. 나의 의가 남아있는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나의 나라에요. 주님은 무슨 나라입니까?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분의 의와 그의 나라잖아요. 그럼 우리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에 비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겠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친히 용사가 되면서 이 전쟁이 나중에 어디까지 파급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내부까지 필히 파급되어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구원될 때까지 주께서 일하죠.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0627a 사무엘하 6장 16절(기만 행위)-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생긴 과제가 있어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기만행위를 알게 만들까?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 없이는 기만행위가 안 생기겠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기만하고 있다는 자체도 모르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27장 40절, 그리고 아까 출애굽기 14장 13-14절, 가만히 있어, 건진다는 이 두 가지 내용이 신명기 20장 1-3절 안에 이미 함축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찌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네가 어디서 메시아도 아닌 게 메시아 흉내를 내고 있느냐?’ 그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진심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목사부터 해서 모든 사람들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신앙이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기만행위가 마치 먹고 난 뒤 토하듯이 나오게 돼요. 토할 때는 자기가 토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도 모르게 토해지잖아요.
‘예수가 메시아일까? 구원자 맞기는 맞을까? 천국이 있기는 있어? 하나님은 과연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안에 바닥을 갈듯이 자신의 본심이 바깥에 있는 기만행위를 덮치죠. 그래, 아무도 몰라. 그렇게 되면 신앙의 투쟁은 뭐로 끝나요? 대참사로 끝나죠. 대참사로.
남편 있는데 부인이 “여보, 신앙생활 우리 잘하고 있는데 잘해서 그동안 우리한테 이익된 거 뭐가 있는데?” 아내가 먼저 운을 떼죠. “그냥 남들 앞에 신앙인으로 표내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있지만 당신 하는 꼬라지하고 내 꼬라지 봐서는 이게 무슨 천국을 가느냐? 일찌감치 우리 솔직하게 까자. 패 까자. 둘 다 믿음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신앙의 투쟁, 이게 대참사로 끝나죠.
어느 중견교회, 중견교회라 하면 100~150, 200명 정도 모인 교회에서 십여 년 동안 안수집사로서 열심히 했는데 장로 투표 두 번 떨어졌다. 그 교회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안 가죠. 부인 데리고 우리 다른 교회 가자 하죠. 한 번 떨어진 게 아니라 두 번 떨어지면 계속 다니겠습니까? 안 다니죠. 이혼하고 그 교회 다니겠습니까? 안 가죠.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동안 주를 위해서 산 게 아니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그 교회라는 사회가 나한테 유리하다는 조건이 살아있는 한 다닌 거예요. 내가 원한 조건은 뭐냐 하면, 나의 치부가 아직 들키기 전까지. 이걸 세 자로 뭐라 했습니까? 나의 치부가 들키기 전을 뭐라 했습니까, 세 자로? 나의 의. 나의 의죠. 이걸 네 자로 늘이면, 나의 나라. 나의 세상. 이게 계속 유효할 때까지 그 집단에 있을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놀리잖아요. 심지어 옆에 있는 강도 두 사람도, 나중에 구원받게 된 강도도 같이 놀렸어요. 강도도 같이 놀렸다고 되어 있어요. ‘강도가’가 아니고 ‘강도들이’. 같이 십자가 매달려있는데 놀렸어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언약은 없어요. 언약을 위한 언약이에요, 이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데 대전 강의에 이건 안 빠지고 나오는 거예요. 상투적인 주제가 이거에요, 대전 강의에서. 신명기하다보니까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예요, 반복해서.
구원을 위한 언약은 아예 없는 거예요. 나를 죄 사함은 없어요. 죄 사함에 말려든 거죠. 주님의 죄 사함 행위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주의 이름이 용사에요. 아까 출애굽기 15장 봤죠? 하나님이 용사이신데 이제 누가 용사되어야 돼요? 주님이 먼저 “용사는 이러해야 돼. 이것과 싸우는 거야.” 했으면 그다음에 누가 거기에 딸려 들어가야 됩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용사가 되어서 딸려 들어가야 돼요. 용사가 되어서.
그런데 그 이스라엘 신앙의 투쟁은 참사로 끝났습니다. 그들이 투표해서 결정했죠. 우리는 여호와 믿지 않고 우리는 바알 신을 믿는다. 투표하나 마나 850대 1이에요. 엘리야 시대 때. 그러니까 ‘칠천 명은 남아 있잖아요.’하는데 칠천 명 남아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냔 말이죠. 칠천 명 남아있다는 것을 엘리야는 알지도 못했어요. 하나님이 이야기해주니까 알았죠.
그러니까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신앙인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있으면 함께 하겠다는 말은 그만큼 드물다는 거예요. 드문데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서 열매로 맺게 된 신앙인은 그래도 좋아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살아있는 게 중요하고, 내가 신앙생활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싸운다? 주님이 싸우는 거예요.
그럼 나는 어디 속합니까? 육에 속하죠. 우리의 싸움은 나에 속한 게 아니고,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고 누구 싸움이다? 주님께 속한 싸움이다. 영적 전쟁이죠. 성령님이 싸워주잖아요, 성령님이. 성령님이 싸워준다고요. 내 신앙은 애초에 완전 개박살 났고요. 애초에 개박살 났고 내 신앙은 작살났고 주님은 살아남아있습니다, 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게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예가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32장 31절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그다음에 뭡니까? “해가 돋았”다. 야, 이거… 해가 돋았는데 그 뒤에 말이 또 진짜 멋있는 말이에요. “그 환도뼈로 인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절었더라” 절었다.
만약에 이웃이 있다면 “야곱 아저씨, 지난밤에 무슨 일 있었어요? 지난 저녁만 해도 멀쩡했던 다리가 갑자기 오늘 아침에 보니까 절게 되었어요?” 그럼 야곱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해가 떴거든요.” 그럼 이웃사람이 “해야 늘 뜨는 거죠. 해는 늘 뜨는 거예요. 야곱 이상한 사람이네. 해는 늘 떠. 왜 그래? 어제 해, 오늘 해 같은 해야.”
아니요, 같은 해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시간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시간 또는 천사의 시간의 흔적으로서 내가 절었더라. 인간의 시간에 속했던 것이 어제라면 오늘 해가 뜰 때 나는 어디 속합니까? 천사의 시간에 속하죠.
천사의 시간에 속했을 때 내가 절었다는 말은, 천사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올 때는 나처럼 이 야곱의 노선을 따라서, 야곱의 이름이 뭐에요?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노선 따라서 저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죽어야 될 존재로 온다는 사실을, 나중에 오실 메시아의 흔적을 미리 맛보게 해주신 거예요. 그럼 인간의 시간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시간에 속한 사람과 여기서 투쟁이 일어나겠죠. 투쟁.
예수님이 용사가 되었다가 이제는 누가 용사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께 속한 자가 그 투쟁을 해야 될 투쟁자로서 등장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집단을 이스라엘이라 한 거예요. 창세기 32장 1절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거든요.
이 천사 떼가 어디를 통해서 오게 된 거예요? 창세기 28장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꼭대기가 어디에 닿았어요?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죠. 거기서 부대 이동이 있죠, 부대 이동이. 부대 이동이 있는데 하늘의 부대, 엄청나게 많은 부대가 야곱은 자고 있는데 그냥 야곱의 베개 머리맡에 쏟아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좀 과한 표현이지만 하늘나라에서 천사를 주사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주사기에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주사기를 가지고 야곱의 두뇌에다 쭉 주사를 놔줘버린 거예요. 주사를 놔줘서 이제 야곱의 후손들은 마하나임처럼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될 운명으로 지상에 분포되는 거예요. 이제 확산되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싸우는 것. 사람이든 신이든 하여튼 만났다 하면 싸우는 거예요.
신앙인이라 하는 것은 내 신앙 작살나고 그 속에 주님의 신앙이 들어오거든요. 주님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야곱과 싸웠던 천사처럼 싸우시는 거예요. 싸우시는데 이 천사가 야곱한테 못 이겨가지고 다시 새벽에 자기 세계, 자기 시간으로 가버렸잖아요.
자기 시간으로 가버렸는데 거기서 둘이 영영 헤어진 게 아니고 축복해 달라 했단 말이죠. 축복해 달라 했으니까 자기 시간으로 돌아서는 천사의 요소가 야곱에게 그냥 복으로 주어진 겁니다. 복으로 주어지니까 결과적으로 야곱이 받았던 것은 뭐냐 하면 천사가 이 땅에서 활동해야 될 내용에 대해서 야곱이 인수인계 받은 거죠. 그렇죠?
인수인계 받는데 그 모습은 절었더라. 절었다는 것은 예전에 인간 시간 속의 야곱의 힘은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더라. 다시 말해서 쓰레기가 되었더라. 쓰레기. 나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내 신앙도 소용없는 거예요, 내 신앙도.
이스라엘 민족 이전에 이름부터 먼저 짓고 이 이름에 주의 이름이 관여하고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관여하게 되어 있어요. 이름은 기능입니다. 여러분 잘 모르는 노래지만 혹시 이 노래 들어봤습니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하는 노래. 혹시나 들어본 적 없겠지만 혹시나 들어봤습니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인데 앞에 가사에 보면 ‘왔다가 사라지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이름 자체가 바람이 되는 이유가 왔다가 쓱 사라지는 바람이에요. 그대는 왔다가 지나가는 바람. 그래서 이름을 뭐로 지었다? 바람의 삼위일체,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가사에 보면 예배당도 막 나오고 그래요. 가사에 보면 나와요.
바람 바람 바람 (1985, 김범룡)
문밖에는 귀뚜라미 울고 산새들 지저귀는데
내 님은 오시지는 않고 어둠만이 짙어가네
저 멀리에 기타소리 귓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만 휭하니 부네
내 님은 바람이련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어둠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어두운 창밖을 바라
힘없는 내손 잡아주며 님은 곧 오실 것 같아
저 멀리엔 교회 종소리 귓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만 휭하니 부네
내 님은 바람이련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어둠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기능이 이름에 함축되고 기능이 이름에 함축되어 있으니까 이름이 형성되게 되면 뭐가 나오겠어요? 기능이 쏟아지겠죠. 기능이 쏟아지니까 이 이름, 천사의 이름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인수인계 받게 되겠죠.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수인계 받은 집단이 누구냐? 이스라엘이에요.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는 자기 의, 자기 세계 일체 용납 안 되고 야곱에게 찾아왔던 그분의 전쟁기능만 부여받은 단체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아까 출애굽을 통해서 가만 있으라 했죠.
신명기 20장 1-3절에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찌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시느니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 그 전쟁의 방식이 계속해서 줄곧 반복해서 적용되는 이유가 인간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이에요. 출애굽에서.
사람을 건지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이름을 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가시다가 오뎅 파는 포장마차보고 오뎅을 하나 먹듯이 자기 이름을 이 땅의 것으로 찍어서 그냥 잡수시는 거예요. 이 땅의 것을 찍어서. 자기 이름을 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지는 거예요. 이미 자기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으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문제는 여러분들도 예상하듯이 이스라엘 자체가 자신들을 이스라엘로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기만행위가 일어나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조건을 달았거든요. 율법대로 살면 내가 복 준다 했거든요.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기만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분명히 가만 있으라 했잖아요. ‘가만히 있어. 그러면 네가 구원을 본다.’ 했잖아요. 처음 조건에는 애굽에서의 구원이에요. 애굽에서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애굽 모른다 했죠. 이스라엘에게는 가만히 있어 구원을 보라 했는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고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거니까 앞에 ‘가만히 있어라’와 ‘율법을 지키면’이 다르다 이 말이죠.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고 그런 거예요? 왜 이게 달라야 되죠? 같은 거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걸 같은 걸로 봐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430년 후에 율법을 주었다. 율법을 준 것이 어느 선언에 대한 후속 조치라는 거예요. 무슨 선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후속 조치로서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럴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믿음이 아니고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믿음을 다 박살내는 율법이죠. 진짜 이스라엘의 믿음에 뭐가 걸리적거리느냐 하면 주의 말씀과 하신 것을 믿는, 나에게서 나오는 그 믿음이 기만행위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기만행위’로 이미 결정했어요. 이게 기만행위로 되어버린 거예요.
‘믿습니다’ 이 행위, 예수를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됩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기로 한 거예요. 하나 예를 들께요. 물 위를 걸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가 믿음입니까, 물에 빠졌을 때가 믿음입니까? 보통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 위를 걸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능력으로 계속 일관되게 주셔야지, 왜 중간에 능력을 안 주십니까?’
베드로가 주님만 바라보고 오다가 중간에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풍랑이 이는데. 조용하면 걸을 수 있어요. 그런데 풍랑이 이는데도 걷는다? 이거는 있을 수 없어.’하는 순간 빠져버렸어요.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건 있을 수 없어, 하니까 빠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 우리가 나의 기만행위의 끝이 어디까진가를 미처 모르고 있어요. 구원을 시켜놓고 율법을 주신 이유는 끝까지 율법이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돌아다녀가지고 우리 쪽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 있잖아요, 그걸 율법이 달달 다 긁어내요. 우리 쪽에서 의미 있는 것.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가 멀쩡하기를 바라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는 야곱은 해가 돋으매 어떻게 되었어요? 다리를 절었어요. 절었다는 말은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뽑아낼 자기 능력이 없어요. 자기를 사수하거나 방어할 수 있는 어떤 일체의 것이 자기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값없이 주는 사랑 아닙니까? 값없이 주는 거잖아요. 마태복음 26장 26절, 참 외우기도 쉬워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 몸을 받으라.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주님의 지시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 말이에요. 떡을 주면서 내 몸을 받으라.
주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주님 자기의 과제를 발표하는 거예요. 무슨 수로 주의 몸을 받습니까? 주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어요? 먹고 동작을 어떻게 해야 돼요? 카스테라를 주의 몸이라고 생각해야 됩니까? 아니면 천주교 성당에서 친절하게 비스켓으로 만들어주게 되면 천주교의 능력으로 그게 갑자기 몸이 되는 거예요? 떡이 갑자기 예수님의 몸이 된다. 갑자기 체(體)가 바뀐다. body가 바뀐다. 이걸 화체설(실체변화: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바뀌는 일 또는 그러한 믿음)이라 해요.
지금 마귀가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자꾸 떨어뜨리는 거예요, 육적으로. 주님이 떨어뜨린 육은 무능한 정도가 아니고 더 나아가면 내가 하나님을 기만한 자다. 맨날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 당신이 메시아 맞아? 과연 당신이 믿을 만해? 내 사업이 잘되고 자식이 잘되면 그때 살아계시는구나, 그때 믿어줄 용의가 있다.’ 맨날 이런 식이에요.
집구석 다 망하고 집 내놓고 땅 내놔도 팔리지 않을 때, 그럼 뭡니까? 대책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집사님은 집 내놓자마자 제값보다 더 많이 받았을 때, 어느 쪽이 주님의 살아계심일까요? 어느 쪽이 주님이 살아계실까요?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요. 어느 쪽이 기만행위에 속할까요? 어느 쪽이.
주님께서 용사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용사되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준비한, 육적으로 낮아짐의 극치를 보여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 궤(상자). 상자입니다, 상자. 궤. 하나님 자체의 모순을 하나님이 덮어주는 상자에요. 자체 모순을. 박살난 하나님의 면상을 박살난 하나님 자신의 피로 덮어주는 상자가 언약궤거든요.
상자인데 이게 무서운 상자에요.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언약’이 붙어있어요, 언약이. 언약이 붙어있으면서 이것은 그 누구도 출입불가에요. 출입불가. 하나님만이 이 궤에 대해서 다룰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만이 이 궤에 대해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보이고 언약궤가 보인다 했어요. 언약궤가 그 위에까지 올라갔어요. 언약궤가 보이면서, 언약궤가 위에 올라가면서 그 밑인 이 땅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마무리 전쟁에 돌입하게 돼요. 이 세상 전체가 마무리 전쟁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땅에 속한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다 파괴, 폭파의 대상이에요. 심지어 인간까지 누구든 다 파괴의 대상이에요. 주께서는 이미 건질 분을 건졌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있는 수직적인 이 구조를 구약에서는 평면구조로 바꿔요. 신약에서 위-아래 수직적인 구조를, 구약에서는 특정 장소, 특별한 장소와 그 외의 장소로 구분지어서 그 둘 사이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데 특별한 장소는 실은 없어요. 왜냐하면 너무 놀려서. 모든 인간이 너무 놀려버렸어요. 특히 성전 있고 언약궤 있던 이스라엘이 누구한테 파괴됩니까? 바벨론, 앗수르에게 파괴되죠. 이방민족에게 파괴되잖아요. 그러니까 주변나라에서 마구마구 배꼽을 잡고 막 웃는 거예요. 꼴좋다고. 다른 민족의 신이 이긴 게 아니고 저 민족은 어떻게 된 게 여호와에 의해서 여호와가 작살나고 박살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를 박살내는 것하고 똑같아요. 꼴좋다. 물론 그 사람이 여호와를 믿지도 않지만. 자본주의를 믿지만, 박살난 거예요. 전에 강의시간에 했는데요. 전광훈 목사가 출구조사 결과발표 생방송하면서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뒤집는가 보세요. 5, 4, 3, 2, 1.’ 조용-. 이장림이 ‘자, 흰옷 다 입으세요.’ 그때 흰옷 품귀현상이 있었어요. 흰옷입고 올라간다고. 왜? 말씀대로 해야 된다고. 10월 28일에. 잊지도 않아요. 흰옷입고 준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장림이 10년 뒤에 탈 적금을 부어놓은 게 있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본인도 본인을 기만한 거예요. 안 믿기 때문에 믿습니다 한 거예요. 안 믿기 때문에. 내가 안 믿는다는 것이 들킬까 싶어서 힘주어 이 연사 외칩니다! 믿습니다! 안 믿기 때문에. 안 믿기 때문에 믿씁니까 믿씁니까. 순복음 교회에서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안 믿기 때문에.
사무엘하 6장에 언약궤가 들어옵니다. 불가마 들어온다 했죠, 전에 울산 강의에서. 사무엘하 6장을 얼마 전에 설명한 것 같아요. 6장에서 다윗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춤추는 데에 걸리적거린다 해서 뭘 벗었어요? 그냥 옷이 아니고 왕의 옷을 벗었어요.
후에 화목제 제사를 드리고(17절) 그전에 춤을 췄죠. 이게 뭡니까? 뭐가 없어진 거예요? 내 신앙의 투쟁이 언약궤 앞에서는 걸리적거리는 거예요. 내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요소인 것을 알죠. 믿을까 말까하는 이런 자세에서 차라리 창세기 3장에 벌거벗은 그때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때의 모습이 바로 뭐와 같이 되느냐 하면, 신약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된다, 겸손해라 이러면 우리가 받아들이겠는데, 우리의 기만행위가 용납되는데요, “결단코” 결단코 어디를 못 가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을 못가요. 아니, 천국을 못 간다니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거는 마치 요한복음 3장에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네가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결국은. 실컷 50년, 60년 성경공부하고 복음공부 해왔는데 마태복음 18장 이 대목에 와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그럼 지금까지 한 게 헛수고죠.
그때는 종류가 딱 두 가지로 나뉘죠. ‘그런 말한 예수님을 내가 엎어치기하자.’ 가룟 유다 쪽. 그다음 다른 한쪽은 ‘그래, 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나는 내 일을 해야지. 해가 돋는지 안 돋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일을 해야지. 다시 고기 잡으러 가자.’ 뭐요? 끝났어. 예수님 돌아가시는 순간, 모든 게임, 우리의 모든 신앙 파티는 끝났어요. 십자가 마을 수련회도 끝났어요. 다 끝났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
끝이 오지 아니하면 성령이 안 옵니다. 끝이 오지 않으면 성령이 안 와요. 끝났음을 아는 것은 내가 바로 주님께 걸리적거리는 존재라는 사실이 자타에 의해 이미 공인된 상태에요. 자타에 의해서. 싸움이고 뭐고 자기 생활을 꾸려야지, 무슨 싸움을 하는데요. 내가 중요하지, 뭐.
고기 잡으러 가자, 목표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자, 기대고 고대죠. 고기가 많이 잡혀야 될 텐데, 걱정했죠. 주께서 다시 찾아오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에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고기가 잡혔습니까, 안 잡혔습니까? 안 잡혔는데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해서 내리니까 잡혔죠.
베드로가 주님과 빠이빠이하고… 뭐 주님이 계셔야죠, 하늘로 가버렸는데요. 로켓 건전지가 밧데리 힘으로 하늘로 가버렸잖아요. 주님이 없단 말이죠. 남아있는 건 뭡니까? 자기들이 있잖아요. 자기들 있음. 있는 거라도 추리고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고기 잡으러 간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고기를 잡게 해주죠. 고기 숫자도 나와 있는데 153마리 잡았어요.
똑똑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처음에 고기 잡을 때 오신 그 주님의 연속성을 베드로가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끊어졌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시간 안에서는 베드로가 이미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이에요. 끝까지 사랑한다 했어, 안했어? 했지. 내가 찾아왔잖아.
주님이 찾아온 걸 성령이 찾아왔다 해요. 오순절에 성령이 찾아왔어요. 오순절 날. ‘날(日)’이란 자체는 인간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의 접촉점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단회성이라 하거든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찾아오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 임한 것을 통해서 성령 자체가 매개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임한 사건을 통해서 성령 받을 자와 성령을 못 받을 자가 말씀을 통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여기서 이런 공식이 성립돼요.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어떤 인간도 모르는 말이다.’ 이 원칙이 성립됨을 알아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은 인간이 모른다. 천국, 의, 율법, 하나님, 여호와, 예수, 메시아 이 개념에 대해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전부다 엉터리다. 모조리 다 엉터리에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아느냐? ‘엉터리다’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아는 거죠. 내 신앙에 참사가 일어나는 기만행위에 불과한 것을 들추어내는 거예요.
인간이 나쁜 짓해서 죄인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나쁜 짓해서 죄인 되는 게 아니고, 죄라는 주님의 개념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서 그 개념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것이 피조물로 만들어진 거예요.
굳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시편 24편 8절, 주님 하는 일의 연속성을 위해 그렇습니다. 숫자로서는 잘 모르지만 들어보면 아, 이 이야기구나 알 수 있으실 거예요.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그러면 이 고백, 이 말씀 속에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은 이미 들어와 있잖아요. 들어와 있으니까 아는 거예요. 말씀 속에 들어와 있을 때 주님은 어떤 분이냐? 주님은 전쟁하시는 분이고 승리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겼습니다. 너를 이기고 나를 이겼습니다. 주님이 이겼습니다.
그럴 때 아까 출애굽기 14장, 가만히 있어. 너희 구원을 보리라.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애굽에 속한 사람이고 나를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충실하게 활용해주셨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바로 성도죠. 이게 성도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오늘날 주님은 누구하고 싸웁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거든요. 여러분 잘 아는 말씀, 베드로전서 5장 8절이에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대는 악마. 지금도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든다.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덤벼든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험 받은 광야도 마찬가지고 이 광야가 확장된 오늘날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누가 활개 칩니까? 여전히 누가 활개 쳐요? 악마가 활개 치죠. 지금껏 강의한 것에 의하면 악마의 활동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주님의 일을 뭐로 바꾸느냐? 악마는 나의 일로 바꿔요. 나의 일로.
‘열심히 해봐. 열심히 믿어봐. 왜 자꾸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 하느냐? 열심히 하면 되게 되어있어. 열심히 예수님을 믿어. 그럼 구원받을 수 있어.’ 이게 지금 누구 보이스에요? 누구 음성이에요? 누구 이야기에요? 이게 악마이야기잖아요.
이게 왜 필요하냐하면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요. 수련회 마치고 누구하고 이야기하든지 카페에서 이야기할 때 재민데 한번 들어보세요. 주체가 누군지를 한번 들어보세요. 요령 있게 요렇게 자기를 낮추면서 이야기하면 상대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문제 해결 될 수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오는지, 그 이야기를 한번 쭉 들어보란 말이죠.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자, 수련회 끝났습니다. 카페에 모였습니다. 광주까지 가기 전에 심심해서 휴게소 모여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수련회에서 목사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는데 어린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낮춰야 됩니다. 이게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묻습니다. 관심사가 율법에 있어요.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 사람이 대답해요.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어요. 이게 성경말씀이죠.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 성경말씀 인용 안 했습니까? 인용했잖아요.
마귀가 설친다니까요. 마귀가 살아 있어서 설쳐요. 설쳐서 말씀을 어느 수준까지 낮춥니까? 네가 해라, 네가! 네가 하라는 말은, 네가 한 것으로 인한 결과로 구원은 누가 받는다? 남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네가 해서 남 주는 게 아니고 네가 하게 되면 네가 구원받는다. 너 구원받고 싶잖아.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이 방법을 이야기해줬잖아. 말씀 줬잖아.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가죠. 그럼 뭐하면 돼요? ‘우리가 어린아이같이 되면 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마귀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럼 카페에서 무슨 이야기할까요? 말씀이야기 했죠. 수련회 했으니까. 거기다 뭐만 붙이면 됩니까? 주체를 뭐라고 하면 돼요? ‘마귀가 말하기를.’ 수련회 다 이야기하고 “마귀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대.’라고 마귀가 이야기했어.”라고 저쪽에서 이야기하면 이쪽에서 “내가 마귀한테 받은 거 이야기해볼까? 이렇게 하면 마귀래.” 이렇게 이야기하면 두 시간 반 갑니다. 카페 주인이 “빨리 안 나가나? 커피 한잔 먹으면서.” “알았어요. 나갑니다.” 너무 시끄럽다 하면 그때 나가면 돼요.
살아가면서 인간들은 육신이 있잖아요. 영의 전쟁은 육 없이는 되지를 않았어요. 야곱도 육이 있어서 천사하고 붙었잖아요. 그 싸움을 우리는 하는 거예요, 그 싸움을. 그 싸움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보고 그다음부터 나는 이런 일을 하겠다는 자체가 이미 신앙이 파탄 난 나에 대해서 계속 마귀가 희망과 격려를 주고 구원에 대한 약속을 말씀을 통해 제공하더란 말이에요, 마귀가. 계속 내 문제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걸 들어놓고 그다음에 정답은 뭡니까? 이런 마귀를 누가 보냈느냐? 아, 우는 사자같이 설치게 한다는 사실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주님만 다 이루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마귀를 아직도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이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7절,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야곱만 절뚝절뚝하는 줄 아느냐? 나도 마이 묵었다. 나도 많이 맞았다. 나도 내가 뭐 해보려하다가 많이 얻어터졌다.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직 자랑은 뭐냐? 주께서는 일체 우리 자랑을 못하게 하고 주님만 자랑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게 영적 전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이 있는 한 우리 속에서 기만행위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무 짐이 없는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께서 마귀를 통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 주님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주의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