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증상 사도행전 4:22 250617
강남-사도행전 4장 22절 (예수님의 증상) 250617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4장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의 내용은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일이 일어났어요. 30절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 대목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40여 세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이 예수 이름으로 병이 낫는다는 것이 이것을 표적이라고 되어있는데. 기적입니다. 표적 또는 기적인데 성경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은 진리 없이 또는 진리를 몰라도 잘만 살더라 하는 점이에요. 물론 그들은 어떤 기적 같은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자기의 사는 형편이나 몸이 낫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그게 진리냐 하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말씀의 현실화와 관련되어있어요. manifest.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것.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말씀의 현실화, 말씀이 실제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게 진리에요. 진리라는 것은 말씀의 현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누가 끼어들면 안되느냐 하면은 사람들 또는 나, 나는 이 진리를 내 것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어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진리는 없습니다. 내가 소멸된 상태에서 말씀의 현실 속에 자기가 손실되어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이게 지금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현실은 숫자화 할 수 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현실이잖아요. 현실인데 나타나기는 뭡니까? 숫자로 나타나죠. 숫자로. 좁은 길로 가거라. 거기에 영생이 있다. 마태복음 7장 13,14. 숫자로 대응이 가능하다. 모든 일어나는 현실은 성경말씀과 관련지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현실은 숫자화가 가능하다. 이 말은 성경 말씀에 있는 숫자화 된 성경 말씀, 숫자로 집대성 되어있는 것을 확 이렇게 퍼트려 버리면 바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게 현실이 돼요.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보잉사에서 이번에 비행기를 만들었다. 비행기 기종 숫자를 뭐로 할까? 828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는 비행기였다. 이 비행기는 828에 예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828로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겠죠. 현실이라는 것은 전부 다 숫자로 대응이 되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해서 괴델이라는 수학자가 그걸 했는데 나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는 이 문장을 이 사람은 나는 72 배가 36 고프다 8, 이걸로 바꾸자는 거예요. 바꾸면 72,36,8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배가 고프다. 모든 것을 숫자로 이렇게 환원이 가능한 거예요. 환원이 가능했을 때 이 수를 분석함으로 말미암아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분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괴델이라는 수학자는 그런 식으로 시도를 했습니다. 시도를 해서 결국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정당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숫자로서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불완정성 원리라는 것을 주장했거든요.
성경은 이렇게 숫자가 있고, 사실 숫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나중에 사람들이 필요해서 이렇게 만들었겠죠. 어쨌든 숫자화된 것을 펼쳐버리면 이게 바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기적은 없어요. 현실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기적은 없고 표적이 되려면 바로 이 현실을 방해하는 인간이 주장하는 또 다른 현실이 나타났을 때 이건 하나의 말씀의 세계는 표적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중에서 중요한 것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적은 없다. 기적은 없어요. 새삼스레 기적은 없습니다. 다만 성도의 활동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 증상, 정황 또는 징후 또는 징조 또는 전조현상. 이걸 소리로 한다면 엥~~~~ 이런 것. 이걸 네 자로 표현하면 공습경보. 전 국민은 방공포로 피신하세요. 엥~~~~. 모기 소리 아닙니다. 공습경보 경고 소리예요.
말씀이 현실이 이 세상에서 경고가 되냐 하면은 인간들이 말씀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 없어도 잘만 살고 진리에 관심 없어도 밥 잘 먹더라. 연애도 잘하고 자기들끼리 나는 솔로 해가지고 결혼도 하고 진리와 아무 상관도 없이 결혼하고 있어요. 특히 후진국에서 이런 거 많이 하지요. 네덜란드에서 많이 해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내가 저 남자와 결혼했다.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에 안 나오지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진리에 속합니까? 진리에 속하지 않습니까? 진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관련이 없고 오히려 말씀에 대해서 ‘나’라는 존재가 훼방하고 방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말씀에 방해하든 훼방하든 하나님이 가만 놔두면 되는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가만 안 놔두기로 작심을 하셨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전면적인 불사름’. 모든 것을 다 불살라버려요. 너 언제 결혼했어? 지난 12월에 결혼했습니다. 불살라버려. 너 사법고시 언제 합격했어? 이번에 합격했습니다. 그래? 불살라버리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은 불사름의 예비 된 세계예요. 왜? 방해하니까. 진리에 대해서 방해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불사름을 위해서 하는 작업이 뭐냐 하면은 제습기 작업. 제습기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그냥 축축한 날 제습기를 그냥 놔두면 돼요. 놔두고 나중에 한 2시간 뒤에 제습기 뚜껑 열고 안에 물 찬 거 보면 거기 제습기에 누가 물 부었어요? 아무도 부은 적 없어요. 가만 존재하기만 했는데 안에 물이 가득 차 있어요. 특히 장마철에. 물 낑낑 들고 화장실에 물 붓고 다시 빈 통 놔두면 어떻게 돼요? 또 물 꽉 차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두는 이유가 각자가 죄를 끌어모으는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 약속된 대로 그냥 산다는 것은 제습기에 물 차듯이 죄가 차는 기능을 하게 하십니다. 인간들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걸 찾아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까지 전부 다 말씀으로 대응하는 거예요. 대응이라는 것은 일어난 모든 현상은 성경 말씀과 이렇게 다 연결이 되게 되어있어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성경 말씀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18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20절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그 분이 예정된 채로 오는 거예요. 예정된 채로 오게 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말씀 또는 진리에 아무 관심도 없고 진리도 모르는 채 잘만 살아가는 그들 속에 누가 왔느냐 하면은 예정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의 결정체 되시는 말씀의 덩어리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이죠. 오셨으니까 그 둘 사이에 이제는 극단적인 대비, 대립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병에 걸려야 치료법이 나오는 겁니다. 병에 걸려야. 성도가 예수님이 아니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의 결정체로 이뤘잖아요. 그 말씀의 결정체가 뭐냐 하면은 죄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잖아요. 죄에 대해서 희생하는 것, 그러니까 성도는 어디에 해당 되느냐 하면은 병에 걸려야 치료법을 아는 것처럼 죄 때문에 주님이 희생되었다는 것과 결부 되어서 병에 걸린 자로서 주님과 관련 짓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면서 희생제물이 되었으니까 성도야 말할 것도 없이 희생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516. 숫자로 대응되었지요. 로마서 15장 16절에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공급책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제물로 바치는데 그 사람은 제물이 되었다고 해서 죄 사함 받는 것은 아니고 왜냐하면 병이 걸린 자로서 참여되고 있는 거예요. 병에 걸린 자로서. 병 걸리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말씀을 보면 병 걸리죠. 이 세상에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거든요. 진리에 관심도 없고 말씀에 관심도 없어요. 잘만 살지요. 그런데 성도한테는 딱 걸렸어요. 말씀이 그 사람 내부에 들어오니까 ‘아! 나 환자다. 나는 환자다. 앗! 환자닷! 앗! 나는 죄인이다.’ 그때부터 말씀이 하나 들어왔는데 성경 전체가 다 들어온 게 되어버려요. 이제는 주님의 말씀의 현실을 방해자가 아니라 초대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의 세계에. 병든 자로 초대받은 거예요. 제물로서.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표적이 되는 거죠. 표적. 하나님의 예수님이 활동하는 징후가 되고 징조가 되는 겁니다. 환자가 되었으니까 내가 심판 받아 마땅하다 당연하다가 되요. 그러면 내 인생이 길다 합시다. 젊은 나와 늙은 나, 나 전체가 인생이 80이 되고 90이 되고 100세가 된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 50대에 자기가 말씀에 의하면 내가 환자고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0살 때 1살 때 2살 때 소급해서 보게 되면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겁니다.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 이 숫자가 고린도후서 5장 15-17절. “이미 죽었나니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러면 이미 죽어 있으니까 여기 소급해서 10-11살 12살 사이에 시간의 의미가 뭐냐? 이 의미는 한꺼번에 시작=마감 또는 끝이 됩니다. 아무리 70, 90 살아도 항상 끝났고 끝난 것을 주님의 말씀 때문에 또 새로이 개시하고 시작하는 것, 이게 늘 같이 반복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해왔는데 이것을 숫자로 하면 고린도후서 53. “나는 하나님의 편지요” 이 자체가 하나님의 편지가 돼요.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되면서 52살에는 신앙생활 잘 해야지 이런 게 없어요. 없고 항상 소급해서 보면 52살 되도 50살에 환자였고 51살에도 환자였고 앞으로도 죽을 때도 환자였다. 그래도 괜찮다. 왜? 나는 하나의 주님의 말씀 현실의 징후고 징조이기 때문에. 공습경보용 하나의 징후, 징조가 돼요.
엥~~~. 이 세상은 불로 불사름을 당합니다 엥~~~~ 하는 징후 징조로서 주님의 편지로서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4장 그냥 읽어버리면 이게 단락이 끊어져서 연결이 잘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연결이 다 되어버려요. 어떤 경우라도 징후, 사도행전 1절도 2절도 3절도 끝까지 징후에서 시작해서 징후로 끝나버리니까. 나는 어떻게 되는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징조, 징후라고 하는 것은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예를 들면 감기 들면 콧물 나잖아요. 콧물 날 때 감기 걸린 사람은 하나님 어떻게 콧물 안 나게 할 수 없습니까? 이 질문은 해요. 그런데 본인이 감기 걸린 자가 아니고 콧물이라면 흘려야죠. 왜? 콧물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의 징후니까. 너는 어떤 사람의 코에 붙어서 죽죽 흘러내려라. 흘러내려야 돼. 너는 주님의 부속품이니까. 너는 따로 내 몸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왜?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자를 주님의 몸의 징후로서 살려냈잖아요. 죽은 자에서 도로 받는다 할 때에 죽은 자에서 도로 받는다는 것은 아까 1516, 주님께서는 죽었던 나를 도로 받는 게 아니고 이제 도로 받을 때는 뭘로 받느냐 하면은 주님께 드릴 제물로서만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물로서. 독립적인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게 없어요. 제물이에요 제물. 제물로서 주님의 징후가 되고 징조가 될 뿐이에요. 다른 것은 없어요.
성경 사도행전 4장을 보든 5장을 보든 3장을 보든 모든 것이 우리보다 앞선 것은 뭐냐 하면은 말씀이 앞섭니다. 그 다음부터 성경에서 막히는 게 없네요. 막힘이 없어요. 그동안 성경이 왜 막혔느냐면요 이것대로 지키면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맨날 질문을 나는 어떻게 됩니까 질문을 하니까 성경이 딱딱 막히니까 나 성경 안 볼래. 성경 재미 하나도 없어. 이대로 했는데도 안 되면 어떡하라는 건데. 자기 걱정하고 자기 생각하고 있어요. 주님의 징조여야 되는데 내가 구원받는 징조를 내가 만들어가려고 하니까 터무니 없는 말씀과 관련 없이 지금 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엉뚱한 시나리오 쓰고 있어요. 다시 중요한 것 말씀드리면 병에 걸려야 치료법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에서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이것 치료법 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냐? 임상실험용 흰쥐가 되는 겁니다. 흰쥐가 되는데 흰쥐는 세리든 창기든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어떻게 쓰여져서 주님의 일하심의 징후가 되느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 세상 현실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말씀에서 현실이 나와요. 현실은 말씀에서 대응이 가능해요. 이 상황은 성경 말씀과 연관되어있다. 이 사태는 성경 말씀 이 구절과 연관되어있다. 그렇게 이어져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할 것은 간단해요. 이렇게 병이 나은 것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베드로 요한 인생 편하게 되었어요. 할 게 없어요. 이 세상은 전부 다 말씀의 세계인데 방해꾼들이 있잖아요. 진리에 관심도 없고 진리를 몰라도 잠만 잘 오더라. 잘만 살더라. 이게 방해꾼인거에요. 이것들이 기적을 원하는데 이 기적은 자기에 의한 기적이지 현실을 알기 위한 기적은 아니에요. 본인이 현실의 전부니까.
그래서 성경 사도행전 3장 4장 5장 전체를 아울러서 보면 말씀을 뒤집어씌우지 않으면 이 시공간에서 살 수 없다. 우리가 불로 태움을 안 당한 것은 말씀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안 타는 거예요. 말씀을 안 뒤집어쓰면 시공간에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성도끼리 만남은 뭘 뒤집어써야 합니까? 말씀을 뒤집어써야지요. 옛날에 아이들 오줌 싸면 뭘 뒤집어씁니까? 키 뒤집어쓰잖아요. 성도가 만나는 것은 말씀을 뒤집어쓰면서 나 이번에 직장에서 이런 일 있었는데 성경 말씀과 이렇게 관련되어 있더라. 말씀을 뒤집어쓴다는 말은 이 시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징조로서 살아가는 그 표를 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이 성경의 말씀은 본인이 이룬 게 아니에요. 자기는 할 게 없어요. 참 사는 게 편해요. 당신은 왜 남의 시계를 왜 훔쳤습니까? 말씀에 의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어려워. 방금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은 기존 세계는 나름 질서가 있다. 나름 질서가 있는데 성도는 기존 질서에 따를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느냐? 성도는 다른 언어를 따르죠. 자기의 몸을 통해 구현되는 말씀이라는 언어.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33, 고린도후서 33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편지가 돼요. 편지라는 것은 늘 처음이고 늘 마지막이고 내일되면 또 늘 처음이고 늘 마지막이고. 그래서 성도 자체가 인간 세계에서 봐서는 표적이 되고 그리고 또 인간 질서에서 보면 존재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인물의 출몰. 이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 인간에게 굉장히 기이하잖아요. 그것 못지 않게 기이한 것이 이 땅에 성도가 출현되었다는 것이 예수님 출현한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기적적이고 놀라운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성령으로 태어났잖아요. 성도가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로 성령이 없이는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부딪혀서 육으로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이게 육의 세계, 닫힌 세계인데 이게 바닥이고 천장이다. 육에서 태어난 인간이 아무리 커봐야 팅팅하고 튕겨서 떨어지게 되어있죠. 육에서 난 것은 육에서 떨어져가지고 또 시도하지요. 두더지 굴 속에 혼자 갇혀가지고 혼자 쿵탁쿵탁. 육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날 수가 없다고요. 이게 무슨 탑이냐? 바벨탑이에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하자 할 때 영 쪽에서 육을 공격합니다.
이제부터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1.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이다 이거하고 2. 내 병이 낫는 것이 기적이다. 어느 것이 기적이냐 하는 겁니다. 2번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지요. 앉은뱅이의 병을 낫게 하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40세 쯤 된 사람을 낫게 했지요. 30절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우리 생각은 예수 믿으면 기적인데 이게 왜 필요하느냐? 내 몸이 낫는 것이 예수 믿는 것으로 충분한데 내 병이 낫는 기적이 왜 따로이 굳이 또 추가해서 필요하느냐 하는 그 점이 여러분들이 궁금해야 돼요. 그런 의문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서 내 병이 낫는다고 했잖아요. 내 병이 아니고 보편적인 병이에요. 보편적 병. 모든 인간치고 병 없는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다 죽으니까. 육신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망가졌다는 이야기에요. 특징들이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 각색 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모든 인간은 병든 채 태어납니다. 병든 채 태어나요. 모든 인간은. 병든 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기적과 내 병이 낫는 기적과 여기에 뭔가 연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연관성은 날 위한 구원은 없다는 연관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징조, 징후지 내 구원받았음을 알리는 징후는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 되어야 되지 내 구원받았다는 증인은 그런 것은 허락한 적도 없고 주님께서 인정하지도 않는 증인입니다. 예수님 증인 되어야 될 텐데 나 이렇게 잘 믿어서 병 낫고 구원받았다 자기 증인되는 것은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어요. 뭔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달라져야 하는데 나 중심으로 있다가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달라져야 돼요. 이게 숫자 525에요. 고린도후서 525.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날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 살려함이라” 라고 바뀌어져야 되고 고린도후서 410에 보면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이제 나는 이미 죽어있고” 나에게 나타나는 징조, 주님이 내 몸에 살아있다는 징조만 나타나면 ok이다. 내 할 일은 끝났다. 이게 안 쉬워요? 이 이야기가 억수로 쉬운데. 제가 복잡하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왜 두 번째가 끼어들어야 하는 게 그걸 설명하는 게 이제부터 좀 복잡해요. 복잡하지만 여러분들 다 예수님의 징조니까 다 이해될 거예요.
창세기 6장에 보면 세상 엉망이었습니다. 세상이 엉망이었다. 천사와 사람의 딸이 혼인해서 거인이 출생했어요. 거인이 출몰했다. 세상 엉망이었다 같은 말로 비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자들이 출몰했다. 이런 이야기가 노아 홍수의 정당성을 말해줍니다. 노아 홍수의 정당성. 심판의 정당성이에요. 그러면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해서 이 세상에 불로 불사름을 당하려면 반드시 이 세상이 어떤 세상 돼야 돼요? 물로 휩쓸어 갈 때도 이렇게 엉망이었고 개판이었다면 오늘날 이 시대는 불로 불사름 직전이기 때문에 이 세상 형편이 어떻게 됩니까? 엉망이어야 돼요.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어야 돼요. 그래야 주의 불 심판이 정당화 되잖아요. 그 당시의 노아 홍수 이전에 에녹이 있었지요. 선지자. 그 다음에 므두셀라 있었지요. 그 다음에 노아 있었잖아요. 이들의 외침은 힘에 부쳤어요. 이들이 외친다고 회개했습니까? 노아 홍수에 교인 수가 몇 명이었어요? 방주에 들어간 사람 몇 명이었습니까? 8명이잖아요. 말이 8명이지 달랑 자기들 식구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가 먹혀들지를 않았다 이 말이죠.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전도 많이 못했다고 노아한테 섭섭해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은 엉망으로 만든 의도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병든 모습이고 거기에 적합한 처리고 대우였다 그걸 알리고 싶은 거예요. 아무도 없어야 돼요. 전제를 그래도 한 14만4천명 있어야 돼 그런 전제를 하지 마세요. 아무도 없어요. 실제로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 없습니다. 구원 될 사람은 예수님의 징후지요. 징조지 예수님의 전조증상 예수님의 징후로서 구원되는 것이지 본인이 잘나서 구원되는 사람 여태껏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주님의 콧물. 주님을 증거하는 콧물로서 있는 거예요. 머리아픔 이런 거 있잖아요. 나를 따로 독자적으로 나 이런 인간인데 구원받았다 이거는 여태껏 주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24절에 창세기 2장17절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에 일관된 조치이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안 심었으면 우리 인간에게 불행한 일이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날 거예요. 이 생각 자체가 바로 병든 생각이에요. 그러면 병들지 않는 생각은 어떤 생각인가? 마태복음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여요. 보이는 것은 표면으로 늘어난 그러한 정사. 징조. 이게 보이지 그 누룩은 안 보여요. 보이지 않는 것이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합니다. 이게 바로 천국이 진행되고 성립되는 모양새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단독적 독자적인 자기의 존재를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냥 섞여있는 거예요. 천국에 섞여있는 존재이지 각자 하는 일, 어떤 일을 하든 그 일 속에서 천국을 드러내는 하나의 누룩, 이스트 같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따로 어떻게 실적 같은 것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되겠다 하는 실적 같은 것 하지 마세요. 어쨌든 간에 창세기에서 거인이 출몰했다는 것은 거인은 뭐냐? 신체성, 신체성은 육이거든요. 비정상적인 신체성이 여기 등장했습니다. 에녹과 노아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유다서에 보면 심판이 온다고 분명히 외쳤어요. 안 외친 게 아니에요. 외쳤는데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외친 노아만 구원받았어요. 그럼 에녹은 홍수 때 왜 구원 못 받았는가. 죽었어요. 딱 그 해 죽었어요. 아주 타이밍 멋져요. 마치 릴레이 할 때 바톤을 넘기는 그 선수는 안 뛰어도 돼요. 넘기고 자기는 쉬면 돼요. 천국 가서 쉬면 되요. 그 다음 바톤 또 넘겨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노아홍수 오기 전에 에녹 때에도 에녹의 말 자체 속에 뭐가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미 심판성이 담겨있는 겁니다. 심판성이.
인간 세계는 하나님의 현실을 방해하고 있다 라는 내용의 말씀이 그 시대에 전파된 거예요. 진리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고 너희들 살고 있는 것은 지옥에 살고 있다고 알리는 현상들이죠. 여러분들 만약에 딸이 있다면 손녀나 손자, 이번에 새 학기 되가지고 너는 몇 반이야? 4학년 2반이에요. 4학년 2반이라는 지옥에 살게 되었구나. 그러면 징조, 징후 오늘 본문에 의하면 표적, 이것은 이 자체가 인간의 단독적인 사적인 개별적인 요소를 다 뺀다는 말은 뭐냐? 장, 필드, 어떤 장을 형성하는 거예요. 대규모 장을 형성해요. 촘촘한 장. 하나의 현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공격하는 거예요. 방주 안에 있는 공간이 확산되어버리면 그게 바로 언약의 공간으로서 노아 홍수 이후의 그 세계를 통제하고 지배하게 되는 겁니다. 공간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은 어디에 함몰됩니까? 이 공간에 함몰 돼요.
그래서 신약에서의 구원은 뭐냐?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걸 예수님께서 그물을 확 던지는데 촘촘한 그물, 그 그물이 뭐냐 하면은 성령 안이에요. 성령이라는 그물을 확 던져버리면 여기에 포획된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의 공간, 인간들 보기에 새롭지만 원래 있었던 공간이지만 인간들은 그 공간을 모르니까 성령이라는 새로운 공간,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공간 십자가 다 이루었다 라는 공간에 포함이 됨으로서 그들은 구원이 되고 이들의 개별적인 신체성은 하나님의 징조와 징후가 되는 겁니다. 징조와 징후가 된다는 말은 개인적은 신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성도도 신체가 있잖아요. 이 신체를 통해서 주께서 살아계신 징조를 보여주는데 이게 병 나음으로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사람이 병 낫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순간이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주님께서 징후를 신체에 의한 변화에 대해서 하나의 병 나음이 개인적인 건강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의 말씀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로서 병이 나은 거예요. 물어보겠습니다. 암 걸려가지고 나을렵니까? 아예 암 안 걸리겠어요? 이건 물어보나 마나죠. 백내장 수술 하실렵니까? 백내장 안 걸리는 게 낫겠습니까? 안 걸리는 게 낫지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나이 들면 병들게 마련이에요. 이미 우리 인간은 병이 들음으로써 치료법이 우리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노아 홍수 전에 몽땅 다 망했잖아요.
그러면 아이고 목사님 요즘도 그만큼 세상이 엉망이겠습니까 시비조로 할 사람 있을 거예요. 그럴 때는 821. 로마서 821.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0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썩어짐의 종노릇한다는 것은 썩었다는 것의 주인 역할이고 거기에 썩어가는 내 신체는 그 주인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썩는다는 것은 이 지배적 구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모든 인간들 피조물도 마찬가지고. 20절에 허무한데 굴복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굴복을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허무해요. 다 소멸해요. 버티고 버티죠. 병원가고 의료보험 됩니까? 실비보험 됩니까? 백날 버텨봐야 소용없어요. 결국은 모든 게 허무하게 허물어져요.
이게 왜 그런가 이미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져있고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주께서 불을 하든지 물을 하든지 너 군소리하지 마라. 너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자 이러한 마지막을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책을 내세웠는지 그거는 10분 뒤에 합시다.
강남-사도행전 4장 22절 (예수님의 증상) 250617b-이근호 목사
아이슈비츠 수용소 유명한 유태인들 학살한 수용소에 어린 나이로 잡혔는데, 그 어린 안에 갇혀있는 어린 아이와 그리고 거기에 안 갇혀 있는 그 나치의 아이가 서로 친구가 되어서 교제하는 영화가 있어요. 그 나중에 너무 친구가 보고 싶어서 지가 자진해서 그 수용소 소장 있는데 소장 아들이 거기 가가지고 나중에 지도 같이 가스실에 간 것도 모르고 찾아다니다가 지 아들이 자기가 피워낸 가스실에 자기 아들 죽는 장면이 들어가는데, 그 영화에서 아이가 이런 이야기해요. 그 나치 소장의 아들이에요. 왜 너희 동네에 있는 사람은 왜 잠옷이 똑같냐? 하는 말이에요. 죄수복을 잠옷으로 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잠옷이 똑같아요. 왜? 같은 수용소에 갇혀 있으니까.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가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수용소가 어떻게 막아지느냐 하면 바로 금지의 경계 때문입니다. 금지의 경계선, 금단의 열매라 하죠. 창세기에 따먹지 마라 하는 걸 따먹는 순간 따로의 공간을 만들어 버렸어요. 다른 공간으로 같은 공간을 만들어 버리니까 그 공간이 바로 세상입니다. 창세기 3장 18절에 보면 그 에덴 생명나무가 누락된 채 만들어진 세상. 전혀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나무 과일을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조건 하에 따로 자기들끼리 구성된 세상에 모든 인간은 출생하고 태어납니다.
이거 생각하면 처지가 기가 막히죠 그 세상에서 이 세상 거기에 그걸 창세기 3장에서는 저주받은 세상인데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인간들이 사는 방법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는데 이 질서가 어떤 기술이냐 하면 '평균적인 질서'예요. 자기들끼리 뭘 맞추냐? 균형을 맞춰와요. 요걸 '정치술'이라고 합니다. 평균적인 균형을 맞춰놓고 그들 자체에 대해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법을 동원해서 통제합니다. 통제하는데 문제는 여기에 중간중간에 뭐가 툭툭 튀어나오냐 하면은, 이 금지했다는 거 금지했으니까 금지하면 이게 뭐가 따라옵니까 저주라는 처벌이 따르죠 처벌로 인하여 처벌의 현상이 인간 세계에 불쑥불쑥 튀어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쾌락을 따라 표류하는 존재' 떠도는 것. 이러한 욕망을 달성하면 또 욕망으로 멈추는 게 아니고 또 표류해요.
마치 바다에 스티로폼 떠다니듯이 계속 정처 없이 새로운 쾌락을 발굴하고 느끼기 위해서 계속 떠다니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금지했기 때문에 차단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쾌락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쾌락이란 인간의 신체성에서 나오거든요. 인간의 신체성이 나오는 것을 인간 세계에서는 법을 동원해서 강제 통제를 해버려요. 그냥 막 강제로 억누르는 거예요. '금지된 현실 내에 따로 작용하는 금지' 그러니까 이 공간이라는 것이 새로운 쾌락이 불쑥 튀어나온 것에 대해서 쾌락에 달성해도 허무하고 또는 그냥 참고 지내려면 신체가 갖고 있는 이 쾌락을 좀처럼 억누를 수가 없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인간은 맨날 슬픈 얼굴로 하고 그렇게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을 통제를 통해서 그들은 시도하는 게 뭐냐 저 금지된 거 있잖아요. 저 금지된 뚜껑을 한번 열어보려고 시도를 해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무슨 탑입니까? 바벨탑이죠. 근데 바벨탑을 짓고 하나님 가만 놔두면 짓지 마라고 그냥 흩어지면 되겠는데 바벨탑을 지었다는 그 속성에 대해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불심판 받을 때까지 한 쪽에서 바벨탑 그 성격에 대해서 주저 없는 공격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 공격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원리'. 바벨탑은 창세기 11장이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소명 부른 것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12장이에요. 12장부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나서면서 뭘 공격하겠어요. 이 쾌락이라는 신체성에 대해서 주께서는 겨냥해서 공격을 하게 되어있어요. 공격하는 방법은 뭐냐? '속살 노출' 시키고 '표적으로 삼아서 공격' 해요. 자기의 법으로 자기를 건사하고 자기 법으로 선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다가 이 쾌락이 와버리면 자기의 속살을 드러내잖아요. 그걸 놓치지 않고 표적으로 이걸 공격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온몸으로 다 감쌌는데 이렇게 실수하다 보면 어떻게 돼요?
신체 일부 나오면 방사능이 가만히 있지 않고 그걸 노리잖아요. 그렇게 노려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속살 노출한 이 사람은 죽는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자기의 신체를 살리기 위해서 애쓸 때에 하나님은 언약으로 공격을 합니다. 공격을 해서 아브라함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태어나게 하고, 야곱 죽이고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하고, 이 작업을 주께서는 하시는 거예요. 아브람바 이삭과 야곱이 착하다가 아니라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공격을 먼저 당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거죠. 처음에 야곱이 꿈꿀 때는 뭐 난리도 아니었어요. 내가 여기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다시 오게 되면 뭐 어떻고 이렇게 했는데 그 야곱이 어떻게 됐어요? 그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죽지요. 이 주일날 설교에 상세히 설명을 못했습니다마는 야곱의 특징 중 하나가 뭘 아느냐면 살아있는 채로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야곱이 경험한 이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공간적이에요.
해가 떠서 밤의 세계에서 이제는 해가 뜨기 때문에 사라져야 될 그 분을 따라갈 수 없는 그 공간 자체가 죽음의 세계예요. 그 공간 자체가. 그러니 이 목숨 끊어지는 거는 그거는 죽음이 이미 죽음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에 해당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다 이거지, 이 공간 자체가 이게 죽음에 죄에 갇혀있는 죽음의 세계에 있는 거예요. 야곱이 처음으로 이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떻게 되는가? 나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나를 도로 죽음에서 되돌려 받으면 된다는 그게 바로 이삭이 죽을 때 옆에 있는 수풀에서 양 대신 받아서 히브리서에 보면 죽음으로 되돌려 받듯이 야곱으로 죽고 뭘로 되돌려받아요? 이스라엘로 되돌려 받는 거예요. 이걸 오늘 사도행전에서는 뭐냐 하면은 그 사람의 이름은 죽고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공간이 기존 죽음에 있는 자를 살려내는 살려냄으로써 그 두 사람은 죽음도 알고 생명도 아는 그 경계선의 존재 그 경계선을 갖는 존재가 된 겁니다. 경계선을 갖는 존재. 이걸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걸 뭐라 하냐면 '중첩'이라고 해요.
중첩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정체를 고정할 수 없는 게 중첩이에요. 망이 있는데, 여기 이렇게 틈을 여기에 두 개를 만들어놓아요. 여기다가 총 가지고 콩을 탁 쏩니다. 콩을 쏘면 여기 스크린에 바깥 뒤에 있는 총 가지고 콩을 쏘면 여기 뭐가 나오지요? 콩이 여기 맞겠죠. 콩~ 하고 콩이 맞겠죠? 또 콩 쏘면 이쪽에서 또 콩이 맞겠죠. 따다다닥 하고 콩을 쏘세요~ 하면 여기 뭐가 남겠습니까? 콩 맞은 흔적 두 개가 나란히 이렇게 딱 나오겠죠? 이게 이제 이중 슬릿입니다. 슬릿 시험이라는 건데 이중 슬릿인데. 콩을 쏘면 콩으로 맞은 흔적들이 나란히 어떤 경계선에 뚜렷하게 두게 되죠. 콩을 쏘면 이렇게 콩 흔적이 나오죠. 그 다음에 입자나 광자나 전자, 작은 입자를 여기다가 쏘아대는 거예요. 입자는 쏘아지게 되면 입자니까 콩 같은 존재니까 여기 이런 선이 나와야 되는데 선이 나오는 게 아니고 어떤 물결 무늬가 이렇게 시커멓게 하얗게 물결 모양이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파가 이렇게 물결을 이렇게, 물을 흘리면 물결이 생기잖아요. 이 물결이 생기면 여기서 간섭무게가 생기잖아요. '간섭무게' 물결이 서로서로 상쇄하고 파동이 상쇄하고 보태고 상쇄하고 해가지고 짙음 옅음 이렇게 나오듯이. 이거는 분명히 입자를 쏘았는데 이게 뭐 어떤 물결 같은 파동을 벽에 통과시켰을 때에 간섭 효과 '간섭 무늬 효과'가 등장하는 거예요. 야 이거 분명히 입자 콩 쏠 때는 이게 없던데 왜 입자 쏘니까 이게 나올까 싶어서 여기에 중간에다가 탐지기 하나 CCTV 탐지기 해가지고 입자를 하나씩 쏘면서 어느 쪽으로 갔나 하고 조사를 해보니까 딱 조사하는 순간 여기서는 파동 없어지고. '네가 이거 보고 싶었지?' 하고 입자가 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우주는 입자와 관찰하는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공간'이라는 거죠.
이거는 우리가 흔히 아는 뭐냐 하면 변수, 변수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파동 효과.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가 열심히 해서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내가 미리 예측하지 못한 내가 다 추적하지 못한 많은 변수와 원인들이 파동처럼 나한테 쓸고 나가고 파도처럼 해 가지고 지금 이런 결과가 되어진 거예요. 이 공간 자체가 그런데 공간 자체가 되었는데 분명히 나는 뭡니까? 나는 파동이 아니고 뭐예요? 입자예요. 왜 입자인데 입자가 모였다 하면 왜 파동끼리 모인 그런 결과상이 결과 형태가 왜 등장하느냐 이 말이에요. 참 이상해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중 슬릿을 하면서 도저히 성이 나가지고 도저히 못 참겠다. 반드시 입자가 파동이 되는데는 분명히 통과하는 입자가 파동처럼 서로 연락을 취했다. 연락을 취했으니까 '야 보고 있어 우리 파동으로 한다.' '어 알겠어' 이렇게 파동 같은 효과를 줬다 이 말이죠.
그래서 양자물리학자들은 이 입자 하나하나에 뭘 했냐 하면은 방향을 틀어버렸어요. 편광이라고 하는데, 방향을 시계 방향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걸 틀어가지고 또 통과시켰어요. 통과시키니까 역시 여기는 이런 입자선이 나온 게 아니고 물결 모양 파동 모양 여러 가지 선이 나왔다. 이 말이죠. 선이 나왔는데 이거는 학자들이 예상한 대로 나왔어요. 나왔는데 이 끄트머리에 이 검은 부분이 나왔어요. 그런 부분이 보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서로 의논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야 이거 누가 보고 있다. 우리 파동으로 하자' 했는데 그게 마저 다 하지 못하고 제대로 그들끼리 의논이 잘 안 돼가지고 이렇게 검은 부분이 이렇게 나왔어요. 이거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은 이거는 '과거의 원인이 결과를 낳는다' 이게 아니라 '미래의 결정을 보고 과거를 거꾸로 과거를 정한다' 미래의 결정을 보고 과거를 정한다 가 돼요. 그러면 이걸 성경에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이 세상은 심판받기로 미래에 확정되고 난 뒤에 왜 심판을 받아야 되는가 그 이유를 이 세상에 과거란 이름으로 쫙 현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느날 설교했잖아요. 우리가 앞으로 사는 것은 과거를 산다고. 이미 미래라는 것은 이미 확정되어 정해져 있는 거예요. 정해져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양자물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이거예요. 나는 여러 가지의 타인들과 많은 입자들과 타인들뿐만 아니고 같은 인간 말고, 소나 돼지나 나무나 대나무나 코스모스나 이 모든 자연 세계의 변수의 물결 가운데 하나가 단지 나라는 인간일 뿐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공간이란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모든 자연물의 상호 관계망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는 이런 이야기해요. 당신은 비어있는 유리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죠. 물이 있으면 물로 채워졌죠 물을 부어버리면 그 공기가 있는 거예요. 공기라는 또 다른 것으로 컵이 채워져 있으니까 이 땅에 비어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공간만 비어있는 게 아니에요. 시간도 비어있지 않아요.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이것이 공간 시간 이거는 전부 다 휘어져 있는 거예요. 공간 시간이 휘어져 있다는 거죠. 꾸물꾸물하게 휘어져 있는 거예요. 휘어져 있으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게 거리고 이게 시간이라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고 생각하고 현재는 여기에 현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현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근데 뭘 생각 못 했냐 하면 현재가 폭을 가진다는 생각은 그들은 옛날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누가 나올 때까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원리가 나올 때까지. 이거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현재가 폭을 가진다는 게 이게 여러분 상상됩니까? 현재가 왜 폭을 가집니까 현재 된 순간 뭐가 됩니까? 과거와 미래의 그냥 경계선일 뿐이지 현재라 하는 것은. 마치 산꼭대기처럼 과거 올라갔다 현재 되면 다시 이게 미래로 내려가잖아요. 현재 순간 이쪽은 미래가 되고 이거는 과거가 되고 현재 되니까. 현재는 그 첨탑 그 순간일 뿐이지 현재가 두껍다는 말은 이거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한 거예요. 현재가 왜 그렇게 두꺼우냐, 화성의 현재는 두께가 15분이랍니다. 달의 현재 두께는 몇 초밖에 안 되고 이 지구상의 현재는 거의 순간적으로 현재가 있을 뿐이고 안드로메다 성운의 현재는 약 500년이 지속적인 현재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요, 각자 시간이라 하는 것은 정해진 게 없고 현 시간이라 하는 것은 그쪽과 이쪽 사이에 보는 시선의 차이에 의해서 사람마다 현재 과거 이게 다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성에 15분 같으면 화성이 일어난 그 사건이 15분 기다려야 지구에 오니까 지구 입장에서는 화성이 일어난 사건과 지구 사람들 사이에 15분이라는 그 텀이 있으니까 그게 현재가 15분 동안 두껍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현재라 하는 것은 지구만 보면 순간이지만 우주까지 확장하면 인간이 아는 현재라 하는 것은 지금 인간의 현재에 수집돼야 될 그런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를 인간은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 것이 아니고 현재는 과거에 왔던 그러한 뾰족한 현재고 현재부터 멀어지는 현재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자 이게 이제 성경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이런 관계가 있어요. 지금 이걸 누가 이야기했냐면 양자 물리학 학자들이 이야기해요. 시공간이라는 것은 정해진 게 없고 보는 사람마다 이 우주에서는 각각 다 관찰자에 따라 다르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시공간도 상대적이고 그러면 절대적인 건 뭐냐? 하면 이 상호관계 입자나 인간 또는 뭐 개나 소나 다 마찬가지 해와 달 다 마찬가지지만 관계의 내용 또는 다른 말로 정보. 정보가 이 우주에 꽉 차 있다는 거예요. 자 거기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 관찰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냥 놔두면 파동인데, 뭘까? 하고 보면 파동이 응축이 되서 뭐로 되냐면 입자가 되는 거예요. 안 보면 뭐가 되고? 파동이 되고. 에너지가 입자와 파동인데 흩어지면 파동이고 에너지가 응축되면 입자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자물리학에서. 그리고 이 에너지는 뭐로 돼 있다? 이 모든 입자의 관계에 대한 정보, 내용으로 꽉 차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성경은 뭐라 하느냐? 성경은 간단하죠. 관계없어요. 성경은 '무관계성'이에요. 성경은 누구와 관계있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뿐입니다. 인간은 이용할 뿐이죠. 왜? 피조물이니까. 천사도 마찬가지고 피조물이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뭐냐? 예수님 이야기 빼놓고 모든 인간의 생각을 제거하는 작업이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 방법이 뭐냐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생각들을 다 제거하는 거예요. '피막 뜯어내기' '얼굴팩 제거' 얼굴팩 제거 같으면 뭐 쉽죠 뭐. 말씀은 이렇게 얼굴 팩 정도 시원한 게 아니고 아파요. 소위 의인이라는 마스크를 뜯어내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바닥층'이 나와요. 금단을 따먹지 말라는 금단의 그 세계의 내용이 나온다구요 바닥층에. 인간의 신체를 예수 믿으면 되는데 우리 신체는 무슨 관계 있습니까? 신체 자체가 파괴되는 이 징후 증상이 예수 이름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징후로서 우리 몸이 늙어가는 거예요. 우리 신체라는 이 막 있잖아요? 이 피부막 이게 뜯겨져 나가는 거예요. 수술할 때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참 아프죠. 주님께서는 이 공격을 멈출 의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계속 좀 생각해 봅시다 중요한 거 했어요. 뭐냐 하면은 무관계로 관계로 얽힌 또는 아까 이야기한 입자와 인간 사이에 무슨 작용? 상호작용. 상호작용에서 나온 것은 뭐냐? 정보죠. 이 세상 우주는 비트로 되어 있다. 정보로 되어 있다. Bit 니까 이거는 숫자로 하면 뭡니까? 0과 1로 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0과 1, 그냥 물질과 암흑물질, 암흑 에너지와 그냥 에너지, 반입자 전부 다 뭡니까? 서로 반대되잖아요.
동양의 음력사상처럼 이렇게 비트로 되어 있는 거예요. 이 무관계로서 인간이 기껏 아까 퉁탕퉁탕 컴퓨터 게임 이런 게 있죠. 올라가고 내려왔다가 올라가서 띵하고 받치고 또 내려오고 이런 게 있죠? 이게 아무리 '유'로 난 것은 백날 연구하고 양자물리학 해도 어느 세계에 이르지 못합니까? 0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죠. 44 무슨 44? 고린도후서 4장 4절. 복음은 하나님의 신이 복음의 광채를 이 세상의 신이 비추지 못하게 복음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고린도후서 4장 4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 중에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라" 3절에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사람이 양자 물리학 이거 해 가지고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왜? 관계성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연구해도 내가 있는 것은 우리 부모가 날 낳아서 있다는 관계성 있잖아요. 근데 주님은 뭐라 합니까? "누구든지 부모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무관계성을 이야기해 버립니다. 무관계성으로 모든 관계성을 뜯어내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볼까? 진리가 뭔가 알아볼까?'를 뜯어내버려요. 무관계성으로 관계에 얽힌 상호작용을 이렇게 뜯어내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관계적 이 세상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보로메오 매직'이라는 게 있어요. 이거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첫째는 상상계 그 다음에 상징계 심볼 그럼 리얼리티 실제계 중간에 뭐냐? 이거는 대상 없는 욕망, 소문자a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상상계라고 하는 것은 이거예요. 저것은 나다 또는 저것은 내 것이다. 이걸 인간 잊을 수가 없다는 거죠. 인간은 뭔가 물을 때 자기와 관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번에 돈 천만 원만 주시면 2천만 원 드리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천만 원 투자하시면 2천만 원 줍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에 솔깃한 이유가 2천만 원이라도 더 생기는 나와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내 것이 된다는 이득과 관련돼 있죠. 인간은 어릴 때부터 인간은 상상계 이미지 자기 이미지 구축에 목숨을 겁니다. 자기 이미지 구축에 자기 이미지 목숨을 거는데 이게 실패하면 뭐로 이어져요? 자살로 이어지는 거예요 자살로. 자기 이미지 구축이 자기 전부니까.
그런데 크면서 어릴 때부터 이거거든요. 유치원 애들 인사할 때, 내가 손자를 유치원에 오늘 아침부터 데려다 줬습니다. 유치원에 딱 가게 되면 선생님 마중 나와서 나하고 손자하고 헤어질 때 걔한테 인사를 시켜요 공수~ 해가지고 오늘도 겸손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이제 나도 빠이빠이 하고 집에 오면 되는데. 겸손한 아이가 되면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뭐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칭찬 받는 주위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거예요. 인정해주는 이익이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면 나한테 오는 이익은? 남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인정해 줄 때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뭐지요? 이거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원래 생각했던 나 되기에 지금 그 계획이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진행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생각한 나로 구축이 들어가지요 그럼 나로 구축이 되면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바로 내가 절대자로 성육신 되는 거죠. 내가 신으로 성육신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상상계를 했던 애가 상징계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이거는 뭐냐하면은 사회에서 나한테 요구하게 되면서 여기 나라는 것을 사회에서 인정을 안 해줘요. 나를 인정하지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체를 인정해요. 주체가 하는 것은 그 조직 사회에서 내가 조직 사회가 원하는 그 포지션 위치를 제대로 해 주게 되면 그때 그 사회가 나를 인정해 주면 나는 거기서 부수적으로 내가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내 상징계의 본래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건부죠. 이 사회에서 '나 여기 있다' 하면 '여기 있는데 어쩌라고?' 하지요. 취직하러 가는데 "니 뭐 할 줄 알아? 토플 어느 정도야? 컴퓨터 뭐 한글 다 뗐어?" 이래 나오면 "저는 믿음이 좋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은 상상계야. 여기는 조직 사회라는 게 상징 세계예요.
조직 사회에서는 조직이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거 다시 말해 그 조직이 필요한 포지션에 적합한 인사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계엄을 왜 해요? 계엄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대통령이라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돼요. 대통령의 주체 자리가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재명 리로 바뀌었잖아요? 인간은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사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신에 대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상상계와 상징계 해가지고 절대적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한 돈도 필요하고 인적도 필요하고 사회에서 생활비도 필요하니까 그 조직의 말에 꾸벅거려야지.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상상계와 뭐가 결합이다? 상징계의 결합이 돼버리면 이거는 뭐냐? 무한 의미의 반복이 돼버려요. '무한 의미의 반복' 무한의미의 반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의미 있고 의미 있는데, 의미의 끝이 보이질 않아요. '열심히 일하세요.' 어디까지? '훌륭하게 사세요.' 어디까지? 또 훌륭함의 그 한계가 어디입니까? 그러니까 이 조직사회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는 직장을 이야기했지만, 교회도 의미합니다. 또 가정에서 내가 얼마나 너 어떻게 키웠는데 니가 이래 나오면 돼? 아버지를 실망시켰어.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 그럼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명을 따라야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명을 따를 때 나의 고유 의미는 날라가고 아버지의 의미가 나의 무한 의미의 자리를 대체해 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돼요? 평생 동안 내가 뭘 할 것이냐 아니라 누가 나에게 지시를 해줘야 움직이는 사람이 됩니다. 정신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빠졌냐 하면 상상계하고 상징계 둘이 결합했는데 여기에 뭐가 끼어드냐 하면 실제계가 뛰어들어요. 실제계는 뭐냐 하면 말할 수 없는 쾌락이에요. 표현이 안 되는 쾌락 그러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의미를 주잖아요. 이쪽에는 의미 세계예요. 상상계하고 상징계는 의미 세계라고 해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칭찬받고 되는 세계인데, 쾌락은 "이거 해" "싫어" "왜 하기 싫은데" "몰라 표현이 안 돼 무조건 내 몸이 내 신체가 그거 하기 싫대." "조목조목 따져봐 왜 하기 싫은지. 왜 우리 직장을 그만두려 하는지 좀 따져봐." "싫어 이유도 나도 몰라 그냥 싫어 내 신체가 싫어" "아이고 그러면 월급 더 줄게" 월급 더 준다는 것이 그건 상징계잖아요. 월급 더 주니까 그쪽이 요구하는 의미를 내가 충족시켜야 될 또는 종이 되는 거잖아요. 근데 실제계는 월급을 더 준다고 행복한 건 아니에요. 여러분 쾌락은 뭐가 아니냐면 행복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가질 수 있잖아요. 이거는 상상이잖아요. 쾌락은 쾌락이 나를 가져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쾌락이 나를 가진다고요. 근데 이게 딱 붙어 있으니까 평생 동안 열심히 직장에서 일했는데 도대체 왜 사는지를 모르겠어요. 왜 사는지 모르겠고 이것이 그동안 살면서 내 신체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요. 근데 실제계에서는 내 신체가 망가지면 망가지면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 신체는 안 망가져야 되고 늘 즐거워야 되고 너를 쾌락적이어야 돼 라는 것이 실제계에서 내 신체가 말을 한다구요. 결국은 이 세 가지 이유는 이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게 뭐냐면 신체 그걸 한 자 줄이면 뭐 됩니까? 한 자 줄이면 육이 돼요. 정신분석학은 이걸 제시하면서 해답이 없어요. 기껏 낸 해답은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다' 이게 해답이에요. 그쪽의 해답은 뭐냐 내가 정신병자임을 알면 그게 행복해진다. 그게 정신병의 치료입니다. "난 문제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근데 "문제 있습니다." 이거는 성경에서 말하는 "나 죄인입니다." 하고 관계없어요. 죄인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와 관련돼 있고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여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 안 하든 죄 짓든 안 짓든 간에 우리는 이미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어요. 왜? 예언이 그거니까 말씀 자체가 시편 51편 말씀 자체가 너는 죄인으로 태어나도록 이렇게 그 규정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이 말씀 세계 속에 우리가 편입되는 거예요. 들어가 버리면 말씀의 징후와 징조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여기 18절에 한번 봅시다 4장 14절에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래서 민가에 퍼지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는데, 자 협박을 했습니다. 이건 무슨 계입니까? 이거 상징계죠. 네가 속해 있는 이 사회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한테 뭘 받는다? 처벌받는다. 신체에 대한 처벌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혀요. 감옥에 갇힌 게 뭡니까? 그들의 영혼입니까? 신체입니까? 신체가 갇히죠.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지금 예수님의 영을 받았잖아요. 예수님은 이미 이 마귀로부터 벗어났잖아요. 마귀로 벗어난 분의 마음이 옥에 갇힙니까? 아니죠. 왜? 이 신체 말고 영적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신체를 더 이상 가둘 수 없지요 그래서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니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더 옳은가 판단해 봐라" 우리가 이런 행동을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고 이끈다.
이게 제가 처음에 이야기하는, 바로 말씀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현실세계예요. '현실세계' 그래서 그들은 협박을 해도 소용없지요 자 그러면 이제 25절 봅시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격려하였는고 세상에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도다" 이거는 21 또는 22 뭐? 시편 2장 1절, 2장 2절 왜 갑자기 여기서 시편 이야기가 나오느냐? 이미 말씀이 완성된 상태에서는 이렇게 시편이냐 구약이냐 신약이냐가 아니라 전부 다 이거는 한 공간을 차지해요. 다 이루었다 안에서. 그러니깐 아까 이야기했지만, 미래가 결정된 상황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뭐가 돼요? 과거가 되는 거예요. 과거가 돼요.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그걸 관계로 설명했는데 성경은 이미 인간은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주님과 관계를 못 해요. 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이 주님의 자기 영과 관련했던 그 관계가 새로운 공간으로서 확장이 돼버린다니깐요.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관계가 맺어버리니까 우리는 하나의 주님과의 성령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에 우리는 하나의 징후 징조로서 작동하게 되는 겁니다.
자 4장 32절 봅시다 "믿는 무리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그 상상계에서 '나' 또는 뭡니까? '내 것'은 바로 내 것이다. 이것은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 신체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내 신체가 신체에서 마음이 나와서 마귀 마음이죠. 신체에서 마음이 나왔고 마귀의 영이 나와서 이 마음이 이 신체를 내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어떤 재물이 있으면 이 재물이 누구 것이 되느냐 하면, 내 것이 돼요. 내 것이 되면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내 것을 보유하고 갖고 있으면 "주님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요새 이게 많이 나오네요. '친히 기르시나니' 가 성립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내 것은 내가 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끼어들어야 되잖아요. 어떻게 끼어드는가 바로 나와 나의 것의 관계 속에 이것을 뭐로 보느냐 이걸 바로 죄인으로 병든 것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오늘 벌써 네 번째 적는 문장인데 다시 한번 써볼게요 병이 들어야 그 다음에 뭡니까? 치료법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이 되어 있잖아요. 그 예수님의 육이 아담의 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육이나 우리 육이나 똑같은 육이에요. 육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육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유대인들이 왜 율법을 지켜도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왜 자꾸 의인이라고 우기는 죄를 짓는가 그거는 주님의 영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자기가 눈이 열리면서 눈이 막 활짝 열렸죠. 눈이 활짝 열리면서 내 것이라는 게 일체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도 그냥 우리가 하는 주님이 주신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리는 징후 징조와 그러한 필요한 것들로 우리에게 제공된 겁니다. 그냥 주님 주신 거니까 내꺼 내꺼라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나의 증인 되어버려요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주님의 말씀과 관련된 그것과 필요해서 주신 거기 때문에 이 주신 것을 통해서 무엇과 관련 지으면 됩니까? 말씀과 관련 지으면 돼요. 이 관련 짓는 방법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성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무관계성, 인간과 하나님과 관계없던 그 관계성. 성령님에 의해서 말씀과 하면서 우리가 관계 지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로 편지가 되는 거죠. 주님의 편지가 됩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3장 3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여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고 오직 육의 마음판에" 거기에 우리를 마음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엄청 오류가 있고, 우리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활용하신다라는 걸 알게 된 그런 신분이 된 것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