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500강, 501깅) 일치된 마음/천사들 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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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강-YouTube강의(일치된 마음 에스겔 11:19)20250617-이 근호 목사
제500강, ‘일치한 마음’ 또는 ‘일치된 마음’.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마음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살아온 성장과정, 가정환경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수많은 변수들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상황들이 침투해오기 때문에 그 침투한 상황들, 사태를 본인의 마음이 편집하면서 자신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조립하기 때문에 똑같이 일치된 마음은 아예 없습니다.
당신하고 나하고 마음이 같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상황이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내가 찾고 있다. 당신도 찾고 있는데 나도 찾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동일한 피자를 두고 형제간에 먹는데 똑같은 피자를 뜯어먹었다고 해서 형의 마음, 동생 마음이 일치되지 않잖아요. 같아지질 않죠.
이런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진라면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순한 맛, 또 하나는 매운 맛이 있거든요. 순한 맛 진라면 먹으면 마음이 순해집니까? 그럴 일 없잖아요. 그럴 일 없죠. ‘마음 순하다’, ‘진라면 순하다’ 같은 ‘순하다’는 형용사가 동일하게 쓰여지질 않습니다. 똑같은 피자판을 먹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 사람의 마음은 그 상황에 적응하는 바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마음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11장 19절에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일치된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전제로 깔고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라고 했다는 것은 마음이 도저히 똑같을 수 없는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가운데서 우선 하나님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일치된다면 동일한 주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치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에요.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의 마음이니. 열두 제자가 다 마음이 하나 같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들은 똑같은 복음을 이야기해요.
그들이 성격이 똑같아진 게 아닙니다. 성격이 똑같아진 건 아닌데 근원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서 궁극적으로 내미는 마지막 마음은 바로 복음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느 인간도 의롭다 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이 점에 대해서 일치된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11장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고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이 절차, 이 과정을 성령께서 시행하시는데 성령께서 어떻게 이걸 하시느냐? 신약에 오면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도케 하십니다. 기도하면 성령 오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아예 기도를 하게 하셔요. 기도를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어떤 마음인 줄 모르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x-ray찍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평가 못해요. 그냥 찍어보는 거예요, 그냥. ‘주님이여, 제 마음 한번 찍어주세요.’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게 되면 기도는 약속대로 기도가 실시돼요. 그 약속 중 하나가 에스겔 11장 19절입니다. 굳은 마음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치기하는 작업을 기도를 통해서 하게 하십니다. 기도를 하게 하시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 것은 기도 끝날 때 붙는 이름으로 알 수 있어요.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예수의 마음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밧데리 갈아치우듯이 늘 수시로 갈아치우는 것을 주께서 기도를 통해 하게 하십니다.
그럼 기도는 언제쯤 하면 됩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언제 하느냐, 어디서 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주께서 밀어붙이기 나름이지, 본인이 기도시간 정해서 한다고 뭐 주께서 반드시 응답주고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럼 어떤 타이밍에 하게 하시는가? 굳은 마음일 때, 굳은 마음을 적절하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는 그 시점에서 하게 되죠.
자, 그러면 여기서 굳은 마음은 어떤 마음을 굳은 마음이라 하느냐? 여기 굳은 마음을 돌 같은 마음, 원뜻에 의하면 돌 같은 마음인데 돌 같은 마음이 굳은 마음이죠. 딱딱한 마음, 씨도 안 먹히는 마음, 굳히기에 들어간 마음, 어떤 뭐가 있더라도 이 마음은 내가 양보 못합니다,하고 버티는 마음.
‘버티는 마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나는 수긍하겠습니다.’하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 대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부드러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원뜻에 ‘고기(살)’같은 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면 주는 대로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든 그것은 주님이 할 소관이지, 내가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거죠.
다만 돌멩이가 그대로 유지되다가는 주께서 준비한 게 안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돌을 아주 잘게 부숴서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전환되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해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서 어떤 선입감을 갖느냐 하면 ‘엘리사벳은 참 착할 것이다. 뭐 보나마나 미모는 기본이고.’ 이름도 엘리사벳이잖아요. 엘리사벳치고 못난 배우 봤습니까?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쁘잖아요. 이름 자체가 이쁘단 말이죠. 이쁘니까 마음도 이쁠 거고.
그러니까 엘리사벳에 대해서 천사가 와서 마리아한테 아기 예수에 대해 예언할 때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완벽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 순간에 사용했을 뿐이지, 마리아와 이야기하고 난 뒤 집에 가다 이웃집하고 대판 싸우고 남편하고 싸우고 그럴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주께서 그때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도에 대해서 성령께서, 실제로 신약에 오면 신약은 성령이잖아요, 성령께서 구약의 에스겔 예언대로 “새 신을 주며”라고 했으니까 신약대로 하면 새 영을 그들에게 준다 이 말입니다. 새 영이 왔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가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여기 생선 나오죠. 이 대목에서 어떤 사본에 보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이런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누가 있느냐. 같은 뜻이에요.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알과 전갈. 하나는 살리는 것이고 전갈이니까 하나는 죽이는 거죠.
그러니까 일치된 마음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어이 자기 사람, 자기 백성, 천국 백성을 어떤 경우라도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집념이 담겨있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겁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자, 이 대목에서 결론이 나오는데요. ‘성령주시면 우리한테 뭐 줍니까?’라는 말이 성립 안 되고 그냥 성령주시면 성령주심이에요. 성령주심으로 끝났어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을 주게 되면 이게 바로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어떤 지시를 하고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했어요.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따라서 일치된 마음이라 하는 것은 각자 당하는 사태는 다 다르더라도 그냥 이런 것, 저런 것 하나 주께서 살리기 위해서 주신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게 성령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501강-YouTube강의(천사들 이사야 37:36)20250617-이 근호 목사
제501강, ‘천사들’. 천사들의 존재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워요. 천사들이 물체가 아니고 물질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에요. 활동하는 거거든요. 일종의 유령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요. 죽은 자의 귀신이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똑같으니까요.
마노아 가정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삿 13:3, 9). 마노아 가정에 천사 나타났을 때 특징이 있어요. 천사가 임한 마노아 가정과 천사와 생각의 핀트(초점)가 안 맞아요. 그러니 천사가 온다는 것은 핀트가 맞지 않음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의도를 가지고 천사가 옵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면 다 잘되는 이럴 땐 천사가 올 이유가 없죠. 끝났다. 절망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나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누가 찾아옵니까? 천사가 오죠. 옥에 갇혀 죽게 됐는데 천사가 옥문을 활짝 열어버려요.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옥문 열어줘도 나가지를 않아요. 베드로는 좋다고 나왔지만.
천사가 하는 일에 대해서 당황스러운 이유가 얼추 인간하고 비슷한 일을 하게 되면 천사에 대해서 예상을 한다든지 천사가 이렇게 이렇게 할 거야,라고 되는데 천사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천사 같지 않으면서 천사처럼 대우받는 존재가 뭐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요.
천사는 하는 일을 모르는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울면 안돼. 울면 선물 안줘.’ 이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굴뚝타고 온다는 거. 그리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의 특징이 있어요. 저렴하다는 거. 고급진 선물 안줘요. 이게 가난의 균등화라 할까요. 선물은 받았는데 얼마든지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문제에요. 엄마, 아빠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선물을 산타클로스가 굳이 굴뚝타고 얼굴 시커매져서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특징은 천사,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예상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인간 중에 한 사람으로 인간세계에 같이 섞일 수 있는 천사 같은 존재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요.
그런데 천사는 그게 아니고 특이성을 갖고 있어요. 도저히 어떻게 포섭이 안 되고 붙잡을 수도 없는데 주제넘게 인간들 혼자 활동해야 될 세상을 설치고 다니는 것. 상당히 난감하죠. 그래서 삼손 아버지 마노아 가정 같은 경우에는 천사가 다녀갔을 때 그들은 어떤 위기를 느낀 거예요. “우린 죽었다.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고 하는데 하나님 왔다는 것은 우린 이제 심판받는다는 뜻이구나.”라고 하니까 마노아 부인이 “그럴 것 같으면 진작 죽이지. 왜 우리한테 제물을 받고 가느냐? 그것은 우리를 사용하기 위함이지,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삿 13:22-23)
어쨌든 간에 천사는 우리 인간에게 일을 시키되, 인간은 천사를 붙들고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거예요. 천사는 가정부가 아닙니다. 월급주고 일 더 시키거나 알라딘 램프에서 올라오는 우락부락한 머슴이 아니에요. 독단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죠.
그런데 그것이 인간들 세계에서는 이러다 보니까 결국 인간에게 포섭되지 않고 인간이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천사 같은 것은 있다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천사는 부재하는 것, 없는 존재로 치고 인간들은 인간들만 붙들고 활동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를 불러낼 수 없으니까. ‘천사님, 도와주세요. 뽀빠이.’ 뭐 이럴 수 없잖아요. 난데없이 무례하게 침투할 뿐이지, 인간이 요청한다고 쪼로록 달려와서 ‘주인님, 무얼 도와드릴까요?’ 이러는 건 아니란 말이죠.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유대나라가 굉장히 궁색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르라는 그 대국이 조그만 나라, 하나님 믿는 것 외에는 아무 볼품없는 유다민족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유다민족의 왕이 히스기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죠.
여기서 우리가 또 주의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섬기고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덤으로 ‘옛다, 내 능력을 이제 네가 가져라. 넌 가질 자격이 돼.’ 이건 아니거든요.
순종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까지는 순종했을 뿐이지, 순종한 보상으로 미래까지 자율적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에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큰 대국, 앗수르라는 대국이 쳐들어와서 랍사게가 와서 협박을 하는 거예요.
랍사게는 앗수르 왕의 밑에 있는 군대장관쯤 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협박을 하는데 이 사람은 외국 사람인데도 히브리말을 할 줄 알아요. 유대민족이 쓰는 말을 해버려요. 푸틴이 한국에 와서 한국말로 연설해서 협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 너, 미국 의존하면 우리 핵폭탄 떨어뜨린다.” 참, 푸틴은 너무 멀리 있구나. 그럼 시진핑. 시진핑이 와서 똑똑한 한국말로 협박한다고 해보세요. 이 사람이 우리와 무관한 외국 사람이 아니고 그 나라 말을 한다는 말은 ‘우리나라를 이미 잡아먹었구나.’하는 인상을 깊이 새겨줄 거예요, 유대민족에게.
사람들은 그때 히스기야 왕한테 해결책을 내라 하지만, 히스기야는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아무 재주 없지요. 그래서 히스기야가 누굴 찾아가는가? 이사야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산헤립, 인간. 히스기야, 인간. 이사야, 인간. 계속 인간이 인간에게 난처한 일을 미루고 미루는, 랍사게가 히스기야한테 압박을 가하고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압박을 가하고 이런 식이에요. 네가 좀 알아서 해봐라. 너 선지자잖아. 백성들은? 히스기야 임금님, 당신은 임금이니까 나라를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뭐 순종했다면서요? 말씀대로 살았다면서요? 살아온 댓가가 있어야지, 이게 뭡니까? 우린 이제 다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자, 인간이 인간을 밀고 인간에게 미룰 때 인간이 빠뜨린 게 하나 있죠. 뭡니까? 천사. 인간은 천사가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이 인간한테 책임추궁하고 밀어붙이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거예요. 만약 한 가정에 천사가 살고 있다면 부부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겠죠.
이사야 37장 36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널부러진, 그야말로 온 천지가 널부러진 시체뿐이에요. 시체뿐이란 말은 시체가 널렸단 말입니다. 기세등등한 사람 다 어디 갔어요?
이 대목을 딱 보면서 사람들은 기쁘기도 하지만 짜증이 약간 올라와요. ‘천사가 이렇게 조질 걸, 좀 미리 언질이라도 사전에 주면 안 되느냐?’ 안 줍니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인간이 인간만 믿고 있고 스스로 낙담하고 붙들고 난리도 아니고 원망하는 것, 이 모습을 다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뭐 순종해봤자, 봐. 별 거 없지? 별 거 없어. 그래, 너는 원래 별 거 아니야.
그렇게 협박했던 산헤립, 유다민족 말로 압박했던 랍사게, 그 많은 군사들… 그 많은 군사가 몇 명이냐? 십팔만 오천이에요. 엄청나요. 다 어디 갔습니까? 다 죽었죠. 왜 진즉에 그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 천사의 눈에는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진작 몰랐는가?
인간은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천사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