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공간 시편 61:4 250609
20250609a 부산강의 : [시편]77(61:4)-새로운 시공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61편입니다. 61편은 아주 짧게 돼 있지요. 한 번 쭉 읽겠습니다.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셀라)
5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7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이게 다지요. 이 자체로 내용이 완결돼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의 작은 결정체에 빛을 쪼이면 그 결정체에 담긴 내용이 스펙트럼처럼 전체 벽면을 다 채울 수가 있어요. 영화관의 스크린이 크잖아요. 그러나 스크린에 그림 나오게 하는 카메라의 필름은 아주 작지요. 작은데다 빛을 비추니까 작은데 응축된 정보가 스크린에 가득 담기는 겁니다.
스크린의 특징은 옆에서 보면 폭이 제로(=0)에요. 폭이 없어요. 없는데 스크린을 보면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담긴다’ 이게 굉장히 처음 사진 나올 때 사람들이 놀랐던 게 그거에요. 과거는 지나가잖아요. 사진기 처음 만들 때 과거 시간이 한 곳에 담긴다는 것이 신기한 겁니다.
사진이 나오기 전에는 초상화가 있었어요. 초상화를 보면서 자기가 추억을 생각하는데, 추억을 생각하는 내 머리, 내 뇌 속에 담긴 저장돼 있는 과거가 이제는 내 머리가 아니고 나 바깥에 있는 조그마한 종이에다 내가 기억할 필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낼 때 사람들은 굉장히 놀랐습니다. 이제는 화가가 필요 없다, 화가는 끝이다. 뭐 사실적으로 그려봤자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 아니니까.
그런데 사진이 발달한 후에 영화가 되었습니다. 영화가 나오니까 더욱더 놀랐어요. 어떤 점에 놀랐느냐 하면 영화라는 필름 안에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에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겁니다.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그전까지 영화가 있기 전에 인간은 현실 속에 살아요. 내가 안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냥 주어진 현실 속에 묵묵히 살아갈 뿐인 인간이 이제는 내가 원하는 현실을 영화로 만들어버리면 나는 내 쪽에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영화 속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에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영화가 뭐냐 하면 기차역에 기차가 들어오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 보던 사람들이 기차에 치일까봐 웅크리고 그랬어요.
1895년 12월 28일,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회를 개최했다. 상영회에는 33명의 관객이 1프랑씩의 관람료를 내고 입장했으며, 역에 들어오는 기차나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의 모습 등을 담은 1~3분 길이의 영화 10여 편이 상영됐다. (다음백과)
현실이 따로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힘겨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인간은 그전까지는 문명을 만들었다면 영화가 나온 후에는 문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문명은 하나의 물체적이죠. 문화는 뭐냐 하면 정신적이에요. 문명은 소유 가능한데 문화는 문화가 나를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문명은 인간이 주인노릇하고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문화가 돼버리면 문화가 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주인노릇이 되고 우리는 문화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혼자 계신 늙으신 부모님에게 용돈 주고 도시락 배달해주면 행복하겠지. 전에부터 엄마는. ‘나는 밥 없이 못 산다했으니까 밥 주면 살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는 우울증 걸리죠. 우울증이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거예요. 이게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사는 이유가 없잖아요.
우울증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삶의 이유가 모호한, 자식이 “그냥 밥 먹고 사세요” 하면 부모가 “이게 네 눈에 사는 걸로 보이냐. 뭐 사람이 재미가 나야지” “그럼 엄마도 재미나게 하세요” 그러나 재미나게 사는 게 어디 있어요? 나이트에 갈까요, 콜라텍에 갈까요? 그것도 물 흐린다고 나이 많은 사람은 받아주질 않아요. 맨날 수발들다가 재미난 건 다 놓치면 어떻게 해요? 휠체어 타고 무슨 춤을 춥니까? 근육이 빠져서 걷지도 못하는데.
인간은 문명을 거쳐서 문화로 가면서 드디어 무너집니다. 무너질 때 사람들은 시간 지나면 무너지거든요, 현실 속에서. 영화를 보면서 잠시 잊지요. 연세 많은 사람의 영화 보는 특징이 영화 속에는 자기 젊을 때 모습, 날고 기고 삼엽기 비행기 타고 거기서 격투벌이는 그런 게 나온단 말이죠. 탐 크루즈 활약하는 게. ‘나도 한 때는 저랬어.’ 지금은 기력이 없어서 영화도 다 보지 못하고 졸다가 자고. 내가 자러 왔는지 영화 보러 왔는지 분간도 안 되는.
우리는 문화를 대하면서 문화가 나의 대체물이 된다는 생각을 점점 더 강도 있게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요물이고 괴물인지 알아야 돼요. 이 대체물은 성경에도 나오지요. 이게 뭐냐? 대신이에요, 대신. 십자가에서 대신하심. 십자가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에요. 십자가에는 값을 치루는 것도 있지만 대신한다는 거예요.
대신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나는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 저 무너지고 있어요?” 무너지든 말든 왜 그걸…. 네가 무너진다, 아프다, 주저앉는다, 끝났다는 말을 나한테 왜 하느냐? 나는 너를 대체하는 분과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나는 너를 만난다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때요, 라고 나한테 묻지 말라. 이분을 나를 대신했어요, 라고 대신하신 분 앞에 네가 속해라 이 말이죠. 이게 복음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핵심 중에 하나거든요.
십자가를 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이거잖아요. 십자가 없는 교회 가면 맨날 교회 와서도 자기 걱정해요. 선풍기를 껐는지 가스불은 껐는지. 선풍기 안 꺼서 홀라당 날아가도 예배당 다 말아먹어도 괜찮아. 왜? 대신하심 분과 상대하기 때문에 네가 가진 것, 네가 소유한 것, 네 인생 어떻게 산 것, 그런 것 일체 주께서는 보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없는 교회는 뭡니까? 여러분 염려하지 마세요. 주께서 여러분의 염려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순종하시고…. 또 이렇게 한 짐을, 교회 갔다가 추가적인 짐을 마귀로부터 숙제 받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내게 맡기라 했는데 기어이 짐을 자기가 지고 가고 있다고.
참 이게 인간이 문명을 만들 때는 내가 비행기를 만들고 칼을 만들고 그때는 좋았지요. 그러나 문명은 우리에게 위협이 안 되지만 문화는 우리를 완전히 삼켰습니다. 이제는 ChatGPT 없이는 못 사는 수가 있어요. 난 ChatGPT 들을 때마다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이게 생각나요. ‘쳇’ 또 있는 체, 없는 체, 아는 체하는 ‘척’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인간이 모아놓은 모든 정보가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우리 집 근처 커트 잘하는 미용실 어디 있는지 아나?” 그럼 며느리가 뭐라 합니까? “어머님, ChatGPT한테 물어보면 나와요. ‘가까운데 미용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나는 이제 며느리한테 전화 안 하련다.” ChatGPT를 이용하면 내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인간과 ChatGPT는 무슨 관계? 의존관계. 누가 누구의 주인이 되죠? ChatGPT가 나를 주관하게 되고 나는 ChatGPT가 만들어낸 피조물 돼요. 인간이 만든 문화에 내가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ChatGPT는 문명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다루는 도구가 아니고 도리어 인간을 다루는 도구가 ChatGPT,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이 나오게 된 이유가, 인간이 그냥 살면 되는데 나의 두뇌는 어떻게 생겼을까? 처음에 이렇게 생각하다가 내가 아픈가, 두뇌가 아픈가? 내가 저걸 하얀색으로 보는가, 아니면 내 두뇌가 저걸 하얀색으로 보게 하는가? 이걸 조사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내 안에 나를 조종하는 엔진기능 같은 그것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면서 그다음부터는 그 내가 어느새 자아를 대체하는 자아가 돼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 의존관계, 말이 좋아 의존관계지 사실은 뭐가 돼요? 내 안에 내가 다룰 수 없는 나의 뇌에 의해서 나는 종이 되는 그런 관계에 속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인간은 대체물을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인간은 대체물을 찾아야 돼요.
대체물에서 인간이 대체물을 찾을 때 방향이 화살표가 이렇게 되잖아요(인간 → 대체물). 하나님이 인간대체물을 만듭니다(인간대체물 ← 하나님). 이 두 가지가 시편 61편에서는 공유돼 있고 섞여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돼요. 인간이 대체물을 원할 때 인간의 원함, 기대하는 것, 요구하는 게 있어요. 요구하는 게 이거에요.
6절에 보면, “주께서 왕으로”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있는 임금님, 왕을 오래오래 살도록 해주실 겁니다. “장수”에요, 장수. 여러 대에 미치게 할 정도로 여러 세대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의하면 인간은 대체물을 원한다. 왕을 원하지요. 왕 안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인간은 시간과 자기의 공간이 있잖아요. 시간과 공간을 왕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대체,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관여하는 왕이 나의 대체물이 돼버리면 왕이 내 대신이니까 왕 안에 있으면 이제는 내 시간, 내 공간이 허접하게 날아가도 왕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대체할 것이고, 더구나 대체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시간과 공간이 되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런 계산이죠.
이게 인간 쪽에서 다윗이 바로 시편 61편 8절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지금 이걸 오늘날 교회에다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왜 불렀어? 이야기할 것 있으면 해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했지요?” “그래 약속했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그런 아버지 없지요?” “그래 없어.” “그렇다면 내가 아쉬운 게 있는데 하나님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거의 자살을 요청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하라, 아버지가 기뻐하는 걸 너한테 줄게.” 그 아버지가 기뻐하는 게 뭐냐 하면 놀랍게도 우리가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에요, 성령. “성령만 있으면 됐지, 그지?” 이래 묻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나에게 성령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 이야기하기를 “그거는 네가 예수님에게 찾아보면 되잖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뭘 받았어요? 성령 받았지요. 성령 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샘플이 되고 모델이 되지요. 그리고 세례 요한이 전파할 때 무엇에 충만했어요? 누가복음 1장에 나와요. 성령에 충만해서 앞으로 메시아에 대해서 전파한다고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와서 알려줬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됐어요? 모가지 날아갔지요.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 어떻게 됐습니까? 멍투성이 되어서 죽었잖아요. 현장에서. 그걸 두 자로 ‘객사’했다고 해요. 요양병원에서 정든 가족들 앞에서 애도 속에 돌아간 게 아니에요. 짱돌 맞고 그냥 죽었어요.
자살에 두 종류가 있는데 성령에 의해서 자살, 그거는 바로 ‘내가 스스로 죽는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남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스스로 죽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살은 어디서 볼 수 있느냐 하면 이겁니다. 불교의 중. 불교에서 스님을 스스로 ‘중’(衆)이라 하는 이유가 뭐냐? 나는 일반대중 속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 뜻에서 머리 깎은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 머리 다 깎아야 돼요. 그들 말대로 중이 머리 깎는 이유는 일종의 자살의 시도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자살이 성공합니까? 내가 나를 죽이는 것에 성공해요, 안 해요? 가룟 유다가 자살에 성공했다고 보십니까? 마지막 때에 다 불러내요. 자살 실패에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못 살겠다고 죽었는데 보니까 ‘너는 죽으면 안 돼. 반드시 지옥 가야 돼’ 지옥 갈 자로 악한 부활로 저주체로 새로 만들어내요. 해서 저주체가 가는 지옥에다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없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 일대기는 지연된 자살이다. 골프를 치고 찧고 까불고 해도 자살이에요. 자살을 자꾸 지연시키는 거예요. 나는 월드컵 보고 죽겠다, 해도 월드컵 볼 때까지 자살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자살하는 방법을 요란스럽게 하는 겁니다. 자살의 적당한 말로 침몰하는 거예요. 인간인데 아니었어요. 흙으로 주저앉는 거예요. 서서히 흙이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흙이 많이 실현된 자를 늙었다 하고, 흙의 요소가 없이 탱탱하면 갓난아이라 하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그 가운데서 어떻게 옮겨 타다보니 종교라는 걸 믿어요. 실은 내가 내 인생은 볼 때에 한 방에 진짜 완전히 대박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인간한테는 소용없고 신에게 비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예요. ‘신이시여 나를 위하여 시간과 공간을 교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주옵소서.’ 내 시간과 공간, 일종에 피 수혈이죠. 현재 늙어가는 피를 깨끗한 피로 수혈하는 거예요. 바꿔치기해서 내가 신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그러면서 성경 보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저쪽에서 찾아낸 게 있어요.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고. 기존교회에서 이단이란 자가 있잖아요. 기존교회는 쭈뼛쭈뼛한 거예요. 인간이 원하는 걸 줘야 되는데, 아예 신천지 같으면 노골적으로 주면 돼요. 예를 들어서 나는 죽어도 부활한다. 이만희가 그렇게 하면 막 모이는데 기존교회가 보기에 나가도 너무 나갔거든요. 차라리 허경영이처럼 ‘내 눈을 바라 봐’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 눈을 바라봐서 병을 고치는 건 좋은데 고쳐봐야 늙고 병들고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기존교회는 줏대가 없어요. 눈치코치 없이 쭈뼛쭈뼛하고 있는데 그걸 노골화한 게 이단들입니다. 뭐냐 하면 당신들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 요한복음에 있어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신이라 했으니까 신이 되는 건 우리의 목표입니다. 기존교회는 그걸 안 들어주니까 여러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현래의 지방교회에요.
성경구절 딱 구절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신이라 했으니까 우리가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이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뭐냐?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서하는 거다. 그런데 기존교회는 우리가 신 된다는 말을 안 해주고 있다. 그거는 성경해석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용감하게 성경대로 한다.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대목 봅시다. 여러분이 만약에 신학교 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희망 없지만 여러분 자녀들에게 네가 뭘 해도 화끈하게 해봐라. 요한복음 10장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하나님이 율법 받은 자를 뭐로 본다? 신이라 하셨거늘, 내가 신이라 하는 것이 그만큼 과하냐고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되묻는 그 대목이에요. 지금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미 뭘 의도하고 있는지 여러분 짐작했지요. 이거는 악마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뭐가 된다? 네가 신이 된다는 거예요. 악마가 보기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기 전에 신입니까, 신 아닙니까? 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악마는 신이 된다고 했고,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죽는다고 돼 있어요.
누가 말이 맞습니까? 누가 말 나한테 좋아 보이느냐고 묻는 게 아니에요. 누구 맞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누가 말이 맞아요? 하나님 말이 맞지요. 그러면 여러분 죽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죽잖아요. 그러면 말씀대로 우리를 뭐한다? 우리를 죽이는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뭐다?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있는 신 같은 존재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 어려워요? 그게 어렵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죽이고 저주받게 한다고 했지요. 로마서 3장에서. 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왜 율법은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저주받게 하느냐? 입을 안 다물고 마스크 안 쓰고 자꾸 뭐가 나와요? 마귀가 나오는데 그 마귀의 목적은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이다’ 이런 미친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있잖아, 나는 신이다. 성경에 있잖아. 나는 신이다.’ 왜 기존교회는 쭈뼛쭈뼛 이야기하느냐. 우리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교회가 이현래 지방교회를 공격 못하는 이유가 기존교회가 몰라서 그래요. 뭔가 아는 게 있어서 해야 되는데 기존교회가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이런 점을 고려해서 하나님 쪽에서 대신할 걸 보냈는데 이 대신하신 분, 대체물이죠. 하나님의 중보자는 우리로 하여금 중보자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바로 필요한 것은 죄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이란 소스가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올 사람이 있잖아요. 주께서 커트. 네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망가진 자가 어떤 개념 잡을 때 성경에 나오는 개념을 ‘이거다’ 하고 개념 잡잖아요. 성경에 죄인이라 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죄인일 것이다, 죄인입니다’ 하고 나오잖아요. 안 받습니다. 개념은 중보자로부터 새로 나가야 돼요. 주님처럼 해야 죄인 돼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충분히 배신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 했지요. 충분히 주님을 배신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 했어요. 신앙이란 것은 두 가지잖아요. 오류가 있는 나로부터 이해하는 신자, 그리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신자가 동일하지 않아요. 만약에 우리 생각과 예수님 생각이 동일하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번 수련회에 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데 2장에 보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인간 가운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과 제자들은 알겠지요.’ 아니요. 그들은 지시받고 있는 사람이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보자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병 고친다고 개나 소나 다 돌아다니는 게 아니에요. 설교한다고 다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여러분 다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 나오지요. 베드로, 고넬료. 베드로와 고넬료가 모르는 사이인데 우연히 만났다 칩시다. 시장에서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할 때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게 통합이 안 돼요. 우리가 교회 집사님들 만날 때 서로 살아온 성장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살아온 과거 이야기해도 듣는 사람은 건성으로 들어요. 내 인생 아닌데. ‘그랬어요? 아이고, 안 됐다. 그럴 수가. 고생 많이 했겠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아프겠노. 전 약속이 있어서 이만….’ 전부 다 따로따로입니다. ‘다음에는 내 사연 한 번 들어보세요.’
그런데 고넬료,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 밖에서 남 안에 못 들어가고, 남도 내 안에 못 들어와요. 근데 여기 조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조종하고 고넬로 조종해버려요. 조종하면 베드로 안에 성령 있고 고넬료 안에 성령 있으면 이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아니고 성령과 성령의 만남이에요.
성령과 성령의 만남과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의 차이점이 뭐냐? 성령으로 서로 만나게 되면 베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가 되고 고넬료도 ‘나도 죄인입니다’가 돼요. 그러면 비로소 성령이 옴으로써 예수님이 중보자가 아는 죄인의 개념이 성령을 통해서 각 인간에게 담기게 되는 거예요. 전달되고 담기게 되고 그 인간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개념을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전에 망가진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이거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개념이 돼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고통스럽지요. 사는 게 고통스러워요. 고통스런 이유도 몰라요. 그냥 고통스러워요. 왜냐하면 마귀가 그렇게 현실에 없는 식으로 몰아넣었다 이 말이죠.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안에 자기 설계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인생 계획이 있어서 힘들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어느 설계도입니까? 세상은 주님 중심의 설계도를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울산강의 제목 뭐였습니까? ‘봐주지 않는다’ 주님이 자기 설계도대로 건축물을 안 지으면 이게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누구든 인간은 사는 게 뻑뻑하고 힘든 이유가 내 설계 계획대로 안 되게 돼 있고, 설계대로 안 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점이 설계대로 됐는데 기쁘질 않아요. 이거는 보통 병이 아니에요. 뭔가 뜻대로 됐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아요. 뭐지 이 허한 기분은? 여러분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뺑뺑이 돌린 이유가 그들 자신이 모르는 죽음을 체험하게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만 뺑뺑이 돌았습니까, 누가 동행한 분이 있었습니까? 동행한 분이 있었지요. 주님도 같이 뺑뺑이 돈 거예요. 주님이 조교가 되어 ‘너희들 고생해봐’ 이게 아니라 주님도 같이 다니면서 원망은 원망대로 다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요청하는 대체물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대체물이 이게 안 맞았기 때문에 그래요.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들어요.
사는 게 힘든데 이게 나가면서 남이 있는데 내 설계대로 되는데, 어려워요 잘 들어야 돼요. 내 시간을 고려하고 내 공간을 고려한다고요. 나는 내년 이만쯤 이런 사람이 돼야 되겠다는 게 자기 설계도잖아요. 나는 내년 이만쯤 여기 살지 말고 미국 가서 살까? (요새 미국 갔다 오는 사람 더 많아요.) 유럽에 가서 살까, 이런 계획이 있다고요. 그러면 그때 되면 행복합니까?
이런 계획을 하면서 인간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생각만 해도, 촌에 집 짓고 전원생활하면 재미있겠지, 라고 생각할 때 갑자기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내 계획대로 안 따라주는 자가 등장해요. 보통 남편 같으면 아내, 아내 같으면 남편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 설계에 방해되니까 이 방해물을 어떻게 해요?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너 아직 나한테 붙어있나. 징그럽다 정말. 좀 알아서 죽든지. 하나님 저 인간 좀 죽여주든지. 왜 내 설계, 내 미래를 왜 방해해. 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죽었으면 좋겠다는 순간 내 계획이 이미 타인의 존재가 나의 방해물로 찌꺼기로 끼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남과 있다는 자체가 누굴 만나든 내 방해요소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죠. 나는 내 계획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보장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께 내가 의인이라는 것을 자처해야 이게 가능하거든요. 쉽게 말해서 나는 내 인생을 처분하고 싶다는, 내가 알아서 처분하고 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싶다. 이게 유일한 소원인데 남이 있단 말이죠. 타인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고넬료와 베드로, 베드로와 고넬료와 만나요. 그 대목을 봅시다. 사도행전 10장 11절,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제3의 요소가 개입되지요. 제3의 요소가 뭐냐 하면 위치 공간, 수직적 체계에서 주님은 작용해요. 하나님의 설계도가. 인간과 인간이 아니고 하늘이 개입한다 이 말입니다. 수직적으로. 평면적으로 인간이 만나는 게 아니고 수직적으로 늘 개입하는 거예요.
어제 오후 설교에 이 이야기했잖아요. 밤비. <밤비>란 노래는 많아요. 이은하부터해서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걸었다는 사람도 있고. 제3의 요소가 개입하는 거예요. 엉뚱한 요소가. 먹어라. 그러면 베드로가 뭡니까? 나는 지금 내가 행복하고 내 인생, 내 시간, 내 공간 내가 관리하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내 계획, 내 설계도에 없는 빠져있는 것이 침투가 돼 있지요. ‘먹어라’ 그러면 계산하는 거예요. 보자기 안을 보니까 먹지 말아야 것, 율법에 위반되는 게 있네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내가 해버리면 나의 설계도에 의한 구원계획은 와장창 다 무너집니다. 평생 동안 내가 착실하게 다져놓은 나의 모든 의가 한방에 다 날아가고 이건 뭐 죽기 전에 지옥 갈 사람으로 결정나버리죠. 그러한 위태로운 모험을 내가 할 이유가 없지요. 될 수 있는 대로 율법을 지키고자 애쓰는 가상한 태도를 지금 하늘에서 보고 있으니 내가 그 시선을 의식해서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겠지요.
먹으라고 했어요. 못 먹습니다. 뭐가 발생됐지요? 갑자기 중보자가 날아가 버렸어요. 먹으라고 했는데 결정을 내가 하는 거예요. 나의 대체물은 내가 알아서 만듭니다, 이런 뜻이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결정은 쓸데없는 대체물을 내가 지정해서 그것과 의논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든 중보자는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지 않기 때문에. 집에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는 것과 똑같아요.
집에 어른 모시는 게 좋습니까, 개 키우는 게 좋습니까? 개가 좋아요. 왜? 어른처럼 잔소리 안 하잖아요. 귀찮은 건 마찬가지지만 어른은 잔소릴 하다고요. 어른이 자식한테 봉양 받으려면 개가 돼야 되겠죠.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고맙다고. 그런 인간이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냉장고 청소 좀 해야 되겠다’ 이래 나오면 끝났습니다.
개와 인간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개는 주께서 지르시지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길러요. 고집이 있어서. 자칭 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이현래 단체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아는 인간 자기 자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진짜 메시아는 우리를 작살내잖아요. 그게 싫은 거예요. 내가 선호하는 메시아를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확정을 내가 확보하고 싶은 거예요.
자, 먹으라고 했는데 안 먹었어요. 세 번 그렇게 하고 가버렸어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베드로가 지적을 받지요. “내가 먹으라 했는데 왜 안 먹었어? 이유를 대라.” “내가 율법에 위반되는 것은 안 먹습니다.” 이렇게 했지요. 율법에 위반 된 것은 안 먹는다는 그 결과가 율법을 위반하면 안 되는 그 결과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내가 이해한 율법 개념, 엉터리 개념에서 나온 결과가 그거였다 말이죠.
그러니까 율법을 지켰다, 의롭다, 죄인이다, 천국이다, 천사다 이 모든 개념은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 일방적으로 주님에서 새로 나와야 돼요. 모든 개념이. 그러면 새로 나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냐? 기존의 것이 타파되고 기존의 시공간 이것이 타파되고 주님의 새로움으로 교체, 대체가 돼버리죠. 그러니 인간은 뭐냐 하면 새로움으로 인하여 기존에서 끙끙 앓던 모든 구닥다리가 날아가는 희열과 감격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쯤해서 보자기 또 내려올 텐데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다뤄짐의 지체가 되는 거죠. 내가 신 아니고 주님의 신에 일부가 된 거예요. 단수, 그분만의 진정한 하나님의 소속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분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니까 신에게 주는 상속자를 그 안의 일부가 된 우리에게도 다 같이 상속받는 거예요. 그걸 양자라 합니다.
아들도 아닌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주는 그 혜택에 같이 참여된 자가 바로 아버지도 아니면서 그다음부터 성령을 받으면 뭡니까?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양자의 영을 받았다. 일방적으로 나 좋으라고 살아가는 이것에 주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침투하는데 뭐냐 하면 새 술은 옛 부대에 담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옛 부대의 특징은 뭐냐? 자꾸 성경에 나오는 그 구원과 영생을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 사실이 시편 61편에서 다윗 때부터 이미 실시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어떻게 교체하느냐? 두 번째 시간에.
20250609b 부산강의 : [시편]77(61:4)-새로운 시공간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개념이 온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제일 쉬워요. ‘나는 산에 간다’ 이 개념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내가 산’이라고 바꿔지는 겁니다. 개념 안에 함몰되는 거예요. 그럼 개념은 누가 다루느냐?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전의 그 개념들이 있어요. 나라 하는 것은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이 함몰되는 거예요. 피조물이 있어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조물이라 하면 이상하지만 하여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개념과 아버지 개념을 둘 다 통합하고 완성시킵니다.
악마는 여기에 대해서 이 점을 알고 ‘너도 신이다’ 하고 따로 떼어냈지요. 따로 떨어져 나오면 신이 된다는 말은 뭐는 아니다? 피조물 노릇 그만할래, 란 뜻이에요. 판단과 평가, 나의 시작과 내 운명은 내가 관리할래,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이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적어볼게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 천사든 악마든 간에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이 하나님이 다룰 줄 아시는 거예요.
다룰 때 그냥 다루겠습니까? 설계도면대로 다루는 거예요. 그걸 위치배정이라 하는데 너는 이 기능을 해야 되고 너는 이 위치에 있어야 되고, 딱 배정을 해줘요. 그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소관입니다. ‘나 좋은 자리 배정해주세요’라고 끼어들 수 없어요. ‘내 아들 후방에 보내 달라’ 할 수 없듯이 떼쓸 수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 개념에서 오늘 시편 61편과 관련해서 이런 개념이 발전하는 거죠. ‘장수한다’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영생’으로 바뀌는 중간과정에 있어요. 장수라 하는 것은 어떤 데 쓰이느냐 하면 피조물의 경우에 장수가 돼요. ‘하나님 장수하신다. 하나님 청와대 사신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장수에서 영생 개념으로 이동하는 거예요.
‘우리 이스라엘 임금님이 오래오래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했으면 좋겠다.’ 이 개념이 이제는 그렇게 하는 다윗 너를 이 땅의 왕으로 영원히 장수하게 만들어줄게, 이걸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와요.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천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피조적인 시간을 능가한 초월한 저쪽 세계를 시간으로 표현할 때 천년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걸 지상의 999년 그다음 해가 천년이 아니에요. 단절된 개념이에요.
인간이 느끼는 시간개념, 피조물이 느끼는 시간개념과 중보자 되신 주님이 새로 이 땅에다가 꽂아놓은 확산시켜 나오는 새로운 시간개념, 그걸 어려운 말로 묵시라 하는데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시간의 개념을 지상에 있는 시간개념으로 표시하자면 천년. 이게 십계명 처음 나올 때도 있어요. 천대까지 복을 받으리라.
그럼 천대까지 복을 누리면 끝입니까? 아니잖아요. 피조물의 세계는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이 대가 오래 산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거의 뭡니까? 천년은 넘지 않고 구백구십, 꼭 뉴욕의 마천루 같아. 높이가 올라갑니다. 남자 장대높이뛰기 기록 세우듯이 천년을 못 넘어요. 이런 의미는 뭐냐? 천년을 못 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구박한다, 심판의 권리를 갖고 있다. 심판을 행사할 권력을 확보해 두었다. 너희들 피조물의 한계를 넘지 말라는 이런 뜻이겠지요.
그래서 장수에서 영생으로 간다. 그럼 장수의 모델, 오래 살았던 모델은 창세기 5장에서 바로 홍수 전의 인물들이 천년에 가까운 그게 장수의 모델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장수의 모델이 중간과정을 거쳐 영생으로 가면서 이게 수직적으로 높아지는 것이 드디어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영생은 어디 있는가? 저 밑에 있게 돼요. 십자가 거기에 그쪽에서 영생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무슨 마음?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높이 계신 분이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간 거예요.
그럼 그 낮으신 분의 본질은 뭡니까? 여전히 하나님 됨을 유지하고 있지요. 영광은 포기했지만 본질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없는 장소를 만드는 그곳에서 영생으로 가야 될 사람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천국 가는 버스운전사가 되어 손님들을 기다리는 셈이 되지요. 영생으로. 아무도 안 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을 사람이 없어요. 성경에 있는 그 모든 개념을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천국 가기 위해서 이용을 하지 나 자신이 파괴되는 경우를 인간은 생각 못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인간은 안 품으려고 해요. 성령 없이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예수의 마음 없이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열심히 하나님 믿고 기도하지요. 다 누굴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가 산을 정복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높은 산에 올라 정복하고 야호, 부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저 산 밑에 있는 자갈, 그 자갈이 우리와 똑같다는 사실, 이게 얼마나 편리합니까? 산을 정복할 것 없이 산 밑의 모래조각 하나 되는 게 쉽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 강도잖아요. 높은 곳에 가는 것을 주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높은 곳이란 개념을 낮추는 역사를 다윗 이후에 실시합니다. 오래 살게 해달라에서 이제는 영생하는 자로 만들어요.
오래 사는 자에서 영생한다는 말은 오래살기, 오래살기, 오래살기 백날 해봐도 그거는 우리의 옛 것, 옛 부대에 해당되는 시간개념에 대한 고집스러움이죠. 자기에 대한 열정이에요. 자기에 대한 정열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를 포기할 수 없지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치고 들어와야죠. 마주쳐야죠. 치고 들어옵니다.
그게 여기 61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그다음에 부르짖는 이유가 나오죠. 2절에,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마음이 눌렸다 하는 것은 뭔가 마주쳤다는 거예요. 어떤 외부의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걸 이렇게 보게 되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보이겠지요. 추상적인 실제적으로 나타낸 것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슬이고 물이고 비고 여기 수년 동안, 정확하게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돼 있어요.
신약성경 히브리서 다음에 나오는 야고보서 5장 17절에도,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비가 오지 않았다. 기뻐할 일 아니죠. 춤출 일 아니죠. 어떻습니까? 망한 거죠.
높은 데서 지향하는 이스라엘이 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주저앉게 됩니다. 주저앉게 되면 점점 더 희망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요. 그 인간들의 개념, ‘이제는 망했어. 우린 이제 희망마저 사라졌어’라고 하는 인간의 선입관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잖아. 선지자가 바로 열왕기상 17장 8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가는 거예요.
사르밧 과부에게 가니까 그 과부가 가뭄으로 인하여 점점 생활이 어려워서 그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마지막 최후의 떡을 먹습니다. 혼자서 살기 힘든데 가뭄까지 드니까 점점 구호물자도 다 끊어졌겠지요. 그 타이밍에 선지자가 개입합니다. 절대적인 절망 가운데서. 그런데 그 전까지 사르밧 과부는 이 자식과 내가 먹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 개념에선 먹을 게 있어야 되고 먹을 것이 제공될 때 산다.
그런데 자기한테는 뭐가 없습니까? 먹을 것이 마지막 동이 나는 끝나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어요. 그러면 그것 먹고 예상 되는 남는 건 뭡니까? 이제는 죽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장수가 아니고, 장수는 내 존재가 이어져가는 거예요. 살아 있다. 오늘도 살아 있네. 살아 있다. 백년 되도 살아 있네. 이백년 되도 살아 있다가 되지요.
그럼 오래 사는 것과 영생과 이어집니까, 안 이어집니까? 안 이어지지요. 995년, 996년 심지어 천년 살아도 영생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옛 것의 이어짐이니까. 옛 것의 연속이니까 이거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새로움이 없는 거예요. 옛 것은 과거의 기억이 계속해서 지저분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자꾸 과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되새김밖에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게 없어요. 살아도 사는 게 고역이고 살아 있는 자체가 지옥 같아요. 왜? 새로움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나에게 새로움을 주세요, 하잖아요. 아니 새로움을 누가 방해합니까? 새로움을 방해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이게 새로움을 방해해요. ‘살아 있네’ 이러잖아요. 살아 있는 것에 주께서 다치지 않게 이걸 지켜주고 더 멋지게 새롭게 살게 해 달라. 새로움을 기존의 살아 있는 것과 이렇게 연계하고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는 예수님, 메시아적 삶이 아니에요. 그건 이미 악마에 물든 우리가 기대하는 우리의 설계도일 뿐이죠. 주님께서의 새로움은 주님이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남의 요소가 우리한테 대입시킬 때 대신하고 대체할 때 그때 비로소 살아 있는 내가 예상도 못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내가 살아 있다, 죽어 있다 이 생각조차도 새로움 앞에서는 그건 둘 다 갖다 버려야 될 생각이란 것을 새로움이 안겨줍니다.
어떻게 살지? 그만 죽어버릴까? 살고자 하는 생각이나 죽고자 하는 생각이나 둘 다 새로움이 아니에요. 새로움은 이런 겁니다. ‘주님 또 오늘 무엇을 시켜주실 랍니까? 어떤 일이 준비돼 있습니까?’ 자기 쪽에서 뭘 건지는 게 아니고 저쪽에서 나에게 일을 시키는 관계로 맺어질 때 새로움이에요. 그 새로움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본인이 실습을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에 대한 종속된 자세를 나타냈어요.
“아이고, 예수님 제 병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답변은 이거에요. “이거는 당신보고 고쳐준 게 아니고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 결과에 당신이 얻어걸린 거야. 당신의 존재는 아버지가 일하시는 증거물이고 내가 아버지 뜻대로 일했다는 증거물로 나한테 참여된 거고 동원된 거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관계 속에서 천국을 설명해주십니다. 지금부터 두 가지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또 하나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므나 비유. 므나 비유부터 먼저 볼게요. 누가복음 19장 11절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2절에,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므나가 몇 개입니까? 한 사람 당 한 개지요. 달란트 비유에선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로 받은 달란트가 다 달라요. 그러나 열 므나 비유에선 한 개라고 한 개. 너도 한 개, 나도 한 개 전부 다 하나씩 받았어요. 받은 한 개의 므나는 주신 분, 주님이죠. 주신 분과 받은 종 사이의 관계가 단일화 돼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유도리나 융통성을 내가 부릴 수 없다는 거예요. 므나가 한 개 있다는 말은 이 돈이 있는 이상 주인이 안 보이든 사라지든 없어지든 심지어 죽든 다시 살든 간에 그 관계는 하나의 종이라는 관계는 요지부동 변함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의 공통점이 있는데 종과 종 사이에 대화가 없다는 사실. 인간과 인간 간에 회식하고 이런 것 없습니다. 전부 다 누구만 쳐다보고 있느냐 하면 각 개인이 주인하고만 대화해요. 천국은 어떤 나라다? 남과 의논하는 나라가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로 형성돼 있는 모아진 조직이 천국이에요.
이게 은사잖아요, 은사. 당신이 나한테 은사 줬습니까? 아니잖아요. 주신 분이 따로 있단 말이죠. 뭘 은사로 주느냐? 개념, 개념 전환이죠. 대신하심.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을 엉터리였다. 그건 우리 출생 자체가 문제성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문제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게 문제가 돼버린 거예요. 나한테 문제가 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문제가 없어집니다. 말장난 같은 느낌 드는데요.
‘나는 문제가 없다.’ 멀쩡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선 이걸 뭐로 바꿉니까? ‘문제 있다’로 바뀌지요. 바뀌니까 이게 어떻게 돼요? 이제부터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가져와서 문제가 없다고 되니까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자꾸 주인을 증거해야 될 걸 괜찮은 내가 되기 위해서 성경의 개념을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거예요.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문제가 있는데 주께서 그걸 문제없음으로 정리했잖아요. 그러니까 문제없음 옆에 붙일 내가 없어진 거예요. 문제없게 된 것이 주인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여기에 갑자기 그러니까 그걸 가져와서 따로 자기 살림을 차려서 ‘나는 문제없다’가 돼버리면 이게 문제가 있음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천국은 뭐냐 하면 구분하기에요. 열 달란트 받았다. 고맙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다. 고맙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습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맡기고 나는 출장 간다.” “잘 다녀오시옵소서.”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있든 없든 뭐가 없는가? 자기가 받은 달란트가 있잖아요. 그 있음이 주인 있음과 대체물 된 거예요. 여전히 자기는 종이 된 거예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갑자기 주인의 부재를 느끼는 거예요.
주인이 없다는 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왔습니다. 주인이 없다는 말은 조금 전에 주인이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있었다가 돼야 없었다가 되니까. 그 개념이 나란히 병행해야 의미가 생기거든요. 주인이 있었다 할 때 자기는 뭘 몰랐느냐 하면 나도 있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어요. 왜? 주인이 있음을 독차지하니까. 그런데 주인이 없어지니까, 주인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뭡니까 드디어 ‘나는 있지롱. 나는 여기 있지롱’이 된 거예요. 주인이 와서 “이 악한 종아.”
여러분 달란트 비유에서 만약에 주인의 부재를 느꼈던 그 종이 백 달란트 받았으면 주인한테 칭찬 받았겠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천국에 대해서 설명한 거예요. 천국이란 달란트로 설명했는데 주께서 취지가 뭐냐 하면 악한 종을 가려내는 방법이에요. 악한 종이 주인을 의식했어요. 주인을 의식한다는 말은 내가 주인을 의식한 거예요. 그런데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받은 게 뭐냐, 시키신 게 뭐냐’ 그게 전부에요. 내가 산에 올라가는 게 아니고 내가 산이에요. 내가 받은 게 내가 달란트에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이걸 남길까, 어떻게 할까? 주인은 무서운 사람이라 주인이 무섭다고 의식하는 자체가 지금 주인과 자기 관계가 끊어진 상태거든요. 어떻게 하면 주인을 잘 섬길까 하는 자체가 끊어진 거예요. 마치 성령 받기 전의 열두 제자와 똑같아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 바르게 할까? 이미 끊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버리니까 갑자기 누구 도드라집니까? 나라도 살아야지. 나라도 살아야지, 하는 그 점에서 열두 제자가 가룟 유다까지 포함해서 똑같아요.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 배반한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배신이 충분치 아니하면 그거는 신앙인 아니라 했어요.
배신이 충분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더 이상 나에 대해서 모든 기대는 끝나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주님 나한테 뭘 해줄 겁니까, 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 성립이 안 된다는 걸 성령 받고 알았지요. 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성령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그대로 우리한테 성령으로 오니까 이제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그냥 나도 일하는 거예요. 그뿐이라니까요. 한 식구가 됐으니까.
그러나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열심히 충성을 다하려고 해요. 충성해서 뭐하려고요?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듣고 얼마나 화를 내겠어요? 내가 너 대신 하라는 것은 다 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도록 다 조치해 놨다 이 말이죠.
달란트에서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것은 액수에 관계없이 이쪽 편에 속하는 거예요. 나중에 주인이 와서 두 패로 나누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천국이 있다는 말은 지옥이 같이 만들어진 거예요. 양과 염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지요. 내가 배고플 때 네가 먹을 걸 주었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너는 천국에 속한 사람이다. 언제 주님 배고플 때 먹을 것 안 줬습니까? 너는 지옥에 속한 사람이다. 이것 분류하기 위해서 천국을 설명하는 거예요.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았으니까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고위직에 앉아요? 아니지요. 달란트 비유는 뭐냐?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역량이 대단한지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은 나만 없으면, 꼭 학교 담임선생님 없으면 애들 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때는 섬기는 것 하지만 주님이 없을 때는 누가 튀어나와요? 내가 어떻게 할까, 이렇게 되지요. 주님의 부재가 나의 존재가 되지요.
그래서 주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현재 이 땅에 부재시킵니다. 없애버립니다. 주님은 찾아와도 답변도 안 해요. 찾는 이유가 수상하기 때문에. “너 왜 찾는데?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나 찾지 말고.” 그냥 기도가 뭐냐? “이렇게 된 것도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범사에 감사와 고마움으로 듣는 게 기도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밤비가 새벽 3시에 퍼부으면서 어떻게 퍼부어요? 지 할 일 하잖아요. 밤비 좀 본받으세요. 자꾸 대가 바라지 말고. 누가 보지도 않고 잠자고 있어도 쏟아지잖아요. 이렇게 일되는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하면 되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성령이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므나 비유에서는 한 므나씩 받았어요. 그들이 뭘 하느냐 하면 이거는 통치권을 받을 걸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한 므나니까 관계가 하나다 말이죠. 주인과 종. 역시 타국에 왕권을 받으러 갔으니까. 므나란 존재는 뭐냐? 이것은 왕권 받은 분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해서 얼마 남겼습니까?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열 므나 남겼습니다. 열 고을 차지하라. 그다음에 다섯 므나 남겼습니다. 다섯 고을 차지하라. 한 므나는 내가 당신이 엄한 사람이나 무서워해서 그냥 갖고 있다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의 싸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여기서 아까 공통점이 뭐냐 하면 부재에 관해서 둘 다 주인이 있다가 없어질 때 비로소 각자의 정체가 탄로 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주인이 있어줘야 내가 종이 되는데 종인 척하지만 주인이 빠져버리면 내가 주인이라는 본색 가진 자를 추적해서 찾아내는 거예요. ‘누구야 너? 딱 들켰지?’
그러면 변명하기를 저는 주인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엄한 사람입니다.” “지금 나보고 엄하다고?” 그런 소리하지 말고 나는 주의 것이라 하면 끝날 문제를 엄해서 어떻고, 제가 할 도리를 어떻게 하고 자꾸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 자기변명을 자기변호지요. 그 변명은 어디 가서 하면 됩니까? 지옥에 가서 하면 되지요. 바빠서 교회 못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뭐냐 하면 주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그게 천국이에요. 지금 환경이 좋다, 한 달 수입이 얼마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주님 있으면 저는 좋습니다, 이게 바로 장수에서 완성이 되는 영생이 되는 거예요. 장수를 기대하다가 영생으로 도약해버리죠. 중간에 누가 끼어서? 진짜 왕, 중보자가 끼어들면 그렇게 돼요.
61편에 장수 말고 또 하나의 요소가 있어요. 그게 ‘날개’입니다. 4절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아까 강의 처음 시작할 때 시간 요소도 있고 뭐가 있다 했습니까? 공간 요소. 지금은 제가 시간 요소는 이만큼 이야기했으니까 장수에서 뭐가 됩니까? 영생 되었어요.
장수란 내가 주인공 되는데 이 주인공이 교체가 일어났지요. 내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산이 되는, 그분에 정복된 산의 일부가 되었어요. 굳이 산에 안 올라가도 이미 산을 정복한 분의 모든 혜택은 같이 받게 되니까. 우리 쉬운 쪽으로 갑시다. 어렵게 정복하려 하지 말고.
어떤 십자가마을에 그 질문했지요. 정치 이야기했잖아요. 대구사람은 왜 그러냐. 강남사람은 왜 그러냐. 인간이 보시에 인간의 속성이 뭐냐? 승리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승리자가 되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데 어떤 보상이냐 하면 내가 승리자가 될 만한 본질이다, 라는 것을 마지막 보상으로 내가 갖게 돼요. 역시 하나님은 나를 알아주는구먼. 내가 승리할 존재로 알아주니 나는 흐뭇하다. 이걸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쟁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게임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없어요. 게임을 기피하면 낙오자가 돼요. 그걸 지진아라 하지요. 성적이 안 올라. 초등학교 1학년한테, “너 뭐하고 싶어?” “나 놀고 싶어요.” 그럼 놀아라. 노는데 학교에 시험이란 게 있지요. 세상에 어떤 아이가, ‘엄마, 나 영점 맞기를 소망했는데 드디어 영점 받았어. 너무 기뻐’ 이런 아이 봤습니까? 없지요.
아무리 놀고 싶어서 놀았는데 사회는 게임 안에 종속돼 있다는 걸 분명히 합니다. 어떤 누구도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나이 많아도 마찬가지에요. “요새 연금 얼마 받습니까?” 이게 하나의 게임이라. “연금 얼마 탑니까?” “오십만 원.” “그걸 누구 코에 갖다 붙여요.” 인간이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항상 시도하는 것은 게임에서 밀리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다윗도 뭐냐? 높은 곳이에요, 높은 곳. 그게 나오지요. 2절에,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높은 곳. 아까는 시간 이야기했고 지금은 공간 이야기하지요. 공간적으로 높은 곳에 나를 두게 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잡기 위해서 따라와도 잡히지 않는 높은 곳, 그 높은 곳을 인간은 본성적으로 원하게 돼 있어요.
그거는 인생에서 어떤 게임을 해도 내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어떤 희생, 대가를 치르더라도 게임에서 몰두할 그러한 대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도소를 몇 번 가든지 형수를 정신병원에 보내든 말든 내가 재판에서 선거법 위반 되든 말든 ‘나 봐. 대통령 됐잖아.’ 대통령이 아무나 됩니까? 이번에 몇 퍼센트로 됐어요? 49.42%. 그런데 15%넘는다고 큰소리치다가 10%도 안 된 이준석과 비교가 돼요? 아무나 안 된다는 것을 게임에서 내가 승자가 됐다는 것은 거기에 합당한 자질이 된다는 것을 이젠 대외적으로 여러분들의 증명해준 거예요. 승자에 대한 증명.
나는 반드시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김민기 작사·작곡). 그 게임이 대통령 게임도 있지만 그 밑에 소소한 많은 층과 단계의 나름대로의 게임이 있잖아요. 저 밑바닥에도 게임들이 있어요. 북한에도 게임이 있다고요. 배급 먼저 받으려고 줄 서다 한 대 얻어맞고, 나름대로의 게임 있잖아요. 백화점에서 신상 사려고 할 때 줄 선 것 보세요. 하여튼 게임 없는 장소가 없어요. 공간 자체가.
그렇다면 이게 인간의 개념에서 나온 그거라면 아예 벗어나서 쳐다보기는 하고 도달할 수 없는 그 자리에 나를 앉게 해달라는 이게 바로 다윗의 기도입니다. 답변은 간단하죠. 이게 중간과정이죠. 신약에 도달되기 전에 구약에서 이뤄지는 인간 쪽에서 내미는 중보자 개념, 하나님 쪽에서의 중보자 개념이 다윗에서 서로 섞이게 되는 그 지점이에요. 인간의 패를 다 까게 하고, 그 패를 정반대로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의 메시아적 활동입니다.
아까 사르밧 과부 이야기 다시 보겠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갑자기 가뭄이 들어서 경제가 어려우니까 못 사는 사람부터 먼저 자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 집에 가게 했어요. 가보니까 죽기 직전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죽음이 오고, 또 죽게 되면 그 공간에서 사라지요. 거기에 누가 투입되는가? 엘리야가 투입이 돼요. 참 복잡해요. 죽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아들과 엄마가 죽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 결정이냐 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결정이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결정은 환경의 밀어붙임의 결과다. 그리고 이 환경은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모든 세계는 내게 속했다고 돼 있지요.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나온 결정은 하나님에 속한 결정인데 여기 누가 개입하느냐? 선지자가 개입합니다. 선지자가 개입한다면 아까 시편의 말씀처럼 높은 곳이라 돼 있고,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3절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그러니까 높은 곳을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왜? 다윗이 사는 게 힘드니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다윗의 생각이 하나님에게 접속함으로써 접수처에서 받아서 그걸 어떻게 완성시키느냐,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지 그것에 주목하면 되지요. 그 주목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4절에,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여기에 날개가 나와요, 날개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건 하나님의 예언이고 계시입니다. 내가 쏟아낸 예언을 접수를 주님이 받고 그 예언에 섞인 개념들을 주님 쪽에서 완성하고 싶은 안정적인 거처와 영원한 공간과 시간을 주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으로 완성시키고 적용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지요. 그러면 날개라는 것이 등장했을까? 그거는 아까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나옵니다. 4절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날개가 독수리 날개로 되었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남들은 독수리 타고 날아가는데 혼자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모조리 다 동일하게 독수리 날개 타고 애굽에서 광야까지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날개의 기능은 뭐냐? 남들이 나 있는 곳에 접근하지 못함을 알기 위해서는 나부터 접근 가능해야 돼요, 가능하지 않아야 돼요? (안 해야 돼요) 다윗이 이걸 몰랐던 거예요. 나만 가게 해달라고 했지 내가 과연 그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다윗은 있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사실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윗 말고 다윗 같은 새로운 다윗을 위한 공간에다 죽은 다윗을 올려버립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의 특징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야 돼요. 메시아 기능을 하면서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요. 약속은 하면서 온전한 약속을 받지 못했어요. 어제 히브리서 설교처럼. 다윗 시대가 끝나는 시대가 아니고 다윗의 자손이 예언된 대로 될 때 미리 예언을 주었던 사람들을 소급해서 다 그 세계에 들어갈 거예요. 엘리야도 모세도 마찬가지고. 변화산에서 주님이 영광스럽게 될 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게 다인 줄 알았어요. 다가 아니고 그 시대에 영광스런 주님이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야 될 일이 남아있었어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걸 몰랐어요. 여기가 좋아오니 그냥 들어갑시다.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내가 그냥 못 들어간다고요. 대신한 분이 있어야 돼요. 대체물이 있어야 돼요. 내가 제시한 대체물을 주께서 거부합니다. 주께서 친히 대체물로 해놓고 대체물 속의 일부로 들어감으로서 내가 저분 때문에 살은 게 아니고 내가 저분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인의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에요, 그냥. 하나의 관계라니까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주님이 여기저기 계시다는 것을 일관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증거물로 있지 나 여기 있고 주님 저기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주 안에서 함께 있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한 집에 살고 있는 거예요.
주의 날개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주님의 날개 위에 있잖아요. 독수리 날개 위에 있단 말이죠. 그럼 날개 밑에는 뭡니까? 올라갈 수가 없어요. 이건 뭐냐 하면 단절이에요, 단절.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스라엘은 외부 민족과 단절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이 단절성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계속 오래 살고 내가 안전한 곳에 가고 싶다, 라는 이 이야기를 계속 밀어붙이는데 이 전체가 독수리 날개 밑에서 노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요소가 독수리의 날개 입장, 개념을 유지하면서 이 날개가 날개답게 새로운 메시아가 와야 되겠어요, 안 와야 되겠어요? 와야 되겠지요, 새로운 메시아가.
끝으로 시편 76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1,2절) 여러분, 시온에 뭐가 있습니까? 시온에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는 어떤 장소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언약궤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다른 민족과 전쟁을 해서 구원받기도 했지만 그건 오해였고, 주님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궤를 지키는 하나님이에요.
언약궤가 독수리 날개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유월절에 양 잡듯이 언약궤 앞에서 매일같이 뭘 잡았습니까? 제물이 희생되었잖아요. 매일같이 반복해서. 근데 언제부턴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의 제사를 거부하고 직접 다이렉트로 자기를 지키는 신을 골랐는데 그 신이 뭐냐? 이방 종교 신이었습니다. 중간에 희생제물이 우선이고 우리는 희생제물을 증거하는 희생제물의 효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종속된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 어떡하면 내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이것 생각하는 거예요. 말이 통해요, 안 통해요? 끝까지 안 통해요. 독수리 날개가 막아버리니까.
제가 티비 보면서 잘 안 웃는데 어제 어떤 예능프로 보면서 웃었어요.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온 걸 보면서 식당주인이 날마다 회의해요. 매출이 얼마인지 식당주인이 직원들 모아놓고 묻습니다. 6월은 무슨 달이지, 물었어요. 시청자 중에서 아무도 예상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5월에 매출이 얼만지 밑에 직원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6월이 무슨 달이지, 하면 백 프로 …. ‘6월은 더욱더 우동 팔기 위해서 매진해야 된다’ 이런 답변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뭐냐 하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 해요. 지금도 우스운데. 그게 새로움이 아닙니까, 그게 새롭다고요. 그게 새로움이거든요.
예수 믿고 앞으로 내 계획은? 웃기고 있네. 그게 완전히 무산되는 거예요.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 했잖아요. 내 일을 없고 주의 일밖에 없어요. 이건 성경에 나옴에도 우리는 매일같이 잊어버려요. 모가지를 돌려야지. 십자가를 봐야지. 우리는 내 이름으로 하는 게 없어요. 그냥 밤비와 같아요. 내 이름이 없는데 맨날 걱정은 나에 대한 걱정밖에 없어요. 걱정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게 안 되니까 남한테 화풀이하고 만나면 성내고. 말은 안 했지 멱살 쥐고. 말은 안 하지만 너 좀 죽었으면 좋겠다. 내 눈에서 꺼졌으면 좋겠다. 맨날 주고받고요.
앞으로 서로를 볼 때 성령이 있는 사람 같으면 주님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너도 강도고 나도 강도고 우리 둘 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게 뭐냐? 내가 죄인이란 느낌은 도달할 수 없어요. 독수리 위에서만 통하는 개념이 내가 죄인이에요. 그 독수리 위에서 통하는 개념들, 지금은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주님이 거저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시간이고 사랑의 공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 우리를 보내 주신 것은 이제 구원받았다고 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가 주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가 동원되었음을 기뻐하는 철저한 주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