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1강( 화살과 과녁) 십자가를 아십니까 38강( 비밀보관함) 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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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250525)요약 히브리서 11장 9-10절(이사 가는 날) 이근호 목사
어제 했던 주일 낮 설교를 잠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복잡한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처음에 복잡한 내용은 신약의 수직적인 구조와 구약의 평면적인 구조, 그 구조의 차이는 뭐냐?
수학에서 차원 문제에 있어서 2차원은 1차원에 그림자만 나타나죠. 1차원, 선 위에 있는 존재는 면적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파악을 못하고 그냥 그림자로, ‘이거 뭐야? 흔적이네? 없어지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의 특징은 없어지는 거죠. 소멸하는 거죠. 3차원에 대한 실체는 2차원에서는 그냥 그림자로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3차원 공간을 지금 헤매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게 3차원 공간이거든요. 3차원 공간에 갔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3차원 공간에서의 목적지는 3차원 공간이 목적지가 되어야 되는데 3차원 공간 안에서는 어떤 도착지점이 없어요. 없으니까 헤맬 수밖에 없죠.
헤맨다는 것은, 거기서 감을 잡아야 되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기가 영원한 곳이 아니구나.’하는 감을 잡아야 됩니다. 감을 잡는 그 안에 그들은 공간 속을 헤매면서 그들은 특수한 시간들을 같이 겪게 되는 겁니다. 시간들을 겪는데 결국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어요.
이것을 합쳐버리면 ‘이 3차원 공간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나라) 흔적은 죽어서 사라짐’입니다. 죽어서 사라짐. 보통 이 3차원 공간에서 죽으면 끝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없는데, 하늘나라가 3차원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죽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는 거예요.
막벨라 굴에 집합해서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사라지면서 ‘갈 바를 알지 못했다’가 ‘있을 곳이 못된다’로 전환되죠. 아, 이곳은 우리가 있을 곳이 못된다. 그런데 있을 곳이 못되는 곳에 왜 우리를 보냈는가?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 바울이 아주 파격적인 고백을 해요. 내가 셋째 하늘에 갔다는 거예요. 셋째 하늘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둘째 하늘을 거쳤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왜 이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셋째 하늘을 모르는가? 둘째 하늘에 막혀있었습니다.
셋째 하늘에 있는 요소가 둘째 하늘로 오면서 왜곡되게 되어 있어요, 전부다. 왜곡이라 하는 것은 상(象/像)이 틀어지는 거예요. 엉뚱하게 틀어지는 거예요. 틀어지면서 첫째 하늘에 도착하니까 첫째 하늘에 사는 입장에서는 셋째 하늘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왜곡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디서 오셨습니까?’라는 말을 보통 안 믿는 사람들은 하지만, 아브라함은 천사에게 ‘어디서 오셨습니까?’ 말을 안 해요. 삼손의 부모는 천사한테 ‘누구십니까?’ 물었잖아요(삿 13:17). 누구십니까, 물을 대상이 아니에요. 그들은 3차원 공간에 그림자로 왔던 하늘나라의 흔적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셋째 하늘에서 왔단 말이죠. 그럼 궁금한 게 둘째 하늘을 어떻게 통과했나 하는 거예요. 첫째 하늘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과 인류사는 영원히 간다, 끝이다, 다른 세계는 없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시편 19편과 시편 136편에 보면, 해와 달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간에게 그걸 믿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9장에 무지개 있잖아요. 창세기 9장에 모든 첫째 하늘을 무지개 아래쪽에 두었다고요. 무지개 아래쪽에 있으니까 무지개부터 셋째 하늘 사이는 노아 홍수, 심판했다는 그러한 요소가 차 있는 거예요.
두꺼운 심판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계절, 햇빛과 공기를 주시니까 여기가 일종의 온실같이 느껴져서 이 세상 안에서만 모든 자기의 세계관이 여기서 확정되도록 그렇게 됐단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무지개 안에 뭐를 집중해서 이야기하느냐? 피 이야기했어요.
피 있는 것 먹지 마라. 피 흘리지 마라(창 9:4-6).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데, 피째 먹지 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마라는 말은 너희 인간들이 낼 수 있는 피와 하나님 법에 의해서 생긴 피를 철저하게 구별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생긴 피만 셋째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 피는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심판 속을 같이 경험했던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피죠. 방주 안에 짐승의 피. 그 짐승의 피는 시편 136편의 말씀처럼 자비를 나타내는 거예요, 자비. 유일한 자비.
그래서 노아의 함과 노아의 가나안은 이 자비성을 몰라서 아버지가 술 먹고 벌거벗을 것을 보고 얼레리 꼴레리 한 거예요. 이 자비심을 놓치니까. 자비심을 놓치니까 둘째 심판에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아래 세계는 둘째 심판의 통제 하에, 지배 하에 들어간다.
그럼 셋째 하늘로 통과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피에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피만이 첫째, 둘째, 셋째를 통과하는 경로를 형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두 번째 층을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셋째 하늘에서 첫째 하늘로 오니까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형편없는 몰골로 오는 거예요. 형편없는 몰골로.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망가지게 했지? 둘째 층을 통과한다고, 마귀를 통과한다고 그렇게 형편없이 된 거예요.
둘째 층을 통과하면서 망가진 모습으로 왔을 때 그 둘째 층의 망가진 모습이 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층에 속한 모든 인간이 둘째 층에서 전쟁 벌이고 있는 악마하고 한통속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첫째 하늘에 속한 인간들은 메시아를 처참하게 망가뜨려줘야 되죠. 처참하게.
그리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 해와 달 등은 ‘아무 문제없다’가 돼요. 아무 문제없는 공간이 됩니다. 첫째 하늘 아래서 악마가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양육하고 있는 거예요. 훈육하고 있고 사육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주일 낮 설교에서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저 할 만큼 했습니다. 이 문장입니다.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저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것은 세 글자로 표현할 수 있어요. ‘정당성’. 다섯 글자로 ‘나의 정당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어디 가도 내 나름대로의 할 도리 했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의식으로 인하여 둘째 층을 통과 못해요. 둘째 층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첫째 층을 통해서 첫째와 둘째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의 증거물을 갖고 있어야 둘째 층을 통과할 수 있거든요. 그 대표적인 분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에요.
스데반 집사가 셋째 하늘 이야기를 해버렸다고요. 귀를 막고 짱돌 던졌잖아요. “안 보여, 너희? 예수님 서신 것이 보이는데?” 이 얼마나 도발적인 발언이에요. “뭐? 하늘, 구름?” 요즘 과학자가 이야기한다면 “하늘 뭐? 전자의 산란? 입자? 분자, 원자 그것만 보이는데.” 왜? 그것만 측정하고 있으니까. 양자, 광자 이런 것만 보이는데. “예수님이 안보여?”
이렇게 되어버리면 층을 아래층으로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세층으로 확장해서 그걸 한꺼번에 보는 눈이 필요한 거예요. 그 눈은 그 안목은 예수님께서 주셔야 되죠. 성령으로 주셔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녀갔기 때문에 1층, 2층, 3층 다 보이는 거예요. 다녀가지 않으면 1층, 2층, 3층이 있는 걸 모른다고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했잖아요.
그래서 다녀가시면서 주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어제 낮 설교에서 이 문장으로 제가 함축을 했습니다. 어떤 안목을 가지느냐? ‘우리가 살 남은 날은 지난날이다.’ 우리의 앞으로 남은 날은 지난날만 살 게 남아있어요. 지난날만.
어째서 이게 가능하냐 하면 죽은 다음에 재방문하면 돼요. 이미 죽은 다음에 재방문하게 되면 우리가 살 남은 날이 결국은 내가 죽어서 거쳐야 될 날들만 아직 우리가 살 날로 남아있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살면서 해야 될 일은 우리가 꼭 죽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날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죽을 짓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멀었어요. 그 죽을 짓은 아직 많이 남아있거든요.
죽을 짓을 할 때 악마에 속한 자들은 이걸 싫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거절’ 이것을 제일 싫어해요. 누가 나를 거절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누가 나를 거절하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런데 그 심성을 인간도 똑같이 닮았어요.
닮아서 자기 행함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누가 나를 거절하게 되면 반드시 반대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대표적 모델이라고 여겼는데 그들의 구원을 거절했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죠.
주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1층과 2층, 3층 각각의 내용에 대해서 한꺼번에 보게 하는 겁니다. 특히 2층 같은 경우에는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자존심이 있는 한 절대로 못 통과하는 거예요. 퇴짜 놓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퇴짜 놓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인간들은 일본에 가면 있는 후지산이죠. 자기 딴에 낮추고 낮췄습니다, 비웠습니다 했지만 결국 이 고깔 같은 자기 의가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후지산꼭대기에 있는 하얀 눈, 눈 쌓임 이것을 확인하는 삶이죠.
그럼 왜 이렇게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이 살아 있는가? 인간으로서 스스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내 삶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에요. 삶의 기쁨.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 가지면 안 되느냐? 안되죠. 그게 뭐를 가로막고 있어요? 나의 구원받은 기쁨은 어디로 다시 돌아오느냐 하면 내 것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런데 감사는 뭐냐 하면 내 외부의 인물에 대한 거예요. 외부. 나한테 감사하는 게 아니고 내 바깥의 인물에게 감사하면, 이 삶의 기쁨마저 좌절되고 그 속에서 감사로 고마움으로, 나한테 말고 다른 분께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기뻐해도 탈이에요. 구원받은 기쁨도 복음의 기쁨도 탈날 정도에요.
그 감사는 아까 시편 136편도 이야기했지만 ‘해를 봐라. 달을 봐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이렇게 되거든요. 비로소 첫째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속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파악이 되는 거예요.
그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방독면을 벗자’에요. 방독면을 벗어버리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천사 조교는 뭐라고 합니까? “빨리 나가!” 하죠. “빨리 나가. 이 세상 빨리 나가.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나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기를 소원하죠. 빨리 빠져나가기를.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이거 뭐 코로나 예방주사 또 맞아야 되지, 온난화 때문에 뭐 하죠.
특히 설교에서 말 안했습니다만 이 말까지 하려 했었어요. 후지산 눈 있잖아요. 온난화가 되어버리면 꼭대기에 있는 후지산 눈이 녹습니다. 그러면 눈이 산꼭대기에 있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형편에 이 자기 의가 다 녹아져있어요. 자기 정당성이.
따라서 정리하라면 이거에요. ‘환경문제’라는 거예요. 인간의 자질이 어떻고 인간이 얼마나 덜 훌륭하냐 더 훌륭하냐 그런 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내가 좀더 열심히 할 걸, 바르게 하면 이런 일 없을 텐데, 그런 거 다 악마의 속임수에요. 환경문제입니다. 새로운 환경.
그래서 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이야기하신, 아직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 기도, ‘십자가를 믿게 하옵소서. 아멘.’ 십자가 안의 각설탕처럼 녹아지게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모든 것은 네 뜻대로 안 된다. 겟세마네에서 나도 겪었어. 내 뜻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그것을 응답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카피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 첫째 하늘 살면서 하셨던 모든 것이 우리한테 그대로 카피되어서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심지어 죽는 것마저도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죽지를 못합니다. 어차피 죽은 인간이니까 네 죽음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재방문이니까. 고향 방문이거든요. green grass of home. 옛날 살던 동네에 재차 방문이니까 어떻게 죽든 살든 주님의 죽으심을 카피하듯이 그렇게 살면 되는 거죠.
대전-신명기(30강) 신명기13:16(화살과 과녁) 20250526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3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말하는 ‘그’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들을 말합니다. 9절에 보면, ‘너는 죽이라.’ 정도가 아니고 앞에 뭐가 붙어 있죠?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용서 없이 죽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 바깥쪽에는 그냥 자비가 없음이 아니라 무서운 진노가 있는 거죠. ‘여기는 용서가 있고, 저기는 없다’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퍼붓겠다는 거예요.
그 다음 9절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절 끝에는 “너는 돌로 쳐 죽이라” 했죠. 죽이라는 말이 벌써 두 번 나옵니다. 그 다음에 15절 보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죽이는 거 또 나오죠. 16절에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재개발 지역에 불도저, 또는 포크레인 장비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재개발 지역에 있던 많은 추억과 많은 아름다운 과거가 소복이 담겨 있던 그 허름한 건물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불도저나 포크레인은 그냥 깨부수잖아요. 추억이고 기억이고 그런 낭만적인 거 없애버리고 그냥 밀어 부쳐버리죠.
그러면 뭐가 남습니까? 황무지가 남죠, 황무지가. 상당히 하나님께서 너무 섭섭하게 하신다는 생각도 들겠는데, 섭섭하게 하는 게 아니고요, 인간은 없는 데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이에요. 그러면 천국 백성 만들려고 하면, 만들어진 인간으로는 안 되고, 이 만들어진 것을 뭐로 바꿔야 돼요? 없음으로 다시 원위치로 돌려야 되는 겁니다.
있는 걸 고쳐 쓰는 게 아니고, 있는 것은 아예 없애버리죠. 없애버리는 것을 가지고 ‘죽이라’, 죽음이에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자꾸 우리 자신이 안 죽은 상태에서 교회 나오고, 성당 다니고 ‘믿겠습니다.’ 해버리면 이것은 주님이 하는 일에 거슬리고, 훼방이 되죠.
공식 적어보면, <주의 일은 내가 방해한다.> 여기서 ‘내’란 살려고 하는 나, 살려고 하는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합니다. “남편이 놀지 말고 돈 좀 벌어야지, 연금 가지고 안 되잖아.“ 이런 거요. 주의 일을 방해해요. 그러니까 아까 주일 오전설교 요약처럼 방해해야죠. 집에서 꽃이나 꽂지 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가지고 주의 일을 방해해야죠.
방해해야 뭐가 실감나고, 뭐가 체험되느냐 하면, 바로 신명기 13장 8절에서 18절이 체험돼요. 죽이라는 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과 인간 간에는 사이좋게 살고 싶지, 누굴 죽이고 싶지 않아요. 죽이라고 독촉하는 것은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남을 죽인다는 것이 엄청나게 독해야 죽일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남 죽일 정도로 흉악범이 되기 싫어요. 왜? 살아있는 나는 건전하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따라서 율법을 줘서 저들을 죽이라는 말은 그 율법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은 그들이 죽는 것처럼 너희도 똑같은 입장에 있다는 거, ”율법이 너희들을 죽일 거야. 없게 만들고, 죽게 만들 거야.” 라는 얘기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특히 여기 16절에 보면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라 했죠.
‘불사르라’ 불놀이 할 것도 아니고, 불살라서 뭐 할 건데요? 이 점은 고린도전서 3장을 찾아봅시다. 3장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아멘. 불에 집어넣어서 불을 그냥 통과시키는 겁니다. 심판의 불이에요, 심판의 불.
그러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했던 모든 착실하고 성실한 모든 것, 부모한테 효도하고, 자식 교육 잘 하고, 부부가 유별한 이 모든 것을 살아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게 자기 의가 되고, 후지산의 고깔 눈처럼 우리 속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내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 보람, 이런 게 남아 있어요.
보통 가족 중에 누구 한 분이 돌아가시면 그 다음부터는 털썩 낙담이 되죠. 자기가 존재할 이유가 날아갔으니까. 경상도에서는 뭐라 하냐 하면, “아이고, 내가 더 살아서 뭐 하겠노?” 자식들 앞에서 남편 죽고 난 뒤에 “내 느그 아버지 죽고 나니 살맛이 없다.” 그러면 딸들은 “엄마, 우리가 자주 와서 반찬 해놓고 잘 할게.” 그럴 때 옆에 있는 며느리는 아무 소리 안하죠. ‘시누이 니가 해라. 느그 엄마지, 내 엄마가?’ 하면서 가만히 있어요.
그 아들은 “어무이, 내가 정기적으로 용돈 대겠습니다.” 온다는 말은 안 해요. 지 마누라가 못 가게 하니까. 온다는 말은 안 하고, 용돈만 댄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그게 얼마나 자식들도 긴장되고, 아들도 긴장되고, 부인은 낙담하고 있고, “나는 이제 못 살지 싶으다.” 그러다 치매 걸리는 거예요. 살 이유가 없으니까, 자기 존재가 이만큼 꽉 차게 했던 한 부분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이 빈 공간을 뭘로 채웁니까? 채울 방법이 없거든요. 라인댄스 해봐야 늙어서 박자도 못 맞추는데요. 나가라고 눈치 줘서 못하죠. 노래 따라가지도 못해요. 그러니 이렇게 아무리 주변 사람이 늙어 죽고, 병들어 죽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나에 대한 처분이 자기한테는 제일 다급하고, 마지막 남아있는 숙제 같은 겁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한테 <고귀함의 경쟁 비교>를 시킵니다. 누가 고귀하냔 말이죠, 누가? ‘뭣이 중헌디?’라는 말 있잖아요. 영화 ‘곡성’에 나오는 말. 무엇이 소중한 겁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던가요? 없죠. 없는데, 여기 신명기 13장에서는 가차 없이 네 손을 들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대 가지고 “내가 앞장서서 이 사람 죽였다. 너희들 증인이지, 봤지? 내가 죽이게 했다.”(9절)
주께서 그렇게 독촉하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여호와 안 믿는 사람을 돌로 쳐 죽였잖아. 그 다음 차례는 너야, 너! 네가 죽인 것처럼 네가 죽어야 돼.”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봐.’ 이런 식으로. “그 다음 차례는 너야!” 이러한 환경 속에, 구조 속에 주님께서는 강압적으로 이스라엘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는 뭐냐? 공력을 다시 주께서 검사하는 거예요. 재검하는 거예요. 무엇을 재검하느냐?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는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없앤다. 왜? 둘째 하늘을 통과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만 둘째 하늘을 통과해서 셋째 하늘에 도달해 간 거예요.
어쭙잖게 자기 행한 것 가지고, 선행 가지고, 자존심 가지고 가면 둘째 하늘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셋째 하늘까지 갔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전부 다 그냥 선포해 버린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실 거 같은데, 확실하지 않지만, 천국 갈 때는 여러분은 성명서를 듣게 될 겁니다, 성명서, 담화문.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 13, 14절에 나와요. 천국에 딱 도착했습니다. 딱 도착하니까 성명서가 들려옵니다. 13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어디서 왔지?’ 이제는 선배죠. 고참, 선배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말을 안 해요. 14절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당신이 압니다. 장로님, 당신이 아시잖아요. 다 같은 코스 아닙니까?’ 이런 뜻이에요.
14절 이어서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피, 이게 바로 성명서에요, 성명서. 신입 천국 백성이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빰빠라밤 하고 성명서 쫙 울립니다. “이들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된 사람들이 이제 신입으로 천국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보다 아름다운’ 그 드라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십자가 피가 빠졌는데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그러니까 이 피가 천국에서 발린 게 아니고, 이 지상에, 첫째 하늘에 있을 때 이미 십자가 피와 관련된 인물로써 선택된 거예요, 뽑힌 거예요. 피를 증거 하라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무엇과 동행하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과 동행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당했던 팔자와 운명을 약속의 땅까지 어린양이 가고 있으니까,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같이 있으니까, 어린양이 가고 있으니까 졸졸졸 따라서 그 어린양의 가는 코스대로 그들은 같이 가고 있는 겁니다.
어린양의 존재 이유가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여야 되고, 어린양의 그 가는 목적이 이스라엘의 목적이어야 되고, 어린양이 활동하는 그 보람이 이제는 이스라엘의 보람으로 넘어와야 돼요. 이스라엘로 넘어와야 돼요. 그런데 어린양이 뭐냐 하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첫째 시간의 핵심 부분에 도달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면,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면 이 땅에 오시지 않아요. 보통 생각하기를 ‘죽으면 다시는 이 땅 사람이 아니다, 안 온다.’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가 아니고, 죽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 땅을 성령으로 방문하시고 재림으로 방문하시는 거예요. 죽으셨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죽으셨기 때문에 이 땅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죽어있다는 것을 통보함으로써 그 속에서 예수님의 천국의 어린양과 똑같은 팔자, 똑같은 인생길을 가야될 자를 자신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그 능력으로 카피(copy)를 하고, 능력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고전1:18).
살려고 하는 자에게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능력이 임해버리면, 예수님이 죽었던 환경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너희들이 지금 놓여있다는 것, 그래서 너는 죽어가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냐? 참 기쁘다, 죽어가는 게. 주님께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빨리 죽어서 주님과 합류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가 된 거예요, 보람이 된 거예요. 존재의 이유가 된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정도의 입체적인, 수직적인 그런 세계관은 율법이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냥 그림자로, 제단, 성전 다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였기 때문에 항상 3차원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 의하면, “안 믿는 사람 다 죽이고,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버리라.” 했지만, 이건 일방적인 하나님의 말씀 주장이고, 그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한테는 당연히 거부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게 아니고, 알아요. 내(주님) 말한 대로 안 지킨다는 것을.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는 지켜요,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남을 죽여라’ 그것도 ‘용서하지 말고 죽여라.’ 아, 이것은 정말 힘든 겁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신약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거주할 의사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을 듣고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랬다고요.
‘전세집도 아니고, 월세집도 아니고 이 땅에 거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그냥 거처할 의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은 ‘모든 족보로부터, 족보가 네 거주지가 되지 말라.’는 뜻이에요, 족보까지. ‘족보 자체로부터 벗어나라.’ 이 말이에요, 족보 자체로부터.
그런데 제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 장사 지내는 것만 허락해주시면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족족 이거는 도저히 실천에 옮길 만한 말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것도.
마가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미움을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해요.(막13:13) 이게 아까 말한 ‘거절’이에요. “네가 미움을 받아야 된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점을 이 시간에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제가 먼저 한 문장을 쓸게요.
<물리적인 접촉이 없음에도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물리적으로 누가 때린다, 민다, 목 조른다는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물리적인 접촉은 아니잖아요. 음파가 전달된다 뿐이지. ‘어떤 사람이 욕을 한다.’ 물리적인 접촉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왜 화가 나고, 분노하느냐 이 말이죠.
이 문제가 왜냐하면, 우리가 거울 볼 때 뭐가 보이죠? 나의 육체만 보이죠. 마음 같은 건 안 보이죠. 육체만 보이는데 우리는 이걸 가지고 ‘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실제로 사회에서 육체가 ‘나’라면, 물리적으로 떠민다든지, 밟는다든지 그런 게 없으면 나한테 해코지가 없는 걸로 간주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육신이 나니까.
그런데 욕을 먹는다든지, 째려본다든지 그런 거에 대해서 왜 은근히 화가 나냔 말이죠.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는 질문에 “우리 아버지 조폭입니다.” 라고 했는데 왜 시계 풀고 “너 오늘 좀 맞자.”라고 하는지, 그게 왜 맞을 짓이냔 말이죠. 아버지가 조폭이니까 조폭이라고 한 건데 선생님이 왜 화를 내느냐? 왜 모든 매사가 물리적인 접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화를 내느냐?
특히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가롯 유다 불러서 쥐어 팼습니까? 그래서 가롯 유다도 예수님 때려죽이려고 한 거예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폭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죽는 데 팔아 넘겼는가? 왜 화가 났느냐? 그것은 진짜 인간은 숨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인간은. 내가 몰라요. 내가 모르는 인간이 숨어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중문을 설치했습니다. 문이 두 개예요. 문 안에 문이에요. 앞에는 열린 문, 열린 문 안에 닫힌 문이 들어 있어요.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완전히 올무에 빠진 거예요. 이제 빼도 박도 못한 거예요. “야, 천국이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우리를 구원한단다. 야, 우리 민족 너무 감사하지? 들어가자.” 그런데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주께서 이스라엘을 팼습니까? 팬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준 것은 언어예요. 문자, 십계명,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짜 인간이라는 것은, 육체보다 진짜배기 보이지 않는, 그 동안 악마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그 이미지가 각자 인간의 육체를 덮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열린 문이라고 덜렁 들어왔는데, 안에 닫힌 문이 있어요. 그 닫힌 문 입구에 뭐가 있느냐? 유월절 양의 피가 묻혀 있습니다. 피가 묻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했죠. 나 구원받기 위해서, 또는 나와 내 가정 구원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유월절 양이 주인공이 된 공간에 그들이 들어왔습니다.
누구든지 유월절 양이 가는 길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에게 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합류한 사람 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뭐 어차피 우리는 유월절 그 때 이미 죽은 자로,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았지, 우리가 살았냐?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죽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가 지금 유월절 어린양과 함께 동행 하면(그게 제사거든요), 동행한다면, 죽든 말든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서 14장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롬14:8) 한 번 적어볼게요.<사나 죽으나 주의 것> 사나 죽으나 내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 것인 것을 주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율법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것은 어떻게 갖고 있느냐? 내 것은 소유성이에요, 소유성.
나는 뭔가 소유함으로써 내가 존재하거든요. 내가 있다는 이 소유성을 주님께서 악마성으로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내가 소유하기 때문에 소유가 아까워서 나를 못 놓는 거예요. “나는 내 거다.” 왜? “내 거라고 가진 게 있기 때문에.” 신약에 오면, 이것을 이렇게 처리합니다. 신약에서는 굉장히 간단해요.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세계에 나는 없다.’가 돼요. “네 중심의 세계관을 만약 네가 붙들고 있으려면 네 입에서 지옥, 천국 이야기 하지마라.”는 뜻이에요. 왜냐 하면, 천국, 지옥은 나하고 상관없기 때문에. 바로 그쪽 세계로 넘어 와줘야 돼요. ‘내가 천국 간다.’가 아니고, ‘내가 지옥 간다.’가 아니라, 지옥도 나가 없고, 천국도 나가 없고, 천국, 지옥은 나하고 연계시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다른 분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지옥이고, 천국이에요.
지옥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세계지, 나쁜 짓 했다고 가는 곳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과 나가 상관이 없고, 천국과 나와 상관이 없어요. 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분노하는 것은 지금 무슨 세계가 나를 꽉 잡고 있다? 내가 만든 나의 세계가 나를 안 놓고 있는 거예요, 발목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주여, 율법대로 살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나랑 상관없는 천국,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율법을 줬는데, 자꾸 우리는 나와 지옥, 천국을 연관시키는데, 연관시킬 수가 없어요. 그 점을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이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에서와 야곱> 에서와 야곱에 있어서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자, 방금 이야기한 게 정리되겠죠. 망령된 것, 죄죠. 죄가 뭐냐? ‘내 것 있음’을 전제로 할 때 발생되는 게 죄에요.
실제로 어떤 남자 형제 둘이 ‘유퀴즈’라는 프로에 나왔어요. 호주 코메디언의 아들들이에요. 유재석이 물었어요. “너희는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싸운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다시 “싸우면 어떻게 풀지?”라고 물으니까, “과자 하나 주면 싹 풀려요.” 그러는 거예요. 형제 간의 서열의 문제가 과자 하나로 해결되어 버려요. 과자 주면 입을 다무는 거예요.
얼마나 육체적입니까? 달콤한 거, 먹고 싶은 거. 야곱이 형이 올 때 즈음 되어서 팥죽을 해서 냄새를 막 피우는 거예요. 팥죽을 해놓으니까 마침 사냥 갔다 와서 배고픈 타이밍에 동생이 “스톱, 잠깐!” 하니까 “야, 동생, 한 번 봐줘. 너무 먹고 싶다, 알잖아.” “아, 공짜로 안 돼.” “ 뭘 해야 이 팥죽 먹을 수 있겠어?” “내가 형 되고, 네가 동생 해라.” “아, 그게 뭐 중요해? 네가 형 해, 내가 동생 할게.”
지금 성경에서 그 철없는 형제간의 이야기가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천국, 지옥 그 시스템의 고귀함, 그 엄중함, 엄격함을 철딱서니 없는 에서가 그 귀중함을 지금 놓치고 있다,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이 방해했습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자기에 대한 소유성, 소유욕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신명기 13장의 말씀은 이게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팔 걷고 한 번 나서봐?” 이런 뜻이에요, 신명기가. “네가 못 했잖아. 그러면 말씀, 내가 할게.” 이거예요. “네가 못하면 말씀, 내가 할게.” 자, 그러면, 아까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육체로 되어있다, 육체가 기본이다.’ 어제 낮 설교한 것처럼 ‘인간은 근육에 집중한다.’ 인간은 근육에 집중하죠.
근육에 힘을 집중해야 꽃도 이렇게 분꽃을 피우고 할 게 아닙니까? 힘 없으면 누가 피웁니까? 안 되지요. 힘에 의존하는 이것을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 하면, ‘말씀을 먹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전에 신명기 8장에서 했어요. “내가 너희에게 만나를 준다.” “야, 만나다.” “스톱, 스톱, 스톱. 이거 네 생각에 뭘로 보이냐?” “양식이잖아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육의 양식 아니야.”
크래커 모양의 먹을 것을 줬으니까, ‘이것은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소유, 근육, 힘, 이런 것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탐하고 있으니까, 만나를 보고 먹을거리라고 인간은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이게 먹을거리가 아니고 생명의 양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육신이 기준이고, 기본이고, 육신이 되고 난 뒤에 ‘인간이 양심대로 살아서 사람답게 산다.’ 이게 인간의 출발점인데, 주님께는 뭐가 출발점이냐 하면, “내가 너한테 뭘 던져준다.” 뭘 던져주느냐? “말씀이 너에게 꽂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넌센스 퀴즈인데, 누가 한 번 아이디어 내보세요.
어떤 사람이 활만 쏘면 10점, 엑스트라 10점에 꽂혀요. 그 사람이 양궁 선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쏘기만 하면 10점, 정중앙, 다시 해도 또 10점.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생겼을까요? 제가 말하는 게 빠르겠죠. ‘과녁 있고 활쏘기’를 순서를 바꿔서, 활 쏜 뒤에 활을 중앙으로 해서 과녁을 그리는 거예요. 뭐, 백발백중이죠.
우리 성도가 죄 짓고 난 뒤에 주님께서 이것을 10점 만점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말씀의 활동입니다. 참, 이래도 안 고마우면 진짜 문제 있다, 정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키면 다 가능한 쌀이 되든, 뭐 하든 간에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완전케 하시느니라. 인식이 완전히 순서가 말씀부터 순서를 잡는 거예요.
“말씀을 말씀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육신이 채택되었다, 초대되었다. 말씀 세계에 강제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또 우리가 이용하면 안 돼요. 절대 이용하면 안 돼요. 왜 이용하면 안 되느냐 하면,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할 때 오는 게 아니고, 열심히 과녁 먼저 있고, 우리가 활쏘기를 하고 있는데다가 뒤통수를 때려버려요.
“네 원대로 될 줄 알았지? 네 원대로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치아라! 내 원대로 된다.”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 조성되어야 돼요, 말씀이. 그러면 환경으로 말씀이 조성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게 신명기 8장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테스트 용으로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사용하십니다, 테스트 용으로. 마음을 낮추는지, 안 낮추는지 시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태어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는 세상 다른 불신자한테는 그냥 지옥이고, 성도한테는 테스트, 시험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 시험은 이미 예수님도 같이 겪었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당했던 테스트를, 테스트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혈압계로 혈압을 쟀다면, 예수님이 쟀던 혈압계로 오늘날 우리도 재는 거예요.
150에 120 나오면, “아, 약 먹어야 되겠다.” 120/70 나오면 “아, 정상!” 90/60 나오면 “이건 저혈압이다, 위험하다.”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은 테스트 하는 거예요. 테스트 할 때, 어떻게 테스트 하냐 하면, ‘네가 지금 어느 정도 오버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정도 화내고, 분노하고 있는지?’
모든 일상에 대해서, 내 일상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아, 짜증난다.’ 하루하루 일상이 짜증이 나는 거예요. 처음에는 짜증에 이유가 있었어요. 몸이 아프다든지, 돈이 없다든지 해서 짜증났는데, 나중에는 짜증이 버릇이 되어가지고 이유도 없이 그냥 짜증이 나요. 심지어는 심심하다고 짜증내고요, 돈은 있는데 돈 쓸 데 없다고 짜증내고, 돈 쓴 값이 제대로 빛이 안 난다고, 백화점 옷 샀는데 또 바꿔야 돼. 왜? 내가 의도한 대로 안 돼, 내 뜻대로, 내 욕망대로 안 돼. 그래서 모든 게 짜증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선을 넘은 거예요. 오버한 거예요. 완전히 무슨 높이뛰기 하는 것도 아니고, 넘어선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죽기까지 낮추는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극단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잊어버린 그 십자가를 다시 알게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말씀이 하게 돼요. 구약에서는 말씀이 하고,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다 이룬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그걸 수시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보통, 불신자는 첫째 하늘이니까 그냥 세상에 있어요. 천문학자, 과학자들은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을 살피고, 농사짓는 사람은 살폈던 그 법칙을 기상청에 전화해서 “오늘 날씨 어때요? 씨 뿌려도 될 날씨인지 모르겠다.” 이런 거고, 돈 있는 사람은 “오늘 날씨에 놀러갈 수 있을까?” 이러거든요.
그런데 성도는 그물망, 말씀의 그물망 속에 성도가 담기게 돼요, 이 땅에서. 그런데 다른 불신자는 이게 안 보여요, 안 느껴지고. 그런데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구원되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에 뭘 느끼느냐? 잊어버렸던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하고 똑같아요. 늘 화나고, 짜증나고, 성질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는데, 이 그물망이 뭐냐? 테스크기예요. 테스트하게 되면, “아, 내 할 일은 남들처럼 소유를 늘리는 게 아니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것을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이 말씀 그물과 부딪히게 해요. 그런데 이게 얼마 안 가요.
왜 얼마 안 가느냐? 이게 얼마 안 가야 다른 말씀도 골고루 새롭게, 새롭게 맛보게 하기 위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가 쓱 지나가고, 또 다른 데 가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는 거 알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어.” 이 말씀이 생각나고.
그래서 하여튼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쳐 놓은 말씀의 그물망에 어디에 걸리든 걸리게 되어 있어요. 걸리는 중에서 이 시간에 한 번 우리가 걸려봅시다. 아모스 8장 11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우리가 모여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장소까지 없어질 날이 온다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는 곳이 모조리 폐쇄되고 없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거예요, 그 날이. 그 때에 성도만이, ‘어디 말씀 없냐?’고 찾는 자만이 말씀의 그물망 안에서 이미 구원된 자들이에요. 이미 구원된 자들.
뭐, 요새는 종교계도 없다며? 종교계가 있으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양식이 중요하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관심사가 “어디 말씀 없나?”하고 찾고, 불신자들은 “트럼프가 관세 좀 낮춰주지.” 이런 거, “대선 때 공휴일인데, 노나?” 이런 이야기 하고, 불신자들은 모든 관심사가 말씀이 없는 상태를 계속 찾고 있어요. 왜? 마음의 욕망에 기근이 왔으니까, 기갈이 됐으니까.
말씀의 기갈이 아니고, 나를 즐겁게 할 새로운 이슈가 없어서, 이슈가 없어서 기갈인 거예요. 프로야구 팀이 열 개잖아요. 그러면 꼴찌는 정해져있어요, 한화. 그런데 한화가 요새 1등이에요. 9등이 어디냐? 롯데, 롯데가 요즘은 2등 한다고요. 신났지 뭐. 부산 가면,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노래 부르면서 신났지요.
부산은행에서는 4강에 들어가면 금리 1프로 올려줍니다. 0.1프로인가? 부산갈매기 노래 부르고, ‘어쩌다 한~번’ 연안부두 부르고 하는 거예요. 삼성은 저 뒤에 9등인가로 쭉 떨어져있고, 그게 뭐냐 하면, 그때그때 즐겁고 재미나는 일, 요새 젊은 애들처럼, 그것을 계속 내 소유, 내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애는 왜 낳아? 개 키우면 되지. 애 키우면 골치 아픈데, 애 낳다가 뱃살 늘어지고, 내 아름다운 체형 다 망가지고, 애 있으면 부부간에 화목한 시간을 못 보낸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육신, 육체를 즐겁게 하는 데 모든 관심이 쏟아져 있습니다. 그럼 그 시대가 어떻게 되냐? 예수님 십자가 이후로 그런 시대에 돌입했어요. 돌입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말씀을 찾으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교회가 말씀을 안 전하죠. 교회는 재미나는 놀이해서 오는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하죠. 애들 영어 공짜로 가르쳐 준다든지, 노인들 다 챙겨주고, 우리 교회 오시면 비뇨기과부터해서 의사들 있으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은 염가로 해줍니다. 의료보험증만 내면 해줍니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냥 붙들려고 하죠. 예배당 지어놨으니까.
말씀은 없지요. 재미나는 교회, 신바람 나는 교회, ‘탁구장 있습니다. 노래방 있습니다.’ 이런 거 다 기본으로 갖춰놓고요, 특히 젊은 새댁들을 겨냥해서 ‘아이들에게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이 공짜로 다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 주일학교 때부터 잡아야 걔가 커서 어른 되어도 대예배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는 말씀의 그물망이 아니에요. 인간의 욕망, 내 욕망의 그물망, 내 결핍된, 내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그냥 하나님 말씀은 빠지고 인간 대 인간의 이익적인 서로 정보 교환을 위주로 연결되죠. 그게 특히 미국이라든지, 해외에 있는 교회들이에요. 바로 정보교환을 위해서 그렇게 활용들을 많이 해요.
자, 이 한 마디만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3절 다시 보면요,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누구라?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로 위에 중간에 뭐라도 얹지 마라 이 말이죠.
예수님의 공로와 결부된 것이 뭐냐? 불을 통과한다 했으니까, 불 통과 못하면 그건 지옥 구성원들, 불 통과 되면 그것은 천국 구성원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면, 나하고는 상관없는 동네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되겠죠. 10분 쉽시다.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7강) 눅12:49(비밀 보관함)20250526b(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로서『십자가를 아십니까』를 다 끝내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마지막에 [십자가와 전도]라는 제7강을 하겠습니다. p.184 밑에서 8번째 줄 보겠습니다. [민중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인물에게는 로마 군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무슨 능력 같은 게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폭풍을 진압하셨고 귀신을 축출하셨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셨고 가시는 곳마다 병에 들린 사람들을 온전케 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전도가 시작됐죠. 전도가 시작됐을 때 전도가 뭐냐?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를 선두로 해서 뒤에 후폭풍이 오는 것처럼 끌고 오시는 걸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선 왕이 먼저 등장하고 그다음에 왕의 나라가 수립된다.’ 이것이 유대민족들이 알고 있던 구약 해석의 일종이죠.
그럼 그 메시아적인 왕이 왔을 때는 인간의 기본 능력을 능가하는 대단한 능력가지고 깜짝 놀랄만한 기적들을 베풀면서 메시아가 온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폭풍을 진압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시는 곳마다 병든 자를 온전케 했다는 소문이 들렸죠. 그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마태복음 9장 18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한 직원이 와서 요청한 게 “내 딸이 죽었습니다. 죽은 딸은 그냥 못 살고 주님의 손을 얹으시면 내 죽은 딸이 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초빙하는 그 가운데 예수님도 가시고 제자들도 같이 가는데 20절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그다음 24절부터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게 아니고 자고 있다 하시고 손 잡으니까 살아났다 하고 그 소문이 퍼졌다고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이 일, 12년 동안 혈루병 앓은 여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왜 살립니까? 왜 살리냐 이 말이죠. 살리는 이유가 뭐냐? 지금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거예요?
전도라는 것은 주님이 갖고 있는 능력이 저쪽에 전달되는 게 전도거든요. 주님 갖고 있는 능력이 저쪽으로 전달될 때, 그다음에 전달받은 그 힘을 가지고 다시 자신이 멀쩡하게 된 새로운 나로 그냥 있어버리면 능력은 도달했는데 주님의 도(道)는 저 사람에게까지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주님의 도는 능력 받았으면 그 능력에 의해서 주님 쪽으로 끌려 들어와야 돼요. 합류해야 돼요. 마치 사막에 구멍이 있는데 거기 개미 빠지면 개미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더 이상 나라는 것은 따로 만들 수 없고 점점 빨려 들어가서 주님의 몸 안에 합류되는 것, 이것까지 전도가 되는 겁니다.
전도라 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을 전해서 그 능력에 이끌려서 주님 몸 안에 합류되는 거예요. 이게 전도인데 주님의 능력이 그럼 꼭 아파야 전해져요? 딸이 죽어야 되고 12년 동안 꼭 아파야 돼요? 멀쩡하고 딸 안 죽었으면 그럼 그 사람은 전도 받을 기회조차 없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죠.
그럼 능력이라는 것, 주님의 모든 전도의 능력은 동일한 능력이 들어와야 돼요. 교재에 나온 것처럼 폭풍을 잠잠케 한다, 귀신이 나갔다, 병든 자를 고친다, 이런 능력이 우리 보기에는 다 다르잖아요. 이걸 하나로 이야기합니다. ‘자유케 한다’고 해요. 자유케 했다는 말은 ‘풀려 나왔다’는 거예요. 인간은 족쇄에 갇혀 있는데 풀려 나왔다. 자유케 되었다.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또는 귀신 들렸든 죽었든 관계없이 똑같은 것으로 묶는다면 자유케 되었다는 겁니다. 자유케 되었다면 이 자유는 ‘어디로부터 자유냐?’, ‘어디를 향한 자유냐?’ 이 두 가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고 하는 일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어느 한 쪽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계속해서 도중에 일어나고 이러한 능력은 열두 제자를 뽑아서 열두 제자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능력을 줘서 전도를 하는데 이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능력을 받았으니까 사람들이 따라오겠죠. 한 무리지어 따라오면서 예수님이 도착하는 곳까지 같이 들어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따라오던 사람들이 도중에 다 가버렸어요. 열두 제자부터 해서 십자가까지 따라온 사람은 없고 강제 조치된 강도 둘이 따라왔는데 강도 하나도 끝까지 탈락하고 한 사람은 건졌죠.
쭉 따라오면서 네가 속해있는 곳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자유케 한다, 자유케 한다 라고 하면서 쭉 따라오다가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 홀로 남게 됩니다. 그럼 예수님의 전도는 실패했느냐? p.187 보겠습니다. 위에서 2번째 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이렇게 되어 있죠.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께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을 때 그 찾아온 인간들이 뭘 생각 못하느냐 하면 내가 기본적으로 악마한테 매여 있다는 생각을 그 누구도 아무도 안 했어요. 우리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또는 내가 이렇게 병들었습니다. 전부다 누구 이야기냐 하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자유를 이야기하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걸 자유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자유는 ‘나도 모르는 채 나를 꽉 잡고 있던 악마의 실체, 그 존재가 나한테 발각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케 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나는 그동안 악마한테 지배받고 살았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악마와 바이바이할 수 있는 경계선에 선 거예요.
“너였어? 네가 그동안 나를 이렇게 꼼짝 마라 했어?”라고 악마를 보고 그런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지점까지 주께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했던 열두 제자도 자기가 홀로라고 생각했지, 마귀가 자기를 통제한다는 생각을 베드로가 해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도, 끄집어내는 능력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능력이고 다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악마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것도 안돼요. ‘악마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이것도 안돼요. 네가 뭐 악마를 알아? 모가지 막 돌아가고 그게 악마인 줄 알아? 상투스 상투스 라틴어 쓰면 뭐 이상하게 게거품 무는 게 악마가 아니야.
멀쩡한 사람 저 아비가 악마야. 정신병 이런 거 말고 아픈 사람 말고 멀쩡한 사람, 허우대가 좋은 사람 그런 사람들의 배후에 악마가 작용하고 있단 말이죠. “저는 우리 아버지 너무 존경해요.” “너희 아버지가 마귀에 속해 있는데?” “저 우리 어머니 너무 사랑해요.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요. 그 고생하면서 우리를 이렇게 공부시키고 키워줬어요.” “엄마가 마귀하고 함께 있는데? 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자유인 줄 모르는구나.”
p.187 위에서 6번째 줄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지르기 위하여 오셨다(눅 12:4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10:34)고 하셨다.] 불 지르러 왔다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디비뿌린다(뒤집어버린다)고 하죠.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세상 배후에 어떤 세력이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예수님께서 “소녀야, 일어나라.”하는 말을, 다시 예수님 끝부분에 와서 문장을 길게 붙여야 돼요. “마귀야, 그 여자 좀 놔줘라. 네가 12년 동안 붙들고 있던 그 병에서 좀 놔줘라. 주가 이야기한다. 마귀야, 병에서 놔주고 너는 꺼져라.” “어디로 갈까요?” “돼지한테 가든지 소한테 가든지 삼겹살 되든지 닭 속에 들어가든지 가버려라.”
그러니까 주님은 인간하고 상대한 적이 없고 누구하고 상대했습니까? 마귀하고 상대했어요. 그게 바로 둘째 하늘이에요. 여기서 에스겔에 나오는 1장과 10장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에스겔 1장과 10장에 보면 천사의 얼굴이 나와요. 천사의 모습이 나와요.
에스겔 1장에서는, 앞에서는 사람 얼굴, 오른쪽은 사자 얼굴, 왼쪽은 소 얼굴, 뒤쪽은 독수리 얼굴 이렇게 되어 있어요(10절). 이게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은 셋째 하늘에 있을 천사들이 둘째 하늘을 경유해서 지금 멸망해야 될 이스라엘까지 방문하면서 이런 모양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거예요.
앞, 오른쪽, 왼쪽, 뒤니까 이것은 정육면체, 사각형 모습으로 나오죠. 앞, 뒤, 왼쪽, 오른쪽 사각형 모습. 사각형 모습이라 하는 것은 셋째 하늘, 둘째 하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사각형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에요. 사각형 안에 갇혀 있다. 네 명의 천사로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맡긴 일을 수행하는데 네 명의 천사로도 충분히 그걸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런데 천사가 어디를 향하여 내려오느냐 하면 성전 있는 쪽으로 내려오거든요. 이 말은 천사가 갖고 있는 진짜 성전과 그리고 이제는 파기되어야 될, 더 이상 성전 기능을 못하게 된, 성전에 우상을 만들어놨으니까 성전 기능이 당연히 취소되어야 되겠죠, 취소되어야 될 그 장소를 향하여 에스겔 10장에 보면 이 보좌가 성전을 찾게 됩니다. 이것(파기되어야 될 성전) 아니고 이것(진짜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네 천사가 뭔가 폭탄을 품고 있어요. 그 폭탄이 1장에도 나오고 10장에도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숯불이에요. 제단에서 나오는 제단 불. 불 없는 성전은 없어요. 불을 투하하는 거예요, 투하. 불을 세상에 투하하는 기능이 네 그룹들이에요. 그룹이라 할 수 있어요.
에스겔 10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 10장에는 첫째 면, 둘째 면, 셋째 면, 넷째 면이라 해서 사각형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게 아니고 순서를 보여줘요(14절). 각자 순서를 보여주는데 보이는 순서를 큐브 돌리듯이 보여주는 거예요. 첫째 면이 그룹, 천사에요. 천사인데 무슨 천사냐 하면 두루 도는 화염검, 불칼을 들고 있는 천사에요. 창세기 3장 24절. 이들의 기능은 확실합니다.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 보호 아닙니다. 인간 보호라는 게 없어요, 성경에.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 보호지 나 보호 아니에요. 듣는 인간들 섭섭하겠지만. 사랑의 하나님, 인간 사랑 그런 건 없어요. 주님 사랑뿐이에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끝났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우리는요?” “너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장 5절에.
너는 그의 말을 들어야 되고 복속되어야 되지, 따로 나 사랑해달라는 이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두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이냐, 첫째 아담이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마지막 아담은 아벨 계통이에요. 첫째 아담 계통은 가인 계통이죠.
재밌는 것은 여자의 후손은 남자고요. 모든 여자는 남자의 후손이에요.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모든 여자는 남자의 후손이고 여자의 후손은 한 아들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둘 사이는 전쟁으로 싸운다는 거예요. 어느 것이 최후에 남을 자냐, 싸워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 거기서 뭐가 없냐 물으면 아들 낳은 여자가 없죠. 여자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자의 후손인데 여자가 없습니다. 모든 여자는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여자가 없는 거예요. 없는 여자를 뒤늦게 아들이 먼저 생기고 아들 다음에 그 아들을 낳았다고 여기는 여자, 교회를 아들이 만들죠. 후손이 선조를 만들어버리죠.
왜 만드는가? 교회를 위한 게 없어요.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을 보호하는 교회로 보조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지, 교회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호하는 그것이 교회고 다른 교회는 존재하지 않아요. 첫째 하늘에서 인간은 가치도 없어요. 위에서 셋째 하늘을 뚫고 내려온 것과 인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가치가 발생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가치가 삽입되어야 그게 인간이죠. 그 외에는 인간이 아니에요.
아까 p.187에 내가 이 땅에 불 지르러 왔다고 했죠. 천사의 기능이 하나님 이름을 잇는 성전을 불태우기 위해서 왔어요. 자, 성전 불태웠다. 뭐가 불타야 돼요? 이스라엘 불타야 되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기 위한 민족인데 성전이 없어지면 그 나라는 자연적으로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건 46년 간 지었습니다.” 할 때 “전부다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한 것도 주님께서 하늘나라 아버지와 통하는 성전, 주의 이름과 통하는 성전을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지 기존 성전은 소용없어요.
어쨌든 간에 첫째 면은 그룹이고 둘째 면은 사람 모습이고 셋째가 사자 모습이고 넷째가 독수리 모습이에요. 뭐가 빠졌어요? 소가 없어요. 10장에서는 소가 없고 독수리, 사람, 사자, 그다음에 천사들 이렇게 나타납니다. 천사의 기능을 먼저 그룹이 실시하고 사람 닮은 천사가 그 그룹의 지시대로 따르고 그다음에 사자도 따르고 독수리도 따르고.
이 독수리, 사자 이 기능은 나중에 스가랴 같은 데를 보게 되면 수직적으로 내려왔던 것이 수평적으로 퍼져요. 퍼져버리면 정육면체가 그냥 사각형 돼요. 평평한 2차원 가로, 세로만 있는 면적이 돼요. 사각형 면적 구석구석에 천사들이 후티 반군 폭파하듯이 모든 것을 작살내버립니다. 박살내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처음에는 삼분의 일을 작살내고(계 8:7-13) 나중에 나머지 삼분의 이에도 일곱 대접을 쏟아 붓죠(계 16장). 대접을 붓는다는 것은 말릴 수 없이 쏟아진다는 거예요, 소낙비 오듯이. 그걸 누가 말려요? 못 말립니다. 그냥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멸망되기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쏟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성경이야기가 굉장히 낯설 게 느껴지고 현실감이 뚝 떨어지게, 현실적이지 않고 그냥 엄포, 또는 그냥 협박조로 우리가 느껴지죠. 왜? 첫째 하늘 아래서는 모든 게 평온하니까. 평온하니까요. 시끄러운 쪽은 대선한다고 하는 저쪽만 시끄럽고 나머지는 아무 문제없이 평온하다 이 말이죠. 자영업자 죽는다는 그런 이야기, 물가 올라간다는 그런 이야기, 뭐 여러 가지, 개인 중소기업에는 외국인들 자꾸 빠져나간다는 그런 이야기 있지만 대체로 평온합니다. 이런 성경이야기, 에스겔 10장 이야기가 자기한테 와 닿질 않습니다.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뭐냐? 메시아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메시아의 능력이.
에스겔 1장의 보좌 안에는 뭐가 있느냐? 아까 이야기했죠. 폭탄 같은 숯불을 담고 터트릴 장소만 찾고 있는 거예요. 한꺼번에 움직여요. 한꺼번에 쫙쫙 움직여서 투하, 움직여서 투하, 투하. 우선 성전 불태우고 그다음에 성전 불타고 난 뒤에는 수직적으로 측정된 세상이 사각형 평면으로 바뀌면서 모든 지역이 폭탄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이 취지가 어디서 나온 취지냐 하면, 첫째 강의에서도 했지만 ‘유월절 그날 밤의 재현’이에요. 유월절 그날 밤의 재현. 모두 잠자고 있을 때, 내가 처해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처벌 받는지를 아무도 모르는 그날 밤에 일방적으로 단 하나의 약속, “어린 양 피 발라라.” 속삭이는 거예요.
“어린 양 피 발라. 피 발랐어, 안 발랐어? 네 피 말고 어린 양 피 발라! 네 피는 소용없대. 어린 양 피 발라. 양 수가 모자라거든 한 마리에 여러 명 합쳐서 나머지 피 바르라고 해.” “왜 그래야 되는데요?” “천사가 피만 보고 그냥 묵인하고 넘어간대. 피만 보고 넘어간대.”라는 그런 소식이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퍼졌을 때, 그들은 왜 어린 양의 피인지, 왜 이 밤중에 오는지, 왜 이 평온하고 멀쩡한 애굽 나라가 작살나고 벌을 받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는 사람이.
알기는 유월절 본인만 알고 유월절 양의 피만 보고 넘어가는 그 천사만 알고 나머지는 몰라요. 천사만 아는 내용, 아무 인간도 모를 때 이 천사의 기능에 메시아가 합류함으로서 메시아는 알고 메시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 이게 전도에요.
심지어 열두 제자도 전도하면서 왜 그래야 되는지를 본인도 몰랐어요. “본인도 몰랐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 그들이 전도한 건 맞잖아요.”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행전에서 어느 제자도 전도한 적이 없어요. 성령이 하셨지요. 자기 마음대로 못 가요. 사도 바울이 터키 쪽으로 가려다가 강제로 아시아 쪽으로 넘어갔어요. 성령이 말렸어요. 말린 거예요.
다니엘에 보면 미가엘 천사가 전쟁에서 바사 군주가 침범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와요(단 10:13, 20-21). 그래서 다니엘도 너무 혼줄 나서 며칠 아팠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10:15-16). 제 말은 이런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일에 이스라엘이 무능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되거나 전도가 중지되지 않고 누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했어요? 천사들이 와서 이렇게 채우는 거예요.
천사는 특히 융통성이 없어요. 봐주기가 없어요. 저 집은 누구 앤데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와서 폭탄 투하하고 불 질러버리는 겁니다. 이 천사의 마음을 그대로 예수님이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봐주기 없어요. 진멸해버려요.
하지만 예수님 안에 천사와 다른 점은 자비를 베풀 자에 대한, 특별히 따로 구분된 택한 백성에 대한 자비가 구약성경 시편에 여러 군데 나오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원래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구원한다는 그 마음도 예수님께는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전도라 하는 것은 자기 사람 찾아 나서기. ‘잃어버린 자기 사람 찾아 나서기’라고 보면 됩니다. 어제 오전 설교에서 했듯이 택시에 ‘예약’해놓고 뒤에 전화번호 나오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 속에 있는 사람만 찾아 나서는 거예요. 교회 다닌다고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천사가 십자가 사건 속에 있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천사가 주님이 시키는 대로 일하기 때문에요.
가브리엘 천사 같은 경우 누구한테 찾아갑니까? 마리아한테 찾아가죠(눅 1:26-27).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천사들이 사도들 가는 곳에 가서 옥문을 막 열어주고 하잖아요. 이런 천사들의 활동이 되어버리면, 두 번째 하늘나라가 아래층으로 구멍 났다. 터져 버렸다. 펑크가 난 거예요.
지붕이 노후 돼서 구멍 뚫리니까 위층에 있던 내용물이 아래쪽으로 떨어졌죠. 위층에 누가 있었냐 하면 악마가 있잖아요. 악마가 있는데 전쟁하려면 악마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있어요? 천사들도 있죠. 천사와 악마가 아래층에서 후반전 싸움을 벌인 거예요.
사실 천사는 주님에 의해 택한 백성을 건지기 때문에 건지는 데에 지장이 없는데 악마는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백성을 데려가려고 발악하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절에 보면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잠깐 고난 받지만 그것은 잠깐이다. 모든 권력, 힘은 그분에게 있다는 이런 이야기도 있고 로마서 8장에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죠(18절).
그래서 이 첫째 하늘 판이 개판이 아니고 악마와 누구와 싸운다? 지킬 자를 지키는 수호천사와 그 수호천사를 노리고 이미 택했는데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집적거리면서 악마가 테스트하고 시험 걸죠. 심지어 악마는요, 예수님한테도 덤벼들었어요.
그다음 계속해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성도 맞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겠죠. 성도 맞느냐. 그게 p.187에 나옵니다. 밑에서 6번째 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여전히 숨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요 12:36, 사 45:15).]
다시 말해서 성도의 특징은 남들에게 말해도 남들이 못 알아듣는 비밀이 있어요. 그 비밀이 지식이 아니고 오히려 나의 모든 것에 대해서 반짝반짝 작동하고 있어요, 비밀이. 재깍재깍재깍재깍 내 속에 시한폭탄 있다? 이런 것처럼, 내 자체가 비밀 보관함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비밀을 보관하는 함이 되는 거예요, 내 자체가. 내 제일 중요한 부분에 그 비밀이 있고 그 비밀에 준해서 나의 모든 상황과 행동이 그 비밀을 드러내는 계기로서 움직이도록 성령께서 이렇게 활동합니다.
p.188 보겠습니다. 위에서 8번째 줄에,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다음 뭡니까? [종결을 뜻한다.] 종결을 뜻하죠. 맞잖아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유, 내 지식, 박사학위 다 소용없죠. 이게 바로 나로부터의 자유가 되죠. 나는 박사학위가 몇 개다, 나는 이 돈 가지고 큰 일한다. 네 돈이 어딨어?
우리 기능은 우리가 일종의 천사가 되는 거예요. 천사는 안 죽지만 인간은 죽어요. 인간은 죽음을 맛본다는 점에서 천사도 인간한테는 안 되는 거죠. “아이고, 아저씨. 어떻게 죽음을 다 경험하십니까?” “그게 우리야. 성도야, 어? 나한테 절해.” 천사가 성도한테 꿈쩍도 못해요. 천사의 문제는 죽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도를 죽임으로써 자유를 자유답게, 자유의 전과 후를 둘 다 소개하게 함으로서 그 가운데서 자유를 빛나게 만드는 거예요.
자유가 무엇인가를. 자유는 구원이에요. 천사한테 무슨 구원이 있어요? 없어요. 구원은 죽음을 맛볼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시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맛본 죽음을 똑같이 그걸 담을 수 있는 보관함으로 성도의 목숨이 필요했던 거예요.
p.189 보겠습니다. 위에서 5번째 줄 보면 빌립보서 1장 28절 나오죠.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증거물로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증거물로.
탐 크루즈가 나왔던 마지막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불가능한 사명. 이게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에요. 불가능한 사명. 그러니까 모든 성도는 탐 크루즈다. 인물은 그 정도 안 되겠지만 탐 크루즈에요.
탐 크루즈인데 이상하게 악마가 이 탐 크루즈를 노리고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것은 탐 크루즈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도 안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창세 전에 있었던 비밀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고 악마가 나를 괴롭히죠. 마귀가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자세는 세리와 창기가 되어야 되죠. 내가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안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내 비밀을 내 장점으로 가리는 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주님이 전도하려고 하는데, 탐 크루즈가 자기 불가능한 사명, 미션 임파서블을 감당해야 될 건데 우리는 전도라는 이름의 내 사명을 감당해버려요. 두 명 전도했습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참 내.
그거 말고 사람 꼬셔서 교회 오는 거 말고 네 비밀을 어떤 경우에 나타내느냐? 그걸 주께서 물으시는 겁니다. 왜? 그건 우리가 불가능이기 때문에. 미션 임파서블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불에도 때로는 물에도 넘어지고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가는 길처럼 참 죽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로마 갈 때도 물에 빠져 죽을 뻔했잖아요. 276명인가 함께 살았지만. 사도 바울 때문에 살았잖아요.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아무리 천사가 밤중에 와서 ‘너는 로마 왕 앞에 서리라’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환각일 수 있잖아요. 앞에 지금 배가 다 부서질 정도로 파도가 치는데. 파도 없이 그런 말을 하면 사람 마음도 간 덜 떨어지는데 이건 뭐 파도가 죽일 듯이 달려들게 해놓고는 네가 서리라 했으니까 이건 결국 뭡니까?
‘성령 받은 자는 악마의 모든 시험에서도 통과할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왜? 사도 바울이 훌륭해서? 아니죠.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복음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기어이 로마까지 당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로 봐가지고 야, 용쓴다. 애쓴다 하지만 당사자가 돼서 한번 해보세요. 로마는커녕 지중해 빠져죽게 되었어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사후(事後),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보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는 주의 뜻이었구나를 아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자기가 성공한 데다 막 써먹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성공한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다. 비밀을 이야기 안하고 성공한 걸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p.195에 나와요. 제일 밑에 [예수님의 배후에는 성령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아, 이거 어렵죠.
전도를 할 때 전도를 하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를 전도했다고 하잖아요. 이미 그것은 전도를 모르는 거죠.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건졌다. 저 분은 메시아다.’ 이것은 인간 본인이 악령에 속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야, 사람 참 좋다. 그분 능력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누구든지 성령을 통해서 했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가야 가능하냐 하면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악령과 싸워 이겨서 우리를 빼내주시는구나.’ 이정도 알아야 이제사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사후에 ‘주께서는 우리를 상대한 게 아니고 우리를 잡고 있던 악마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 줬습니다.’가 고백되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나오죠(29절). 세간이 발이 있어서 스스로 그 집 담을 못 넘잖아요. 도둑이 와서 집주인 묶고 그다음에 방에 들어가서 세간을 훔쳐 도망가는 것처럼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너희 갇혀있는 세간을 내가 담타고 와서 악령을 이기고 주인을 묶고 악령을 이기고 악령에 매여 있던 꼼짝 못하고 있던 너희들을 끄집어내어 구원한다.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의 모습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면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광주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죠. 사람하고 사람이 상대하면 반드시 마귀가 그 현장에 있어요. 좀더 열심히 하지. 좀더 친절하지. 그 사람 식사 값 낼 때 너는 맨날 열 번 얻어먹지 말고 한 번 너도 돈 좀 냈으면 그렇게 관계가 틀어지지 않지. 서로 친하게 지낼 건데 열 번 다 얻어먹어가지고 그다음부터는 바이바이했을 때 봐라. 네 보람은 어디 있느냐?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악마 빼고 예수님 빼고 나름대로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세상에 어느 인간이 남하고 친밀합니까? 어제 낮 설교에 했죠. 26살 먹은 어떤 여자 청년이 호주로 일하러 가요. 일 년 동안 가는데 한 마디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누구의 압력이 있어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그걸 집어넣어서 했어요.
네가 호주가서 천 명을 만나도 그것은 네 자신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찾았을 뿐이고 만 명과 대화해도 네 혼잣말만 했을 뿐이고 어떤 누구를 만나도 너를 부숴주는 타인을 만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누굴 만나도 더욱 더 자기를 꽁꽁 싸매기 때문에 누굴 만나도 ‘내 건 지켜야지.’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깨지는 거 없어요.
깨지는 건 예수님 외에는 깨지는 사람 없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깨집니까? “나 너하고 상대 안해. 네가 왜 호들갑 떨어? 나 너 뒤에 악마 보인다? 마귀 보인다. 마귀에서 내가 풀어주면 너는 그게 자유야. 그리고 풀려났다로 끝나지 않고 그다음부터는 나한테 오도록 성령께서 이끌 거야.” 이게 전도에요.
p.196에 보면 그런 말이 비슷하게 나와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하셨죠. 특히 이 진리 문제에 대해서요. 이제 강의 끝나가는데 꼭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거짓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진리가 안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내가 굳이 나서서 판단하고 파악을 해야 돼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나한테 유리하면 일시적으로 진리처럼 보이는 그런 오류를 범한다고요.
진리가 와버리면 다시 말해서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진리가 와버리면 이 세상 전체가 마귀고 악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휘둘리거나 오지랖 떨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요.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요. 거짓을 믿는데 거짓 믿는 거가지고 왜 부러워해요? 그렇거든요. 부러워할 필요 없잖아요.
진리가 오게 되면 우리에게 안정감이 와요. 정서적 안정감. ‘끝났네, 끝났어. 끝났어. 세상은 성경대로 돌아간다.’ 그게 진리잖아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 이 세상이 움직이면서 그 피의 능력을 모르는 자는 전부다 지옥가고.
이미 그게 확정되어버렸어요. KS마크가 확정되어버린 거예요. 이거는 내가 바꾸거나 할 필요 없어요. 우리의 일체 모든 행함에 대해서는 죄 사함이 되어버리고 어떤 죄도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저 바다 끝에 넘기듯이 넘어가게 하셔서 이미 넘어가버려서 이제 없는 거예요.
“제가 탕자입니다.”하면 주님은 딴소리하고 있습니다. “우와, 옷 잘 어울린다. 역시 내가 입힌 옷이 이쁘기는 이뻐. 딱 맞지, 그치?” 예수님은 엉뚱한 이야기한다고요. 우리는 뭐 죄가 어떻고 그때 회개하려고 했는데 회개 못하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해요, 우리는. 단순히 이게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진리가 되어버린 거예요, 진리가.
그래서 p.196 중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전통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인간은 전통. 인간은 공부해봐야 좀더 이렇게 오류를 줄이는 거야.” 아이고, 참내. 인간이 언제 공부해서 언제 진리를 만들어요? “공부해도 구원 받는 것하고 관계없네요.” 이게 진리입니다. 착함은 윤리 도덕은 둘째 층을 통과 못합니다. 이거 모르면 설교 진도 안 나간다 했잖아요. 내가 한 5초간 멈칫 했어요.
p.197 보겠습니다. 중간에 [전도란 교회의 붕괴를 이야기한다.] 마땅하죠. p.198 위에서 3번째 줄, [결국 전도란 사람을 기어이 구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란 절대로 자생적으로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왜냐하면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p.198에 거기 결정적 단어가 나오죠. 사도행전 28장 26,27절,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고침 받지 마!!” 이런 뜻이에요. “돌아오지 마! 내가 찾아갈 거야. 네가 알아서 오지 마.” 이런 거예요. 뭐 봉투 들고 교회오고 이런 짓하지 말란 말이죠. 돈을 잃으면 일부를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나 영생을 잃으면 어쩌고 그런 전도지 들고 오지 마.
결국 그 모든 전도지는 뭡니까?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거거든요. 그러나 인간 구원은 없어요. 인간 구원 뒤에 악마가 붙어있으니까 인간 구원하려면 누구도 구원해야 돼요? 악마도 천당 가야 돼요. 그럼 지옥은 장사가 안돼. 한 명도 없어. 지옥 문 닫아야 돼요.
p.202 중간에 봅시다. [전도란 예언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세상에 멸망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세상에 멸망이 왔음을 알리는 소식인데 이 앞에 뭐 붙어야 돼요. ‘기쁜’ 소식이죠. 주님께 대들었던 세상, 이제는 누가 복수할 차례다? 주님이 복수할 차례. 주님의 복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에요.
복수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뭐 타고 옵니까? 구름타고 와서 천사들과 함께 참혹한 복수를 해버려요. 도대체 얼마나 밟아놨는지 포도주 알을 밟아놓으니까 그 밟은 분의 흰옷이 벌겋게 물들었어요. 얼마나 밟았는지. 그 붉은 옷, 에돔이잖아요. 메시아는 에돔에서 나온다. 에돔이 붉다는 뜻이에요. 심판에서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빼돌려놓고 작살내는 거예요. 빼돌려놓고. 그러니까 그들이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악마하고 못 헤어져서 저주받는 거예요. 그럼 악마하고 왜 못 헤어졌는가? 그거는 자기 마음대로 아니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거는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악마 존재도 인정 못하고 악마 존재 알아도 헤어진다는 것은 성립 안돼요. 악마가 인간보다 더 세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주위에서 자꾸 성도란 이름으로 대들거든 가련하게 여겨야 되죠. 그리고 사람하고 싸우지 마세요. 우리의 싸움은 사람하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악마와의 싸움이에요.
사탄은 말합니다. “네가 나를 알아?” “알지! 그래, 알지.” “어떻게 아는데?” “십자가 피는 제일 싫어하잖아.”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만, 유월절 피의 능력으로만’ 이걸 제일 싫어하잖아요. ‘구원은 외부에서 온다’를 제일 싫어한다니까요, 악마가.
자식이 있다가 “엄마는 요새 왜 맨날 놀고… 엄마답게 좀 해보세요.” “사탄아, 물러가라! 엄마는 원래 이래. 엄마는 원래 이래. 뭐 어쩌라고? 여기서 돈벌이 나가라고? 엄마 원래 이래. 용돈 주는 거나 고마운 줄 알아라.”
p.203 [사도 바울은 늘 마귀와 싸우고 있다(엡 6:10-13)] 사람하고 상대 안해요. [그 마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유감없이 폭로되었다. 마태복음(4:1-11)과 누가복음(4:1-13)에서 사단은 가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다.] 경제적 지도자? 아니, 아니. 정치적 지도자? 아니, 아닙니다. 기적을 베푸는 것? 아닙니다.
뭐냐? 세리와 창기, 강도, 죽은 자 거기다가 주님 자신의 비밀, 십자가 비밀을 담은 보관함으로 이 땅에 천사와 더불어서 데려가는 것. 주님의 영,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실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비밀이 있는 것, 성령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 창세 전의 비밀, 십자가 피 비밀을 알 수 없다 했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올 필요도 없는데 성령 오시고 십자가 복음 알게 하시고 온통 세상이 마귀판인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안 싸우고 살게 하옵소서. 굳이 잘했다 못했다 따지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 다만 어느 상황이든 십자가 피를 알아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는 주저 없이 십자가 피만 우리 죄를 사한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자신감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