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498강/499강) 문/마음의 눈 250520
498강
499강
498강-YouTube강의(문 아가서 5:2)20250520-이 근호 목사
제498강, ‘문(門)’. 아가 5장 2절에 보면 아가서에도 문이 나와요.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이렇게 되어 있죠.
보통 인간세계에서의 문은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습니다, 둘 사이에. ‘나는 들어오되 너는 못 들어온다’ 이것이 전형적인 문의 기능이죠. 그러니까 문을 중심으로 해서 문이 있다는 말은 나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나의 세계는 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외부인이 내 문 안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려면 내가 닫아놓은 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 문의 특징은 ‘열었다’가 우선이 아니고 ‘닫혔다’가 우선이에요. 그냥 열려있으면 문 자체가 필요 없으니까. 열린 채로 있다면 문이 있으나마나죠. 문이 있다는 것은 ‘열었다’에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차단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겁니다. 오직 나만이 허락되는 공간. 나 외에 외부인이 못 들어오도록 조치를 한 구조, 이걸 문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점을 솔로몬이 너무 잘 알죠. 술람미 여인을 너무 잘 알아서 문을 열 수 있는 계기, 동기를 솔로몬이 뭐라고 제시하느냐 하면, “나의 누이, 나의 사랑” 그다음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경상도 억양을 약간 보탠다면 “나의 삐둘기”, ‘비둘기’하는 것보다 ‘삐둘기’가 더 애정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나의 삐둘기,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앞에 있는 것을 나열, 나열 연쇄로 붙여놓고 “문 열어다오” Open the door. 문 열어다오. 당신의 문의 두께 안에는 가족만 출입할 수 있고 가족은 굳이 사랑을 논할 필요가 없죠.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너와 나가 형성 안 되는 걸 가족관계라 하지 않습니까. 출발부터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사랑이에요. 사랑한다는 말은 가족끼리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죠.
가족의 특징은 너의 있음이 너의 있음이 아니고 너의 있음 자리에는 나도 같이 겹쳐서 있다는 것이 가족이에요. 그래서 나이 많은 엄마가 다 큰 아들보고도 “아이구, 내 새끼야.” 하죠. 내 새끼야. ‘너는 나라는 영역 안에서 영원히 머물라’ 그런 뜻이죠.
그럼 아들이 거기에 대해서 기분나빠할 것이 아니고 반응을 나타낼 때에 ‘아이고, 내 새끼야.’하는 엄마의 마음에 흡족한 그러한 멘트를 날려야 되죠. “엄마, 죽을 때까지 내가 모실게.” 뭐 이정도 나와줘야 가족이죠. “엄마의 노후보장은 내가 책임질게. 엄마 연금? 내가 연금이야.” 뭐 이런 이야기. “내가 연금이야. 엄마는 연금 필요 없어. 내가 영원히 엄마의 연금이 되어줄게. 현금 인출기 되어줄게.” 뭐 이정도 말로 이렇게 주고받아야 이게 가족관계 아닙니까, 가족관계.
‘문 열어다오.’가 성립되는 거예요. 문 열어다오. 만약에 네가 문을 안 열어준다면 어떻게 하느냐?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다. 네가 진정 내 가족이라면 오늘 이 아가서 5장 2절의 말씀, 그 내용처럼 ‘너는 아늑한 공간에 있고 나는 축축한 밤 이슬 젖은 이 공간에 있는데 그래도 좋아? 그러니까 빨리 문 열어달라니까.’ 이게 문이죠.
밖에 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너의 공간 안에 사랑, 새로운 사랑이 어떻게 네 안에 들어올 수 있는가? 그것은 네가 사랑에 응답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까 사랑의 서술에 대해서 언급했죠? ‘나의 누이’, 그다음 두 번째 뭡니까? ‘나의 사랑’, 세 번째 뭐에요? ‘나의 삐둘기’. 그냥 비둘기 아니고 삐둘기. 나의 앵무새, 이렇게 되겠죠. 그다음에 ‘나의 완전한 자여’ 그다음 뭐냐? 우리 둘 사이에 ‘문 열어다오.’
그러니까 문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나만이 사랑하는 그 사랑의 공간에서 내 사랑이 문 밖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능이 문의 기능입니다. 문의 기능이죠.
자, 아가서의 이 말씀을 신약에서 누가 성취했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성취했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문이에요.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양의 문이라”(7절). 양의 문이라는 말은 오늘 아가서와 결부해볼 때 딱 이런 생각 떠오르죠. ‘내 사랑은 문밖에 떨고 있다. 이슬 맞고 있다. 내 사랑이 문밖에 있는 걸 내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내가 문을 돌파할게. 문 열어줄게.’
그런데 그 문이 뭐로 겹쳐져 있다 했습니까? 세 번째입니다. ‘나의 누이’, 가족이라는 거예요, ‘나의 가족, 나의 원초적인 사랑, 나의 삐둘기’, 비둘기라는 것은 내가 기른다, 내가 친히 기르는 거예요. 나의 비둘기. 자기 작품이다. 작품이 작품대로 될 때 기르시는 분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나의 완전한 자여’.
내 문 바깥에, 나라는 문 바깥에 내 백성이 완전한 자로 지금 대기하고 있다. 그럼 주님께서 대기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건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양만이, 나의 양만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나의 양이 아닌 자는 어떤 경우라도 목자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누구세요?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요.” 이렇게 나오면 그건 양 아니죠. 양 아니니까 목자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문은 있고 말씀이 연다’가 아니라 ‘말씀 안에 문이 있다’. 말씀 안에 문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이 세상에 문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내 공간만 채우고 넉넉하면 되죠. 내 공간만. 나만의 세계만 잘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메시아는 뭘 통해서 들어온다? 내가 아는 공간 바깥에 메시아가 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오시는 거죠. 메시아가 문이니까. ‘나는 문 있다. 두드린다.’가 아니라 주님이 문으로 와서 아예 문을 내 앞에 걸쳐놓고 문 되신 주님이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내 목소리 들려? 너 내 목소리 알지? 너를 건지시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뭐냐? 들려오는 목소리, “나의 식구여, 나의 사랑이여, 나의 비둘기여, 나의 완전한 자여.”라는 목소리를 날리면서 주께서 문을 앞장세웁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가 자기를 향한 목소리인 줄 알면, 그래서 아가서 5장 2절의 사랑의 완성인 줄 알면, 그 예수님 문은 닫히는 문이 아니고 그 양에게만 무슨 문이 되느냐? 어? 열리네. 열렸어. 내 안에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 문밖에서 문을 가지고 오시는, 남들은 못 들어가고 양만 들어가는 특이한 문을 만드신 분과 동일한 실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499강-YouTube강의(마음의 눈 전도서 2:14)20250520-이 근호 목사
제499강, ‘눈’. 영어로 eye. ‘눈’이라는 제목입니다. 전도서 2장 14절에 보면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전도자, 솔로몬 왕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서 1장 1절에 그렇게 되어 있죠.
지혜자는 눈이 밝다는 말. 눈이 밝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눈이 밝은 게 왜 지혜자가 되느냐? 둘이 관련을 지으면 이렇습니다. 눈이 밝다는 말은 ‘마음이 맑다’라고 보시면 되고, 그럼 눈이 어두운 자는 우매자니까 어리석다 또는 시커멓다. 시커머니까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음흉하다, 컴컴하다.
색조가 밝은 데서는 사람 마음이 편안하지만 음흉하고 엉큼한 사람 만나면 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어요. 조명이 안 좋아. 조명빨이 안 좋아, 시커머니. 그래서 이 눈이 밝고 어둡다는 것을 마음이 맑고 칙칙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마음구조가 말의 구조로 바깥으로 나옵니다. 전달돼요. 그 사람이 욕설을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고상한 말로 아무리 나열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연결 연결되는 직물구조, 두 실이 어긋나면서 직조가 되잖아요, textile, 직물이 되면서 나오는 그 색조가 전체적으로 음흉하고 칙칙하고 깔끔하지가 않아요.
깔끔하다는 것은 너무나 투명해서 훤히 다 보이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동화 가운데 이러한 것에 적절한 동화가 있어요. 신하들이 임금님한테 아부한다고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옷을 해줬어요. 비싼 옷을 해줘놓고 “임금님, 옷 어떻습니까?” “아이고, 좋다.” 옷 좋기는 뭘 좋아. 임금님 지금 옷 하나도 안 입었는데. 신하들이 아부의 극치를 하다보니까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맑고 깨끗하잖아요. 나중에 어린아이도 어른 되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린이날만큼은 맑고 깨끗하잖아요. 순수하고. 그 어린이한테 임금이 “야, 내 옷 어떠냐?” “임금님, 발가벗었는데요? 옷이 없는데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죠.
그러니 눈이 맑다는 것은 세상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진리에 대해서 여과 없이 쏟아내버리는 사람이에요. 진리에 대해서. 앞뒤 안 가리고, 눈치코치 안 보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내가 그 말 내뱉어서 나중에 뒷감당하겠어?’ 걱정 근심 이런 거 없이, 그건 미래 일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나한테 이익이 올까 그런 건 나중 문제고 지금 내가 현장에서 할 것은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아닌 건 아니고 긴 건 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 맹세할 것도 없어.
나 앞으로 잘할게, 앞으로 잘하겠어, 미래에 잘하겠어, 그런 거 필요 없다. 너는 현재 꽂아준 대로 거기서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버리면 나중의 상황은 현재 쏟아놓은 진실이 구성해서 그것이 미래를 만들어내고 생산해낸다니까요. 미래라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미래라는 것은 현재 내뱉은 진실의 연속선상에 있어요. 진실은 이야기하지 않고 미래의 아름다움을 혼자서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37절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더 벗어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여호수아 1장에도 나오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치 말라”(7절) 그 말씀은 조심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그 현장에서 장래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 걱정하지 말고 지금 무엇이 옳은가 그것만 생각하라는 거예요.
자, 그럼 무엇이 옳은가? ‘그럼 목사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겠네요.’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용기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투명한 투명지만 되면 돼요. 왜? 일은 내가 벌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배후에 주님이 투명한 나를 통과해서 주님 스스로 자기 말씀을 내뱉는데 네가 방해나 놓지 마라, 이렇게 되는 거죠.
자아의 두께가 두꺼워버리면 이게 방해가 돼요. 주님이 하는 일이 내 장래 걱정, 존재 걱정, 생계 걱정, 돈 걱정 때문에 이게 막혀버리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우리의 자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진리는 진리대로 드러나게 할 때 그 진리가 투과할 수 있는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이게 용해가 돼요. 녹아버리죠. 형체는 있는데 말씀은 형체 있는 걸로 간주하지 않는 상태. “너 거기 있나?” “네, 있습니다.” “내가 없는 걸로 쳐줄게.” 하고 엑스레이 투과하듯이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나의 지식보다 더 센 방사능으로 그냥 뚫고 주님께서 현장에 나타납니다.
그럼 우리는 평소에 우리 마음을 숨기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숨기는 하나의 고체가 되죠. 그런데 말씀은 이 고체를 용납하지 않고 와해시켜버리고 우리 마음을 주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하니까 그 현장에는 뭐냐? ‘내 뜻은 무조건 죄인데 주께서 감사하게도 이 죄와 섞여서 진짜 죄인이 아닌 의인되시는 주의 의로운 말씀만 나의 죄를 동반시켜서 지금 당신 앞에 쏟아놓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하는 말이 내 신상에 손해가 되고 비웃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건 뭐 주님 자신이 이 땅에서 비웃음을 당했기 때문에 주님이 당했던 체험에 함께했다는 그것만 해도 보통 영광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겠죠.
방금 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론처럼 그렇게 느껴지잖아요. ‘이론상은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실제가 이렇게 안 되네요.’하는 그런 생각이 들죠. 과외 할 때 문제 잘 푸는 학생들이 있어요. 실제 시험 칠 때 벌벌 떨면서 하다가 많이 틀리는 사람이 있고, 과외 할 때는 딴소리하면서 틀리지만 실제 시험 칠 때 잘 치는 사람들도 있어요. 뭐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 있어요.
그런데 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지금 방금 이야기한 이것은 하나의 지식이고 이론이지만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성령이 같이 동행을 해줘요. 성령이 동행을 해주니까 홀몸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현장이든.
‘내가 어떻게 할까’ 이러면 이건 뭐 ‘방해하지 말아야지’ 하는 걱정이 더 방해돼요. ‘내가 방해 안 해야 주의 말씀이 오롯이 전해지지.’ 그럼 주께서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네가 얻고자 하는 이익은 뭐냐? 네가 뭐 신자라고 남한테 자랑질 하려고 하지?’ 이렇게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동행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요. 동행.
그것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19절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앞의 한 구절 더 읽어보면 18절,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18절, 19절 말씀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총독들에게, 우리를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본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아예 체포 안 되게 하면 안 됩니까?’ 그게 일 깔끔하잖아요. 체포되게 해놓고 무슨 말할까 하지마시고 그냥 체포 안 되게 하면 안 되느냔 말이죠. 신상에 무탈하도록.
그런데 주께서는 내가 너희들 체포되게 해놓고 그다음에, 어떻게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내부의 마음이 바깥으로 형상화돼서 나오는 게 말이에요. 염려하지 말라.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를 아주 쪼다로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발발 떨게 하면서 발발 떨면서 할 소리 다 하게 하시는 거예요. “살고 싶습니다. (작은 소리로) 그러나 주께서 구름타고 오십니다.” 이렇게 해놓고 또 “죽이지는 마옵소서!” 꼭 예레미야 같아. 계시 전하면서 절 죽이지 마옵소서.
그게 다음 오후 설교 때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실컷 해놓고 ‘주께서 자기 성도를 위해서 복수하실 겁니다. 내가 복수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이런 식으로. 그러니 양면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나의 연약함, 나의 믿음 없음이 다 튀어나오게 해놓고는 주께서 하실 계획은 그대로 이런 나약하고 모자란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우리를 투명지로 사용해서 주께서 하실 일을 다 보여줄 때, 그때는 너무 투명하기 때문에 ‘네가 참 눈이 맑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마음의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