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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30강(추방 당함) 십자가를 아십니까37강(나 빼기) 250428설교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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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신명기(30강) 신명13:1(추방 당함) 20250428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13장 해보겠습니다. 13장 1절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절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이루어질 지라도’..

선지자라 하는 것은 앞일을 미리 이야기 한다든지,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는 자죠. 그런데 그들이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해석을 하고, 예언을 하는데 잘 맞아요.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여호와 이름이냐 아니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소원성취하면 그냥 최고 아니냐 이 말이죠.

놀라운, 신기 있는, 보통 신기(神氣)라고 하죠. ‘신기 있는 사람 아니냐?’ 이 말이죠. 일반 평범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통제하고, 다른 세계에 대해 관리가 가능한 그런 쪽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벌써 기죽고 들어가죠. ‘궁궐에 귀신 있다’ 그러면 처녀 무당 하나 데려와야 되겠죠. 인간의 힘으로 안 되니깐.

조선시대 때, 이런 무당들을 국가적으로 낮추어 보고, 용납을 하지 못하고, 아주 천하고 더러운 직업으로 삼았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다시 말해서 철저한, 중국에서 들어온 법 체제 국가로 초반부터 정립돼 있었던 겁니다. 법 체제, 법이라는 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어떤 결과가 있을 때, 그 사이에 법이 들어가는 겁니다. 법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법칙이라 해도 돼요.

법칙이 들어가죠. 법칙이 들어가는데,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오고 그 사이에 법칙이 들어가는 게 상식인데, 그게 아니고 법칙이 먼저 앞서서 네가 아무리 원인->결과가 되더라도 법에 위반되면 이것은 나쁜 것이라는 그러한 논리를 법 체제 자체에서 이끌어내요.

그런데 무당이 뭡니까? 무당은 우연이고, 요행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무당 짓 한다고 해서 귀신 나오고 그런 거 아니죠. ‘당신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했습니까?’ 라고 무당에게 물으면 일반인은 설명 들어도 몰라요. ‘어떻게 해서 귀신이 나갔습니까?’ 라는 물음에 무당들은 뭐라 하냐 하면, “feel, 감(感)이다” 감으로 하는 거예요. ‘필링~’이라는 노래도 있죠. 우리말로 할 때 ‘느낌’이라고 번역하면 좀 이상한 번역입니다만, 그냥 느낌이에요, 느낌.

느낌대로 사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법고시 출신들, 법대출신들이 제일 싫어해요. “너 음주운전 왜 했어?” 라고 물으면, “이상하게 오늘 느낌에 밤에 술 먹고 싶어서 먹고 운전했습니다. 이건 내 자유입니다. 내가 좋다는데 경찰 네가 뭔데 술값 내준 것도 아니고 왜 관여하느냐?” 할 때, “잡숫는 건 좋습니다만, 당신은 법을 위반했습니다. 보니까 벌써 세 번째네요. 교도소 가세요.”

“왜 날 잡아가?”라고 진지하게 물으면, 판사나 검사가 뭐라 하냐 하면 “법대로 했습니다.” 이게 답변이에요. 그러면 “왜 법대로 해?” 하면, “법대로 해야 공공질서가 유지됩니다. 당신 같이 그렇게 하면 이 사회가 개판됩니다. 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고, 느낌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누구나 그걸 참고 사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에 법체계가 국가적으로 해서 무당이라든지 이런 우연 요소를 다 제거하는 이유는 ‘국가 우선주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 해봅시다. 교회는 성령이 임해야 교회죠, 맞죠? 사도행전에서. 자, 그러면 그 다음 질문, 성령은 법에 매입니까, 안 매입니까? 성령은 법에 안 매이죠.

법에 안 매이는데, 성령으로 했는데, 법 쪽에서, 법 있는 사람이 놀리고, 고발하고 비난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으로 성령대로 하겠습니까, 법대로 하겠습니까? 법대로 하죠. ”아, 내가 이렇게 하다가는 이 조직 사회에서 추방되겠다, 가족으로부터 추방되겠다. 나만 손해잖아.“ 그렇게 되죠.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야 되는 게 인간들의 법이에요. 그런데 가인은 안 받았잖아요. 법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에요. 인간이 안심하고 자기의 육신을 건사할 수 있는 법적인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1, 법이란, 인간의 안녕과 평안을 사수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2번 문제, 율법은 뭡니까? 율법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거죠.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나라가 없었어요. 애굽의 일부였고, 애굽에서 나올 때 나라가 없었어요. 이름은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 되려면 영토가 있고, 백성들이 있어야 되는데,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퇴출당하는 경우가 남아있어요.

분명히 나올 때는 한 식구로 나왔는데 점점 없어져요. 뭔가 자꾸 잘려나가는 느낌, 제거되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나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의 땅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인간의 나라를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왕이에요. 율법을 뭐로 바꿨습니까? 율법을 그들은 법으로 바꾼 거예요. 자, 법은 누구를 위하여? 인간을 위하여! 율법은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은 나를 위한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처럼.

자신이 하나님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교회 가서 맨날 하는 기도 내용이 뭐냐? ”하나님 뭐하시노? 나 안 도와주고?“ 이거잖아요. ”하나님 뭐 하시노? 나같이 착한 사람을 안 도와주고? 뭐 선하다, 착하다, 그런 하나님 없는 거 같애. 그래도 내가 하나님 믿는 것은 내가 워낙 착하기 때문에, 내가 워낙 의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녕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천국까지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 해요. 그걸 오만이라 합니다, 자기 의. 이게 나쁜 줄 모르는 이유가 교회나 성당 가면 다 똑같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목사까지 다 똑같아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 이래야 정상인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파탄 난다 할지라도 그건 뭐 큰 문제 아니고, 시시한 문제입니다.’라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어제 오후 설교는 제가 요약을 안했잖아요. 오후 설교를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자들은 하나님이 작살낸다.’(살후1장 7-9절) 이거죠.

여러분, 그 말씀 하나도 뭔가 시원한 청량감이 오지 않습니까? 이게 시원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평소에 주님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건 뭐 예수님 할 일이고, 뭐 내 할 일인가? 그래서, 그래서? 지금 나한테 문제는 그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 오든 말든 난 모르겠고, 우리 집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한테는 예수님께서 깔끔하게 마지막 심판한다는 것이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 않는 것에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인간의 안녕과 번영, 또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치를 해야 된다.’ 이런 사람들은 원인은 ‘나’, 결과도 ‘나’가 되겠죠.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바로 거짓 선지자가 끼어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참 선지자를 원할까요, 거짓 선지자를 원할까요? 거짓 선지자를 원합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가 가슴에 ‘거짓 선지자’라고 달고 오지는 않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 못해줘서 지금 환장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께 사랑을 못 받는가? 하나님께 기도를 안 해서 그렇고, 하나님께 헌금과 헌신과 전도, 구제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와 같이 믿기만 하면 여러분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준비를 다 해놨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기도를 안 해서 복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왔지롱~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간곡하게 기도해드릴테니까 여러분들은 저 하나 믿고, 한 번 믿어 주이소, 고마! 한 번 믿어주시고, 제 뜻에 한 번 따라주세요.”

그 다음에 나오는 얘기가 “내 눈을 바라봐~” 이렇게 나오죠. 허경영. 스바냐 2장에 나오는 자기 말 하는 거요.(습2:15) 어제도 자기 말 한다는 이야기 했죠? 인간은 자기 말만 합니다. “내 말을 들어봐.” 갑자기 허경영이 생각나는데, 그 얘기는 설교시간에는 안했는데요.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봤는데 돈이 수 백 억이 넘으니까, 얼마나 편리해요? “실제로 나를 믿고 나한테 안수 받고 기도하고 내 뜻대로 해가지고 실제로 성과를 얻은, 많은 기적을 누린 자들이 여기 증인들로 쫘악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의 능력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집구석에서 혼자서 끙끙 앓고 이 병원, 저 병원, 해독주스 이런 거 먹지 마시고,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나한테, 우리 교회에 와야 되지, 병원 찾아다니지 마시고, 뭐 또 안다고 비타민제 이런 거 찾지 마시고, 저한테 오세요. 예를 들어서 살이 안 빠진다, 요요현상이 있다 그러면 오세요. 기도하시면 쫙 빠지게 해드립니다.” 뭐 이런 거.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되면, “제가 예루살렘에 가서, 요단강에 가서 물을 갖고 왔는데 이거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요단강 물입니다.” 여러분 요단강 가봤어요? 더러워서 건너가기도 찝찝해요. 누런 황토물. “요단강 물이니까 이거 잡수시면 여러분들은 병 낫고, 여러분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 받고, 사는 동안에 여러분 복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복 받는 방법은 그냥 막연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기도하시고, 때 맞춰 기도하시고, 헌신하시고 봉사하시면 그 마음, 정성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여러분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예요.

제가 말한 것 중에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 이것만 빼버리면 똑같네, 사실은 똑같겠지만...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이미 익히 하나님은 인간을 압니다.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보거든요. 이것은 뭐냐? 그 죄가 인간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 죄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악마, 마귀가 있겠죠. 악마가 인간을 다 인도하면서 나름대로 아까 이야기한, 오로지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하여, 인간 세계를 위하여”, 악마가 건사하라고, 잘 되라고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내신 거예요. 이 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 리가 없죠.

다시 신명기 13장을 봅시다. 3절에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분명히 13장에서 이렇게 말씀을 했죠. 이 내용, 예언이거든요?

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가 어떤 거겠어요? 이 말씀의 성취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했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 맞구나.’가 성취가 돼요. 지금은 그들은 다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예예~” 뭐 그냥 ‘예예’죠. 믿을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만 믿어야죠. 뭐 어떻게 대책 있습니까? 대안 있어요? 없잖아요.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면서 다 하잖아요.

뭐 말기 암 걸렸다가 기도해서 나았다는 그런 사람들 대부분 뭐라고 합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다시 한 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까” 맨날 덤으로 산대요.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까 몽땅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지금 무슨 자기를 말기 암에서 건져준 게 ‘신명기 13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이 너한테 해당되는 이야기야.’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 자체가 뭔가 챙겼기 때문에 나오는, 역시 끝까지 내 위주를 못 버리고 있다는 나 중심의 인생이라는 것을 주께서 나에 대해서 미리 아시고, “너는 백날 노력해서 구원 못 받아.” 라는 것을 신명기 13장 1절부터 3절에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네가 네 스스로 율법 지켜서 구원 못 받는 것을 내가 미리 알려줘? 줄게. 그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증명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 듣고 “우리는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다려봐. ‘사랑하겠습니다.’부터 해서 모든 인간이 왜 나를 사랑할 수 없는가를 분명히 내가 보여줄게.” 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이스라엘 속에 투입하는 것을 주께서 용납을, 허용을 해버려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Test, 시험하는 거예요. 그게 시험이에요. 아브라함도 본인을 사랑하는지, 하나님 사랑하는지를 아브라함은 뭐 하나님 사랑한다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너 누구 사랑해?” “하나님 사랑합니다.” “너 사랑 안 해?” “안 합니다.” “좋아, 내가 테스트 할게. 내가 보기에는 네가 네 아들 사랑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 아들하고 나하고 바꿔볼래?” 하고 시험 내줬잖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시험을 그대로 한 번 내보겠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설명 곁들여가면서 시험하겠습니다. 1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산다. 또는 ‘나’가 산다. 여러분 이 쪽입니까? 아니면, 2번, 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2번입니까? 여기에 대한 정답은 어떤 사람만 정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이겁니다. 간단한 겁니다.

“말씀이냐, 나냐?” 중에서 말씀이 우선이고, ‘나는 말씀의 방해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2번이 정답이 돼요. 왜냐 하면, 나는 내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방해꾼이었어요. 방해꾼으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방해자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니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방해꾼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해서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깊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찌 알리요? 알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 영이 와야 알지요, 십자가 영이.

맞바꾸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과 우리를 맞바꾸어서 그 동안 말씀을 방해하고 있으면서도 말씀 방해한 줄을 모르는 우리를 말씀 안의 새로운 나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버려요. 육신으로 만든 나, 아담의 나를 말씀으로 만들어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아담 족속이냐, 아니면 예수님 족속이냐? 첫 번째 아담이냐, 아니면 마지막 아담이냐? 네 소속을 밝혀라.

네 소속을 아담 소속에서 예수님 소속으로 바꿔 놓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리오? 그래서 사랑은 필수 조건이 뭐냐 하면,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만약에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자꾸 내가 살아있는 이것을 사랑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 있거든요. 아가서 8장 6절에 나와요. 자, 그러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아이고 그딴 게 뭐 중요해?’ 라고 내칠 수 있는 게 뭐냐? 내 목숨이에요. “너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아휴, 죽는 거 그게 뭐 중요해? 사랑이 중요하지.” 이래야 사랑을 안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산 사람만이 자기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진짜 살아난 사람만이 자기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사도바울처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이야기 하겠어요? “나는 죽었다. 어디서 죽었는가?” 혼자 죽으면 자살이고요. 혼자 죽으면 안돼요.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제는 “그럼 당신은 뭐야?” “내가 사는 거? 내가 사는 것은 나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와 한 통속이 되어서 산다. 일체되어서 산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뭘 했는가?“ 라고 물으면, 뭘 한 게 없죠. 믿음으로 살 동안에 한 게 없잖아요. 그럼 믿음생활이란 뭡니까? 계속해서 한 게 없는 게 믿음생활이에요. 계속해서 할 게 없어요, 뭘 할 게 없어요.

아니, 재벌 집에 시집온 여자가 정원에서 시금치나 파 기르면 남편이 ”여보, 뭐하노?“ ”살림에 보태야죠.“ ”뭘 보태?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걸 보태?“ ”우리 이거 아니면 못 살아.“ ”뭘 못 살아? 이 집이 재벌집이야. 그거 시장에 가서 사면 돼. 하지마, 그거.“

그러니까 재벌 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여러분 다 경험해봤죠? 잘 살고 진짜 원 없이, 부족함 없이 살아본 경험들 다 있잖아요. 출신이 부잣집 출신, 좀 산다는 집안에서 태어날 때 경험들이 다 있어요. 나중에 커서도 그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신명기 13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이미 인간들은 이미 거짓 선지자를 요청하는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기적만 일으켜 준다면 여호와가 아니라 부처라고해도 나한테 이익만 된다면 나 예수 안 믿고 부처 믿을게요.’ 라고 마음 준비가 다 되어있는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그래요.

13장 5절 보겠습니다.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죽이라“ 아, 참 주님의 조치가 간단하죠. 어제 낮 설교 가운데서 어려운 점이 ”주님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죽입니다.“ 살인자는 살인자가 부각이 돼요, 살인자가 부각이 되거든요. 죽음은 뭐냐? 태어남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죽은 자를 왜 또 죽여요? 그래서 태어남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 죽음을 죽음 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일이고요.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를 죽이는 것은 살인자가 하는 행동이고. 그러니까 자살하지 마세요. 100살 살아도 그게 일종의 자살이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점점 죽어요.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카운트 한다고, 96,97,98..지겨워 죽어 하여튼. 아, 진짜 도대체 언제 떠날건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 살려 두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는 우리보고 ‘사는 값하라’는 거예요. 사는 값 하라는 게 뭐냐 하면, 죄를 드러내라는 거예요. ‘죄를 드러내라.’ 죄를 드러내는 이유가 뭐냐? 죄를 드러내야 내가 뭐든지 오만하지 않고, 주의 복음에 방해꾼이 안돼요, 그 순간만큼은.

만약에 내가 죄를 안 드러내게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잘난 사람, 의인되어 버리죠. 의인 되어 버리면, 나의 의가 어디와 충돌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의와 충돌돼요. ”너희는 구하라 그 나라와“ 그 다음에 뭡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니까, 그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너희는 네가 생각하는 의 말고, 너한테는 없는데 주님에게 있는 나라, 인간에게는 뭐가 있어요? 죽으면 천국, 지옥이 있죠. 이게 다 가짜인 거예요. 천국은 주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주님 외에 천국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임해야 주의 나라를 알지, 인간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건 극락이라고 하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이에요. 착한 사람만 가는 나라, 극락이에요.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갔던 나라가 극락입니다. 그러면 그의 나라는 어떻게 하면 돼요? 그의 의를 구하면 되죠. 그의 의를 구하는 데서는 뭐가 있으면 안돼요? 나의 의가 있으면 안되죠.

그런데 나의 의를 제거해서 죄 지으면 이게 결국 뭐가 돼요? 나의 의를 없애고 죄 짓고 회개하고 반성하면 이게 뭐가 됩니까? 주의 의가 돼요, 나의 의가 돼요? 나의 의가 되지요. 이런 바보같은...내 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게 뭐가 돼요? 아주 더 고상하고 더 낭만적인 나의 의가 돼요. 도대체 이건 없어지지를 않네요.

천 번을 때려서 멍이 퍼렇게 든다 할지라도, 매일같이 회개해도 회개 자체가 뭐가 됩니까? 맨날 반성문 써도 그 자체가 나의 의가 되고, 나의 의가 죄의 핵심이거든요. 죄의 핵심. ”하나님, 나에게도 양심 있습니다.“ 양심 같은 소리하네. 양심 가지고 지옥이나 가라! 양심은 결국 나를 사수하고, 내 잘남을 변호하는 데만 필요할 뿐이에요.

”내가 뭐 말할 수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내가 다 참고 있다고!“ 이것도 자기 의잖아요. 보통 부부 싸움할 때 뭐라 합니까? ”내가 참지, 내가 참아. 니 잘 났다 그래“ ”방금 뭐라 했나?“ ”아무 소리 안했다. 나 혼자 해 본 소리다.“ 여러분, 참는 것의 반대말은 보통 화내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아닙니다. 참는 것의 반대말은 감사입니다, 감사에요.

”내가 당신한테 많이 참는다.“ 이거는 참는 게 아니죠. 속으로 부글부글 끓죠. 그런데 뭐가 반대냐? ”당신같은 인간도 있음에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 물론 듣는 그 사람은 더 화나겠지만. ”너 지금 나한테 한 방 멕였지? 멕인거지, 그치? 이단 옆차기 찬 거지, 그치? 너 같은 인간하고 산다고 내 인간성 참 많~이 좋아졌다, 뭐 그 이야기 하는 거야?“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만 챙긴다는 것이 더 죄가 나한테 더 시큰시큰하게 ,아주 새롭게 매일같이 느껴진다.”

내 속에 감추어놓은 죄가, 감추어지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죄가 죄의 깊이가 더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참다 참다 결국 터질 때가 되면,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 때문이다. 다 당신 때문이고, 대통령 잘 못 만나서 그렇고, 선거 조작해서 된 거고, 전부다 너 때문’이에요. 그게 뭐냐? 그게 정확하게 맞더라도 의미 없어요. 왜? 감사가 안 나올 때는 뭐든지 비진리예요. 그럼 감사는 언제 나오느냐? 자기가 망가질 때 감사가 나와요.

3층에서 계단 내려오다가 관절 나갈 때, 밥, 청소, 모든 걸 남편이 다 해줄 때, 처음에는 “조금 감사한 것 같애.” 그러다가 일주일 가도 낫지를 않는데 계속 해줬어. “조금 더 감사하네?” 그래놓고 남편이 내색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이런 식으로 10년을 아파도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해줄 때, 분명히 저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기분은 좋으네.”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남편도 없습니까? ‘좋으네~’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언어에 농락당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언어입니다. 율법대로 삶으로써 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성질, 언어에 농락당하는 속성이 율법을 만나서 율법을 곡해하는 식으로 지가 지한테 농락당하는 거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기만당하는 자가 기만자다”라는 말이 있어요.

예를 들면, 보험 사기꾼 있잖아요. 보험 사기꾼이 보험사기를 쳤어요. 그러면, 보험 사기꾼과 보험회사 관계를 봅시다. 보험 사기꾼들이 설치고 다니니까 보험 회사에서는 정상적인 보험 청구에 대해서도 일단 출발을 어디서부터 합니까? ‘보험 사기꾼일수도 있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조사를 다 해봐야 된다고요.

그냥 보험금 달라는 대로 줘서는 회사가 안 되니까. 왜? 보험 사기꾼이 있으면 그건 기만자죠. 기만자가 일부러 사고 내면, 사기당하는 자가 누굽니까? 보험회사지요. 기만하는 자, 사기꾼은 보험 사기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보험회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의 말, ‘기만당하는 자가 기만자다.’ ‘사기당한 자가 사기꾼이다.’라는 말은 뭐냐?

‘보험료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보험회사가 사기꾼이거든요. 보험회사가 사기꾼이에요. 이문을 통계와 확률에 의해서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책정해서 이윤을 챙기는 이 자체가 사기꾼이잖아요. 왜 그 계산을 안했겠어요? 전체 사고 가운데 보험 사기꾼의 사고 비율을 계산하고, 보험 사기꾼이 등장할 때마다 ‘이것이 보험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는 요인입니다.’라고 대국민 사기를 칠 수 있는 빌미가 되는 거예요.

바로 인간들은 이미 마귀한테 사기를 당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인생 자체가 괴롭고 힘들다는 거예요. 나는 착한데, 인생 자체가 내 착함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분명히 나는 착한데, 악마가 나를 괴롭게 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사기꾼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그렇게 힘들게 살 인생이 아닌데, 당신에게 액운이 끼었다. 우리가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의 액운을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기꾼은 누구에요? 거짓 선지자가 사기꾼이죠.

그런데 거짓 선지자 말을 듣는 그 사람은 누구에요? 본인이 본인을 모르고 본인에게 사기치고 있었던 것을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사기꾼을 만나야, 내가 사기꾼을 만나야 마땅함을 아는 거죠. 그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 하냐 하면, “죽이란 말이야.”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안 죽이죠. 성과 없는 선지자는 죽여 버리죠. 죽이는 이유가 율법대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별 소득이 없으니까 죽여도 괜찮은 거예요.

사울 왕은 분명히 율법대로 한다고 무당을 죽이고 쫓아냈죠. 그런데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누가 찾아갔습니까? 사울 본인이 찾아갔죠.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라.” 왜 불러내는데요? 그 이야기 잠깐 해드릴까요? 죽은 사무엘을 불러냈더니만, 죽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알아요?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을 지목해서 이야기했어요.

“그 때 너는 왜 아각의 목을 당장 치지 않았느냐?” 옛날이야기예요. “그 때 이미 하나님은 너를 버렸다.” 하나님 편에 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아각의 목을 왜 안쳤느냐 하면요, 왕이 제 자존심에 내가 칠 수도 있고, 안 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쫘악 보이듯이 보여줘야 백성들에게 자기 권위가 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역시 우리 이스라엘은 저 사울왕 없이는 안 돼. 사울과 그 집안이 계속 왕이 되어야 돼.” 라고 했던 그 기회를 사울왕이 놓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뭐냐? “사울과 그를 따르는 자를 나는 이스라엘로 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이 와서 새로운 왕이 조직해야 된다.” 그 왕이 누구겠어요? 다윗이죠, 다윗.

사울왕 나중에 어떻게 되나 한 번 봐요. 결국에 사울왕은 뭡니까?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건사하고,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이익이 온다면 뭐 신접한 여인이든 뭐든 간에 나한테 조언만 해준다면 나는 최고다.’

‘아각의 목을 쳐라’ 아각 왕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허각과 연관시켜서 생각나요. 여러분들도 성경인물 구절 떠올릴 때 아는 이름과 연관시켜보세요.

이스라엘에 율법이 있는 한, 내내 이런 식이에요. ‘너의 죄를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계속 시험, 테스트 하는 거예요. “죽여라” 안 죽입니다. 안 죽이죠. 거짓 선지가 같으면 죽이는데, 거짓이냐 아니냐를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당신 때문에 우리 조직에 이익이 되면 당신은 참된 선지자가 되고, 여호와 이름으로 했는데 우리가 손해 본다? 그러면, ‘여호와 이름이고 뭐고 소용없다, 죽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에 그 다음 역사가 내내 그렇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부터 해서 모든 선지자가 그런 수난을 받았어요. 참된 선지자는 내가 기대하고 있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퇴출 대상이었고, 죽음의 대상이었습니다.

‘퇴출’,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자,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의 길은 예수님 뒤편에 있어요. 예수님이 길이니까. 예수님의 뒤쪽에 구원의 길이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예수님에 가로 막혀서 구원의 길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퇴출당했죠. 추방되었죠.

추방되었으니까 그 뒤에 뭐가 보입니까? 비로소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 없어질 때, 비로소 바로 그 자리가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착해서 예수님을 안 죽인다 하면, 그 사람은 뭐가 없습니까? 구원의 길이 없는 셈이 돼요, 구원의 길이 없어요.

율법대로,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계속 보내는데, 나중에는 거짓 선지자는 우대받고, 나중에 장로 되고, 신학교 출신들이거든요. 신학교 출신들 나중에 월급 받아요, 공무원으로서. 그런데 참 선지자는 그런 거 없어요. 참 선지자는 나중에 퇴출당하고, 추방당하죠. 그게 바로 구원의 길이에요. 그 시대 사람의 구원의 길입니다.

자, 어떤 시대든 사람들이 ‘저건 거짓 선지자다, 저건 참 선지자다.’를 어느 기준에 의해서 판정을 내리느냔 말이죠. 그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있어서 첫 번째, 도움 되는가 두 번째, 저해되는가로 판정을 내려요. 도움 되는가, 저해되는가?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너희 원수는 너희 집안 식구’라 했어요.(마10장 36절) 그렇죠? 가만히 있는 식구 또 애 먹이지 마시구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런데 좀 더 뒤 구절에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너를 부인하라”고 나와 있어요. (38, 39절)

저거는 나의 구원을 막는 적이라 했는데, 그렇게 얘기하는 네가 바로 구원의 길을 막는 적이에요. 구원 받고자하는 내가 구원의 길을 막는 적이 된다고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를 퇴출시킬 마음이 없고 내가 나를 추방시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동안 왜 힘들게 살았는데? 뭐 때문에, 누구 때문에 살았는데? 누구 좋으라고 살았는데?”

보통 드라마나 실제로도 그런 일이 많죠. 시집 온 지 얼만 안됐는데, 너무 구박을 많이 받아가지고 이건 뭐 시집에서 ‘네가 낳은 자식 놔두고 너 혼자 나가라.’ 시어머니부터해서 그렇게 구박을 해서 애 데려오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젊은 나이에 그만 추방당했다 합시다. 그래서 한 30년 뒤에 애가 커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왔다.

그래서 30살 먹은 아들이나 딸이 엄마 만나서 “엄마, 그동안 나 왜 안 찾아왔어?” 그러면 엄마가 뭐라 합니까? “실은 말이야, 가만 있어봐.”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뭐라 합니까? 눈물 흘리면서 뭐라 합니까? “얘야, 미안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실은 말이야. 우리 시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는 안하잖아요. 왜냐? 그런 이야기는 나를 추방한 당사자한테는 할 수 있지만, 애는 제가 태어날 때 어른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제게 중요한 것은 ‘내 성장에 그들이 도움이 안 됐다.’는 그 점이 화가 나는 거예요.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과 결부해서 진리냐 비진리냐를 판정하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인도해가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그들에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네요. 우리가 ‘나는 착합니다.’하는데, 중요한 것은 착하고 안 착하고가 아니라 판정 기준이 뭐냔 말이죠.

‘나는 나를 버리기 싫은데 내가 너 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 이거잖아요. 노골적으로 말해서 “힘들어 못살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가 악바리처럼 살아서 이만큼 살았지. 너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하얀 나비‘ 한번 불러볼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미자가 불렀던 노래 있죠? ‘여자의 일생’ 그 가사 한 번 보세요. ’이게 여자의 갈 길인가‘하고 울면서 그리고 뒤에 나온 가사가 뭡니까?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안 참으면 뭐 어쩔 건데? 참는다는 게 뭐냐? 감사한다는 게 아니고, 내가 나한테 감사하는 거, 내 의젓함과 내 잘남에 본인이 감사하는 것, 이게 자기를 우상시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있는 노래들이 이렇게 감추어져 있어요. 이게 진짜 세계가 아니라 전부 가짜 세계에서 성경 보고 율법 보다 보니까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이 최종의 우상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때까지 율법은 계속 쫓아갑니다. 쫓아가서 끝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들추어냅니다. 10분 쉽시다.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6강) 롬10:15(나 빼기)20250428b(강의: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십자가를 아십니까』에서 [십자가와 전도] p.182부터 하겠습니다.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란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나와 있죠.

그럼 십자가 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인물이 뭐냐? ‘멸망하는 자’도 동원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라는 것도 나오죠. 그러면 들어가는 것, 재료는 뭡니까? 멸망하는 자가 재료가 되지만 그 결과로 나오는 게 뭐냐? 구원을 얻는 자가 나오죠.

멸망하는 자, 멸망해야 될 자가 있을 때 멸망하는 자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뭐가 투입됩니까? ‘십자가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투입되게 되면 멸망하는 자에서 구원 얻는 자가 발생된다.’ 이 이야기에요.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구원 얻은 자가 뭐를 자랑하겠습니까? 자랑할 수 있다면? 자기 멸망한 걸 자랑합니까? 죄 지은 걸 자랑합니까? 뭡니까? 십자가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겠죠. 자랑하면서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공로잖아요. 예수님의 공로죠. 따라서 나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 없이는 아무도 구원 못 받으니까. 논리가 그래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없이는 아무도 구원 못 받죠.

그럼 모든 자는 뭡니까? 멸망해야 마땅한 자가 되죠. 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와 십자가의 능력을 누가 전한단 말입니까? 구원을 얻은 자만 이것을 전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멸망해야 하는 이유+십자가의 능력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전하는 것은 안 되죠. 이건 자기 증인 되니까. 자기는 멸망 받아 마땅한 자인데, 주도권은 십자가 지신 분이 주도권을 가져서 예수님만 자랑한다 할 때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 받았다, 안 받았다의 관건은 어디 달렸습니까? 내가 뭘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실제로 여기 도입되었느냐 하는 문제에요. 도입되었는지가 결정적이죠. 도입되었느냐.

그 밑에 보면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문제를 내게 되면 그 취지가 밝혀지겠죠. 다음 중 구원의 능력은? 1.예수님의 오심, 2.예수님의 존재하심과 일하심, 3.십자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 몇 번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죠.

그럼 성경에서는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이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탄생도 있고 예수님이 세례 받는 것 있고 일하신 것 있잖아요. 그러면 그 해석을 할 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건 능력입니까, 능력 아닙니까? 능력 아니죠. ‘예수님이 이런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능력 아니죠. ‘예수님은 이런 수난을 받았습니다.’ 능력 아니죠.

지금 성경책을 누가 보고 있어요? 내가 보고 있잖아요. 내가 구원 받은 자 되려면 성경해석을 어떻게 다가가야 되느냐? 3.십자가의 죽음으로 다가가야 되겠죠. 그러면 성경, 신약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 심지어 구약의 모든 구절, 창세기 1장 1절까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구절까지 무엇과 결부시키면 되겠습니까?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면 그것이 전도, 그게 설교다 이 말입니다. 그게 설교가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굉장히 쉽죠. 쉬우니까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빵이 옛날 토속적인 맛이 나는 것은 여기에 막걸리를 이스트용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빵이 구원의 능력이 되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 빵을 먹는다고 구원 되는 거 아니고 천국 가는 거 아니고, 어떻게 연결시키면 돼요? 이 빵에 대한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결부시키면 되겠죠. 참 쉽죠? 뭐가 뻥 뚫린 것 같은 느낌 드는데 논리적으로는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러면 이 빵과 예수님 죽으심을 연관시켜보겠습니다. 이렇게 연관시키면 되죠. ‘모든 주어진 것들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주신 것이다.’ 이러면 ‘모든 주어진 것들’이니까 여기에 막걸리 넣은 빵도 포함되겠죠. 그럼 여러분들이 한번 넣어보는 거예요. 모든 주어진 것, 맏아들. 내 맏아들은 누가 준 겁니까?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온 겁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왔죠.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건이고, ‘예수님’은 존재잖아요. 존재에서 아들이 나온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에서 아들이 나온 거예요. 만약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나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 예수님, 신의 존재를 믿어.” 이건 아무 효과 없어요. 예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뭐 빌보드에 올라가든 뭐에 올라가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나로 하여금 곡을 만들게 하고 빌보드에 올라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냥 예를 든 거예요. 그런 일이 있다는 게 아니고 그냥 예를 든 겁니다.

그러니까 열 살 먹은 애가 “엄마, 나 수학시험 쳤는데 백점 맞았어.”할 때, 그게 구원의 능력이 되려면 “예수님이 그렇게 백점 맞게 했다.”그러면 안 되고 “네가 백점 맞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다.”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심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계셔서 내가 있다’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있다’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예수님이 계셔서 내가 있다 하면 수학 백점이 주께 영광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수학 백점이 영광이 된다면 그럼 수학 95점은 영광이 덜 되는 겁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죠.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수학 백점을 맞더라도 나는 결국 주님의 죽으심에 합류되었고 합류될 자다.’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고 비켜야 그 뒤에 구원의 길이 나오니까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결부되어야 죽으심 안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천국 가는 길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 갈 때 따라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못 따라오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베드로의 죽음이 베드로의 구원의 능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것까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예수님의 죽으심만 구원의 능력이지, 베드로의 죽음이 거기 낄 자리가 못돼요.

결과는 끼어들었는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결과는 끼어들었지만, 시작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이어야 되지, ‘예수님도 참 훌륭한 분이지만 베드로도 참 훌륭해.’ 이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요. 베드로가 훌륭해져버리면 교황이 훌륭해져요.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베드로 계열이라고 주장하거든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베드로보고 반석이라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 안에 계신 분이 반석이죠. 그래야 ‘예수 안’의 베드로죠. 그런데 베드로를 딱 떼어 내버리면 베드로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냥 시몬이죠. 그냥 시몬이에요. 시몬이라는 죄인을, 반석 되신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 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규정하는 방법이 있고 내부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외형적 규정이란, ‘모여 있다. 모여 있는 모임이다.’ 이런 걸로 규정을 합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 κοινωνία)라는 헬라어가 있는데 그냥 우리말로 하면 ‘집회’ 또는 ‘동우회’, ‘단체’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어요. 어떤 표현을 하든 간에 이 ‘교회’라는 뜻을 제대로 표현 못해요. 에클레시아(ecclesia, έκκλησία), 모임, 집회 이런 뜻이거든요. 교제하는 집회. 동우회 같은 경우에는 시노도스(synodos)라 해서 ‘공의회’라고 하는 겁니다. 소위 주교들하고 왕이 모였을 때 공의회라 해요. 무슨 결정들을 할 때 교리 결정할 때 공의회를 많이 했잖아요. 천주교에서 공의회를 따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외형적으로 설명해도 이게 왜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이런 외형적 규정 속에는 탈락자의 속출 요소가 있어요. 탈락자. 탈락자들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온전한 외형적 모임으로 교회라고 묘사하기가 곤란해요. 교회라고 손들고 나왔는데 두 달 뒤에 교회 안 나온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한번 나오면 절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관계가 없을까?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낯선 인간끼리 서로 과거가 다른 인간끼리 출신이 다르고 다 성별이 다른 인간끼리 다시는 탈락자 없이 영원히 완전체로 모을 수 있는 그런 용어가 없을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의 내부적 규정으로서 ‘body, 몸,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는지 성경 한 번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이렇게 되어 있죠. 외형적인 것이 교회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교회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외형적으로 자꾸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을 또는 복음을 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법으로 해석하고 싶은 거예요. 법의 체제가 동원되면 가시적인 대상, 눈에 보이는 대상체가 돼요. 그러면 그것만 딱 붙들면 천국에 합격이 된다, 그렇게 언급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게 일반인들에게 왜 좋냐 하면 일반인들은 벌써 출생 자체가 법적으로 되어 있는 단체에요. 소속이 있단 말이죠. 법적으로 규명을 해주고 법적으로 납득되는 소속이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 단체가 되려면 살아온 것도 법적 인식이므로 ‘법적으로 인식에 합당한 그러한 집단으로 나를 등록한다면 나는 아주 이해하는 데에 편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일반인들이에요.

그래서 교회에서나 성당에서는 “등록하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서류작성하시고 전화번호 하나 적어놓으시고 여기에 오래 있으면 집사 되고 더 오래 있으면 권사, 장로 됩니다.” 하는 거예요. 뭐 태권도 학원도 아니고요. 처음에 흰 띠인데 그다음에 오렌지색, 초록색에다가… 그럼 검은 띠는 누구에요? 당회원들이 검은 띠에요? 도복 입고. 검은 띠인 사람도 불편한 게 많아요. 소위 검은 띠인 사람은 기도해도 정장 입고 넥타이 매고 해야 되지만, 집사가 기도할 때는 운동복 입어도 ‘집사 주제에 그런 거 뭐 봐 줄게.’ 이럴 수 있단 말이죠.

외형적으로 법에 저촉이 안 된다면 나는 그 교회에, 천국 백성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죠. 공동체. 이런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거예요. 떡을 떼고 나누고, 뭐 막걸리 떡을 먹든 뭐든 간에 떡을 떼고 참외도 맛있다 하다가 떡 맛있다 해놓고 그 다음부터 안 나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떡값만 날렸네. 떡값만 날렸어.

그래서 도저히 이건 나오고 안 나오고 빼도 박도 못하는 단어가 있어요. 혈육적인 것은 ‘너는 이제부터 내 자식 아니다. 호적에서 뺀다.’해도 자식은 자식이거든요. 부모-자식 간을 인간이 못 끊습니다. 끊을 수가 없어요.

거기다가 성경은 교회를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면서 모든 눈에 보이는 것, 가시적(可視的) 또는 가지적(可知的)이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기꺼이 탈피하도록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것을 탈피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걸 탈피해버리면 남는 게 뭐냐? 남는 게 우리가 행한 것 말고,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들, 그 현상들의 일치가 교회를 형성합니다.

지금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전도 내용에 대해서도 ‘뭘 전할 거냐’도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8장 15절부터 읽어볼게요.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고 성령이 자동적으로 온다, 안 온다? 안 온다 이 말입니다. 왜? 법적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이 (예상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를 다 탈피하십니다. 다 벗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여기서 시몬은 마술사 시몬이에요,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 시몬 마술사 입장에서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하자 없는 행동을 한 거예요. 자기가 보기에 사도가 안수하니 성령이 왔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생각해도 ‘안수하기 전에는 성령이 없었는데 안수하니까 성령이 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거다. 다른 사람이 안수하면 성령이 안 온다. 저 사람들이 안수하니까 성령이 왔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직업, 다시 말해서 마술사라는 직업 입장에서 볼 때 이건 좋은 상업적 컨셉이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이것은 강남 강의에서도 했지만 사도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 추가적인 어떤 능력이 임해서 이렇게 된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능력은 능력대로 오더라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가 능력으로 오는 데는 이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이 말이죠. 일반인들의 생각이거든요.

지금 일반인들에게 뭐가 안 보입니까? 실제로 홀로 일하시는 성령님은 안 보이죠. 성령님이 안 보이지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보이는 인간이 이렇게 하면 성령이 오신다.’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들을 자기 일에 동원시킨 거예요!

여러분, 같은 말 아닙니다. 이게 엄청나게 다른 말이에요. 그럼 발주를 누가 한 거죠? 아파트 발주를 누가 한 거예요? 주민들이 하게 되면 재개발이죠. 그런데 건설 업체가 하게 되면 건설 회사가 발주체 아닙니까? 나중에 집 지어놓고 팔면 되잖아요.

지금 이 세상에 구원의 발주체가 누구냐 하면요, 인간이 아니에요. 사도가 아니에요. 누굽니까? 성령님이에요. 주님이 그렇게 발주한 거예요. 그런데 이 시몬은 어디에 기대를 거느냐 하면, 사도들이 하는 일, 사도가 인간이니까 저희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이 하는 일에 어떤 자극이 되거나 개시할 수 있는 준비 작업으로 끼어들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시몬이요? 오늘날 전도자가 다. 모든 교회 전도자들이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전도 안 해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교회라는 것을 외형적으로 봤습니까, 내형적으로 봤습니까? 외형적으로 봤죠. 외형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죠. 집회란 말이에요, 집회. 모임, 집회 이걸 교회라고 그들은 규정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보면 모이는 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하니까 뭐가 탐이 나느냐? 숫자가 늘어난다는 게 탐이 나는 거예요. 숫자가 늘어나면 뭐도 같이 늘어나겠어요? 헌금도 늘어나겠죠. 헌금도 늘어나면 뭐가 늘어나겠어요? 교회 월급도 늘어나고 자기의 노후대책도 보장이 되겠죠. 어제 오후 설교 끝나고 난 뒤에 나중에 축도할 때 제가 그랬잖아요. 축도 기도에서. 제발 노후대책 세우지 말고 죽음대책 세우라 했잖아요.

그러고 나서 내가 일평생 동안 주의 설교하고 강의하고 목회하고 개척교회 몇 군데 했다는 거예요. 그때 또 적용되는 성경구절이 있어요. 성경은 얼마나 친절하게 구석구석 다 박아놨는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여, 제가 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너 모른다.”(마 7:22-23) 왜? 자아를 위해서 예수님을 컨셉으로 당겼으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도의 입장에서는 전도 안 해도 돼요. 전도 할 필요도 없어요. 왜? 받을 걸 다 받아 챙겼기 때문에. 사도 입장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사도한다고 구원에 더 보너스 주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도를 죽을 때까지 안 죽여요. 제 말 맞죠? 죽을 때까지 안 죽입니다. 하여튼 빈틈이 없죠. 맞는 이야기죠.

죽을 때까지 안 죽인다는 말은 쓰실 때까지 탈탈 떨어서 다 쓰신다는 거예요. 다 쓰십니다. ‘네 목숨 값하라.’ 다시 말해서 ‘네 숨값 하라’는 뜻이에요. 숨값. 갈라디아서 다시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하지, 돌아가신 분에게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일이 여러분 다 값하라고 살아있는 거예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 했거든요. 이 본문해석을 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그 당시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고 사회적 계층이 차이 나서 집회 자체가 성립 안 되었다. 어디 더러운 것들이 우리 고상한 귀족이나 말하는 자리에 끼느냐? 저리 가라 해서 공동의회 자체가 천한 것들, 모자란 것들을 안 넣어줬다.’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그 해석이 또 교회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외형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교회는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잘난 자, 못난 자 이렇게 얼마나 민주적이고 평화로우냐, 이렇게 해석을 하더란 말이죠. 다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지금 그렇게 해석하면 안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여자냐 남자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여자는 여자 값하면서 죽을 때까지 네 일하라고 여자 되게 하신 거예요. 남자도 마찬가지고. 종도 마찬가지고. ‘나 구원 받았으니까 나는 멋진 공동체, 교회라는 공동체, 그리스도 몸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그 이야기 들으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요.

주님께서는, 너는 내가 시키는 일 하라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일! “뭐 종인데 뭐…” “종이라도 내가 너 종 되게 했어. 내가 너 강도 되게 했고 너 창녀 되게 했어. 그 값을 해야지. 기생 라합 봐. 창기, 세리 봐.” 삭개오는 세리장이잖아요. 남한테 군림해서 욕 얻어먹는 세금장이란 말이죠. 그런데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직업 바꿨습니까? 안 바꿨어요. 어떤 직업이든 어떤 시간이든 날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날 위한 시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단체는 다른 단체와 달리 서로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뭐 이런 외형적인 것 감상하면서 흐뭇하게 여길 그런 쨉이 아니에요. 그 시간에 너는 복음이나 전하라! 나 이렇게 구원 받았다, 그거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네가 하고자 하는 네 일이나 하란 말이야. 네 있는 모습 그대로.

“난 뭐 몸이 아파서 복음도 못 전하고…” “아픈 것이 전도용이야. 내가 아프게 했어. 왜? 전도하라고!” “고관절 나가서…” “고관절 나가더라도 내가 나가게 했다고. 내가.”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남 탓이에요.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자기 자신을 외형적으로 봐요. 맨날 외형적으로. 나는 나한테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전도를 누가 방해했어요? 나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엉뚱한 생각이 주님의 거룩한 도를 방해한 거예요.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 보이지 않죠.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 지신 분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안 믿어져요. 여기서 능력이 와야 되는데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이냐 하면 구원해주는 능력이에요. 구원의 능력은 일시키는 능력이에요. 기능적 능력이에요. 일시키는 능력.

“오늘 왜 모자 쓰고 왔어요?” “주께서 모자 쓰게 하셨네요.” 주께서 주시는 일시킴을 위함이에요. 만약에 내가 이러기 위해서 모자 쓰고 어떻고 한다면 이건 자기 의가 되죠. 자기 의. 나는 모자 쓰나 안 쓰나 구원 받았다~ 주님께서는 일시키기 위해서 구원해놨는데, 나는 드디어 챙길 것 챙겼다~ 신난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전도라 하는 것은 발주자가 누굽니까? 주님이 발주하죠. 그 결과 생긴 것이 뭐냐? 전도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발생하죠.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활동하고 있죠.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걸 교회라고 해요.

‘교회 들어갔다’가 아니라 ‘나 교회 다닌다’가 아니라, ‘늘 교회 되게 하신다. 성령께서.’ 교회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다. 아까 ‘몸’이라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육체도 자식 부모 사이에 형제 간 사이에 형은 형 아니고 동생 아니다 해도 소용없듯이 이것은 이미 주어진 거예요.

그처럼 우리의 구원도 빼도 박도 못하고 이미 주어진 거고요. 우리가 맡은 기능도 이미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하기 싫어요, 하고 싶어요’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동하고 있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요약한 것으로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보고 10장 보고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렇게 되어 있죠. 주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왜 몸이 하나냐? 고린도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약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이 필요해요. 10장 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뭐가 설명이 필요하냐? 구약에 있는 역사적 사건을 신약의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서 어떤 해석을 동원시켜서 이렇게 진리로서 내세울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구약의 사건을. 구약의 사건에서 그들이 마신 물은 한 장소에서 마신 물이에요. 한 장소, 광야에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홍해를 건너왔는데 다른 사람은 홍해 말고 다른 길로 건너오고 이런 거 없어요. 그건 노선 이탈이죠. 노선 이탈은 마라톤에서 선수로 안 넣어줍니다. 똑같은 코스를 밟고 가야 되거든요. 똑같은 코스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코스에 동행하시는 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이죠. 주님이 애굽에서 나왔고 주님이 유월절에 있었고 주님이 홍해를 건너갔고 주님이 반석에 있었어요. 그 주님이 하는 일이 모세 옆에 있는 지팡이로 보였고. 모세 옆에는 항상 뭐가 있었습니까? 지팡이가 있다는 말은, 너희들의 경험을 내가 보상해주는 게 아니고 내 경험에 네가 종속되게 하시는 거예요. 지팡이가 겪는 그 경험에 종속된 자를 교회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하나요 지체가 여럿’이라는 이 말은 그 몸은 누구 몸을 말하느냐? 우리 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엡 4:3-6) 다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다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아까 갈라디아서 3장 28절, ‘자유자나 종(노예)이나 또는 남자나 여자나’ 그렇게 표현할 때 그 표현은 이게 돼요. ‘내가 남자다’, ‘내가 여자다’, ‘나는 주인장이다’, ‘나는 당신의 노예다’ 할 때 앞에 붙어있는 ‘나’. 남자, 여자, 주인장, 노예 이것은 그대로 있고 무엇을 제거하느냐 하면 나를 제거해야 돼요. 나를 제거하지 않으면 이게 단일성이 안돼요.

교회 오게 되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정답은 있어요.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동에서 오셨습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동이든 내가 교회 오는데 그게 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느 동에 사느냐 물으면 내가 중촌동에 삽니다. 36년 된 금호 아파트에 삽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그건 어떤 조건의 탈락이냐 하면 ‘교회가 무엇이냐’를 보여줄 기능, 전도에서 ‘나는 중촌동 옛날 아파트에 삽니다.’ 이게 전혀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게 돼요. 왜? ‘나’가 들어가니까. 천국은 불순물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 몸이 들어가는데, 내가 들어가는 것, 그것은 가차 없이 못 들어가게 합니다.

제가 제일 답답한 게 그거에요. 참 답답한 게 천국은 간다 하면서도 몸은 천국 가는 몸이 안 되었을 때, 저 사람 어쩌려고 저러는지. 도대체 대책이 있어? 아무 대책도 없어요. 천국 갈 거라고 기대하면서 마음가짐이나 생각은 천국에 못 살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이럴 때는? 뭐 약물 주사를 놔도 안 되고 어떻게 달라질 대책이 없네요. 대책이 없어요. 바꿔야 되거든요.

“천국 간다는 내가 바로 죄였습니다.” 이렇게 바꾸면 된단 말이죠. 그럼 “지옥이나 가라.” 이런 이야기 안한다고요. “어떻게 알았지, 그걸?” 그래가지고 주님께서는 “너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 이렇게 되는데 그냥 “성경에 보니까 예수 피 믿으면 간답니다.” “너는?” “나는 그대로죠.” 네가 그대로 있으면 안돼!

그대로 있으면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 아니고, 만약 교인 수가 50명이라면 그 교회 몸이 몇 개에요? 50개가 돼요. 그거는 교회 아니에요. 뭐 낙지도 아니고 히드라도 아니고 이거 뭐 진짜 50개의 머리가 있어가지고 중구난방 된다니까요. 하나에서 나와야죠, 하나에서요.

“당신은 무슨 물 먹었어요?” “나는 뭐… 삼다수 먹고 왔어요.” 이스라엘은 한 군데 한 반석에서만 나온 물을 먹었는데 삼다수를 먹고 왔대요.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말 안 통하니까 수준 낮으니까 우리끼리 놀자. 게바 파고 아볼로 파고 뭐 바울 파고 예수 파고 파를 이루었다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왔던 반석, 실제적으로 반석에서 나온 물질적인 물을 먹은 자들은 구약에 오면서 탈락됐어요. 탈락이 있는 거예요. 온전한 완전체가 아니고 탈락을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이것을 거론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하나의, 반석에서 물 먹는 것 말고 물 안 마시고, 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두 번 다시 뭐가 없다? 탈락은 이제 없다. 이제 탈락은 없는 거예요. 물마시듯이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그렇다.

탈락이 없다는 말은, ‘나’라는 가치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집게로 빼내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늘 제거해주는 작업을 성령께서 해주신다는 거죠. 어제 낮 설교에 이 대목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제가 귀신들린 자를 이야기했죠.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들어있는 인간. 아무것도 아닌, 마귀죠, 진짜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름도 없어요, 그냥 군대에요, 아무것도 아닌 마귀가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남은 인간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게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가 안 될 수 없어요. 감사가 절로 돼요. 왜 우리가 감사와 기쁨이 없냐 하면 지가 뭐 인양 여기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된 양 여기기 때문에 불안이 와요. 이 잘난 것을 어떻게 손상당하지 않고 흠집당하지 않고 지켜내느냐? 그렇게 지켜내는 방법은 여러분 아시죠? 맨날 자기의 뭘 끌어와요? 자기만 지키고 남은 못 지키는 법을, 자기만 지키니까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법을 끌어와서 이게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그 법이 있는 자는 스스로 망가진 자에요. 사실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 깔끔하게 다 치료가 되고 괜찮은데요. 상담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오은영 박사부터 해서 상담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이혼숙려 캠프에서 서장훈부터 퇴직 판사, 변호사들 나와서 상담해주죠. 상담하는 사람들을 상담하고 싶어, 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그 목적지가 뭐냐 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거에요. 당신은 소중하다는 거예요. 이거는 상담을 하는 게 아니고, 악을, 하여튼 저주를 벌어. 인간은 소중하지 않습니다! 그게 치료에요, 그게. 우울증이고 뭐고 간에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대로 병 걸려 죽어도 상관없어요. 마귀의 주택지인데 뭐 마귀 아파트가 마귀 아파트 값을 하지, 뭐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 말하려고 지금까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위함인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가. 사도 본인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맨날 죽음에 넘기움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신경 쓸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죽는데 내가 왜 신경 써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흙으로 되는 것이 그게 왜 내가 신경 쓸 문제냐 이 말이죠. 발주체가 내가 아닌데요. 아파트 한번 지어봐야 돼.

자꾸 율법, 성경말씀 동원해가지고 대학교 간사들, 학생들처럼 ‘주여 주 오는 날까지~’ 찬송해가면서 ‘주여 주여 회개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물론 기성교회에서 그렇게 하니까 애들이 본받아서 그렇게 하겠죠.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주 오시면 너 없는데? 너 누구세요? 하고 있는데 어쩜 좋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언제 오셔도 상관없어요. 내가 없으면 뭐만 남는 줄 알아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만 남아요. 복음만 남는다고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 안에 말씀만 남는다고요. 말씀만.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상담하는 사람들이 정신병자 같아요. 이혼숙려 프로그램 보게 되면 성질나면서 보거든요. 이거 뭐 개판이야, 개판, 완전히. 남편 돈 한 푼 안 벌면서 돈 쓰면서 큰소리치고요. 기가 차요. 여자는 돈 벌어주면서 얻어맞으면서도 안 떠나고 있고. 뭐에요? 자기에 대한 자기 애착이거든요. 집착이란 말이죠. 자기 결정에 대한 자기 집착이에요. 비참하게 끝나는 걸 내가 용납 못하는 거예요. 전부 다 정신병자들이에요, 정신병자들.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걸 모르는 거예요. 그들이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어요.

로마서 10장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도의 발주체가 누구라고요? 보낸 자에요. 하늘이죠. 성령께서. 그러니까 ‘전도하고 싶으니까 성령 오세요.’ 안돼요! 출발을 너부터 시작하는 것은 전도가 안 된다고요. 그냥 살아. 나 빼고 살아, 나 빼고. 나 빼고 살면 어느 현장이든 뭐 동창회 가든 어디에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그게 전도에요. 전부 다 공부 잘하는 거 자랑하는데 나는 뭐 ‘우리 애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자랑하고…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해놓고 ‘아름답다’를 어디다 딱 집어넣느냐 하면 그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 아름답다는 규정을 해버려요. 뭐 아름답기 위해서 전도하고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모든 게 하나님이 발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세세에 모든 작업에 하나님의 손길이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전도를 하는데 누가 방해하느냐? 나의 나 의식이 방해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상생활 가운데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마찬가지에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주여, 이런 일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또는 ‘이런 일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할 줄 나는 몰랐습니다.’ 이런 것.

‘내 뜻대로 안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럼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께서 퍼부어주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만 알면서 나는 내 인생 오늘 잘 살았다, 못 살았다 함부로 평가한 거예요. 내가 존재한 자체가 주님께서 복음 전파하기 위해 안 죽인 거예요. 살려준 게 아니고, 안 죽여준 거예요. 안 죽이고 일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그 중에서 극히 일부밖에 안돼요.

그 일부라도 건진 게 어딥니까. 그 일부를 알거든요. 일부를 아는데 그 다음날 저녁에 무슨 일 터져버리면, 갑자기 전기세가 예상보다 많이 나갔다 하면 그 감사와 기쁨은 그 순간 다 날아가죠. 왜?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까지 포함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다시 전기세 많이 나온 거보고 생각해보니까 옛날에 연탄 때우고 살던 거 생각하면 지금은 가스 불 들어오는 이게 얼마나 고마운지. 갑자기 또 고마움이 생기는 거예요. 일부가 약간 더 늘어났어. 전부는 아니에요. 몰라요, 우리는. 어느 정도 감사해야 될 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그 일부라도 내 기능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 전파 기능에 참여되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라는 말씀이 이제는 새록새록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러지 못한 것은 내 생각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내 생각을 지워주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50428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주일 낮 설교에서 ‘실상’과 또는 ‘허상’ 그 대목부터 앞으로 히브리서 11장 내내 정리되어야 됩니다. 실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계속 안 보이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없죠.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해놓고 보이는 세계에 이게 나타나버려요.

‘실상: 보이지 않는 세계’ 이렇게 해놓으면 이 자체는 없어요. 안 보이는데 무슨 실상이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세상, 성경에서는 보이는 세계죠, 이 보이는 세계에 실상으로 등장했을 때, 이것을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나타난 것.

나타난 것이니까 나타난 것은 보이는 세계와 결합이 안돼요.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하기 때문에 나타나더라도 보이는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나타난 것으로 왔을 때… 보이는 세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보고 있는 세계’. 내가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주일 낮에 설명한 것은 이것을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이라 했죠. 양자역학. 양자역학이 요새 모든 과학의 총화입니다. 모든 과학, 모든 학문의 마지막은 양자역학에 도달하게 되어 있어요.

양자역학의 큰 특징이 뭐냐 하면 ‘보면 사라지고 안 보면 나타난다’ 이게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학문의 끝자락, 인간 모든 학문의 끝자락입니다. 공부 꽤나 하는 사람들은 이 양자역학에서 짐 싸야 돼요, 이제는. 아, 이 세상은 내가 연구할 대상이 아니구나. 내 말을 안 듣는 세상이에요, 내 말을 안 듣는 세상.

이 양자역학에서 내놓은 결론이 있어요. ‘나도 양자의 일종이다.’ 양자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나도 입자의 일종이다. 그리고 파동의 일종이다.’ 입자와 파동을 합해서 ‘양자’라 이야기합니다. 입자와 파동에 대해서 이걸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정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라는 이스라엘 학자가 <사피엔스>, <넥서스>라는 책을 지었잖아요. 최근에 한국에 와서 강연도 했는데요. 인간은 뭐냐? 정보다. 인간은 정보,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실컷 공부하니까 어디로 가요? 양자역학, 물리학이 불교와 만나는 거예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은 있다, 뭐 이런 식의. 부처가 이야기한 것도 있지만 부처 말고 부처의 말을 그 뒤에 탐구한 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불교가 자체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측정하면 있는데 측정 안하면 없어지는 것. 그런데 더 나아가면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나 자신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나 자신이. 그래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김상욱 교수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버전 이야기했지만, 저는 10초 버전으로 이야기를 했죠. 양자역학은 뭐냐? ‘지가 자기한테 문학편지 보내놓고 좋다고 읽는 것.’ 그때 제가 설교에서 언급한 용어가 있는데 ‘무한한 투영’ 또는 ‘무한한 투영의 반복’.

이 양자역학이 발달해서 만들어진 게 휴대폰입니다. 휴대폰, 현재는 AI. 이게 양자역학에서 나왔어요. 양자역학이 아니면 전자의 흐름을 포착 못하기 때문에, 전자 흐름을 통제 못하면 휴대폰이라든지 AI, 인공지능이 안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휴대폰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맨날 쳐다보죠. 예배 시간에도 막 보고 이러죠. 본다고요.

보면 뭐가 나오냐? 무한한 투영. 누구의 투영? 나의 투영. 나를 닮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기껏 아무리 연구하고 해도 인간은 인간 속의 인간에서 그냥 자기들끼리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 모습에서 내가 달아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 모습에서 달아날 수가 없어요.

내 속에 있는 다양한 면을 타인을 통해서 봅니다. 그게 유튜브에요. 내가 이 모습일까, 저 모습일까? 내가 저거하고 싶고 이거하고 싶고 이런 거요. 유튜브를 통해서 그걸 보여줍니다. 동영상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내 욕망이 되고 싶은 것들의 무한한 반복적 투영이에요. 나의 이미지에요. 여러 각도에서 본 내 자아의 모습이에요. 그게 지금 휴대폰 세계, AI 세계, 유튜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뭡니까? 정보의 흐름이다.

이것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돼요. 이런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서로서로를 보면서 서로서로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데, 낯선 게 있어요. 아주 낯선 것. 그 낯선 것을 보이는 세계의 일부로 생각하고 보면 그 낯선 것은 내가 보고 있던 나로서는 해석이 안돼요.

그게 뭐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은 보이는 세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이 앞으로 히브리서 내내 반복될 거예요(“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불쑥 나타나버린 거예요. 어제 그 첫 번째 예로 나타난 것이 아벨의 예물이었어요. 아벨의 예물. 예물로 말한다면 그 예물은 어디 있나?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죠. 몸통+기름을 따로 분리했어요. 의도적으로 기름을 부각하면서 따로 분리를 했다 이 말이죠(창 4:4).

몸통은 보이는 세계에서, ‘아, 저건 양이야’, ‘저건 염소야’, ‘아, 저건 인간이야’ 몸통은 누구든지 이해가 되죠. 그런데 보통 기름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몸통 안에 들어있어서 몸통의 일부로 생각하는데, 아벨은 제사드릴 때 몸통과 ‘이건 몸통의 일부가 아니야.’라는 것을 부각하는 것처럼 기름 부위를 따로 분리시키는 거예요.

자, 기름이 뭔데 따로 분리를 시키느냐? 히브리서 1장 9절, 기름은 나타난 것으로서 그 속에 보이는 세계, 이 허상, 가짜죠, 가짜 세계 말고 진짜 세계, 이보다 훨씬 격상된, 차원이 다른 진짜 세계의 흔적이 기름이라는 그러한 개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고속버스 탔는데 후딱 타다보니까 내가 탄 이 버스가 대전에서 서울까지 가는지, 아니면 대전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앞에 놓인 고속버스 택배 수하물을 보니까 ‘서울 도착’이라고 되어 있더란 말이죠. 아, 이 물건 가는 곳이 서울이라면 나는 이 버스 탔으니까 지금 서울로 간다.

기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 진짜 하나님께 갈지 안 갈지 어떻게 아느냐? 인간은 진짜 하나님께 가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계시면 저의 정성을 받아주세요.’ 가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가인의 예물을 안 받습니다. 왜 안 받는가? 도착이 하나님께 도착할 게 아니에요. 뭐가 빠졌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될 요소, 기름을 앞장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달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름은 뭐냐? 히브리서 1장 9절(“…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 보이는 것 말고 나타난 것 속에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했고 결국 자신에게 도달되는 그 요소를 예물에 섞어 넣은 겁니다. 섞어 넣었어요, 기름을.

그러니까 예물, 소나 양이나 그런 거죠, 염소 예물, 이 예물이 그냥 있을 때는 눈에 보이니까 고체가 되겠죠. 그런데 예물을 이렇게 고체로 드리면 안 받습니다. 잡아야 돼요. 죽음을 당해야 돼요. 예물이 죽임을 당하면 거기서 액체가 나오죠. 피가 나오죠. 피를 흘린 이 고체는 그럼 버리느냐? 아니에요. 기름 부분을 따로 떼 내요. 기름을 따로 떼 내면 이 기름은 제단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기체가 됩니다.

고체에서 시작해서 죽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일대기에요(요 3:13-14). 육신으로 왔으나 나는 죽고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요? 들려야 되는 거예요. 나는 하늘로 들려야 되는 겁니다. 왜? 기름부음을 받았으니까.

나는 너희들하고 놀 군번이 아니니까. 이 가짜 세상에 살러 온 자가 아니고, 가짜를 가짜라고 폭로하는 기능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들려야 돼요. 들리고 가짜가 가짜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냥 ‘구경 잘했다’하고 가는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맞아죽어야 되죠. 죽임을 당해야 돼요.

이게 기름 부은 자의 가는 코스입니다. 이걸 ‘메시아(Messiah, 기름을 바른(또는 기름을 부은) 자’라 해요. 기름 부었다.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름 부은 자의 코스,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 나타난 것으로 주셨다 할 때 여기서 가인은 보이는 세계의 대표자로서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결과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왜 내가 드린 예물은 안 받습니까?’ Question mark에요. ?, 물음표. 왜 내가 드린 예물은 안 받습니까? 가인은 몰랐어요. ‘아, 인간 것은 다 안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동생 것은 받았습니다. 자, 여기서 가인은 큰 충격 받습니다. 내 예물을 안 받은 것에 대해 충격 받은 게 아니고, 내 예물은 안 받는데 동생 예물은 받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는 그 점 때문에 충격 받았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드린다고 다 받는 게 아니고 안 받는 하나님인데, 안 받으면 다 안 받아야 될 텐데 아벨이 드리는 제사는 받는 거예요. 아벨의 제사는 왜 받는지, 가인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악이 너를 지금 지배하고 있으니까 현재 네가 해야 될 일은 악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치지 못했어요. 악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시편 65편 3절을 제가 설교에서 분명히 언급했어요. 65편 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아, 이거……. 다시 말해서 실상의 세계에서 볼 때, 우리는 어두움 그 자체였다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죄가 우리를 이기는데.

그럼 우리는, 아벨 되면 되잖아. 아니, 아벨 못 됩니다. 출발을 가인부터 출발해야 돼요. 가인과 우리의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시편 65편 3절에 나오죠.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나쁜 짓한다고 죄가 아니거든요.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살면 네가 복 받는다,도 죄가 돼요. 네가 바르게 사는 그것도 죄에요. 심지어 어디까지 죄가 되느냐 하면 ‘네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라는 그 말, 그것도 마귀가 이야기한 죄가 되는 겁니다. 모든 종교, 기독교든 천주교든 어떤 종교든 그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를 안 받죠. 그러면 아벨의 제물은 왜 받느냐? 아벨의 예물 속에는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이게 죄가 아닌 거예요. 그럼 우리도 기름부음 있는 것으로 아벨처럼 드리면 되지 않느냐? 이게 드리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믿음’이거든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물과 예물 드리는 자가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에요. 예물이 가는 운명, 그 운명대로 예물 드리는 자 아벨이 따라가야 돼요.

지금 예물은 피 흘려 죽잖아요. 그럼 예물 드리는 자가 누굽니까? 아벨이죠. 아벨은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죽임을 당하면 예물 드려놓고 손해가 되지 않느냐 생각하겠죠. 주님께서는 아벨을 복원시켜요. 사실은 준비하기 전에 제목을 ‘아벨의 복원’으로 할까 이렇게까지 생각했어요. 아벨을 복원시킵니다.

아벨이 복원된다는 말은 아벨의 이름은 보이는 세계의 이름이기 때문에 날아가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름으로 바뀌어져요. 그게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벨의 이름은 이제 육신의 이름은 그만두고 여호와 이름 안에 쑥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왜 들어가느냐? 예물 되시는 주님과 아벨이 믿음으로 같은 운명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실은 아담에게도 이게 있어요. 분명히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내 이름이 뭐로 바뀌죠? ‘생명’이잖아요. 흙으로 돌아간다 해놓고 아내 이름은 생명이다. 죽이려면 다 죽이지, 어떻게 한쪽은 흙이고 한쪽은 생명이냐? 그 일은 네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거예요. 생명의 후손으로 오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가 다시 한 번 기억이 쉽게 되려면 여러분들은 마동석 영화를 보셔야 돼요. <범죄도시3>인가 초반에 나오는데, 마동석이 신고 받고 드디어 갑니다. 가면서 “와! 깡패 봐라. 와! 깡패다!” 되게 반갑다는 표정을 합니다. 와! 깡패다.

제가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마동석 눈에 저 인간들은 내 평가와 내 판단, 내가 내린 신분 규정에 내가 자신감을 갖고 있다 했어요. 너는 뭐래도 내 눈엔 깡패야.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세상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와! 마귀 새끼들이다!” 되게 반가운 것처럼.

굉장히 반가운 거예요. 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다른 말로 하면, “와! 어두움이다!”, “와! 지옥이다!”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걸 약간 틀었죠. “와! 이단이다! 와! 여기 이단이다. 반갑다, 이단아. 그동안 이단하고 지옥 간다고 교회 나와서 수고 많습니다. 지옥 가려고 교회 나오고 지옥 가려고 성당 나오고 아이고, 반갑습니다.” 성당 다니고 지옥 간 사람 있죠, 얼마 전 죽은 교황 같은 경우.

딱 그 한 마디에요. ‘보이는 세계가 헛된 세계’입니다. 물리학자도 자기를 모르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누군지 모르고. 자기가 죄의 작품인 줄을 아무도 몰라요. 그걸 알려줄 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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