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념 로마서 8:36 250425
광주강의20250425a 로마서 8장 36절(신앙과 신념)-이 근호 목사
오늘은『기독교와 허상』p.164 제목은 <그리스도인을 찾아서>. 그리스인은 많죠. 이방인인 헬라인이 바로 그리스인이고, 헬라는 유대나라를 삼켰던 바벨론을 삼킨 제국입니다. 바벨론을 삼키고, 그 바벨론을 페르시아가 삼키고, 그 페르시아를 삼킨 나라가 헬라입니다. 헬라 민족을 로마가 또 삼키는 거죠. 일종의 고고학이죠. 층층이 시루떡처럼 쌓이는 겁니다. 그럼 제일 밑바닥에는 무슨 나라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있겠죠.
어릴 때 고생박기 게임 있잖아요. 왕따 당한 아이 제일 밑에 넣고, 위에 와르르 덮치고 덮치고 덮치고 덮치고. 이스라엘 위에 바벨론, 그 위에 페르시아(바사), 그 위에 헬라(그리스), 그 위에 로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맨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쏙 빼서 덮친 모든 민족 위에 스펀지를 물에 담그면 물이 침투하듯이 이스라엘을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까지 침투케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언약과 함께’에요. ‘언약과 함께’라는 말은 너를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고, ‘언약이 현실이 될 때 나타나는 결과의 두 양상’을 의미해요. 언약을 지키면 복 받고 언약을 안 지키면 저주받죠. 이게 두 양상이에요.
언약은 무엇을 용납하지 않느냐 하면, 다양성? 없습니다. 다양성이라는 게 없어요. 둘 중에 하나에요. 쭉정이 아니면 알곡. 쭉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허풍,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알곡이라는 것은 언약이 제공하겠다는 복, 그 복으로만 꽉 차 있는 상태, 그게 알곡이죠.
외부에서 뭐가 들어왔다 이 말이죠. 원래 영생은 없는데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알곡이에요. 탱글탱글한 알곡. 한쪽은 쭉정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과연 쭉정이가 아무것도 없을까? 이스라엘,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다 쭉정이에요. 다 쭉정이인데 언약과 더불어서 이스라엘은 언약에 의해 망했죠. 언약이 살아있으면 위에 있는 첩첩이 쌓인 모든 나라가 이 언약의 두 양상 가운데 하나로서 전부 다 저주받고 멸망합니다.
그런데 로마는 마지막 로마 다음에 한국, 이런 거 없어요. 이 제국의 특징은 전체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니까요. 다 덮어버리니까 모든 나라가 로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가 이스라엘을 왕따 시키면서 위에서 덮쳤을 때, 그들이 스스로 알기를 자기가 쭉정이라고 보겠습니까, 알곡이라고 보겠습니까? 알곡이라고 보겠죠.
그 알곡에는 생명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권력이 들어있습니다. 힘이 들어있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쭉정이라는 말은 무엇을 뽑아낸다? 거기 있는 모든 권력을 헛것으로 다 쪽쪽 뽑아내는 작업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던 언약의 작업이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지금 제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에 의하면 모두 다 쭉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그냥 쭉정이죠. 우리도 뭐 존재에 힘이 있잖아? 그 힘은 언약이 다 뽑아낼 겁니다. 없앨 겁니다.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냥 죽게 됩니다. 없어지죠.
이 말은 언약의 완성, 생명이 없으면 그 인간이 아무리 재벌이니 좀 잘 나가니 정치력이 있니 해도 그건 하나의 쭉정이로 끝나고 마는 거예요.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와 후기 역사를 통해 주님께서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알다시피 바벨론 망하고 페르시아 망하고 헬라 망하고, 망하다 망하다 이제 로마 망하는데, 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에게는 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언약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으면 이건 ‘생명도 없다’ 그렇게 돼요. 왜냐하면 생명이란 언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의문점이 있을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생겼다면, 그럼 이스라엘이 없다는 말은 언약이 있다는 말로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이 논리적으로 맞느냐? “‘이스라엘과 함께 언약도 날아갔다. 사라졌다. 없어졌다.’ 이래야 이게 논리상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실 겁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죠. ‘언약의 나라가 망했으니까 그 나라 망할 때 언약도 같이 소실되었다. 없어졌다.’ 그게 맞죠.
조선이 일본한테 강제로 합병될 때 조선의 모든 것도 같이 다 날아가는 거죠. 보통 옛날에 전쟁할 때 이긴 자가 마지막에 하는 것이 불 지르는 거예요. 불 지를 때 그들의 과거 역사 같은 것을 흔적 없이 지움으로써 토대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처럼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던 여호와, 그리고 언약 자체가 날아가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현실세계, 로마, 헬라 이런 세계다. 힘센 나라가 그다음 차지하고 로마보다 더 힘센 나라가 차지하고 이게 진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논리에 있어서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 언약 때문에 망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언약은 이스라엘의 망함과 함께 과연 사라졌느냐, 아니면 더 생생하게 돋보이게 되었느냐?’ 이렇게 봐야 돼요.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이스라엘을 사라지게 한 그 언약은 도리어 현실로서 분명하게 남겠죠. 남는 거예요.
지금 주제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없는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없어요. 지금까지 한 것은 인간의 이야기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디 있느냐? 없죠. 모든 세상이 이스라엘과 바벨론과 로마, 거기에 다 소속되어 있고 그 소속에서 벗어난 인간은 없죠. 인간세계가 제국으로 모양이 바뀌면서 인수인계를 했기 때문에 이 짐승 같은 제국에서 벗어나서 ‘나 빼주세요’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는 기준 있잖아요, 언약이라는 기준. 그 언약 안에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써 언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면 어떨까?’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지금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제가 설명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의인 아니면 죄인, 죄인 아니면 의인 그렇게 되겠죠. 의인은 뭘 하고 싶냐 하면 신앙인하고 싶어요. 의인→신앙인. 의인이 신앙인을 하려면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언약, 율법을 집어넣으면 의인은 신앙인 된다.’라는 것이 망했던 이스라엘의 주장이죠.
지금 이스라엘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앙인을 원하잖아요, 신앙인. 그런데 현재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는 자는 유대인인 자기들밖에 없죠. 그래서 자기들은 율법에 의해서 회개를 하거나 뭐 반성을 하거나 해서 로마에 잡혀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율법으로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에서 무엇까지 나가야 된다? 이 어려운 시기에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인까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이 유대인들이 유대사회가 망해가면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포기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멸망케 했으니까 이 시점에서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더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현재 어려운 상태를 그런 식으로 율법으로 또는 말씀으로 설명을 한 거예요, 사람들이. 망하고 난 뒤에 바벨론 포로 잡히고 난 뒤에 그들 유대사회가 다시 약속의 땅에 모여 있으면서 유대인들 사이에 형성된 사상이 이거에요. 이 어려운 시기에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럴수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 믿어야 된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 신앙인 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이거에요. 신앙인부터 해서 의인이 되는 거예요. 신앙인에서 의인이 나오는 거예요. 신앙인→의인. 그럼 의인에서 신앙인 되겠다는 이건 인정 안하죠. 없습니다. 없고, 없는 신앙인이 등장해서 비로소 의인 된다면, 아까 의인에서 신앙인 될 때는 율법이 들어갔는데, 신앙인에서 의인이 될 때는 죄인이 여기에 들어가요, 죄인이.
↓율법 ↓죄인
유대인 : 의인 → 신앙인 (X) 예수님 : 신앙인 → 의인 (O)
지금 유대인들은 의인에서 신앙인 되잖아요. 유대인들은 뭘 용납하지 않습니까? 죄인에서 신앙인 되는 것을 일체 용납 안 해요. 세리와 창기가 신앙인? 천국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죄인은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은 벌 받아야 돼요. 저주 받아야 되지, 신앙인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이 신앙인 되려면, 죄인이 의인으로 가서 의인에서 신앙인 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게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토 달거나 ‘그게 아닙니다’ 할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들 사고의 한계, 범위에요. 이게 범위라고요.
지금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인→신앙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를 한번 보자는 거예요. 우리를. 우리 자신을 볼 때, ‘나는 교회 가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서 나는 신앙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초반에 문제 나갑니다. ‘나는 교회 가서 신앙인 되고 싶어요.’할 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의인에 속합니까, 죄인에 속합니까?
당연히 의인에 속하죠. 왜? 좋은 걸 하려는 그 태도 자체가 얼마나 착하고 의롭습니까? ‘난 복음 전해도 안 들어.’ 이게 뭐에요? 이게 의인이에요? 죄인입니까? ‘나는 복음 녹취해도 안 보고 안 들어. 의인 당신들이나 하세요.’ 난 죄인입니다, 소리 안 해요.
‘난 그냥 있어도 의인입니다. 당신들은 욕심을 내고 있어요. 우리처럼 그냥 바르게 살면 얼추 의인되는데, 성경에서 뭐 신앙, 믿음 없으면 천국 못 들어간다 하니까 이미 갖추어진 의에다가 더 플러스 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의까지 보태면 이젠 신앙인으로 인정받겠다는 이런 시도. 그 시도는 잘못된 겁니다. 잘못됐어요.’
그러면 이 이론에 의해서 ‘나 그럼 의인 안 되고 죄인 될래.’ 이렇게 하거든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왜 죄인이 되려고 해도 못 되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의 지식이 있다는 자체가 이게 악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선이 무엇인 줄 알고 악이 무엇인 줄 안다면 이것은 죄인 되고 싶어도 죄인 될 수가 없어요.
착함이 뭔 줄 알고 그리고 특히 인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양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 알아줘도 내 양심은 내가 알잖아요. 양심대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장로님 알아요? 양심대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양심대로 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독하게 나쁜 짓한다는 뜻입니까, 반대말입니까? 반대말이죠.
방향이 어느 쪽이라고요? 양심대로 산다는 그 방향이 나쁜 짓만 하겠다는 뜻이에요? 나쁜 짓 가운데도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겠다는 뜻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방향이 옳고 착하고 바르게 가는 그런 성향이 나한테 남아있다는 말은 내가 전적으로 죄인 되려야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신이란 뜻은 아니에요. 내가 천사란 뜻도 아니고. 다 나쁘다는 것은 너무 과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뭘 다 나빠?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이것도 나빠?’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게 없어요. 없고 뭐밖에 없어요? 의인밖에 없어요. 의, 의. 인간은 의인밖에 없어요.
의인밖에 없는데 거기다 여호와 율법 줬죠, 여호와 말씀 줬죠, 예수님 말씀 줬죠, 사도 바울 편지 줬죠. 그럼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의인인데 여기다가 신앙인, 성도가 될 요소들을 주니까 그걸 참을 수가 없죠. 그걸 챙겨야죠. 이것저것 다 챙겨야죠, 열심히. 의인 더하기 말씀까지 보태면 뭐가 된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인 경지까지, 신앙인 차원까지 간다. 오늘날 우리 생각이나 그 당시 유대인 생각이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없죠. 유대인 욕할 수가 없어요.
유대인한테 예수님만 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욕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신앙인으로 왔기 때문에 그래요. 신앙은 쟁취해서 얻는 게 아니고, 신앙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들 사이에 형성된 (의존)관계가 신앙이에요. ‘나는 말씀에 의해서 산다.’ 신앙이라는 것이 아버지와 예수님 둘 사이에 관계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어디 있느냐?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신앙이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약의 두 양상을 생성합니다. 새로 해요, 새로. 과거에 인간들이 알았던 것은 전부 다 치워버리고 새로 해요. 죄와 의를 예수님부터해서 새로 양상을 만들어내요. 신앙인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좀 많이 어렵죠? 어렵더라도 여러분들은 잘 감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신앙인으로 왔잖아요. 왔는데 지금 예수님 입장에서는 의인도 없고 뭐도 없느냐 하면 죄인이 없어요. 죄인이 없다고요. 의인도 없고. 죄인과 의인은 무엇을 위해서 새로 만들어져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등장한 그러한 개념들이에요. 죄인과 의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출발점을 어디서 시작하느냐?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서 의인으로 가면서 예수님의 신앙이 여기에 투입돼요. 출발을 죄인부터 시작하면서. 제가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요. 답변 시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합니다, 늘 그렇듯이.
마태복음 16장 23절과 24절을 제가 읽어드리고 두 가지 문제 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첫 번째 문제, ‘사람의 일이 어떻게 전부 다 사탄의 일이냐?’ 이게 첫 번째 문제에요.
두 번째 문제가 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대목이거든요. ‘십자가를 믿는 데 있어 어떻게 자기부인, 자기부정이 필수요소냐?’ 이 질문입니다. 그냥 십자가 믿으면 안 되겠어요? 그냥 십자가. ‘아, 예수님 피다. 그럼 이 피가 우리 죄를 사한다. 믿습니다. 그것가지고 모자라면 앞에 성령 하나 붙여서, 성령에 의해서 믿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 맞아요, 아니에요? 아니죠. 뭐가 빠졌어요?
지금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의하면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뭐가 들어가야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게 왜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제 질문이 이거에요. 이게 왜 들어가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부인 안하고 그냥 ‘주께서 저렇게 피를 흘리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사해준다. 아, 믿자. 구약부터 나오는 제사의 원칙인데 주께서 유월절로 그렇게 와야 했구나. 인정합니다. 저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거 아니겠어요? 그럼 천국 가는 거 아닙니까? 왜 믿는데 굳이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왜 그동안 자기부인 빼버리고 십자가를 자꾸 믿어요? 자기부인은 생각 안하고. 나무라는 거 아닙니다, 지금. 중요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첫 번째 문제, 어떻게 사람의 일이 몽땅 다 전부 다가 사탄의 일이냐? 그중에서 나쁜 일 있으면 사탄의 일이고 착한 일하면 천사의 일이고 이렇게 되어야 맞는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누가 말입니까? 사탄이. 사탄이 사람으로 하여금 겉으로는 사람의 일로 나타나는데 그 사람의 일은 전부 다 누가 시킨 것이다? 악마가 시킨 일이다. 그러니까 악마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에 어떤 아주머니가 나타나셨는데, 우리나라 대학가에 와플하고 붕어빵 체인점을 350군데 냈다는 거예요. 한 50대 아주머니인데 고생고생해가지고 열여덟 개 대학 앞에다 냈다는 거예요. 자, 문제 나갑니다. 그 아주머니가 자기부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공했는데. 나 이제 미국에 붕어빵 체인점 낼까 이럴 계획입니다, 했어요. 서장훈 앞에서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그 아주머니가 어떻게 자기를 부정합니까? 실질 문제잖아요, 이거는 실제 문제라고요.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데. 그 아주머니가 망한 거 아니에요. 지금 번창하고 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물이 막 들어와, 지금. 어떻게 자기를 부인합니까? 5초 드리겠습니다. 5,4,3,2,1.
두 문제 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힌트는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힌트에요. 주님께서 십자가 언급하면서 십자가를 믿을 위인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백날 가슴 쳐봐야 지 가슴에 나중에 좀 멍만 들지, 아무 효과 없어요. 울어도 소용없고 빌어도 소용없어요.
그럼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 믿는 걸 부정하라니까요! 믿는 걸. 십자가 믿습니다,를 부정하라니까요! 왜? 나에게 나왔기 때문에 부정해야 돼요. 나의 일은 무슨 일이기 때문에? 사탄의 일이기 때문에요. 마귀의 일이기 때문에. 하여튼 천국 가는 통로 다 막아놨어. 이리로 가면 여기도 막아놓고, 저리로 요령부리면 저기도 막아놓고 하여튼 모든 걸 다 막아놨어요.
들어갈 자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간단히 말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니까 사람들은 그럼 ‘죄인 되면 구원 받겠네요?’ 하잖아요. 죄인 될 사람도 없어요! 죄인 될 사람도 없어요. 나를 부정해야 된다니까요. 나를 부정해야 돼요. 죄인이고 의인이고 나를 부정해야 되는데 자기를 부정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왜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하느냐? 그 내력을 주님께서 요한복음 1장부터 시작해서 그걸 설명해나가요.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여러분 다 외우다시피 하죠. 참고로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이런 말씀 나오죠.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참, 주님께서 아예 작심하고 말씀하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어디에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생”이라는 결과, 그 중간에 (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 생명을 미워함). 미워할 때만 영생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럼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25절 보고 ‘영생’이라는 것을 노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자기를 미워하잖아요. 그럼 자기를 미워했다는 그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나를 미워한 그 미움을 우리는 어떻게 해요? 사랑하죠. 꼴좋다. 꼴좋아요.
주님은 인간에 대해서 항상 속에 가래를 끓고 있어요. 요래가지고 구원받겠다고 요령부리는 거, 학씨! 학씨! 가래가 튀어나올 판이야. 폭싹 속았수다. 학씨! 내가 너희들 수법에 넘어갈 상 싶어? 자기를 미워한 그 자기를 못 버리는 거예요. 부정을 못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실상과 보이는 이 세상, 이 세상과 천국 사이의 접합점인데, 어떤 접합점이냐? 영원한 접합점. 영원한 접합점으로 여기다 말씀을 내세웠는데, 그냥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 말씀인데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니까 이 말씀이 졸지에 뭐가 됐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금껏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보이지 않는 상상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율법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게 되면 우리 속에 양심이 있으니까 착함이 있으니까 의가 있으니까 그 의를 통해서 말씀을 접수하면 우리는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받고 천국 간다.’ 이러한 체계, 새로운 나의 정신체계가 갖추어지겠죠.
이미 갖추어져 있어요. 갖추어져 있으니까 주님께서 한번 비교해보자는 거예요. 너희들이 갖고 있는 그 육신과 내가 말씀이 육신 되었을 때에 대조를 해보고 그 차이점을 한번 보자는 겁니다. 그럼 그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터져 나오는 여러 가지 말씀들 중에 하나가 아까 마태복음 16장 23절, 24절이에요. 인간의 일은 몽땅 다 사탄의 일이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져도 소용없다. 십자가 지고 따라와도 그건 소용없다는 거예요.
베드로는 십자가 지는 것을 내 목숨 내놓는 걸로 이해했어요.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못 들어간다. 자기 목숨을 내놔도 못 들어가요. 목숨 내놔도 안 받습니다. 목숨 내놔도 안 받는다는 이야기, 지난 수요 설교 때 한 것 같아요. 뭐든지 안 받아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드라마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목숨도 안 받는다고 했어요. 주민등록 이런 것도 안 받을뿐더러 현찰도 안 받을뿐더러 목숨도 안 받아요. 받질 않습니다. 예,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말씀이 육신이니까 안 받죠.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육신이 필요했다는 말이니까 말씀에 육신이 필요하겠죠. 예수님이 육신이 됨으로써 모든 육신과 예수님의 육신을 비교하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이 말씀 성취에 필요조건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낌새가 슬슬, 여기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물론 작살나든 말든 간에.
주님이 육신이 됨으로써 우리 육신이 주님과 대조된다는 취지에서 우리 육신이 말씀으로 다루어지는 체제에 돌입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부인이 안 되는 이유를 우리 육신을 통해서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을 주님께서 친히 증명해내시는 겁니다. 주님이 증명해내셔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 육신 안에 품고 있는, 말씀과 반대가 되는 요소를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 끄집어내는 그 분주한 작업을 주께서 말씀으로 해주시는 거예요. 노숙자가 매고 있는 배낭을, 노숙자와 함께 경찰서에서 가서 경찰관이 배낭 풀고 끄집어냅니다. 뭐 이런 것도 있어? 이걸 왜 집어넣었어? 이것도 있네! 뭐 계속 나오네! 온갖 더럽고 추잡한 것을 다 뽑아내죠. 다 뽑아내요.
다 뽑아내면 마지막에 무엇이 딸려 나오는가? 바로 악마(사탄)가 딸려 나오면서 악마가 대표적으로 주님께 반항과 변명을 하게 됩니다. 반항과 변명을 하게 되거든요. 자, 이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영화 줄거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영화 제목은 <헝그리 하트(Hungry hearts), 2016, 이탈리아, 미국>.
뉴욕에 어떤 젊은 부부가 애를 낳고 7개월 동안 살고 있는데 부부싸움이 아주 맹렬해요. 부부싸움이 무엇 때문에 맹렬하냐면, 이거에요. 여자가 채식주의자입니다. 채식주의자라서 애를 키울 때 철저하게 어릴 때부터 채식위주로 키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 여자가 책을 많이 봤어요. 채식에 관한 책을 많이 보고, 의학적인 것 일체 다 차단시키고 약 없이 오직 자연에서 나오는 씨앗 있잖아요, 열매, 그것만 먹여요. 그래서 애를 이 세상이 주는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차단시켜서 내 애만큼은 정화되고 정결한 아이로 키워서 나중에 이 애가 크면 더러운 ‘의학’이라는 그러한 불결한 학문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만들고 싶다는 게 채식주의자 여자의 주장입니다. 채식주의자라 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 있지요. 두만강인지 한강 있죠.
남자는 직장 다니는데 여자는 애만 키우는 거예요. 남자는 애를 보니까 애 상태가 안 좋은 거예요, 7개월 동안. 여자는 뭐 씨앗 칼로리까지 계산해서 아이를 주는데. 그래서 병원에 한번 가자 했어요, 남자가. 병원에 가자. 여자는 계속 거부하는데 아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남자 혼자 아이를 데리고 의사한테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까, “이 애는 발육상태가 현재 좋지 않습니다. 자라고 있지 않습니다. 전체 중 하위 7% 허약체질에 속합니다. 애 죽습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탁 들었어요. 남편이 자기 혼자 의사 만나서 여러 가지 상황을 이렇게 보니까 “애 지금 발육이 안 됩니다. 고기 먹습니까?” “고기 안 먹습니다.”
의사 진단을 받고, 여자가 하도 채식주의에 집착이 있으니까 남자가 몰래 고기를 갈아서 먹였어요. 동물성 단백질 공급을 했단 말이죠. 그걸 알고 여자가 욜랙스 퓨어 오일이라는 단백질 소화를 막는 오일을 아기에게 몰래 먹이는 조치를 해요. 고기 먹으면 토하도록.
그래서 그 남자하고 여자하고 대판 싸웁니다. 대판 싸우면서, “애가 죽는다. 애 살려야 된다. 7개월 된 애 발육상태가 안 좋단다.” 그러니까 여자가 대뜸 하는 말이 마귀적인 발언을 해요. 나 그 영화를 보면서 살인충동을 오랜만에 느꼈어요. 여자가 이런 말을 해요. 애 건강문제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해요. 두 문장을 말했어요. “조용히 이야기해라.” 여자가 남편보고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 지금 여자의 관심사는 뭡니까? 애 건강이 문제가 아니고, 남편이 자기를 모독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 여자는 남편하고 결혼한 거예요. ‘내가 하는 결정을 신처럼 받들어줄 그런 남편을 원했는데 당신은 나한테 큰소리쳤고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
아, 모독한다고 할 때 여자의 그 눈빛.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은 사람이에요(제71회 베니스 영화제 남녀 주연상 공동수상). 이렇게 인간의 내부를 짧은 문장으로, 실질적으로 대사로 표현한 영화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 평소에 사람들은 ‘모독’이란 말을 안 쓰고 ‘당신’이라고 현장에서 안 하지만, 모든 태도와 말 가운데 이게 안 섞인 경우가 있던가요? 우리가 남하고 대화할 때, 가까운 부부부터 해서 친척이나 모든 사람하고 대화할 때.
노숙자 배낭에서 끄집어내니까 마지막 나오는 게 뭐겠어요? 악마의 말이잖아요. 악마의 말은 뭡니까? 이거에요. 감히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는 거예요. 애가 죽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식대로 애를 키우는데 당신은 여기서 큰소리 쳤고 나를 모독하고 있다는 거예요.
남자가 그 이야기 듣고 대화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겠죠. 남자가 아내한테 가서 좋은 말로, “여보, 우리 애를 위해서 같이 바깥에 산책하러 가자.” 그런데 여자는 애가 7개월 동안 햇볕도 쬐면 안돼요. 채식주의자니까 숲속의 좋은 공기만 쐐야지, 햇볕 쬐면 피부가 탄다, 피부암 걸릴 가능성이 있고 어떻고… 요새 많이 알잖아요. 요새 사람들 많이 알죠. 그걸 다 공부하고 있으니까 애를 그런 식으로는 못 키우겠다는 거예요. 바깥에 나가면 또 미세먼지 있죠. 그럼 정결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잖아요. 오직 정화된 실내에서 식물을 키워서 채식주의자 그 식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보고 웃으면서 우리 산책 나가자 할 때 여자가 주저하니까, “그럼 나 혼자 산책할까?” “나도 따라갈래.” “그럼 옷 입고 나와.” 옷 입을 때, 남자가 애 들고 애 할머니 집으로 데려갔어요. 애를 살려야 되니까. 그 전에 할머니가 봤어요. “이 애 죽는다. 살려야 된다. 여자 손에서 떼 내라. 여자는 완전히 정신병자다.” 정신병자죠.
그래서 데리고 갔는데 여자가 애 보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찾아왔는데 또 애한테 몰래 이상한 오일 발라가지고요. 거기 가니까 살 좀 쪘어. 잘 먹어가지고 살 쪘는데 또 여자가 와서 오일 바르니까 오일 냄새 났을 거 아닙니까. 여자가 애를 딱 안고 있는 거예요. 그때 자기 남편도 퇴근하고 들어와서 “애 내놔라.” 여자는 안고 안줘요. 거기서 애를 뺏는 과정에서 여자가 넘어지고 입술이 약간 찢어지면서 피가 났어요.
그 다음 며칠 있는데 미국 보건당국에서 와가지고 서류 내밀면서 이 여자가 폭력 죄로 고발했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애를 못 키우니까 애를 데려 가겠다 해요. 그렇게 미국 법에 의해서 애를 데려갔어요. 그 정신병자 엄마는 좋아가지고 애하고 좋다고 눈물 흘리면서 “너 그동안 고생 많았지?”하고 있고, 그 시어머니하고 남편은 온 데 하소연했는데 안 돼요. 피 좀 흘렸다고 폭력 죄라고 애를 데려갔어요.
어느 날 그 여자가 시가집 말고 자기 집에 아이와 둘이 있을 때, 뭔가 소리 나서 보니까 화면 전체가 시커멓게 되어 있고 총소리만 빵, 나고 영화는 그 뒤에 바로 마지막 장면에 이릅니다. 시어머니가 교도소 갔어요. 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며느리 총으로 쏴 죽인 거 (법으로 안 되니까) 내 아들 너는 이해하지?” 그게 영화 끝이에요.
거기서 바로 우리가 뭐를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악마가 꼬깃꼬깃 숨어 있으면서 마지막 하는 이야기는, 당신은 나를 모독하고 있다. 그러면 그 영화에 나오는 가정은 밥 먹고 못 사는가? 아니에요. 남편이 직장 잘 다니고 밥 먹고 살아요. 잘 산다고요.
그런데 마귀는 지금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누구의 가치가 살아야 사는 거예요? 나는 모독 받지 않을 자격이 있다는 그 나가 살아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나는 ‘산다’가 되는 겁니다. 그 누구로부터 모욕 받을 필요가 없는, 그 정도로 나는 고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살맛이 나는 거예요.
이런 인간이 자기부정이 됩니까? 자기부인이 되겠어요? 그런 인간이 교회 가서 십자가 믿으면 그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 믿는 거 맞습니까? 십자가 믿을 때 뭐하라 했어요? 뭘 하고 십자가 믿어라? 자기를 부인하라 했잖아요. 자기부인이 안되는데요.
왜? 인간의 모든 일은 안에 누구의 일이에요? 인간의 모든 일은 악마의 일이에요. 악마의 일은 결국 자기의 가치를 항상 호시탐탐 노리면서 혹시 누가 나를 모독하고 있지 않은가 이걸 24시간 꿈속에도 염두에 두고 살아가요. 이거 염두에 두고. 마귀의 종으로서.
마귀가 무슨 자기부인을 합니까, 마귀가. 하나님께 대들 준비를 하고 있는 존재가 뭘 어떻게 자기를 부정해요? 안되죠. 아, 오랜만에 영화 같은 영화 봤어요. 이런 영화 처음 봤어요. 아… “여보, 이러면 애 죽어요!”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조용히 이야기하세요. 당신은 지금 나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기가 찰 일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0425b 로마서 8장 36절(신앙과 신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는, 자꾸 인간이 상상을 해요, 하나님을. 저 높은 곳에 점잖은 분, 거룩하신 분이 계시다. 아니에요! 이 땅에 인간 속에 오셨어요.
인간세계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이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자기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상상하기 때문에. 이건 마귀가 그려낸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 한 말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요한복음 15장,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내가 너희를 죄라고 하기 전까지는 너희는 죄인이 아니었다. 내가 죄라고 할 때 비로소 너는 죄가 시작된 거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육신이 있는데 예수님의 육신은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육신은 뭐가 됩니까? 자기들도 모르는 채 뭐가 되느냐 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죄가 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셔요. 얼마나 친절한지.
‘그러면 죄인 돼서 신앙인 되면 되잖아. 신나잖아.’ 이렇게 하는데 죄는 그게 아니고, 죄라는 말은 그 뒤에 무엇이 합당한 거예요? 율법에 의하면 죄는 무엇이 합당합니까? 저주고 지옥 불을 당해야 되겠죠. 지옥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내렸잖아요. 특징이 뭐냐 하면 일괄적이라는 거예요. 골라서 가려가면서 불 내리신 게 아니고 그냥 부어도 다 맞게 되어 있어요. 왜? 지옥이니까. 아무도 자기를 부인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천사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롯의 가정보고 나갈 때 뭐하지 마라? 뒤돌아보지 말라 했거든요. 뒤돌아보지 말라 했다고요. 그 말 안했으면 뭐 뒤돌아보든 앞을 보든 가는 방향이 탈출 방향이면 살려줘야 되는데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분명히 했거든요. 했다는 말은 롯의 아내는 반드시 뒤돌아보게 되어있다는 걸 미리 알고 ‘너는 빠져!’라는 뜻이에요. 너는 빼는 거예요.
주의 모든 말씀은 어떤 인간도 구원에 부합되지 않고 구원될 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속속들이 빼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을 주신 이유는 ‘지켜라’가 아니라, ‘죽어라!’입니다. 말씀은 그냥 죽이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말씀 듣기 위해서 온다는 것은, ‘오늘도 죽자. 오늘 죽여주옵소서.’ 이것 때문에 오는 거예요.
‘죽는 척해서 살아야지’ 이런 꼼수는 이제 쓰지 마세요. 쓰지 말고, 죽은 것을 확실히 죽게 만드는 거예요. 쭉정이는 확실히 쭉정이로 만드는 거예요. 그다음에 채우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우리가 노려서 노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실 문제에요.
여기서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 받아야 마땅한데 목사님, 그래도 구원받은 사람 있고 천국 가는 사람 있잖아요. 그럼 그들은 이 꼼수, 노림수 다 피하고 어떻게 천국에 도달했습니까? 그들의 수법은 뭐였던가요? 수.법. 그들이 구원받은 수법은 뭐였던가요? 우리도 몰래 그 비밀 수법을 캐내가지고 나도 그대로 하고 싶습니다.’ 뭐 이런 생각이 들거란 말이죠.
그 수법,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되어있죠. 누구보고 이야기하냐 하면 예수님보고 이야기하신 겁니다. 예수님보고.
이제 어려워요. 로마서 8장 36절,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아니고 누구를 말합니까? 성도를 말하죠, ‘우리’니까.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하고 36절에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렇게 되죠.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양처럼 도살당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하잖아요. 그런데 그 ‘우리’가 어떤 우리냐? 조건이 뭐냐? 도살할 양 같이 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한 것은 이사야 53장의 이야기고, 로마서 8장 36절에는 그 도살할 양에게 있었던 그 일이 그대로 덧입혀지는 자가 이게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우리는 고생은 주님이 하고 우리는 날름 덕이나 보자고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빠져요? 자기부인, 자기부정이 없죠. 그냥 십자가 이용하는 것밖에 안되죠. 로마서 8장에 도살할 양 이야기하면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35절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여기에 아까 영화 이야기했으니까 하나 더 보탭시다, ‘모독’. 누가 나를 모독하는 것, 무시하는 것까지 포함합시다.
그렇게 될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누가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일으킨다는 겁니까? 먼저 도살할 양처럼 되신 분이 우리에게 그런 일을 일으킴으로써 그 영역과 공간 안에 네가 나와 함께 같은 공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출해내는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부인이 안되고 자기 능력으로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미워할 수 없어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뭐를 못 얻는다? 영생을 못 얻는다고 되어 있죠. 따지고 보면 어려운 게 아니고, 쉬운 대목이에요. 왜 쉽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천국 못 간다 이 말 아닙니까. 이게 말씀이잖아요. 이 말씀을 누가 줬느냐? 예수님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죠. 예수님은 뭘 갖고 있습니까? 육신을 갖고 있죠. 이 말씀이 말씀되려면 ‘말씀+육신’이라는 틀이 꼭 필요하다 이 말이죠.
지금 우리는 뭘 갖고 있습니까? 육신을 갖고 있죠.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육신을 갖고 있는 이 말씀이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이 말씀 자체가 완성 안에 같이 놓여지게 되는 거예요, 말씀 안에. 말씀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말씀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뭐냐? 먼저 도살할 양 되시는 분이 믿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니까 믿음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믿음의 영역 안에 예수님과 같은 육신이 있으니까 이 믿음도 우리 육신 안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 그런 공간, 영역이 확보되는 거예요.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의 믿음으로.
그런데 주님의 믿음 안에는 주님이 먼저 겪었던 일이 들어가겠죠. 뭡니까? 내가 도살할 양 같이 잠잠했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입 다물어라 이 말이죠. 입 다물어라. 그럼 네가 누구한테 모독 받고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더라도 뭘 다물어라? 입 다물어라. 강의 시간에 함부로 ‘주둥이’라 말하면 안돼요. “그냥 입 다물어! 네 육신은 내가 사용할 거야.” “죽겠나이다.” “이게 아직도 지가 죄인인 거 모르지?” 이런 식으로.
지금 영화에 남편은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슨 구원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세상 법에 대한 모순을 이야기하는 영화거든요. 가정을 지켜주는 법이 가정을 파괴시켰잖아요. 그 영화에요. 무엇 때문에? 각자의 자존심 때문에. 각자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특히 그 영화에서 강조한 것은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잘 때도 꼭 껴안고 자면서, 내가 책임지고 너를 키워줄게. 이 더러운 오염된 세계로부터 내가 격리시켜서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먹을 때 우리의 육신은 좋은 육신 가운데 어떤 생각만 남는다? 깨끗하고 선한 생각, 바른 생각만 남는다는 거예요. 유기농법 책이 얼마나 많아요. 독소 뺀다는 그런 주스도 많고. 이걸 책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배웠겠습니까.
우리 애를 특별한 애로 키운다는 말은, 인간세계, 더러운 세계의 평균적인 애들 속에 섞여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 엄마인 나의 사명이다. 이런 깨끗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엄마의 사명이라는 거예요. 어쩔래? 내 배 째라는 식으로. 내 배 째라.
그 영화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참 무서운 단어가 나와요. 뭐냐 하면, 그 여자는 ‘신념’에 차 있습니다. 신념. 이게 교계에 오면 뭐로 바뀌죠? 신념이 뭐로 바뀝니까? 신앙. 아, 도대체 상대방보고 신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어요, 없어요? ‘너 신념 있구나.’라고 말하면 자기는 신념 없습니까? 그게 다양성이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다양성이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알곡과 가라지.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알곡과 가라지에요. 다양한 신념이 있다. 봐주자, 다양성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에요.
<보물섬>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2조원 대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을 자기 혼자 머릿속에 기억하고 살아가면서 그걸 지켜내는 어떤 남자 이야기에요. 아버지한테 총 맞아도 기어이 비밀번호 안 알려줘요. 그게 보물이에요. 2조원의 돈. 여러분 머리에 지금 뭘 기억하고 있습니까? 갑자기 스위스 은행에 금고 열리는 소리 들려요?
‘여러분 머릿속에 지금 무엇을 기억합니까?’는 말 잘못했어요. ‘주께서 뭐를 심어줬습니까?’ 주께서 뭘 심어줬습니까? 심어준 것 한번 찾아볼까요? 히브리서 10장 16절,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뭐한다?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2조원 대 정치 비자금, 그게 보물이 아니죠. 보물은 뭐냐? 영생을 아예 죄 있는 우리, 자기부정도 안 돼, 자기부인도 안 돼, 자기를 미워하지도 않는 우리 육신 속에 심어버렸죠. 심어버리고 거기서 발현된 그 결과가 뭐냐?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모독 받음, 핍박받는 그거잖아요.
우리는 말씀을 말씀대로 못 지켜요. 그러나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그 언약을, 예수님께 심었던 그것을 우리에게 심는 거예요. LG에서 휴대폰에 뭘 심는다고요? 유심을 심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심은 유심 있잖아요, 그 유심을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쭉정이 말고 알곡 된 자들에게 그걸 심어놓고 뭐를 발생시킵니까?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재현해서 발생시키는 거예요. 그게 말씀이잖아요. 말씀을 발생시켜요. 죽었어요, 이제. 그거 심어놓은 사람은 죽었다고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제 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미리 말씀드렸어요. 예수님께서 다 성취해놓은 그 말씀을 우리 안에 유심 심듯이 칩 심듯이 심어놨다 이 말이죠. 심어놓으면 우리 안에서 어떤 현상이 나오는가? 아까 첫째 시간에 약간 힌트 드렸어요. 노숙자 맨 배낭 이야기했죠.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 중심성’이 나오겠죠. 내 중심성. 자, 내 중심성인데요. 내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끄집어내주기 전에 모든 불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유심 칩이 없는 사람도 말은 안하지만 누구 중심이에요? 자기 중심이죠. 나를 모독하지 마라, 이걸 확고하게 박아놓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을 본다 합시다. 그러면 하나하나 한번 제쳐 봅시다, 성경에 나온 내용을. 창조, 타락, 노아 홍수, 아까 소돔과 고모라 불 심판, 홍해, 여리고성, 많이는 안 하겠습니다, 십자가, 부활, 재림 이렇게 있다 합시다.
자, 내 중심으로 삽니다. 살 때, 창조 인정합니까, 인정 안합니까? 내 중심으로 산다면 창조 인정합니까, 창조 인정 안합니까? 인정 안하죠. 왜냐하면 창조는 햇빛과 공기를 누가 주시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게 되어 있죠. 내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그걸 고마워하고 감사합니까? 안하죠. 왜? 내가 사는 것은 누구 덕으로 산다? 내가 힘들게 애쓰고 노력해서 이만큼 살아왔다. 뭐가 빠졌어요? 창조가 휙 다 날아갔죠. 다 날아갔죠.
그리고 창세기 3장에 타락 이후 인간은 고생하잖아요. 창세기 3장이죠. 창세기 3장 인정합니까, 인정 안합니까?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늙어 죽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받을 저주다, 인정합니까, 인정 안합니까? 인정안하죠. 그럼 또 제쳐버립니다. 성경책을 보는데 벌써 쫙쫙 매직가지고 지워나갑니다.
노아 홍수 당연하고요. 고모라의 불 심판, 홍해, 여리고성, 아까 말했던 십자가, 그리고 부활. 부활은 뭐냐 하면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살아나는 걸 말하잖아요. 제가 강남 강의할 때 했잖아요. ‘절름발이가 걷는 것보다 귀머거리가 듣는 것보다 마지막 부활 때 또는 재림 때 모든 사람이 홀연히 변화한다는 것, 그게 기쁩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물어보면,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안 기쁘죠. 자기 스위스 금고에 2조원이 더 기쁘죠. 안 기쁘죠. 그럼 그거 어떻게 해요? 제치죠. 안 기쁘니까. 하든 말든 난 그거 인정 안하죠.
그럼 성경 두꺼운 책 가운데 남아있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뭘 믿어요? 아무것도 안 믿는데요. 아무것도 안 믿고 교회 나와요. 안 믿어요. 성경 어떤 구절도 안 믿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도살할 양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유심 칩 심고 우리에게 환난과 핍박을 줘버리면 거기서 뭐가 들통 납니까? 유사 신앙인들이 다 들통 나겠죠. 왜? 아무것도 안 믿으니까. 그러면, 신자는 믿습니까? 그럼 성도는 믿습니까? 성도는 믿어요, 안 믿어요? 안 믿죠.
그럼 성도는 자신이 뭐라는 걸 발견합니까? 성경 어느 구절 가운데 믿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자기는 불신자죠. 그럼 성도가 불신자 되면서 성도가 성도된 이유는 이걸 비로소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아, 주께서 내 믿음을 안 받는 것에 대해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거예요.
신자는 뭘 아느냐 하면, 나를 불신자 되게 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했잖아요, 그 멸망당해 마땅한 바리새인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기쁨, 그 기쁨이 있으면 내가 불신자라는 것을 아는 기쁨이 있으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사업 망하고 자식 다 죽고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슬퍼하겠어요,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죠. 왜? 일관된 하나님의 언약적 작업이 내 육신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가 될 겁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와요. 8장 36절, 37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다음에 뭡니까?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 이긴다는 것이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피조물도. 그럼 반드시 그 피조물 속에 누굴 집어넣어야 되겠어요? 나 자신을 집어넣어야죠.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나.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나라면 나는 내가 나를 놓아줘야 되고 내가 나와 결별해야 되겠죠. 결별해야 되겠죠. 그게 바로 나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게 미움이에요. 내가 나보고 하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라! 니 실컷 사랑하고!’ 이걸 웃으면서 할 수 있다는 것은 나 말고 따로 만들어진 나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따로 만들어진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걸 서울강의에서 제가 언급했어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대목인데요. 말씀으로 된 육신. 새로운 나는 말씀으로 집어넣어서 만들어져요. 말씀을 집어넣어 만들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보면 뭐가 풀풀 계속 나와요? 말씀만 계속 나와요, 말씀만.
옛날에 동네 야구할 때 값 좀 나가는 좋은 야구공이 있었어요. 그 야구공은 실타래로 만들어졌어요. 이름이 일본 말인데 잊어버렸어요, 실을 꽉꽉 묶어서 만든 야구공. 야구 좀 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는 잊어버렸어요. 그 야구공이 깨졌다. 그 안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지렁이 같은 실만 계속 나오겠죠.
지렁이 같은 말씀만 꽉 차 있으니까 피부가 터져버리면 말씀만 계속 나오죠. 말씀만. 아,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때는 이 말씀, 저때는 저 말씀이구나.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뭘 이야기합니까? 너는 불신자고 비로소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 로마서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롬 3:19)도 그 실타래 속에 포함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포함되어 있죠. 그 말씀을 하면서 그 뒤에 보니까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으니 그 의로 말미암아 네가 화목해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었다는 말씀(롬 3:21)도 덩달아 같이 연계되어서 연결되어서 나오겠죠. 그러니까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비극이 먼저고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희극이에요. 비극 속에 있을 때 나는 코미디언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봐도 웃기지도 않아요. 아까 이야기한 영화, <헝그리 하트>에서 만약에 그 부부가 둘다 성령 받은 성도라 합시다. 그러면 그 부부는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실컷 싸우겠죠. 싸우는데 그 끝은 뭐로 끝나겠습니까? “야, 우리 지금 웃기고 있지? 그치?”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걸로.
총 쏘고 이런 거 없어요. 왜 총을 쏴요? 하나의 연극인데 왜 총을 쏴요? 왜 내가 나한테 총 쏘고 자살해요? 하나의 연극인데. 자기사랑의 내력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과거에서 나온다’?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지금의 이해에서 나온다’ 딩동댕 입니다. 모든 과거를, 지금의 내가 모독 받지 않기 위해 내가 재해석해요. 모든 걸 재해석한다고요. 지금 나를 내가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모든 탓은 누구 탓이에요? 남 탓이에요. 재해석하니까.
아까 성경 봤죠. 자기를 사랑하고 성경을 보면 어떻게 된다고요? 성경 어느 구절 하나도 믿을 게 없어요. 하나도 안 믿습니다. 안 믿고 교회 나와요. 아, 참 나는 그 인내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배시간에 만약 누가 대표 기도한다. 성경구절 뽑아서 ‘나는 지금 이 말씀에 꽂혀서 이 말씀대로 삽니다.’라고 생중계되는데 기도한다고 합시다. 집사님은 어느 말씀을 뽑으실 예정이십니까? “주께서 고난의 길을 가셨으니 저희들도 죄인이지만 주의 가는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하고 후딱 내려오죠.
뭐가 빠졌습니까? 아까 뭐가 빠졌어요? 자기부정이 빠졌죠. 열심히 하겠습니다,가 들어가 있죠. ‘예수님을 본받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참 예수님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본받아서 나는 이제부턴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하죠. 뭐가 빠졌어요? 자기부정이 안 들어가잖아요, 자기부정이.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자기를 째는 성경구절을 동원한다면? 자기를 찢어버리는. 아예 자기 자신을 찢어버려요. 자기를 아예 찢어버리는 말씀, 고린도후서 4장 10절의 말씀. 내가 날마다 죽음에 넘기움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심이라. 어떤 분은 저한테 전화해서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그 기도 들을 때 저는 충격 받았습니다. 기도 들을 때 충격 받았어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집사님이 앞에 대표 기도할 때, 고린도후서 4장 10-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 본문을 기도하고 내려갔다 합시다. 그 뒤에 목사가 설교할 때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할 수가 없죠. 할 수가 없어요.
목사가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십자가 은혜로 우리 죄인을 용서했습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면서 이 복음을 전파하고 많이 힘써서 시간 바쳐 몸 바쳐서 돈 바치고, 돈 이야기는 살짝 줄이고 안 들키는 것처럼 하면서 하고, 열심히 이 교회가 있어줘야 부흥해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설교 그런 식으로 할 거잖아요. 그 설교에 뭐가 빠졌어요? 자기부정이 빠졌잖아요, 자기부정이.
교인들은 세상 생활하면서 일요일에 시간 맞춰 오는데 대충 봐가지고 11시에 오지도 않아요. 11시 5분에 와요. ‘오늘도 내가 지금 바쁘지만 또 말씀 들어서 성도답게 풍성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올 때, 뭐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습니까? 지금 죽으러 온 게 아니에요. 들으러 온 거예요. 죽으러 온 게 아니고.
‘나 오늘 또 죽는 기쁨이 있다.’ 이렇게 온 게 아니고, ‘아, 대충 대충하고 잊어버린 기억에 안 났던 말씀 또 갖다 붙여서 하면 일주일 동안 내가 또 사는 데 여러 가지 세상살이 어려운 데에 보탬이 되지 않겠나.’ 지금 그런 통박, 그런 노림수 가지고 들을 게 아니냔 말이죠.
거기에다가 고린도후서 4장 10절 말씀을 그냥 작정하고 뽑아서 갖다 터트려버렸으니… 세상에, 기도하면서 자기부정이 되는 말씀을 뽑는다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에요. “마태복음 6장에서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고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느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기도하는 자체가 나를 부정하기 위해서 이 기도를 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한다는 말은, “너는 진즉 죽어 없어져야 돼. 너 알지? 너 없애주니까 어때? 기뻐, 좋아?” “너무 기뻐요!” “그래, 바로 그거야. 안 없어지는 너를 내가 없애주니까 내가 얼마나 좋아.” “좋습니다.” “바로 그거야.” 그거다 이 말이죠.
과거가 있음으로써 과거의 바탕에 우리는 살고자 합니다. 과거를 통해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미래에서 나타나요, 미래에서.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의 육신은 이 지상에 인간들이 있는 시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예수님 안에서 완료가 되어버려요. 완료가 된다고요.
따라서 인간은 육신이니까,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잖아요, 그럼 인간은 육신으로 내 과거를 토대로 해서 소망을 갖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잖아요.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어떻게 되는가? 부정당하죠. “두 달 전에 너는 진즉 죽었어야 돼. 뭐 지금 네 힘으로 산 것처럼 하느냐?”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라니? 앞으로가 네가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냐? 너는 앞으로 없어.”
너는 이미 내 공간에 있지, 앞으로가 없다고요. 네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내 말씀을 계속 너한테 적용할 거냐 말 거냐 내 결정에 따른 것이지, 네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주께서 더 살려줄 수도 있고 고만하라고 죽일 수도 있고. 그 문제는 주님께 속한 거예요. 이런 상태를 뭐라고 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무슨 양? 도살할 양으로 취급한다. 우리가 도살할 양으로 취급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사태라도 우리가 예상 못한 사태를 다 일으킵니다. 우리가 예상 못한 사태를 다 일으켜요. 왜 그러느냐 하면, 문장을 써볼게요. ‘이 세상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말씀 안에 들어있는 내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태초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죠. 물론 당연히 우리는 믿느냐, 안 믿느냐? 안 믿습니다. 왜냐 하면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을 해서 내 중심으로 했던 그것의 마지막이 아까 그 영화에서처럼 ‘당신은 왜 날 모독하느냐?’ 였죠.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 네가 뭔데 날 모독하느냐?’ 그 이야기에요. 하나님 네가 뭔데 날 모욕하느냐?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날 모독하느냐?’ 이 말은 하나님보다 누가 먼저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먼저 있다는 뜻이에요. 아니, 먼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순위에서 내가 우선순위를 꼭 차지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16장 23절, 모든 인간의 일은 무슨 일이다? 악마의 일이다. 악마의 일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것은, ‘나와, 악마야!’ 그런 뜻이에요. 악마 나와! 악마가 나오면서 내가 불신자로 들통 나면, 그게 바로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한 그 상태를 우리 육신 속에 재현한 절차에요. 말씀으로 죽이고 말씀으로 살려냄의 반복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순간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
죽어야 될 이유는 내가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이기 때문에. 살아야 될 이유는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나 중심이었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중심을 재료로 해서 전체가 무슨 중심? 말씀 중심으로 현재 그런 영역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통해서, 내 중심을 통해서 예수님의 증인 노릇하는 거예요.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를 증인 노릇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런데 그 과정 속에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나는 날마다 말씀에 의해서 죽고 또다시 사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19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여기서 15절에 “또 우리가 하나님의” 그다음에 뭡니까? “거짓 증인”이죠.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자리나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한다 합시다. 그럴 때 듣고 있는 사람이 “당신 거짓말이야. 당신 거짓말이야.”라고 할 때, 우리는 뭐라고 반박해야 돼요? “당신이 하는 말 거짓말이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거짓인가?” 물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산 게 거짓인가?” 이렇게 물어요.
성경에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 육신에 함축되어 있다고요. 하나님이 천지를 이렇게 만들고 어떻고 이게 아니고, 예수님 육신에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예수님 육신에 함축된 일이? 죽었다가 살아났죠. 그게 예수님의 육신이잖아요. 그 육신이 어떤 육신인가요? 죄 있는 육신이죠. 우리하고 똑같은 육신 아닙니까?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럼 우리에게 일어난 진실은 뭡니까? 이 몸은 필히 죄로 죽어야 마땅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몸은 필히 예수님의 살아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말씀이 우리 안에 제 2의 자아를 만들어서 우리 육신을 통해서 새로운 육신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거짓이 아닌 진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토대로 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가. 안 그러면 거짓이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당신 종교의 교리요, 그건 보편적인 게 아니고 당신 일방적인…” 아까 나온 단어 뭡니까? 일방적인 ‘신념’이다. “당신 정신병자야. 신념이다. 마치 채식주의 해야 이게 올바른 인간된다고 하는 그것이 그 사람한테는 종교고 신념인 것처럼 너도 똑같아. 너도.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너 자신의 신념이야. 왜 보편성이 없어? 다 당신 놀리고 비웃고 있는 거야. 당신 아직도 당신 신념에 매여 있는 거야. 빨리 거기서 빠져나와. 거짓된 것에 너 말려들었어.”라고 할 때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래서 아까 채식주의 영화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게. 내 평생 그런 영화를 처음 본다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각자 사람들이 보는 것마다 다 다르다 이 말이죠. 어떤 하나를 자기의 신념을 진리로 우기지 말라는 거예요, 이 시대는. 다양성이다, 다양성. 각기 다양성이니까 다양성을 존중해줘야 이 사회가 그나마도 살만한 사회가 되는데 당신은 앞뒤 완전히 막힌 사람처럼 십자가 죽고 부활하고 재림한 그것만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반박하느냐? 반박 이거 안 되면 오늘 강의에서 우리가 다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반박해야 되겠죠. 오늘 이 강의 듣고 ‘나 이제 신앙 버리겠다.’는 사람 나타나도 할 수 없지, 뭐.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이게 무슨 책입니까, 행위를 기록한 책? 행위책이죠. 그러니까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안 믿는 사람은 무엇을 죽을 때까지 꼭 쥐고 있습니까? 자기 ‘행위’죠. 자기 행위. 그럼 성도는 무엇이 죄로 규정되는 겁니까? 내가 이 땅에서 애 키우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뭐가 되더라?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되더라.
그럼 의는? 죄인데 여기서 무슨 의가 나올 수 있겠어요. 의는 뭐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주님께 내가 예속되었다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죠. 그 관계가. 나는 너하고 똑같이 죄인이고 나도 똑같이 내 중심인데, 네가 나하고 다른 점은 나는 이렇게 행위했다는 것을 포기 못해요.
우리는? 우리도 포기 못하지만 그건 알아요. 내가 밥을 먹든 뭘 하든 몽땅 내 존재하는 자체가 뭐가 된다고?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존재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신나 죽어요, 이게. 내가 죄가 될 때, 우리는 뭐로부터 벗어납니까? 나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요. 무거운 짐으로부터.
아까 동대구역 광장을 지나다가 어떤 모녀 간에 가는 걸 봤어요. 여자 애가 다섯 살 쯤 되고 엄마는 한 사십 살 초반 쯤 돼보였어요. 가는데 다섯 살 애가 캐리어를 끌고 가요. 이걸 딱 보는 순간, 저게 인생의 짐이다. 꼬마가 자기 캐리어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이 캐리어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내가 평생 이렇게 열심히 바르게 훌륭하게 살았다는 자기 행함을 죽을 때도 못 버리는 거예요.
아, 저게 인간이구나. 저게 인생이구나. 자기 행함을 죽을 때도 못 버려요. 왜? 행함이 있어줘야 이게 자기 의가 되니까요. 자기는 열심히 살았고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이 캐리어 안에 들어있는 자기 행함이 자기를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이 캐리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 행함이죠. 그리고 그 행함을 내용으로 해서 뭐가 발생되는가? 신념이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내 행함을 캐리어에 넣듯이 각자 모든 인간들도 자기 캐리어를 끌고 있는데 왜 네가 끌고 가는 캐리어만 천국 가는 진리라 하고 왜 남은 무시하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성도는 뭐라 하느냐 하면 “내 행함? 이거 저주고 이게 죄야. 나는 캐리어 끌고 가는 이 자체가 하나의 코미디다, 코미디.”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 지옥 갈 인간이었다는 것을,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보여주는 거예요. 구원받고 난 뒤에. 딸이 있다가 “엄마 용돈 좀.” 하면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너는 놀지? 나는 죽어라고 일했어. 돈이 뭐 거저 생기는 줄 알아? 네가 돈 한번 벌어봐라, 얼마나 힘든지.’라고 나는 그런 행위를 했단다.”
그래서 나는 남으로부터 어떤 모독을 받지 않을 근거를 확실히 사수하는데 밤새도록 이걸 사수하는 거예요. 24시간 이걸 사수하는 거예요. 내 행함이 남 못지않고 정당하다는 것. 어디까지 가겠어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어디까지 갑니까, 이 행함 캐리어를 어디까지 끌고 가요? 지옥까지 가죠, 부자가. 아, 독하죠. 지옥까지 이 캐리어를 끌고 간다고요, 지옥까지.
이겁니다. 인간이 태어났습니까? 태어나면 죄인이에요. 태어나면 무조건 죄로 태어난 거예요. 본인은 모르겠지만.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몰랐던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욥을 보면서 자기 죄를 몰랐던 거예요. 욥이 당해야 될 그 고난도 자기가 마땅히 당해야 될 고난인 것을 욥의 친구들은 몰랐어요. 그들은 자기부정이 안되었어요. 자기부인이 안 된 거예요. 오히려 욥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욥기 마지막 아시죠? 친구들보고, 너 만약에 네 죄를 위해 욥한테 가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너희는 죄 사함이 없다(욥 41:8). 하나님께서 욥을 무엇으로 사용합니까? 메시아로 사용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에게 일어날 일을 욥에게 먼저 보여주듯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네 마지막 모습이 지옥 가는 모습이다.’라는 점을 도살할 양으로서 주님께서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고 그 상황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유심 칩처럼 박아 넣은 거예요.
이게 바로 새 언약의 확대이고 새 언약의 확장이고 새 언약의 결과물이에요. 너한테 내 것이 들어있으니까 너는 알곡이 되고 그게 없는 사람은 뭐가 되겠어요? 쭉정이 되는 거죠. 이것을 다섯 자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
이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멀리 할 수 없죠. 성경을 멀리 하겠다는 말은 내 행함을 나 잘난 것으로 쥐고 있겠다는 말이고 ‘내 행함 자랑해야지.’ 이럴 때는 성경 볼 필요 없어요.
그러나 성경을 강제로든 억지로든 본다는 말은 바로 내가 내 행함을 쥐고 살아가는, 철딱서니 하나도 없고 내 잘남 그것만 타인에게 비취길 바라는 전형적으로 지옥 갈 인간인 것을, 구원받고 난 뒤에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백성이 된 뒤에 확인하는 그 간격, 틈 사이에서 우리는 예상 못할 감사와 기쁨이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이 뭔지를 우리는 그동안 건성 건성으로 대충 알았습니다. 매일 일상 속에서 말씀으로 우리를 건드리고 있으매 건드린 이유를 알게 해주시고 그걸 통해서 날마다 죽는 기쁨에 도취되어서 누가 신념이라 누가 신앙이라 뭐라 욕하든 간에 우리는 내가 죽고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이 십자가에 근거해서 이게 팩트이고 엄연한 사실인 것을 깨닫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