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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명기 29강( 나의 일 빼기), 십자가를 아십니까36강(전쟁을 통한 상급) 250324설교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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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신명기(29강) 신명기12:30(나의 일 빼기) 20250324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2장 29절에서 30절까지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 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실 때에(29)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벌써 낌새가 이상하죠. 사람을 망하게 하는 땅에 네가 들어가게 되면, ‘너는 망할 각오해라’ 이런 뜻이에요. 너의 끝은 누가 안다? 하나님, 내가 안다, 내가 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터미널로 사용한다.”

터미널이란 뜻이 뭡니까? 모든 게 종점이죠. 끝점이잖아요. 이방 민족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관심사가 현재 있는 나를 어떻게 지켜줄 것이냐에 관심이 있어요.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인간들도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방 민족은 자기를 위한 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끝장난다는 생각은, 자기를 끝장내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선택하지 않죠.

종교마트에 가서 그 신을 카트에 안 담죠. 지금 나를 행복하고 풍성하게 해 줄 신을 담지, 왜? 선택은 내가 하니까. 신을 내가 선택하잖아요. 나 좋아라 하는데, 나를 망하게 하는 신을 누가 선택합니까? 이스라엘도 망하게 하는 신을 선택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훅 들어오신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불쑥 들어온 거예요.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노예로 몰아세우게 만들었어요. 그들로 하여금 애굽의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애굽의 많은 신이 자기의 존재 자체를 압박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옛날 잃어버렸던 신, 여호와, 400년 전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은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까짓거 노동을 좀 힘들게 시켜도 노예를 죽이진 않아요. 왜냐하면, 노동하는 기계이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는데, 이스라엘에게 바로가 어디까지 압박하느냐 하면 아예 족보를 끊어버리는 짓을 했죠.

‘아들 낳으면 다 죽여라.’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자기 아들 대에 희망이 없고, 왜냐하면 대가 끊어지니까. 이걸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사실, 완전히 영원히 히브리 종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굳히기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의 끝장을 본다는 데 대해서 마지막에 그들은 여호와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족보를 잇기 위해서 부르짖었죠.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압박을 가해서 된 거예요. 가끔 과학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진화론 주장하다가 자기가 병에 걸렸다든지,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니까 어릴 때 주일학교 다녔던 그 하나님으로 돌아섰다. 그런 것이 기독교 기사에 보면 많이 나와요.

뇌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든지, 양자물리학자가 ‘과학 속에 나타난 하나님’ 이래 가지고 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았다고 해요. 어떤 계기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역전이 벌어지는데요. 나에게서는 나의 일이 나오죠. 내가 구원받는 건 누구의 일입니까? 나의 일이죠.

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광주 강의에서도 했지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그 신을 선택하는 행위도 누구 좋으라고? 나 천국 보내달라고 보험 하나 들 듯이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들어왔다 이 말이죠.

소위, 언약의 하나님, 주님, 하나님의 이름, 주님, 주님이 계시면 가만히 계십니까? 어떻게 합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죠? 나에게서 뭐가 나옵니까? 나의 일이 나오죠. 그럼 주님에게서는 뭐가 나옵니까? 주의 일이 나오죠. 이 주의 일이 근거가 있어요. 바로 율법을 앞장 세워서 주의 일이 율법대로 그냥 추진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일이 등장했고, 내가 존재한다는 이상 무슨 일이 계속 지속적으로 주저 없이 나오는 게 뭡니까? 나의 일이죠. 이 둘 사이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뭐가 셉니까? 하나님이 세죠.

‘하나님 참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셉니다.’라고 발언한다고 해서 내 일이 중단됩니까? 중단되지 않죠. 중단되지 않습니다. 개가 주인 왔을 때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지요. 좋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그 주인이 선을 넘으면 안돼요.

개 밥그릇을 발로 찬다든지 이러면 개도 , 원래 개가 이해심이 많은 편이지만, 개가 먹는 사료에 주인이 입 대고 먹는다든지 이럴 때는 잠자고 있던 라이벌 의식이 확 올라오면서 개가 뭐라 합니까? “It is mine!" 이거 내 거야. 이렇게 영어 방언이 막 터져 나오면서.. 물론 미국 개이겠지만.

”이 사료는 내거야!“ 내거니까 내가, 개라는 나의 존재에게 있어 나의 사료를 먹는 것은 이것은 천하의 주인이라도 주인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내 일, 개의 일. 개의 일은 지켜줘야죠. 주인이라도 선 넘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개보다 못한 게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훅 들어오면서 밝혀내는 거예요. 밝혀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일에 요구하는 목적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너는 네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네가 누군지 아느냐? 소크라테스가 이거 몰라가지고 고민고민 했어요.

소크라테스의 전기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사람들 만나서 계속 묻는 거예요. 어떤 청년을 만나서 그 청년에게 “너 왜 네 아버지 고소했어?” “아버지가 경건치 않아서요.” 그 당시에 신을 안 믿으면, 인정하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은 거였어요. ”아버지가 신을 인정 안 해서 아버지를 고발했습니다.“

도시 사람이었으니까요. 싱가포르처럼 도시 사회가 소규모제라서 법의 적용이 아주 엄격해요. ”그래, 아버지가 신을 안 믿는다고 고발해도 되나?“ ”네, 경건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뭔데?“ 라고 또 시비 걸기 시작합니다.

”경건이 뭔데?“ ”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예전 말로하면 신탁, 무당으로부터 받은) 위반하지 않는 게 경건입니다.“ ”신탁을 누가 결정하는데?“ 너 오늘 잘 걸렸어. 계속 캐고 다닌 거예요. ”네가 신의 내용을 알아? 네가 전해 들었잖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켜야죠.“ ”네가 지키는 것과 신탁을 받은 무당이 지키는 것이 어떤 근거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하느냐?“ 라고 계속 따지는 거예요.

결국 소크라테스가 노리는 것은 뭡니까? ”저는 경건에 대해서 모르겠습니다.“ ”너는 왜 모르면서 아버지를 고발했냐?“ 여기까지 몰아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고발한 청년이 뭐라 합니까? ”왜 고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거예요.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 이게 과연 진리냐? 이게 거짓이지, 이게 무슨 진리냐? 그걸 캐 가는 거예요.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걸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소크라테스 앞에 앉아있다고 봅시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은 논리로 나한테 묻겠죠. ”너는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 그러면 소크라테스 논리대로라면 모른다고 해야죠. 모른다고 한다면, 그 모른다는 걸 가지고 소크라테스는 시비 걸 거예요.

”왜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야지. 모른다는 사실을 당신이 어떻게든 모른다는 사실을 하면, 당신 나름대로 정리되어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경건이 뭐냐, 정의가 뭐냐, 진리가 뭐냐’이걸 모르는 게 아니고,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냐?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걸 짐작했는지 늘 주장하던 게 뭡니까? “네 자신을 알라.” ‘네 자신을 알라’고 하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된다는 그 의지, 그 의지가 무지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잘 이해 안 되면 그냥 넘어가고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알아야 되니까. 정답부터 먼저 말씀드려볼게요.

너는 너 자신이 누군지를 아느냐? 율법을 통해서 이걸 언급하시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주는 해답은 우리는 출발할 때 ‘나는 내가 이런 존재다.‘라는 것을 이미 우리 안에 뭔가 심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수상한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심어져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은 모르지만 주님은 아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을 죽일 자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는 누구냐? 87일 만에 국무총리가 복귀되었잖아요. 기자회견 합니다. “저는 말씀회사에서 온 기자인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하죠. 그걸 듣고 국무총리가 “나는 예수님을 죽인 자입니다.” 이런 발언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담임목사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목사입니다.” 그런 사회적, social position 말고. 당신은 진짜 누구십니까? “내가 하나님 아들을 죽인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뭡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그런 품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유자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신약에 오면, 마지막 최종적인 언약이 뭐냐? 예수님 피와 살이잖아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거 인간의 힘으로 그걸 보일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죠. 이게 인간의 일의 한계예요. 인간의 일은 안돼요. 그래서 주님의 일이 이스라엘에게 찾아와서 기어이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죽인 대변자로 만드는데, 그걸 터미널이라고 해요, 터미널.

마지막 종점까지 가게 하시는데, 그 종점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이 만나서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순간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다? 어떻게 약한 피조물이 강한 창조주를 죽일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창조주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게 해요.

인간 중에서 가장 약한 인간으로 오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살인이 가능하도록 그렇게 사건을 거기까지 밀어붙입니다. 터미널이죠, 터미널. 이렇게 터미널이 되어 버리면, 어떤 복음이 형성되느냐 하면,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어디를 가는가 하면, 죽음의 세계에 간다 하죠.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가 현재 인간이 살아있는 세계와 다 같이 갇혀있는 세계라면, 죽고 난 뒤에 어디 간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죽음의 세계하고 인간의 세계가 이미 한결같이 인간은 늙어 죽어서 세포가 노화되어서 죽습니다. 죽으면 애초부터 이 죽음의 세계에 간다는 말보다도 죽음의 세계가 이 살아있는 모든 세계를 이미 점령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사고에요.

죽어서 거기 죽음의 세계에 가니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인간의 시간관에서 인간은 과거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누적 속에 있고, 인간이 죽게 되면, 누구나 갔던, 인간은 미래에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 미래에 결국 죽는다면, 인간 속에 이미 과거+현재+미래가 한 통속, 한 영역, 프레임 안에 이미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 이야기 한 번 들어 볼랍니까? 잠시만 제가 들려드릴게요. 죽었던 사람 이야기입니다. 죽었던 사람 이야기가 결국은 오늘날 우리 사는 사람과 그 죽음이 같이 있는 거예요. 잠시만 들어보세요. 가사를 생각해보세요.

<아득히 먼 곳>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이 노래 부른 사람 죽은 사람이에요)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가사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아득히 먼 곳이라 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입장이잖아요. 지금 이선균은 죽음에 가 있어요. 그렇다면, 이 죽음에 가 있는 이선균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선균은 노래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선균 노래 들으니까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아했던 배우인데..그런데 꽃뱀 때문에 죽었잖아요. 휘성 같은 사람 보세요. 난리도 아니죠, 밥도 안 먹을 거예요. 주인이 죽었는데 개가 밥을 먹을 수 있어요? 휘성의 팬인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인간은 과거를 버리는 게 아니고 과거를 품고 살아가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품고 살아간다고요. 이게 무슨 일이다? 인간의 일이에요. 나를 지키는 일이에요, 나를 지키는 일.

이걸 오래전부터, 인류가 역사를 시작할 때부터 조상숭배는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에요. 왜냐 하면, 조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 현재, 미래에 의미가 있고 내가 있게 된 과거의 의미가 받쳐줘야 지금의 현재 내 의미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로 보냅니까? 이 과거, 현재, 미래 이선균이가 죽었던 그 장소를 내가 벗어나게 해주는 거예요.

뭐가? 율법이! 그럼 어떻게? 노선이 바뀌어야 되겠죠. 아득히 먼 곳? 아니야, 같이 있어! 같이 있다고요. 네가 아는 범위 안의 죽음의 세계 안에 있어요. 네가 아는 범위 내에. 전혀 우리가 모른 범위 바깥의 일은 인간의 힘이 못따라 붙여요. 그건 누가 해야 돼요? 주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인간의 미래를 접고, 하나님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파견 보냅니다. 구약에서는 자기 아들로 오시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먼저 구약에서는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이방민족이 따라올 수 없는 나라로 갑니다.

그게 뭐냐? 그렇게 아득히 먼 곳이 아니에요. 그곳은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에 갈 수 없는 곳, 그게 율법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입니다. 분류 작업이죠, 분류 작업. 벌써 주께서 시작할 때부터 분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맨날 싸워도 남편 죽고 난 뒤에 장례식장에서 아내가 붙들고 늘 하던 이야기, 하도 제가 장례식장에 많이 갔습니다. 50번도 넘은 거 같아요. 시골 박사교회 가니까 초반부터 맞닥뜨린 게 장례식이었어요. 오자마자 92세 분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86세 돌아가시고 하는데, 그 따라가는 남아있는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먼저 가 계시게. 내 당신 따라갈게.” 얼마 전까지 싸웠어요. 죽어라죽어라 싸웠는데, “좀 기다려. 내 따라갈게.”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하는데요, 거 어디... 거기가 진정 죽음의 세계가 아니에요. 죽음의 세계는 출입구가 예수님이 죽을 때 그 출입구를 통과해야 진짜 하나님이 마련한 죽음의 세계가 나오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이 갈라지는 그곳에 가는 겁니다. 뭐, 따라죽어서 뭐 할라고요. 인간을 만나면 전부 다 계약서 들고 만나는데...그 얼마나 이기주의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는 거예요. 율법을 주시는데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6장 3절에 나옵니다. 6장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헌법재판소 판사가 8명이죠. 4명이 여자고, 나머지 남잔데, 그 재판석에 앉아있는 재판관들은 다른 변호사를 우습게 봐요.

“네가 공부 얼마나 했는데? 너 몇 등 했어? 서울법대에서 몇 등 했는데? 그것도 공부 한 거냐? 사법 연수원에서 너는 끝에 있었어. 우리는 수석이었어.” 변호사라 해봤자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바둑 둘 때, 프로기사가 아마추어 두는 거 보면 그건 수도 아니에요.

최고의 엘리트에요. 최고의 엘리트이기 때문에, 판결 내리고 판결에 대해서 온 국민과 언론사가 다 달려들어도 그 논리를 지적해 낼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완벽에 완벽입니다. 왜? 인간의 두뇌로 짜낼 수 있는 지혜로는 최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재판을 그렇게 해요.

뒤탈 없게 해요. 판결에 대해서 뒤탈 없게 하는 게 그들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정치적 판단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재판관이 8명 있다고 했죠. 만약에 주께서 여덟 명을 앉힌다면 누구를 앉히겠는가? 하늘나라 재판석에.

이 세상에서 불신 생활을 했던 사람을 구원시켜 놓고 재판석에 앉혀버려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아는 사람, ‘나는 불신자 맞습니다.’를 구원해 놓고, 그를 재판석에다 앉혀버려요. 그리고 누구를 판정하느냐 하면, 6장 3절의 말씀 다시 보면, “우리가 (누구를 판단해요?)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어떻게 교인끼리 서로 고소하느냐? 지금 고소의 정답을 어떻게 세속적인 판사한테 그걸 듣고자 하느냐? 우리가 하늘나라 판사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왜? 우리는 터미널이니까! 우리는 종점을 아니까, 끝을 아니까. 끝을 알면 모든 걸 아는 거예요. 끝을 알면 모든 걸 아는 겁니다.

모든 걸 아는 자가 천사까지라도 판정하는 거예요. 천사하고 성도의 공통점이 있어요. 천사는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 자체가 뭘 해도 그 전체가, 존재 자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것, 저주의 세계라는 것을 이미 천사는 아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인간의 세계에서 나오는 희망이, 희망이 아니고 이게 가짜라는 것,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서 만든 희망이라는 것을 천사가 안다는 점에서 성도하고 동일해요.

차이점은 뭐냐 하면, 천사는 육신이 없어요. 육신이 없기 때문에 몸으로 느끼는, 아까 땅에는 뭐가 없다고 했죠? 희망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희망은 어디에 쓰는 용어냐 하면, 하늘나라에서만, 하늘나라 자체가 희망의 결정체에요.

그런데, 성도는 천사와 차이점은 터미널을 통해서 땅의 희망에서 어디로 바뀌었습니까? 하늘의 희망으로 가득 찬 그쪽에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육신의 고통을 같이 체험했다는 점에서 천사보다 우월합니다. 주님이 가졌던 그 고통, 갈등, 그 애씀, 자기부정, 이런 걸 성도는 갖고 있지만, 성도의 본질로 갖고 있지만, 부정이 포함되어야 그게 성도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는 그걸 갖고 있지만, 천사는 원래 도사거든요. 천사는 도사가 돼서 그게 없어요. 주님의 아픔에 참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체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사보다 성도가 한 수 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를 재판한다? 천사를 재판한다.

재판한다는 말은 이건 악마고, 이건 천사고 이걸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뭘로 인간을 유인하고 미혹했는가를 아는 거예요. 자,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의 요점은 이겁니다. 사람이 있으면 사람의 일이 나온다. 그런데 주님이 계시면 무슨 일이 나온다? 주님의 일이 나온다.

그러면 주님의 일은 무엇을 매개로 한다? 율법으로 매개를 하죠. 율법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일은 자기의 희망과 미래에 대해서 그리움이 있어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요, 희망이 있다고요. 율법이 그것을 무산시킬, 주님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그 일이 무산되게 될 겁니다.

무산되는 방식은 바로 율법을 앞장 세워서,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소박한 그리움과 희망을 좌절시키는 새로운 사건들을 율법 진행 과정 속에서 유발시키는 일을 하게 돼요. 그런 예를 지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이니까요. 사무엘상 9장 3절.

땅의 인간들의 희망을 ‘아랫 희망’이라 표현할 수 있고, 하늘의 희망을 ‘윗 희망’이라고 할 수 있죠. 희망이 아랫 희망과 윗 희망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 사람은 자주 오해하죠. 내가 그리는 희망이 나의 일에 속하면 그게 아무리 하늘나라를 소망해도 땅 희망이 돼요.

‘긍정적 마인드’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건 땅의 희망이에요. ‘4대째 기독교 집안’ 이건 뭡니까? 과거를 통해서 희망을 추출하고 싶은 생각, 그 희망으로 내 미래가 보장되었으면 좋겠다는 자기 내부의 희망이죠. 그러니까 인간에게서는 계속 하늘의 희망이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결국 땅의 희망으로 전락되는 희망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이미지가 형식주의를 형성하게 돼요. 형식주의는 뭘로 굳혀지냐 하면, 패턴, 습관, 자기만의 징크스, 법적 습관, 법적 태도, 이런 걸로 자기 이미지화 시키는 거예요. “나는 축구하기 전에 머리를 안 감는다.” 이런 거요.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어요.

“난 교회 가기 전에 반드시 무슨 일을 한다, 안 한다.” 이런 게 다 있어요. 평소에 머리 안 감다가 교회 갈 때 머리 감는다. 타인에게 제일 먼저 오는 게 냄새니까. 평소에 안하다가 그 날은 머리까지 감죠. 그럼, 만약에 예배 참석하니까 경건한 마음? 아니에요.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어떤 분이 감사하다는 글을 올렸는데, 그 사람 표현에서 처음 듣는 표현이 나와서 내가 그걸 부각시켰어요. 무슨 표현이냐 하면, ‘온라인 우리교회’ 아, 이거 멋진 말이다. 온라인 우리교회는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나름대로의 자기 이미지 관리는 항상 패턴과 습관에 의해서 형식주의적 법으로 자기를 무장하죠. 인간들이 자기 일로 피어나올 때 하나님의 율법은 또 그렇게 공격대상이 구체화되는 겁니다. 딱 기다려! 너희들이 생각하는 율법해석을 율법이, 실제로 율법이 그걸 무산시켜줄게. 부숴줄게, 부숴버릴게.

자기 이미지 관리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 하잖아요. 그 율법이 그걸 부숴버려요. 그 예를 지금 사무엘상 9장 3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뭔가 잃어버렸어요. 뭐를? 나귀를 잃어버렸어요. 사울 집에서.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나갑니다. 암나귀를 찾으러 나가는데, 여기서 장차 왕이 될 관상, 왕이 될 상인가? 왕이 될 인물, 그가 움직일 때에 암나귀를 잃어버렸죠.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으러 간단 말이죠. 그러면 사울은 그 암나귀 찾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가 첫 번째 왕이 될 사람이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 되는 조건이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 되는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암나귀 찾다가 사무엘상 11장 6절에 보게 되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여러분들이 실력이 되니까 제가 편하게 말씀드립니다. 사사시대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겨우 구원이 되는 그러한 시대였어요.

그 시대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어야 되는데,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했어요. 거부하고 그야말로 바알 섬기면서 우상을 섬겼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를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왕 맞다. 내가 너희 왕이야. 내가 왕이기 때문에 굳이 너희에게 너희들 속에 인간들 중에서 왕을 뽑을 필요가 없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실체로서 제공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율법의 실체로서.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 되심을 원치 않아요.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시대냐? 사사시대. 사사시대 특징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일시적으로 또는 임시적으로 임시적 구원자가 필요한 거예요. 임시적 구원자.
이걸 요즘 말로 ‘계약직 신“

또는 차 사고 났을 때 누구를 부르죠? 보험회사 직원 부르죠. 그렇다고 해서 보험회사 직원의 종이 되는 건 아니죠. 필요할 때마다 그냥 임시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땜빵 하는 거죠. 인간들이 왜 신을 땜빵 역할로 밖에 안 보느냐, 사사시대 때에..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내가 결정해서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되, 당신 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걸 어디서 그들이 알게 됐느냐? 이방나라는 든든하게 눈에 보이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왕의 특징은 영웅적으로, 세습적으로, 전통적으로 족보를 따라서 왕이 있어서 그들은 안정권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정적인 왕의 권력 때문에 자기 이스라엘은 많이 밀리고 사는, 당하고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계약직이죠. 계약직이니까 하나님은 일단 그 당시 시대를 반영해서 사울을 뭐로 바꾸냐 하면 사사로 바꿔요. 사사로 바꾸려면 사사의 조건이 뭡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임했는데 문제는 사울이 사사의 범주를 못 벗어나요. 사사의 역할 밖에 안 되는 인간이 백성들이 요구를 해서 사사밖에 안 되는 사울을 뭐로 억지를 부리냐 하면, 왕을 삼아버려요. 왕이 된다고요. 사무엘 보고 그걸 시켰죠, 그들이 왕을 원하니까.

사울을 왕이 되게 한 거예요. 왕이 되니까 사울 왕은 나중에 다윗을 만나니까 뭐가 되냐 하면, 악신이 들려요, 악신이. 조금 전까지 성신 받은 자가 악신 들린다니까요. 사무엘상 보면, 사울이란 사람이 성신 받아서 옷 벗고 춤추고 난리도 아니에요, 사무엘처럼.

사무엘은 왕이 아닙니다. 선지자죠. 선지자는 배후에 왕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사사는 배후에 왕이 없어요. 사사는 잠시 고용된 임시직이라니까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잠시 사사가 등장하는 거죠. 사무엘처럼 연락 체계가 된 게 아닙니다. 그냥 써 먹고 말 거예요.

악신이 들린다 이 말이죠. 그럼 여기서 뭐냐? 사울을 임시 땜빵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다윗이 그냥 등장해 버리면, 사울의 임시 땜빵이나 다윗이 임시 땜빵이나 똑같이 돼요. 그래서 다윗에게는 사울의 한계를 품은, 그러니까 인간들의 한계, 인간들의 약점, 부정성을 품고 등장하는, 그걸 품고, 그걸 극복한 왕인 다윗이 등장하기 위해서 다윗은 어떻게 하느냐?

사울의 악신을 다윗이 비파 쳐가지고 추방하고 말아요. 추방합니다. 추방하면서 뭐는 가져오느냐? 사울이 갖고 있던 ‘기름 부음’이라는 그 흔적은 그대로 자기 쪽으로 인수인계 해버려요. 기름 부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긴다. 기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지만, 자기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을 품게 만드는 작업을 한 겁니다.

자, 이렇게 이 모든 게 율법의 진행과정에서 이렇게 되어 진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처음에 이방 나라는 율법이 없잖아요. ‘율법이 없다.’ 이게 첫 번째.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다.’ 세 번째,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없다.’ 네 번째,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없는 이스라엘이 생긴다.’ 가 되겠죠.

이 네 가지의 절차를 주께서 훅 들어오셔서 일방적으로 이 절차를 실시를 한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 제가 세 번째 까지 얘기를 했죠.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없어져요. 다윗 언약 안에 그게 내포되어 있지, 이스라엘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만나면서 자신의 희망을 율법에다 싣고자할 때, 율법이 그런 희망을 내치는 거예요. 사울에게 담겨있던 백성들의 희망을 다윗이 내쳐버립니다. 왜? 사울 안에는 그 당시 백성들의 모든 여망과 희망이 사울에게 집약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무엘상 보면서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분명히 그들은 찬미했지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그런데 그게 왜 정치적 힘으로 결집이 안 되죠? 왜 쫓겨 다니죠?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을 찾던 사람은 다윗이 누군지 몰라요. 다만 새로운 희망의 영웅으로 등장했다 뿐이지. 율법의 정신은 뭐냐? ‘네가 누구냐’예요. 네가 누구냐? 백성들은 그런 데 관심 없어요. 내가 누구냐에 관심 없고, 누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냐?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내가 누구냐’를 몰라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몰라요. 그냥 나 지켜주면 그 하나님 찬양하겠습니다. 이런 자체적인 법의 패턴을 보여주는 거예요.

다윗이 등장했다는 말은 결국은 다윗이 등장함으로 레위 언약이란 제사 제도가 말짱 거짓이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이제 레위 제사 제도에서 뭐로 넘어가느냐? 왕 제도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 말은 좋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포기했다’는 것을 계속 끌고 가시는 거예요. 계속. 그게 3번입니다.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마땅히 파괴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도 하나의 임시 고용자였다, 땜빵이었다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나는 땜빵이 아니라 계속 정규직이었으면 좋겠다. 말씀회사 취직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9절에서 10절까지 “저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을 찾을 이유 없죠? 내 인생을 완전히 조져 놓은 거예요. 세상에 이걸 행복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과거, 현재, 미래의 패턴에 의하면 이 말씀은 우리 쪽에서는 수용이 안 되죠. 다시 말해서 이미 나의 존재가 있다는 말은 엄연히 나의 일이 있다는 거고, 나의 일은 나의 기준이 있다는 말이고, 그 말은 천하의 주의 일이라도 나를 망친다면, 나는 주의 일을 받지 않겠다. 라고 하는 거죠. 그거죠.

아까 사울에서 다윗으로 교체된다는 얘기했죠, 교체. 교체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죽음으로 질주합니다. 죽음으로 달려가요. 멈출 수가 없어요. 왜? 내 존재가 그러니까. 내 존재는 나의 일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일에서는 뭐가 빠졌다고 했어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일이 있는 한, 주의 일은 나한테 마치 N극과 S극이 서로 배척하듯이 누구 자존심이 더 세냐고 배척하듯이 서로 튕겨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본능적이에요.

“내 일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왜 내 일을 작살을 내요? 뭐 하나님이면 다냐?” 이게 우리 마음 속에 늘 이렇게 샘솟듯이, 좋은 말 아닙니다 이게.. 분출하듯이 계속 솟아나는 일이 그 일이에요. 그 일이라고요. 우리는 교체할 마음이 없어요. 좋게 좋게 가자는 거예요.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게 가자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1장에서 열두 제자를 뽑아버렸어요. 열 두 제자. 제자 뽑고 훅 들어와요, 훅. 그냥 훅 들어온다고요. “가자” 어느 길로요? “몰라도 돼. 내가 앞장서잖아, 내가. 내가 앞장선다고. 너는 나 따라오기만 하면 돼. 따라오는데 일단은 네가 여행을 위해서 주머니나 두벌 옷을 갖지 마라.”

여벌 옷을 갖지 마라, 요새 말로 쉽게 하면, ‘휴대폰을 소지하지 마라.’ “몰라도 돼. 언제 기각되든지, 누가 대통령 되든지 몰라도 돼. 너는 등신이야 이제부터. 아무 것도 몰라도 돼.” 그러면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 호락호락 수용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반대했죠. 왜? 제자들은 터미널이니까.

새로운 의미의, 새 언약에 합당한 터미널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어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밀어내는 게 아니고, 3년 동안 모든 재산을 버리고, 모든 청춘을 버리고 다 따라다녔어요. 땅을 치면서 이야기했어요. ‘내 청춘 내 놓으라’고 나훈아가. “내 청춘 돌리도, 내 청춘 돌리도”

제자들은 강력 반발했지요. 바로 이런 거예요. 율법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 안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냉혹하고 냉정합니다. 너무 냉정해요. 요한복음 14장에서 “기다려라 내 다시 갈게.” 그때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의 느낌은 뭐겠습니까?

“아, 안 오신다는 뜻이구나.” 왜 그렇게 받는 게 편하냐 하면, 그래야 편안히 고기 잡으러 갔으니까요. 왜냐 하면, 내가 기대했던 그 소망이라는 틀에 주님이 걸려들지를 않으니까..나의 존재와 나의 일이 유효하게, 유의미하게 살아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예 그것은 걸려들지 않는 방식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훅 들어오신다.’고 한 거예요. 난데없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가정에 우환이 있고, 자기가 말기암 되어서 예수 믿는다? 그거 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제 미래가 망했으니까, 미래 부분만 마저 채워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빠져있는, 누락되어 있는 미래를 채워주는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일용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그 시절마저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기다리기 때문에 내가 온 게 아니고, 재림을 백날 기다려도 너한텐 안가. 주의 분류작업은 숨어서 하시기 때문에, 구원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주님이 열심히 분류작업을 했고, 거기에 우리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을 우리의 미래와 어긋나면서, 우리의 희망과 어긋나면서 비로소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의 온 취지입니다. 10분 쉽시다.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5강) 창15:1(전쟁을 통한 상급)20250324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153 [십자가와 상급]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고자 해도 받을 사람이 없어요.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을 사람을 따로 지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거기 6번째 줄에 나와요, 창세기 15장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받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상급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조해야 되죠. 창조해야 되죠. 그래서 너는 상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네가 바로 나의 상급이다. 아브라함아, 네가 나의 상급이다. 결국 하나님의 상은 하나님이 하나님께 수여하는 거죠.

왜냐하면 아브라함 속에 주체자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오죠.

아브라함 네가 의롭게 된 이유는 네 속에 의가 박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가 속에 박혀있는 상태를 하나가 된 상태라 해서 그걸 믿음이라 해요. 네가 믿는 게 아니고, 믿음이 발생되는 하나의 기계라는 거예요, 기계. 인간의 믿음 말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인간의 모습을 띄고 발휘될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도로 가져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죠.

그럼 인간의 믿음은 뭐냐? 인간에게서 나왔으니까 행함이 되죠. 로마서에서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롬 3:28)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를 자꾸 일으켜요. 믿고 싶은데 하나님 쪽에서 못 믿게 만들어요. 우리가 뭔가 믿는다는 것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신뢰’를 말합니다. 신뢰하는데 이것은 나에게, 현재 신뢰를 주는 나에게 이익을 주고, 이 이익은 나에게 생존을 끌어주죠. 생존을 잇게 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준 믿음은 믿는 자를 죽여 버려요. 이미 죽은 자로 규정을 하기 때문에 하나는 살리는 용도로 믿는 것과 ‘지금 죽어도 마땅합니다’고 나오는 내 죽음을 전제로 한 차이에요.

내가 죽었다고 쳤을 때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는 일은 뭡니까? 일-(빼기)나의 일=주의 일. 일 중에서 일 빼기 나의 일하면 여기서 남는 것은 주님의 일만 남아요. 빼기 알죠? 산수 다 배웠죠? 전체 일어난 사태에서 나의 일만 빼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불신자는 뭐냐 하면 나의 일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불신자에요. 전부다 이미 나의 의미로 재해석했기 때문에 나의 일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불신자는 줄창 자기만 증거해요. 자기만 증거하고 자기 자랑만 할뿐이에요.

나 전유진 안다, 이런 거죠. 나 윤석열 지지한다. 이거 뭐에요? 내가 결정한 일에 내가 지지한다 이 말 아닙니까. 내가 결정한 일에. 어떤 사람 만나면 ‘좌파에요, 우파에요?’ 그렇게 묻는 이유가 그걸 통해서 시간의 지루함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게임하면 시간 흘러가는 걸 몰라요. 잠시 잊을 수가 있어요. 안 그러면 지루하니까. 심심하니까 누구라도 붙어 싸웠으면 덜 심심한 것 같아요. 바쁜 젊은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모든 일을 멈췄을 때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있고요.

돈까지 써가면서 가고. 심지어 은퇴한 목사는 전광훈이 돈 백 만원 줘서 교인들 다 완전히 몰표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우파를 만들어라. 주께서 주신 사명이 아니고 전광훈이 준 사명을 가지고 했다는 썰이 있어요. 그것도 유력한 썰이죠. 증인들이 있으니까. 촌 교회 목사가 목돈 탈 일이 뭡니까? 백만원 어디서 나오겠어요? 안 그래도 대장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게 목사인데,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자기 목사라는 대장질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돈도 받고, 그 지역의 유지도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중간에 주장했다는 얘기 안 해요. 또 명예훼손 걸지 마세요. 그런 썰이 있다는 거예요.

자, 상급을 받을 사람은 없어요. 없기 때문에 친히 언약으로 상급 받는 자를 만들어내야 됩니다. 만드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상주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자기 상을 수여하면서 경유지로 사용하는 거죠. 자기 백성을 경유지로. 이렇게 하면 또 듣는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일에 이용했다는 말인가? 아, 기분 되게 안 좋네.’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경유지로 사용하면서 곱게 사용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사용하느냐? ‘전쟁을 통해서 하늘의 상을 통과시킨다.’ 전쟁이 없는 곳에는 뭐도 없다? 상도 없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켜서 전쟁을 통해서 하늘의 상이 다시 하나님께 부여되는 그러한 수단으로서 활용되게 됩니다.

이 땅에 상 받을 자격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이 이미 창세 전부터 결정되어 있어요. 피조물은 그냥 시다바리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생명의 면류관까지 주님의 발 앞에 던집니다. 내가 합당치 않다는 거예요. 상당히 부정적 요소에요. 자기 부정을 듬뿍 담아야 그때 비로소 주님께 찬미가 돼요. 우리가 쓰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평생토록 주의 일하는 목적이 ‘나는 상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 상황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겸손해가지고 ‘난 상 받을 수 없습니다.’ 이거는 또 하나님이 안받아줍니다. 이게 어디서 또 흉내 내고 있고, 연기하고 있어. 실제로 주님께서는 전쟁에 참여시켜서 전쟁을 통해서 이 전쟁에서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대가를 집요하게 노리고 있는 자기 본성을 까발리게 만듭니다.

그 전쟁의 예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블레셋과의 전쟁. 사무엘상 4장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벌어지는데 전쟁이 벌어지게 하신 취지가 뭐냐? 그 효과가 뭐냐? 엘리 제사장 가문을 작살내는 거예요.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정책을 하나님 쪽에서 이제는 철폐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 중심의 나라가 되지 않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가 철폐되면 그럼 하나님의 약속에 위반되지 않느냐?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냐? 하나님은 상 받을 아브라함에게 상을 주시면서 아브라함이 누굴 만나게 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을 만나게 해요. 그 멜기세덱이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제사장 맞아요. 또 하나는 왕이에요. 제사장에서 왕직으로 사이즈를 키우는 겁니다. 범위를 넓히는 거예요. 제사장직에서 왕직으로 넓히면서 필수적으로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을 실시합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4장, 5장에 나오는 이 전쟁은 첫 번째, 엘리 가문을 작살내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어떤 분이 왕이 되느냐?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원수에게 사로잡히는 방법으로 승리하는 분이 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에게 패배함을 통해서 왕이 돼요. 패배를 통해서 승리자가 된다고요. 그럴 때만 하늘의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승리를 노리는 자는 상이 없어요. 패배했을 경우에만 상이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하면서 구원된 자만이 상을 언급할 자격이 돼요.

상을 많이 언급한 자가 누구냐?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뭐했던 사람입니까? 스데반 집사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사람이잖아요. 저 스데반 집사는 죽어 마땅함을 드러내는 그 현장 책임자로 있었던 사람이란 말이죠. 옷을 맡긴다는 말은, 우리가 돌을 던지는 조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그렇게 당신이 증인 좀 해라.

왜? 당신은 헌법 재판소 재판관이니까. 엘리트이기 때문에. 법에 대해서 알잖아요, 법에 대해서. 서울 법대 출신이거든요. 그 당시 율법을 다룰 때 유력한 두 학파가 경쟁적으로 있었어요. 가말리엘 학파에 속한 인물이 사울이었어요(행 22:3).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율법을 아는 우리의 승리가 되기 위해서는 스데반 집사를 패배자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그럼 사울이 사도가 되는 요소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함유되어 있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같이 뒤따라 들어온 거죠. 예수님을 죽인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울에게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그것이 사도라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주님이 그 방식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첫 번째는 엘리 제사장을 작살내고 본격적으로 왕 체제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런데 왕이 될 그분이 적들에게 체포되어서 패배자로 전락해야 왕이 된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가 사로잡히게 되죠. 언약궤는 뭐가 있는 곳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죠.

그럼 여러분들은 부모가 지어준 자기 이름이 있죠. 언약궤는 무슨 이름이 있어요? 나무로 되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나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나무 상자는 특징이 뭐냐? 외부에서 거들어줘야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은 뭐냐?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있어요. 뚜껑 열고 보기, 그게 뭐 힘들어요? 궁금해? 궁금하면 봐. 본단 말이죠. 사무엘상 6장 19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걸 만화로 그려낸다면, 상자를 여는 순간 거기서 뱀 머리 같은 것이 한 이천육백 마리쯤 나와가지고 독을 쏘아대서 보는 사람들이 독 맞고 전부 쓰러지는 것. 카툰, 만화 같은 걸로 그려보면 그게 아주 실감나겠죠. 그런데 그건 만화고, 여니까 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는데 죽었어요. 없는데 죽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니까 죽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의 인지력과 지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이 언약궤를 통해서 터져 나올 만발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독일군들이 언약궤 들여다보다가 완전히 해골 되었잖아요,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1982)>에서. 주인공 이름이 해리슨 포드죠. 인디아나 존스 첫 번째 시리즈. 나 그 영화보고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요. ‘야, 언약궤가 저렇게 죽이는구나. 신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지 말랬는데 왜 들여다봤어? 죽어 마땅하지.’ 이런 승리감이 있었어요.

들여다보면 죽는다는 말은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활약한다는 뜻이죠.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활약하고 활동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언약궤는 뭐냐? 소로 이동했어요.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움직인다. 요양병원에 있는 노인네가 휠체어를 타고 계단 오를 때는 번쩍 들어서 옮겨줘야 옮겨진다는 거예요. 장애인이죠, 장애인.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가 휠체어 탄 장애인이잖아요.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우리는 멀쩡한데 언약궤는 인간인 우리의 봉사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능한 자,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본 거예요.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가 협조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면 제 노릇, 제 구실을 못하는 무능자라 하는 인식을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나무 상자니까요. 나무 상자가 뭘 할 수 있느냐? 발로 차면 차이고 들여다보면 보고 하죠.

언약궤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블레셋 군사들이 언약궤를 달랑 자기 진영에 갖고 왔습니다. 그들이 하마스였어요. 알라신 앞에 여호와가 있는 거예요. 알라신이 이겼고 누가 패배했습니까? 여호와가 패배해서 인질로 잡힌 거예요. 그런데 그 인질로 잡은 하마스가 망했어요. 온 동네가 다 망했어요. 이제는 토하고 싶어. 이게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놀림감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서 인간들의 불신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내놨습니다.

자, 문제는 이거예요. 다윗이 언약궤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동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모실 때는 율법을 가지고 모셔야 된다. 모실 때는 어깨에 메야 된다. 마치 대감마님 모시듯이 모셔야 된다. 율법으로 모실 분이 누구냐? 다른 지파는 안 된다. 오직 레위지파여야 되는 거죠.

레위 지파가 언약을 메고 모심으로써 다윗은 무엇으로 자기 고백을 하는가? ‘여호와 언약궤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살아계신 언약궤 앞에서 내 이름은 마땅히 더럽혀져야 됩니다.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내가 자진해서 철회하겠습니다.’ 하고 거기서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옷을 벗고 춤을 추면서 찬미했습니다.

이것이 종의 종 됨을 보여주는 거예요. 자유인은 자기가 판단해서 움직이지만 종은 시키지 않으면 못 움직인다는 그런 근로조건을 스스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저 시켜만 주이소, 이런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자, 이렇게 해서 언약궤라는 상자가 점차 뭐로 변형되어 가느냐 하면 인물화 돼요. 언약궤가 전쟁을 하는 주인공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자기가 하는 전쟁이 아니라 언약궤를 사수하는 입장에서 전쟁에 자기가 거기에 참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걸 인식한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전쟁. 골리앗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어디 있어요? 언약궤에 있죠. ‘그럼 언약궤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기꺼이 제가 한몸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럼 상급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전쟁을 관통하면서 전쟁을 통과하면서 그 속에서 상급은 하나님에게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죠. 돌아가면서 주의 이름이 참으로 찬양받고 상 받을 유일한 분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혼자 다 끌어 모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다윗을 통해서 그 사실이 점차 점차 밝혀지겠죠. 그 대목이 어디냐? 민수기 31장입니다. 민수기 31장과 사무엘상 30장을 연이어 한번 봅시다. 민수기 31장에 율법이 나옵니다. 민수기 31장 21-30절, “제사장 엘르아살이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법률이니라”

민수기입니다, 민수기. 율법. 모세 때 이야기에요.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전리품이 있잖아요. 전리품을 ‘야, 좋다. 금가락지 해야지.’ 이러지 말고 율법을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전쟁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은 인간의 이름으로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했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까 전쟁 당사자가 주의 이름이죠.

그러니까 전리품은 누구 앞에 상납해야 돼요? 주님 앞에 상납해야 되잖아요. 상납하고 난 뒤에 그 상을 이제 주님이 주시는 대로 그들은 받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그 상을 통해서 하나의 조직이 되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는 겁니다. 상이 연결, 밧줄 기능을 하는 거예요.

우리를 전쟁에 참전시키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케 하고, 거기서 얻어진 결과물에 대해서 ‘너는 내 백성이니까 가져라’하고 줬을 때 ‘이 상은 주님이 홀로 하셨습니다.’ 하는 반응을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이 민수기에 나온 31장 21-23절의 이 말씀이 아까 그 언약궤의 주의 이름이 언약궤를 모신, 주의 종, 언약궤의 종으로 자발적으로 나섰던 다윗이라는 인물에 그게 실리겠어요, 안 실리겠어요? 실리겠죠. 그게 사무엘상 30장 24-25절입니다.

23절부터 보게 되면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붙인다’는 말이 있죠. 붙이시매.

그건 뭐냐 하면 옛날 구약에 자기 전에 있었던 그 전쟁의 내막에 대해서 다윗이 다 알고 있다는 뜻이죠. 그렇죠?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붙여주시는 전쟁.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다윗,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붙여야 들어오죠. 붙여서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관통하면서 이스라엘 자체가 주님의 승리한 파티장의 어떤 결실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이게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평소에도 일상 가운데 이런 말씀을 자꾸 적용시키세요. 날씨가 추울 때, ‘오뎅 국물이 먹고 싶다.’ 보니까 저기 50m 앞에 오뎅 파는 포장마차 있잖아요. 그때는 ‘야, 오뎅 있다.’ 하지 말고 주께서 붙여줬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모든 일상에서 그렇죠. 어떤 집엔 보이스 피싱을 붙여주시고. 원치 않는데 훅 들어온 거예요.

사무엘상 30장 24절에서 군대를 붙였거든요. 붙였으니까 다윗은 정신 바짝 차리는 거예요. “자, 민수기 31장을 해야 돼. 민수기 31장.” 붙여준 전쟁은 이미 승리는 끝났어요. 끝났는데 문제는 ‘여기 상을 우리가 챙길 것이냐, 말 것이냐’에요. 그때는 민수기 31장이 동원되어서 검증에 나서야 되죠. 이걸 누가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언약궤 상자가 점차 인물화 되는 과정 속에서 다윗이 선택받은 왕으로서 해야 될 임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24절,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뭐해라?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같이 분배하라고 되어 있어요. 같이 분배해라.

다시 민수기 3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31장 25-31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로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그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께 돌아가는 몫은 몇분의 몇입니까? 오백분의 일로 되어 있죠. 하나님이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승리는 자기가 해놓고 오백분의 일밖에 안 가져가잖아요. 그런데 원래 마동석 나오는 영화 <범죄도시>에 보면 조폭 양아치들이 대장은 자기 혼자 다 먹고 밑바닥한테는 짜장면 사주잖아요.

이 세상에서는 소득만 주고 그 사람이 하는 힘에 의해서 배분이 되고요. 배분을 할 때 힘에 의해 배분하면서 약간 더 쳐서 주는 것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법입니다. 네가 한 것은 짜장면밖에 안 되는데 따로 불러서 짬뽕 사줄 때, 그것도 해물짬뽕 사줄 때 그때는 “다른 조직원보다 너는 특별하니까 앞으로 위험할 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알겠어?” 이런 거. “나는 너를 2인자로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만약에 내 비자금 2조원 기억하고 있는 인간이 딴짓 하거든 네가 총으로 쏴라. 요트에서 쏴버려라.”

이게 조직사회에요. 내 사람,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사람. 그걸 여러분 아는 단어로 하면 뭡니까? 측근. 앞에 한 자 더 붙이면 최측근. 지분을 보다 많이 넣어주는 거예요. 이것을 ‘위계화’ 또는 ‘서열화’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힘으로 구성되는 질서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의 조건은 뭐냐? 아까 본 것처럼 불을 지나가게 해서 견딜만한 것은 남기라 했죠.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성경이 따져보면 굉장히 쉬운데 복잡해요, 이게. 왜 복잡하냐 하면 인간이 자꾸 자기 몫을 노리기 때문에 자기 지분을 노리기 때문에 자꾸 일이 복잡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게 상급에 대한 거예요. 상급, 십자가와 상급 이야기.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아주 단정을 해요. 하나님이 자라게 한다. 그러니까 물 주는 자, 심는 자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자라나게 하는데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뿐이니라”

이 하나님이 구체화 된 것이 누구냐? 여기에 불이에요, 율법에 의해서. 고린도전서 3장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되어 있어요.

이게 어려워요. 이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묻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공력이 둘 중 하나입니다. 1번-양적이다, 2번-질적이다. 어느 쪽입니까? 질적이에요. 양적이 아니고.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도 과부의 두 렙돈을 쳐주는 이유가 양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적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힘하고 달라요. 주님이 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차지하는 양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질로 삽입되어 들어오는 겁니다, 새로운 질로. 그럼 우리 속에 내가 한 일, 내 것이 남아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한 게 남아있으면 안 되죠. 99%는 주님이 하시고 1%는 내가 했다 하면 질이 깨어져요, 질이. 질 자체가 온전한 질이 아니에요.

제가 농협에서 쌀을 사서 차에 싣고 제 아내와 같이 왔어요. 집에 와서 트렁크 열고 쌀 내려놓고 주차한 다음 쌀을 들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쌀을 드는데 나는 쌀 포대가 그렇게 연약한지 몰랐어요. 내 손톱이 날카로웠던 모양이에요. 드는데 퍽 터지면서 그 안에 응축되어 있던 쌀이 숨을 쉬듯이 팍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걸 제일 밑에서부터 얼싸안고 2층까지 오를 때에 옆에 무슨 보이스, 무슨 소리가 들리겠죠. 잘디 잔 잔소리가 들리겠죠. “내가 쌀 포대 곱게 놓으라 했잖아.” 다 지나간 과거 이야기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터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걸 어떻게 운반하느냐. 그렇게 쏟아졌어요. 그래서 일부는 들고 올라가고 무사히, 아기 안을 때 이후에 제일 조심히 안고 올라가고 나머지는 집사람이 와서 쓰레받기로 큰 다라에 쓸어 담아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올라오고 난 뒤에, 아내는 나한테 지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운동을 시켜요. 20키로 어떻게 하면 빠진다 하는 게 아니고, 운동을 시킨다고요. “돌 골라내.” 심심하니까 TV틀어놓고 돌 골라냈어요. 골라내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돌이 없었어요. “돌 골라냈다. 숙제 끝.”하고 넘겨줬다고요.

넘겨주니까 제 아내가 물로써 제대로 이제 정제단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련단계에 들어가죠. 혹시나 하나님의 공로에 인간의 행위가 섞일까 싶어서 제련하는데 그 일을 누가 하는가? 성령님이 하셔요.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대충 봐서 ‘나는 마음을 낮췄다. 겸손하다.’ 했는데 성령께서는 인간이 못 뽑아내는 걸 다 뽑아내요.

아내가 물로써 쭉 하면서 성령이 하는 일을 보여줘요. “자, 당신 와서 봐라. 응? 당신은 다 뽑아냈지? 이 남아있는 흙 봐. 이렇게 해도 모자라. 또 해야 돼.”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이 쌀 네가 먹어라. 이 쌀 당신이 책임져라.” 이거는 죄 사함이라는, 주께서 지셨다는 사실을 잠시 잊으신 모양이에요.

그렇게 해서 또 걸러내니까 또 나오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나오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육신의 속성 때문에 내 생각, 내 의도, 내 희망, 내 소원이 내 육신에 계속 남아있고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남아있는 한 주께서는 더러워서 안 받아요. 받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알아서 해주겠지만 하여튼 남아있으면 안 받아줘요.

참, 이 강의를 마감하면서 큰일 났어요, 지금. 안 받아줘요. 안 받아주면 영생이란 상급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못 받죠. 받을 수가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에베소서가 있습니다. 아, 에베소서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자, 에베소서 보기 전에 극단까지 몰아세우는 대목을 한번 봅시다. 열왕기하 19장 10-11절,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에 행한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이 싸가지 없는 소리를 누가 하느냐 하면 랍사게가 해요. 이름 자체가 얍삽하잖아요. 랍사게. 랍사게를 누가 보냈게요? 하나님이 보냈죠. 하나님이 랍사게로 하여금 히스기야를 궁지에 궁지로 몰아넣게 합니다. 왜냐하면 더는 히스기야가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그 희망을 완전히 좌절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까지 없애버렸죠. 기도해서 응답 받겠다 하면 저쪽에서 더 밀어붙여요. 하나님께서 더 밀어붙이게끔 합니다. 하나님 믿고 성경 공부한 것 다 총동원하고 집에 있던 마지막 무기 있잖아요.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성령 받았다는 것까지 다 끄집어냈는데 그게 상황을 호전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게 만들어버려요, 주께서. 이게 바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끝까지.

그러니 얍삽한 랍사게가 나중에 돌아서면 굉장히 고마운 분이에요, 이게. 김정은 같은 것도 그렇고 푸틴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굉장히 고마운 분이에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그 나라 의만 구하면 돼요. 자기 나라 옛 영토, 과거 영토 생각하면 안돼요. 젤렌스키도 하여튼 그 나라 의만 구하면 돼요. 그 나라 의만.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쳐요. 거기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 도와주소서. 안 도와줍니다. 도와주면 마귀가 도와주죠. 내 일 안 도와줘요. 내 일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없어야 흙이 싸대다가 햅쌀에 섞이지 않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일하세요. 그러나 이미 섞여버렸어요. 섞이면 어떻게 합니까? 흔들어야죠. 잔소리해가면서. 이거 네가 다 먹어라. 고생 네가 혼자 해라.

그리고 난 뒤에 에베소서 한번 봅시다. 에베소서 4장 8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뭡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언약궤가 혼자 전쟁 승리하시고 전리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그런데 그전에 무슨 절차가 필요합니까? 율법대로 민수기 율법대로 실시가 되어야 돼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서서 율법대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율법의 완성인 인격화, 예수님이 율법을 대신해서 아버지 앞에 나서서 아버지로부터 “그래, 충성된 종아. 너는 나의 율법을 이루었구나.” 이루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뭡니까? 그때, 상이죠. “너는 나의 상이다. 상급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상이 되는 거예요.

일단 율법대로 한다는 것은 모든 적, 모든 원수를 다 발 앞에 깔아뭉갰다는 것이 확인이 되어야 돼요. 자, 문제 나갑니다. 그 원수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걸 인식하는 게 복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 창세 전에 있었던 그 사항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돼요.

창세 전 태어나기 전에 사항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만이 아는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을 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다 하셨습니다.’하는 그것을 고백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이건 누가 뭐래도 우린 구원받은 상태죠. 그럼 구원받은 자가 해야 될 것은 뭡니까? 왜 나는 안 되어야 마땅한지, 내 육신가지고는 왜 안 되는지 그걸 실습 또 실습하는 그런 자유함과 즐거운 일이 있죠.

그걸 이렇게 요약해보겠습니다. 이거는 특별히 여러분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최고의 쾌락과 욕망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쾌락과 감사와 기쁨이 없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실습 가운데서.

정말,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애달아하면서 몰랐던, 네 꼬라지를 아느냐 하는 그것. 주께서 알려주잖아요. 내가 주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 내가 주님을 죽인 원수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의 가담자입니다. 그러면서 주어지는 그 감사와 기쁨.

주님께서 그냥 산 채로 아버지께 간 게 아니고 죽은 모습으로 감으로써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이미 죄인으로 결정이 난 거예요. 어떤 인간도 민수기 율법을 지킨 자가 없습니다. 주님 혼자 지켰어요. 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약속된 권한을 부여받게 되는데 ‘네가 혹시 원하거든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나눠주는 것을 내가 허락하노라.’ 그런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자를 그렇게 분배할 때 그 자체도 또 하나님 말씀의 완성입니다.

끝으로 나눠드리겠다 했던 팝송 가사인데 시간 관계상 빨리 하겠습니다. 이 가사가 오늘 첫 번째 강의했던 것과 관련됩니다. 얼마나 나의 일이 집요하게 나를 안 놔주는지를 이 가사를 보면서 한번 봅시다. 한글 가사 나옵니다.

[Yesterday, When I was young] 1969 Roy Clark
-언약이 빠진 인생 노래-

내가 겪었던 사랑은 언제나 끝이 너무 안 좋았어.
그것 때문일 것 같아. 내가 나이보다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든 건…(나래이션)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땐 인생은 혀끝에 닿는 빗물조차 달콤했지. (여러분 20대, 10대 잘 나갔던 것 생각해보세요.)
하찮은 장난을 하듯 삶을 살았어. 마치 저녁 바람이 촛불을 갖고 놀 듯… (세상풍조가 바람이라면 우리는 같이 신나게 흔들리는 촛불과 같다 이 말이죠.)

수많은 꿈을 품었고 원대한 계획도 세웠지만 언제나 약하고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로 세운 것이었어.
낮의 밝은 빛은 멀리하고 밤에 젖어 살았지. (밤에 논다고 낮에는 낮잠 오래 잤죠.) 그 세월들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간 건지 이제야 알겠네.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땐 끊임없이 행복의 노래가 샘솟았고 내 앞에는 화끈한 즐거움만이 놓여있었지.
눈이 멀어 그렇게 큰 아픔이 있음을 외면했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젊음도 가버렸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 지금 와서 기억나는 대화는 모두 나 자신에 관한 아무 의미 없는 것들 뿐…

그땐 달빛도 창백했어. 그 정신없던 날들이 무언가 신기한 것을 주기도 했지만.
‘마법의 지팡이라도 갖고 있는 듯’(이게 중요해요) 내 청춘을 써버렸고 그 너머의 낭비와 공허함을 보지 못했지. (마치 뭐 큰일이라도 할 것처럼 허세와 허풍 떨면서 담배피우고 술 먹고 돌아다니고 허랑방탕하게 보냈던 거예요, 그 세월이. 허비했다 이 말이죠.)

오만함과 자만으로 사랑도 장난으로 여겼어. 사랑의 열정도 너무 빨리 식어버렸어.
친구들도 결국은 모두 내 곁을 떠나고(뭐 친구들 있습니까? 없죠.) 인생이란 연극의 마지막 무대에 나 홀로 남아있네.

아직도 부르지 못한 수많은 노래가 남아있건만… 쓰디쓴 눈물의 맛이 혀 끝에 느껴지네. 대가를 치를 때가 왔어. 젊은 날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한… (젊은 날 내가 했던 것에 대한 대가)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기쁨과 감사가 없죠. 나를 상실한 기쁨과 감사가 전혀 없죠. 그냥 한탄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노래인지 들어보겠습니다. 영어로 보세요.

Yesterday, When I was young

독백
Seems the love I've known has always been the most destructive kind
Guess that's why now I feel so old before my time

노래
Yesterday, when I was young
The taste of life was sweet as rain upon my tongue
I teased at life as if it were a foolish game
The way the evening breeze may tease a candle flame

The thousand dreams I dreamed
The splendid things I planned I always built to last
on weak and shifting sand
I lived by night and shunned the naked light of the day
And only now I see how the years ran away

Yesterday, when I was young
So many happy songs were waiting to be sung
So many wild pleasures lay in store for me
And so much pain my dazzled eyes refused to see
I ran so fast that time and youth at last ran out

I never stopped to think what life was all about
And every conversation I can now recall
Concerned itself with me, and nothing else at all

(우리의 지난날 고백 같은 거죠.)

Yesterday the moon was blue
And every crazy day brought something new to do
I used my magic age as if it were an wand
And never saw the waste and emptiness beyond

The game of love I played with arrogance and pride
and every flame I lit too quickly, quickly died
The friends I made all seemed somehow to drift away
And only I am left on stage to end the play

There are so many songs in me that won't be sung
I feel the bitter taste of tears on my tongue
The time has come for me to pay for
Yesterday, When I was young

중간에 밑에 첼로가 쫙 깔아줄 때 그 슬픈 과거의 후회스러움을 잘 보여주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습,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에게 관통하셔서 주님의 영생을 상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노력이 아니라 주께서 관통하시고 지금 함께 계심의 증거로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50324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어제 낮 설교에서의 초반에 나왔던 문장이 설교 전체를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참 위험한 발언을 했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밟았잖아, 너희가. 예수님을 밟은 게 예수님의 피를 밟은 거잖아. 밟았기 때문에 나온 그 피를, 나는 계속 말씀의 완성으로 간주하겠다. 말씀의 성취. 하나님 쪽의 모든 성취를 너희 인간들이 밟아놓은 그 피가 나오는 것으로 나는 보겠다.”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뭐가 위험하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밟았다는 그것을 주님의 열성 있는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열성 있는 분류작업. 열성 있는 분류작업의 특징 중 하나가 ‘멈추지 않겠다’에요. 열성 있는 분류작업을 주께서는 멈추지 않겠다,에요.

혼자 바쁘셔요. 혼자. 하나님 혼자 바빠요. 쉬지도 않고 바쁘게 일해요. 뭐한다고요? 열성 있는 분류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직장 내에서, 가정 내에서, 교회 내에서, 매 공간 매 시간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 작업하는 겁니다. 암컷, 수컷 병아리 감별하듯이, 너는 이쪽, 너는 저쪽.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감별하고 난 뒤에 그 표준을… 하나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자기 아들을 미리 파견했잖아요. 보내셔서 예수님이 당했던 모든 당함을 하나님 쪽에서는 ‘시험받았다’로 규정해요. 시험받았다. 그럼 ‘시험받았다’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있고 받은 분이 되어야 되는데, 거기서 악마의 존재가 예수님에게만 드러나요.

귀신에게 다른 인간들은 존재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귀신이 예수님 만나면 갑자기 달려듭니다. 우리를 멸망하러 오셨군요, 뭐 이렇게. 소위 선수끼리는 알아봐요. 선수끼리는. 마귀, 악마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고요, 시험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 체제, 인간세계 체제에 훼방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악마세계 쪽에서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꼬시죠. 꼬십니다. 꼬시는 방법은 간단해요. “몸이나 챙기세요. 참 다 좋은 일하시고, 메시아 한다고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그러나 일단 몸을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악마의 수법이에요. “종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고 말씀도 좋고 다 좋은데 존재 자체를 최종성으로 둬야 되지 않습니까.” 최종성으로. 인간으로서는 자기 존재가 마지막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어제 낮 설교에서 선지자 하나 제시했죠. 미가야. 미가야에 대해서 어떻게 제가 표현을 했냐 하면 ‘막장’ 지점에 와있는 사람이에요. 막장.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가서 그것을 터트려버리는 언론인.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언론인. 마지막에 가서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하고 고발하고 폭로하는 하늘나라의 언론기관에서 파견한 기자. 대변인이죠.

천상회의에 참석했으니까. 천상회의에서 이 모든 인간들에게 거짓 선지자 400명에게 거짓말 영을 보내겠다고 이미 거기서 결의가 되어 있으니까, 그 사실을 미가야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에 대해서 어떻게 겁을 내고 싶어도 겁낼 수 있는 여지가 없어요. 아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속속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니까. 거짓말한 이유도 알고 다 아니까.

그들이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가야는 천상회의를 참석했기 때문에 땅과 하늘을 다 알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구만 붙들고 영업하느냐 하면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붙들고 목회를 하고 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걸 미가야가 볼 때는, 끝장을 모르는 너희들 입장에 대해서 겁내고 무서워할 수가 없죠. 뺨 맞고 해도 약간 피부가 얼얼하다 뿐이지, 그게 전혀 미가야에게 위협이 될 수가 없죠.

참 위험한 발언을 성경에서 히브리서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위험한 발언을 던져놓고 그다음에 인간들의 대책을 보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대책은 뭐냐? 자기를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성경이죠. 그럼 성경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롱과 놀림을 다 성경에 퍼붓는 거예요.

‘이것은 신화다. 인간의 아이디어다. 고고학적으로 따져보니까 맞는 게 하나도 없더라. 그 당시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 당시 과학적 이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참고로 하되 지금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서 그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래서 그들은 학교라는 걸 통해서 진화론이라든지 때로는 창조론을 통해서 성경을 밀어내는 거죠.

성경을 밀어내는데 성경을 미는 것이 가장 노골적인 예수님 피에 대한 모독이죠.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함축해서 완성시킨 사태가 예수님의 피 흘림이거든요. 주님의 피를 이야기하니까 인간들은 ‘그때는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든 희생물이었지. 예수님이 안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그때 그 당시의 의미로 끝나버린 사항이 오늘날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은 너무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납득이 안 된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을 밟았다는 그것으로 오는 세상까지 완전히 색칠을 해버려요. 말씀으로 색칠을 하고, 인간은 그 당시 예수님을 공격했던 공격성을 가지고 밀어내는 거죠.

밀어내면서 제가 표현한 것은, 콘드로이친. 관절이 기억하는 약. 몸이 기억하는 불신앙성.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 다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몸이 기억하는 이 기억은, 모든 건 다 용납하되 성경만은 안 된다는 쪽으로. 왜? 성경은 너무 과격하니까.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 책이니까.

그래서 아까 모임 오는 길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게 이 불신앙성을 완화시키는 기관이 교회에요. ‘교회생활 충실히 하는 걸로 내가 하나님 앞에 굉장히 우호적이라는 면면을 하나님께 보여주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와 가정 화목에 있어서 섭섭지 않게 해주실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교회가 인간을 긍정적으로 맞춰주려고 하는지.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는 끝났어요. 한번 복음을 알고 한번 십자가를 알고 타락한 자는 두 번 다시 용서할 제사도 없고 ‘넌 끝났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그 말씀은 부정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안 하지만, 만약에 교회 목사가 교회 부흥을 위해서 게으른 교인을 자극주기 위해 그 말을 했다면 그다음부터 교인들은 잠 못 드는 밤이 돼요.

어떡해?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한번 떨어지면 그걸로 탈락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에. 분명히 창세 전에 구원했다 해놓고는 “너 지난 여름에 범죄 했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내가 안다.” 해버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밀어붙이는 식에 끝난 거예요. 불합격 처리되는 거죠. 이 딜레마.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죠.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하나님의 자체적인 변덕과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그것이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천년 동안 신학자 다 동원해도 안 풀리는 거예요. 풀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이잖아요.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인데 창세기 22장에서 보란 듯이 시험하죠. “아브람을 시험하사” 야고보는 시험하지 않는다며? 시험하지도 않고 시험받지도 않는다면서?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시험했고 그 뒤에도 시험이 계속 나와요.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 했다고요.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는 “스스로 믿음 있는지를 시험하라” 했으니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지휘자가 “이번 프레임에서는 나팔 불지 마세요. 여기는 현악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휘자가 지휘봉을 집어던지면서 “왜 나팔을 안 불어?” 이러는 거예요. “악보에 나팔 없게 되어 있는데, 왜 나팔을 안 부냐고 닦달내십니까?” “내 마음이 바뀌었거든.” 도대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아요, 하나님 쪽에서.

그 재밌는 예가 바로 달란트 비유“(마 25:19, 24-27)에서 나오잖아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악하다.” “제가 두려워서 주신 동전 하나를 숨겼습니다.” “숨기지 말고 그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라도 주잖아.” 악한 종 입장에서는 이거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냐하면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진작 이야기했으면 은행에 갖다 안 줬을까요? 얼른 줬단 말이죠. 왜 내가 모르는 법을, 나중에 나타나서 징벌용으로 내가 모르는 법을 왜 추가시키느냔 말이죠.

나는 시험 쳐서 백점인데, 보니까 빵점이에요. “선생님, 왜 제가 빵점입니까?” “네가 모르는 문제를 내가 냈거든.” 이게 도대체 뭐, 말이야 막걸리야?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모든 사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립니다. 주님이 시험받았던 것, 유혹받았던 것을 벗어났잖아요. 벗어난 그 권능으로, 삼손이 아예 성채를 완전히 뽑아 세우듯이, 주님께서 하신 모든 틀, 윤리, 도덕, 선악체계, 율법을 다 이룬 그것을 그대로 회장님의 일방적인 자기 결정으로 말씀 회사에 취직시키는 거예요.

말씀 회사에 취직시킬 때 그 사원이 해야 될 일은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 그 시험을 똑같이 반복하는 거예요. 그 시험은 ‘내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를 반복하는 업무를 맡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한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자는 다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말씀 회사니까, 회사 이름이 ‘말씀’이에요.)이 그대로 왔을 때,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회상하듯이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굉장히 즐거운 일이죠. ‘내가 바로 몸이 기억하는 불신자다. 구원받으려고 닦달 낸다는 그 자체가 전형적인 악마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그 업무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찬미에요. 하나님을 찬미.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식은 그 방식밖에 없어요. 불신자를 구원시켜놓고 그들로 하여금 불신자의 삶을 반복시키면서 거기서 나오는 감사, 그걸로 하나님께서는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받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두 가지 문제 있죠. 시험하지 말라 해놓고 시험하게 하시는 그 문제와 또 하나는 한번 십자가를 알고 범죄한 자는 두 번 다시 속죄할 길이 없다는 그 말씀이 한꺼번에 해결된 거예요. 이천 년 교회 역사의 난제가 해결된 겁니다. 제가 해결됐다 했지만, 어떻게 해결됐는지 한번 물어볼까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회장님의 권능이 임함으로써 그 안에 해결이 다 된 채 권능이 임해요. “인간이 풀 수 없는 것을 이미 내가 다 풀었다!”하시면서. “그럼 어느 문제에서 우리가 못 풀었습니까?” “그건 네가 해야지, 앞으로.”

인생은 실습, 실습, 실습하는 거예요. 제가 의도적으로 반복했어요. 실습하고 또 실습하는 거예요. 그게 말씀 회사의 직원이 하루 종일 해야 될 일이거든요. 실습을 하는데 결국 이 실습에서 남는 것은 뭐냐? 성실한 주님의 분류작업이에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여러분들이 걱정하죠, 식구들. “엄마는 요새 바쁘다고 안 와요.” 걱정을 막 하죠, 복음을 들어야 될 건데. 주께서 살릴 사람은 언젠가 오겠죠. 그러나 안 온다는 말은, 주의 분류작업에 의하면 일단은 죽은 자에 속하는데 만약에 살린다면 주께서 알아서 “아, 도대체 인생이 해결 안 나네.” 이렇게 하면서 언젠가 복음 찾아오겠죠. 오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만, 뭐 오겠죠.

그러니까 결국 뭡니까? 열심히 지금 뭐만 일하고 계신다? 주님만 일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회사의 직원이다. 지방학교 출신에다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합격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모든 찬미는 주님께 돌리세요. 그게 어제 낮 설교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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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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