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 나온 죄250312
성전에서 나온 죄(열왕기상 8:46-49)
성전에서 나오는 죄
2025년 3월 1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46-49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8:47)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8:48)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8: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는 대전제를 놓고 봤을 때,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더나아가서 죄를 인식하는 것도 죄요,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고 기도하는 것도 죄는 되는 게 아닐까요? 이래도 죄요 저래도 죄라면 굳이 죄 용서해 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성전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의미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출발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본인이 죄인 것을 알 경우에만 죄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돌아옴’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애굽이 살던 히브리인들은 죄를 몰랐습니다. 그저 애굽 나라 안의 히브리인으로서 차별받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애굽당국에 의한 가혹한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는 의식에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 밖의 세상은 하나님에게 ‘적국’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적국의 땅으로 살게 하시는 것은 ‘돌아옴’을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단지 적국 땅에서 사는 게 힘들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찾는 의식’없이 사는 것이 힘들어서 돌아오는 ‘돌아옴’을 성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돌아옴이 불편의 삶을 풍족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없이 사는 삶에서 ‘죄의식을 가득 품은 의식’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적국’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본인들에 있어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열 번씩이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 14:22) 왜 이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발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애굽’을 적국으로 인식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정착이 되면 비로소 죄인식이 율법에 준해서 주어짐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성전)을 주신 겁니다. 이 성전에 나오므로서 다음의 기본적 원칙에 대해서 이해해야 했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자가 없사오니” 결국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오는 자신들의 죄인식에 대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은 ‘범죄치 아니하는 자가’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일상이 이 범죄하는 일상을 드러냄을 받아들이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본인의 생각에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제사를 통해서 성전 바깥의 일상을 지배당하는 겁니다. 이는 참된 죄란 성전 안의 제사를 통해서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성전 안에는 놋제단이 있고 성전 제일 안쪽에서 천사의 문양이 있는 지성소가 있어 서로 일련의 절차를 잇게 하는 공간구조입니다.
놋제단과 지성소까지 나아가는 실체는 ‘뼈가 꺽여져서는 아니되는 제물’입니다. ‘뼈’란 문에 보이는 대상체로서 그 함축된 사물성을 표현하는 겁니다. 즉 ‘뼈’라는 것은 누구라도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동물 제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동물 제물을 ‘꺽어져서는 아니되는 뼈’라고 묘사하므로서 ‘눈에 보이는 형식의 신비’를 창출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2:46에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 9:12) 이미 죽을 것, 굳이 뼈을 꺽거나 아니꺽거나 제사드리는데 별 차이가 없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이 자신들을 ‘뼈의 집합체’로 간주하면서 ‘제물의 뼈’와 특별한 의미 대조를 보이게 됩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시 35:10) “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사 38:13) 반면 의인의 뼈는 꺽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19-20) 이러한 대조가 제공하는 최종 의미는 요한복음 19:32-36에 나옵니다. “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즉 죽음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죽음이 있는 반면에 의를 드러내기 죽음이 따로 있습니다. ‘의를 드러내는 죽음’ 이외의 모든 죽음은 ‘죄를 드러내기 위한 죽음’입니다. 이는 죄인이면서도 죄가 아닌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여기는 것을 ‘죄된 것’으로 드러내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만 나오는 이러한 권능으로 부여받는 자들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본래 자리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 자신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죄 용서의 능력’ 작렬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성전에 없는 ‘적국’에 해당되는 자들은 그냥 내어버려 두십니다.(롬 1:24) 그렇다면 성전이 불타 버린 그 시대에 죄인이 용서받기 위해 어디에 와서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고 여긴 바를 자빠뜨리는 그 사건의 지점, 즉 십자가의 권능이 작렬하는 바로 그 순간을 통해서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만이 주님께서 내어버려두지 않는 성도입니다. 신비로움이 ‘뼈’라는 사물성을 통해서 드러나기에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해 둔 모든 신비로움은 다 떨어져나가는 허상같은 겁니다.
일관되게 육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과 계명을 보내어 늘 우리의 생각을 토막내게 되면 그 토막남을 통해서 반복해서 근원적인 성전제사와 자신과의 관계성이 유지되게 됩니다. 이 작업 또한 주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대로 사는 삶을 통해서 십자가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