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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41227b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사무엘하

광주강의20241227b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기독교와 허상』 p.147 위에서 4번째 줄에 보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마귀에게 너무 관대한 것이다.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변명의 꼬리표를 달아 준다. 습관처럼 반복한다. 실수는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면서 철저하게 숨죽이며 사는 방식에 몸을 맡긴다.]

여기에 보면 ‘마귀에게 너무 관대하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게 인간한테는 참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죠. 영적 존재니까.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를 무슨 존재로 봤습니까? 영적 존재로 봤어요. 존재하면서 부재하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상태. 마치 천사와 같은 거예요.

천사와 같다 하면 사람들은 자꾸 형태, 형체, 눈에 보이는 그것으로 천사 흉내 내려고 하고 그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구약에서는 천사의 모습이 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요. 천사의 기능, 천사가 하는 할 일, 역할, 여기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어요.

천사가 하는 일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심판, 사랑 둘 다 전달하거나 실행하는 자’. 아까 유월절 했죠. 유월절 그때 누가 죽입니까? 천사가 와서 죽이죠.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과 다른, 다른 세계에 소속된 신분자이죠. 신분자가 하는 일은 심판과 사랑을 다 합니다.

사랑 같은 경우에 가브리엘. 또는 삼손 아버지 마누아 가정에 찾아온 것. 천사가 되게 바빠요.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천사,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 상당히 뭔가 쉬지 않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이 천사의 기능과 할 일을 신약에서는 누구도 해야 된다? 바로 성도. 영적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같은 영적 존재이고 같은 나라 존재잖아요. 그래서 같은 일을 부여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서 이미 인간 속에 오류가 있어요. 오류가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전혀 모르고 육적인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육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뭔가 내 육적으로 관리가 안 되고 통제가 안 되는 게 있다 했죠. 그걸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욕망. 욕망의 대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은 어떤 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신이 되는 것. 그런데 그 자체가 모순된다 했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신이 되면 되는데, 그걸 ‘나는 독립적이다. 자율적이다.’ 교도소 갇혀가지고 외친 인물이 있어요. 실제 인물은 아니고 소설에 나온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이 바로 카뮈가 쓴 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엄마 죽이고 난 뒤에 자기는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중에 창틈의 별을 보면서 ‘그래. 나는 자유자야.’ 그런데 이 자유자가 되기 위해서 부조리가 뭡니까? 갇혀야 비로소 자유를 아는 이 부조리.

쉽게 말해서 해답을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도대체. 왜 인간이 이 지경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세상에 살면 자유가 없고, 세상에서 일 저지르고 교도소 가게 되면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별의 처량한 신세나 내 신세가 동일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처량한 신세가 비로소 내가 얻고자 했던 자유 같은 게 아닌가, 욕망의 대상이 드디어 멈춘 게 아닌가 라고 소설책에서만 그렇게 이야기해요. 소설로만. 너 한번 갇혀보지. 그게 자유인지. “나가기 싫어?” “나가고 싶어.” 이럴 건데요.

인간의 욕망은 도대체 인간이 파악 안돼요. 괴물 같은 거라서 인간 자체로서는 파악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구약에서 천사가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구약 이스라엘에게 뭘 줬습니까? 아까 말씀을 줬다 했죠. 말씀을 주게 되면 말씀으로 인하여 말씀 안과 말씀 밖이 발생되는 거예요. 말씀 밖은 뭐냐? 참혹한 저주와 심판이 있고, 말씀 안에는 사랑이 있죠.

자, 사랑은 뭐라 했어요?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했죠.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행동에 준해서 사랑을 할까, 말까가 성립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났어야 뭘 하든지 하는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원칙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게 되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사랑을 가리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천사가 부지런히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밖에 없죠. 결국 심판해주는 것이 사랑 작업이다. 이 작업을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하는 거예요.

그 언약이 이제는 이스라엘 내부에 스며들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사랑의 열매라는 것이 증명될 테니까요. 이스라엘 백성에 스며드는 예를 지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사무엘하 4장 4절,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므비보셋이라는 이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까 프로이트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이 자기가 결정한 겁니까? 자기 의지로 절기로 선택한 거예요? 선택하거나 결정한 건 없어요. 유모가 자기를 안고 있다가 떨어뜨렸단 말이죠. 황급해서. 다리 하나라도 좀 멀쩡하면 좋겠는데 둘 다 다 절어요. 둘 다. 한쪽은 절고 한쪽은 괜찮은 게 아니라 둘 다 절게 된 장애자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출발부터가 어때요? 타인 의존적이에요.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 언약, 언약 안에 뭐가 들었다 했습니까? 심판도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죠. 사랑. 요나단과 다윗이 언약을 맺어서 ‘네 집안의 사람 내가 언약 맺어서 사랑해줄게.’하고 언약 맺은 게 있어요. 그 언약 맺어서 므비보셋에 대해서 나중에 다윗이 그만한 여력이 될 때에 철저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잘 보살펴주었거든요.

사무엘하 9장에 그 이야기가 나와요. 나오는데 우리가 9장 8절을 주목해봐야 돼요. 앞에는 다윗이 ‘도와줄게.’라고 하면서 잘 대해주죠. 7절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그래서 므비보셋이 비록 요나단의 아들이지만 다윗이 자기 아들로 여겨서 왕자들과 같은 상에서 먹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그때 8절에 보면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그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9절에 “왕이 사울의 사환 시바를 불러서 이르되 사울과 그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저를 위하여 밭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니라”라고 하고

11절에 “시바가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온갖 일을 종에게 명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라고 했단 말이죠. 13절에 “그(므비보셋)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언약 안에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므비보셋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서 이 존재가 어떻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 입장에서 남들과 비교해서 저주받은 모습 아닙니까? 내가 선택하지도 않게 내 신체가 다섯 살 때부터 철저하게 불구가 되었고 두 발 다 저니까 내가 나서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내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계획 자체가 좌절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므비보셋이라면 이 원망을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하겠어요? 이 원망을 상식적 입장에서는 하나님한테 해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조져놨다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헤겔에 의하면 하나님과 나는 무슨 관계? 라이벌 관계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방해했기 때문에 내가 신을 미워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으로서 당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야 돼요.

그런데 아까 우리가 본 것처럼 사무엘하 9장 8절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참에 밥이나 먹고 살려고 ‘권력은 다윗한테 있으니까 잘 보이면 나는 이미 불구자니까 내 힘으로 못 사니까 한번 빌어먹고 기대서 한번 살아봐?’라는 정책적인, 정략적인, 정치적인 어떤 결정을 자기가 내린다면 이건 죽은 개입니까? 아니죠. 죽은 개가 아니죠.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어떤 조치든 나는 그냥 받겠나이다.’라고 한다면 므비보셋에게는 신이 라이벌이 돼요, 안돼요? 신은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 종속된 겁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 또는 다윗을 통해서 어떤 일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그것만 기다리면 되죠. 그렇겠죠?

그런데 그 일이 아주 참담하니이다. 참담한 일이 있어요. 사무엘하 19장에 보게 되면 19장 24절,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아, 이게 장애자라고 다 이런 마음가짐입니까?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어떤 조치든 나를 이미 죽은 개처럼 여길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이런 므비보셋의 존재는 언약이 품고 있는 사랑 있잖아요, 그 사랑 속에 있다는 말은 남들 보기에 혹독한 인생이라는, 남들 보기에 이건 저주를 받아도 엄청난 저주를 받았다는 그러한 상황이 뒤집어씌워진 가운데서도 사랑은 조금도 죽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계속 보면 19장 25절,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26절,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여기서 므비보셋과 정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자가 등장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시바에요. 시바. 하여튼 이름도 시반데 시바는 정략적입니다. 계산적이에요. 자기 주인은 장애인이고 자기 주인이 왕에게 보훈 대상이 되어서 막대한 수익이 들어오니까, 이참에 장애인 주인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시바는 자기가 빼돌릴 생각을 한 거예요. 그야말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20년 식모살이하면서 독약 먹여가지고 치매 걸린 주인 죽이고 주인 재산을 자기 앞으로 이름 등기한 것, 사랑과 전쟁2에 나오는 그 이야기.

그런데 ‘더 참담하니이다’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이렇게 하니까 다윗이 시바한테 화를 내고 “이 못된 것” 이렇게 해야 ‘드라마를 끝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게 성립되는데,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래야 유종의 미를 거두는데, 이게 아니고 다윗은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누구 말이 맞는지.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를 땐 어떻게 합니까? 여기 쪼개기 또 나와요. 솔로몬 재판할 때 애를 쪼개라 한 것이 솔로몬의 영특한 재판 아닙니까. 영특한 재판. 쪼개버려. “쪼갬에 동의하는 사람? 동의 안하는 사람? 쪼개버려.” 하는 것처럼 여기 29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윗 왕이 전번에 시바 말만 듣고 “그 못돼먹은 므비보셋. 세상에, 은혜를 줬음에도 이제는 자기가 권리인 줄 아는 모양이다.” 이래가지고 심히 화를 내었던 다윗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다윗은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긍정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계엄은 계엄이다. 통치적 행위다, 통치적 행위. 그럼 끝나는 거예요. 전~혀. 그거 반성할 마음 전혀 없어요. 남자가 술 먹고 내린 판정인데 술 먹고 내린 그것이 얼마나 정당합니까. 다윗이 똑같아요. 뭐 상황 전후를 알아볼 생각을 안 하고 알아보는 게 아니고 무엇이 진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왕의 권위가 더 중요해요. 솔로몬도 마찬가지에요. 쪼개라. CCTV가 있습니까. DNA 조사하면 금방 나올 걸, 그 시대에 DNA 조사가 되었습니까. 그냥 깨끗하게 쪼개라. 얼마나 무책임한지. “나는 모르겠고.” 이 말이거든요.

“그래, 시바와 밭을 나누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다음이 문제에요, 이제. 그렇게 되면 “나 드라마 안 본다.” 이렇게 되는데 그다음에 드라마 아닌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30절에 야, 이런 구절이 있다니. 우리는 그동안 성경을 너무 얕본 게 아닙니까?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야, 이거 뭡니까? 이게 뭐에요? 이게 아까 빨간 걸로 쓴 ‘천사’ 기능입니다. 천사 기능 다시 이야기합니다. 존재하나 부재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부재하나 존재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존재하려면 이 땅에서의 존재는 반드시 소유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있어야 돼요. 내 것이라는 말은 재산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집. 내 것이 있을 때나 비로소 우리는 동의할 수가 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내가 수긍이 되고 내가 증명이 돼요.

그러면 내 것이 있으면 내 것 안에서 내 것이라는 아지트 안에서는 내가 뭐가 됩니까? 신이 됩니다. 절대자가 돼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 바깥에는 뭐가 있느냐? 각자의 아지트가 있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벙커들이 말씀 바깥의 세계에 있어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한테 제가 묻죠. “혹시 어제쯤 말씀이 우리 집사님 내부에서 팍 터져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내 재산은 시바가 다 가져가고 나는 그냥 주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분노와 사랑이 섞인 말씀이 팝콘 터지듯이 터졌습니까?” 물으면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러면 한 2년 전에도?” “2년? 10년 내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 12년 전에 있었습니까?” “12년 전에 기도원에서 울면서 한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이 나를 장악해서 말씀 안에 있다면 나는 움직이지 않아요. 말씀이 언약대로 움직여서 우리가 거기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그런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죠. 불가능한데 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나는 너한테 일체 책임 묻지 않고 용납하겠다는 그 사랑이, 말씀에 의한 저주와 심판과 그리고 진노를 퍼붓고 난 뒤에 그 안에 사랑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30절에 보면, 임금이 다시 온다면 제게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꽂힌 것은 다윗언약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로 이미 기름 부은 다윗 임금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 존재를 대체하는 겁니다. 대신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 때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걸 저는 천사 기능으로 보는 거예요. 천사 기능. 악마 빼놓고. 천사 기능인데 천사 기능을 언급한 이유가 이 천사 기능과 정반대의 천사가 누굽니까? 악마잖아요. 그 악마가 지금 누구를 인질로 잡고 있습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요. 인간 내부에 선악 지식을 심어놔가지고.

그래서 악마는 존재하지만 부재해요. 존재하는 것은 뭐만 존재해요? 그냥 악마의 앞잡이 인간들만 존재해요. 우리들도 포함해서 인간들만 존재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네 속에 있는 악마의 그 영적 존재를 주님께서는 겨냥하시고 일차적으로 말씀으로 뭘 공격합니까? 모든 말씀으로 우리를 진노하고 우리를 분노하고 저주하고 심판하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저는 ‘말씀이 내부적으로 터졌습니까?’ 하는 거예요.

뭐 사기당해서 돈 한 2만원 떼였다. 한 달에 천 억 버는 사람한테 2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2만 5천원 일당 받는데 2만원 떼이면 보통 아픈 게 아니죠. 2만원 떼였다. 나 고만 살래. 왜 그만 산다고 생각합니까? 2만원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재료잖아요. 그런데 2만원 재산이 날아갔잖아요. 그러면 누가 누구한테 신용을 줄 수 없습니까? 내가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굳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죠. 내가 나를 못 믿으니까 살 가치가 없죠.

그런데 그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디모데전서 6장 말씀이 온다면, ‘아차. 내가 영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내가 나를 다룬다는 생각으로 또 여기에 머물러 있었군요.’라는 생각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뭐 성령 받아야 올라오지, 안 받은 사람은 올라오지도 않아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제가 수천, 수만 차례 했는데 그때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죠. 하나님이 만든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고 ‘나 이제부터 하나님하고 안 놀아.’ 우리가 하나님을 배척하고 싶은 악마의 충동이 또다시 우리에게 욱하고 올라오게 되어 있단 말이죠. ‘주께서 이렇게 나를 만들 것 같으면 나 하나님한테 너무 실망했어요. 나 하나님 못 믿겠어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므비보셋이 어릴 때 두 다리 다 절뚝발이 되었는데 자기가 잘못해서 실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엄마, 아빠 말 안 들어서 그런 거예요? 유모가 안고 그렇게 만든 거예요. 모세의 유모는 모세를 살리고, 므비보셋 유모는 므비보셋 다리를 아주 절단나게 만들고.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적 세계, 영적 존재에서는 그것이 자기가 맡은 기능이고 역할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께 대적할 수 있는 이유가 돼요, 안 돼요? 이유가 안 되죠.

하나님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죠.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하나님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진다고요. 그런데 주님은 이걸 영적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영적 모습.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배후에 있으니까 영적 모습을 겨냥해서 뭐가 날아오죠? 말씀이 옵니다.

말씀에 뭐가 실렸다 했습니까? 말씀에 실린 것은 예수님 혹은 하나님의 분노가 실려 있죠. “네가 나를 배척해? 내가 너를 배척하는 거야. 내가 너를 밀어내는 거야. 천국 오지 말라고.” 밀어냈단 말이죠. 주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를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하게 되면 이것으로 말씀 밖의 세계가 형성돼요.

이것은 성경을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8장,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상에서 상세하게 이 말씀보다 더 적절한 말씀은 없다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나라)이 아니라”

나라가 두 개 있죠? 예수님 나라 있고, 예수님 바깥에 나라 있죠. 예수님 바깥에 나라,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예수님께 속한 나라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까? 예수님께 속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두 개의 나라가 별개다 이 말입니다. 따로 있다고요. 따로.

그 따로를 결정하는 것은 뭐냐? 언약, 말씀으로 결정했잖아요. 언약 밖에, 말씀 밖에 나라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그거는 누구한테 내어준 거예요? 마귀한테 내어준 거예요. 마귀한테 내어준 이 세상에 대해서 거기서 ‘안타깝다’, ‘미련하다’ 뭐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보고 책망하시는 거예요. 남의 나라에 왜 그리 신경을 쓰냔 말이죠.

여러분, 하마스에 신경을 씁니까? ‘아휴, 우리 하마스에도 지도자가 있어야 되는데. 다 부서졌어. 지하 터널 박살났어. 아이고, 우짜지? 우짜지?’ 아프리카에 우물 물 안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아프리카에 우물 안 나오면 재산 바쳐서 도와야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까? 여유 있을 때나 한 만원씩 전화로 내줄 수는 있는데 그것 때문에 막 ‘나는 아프리카 우물 안 나오면 죽을 거야.’ 이런 사람 있습니까?

대한민국 사람은 자기 나라가 있기 때문에 남의 나라는 오락이죠. 이거는 하나의 재밌는 게임벌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군 죽잖아요. 죽을 때, 걔 왜 죽어요? 그거 부모 잘못 만났죠. 부모가 공산당이어서 가잖아요. 그런데 그 애 죽을 때 그렇게 가슴 아파요? 마치 내 애 죽은 것처럼? 안 그렇잖아요. 남의 나라란 말이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부재로 존재케 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네가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배척하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난 거예요.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러면 목사님, 우리나라는 어떤 나란데요?”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 분노하기 위한 나라에요. 예수님이 분노한 것처럼 같이 분노하라고 주신 나라에요. 그 나라를 허락했습니다.

그 나라가 히브리서 10장 27- 29절에 나옵니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한번 보세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이 하마스야!

이게 하마스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마스 같은 나라가 뭐냐? 이 세상 220개국의 모든 나라가 하마스 같은 나라잖아요. 누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보기에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뭘 믿고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임금 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그걸 지금 상기시키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해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밟혔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백성이 아닌, 마귀에 속한 마귀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조롱받고 멸시당하고 천대받으면서 결국은 목숨까지 잃었다 이 말이거든요. 바로 그 이야기가 아까 교재 p.147 위에서 4번째 줄, [인간들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마귀에게 너무 관대한 것이다.]

좋은 대통령이 나타나면 좋겠다. 태극기 휘날리면서 광화문에 천만 명 모였다는데. 도대체 난 못 믿겠어. 천만 명이 거기에 모일 장소가 아니에요, 광화문이. 답답하네. 우리나라 1/5이 갔다는데 1/5 갔어요? 미국이 살리고 태극기가 살리고 하는 겁니까? 그거하려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으로 죽었어요? 주께서 그것 때문에 십자가 죽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 모든 원인이 아까 요한복음 18장 그런 말씀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29절 그런 말씀이 우리 안에 팝콘처럼 안 터져서 그래요. 안 터져서. 그럼 왜 안 터졌는가? 말씀을 안 들었는가? 들었어요. 설교 다 들었어요. 왜 안 터지는가? 나의 욕망, 영적 욕망이 나로 하여금 ‘너 신이잖아. 너 하나님이잖아. 너 자율적 존재잖아. 네 결정, 네 판단이 네 미래를 결정하잖아. 네 자부심, 자긍심을 네가 붙들고 있어야지. 네가 남들보다 못해서 되겠어? 너 장애자 돼야 되겠어? 그래야 속이 시원하겠어?’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내가 건강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요.

오늘 강의 내용은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오게 되면 나의 뭐가 발견된다? 내가 손 댈 수 없는 근원인 오류가 파악되는 거예요.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말씀의 능력. 쉽게 얘기해서, 말씀이 나보고 이야기해요. “너 천사잖아. 너 이 소속이 아니잖아. 네 소속을 분간 못하고 왜 자꾸 혼동해? 이 소속 아니잖아. 너는 하늘나라 소속이잖아.”

네 생명은 하늘에 있다고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죠.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뭡니까? 네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고? 까봐. 주민등록증 까보라고. 까보니까 하늘나라 팔공로 91번지…. 주민등록이 하늘나라 소속으로 되어 있어요. 소속이 하늘나라란 말이죠. 사랑의 소속이에요. 어떤 것을 해도 용납해준다는 겁니다. 용납해주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주께서 무한 책망을 해도 너는 기뻐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을 용납했기 때문에. 용서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우리가 다시금 봐야 돼요.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한번 검토해보겠습니다.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아까 했던 그림 다시 한번 그리면서. 이 그림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7)라는 책에 나오는 그림입니다(p.197). 그 사람이 이 주장을 했다는 게 아니고 내가 이 그림을 따온 겁니다.

인간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악과 선으로 되어 있죠. 그런데 여기 악과 선을 걸쳐서 대각선으로 오신 분이 있다 했죠. 대각선으로 오신 분이 있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같이 선인데 악으로 걸친 분이에요. 이걸 오려보라 했죠. 오려서 따로 떼어내면 종이1은 공백, 빈자리가 되죠. 예수님이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해버리는 겁니다.

이 자리, 예수님의 구멍 난 이 자리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부에 심었어요. 말씀으로 심겨놔 버렸어요. 심겨놓는 방법은 우리의 육신을 저주함으로써 이것이 심어지면 이게 사랑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 이 자체를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따라 이 땅에 존재하지만 부재한 존재가 되죠.

이걸 구약에서 보여주는 게 에스더, 에스라, 그다음에 느헤미야. 그래서 이렇게 설명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에스라 10장 3절, 구약성경 p.724입니다. 에스라 10장 3절에 보면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의 특징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살던 사람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성전을 지을 권한이 있느냐 하면 바벨론 포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에게만 성전 지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이 에스라, 느헤미야의 공통점입니다.

그럼 바벨론에 간 사람이 전체 인구의 10%밖에 안돼요. 그럼 나머지는 어디 갔느냐? 나머지는 다 흩어졌어요. 흩어지고 어중이떠중이, 바벨론 군대 입장에서 봐도 이건 뭐 사람 같지도 않다는 것만 남겨놨다는 거예요. 바벨론 군대가 보기에도. 느부갓네살이 보기에도. 괜찮은 인간 수준 된다 싶으면 다 가져갔어요. 어떻게 쓸모짝 있다 싶으면 다 가져간 거예요. 버려놓나 안 버리나 우리한테 전혀 보탬이 안 된다 하는 존재는 다 남겨둔 거예요. 그것도 몇 % 되지 않아요. 황폐하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농사지으면서 빈 터니까 이방인들도 살 거 아닙니까. 토지는 황폐했지만 또 개간하면 되니까. 그때 누가 오겠어요?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이방여인하고 혼인했겠죠. 그 이방여인하고 결혼한 사람들이에요. 50년 뒤에 에스라 왔고 거기서 좀 더 뒤에 느헤미야 왔고. 와서 같이 또 협력해서 성전 재건하는 데에 힘을 합치고 율법을 또다시 적용합니다.

그런데 그 해당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바벨론에 포로 잡힌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대로 돌아가자.’ 뭡니까?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원래대로. 순혈주의라 하죠. 아브라함의 혈통, 혼혈 없이 가자.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남자들 다 모아놓고, 여자하고 그 자식들 양육권 여자한테 줘서 다 찢어져. 다 갈라 서.

그리고 10장 8절,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한다. 며칠요? 며칠? 3일. 그때 택시 있었습니까? 대리 불러야 돼요? 버스 있었어요? ktx 있었습니까? 어지간하면 3일 내에 오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3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어떻게 된다? 모든 재산은 몰수한다.

이거는 에스라, 느헤미야 보기에 이 땅에 다시 나라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토지나 재산은 있어야 된다. 이건 강탈한 거예요. 누구한테? 잡족들에 해당되는 그 사람들에게 다 강탈한 거예요. 그러면 잡족들이 성전 짓는 취지를 알았죠? 성전만 짓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재산 뺏겠다는 뜻이죠. 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대들겠습니까? 대들죠. 대들 때 에스라,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심히 통곡하고 마음에 작심을 하면서 ‘저 적들을 주께서 쳐부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나라 되었어요? 성전 유지되었습니까? 성전 다 부서졌죠. 부서졌다고 느헤미야 왔지만 어떻게 됐어요? 또 부서졌죠. 또 부서졌어요. 이 에스라의 주장과 말라기의 주장은 다릅니다. 말라기에 보면 결혼했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럼 에스더는 뭐냐? 에스더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먼저 옵니다. 하만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어떻게 해요? 유대인이라는 유대인은 모조리 다 죽이고 재산은 모조리 다 빼앗는 거예요. 씨를 말리는 거예요. 이거 누가 허락했어요? 하나님이 허락했죠.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자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천사와 마찬가지로. 인간 육신의 수준에서 천사로 전환되려면 소위 내 존재함을 확정해줄 그 어떤 건덕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몽땅 다 날아가 버려야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돼요? 그래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새삼스럽게 박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현재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안 터지는 이유가 너무나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내가 잘났고 가치 있고 나는 뭐든지 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장할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 하나의 벙커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경은 많이 알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랑이지, 주님 주신 사랑은 아닙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거에요.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말씀이. 그런데 우리는 자꾸 혼동해서 과거의 내가 말씀 덕분에 계속 지금 이 내가 기어이 살아있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모델 되시는 예수님의 존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말씀으로 언약으로 죽고 언약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고 살아나려는 거예요. 언약이 심겨진 상태에서 언약 때문에 성령 때문에 살아나야 되는데 말씀은 없고 그냥 좀 살려 주이소,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철저히 너를 밀어낸다, 배척한다는 이 취지, 하나님의 분노의 취지가 없어요. 그 취지가 없는 것은 말씀의 적용이 아니죠. 적용이 아닙니다.

내가 그럼 절뚝발이가 될까요? 그럼 재산을 다 드릴까요? 해봐도 소용없어요. 문제는 므비보셋이 죽은 개 같다고 자기를 표현했다는 거예요. 죽은 개 같은, 어떻게 저 같은 걸 다 돌보십니까? 이게 바로 말씀 안에 언약 안에 들어있어서 일체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사로 사용하는 거예요.

다윗이 절뚝발이였습니까? 아니죠. 다윗은 다윗 천사의 방식이 따로 있어요. 다윗도 죽을 뻔 많이 했어요. 창이 막 날아오고 피하고 다윗도 한두 번 죽을 뻔한 게 아닙니다. 므비보셋은 장애자니까 다윗만큼 그만큼 적들이 좀 적다 뿐이에요. 다윗이나 므비보셋이나 둘 다 천사에게 해당되는 기능들이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고, 그다음에 오늘날 누구한테? 감히 표현합니다, 감히 누구한테? 우리한테. 감이 안와요? 그럼 여기 광주모임. 감히 우리에게 그 기능이 주어졌습니다.

끝으로 어떤 기능이 있는가? 요한계시록 14장 18절, 천사의 기능이에요. 천사의 기능은 요한계시록 6장, 7장, 8장 여러분 다 아시죠. 천사의 기능 중에서 18절-20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아주 날카로운)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밟히죠. 밟힙니다. 분명히 밟혔어요. 틀에서 밟히니까 뭐가 터져 나와요? 그 본질이 찢어지면서 튀어나오겠죠. 그래서 그 죄가 일천육백 스타디온, 이 세상을 정방형으로 표현할 때 치수입니다, 이 세상에 퍼졌죠.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더라”

이것이 천사의 기능이라면 오늘날 성도의 기능이 그대로 주어졌는데 성도는 그럼 이걸 어떻게 합니까? 칼 들고 다닐까요? 아니에요. 칼보다 더 날카로운 칼이 무슨 칼이죠? 바로 말씀의 칼날. 말씀이 나부터 먼저 베였으니까. 말씀이 나를 베었으니까. 나를 작살냈으니까. 너 이미 부재해. 너는 죽은 존재야. 너는 죽은 개라 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세상에 대해서 외치시면 여러분들이 천사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사는지 왜 발언을 하고 말을 하는지 왜 내가 결정을 하는지 다 주님 위해서 하는지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함인지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여지없이 들통 나서 깨어지게 해주시고 우리 것을 빼내시고 그 안에다가 말씀이라는 엔진으로 바꿔주시는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강의 중 언급된 도표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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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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