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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41227a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사무엘하

광주강의20241227a 사무엘하 9장 8절(언약으로 교체)-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 교재 p.143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고요. 정작 p.146 이 점에 대해 치중하겠습니다.

충격적인 일이라는 게 p.145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버리고 왔다. 끝나나?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은 이 두 자로 다 정리가 돼요. ‘교체’. 뒤에 뭐 붙는다면 교체 (작업). 나에게서 나 빼고, 뺀 빈자리에 언약 집어넣고. 이 작업이 교체 작업입니다. 나에게서 나를 뺀다는 것. 나 빼기 나는 수학에서 0이죠. 나-나=0. 나 전체가 나에게서 다 빠져나가야 돼요. 나 전체가. 나에서 나가 빠져나가면 이게 0이 아닌가 하는데 0이 아니에요. 0보다 더 큰 것 또는 더 넓은 것. 더 넓은 것이라는 게 낫겠네요.

나라는 것이 눈에 보이잖아요. 내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내가 걸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로 인하여 가리워지고 방해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곧 언약이 보이는 나로 인하여 가리워졌으니까 이걸 이제 빼는 겁니다. 이걸 빼버리면 내가 깔고 앉아서 그동안 나만 느껴졌는데 내 배후에 있는 그러한 말씀세계가 이제는 주께서 나를 나에게서 좀 치워라 해서 빼주니까 비로소 언약세계, 말씀세계가 보이는 겁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릴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 보시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이제 힘들게 되었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추방되었고요. 생명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철두철미한, 철저한 배척이에요. 철저하게 배척하는 거예요. 들어오지 마세요. 철저하게 하나님이 인간을 밀어내는 겁니다.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철저한 배척이죠.

철저한 배척인데 마귀는 반대로 ‘죽어서 좋은 데 가야지.’하고 자꾸 뒤에서 밀어내요. 그러니까 인간은 양쪽에 끼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도 안 보이고 마귀도 안 보이니까 인간에게는 뭔가 여망, 기대, 소망 같은 것이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고 저절로 이렇게 생겨나는 겁니다. 저절로 소망 같은 것이 생겨나거든요.

철두철미한 배척을 하니까 이 배척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인간은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내 소망대로 움직이겠다.’ 하는 거거든요. 소망대로 움직일 때 그 출발점이 뭐냐 하면 선악입니다. 선악체계. 네모를 반으로 나눠 한쪽을 시커멓게 그리면 이걸 악이라 하고 하얀 쪽은 선이라 합시다. 인간은 선과 악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느냐 하면 이렇게 왔어요. 선과 악에 걸쳐서 대각선으로 이렇게 와버렸다고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어디에 걸쳐 있습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이니까 악에도 걸쳐있고, 육신은.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어디에 걸쳐 있어요? 선에 걸쳐 있잖아요.

걸쳐 있을 때 예수님 자신이 악과 선 양쪽에 다 걸쳐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 대각선 양쪽으로 걸쳐 있는 이 대목을 오려서 따로 떼어 내버렸어요. 떼어 내버리면 원래 있던 큰 네모(선악)에서 이 대각선 지점이 뭐가 되겠어요? 공백이 되겠죠. 공백이. 그렇죠? 종이가지고 중간에 떼내면 공백이 된다고요.

공백이 되어 버린 큰 종이를 ‘종이1’이라 하면 오려서 나온 것은 ‘종이2’죠. 예수님은 그 실체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인간의 육신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같은 종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인자(人子),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했어요. 사람의 육신이 나 주님의 재료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종이2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주(主)가 될 수 없어요.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잖아요. 이름인데 이 땅에 와서 사람의 육신을 적셔서 인간 속에 있다가 그다음에 인간과 완전히 무관하게 떨어져 나가죠. 인간과 떨어져 나가요. 떨어져 나가서 따로 단독적으로 오려진 이 세계, 인자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게 되면 인자의 세계가 완성되고 이것이 아들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철저히 배척받아야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 인간은 갈 수가 없죠. 왜? 배척한 분이 따로 나가서 만든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에 배척했다는 그 일을 함유한 채 만들어지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걸 저는 ‘철두철미한 배척’, ‘철저한 배척’이라 한 거예요. 생명나무 오지 말라고 철두철미하게 가로막았던 하나님의 취지가 천국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천국에 살아있는 거예요.

이 작업을 통해서 p.146 제목 나오죠. 예수님께서 분노 또는 예수님의 진노하심, 예수님의 화내심 그것은 바로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생명나무 오지 말라고 배척했던 그 뜻이고, 그 뜻이 지상에 펼쳐지니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거예요.

아까 봤던 p.145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뭐가 될 수 없다?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인간을 나는 기어이 거부하고 밀어내고 배척하겠다는 뜻이에요.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인간을.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분노하는 자, 자신이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인식을 하는 자만이 예수님이 만드신 천국을 이해하고 천국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떨어져 나옴으로써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악기준, 악마가 심어준 선악기준의 세계에서는 천국하고 만나는 게 전혀 없죠. 만날 수가 없죠.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이 도표를 여러분들이 이제 이해하셨죠.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데, 인간의 선악에서 이렇게 도려내셔서 예수님이 오셨다가 홀로 따로 빠져나가서 홀로 만든 나라가 천국이라면 이것은 인간이… 인간이라 하면 유대인이 대표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이 뭘 줬습니까? 말씀을 줬잖아요. 언약이라는 것, 모세 율법이라는 언약도 줬다 이 말이죠. 언약을 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공백을 남긴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공백은 꽉 채워야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공백은 꽉 채워야 된다고 생각한 거죠.

공백은 남겨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빈자리가 있다면 우리의 의가 마저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가려면 비어있는 자리까지 우리의 의로움으로 채워야 된다. 그러면 그걸 근거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마귀 들려가지고 성전에 입각해서 말씀에 입각하여 그들은 이것을 ‘옳다.’ 또는 ‘진리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에 입각해서 옳다, 진리다 했는데 이방인들은 이 말씀을 없애버렸어요. 말씀을 없애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말했듯이 나가 나에게서 빠진다 했잖아요. ‘나’에서 빼기가 아니고 더하기를 하는 거예요. 지식으로. 더하기를 했을 때 나는 뭐가 남을까, 이걸 이방인들이 생각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나’가 있고 여기에 플러스 율법, 율법을 더해서 자기는 천국백성이 된다는 공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나+율법=천국백성. 나에다 율법대로 실천에 옮기면 천국백성 된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율법을 인정하지 않아요. 왜 인정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율법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완전한 이성, 완전한 성스러움, 완전한 아름다움, 진선미, 완전한 진리성, 진리성이 이성이니까, 선함, 진선미, 내 속에 완전한 그것을 가지고 내가 계속 개발해버리면 무엇이 될까? 그것을 인간을 대표하는 서양철학에서 오랫동안 줄곧 해왔어요. 처음에 신학에 그걸 덧붙였고 그다음에는 과학으로 그걸 덧붙여서 보다 공백이 남지 않고 빈자리가 남지 않도록 인간이 아는 것으로 꽉꽉 채웠을 때 과연 인간은 어느 레벨까지 어느 수준까지 오를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 점을 먼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한 지성, 완전한 감성. 완전한 감성은 예술이겠죠. 완전한 지성은 과학이나 철학이 되겠고 또는 신학이 되겠죠. 이걸 쭉 서양에서 했는데 제가 서양 철학자 가운데 세 사람을 언급하겠습니다. 한 사람은 프로이트, 한 사람은 헤겔, 한 사람은 들뢰즈. 이 세 사람을 제가 거론해볼게요. 들뢰즈 또는 같은 부류로 라캉. 이렇게 하면 네 사람 되겠죠.

프로이트는 이걸 봤어요. 인간 욕망의 대상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뭐냐? 인간에게 욕망의 대상이 뭐냐를 이 사람이 연구하다가 그 사람이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욕망의 대상이 뭔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거예요.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요.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유아기, 아빠 엄마가 있을 때 유아기의 상황이 인간의 욕망을 만든다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욕망을 만들면서 욕망의 대상은 뭐냐? 아버지의 훈계. 이 아버지의 훈계를 프로이트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내가 본받아야 될 내 자아, 내가 본받아야 될 절대적 대상, 초자아라고 이야기했고 이 초자아는 아버지의 훈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렇게 본 거예요.

프로이트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어릴 적 상황에 대한 미흡함, 그 미흡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 가정상황에 대한 복수.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가족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가족이. 가족이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죠.

왜 사람마다 다른가? 그쪽이 태어날 때 그쪽 가족상황이 그 사람을 그런 식의 인간으로 만들었고 내 쪽 상황은 내 식대로 만들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습니까? 장로님 어릴 때 어떤 상황이 장로님 되게 만들었어요? 문제점이 있어요. 문제점은 뭐냐? 각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가 아니라 열 명이 있으면 열 명 다 다르다. 왜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가정환경이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죠. 자신의 과거가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팔 휘두르기로 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이걸 흔히 말해서 다양성이라 해요. 인간은 자기 욕망이 있다. 자기가 문신을 하든 말든 담배를 피우든 동성애를 하든, 이건 내 마음대로다. 너는 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되잖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왜 시집을 안 가느냐? 가든 말든 내 인생이다. 장가를 왜 안 가? 가든 말든. 장가를 꼭 외국 여자랑? 외국 여자랑 하든 말든 내 취향인데 부모라고 간섭하지 마세요.

유아기의 상황인데 라캉은 이걸 받아서 뭐를 발견했느냐 하면 ‘욕망의 대상은 없다’가 되어버려요. 왜 ‘없다’가 되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는데 이 아버지가 허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허상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 때문에 이렇다’ 이걸 라캉은 ‘상징에 불과하다’ 한 거예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은 허구다 이 말이죠. 허구인데 아무것도 없는 허구라 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건 중요하니까 빨간 걸로 쓸게요, 라캉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욕망의 대상은 뭐냐? 결핍이에요. 뭔가 빠져있는데 뭐가 빠졌는지 본인도 몰라요. 뭘 채워야 될지 본인도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냥 목말라. 목말라요.

한대수라는 나이 70넘은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있었어요. ‘물 좀 주소’. 옛날 한창 운동권 노래할 때, 물 좀 주소~ 시대가 정치 상황이 안 맞으니까 갈증을 느껴서 목마르다. 물 좀 달라는 거예요. 목마른 광야에서, 그런 운동권 노래 많이 있지 않습니까. 결핍한 것을 정치권에서 채워줘야 정치 본연의 임무를 다 하는 게 아니냐 그겁니다.

그럼 얼마나 채워야 돼요? 물 한 바케스? 한 탱크? 라캉은 계속 연구해보니까 욕망의 대상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상징이라는 말은 그냥 그림으로만 장식되어있고, 그림은 실제가 아니잖아요. 세잔의 정물화에 실제 나오는 사과가 있지만 그 사과는 못 먹어요. 그림 속에 있으니까. 그와 같이 우리는 그림에 둘러쳐져 있는 거예요. 가상이에요. 그냥 그림이에요. 이미지에 둘러쳐진 세상이지요.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가서 ‘나 복수할 거야. 아버지가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나중에 97살 돼서 온 아버지 멱살 쥐고 흔들 수가 없어요. 왜? 흔들면 부서질 것 같아. 그렇게 내가 욕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아버지는 왜 그리 힘이 다 빠졌는지. 이제는 먹여 살려야 될 대상. 다시 말해서 내 욕망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었어요. 전혀, never, 전혀 욕망하고 싶은 대상 자체가 아니었었어요.

왜 그런데 어릴 때 아버지가 그렇게 뭔가 라이벌처럼 느껴졌는가? 그건 내 쪽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내 쪽이 세상을 몰라서 그래요. 나는 진심을 다하는데 그쪽은 나에게 뭘 준다? 상처를 주네. 왜? 이유가 뭡니까? 내가 세상을 몰랐나보오. 내가 몰랐던 모양이에요, 세상을.

아버지의 한옥집이 대단해보였는데 자기가 나중에 비트코인 대박 나고 난 뒤에 ‘아휴, 그것도 뭐 집이가? 그거 뭐 두 채는 살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내가 기대했던 목표지점을 나는 허탈해하면서, 또 새로운 목표지점을 향하여 흘깃 보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욕망의 결핍에 목말라하면서 찾아야죠.

그런데 라캉은 찾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 찾아봤자 전부 다 허구,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정작 욕망의 대상은 상징적인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고 실재에 있다. 그런데 실재는 무슨 뜻인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은 없다는 뜻이다. 이게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들뢰즈는 뭐라고 하느냐면, 라캉은 욕망의 결핍을 메꾸면서 욕망할 것, 목표를 자꾸 찾아가려고 하는 이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그걸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욕망을 생산하면 그것이 곧 세계요, 전체 세계라고 보는 거예요. “평생 동안 죽을 때 죽는 값이라도 너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 그게 우리 욕망이 고대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표를 잡지 말고 내가 여기서 뭔가 움직인다는 것, 내 욕망에 휘둘린다는 그 자체를 좀 좋게 보면 안 돼?” 이게 들뢰즈 철학이에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걸 고대할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긍정하죠. 욕망을 긍정한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나를 신용한다는 뜻이에요. 신용은 모든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에요. ‘내일 줄게. 오늘 돈 빌려 줘.’ 이게 신용이거든요. 신용 없으면 은행에서 돈 못 빌리죠. 담보가 있어야 되니까. 이게 신용체계입니다. 신용체계가 자본주의 체제에요. 그래서 신용한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누가 신용한다? 내가 신용하는 거예요. 내가. “뭐 믿고 너한테 돈 1억을 빌려줘?” “날 믿어라. 내가 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돈 1억 빌려 달라.”

그러면 자살은 언제 합니까? 언제 자살하죠? 본인이 본인을 믿을 게 전혀 없을 때 자살하죠. 본인이 본인을 더 이상 못 믿겠다 할 때 자살하는 겁니다. 그래서 들뢰즈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해서 죽었어요. 호흡기 빼고 죽었어요. 빼고 병원 창문 열고 5층에선가 뛰어내려서 죽었습니다. 평생 누구 믿고 살았어요? 나 믿고 살았어요. 나 믿고. 꼭 일본 이름 같죠? 나 믿고.

모든 인간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어요. 예수 믿는 내 믿음을 믿고 사는 겁니다. 전부 다 ‘나 믿고’에요. 그래서 수요일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 자기의 욕망이 자신을 자살로 이끈다. 자기의 욕망이.

여기서 여러분들은 갈등을 일으키죠. 라캉 쪽이 맞는지, 들뢰즈 쪽이 맞는지. 어느 쪽이 맞는지. 때로는 라캉 같기도 하고, 때로는 들뢰즈 같기도 하고. 헤겔 이야기 안했거든요. 헤겔은 인간의 욕망을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라 했어요. 헤겔은 욕망을 설명하면서 타인을 빌려와요. 타인.

전부 다 관련성이 있어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아기에서 어린아이 양육할 때 당근 아니면 채찍이죠. 채찍을 때릴 때도 당근을 준다는 조건 하에 때리는 겁니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네가 이제 기저귀에 오줌 안 싸고 화장실 가게 되면 내가 맛있는 케이크 줄게. 그런데 또 오줌 싸면 너는 이제 맞는다. 생각의 방에 가서 혼자 의자에 앉아 벽보고 있는다.” 뭡니까? 선과 악이죠. 선과 악. 아까 도표 봤죠? 선과 악. 악에서 벗어나서 선의 자리를 유지하는데 악의 자리에 가게 되면 후딱 선의 자리로 와야 된다.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둘 다 걸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둘 다 걸친 분이 누굽니까? 아까 했듯이 예수님이 둘 다 걸쳤죠. 둘 다 걸쳤지만 둘 다 걸친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받는 방식으로 배척을 해버렸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배척받도록 유도해서 기어이 하나님께서 인간세계 전체를 배척하는 결과를 내겠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 쪽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를 영원토록 지옥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헤겔은, 유아도 마찬가지지만 타인을 더 동원시켜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바로 욕망의 대상이라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인정받는 내용이 뭐냐? 인정받는 내용이 굉장히 모순돼요. 이 모순된 이야기를 헤겔도 해결 못했어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인정받는 그 내용이 뭐냐? 어떤 경우에 인정했느냐 하면, ‘네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알아라.’ 여러분들 이게 안 맞는다는 느낌 들지 않습니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인정받는 내용이 뭐냐?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인정한다면 내가 너를 칭찬해줄게.’ 이게 자율입니까?

엄마가 경상도 말로 단술이라 하는 식혜를 생강 띄우고 맛 예쁘게 해서 딸한테 줬을 때,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요새 뭐 일 안하고 집에서 노니 심심한 모양인데 앞으로 이런 거 해가지고 오지 마세요. 이거 먹을 사람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막 기분 좋던가요, 엄마가? ‘아, 진짜 오늘 나 너무 기쁘다.’ 이렇게 되던가요? 어떻습니까? “이것들이 말이야. 엄마를 무시하고.” 갑자기 분노가 나타나죠. 분노가.

분노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만큼 내가 자율적이란 말입니까, 타율적이란 말입니까? 남을 의식하고 있잖아요. 자식이 나한테 “엄마, 전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요.” “더해줄게. 더해줄게.” 이렇게 된단 말이죠. 남에게 놀아나는 나. 딸자식한테 인정받는 나. 엄마는 사는 보람을 얻게 됩니다. 해맑게 엄마는 웃죠. 웃는다는 말은 일시적이나마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뜻이에요. “선생님, 너무 잘 가르쳐요.” 할 때, 가만있어 봐. 내일 좀 일찍 가야겠다, 학교에.

모든 타인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남으로부터 인정받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최고에요’라는 거예요. 당신이 최고입니다. 헤겔이 보기에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데 이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나와 똑같이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신이라고 인정받는 그런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부정을 통해서 타인에 의해서 내가 트랜스포머, 내가 나라고 하는 게 없이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맞춰주면서 내가 트랜스포머, 변형되는, 타인의 상황에 의해서 변형되는 내가 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게 바로 나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아까 라캉하고 비슷하죠. 타인의 세계라는 것은 상징적인 세계. 이미 기성에 있는 세계. 이 이방 철학가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여기 어디에 해당됩니까? 지금 이방인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탐구하고 연구한 지식에서 나왔잖아요. 이성적인 지식, 지식이잖아요. 선악적인 지식이잖아요. 아까 말씀 빼고 내 속에 있는 것가지고 나를 분석하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뭘 동원시켰습니까? 차이점은? 율법을 동원시켰죠. 율법을 동원시켰는데 율법의 취지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마중을 나갑니다. 방금 이렇게 자기 분석된 자아를 가지고 율법을 자기 소유화시켜서 나는 율법을 잘 지켰으니까 원하는 대로 지켰으니까 나는 천국백성이 된다고 자부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종교적이죠. 종교라는 말은 결국은 신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신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유대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는 마귀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 할 일이 있어요.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해야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주님께서 오시는 이유가 이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라이벌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그들 속에 눈에 보이는 육신 배후에 예수님의 라이벌이 이미 있었던 거예요. 라이벌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오늘 강의 가운데 좀 어려운데 이 대목에 우리가 일단은 도착했습니다. 어떤 어려운 대목이냐 하면, ‘존재하지만 부재한 것으로 보이는 것.’

아까 그 도표에서 악과 선. 인간 내부의 마음은 악과 선으로 되어 있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그런데 여기 인간 속에 와서 대각선 네모를 따라 도려내버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분’ 이렇게 되죠.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분, 이렇게 되죠.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막 울었잖아요. 왜 웁니까?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 치웠는지 몰라서 운다는 거예요. 결국 마리아는 진리를 모르죠. 왜? 라이벌이 없는 거예요. 라이벌이. 자기가 절대적 존재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 개념 자체가 항상 자기를 삭제한다는 생각은 없고, 기어이 기어이 내가 있어야 그다음에 무슨 말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진리가 되든 생명이 되든 영생이 되든 일단 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부재했어요. 물론 그 뒤에 나타나서 “울지 마라.”하고 만지려 하니까 “만지지 마라. 아직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만질 게 아니다.” 벌써 부활체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철두철미한 배척을 실현시키기 위함입니다. 철두철미한 배척을 실현시키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아, 예수님이 부활했구나.’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은 자체부터 오류가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오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존재하지만 부재하시는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동시에 안 계신 분이 되는 거예요. 이걸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안 계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안 계신 분으로 왔는데 사람들은 “랍비여”하면서 계신 분으로 인식한 거예요. 예수님은 실제로 계시다고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내 속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본인이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떤 게 와도 자꾸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식의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교회에 교인 오천 명이 있다면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오천 명 다 지옥 가는 거죠. 철저한 배척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에는 거기에,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분으로서의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 하나하나가 인간에게 시비 거는 말씀인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분노가 담긴 말씀들이에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 천국백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물으면 그건 주님의 분노가 담기면 되죠. 나에게서 나를 빼내고 빼낸 빈자리에 주님의 분노가 담기면 돼요. 어떤 식으로 분노가 담기는가? 말씀이 오면 되죠. 말씀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씀이 말씀 자체가 지닌 욕망이, 전에 내가 부모로부터 있던 내 자리를 대신하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쉽죠.

은혜 받았다는 말하지 말고, 내 안에서 지금 무슨 말씀이 다시 오늘도 몇 번이나 나를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말씀 네 개가 네 번 지적하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말씀 한 개 가지고 날 지적하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6년 8개월 동안 한 번도 지적 안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문제고.

은혜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천국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렇게 지적해주는 거예요. 주님의 분노가 지적을 해줘야 내가 나를 그 순간만큼은 포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서 손을 뗄 수가 있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그걸 못했습니다. 말씀을 지키기 전보다 지킴으로서 나의 의가 더 추가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유대인만 그렇겠어요?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이 와서 당신을 지적하던가요? 이라는 영화를 저도 봤습니다만, 머리에 꽃 꽂고 있는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여자가 좋다고 환호를 하죠. 수류탄이 터졌는가 뭐가 터지니까 팝콘이 팍 터져가지고 온 하늘에서 팝콘 눈이 막 내리잖아요. 그 팝콘 하나하나가 말씀이라고 보세요. 버터 향기와 더불어서 그게 우리 안에서 팝콘이 터지듯이 말씀이 터져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주께서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해요. 사랑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분노도 어디에 담기느냐? 말씀에 담겨요. 말씀에 담겨서 하나님께서 분노로 터트리면 그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터트리면 저주 안에 사랑이 나옵니다. 저주 안에서 사랑이 나와요.

충분히 짓밟을 것 다 짓밟고 충분히 죽일 것 다 죽였다는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사랑이거든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면 출애굽기 11장, 12장에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이 집 맏이 죽었대.” “죽었어? 아, 주님께서 만족하겠다. 야, 빨리 지나가자! 넘어 가. 넘어 가.” 이게 유월절(Passover), 넘어가는 절기잖아요. “이 집은 됐고 다음 집 가자. 다음 거 맏이 또 죽이러 가자.” 넘어갔단 말이죠. 왜 넘어갑니까? 충분히 짓밟았기 때문에. 충분히 죽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넘어간 히브리 가정에서 넘어가도록 무슨 조치를 했습니까? “우리 집에 이미 우리 아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죽었어요.”하고 죽었다는 표를, 그냥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그런 실수하면 안돼요,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면 안 되고, 죽은 아들을 대신해서 죽었던 어린 양의 피를 바르죠. 어린 양의 피를.

죽은 아들의 피를 바르는 그 실수가 바로 수도원, 수녀원들이에요. 기도원이고. 강원도 기도원 예수원 있죠. 그런 데서 하는 실수가 뭐냐 하면 자기를 비우는 거예요. 자기를 비운다고 난리도 아니야. 왜 자기를 자꾸 생각해요? 뭐할라고? 그런 신비주의는 이슬람, 불교, 티벳 불교, 기독교, 천주교 다 있어요. 그런 거. 자기를 비우는 방법 중 하나로 열혈사제도 있어요. 마약상하고 한판 싸우면서 자기를 비우는 방법도 있다니까요. 화염병 들고 비우는 방법도 있고. 탄핵하라고 외치는 그런 방법도 있어요. 자기를 비우는 거.

그런데 유월절 어린 양은 이미 밟을 대로 다 밟았다는 자기만족이란 말이죠.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가 아니라, ‘심판 전에 우리 집에 먼저 와서 이 분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게 유월절이라는 말씀이에요. 말씀이 먼저 왔거든요. 말씀이. 그러니까 천사의 심판 이전에 뭐가 먼저 왔어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먼저 왔잖아요. 그 계명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현실이 들어있죠.

오류가 많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계, 이미지인 현실, 가짜 허구적인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은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어요. 일종의 팝콘이고 강냉이지만 그걸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 터트려지는 이유가 예수님이 그 경과를 겪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온 자는 누구든지 아버지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 필연성을 말씀 안에 담고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저주로 전달함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이 임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도 만족스럽고 주님이 자기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만족스럽고. 그런 조치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라는 존재가 특이한 존재가 되죠. ‘이 땅에 존재하나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이 땅 말고 다른 데 이미 빼돌렸다.’가 되는 거예요.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크게 써야 돼요. 그 존재가 바로 ‘천사’같은 존재. 천사 같은 존재에요. 이것은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영적 존재 또는 영에 속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말씀세계 안에 들어온 사람. 10분 쉽시다.

** 강의 중 도표는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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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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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