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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1212b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1212b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요한일서 3장을 읽어보면 사랑이라는 게 굉장히 모호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겁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예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단정지어놓고,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굉장히 모호해요. 왜 모호하냐 하면, 모호한 이유가 우리의 평소에 인간 tree, 인간의 나무에서 행함을 하려면 어떤 개념이 손에 딱 잡히고 그다음에 그 개념을 내 행동과 맞추려는 이러한 식으로 그동안 인간은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해왔던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되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자기의 증인으로 살아왔던 거예요.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 동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증인이라는 게 낯선 개념이 아니에요. 이미 자기 자신을 PR(public relations, 홍보), 선전하는 식으로 모든 의식이 돌아가고 있단 말이죠. 그렇게 될 때에 ‘나는 사랑이라는 걸 했다.’라고 이렇게 자기가 잘났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늘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서로 사랑하라 하니까 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사랑하게 되면 여기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이게 딱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우리를 흥겹고 즐겁게 가볍게 해주는 게 아니고 더욱더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말씀으로 이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뭔가 남아있는 숙제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그런 숙제로 오늘치 사랑했다면 내일 사랑할 것을 오늘의 사랑으로 퉁칠 수 있습니까? 안되죠. 오늘 사랑은 오늘로 사랑하고, 내일 만약에 미워했다. 그러면 또 나는 실컷 어제 사랑한 걸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줄 알았는데, 내일쯤 돼서 내가 미워하는 인간이 등장해서 막 미워했더니만 “요한일서 3장에 보면 네가 형제를 미워했기 때문에 땡 탈락이야. 취소.” 이러면 어떻게 돼요? 그럼 나오는 노래가 뭡니까? 난 어떡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끝에 계속해요. 난 어떡해~. 어떡해.

하여튼 입장 난처하게 만들어버려요, 요한일서 이 모든 글들이. 구원받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초를 치고 무거운 짐에다가 덤터기를 더 씌우고요. “뭐 적당히 사랑하면 안 됩니까?” “안돼.” “어느 정도까지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나는 그걸 사랑의 턱걸이했다고 보겠다.”

이렇게 나오면, “에라, 죽는 셈치고 뭐 신장 하나 내놓겠어요.” 이랬는데 신장 내놓고 난 뒤에 다른 교인이 와가지고 “나머지 신장도 내놔라.” 이거 뭐 도대체 어디까지…. 도대체 얼마면 돼? 사랑 얼마면 돼?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가 투자할 사랑은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남아있어요? 몇 번 남아있냔 말이죠. 삼천육백오십여섯 번?

이런 점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결론을 말씀드려야 돼요. 안 그러면 얼굴색이 더 검어질 것 같아요. ‘잃었다가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관성은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잃었다가. 안 잃은 채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자기를 증명하잖아요. 어떻게 때려죽여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자기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잃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조치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죽음’이에요. 죽음. 그런데 죽음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기죽음. 조기죽음이 있고 두 번째는 만기죽음이 있어요. 만기죽음. 병장 다 따고 제대하는 거. 첫 번째는 일병 따고 조기 제대하는 거. 만기죽음은 육신을 거둬가는 거고요. 조기죽음은 율법에 의해서 죽이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죽인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가 적절하겠죠. 율법이 우리에게 준 것은 ‘선하다, 선하다’ 우기는 우리를 ‘악하다, 악하다’로 바꾸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선한 그 선함과 율법이 요구하는 선함이 수준차이가 너무 나요.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은 사람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달성 못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선하다’가 달려있어요. 그럼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어떤 경우라도 어떤 핑계도 소용없이 선하지 않은 게 돼요. 악함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 율법을 주심으로서 율법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극한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려줍니다. 극한적인 상태. 그게 뭐냐 하면 이사야가 이야기한 것처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사야가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안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안 달라졌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시선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 나는 달라졌다고 하든 안 달라졌다고 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그 자체로 망해야 마땅한 존재로 발각됩니다. 그걸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태어났다고 하죠.

그러면 이 조기죽음에 의해서 인간은 뭐가 돼요? 죄인이 되죠. 죄인. 죄인인데 이게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은 처음 출발점까지 밀어붙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에는 착했는데 그다음에 화내서 악하다.’ 이렇게 궁시렁거리지 말고 끝까지 몰아붙이면 ‘애초부터 선한 것은 나에게 나올 수가 없다.’가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판단에서부터 해방이 되겠죠. 구원이 된다고요. 구원이. 나의 자기 판단으로부터 구출 받는 거예요. 내가 하는 어떤 판단도 이거는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을뿐더러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그런 상태까지 나아가게 돼요. 왜? 원초적으로 망하게 된 거니까.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자기 판단에서 해방되니까 나한테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이 없죠. 그럼 나에게 죄 있는 육신을 물려준 책임자는 누가 있어요? 책임자는 누굽니까? 울 아버지죠, 울 아버지. 울 엄마고. 울 엄마, 울 아버지는 그럼 누가 낳았습니까? 울 할아버지겠죠. 울 할머니고.

그렇게 나가면 누가 책임자입니까? 누가 죄의 책임자가 되죠? 원초적인 아담이 되겠죠. 그런데 아담은 죄를 책임집니까, 책임 못 집니까? 책임을 못 져요. 다시 말해서, 아담은 죄를 의로 바꿀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습니다.

자, 그러면 사랑은 뭐냐? “내가 왔잖아!” 하는 게 사랑이죠. 내가. 아담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아담 자리 거기 꼭 있어. 그거 지켜줘. 내가 그 자리에 끼어들께.”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수준으로 내려오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위세 떨지 않고 “내가 온 것은 사람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함이라.” 인간 자리에 하나님이 같이 중첩해서 결합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 그러면 그 사랑 안에 내용이 둘이 되겠죠. 죄 없는 분과 죄 있는 인간,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의 증인되는 거예요. 내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여러분, 그것 좀 구분해야 돼요. ‘나는 나를, 내 잘남을 증명한다. 나는 증명하고 싶다. 나는 내 잘남 증명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간다. 난 이렇게 잘났다, 잘났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교회 갔는데 “이제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하면 그 사람은 그다음부터 뭐가 추가되겠어요? 나는 잘났는데 그 중에서 뭐도 잘났는가? 드디어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내 잘남을 증명하는 하나의 재료가 되겠죠. 그걸 주님께서는 거부하는 거예요.

성령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되지, 내 잘남의 증인 안 되거든요. 나를 증거하라고, 나 구원받은 것 증거하라고 성령 준 게 아니란 말이죠. 예수님의 증인되려면 예수님의 증인 요소, 그게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럼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랑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사랑 안에 두 가지 다 들어있죠. 주님은 죄를 대신해서 말씀을 다 이루신 의인이 되고, 그 의인된다는 것은 우리 육신 자체가 아담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사랑의 요소로 결합되는 거예요.

사랑은 만남이에요. 만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의인이 죄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을 이루었어요. 사랑을 이뤘다고요. 따라서 이 사랑이 일차적으로 오게 되면 율법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미 산 자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네가 죽었다는 말이야, 살았다는 말이야? 두 개 하지 말고 하나로 몰아세워. 응? 죽었다 했다가 살았다 했다가. 정체를 밝혀라. 너 어느 쪽이냐?” 하는데 둘 다가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요소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예수님의 증인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소가 그겁니다. 죄인으로 오셔서 의인되셨거든요. 그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예수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사랑이 무엇이냐’를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거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알아야 구원되는 겁니다. 사랑을.

사랑을 알아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거든요. 그 작업. 그 작업은 예수님 자신의 신분 자체가 죄인과 의인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었잖아요. 죄 있는 육신과 의로운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도 주님께서 성령을 주니까, 우리 육신은 이미 죄 있는 거니까요,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까 성령만 오시면 뭐가 돼요? 죄가 의로 변하는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겁니다.

창녀촌에 일하시는 그분들이 손님 기다리기 심심하니까 화투를 친답니다. 옛날 이야기인데 요새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요새는 화투치지 않고 휴대폰 보겠죠. 화투를 칠 때, 누가 와서 화투 있는 걸 다 뒤집어 펴놓는다면 어떻습니까? 신기한 일이겠죠.

죄인데 죄다 죈데 이걸 뒤집어놓는 순간 다 뭐로 변해요? 죄인데 의로 다 변해요. 죄가 의로 변한다고요. 이게 뭐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잔칫집에 아무 쓸모없는 물이 잔칫집에서 가장 요긴한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를 예수님이 “내가 해줄게.”라고 하신 거예요.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불신자한테는 이런 이야기까지 모호하기 짝이 없어요. 비구체적이고 허황되고. 왜 이런 성경이야기를 들이대도 그들은 그걸 모호하게 생각해서 ‘안 믿는다.’ 이렇게 나올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뭔가 강력한 거부 저항체제가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저항체제가 뭐냐 하면 내 잘남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한 의식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내 잘남을 밀어붙이는 의식이 어떠한 원칙에서 이뤄지는가? 이 부분이 조금 난해해요. 이제부터 난해하다고 내가 미리 선언했습니다. 그 점을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리 그들 안에 가득 차있는 선점해있는 어떤 삶의 원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그게 놀랍게도 ‘진리’입니다. 진리.

인간에게 진리라 하는 것은 언어와 사물이 일치되는 것, 이걸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어와 사물이 일치될 때 자신은 ‘정답을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 이치를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의 정답을 알게 되면, ‘정답을 품은 존재가 “나”다.’가 되겠죠.

이게 바로 소위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옛날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정답을 이야기함으로써 여기서 뭐가 발생하는가? 권위가 발생해요. 권위가.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그들이 의기양양했던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간음에 대해서 그들이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바람피우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죄에 대해서는 나는 간음죄 지은 적이 없다는 이 사실과 본인들이 일치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따라서 ‘나는 이 사람을 돌로 칠 자격은 있지만, 난 그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입장에 있지는 않다. 왜? 그만큼 고상하고 거룩하니까.’라는 식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를. 심지어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 데려와서, 예수님도 ‘이 여자는 잘못되었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여자를 제대로 율법으로 나무라니까 당신은 옳네. 옳다.’ 그걸 예수님 입으로 듣고 싶은 거예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니까.

시험을 왜 칩니까? 시험을 치는 이유가 뭐에요? 시험이 없으면 내가 어느 정도로 정답률에 가까운지를 몰라요. 그런데 초등학교 1,2학년 때 수학시험을 치잖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백점 안 맞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어린아이는 선생님이 찍어준 도장,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시험지 들고 집에 가서 엄마를 보여줄 때, 자기 잘남을 증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보장받은 거예요.

막 흔들면서 가죠. “나 산수 백점 맞았다.” 그럼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잘했어! 오늘 맛있는 거 돈가스 해줄게.” 이렇게 된다고요. 내 잘함에 대한 뭐가 주어지죠? 보상이 주어지는 거예요. 내 잘함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내가 잘난 존재라는 내 평소의 의도에 딱 들어맞았다가 돼요. 평소 의도에.

만약에 어느 교회 1층에 기도실이 있는데, 이상하게 그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착착 된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 떠나겠습니까, 안 떠나겠습니까? 안 떠나죠. 자기 잘남, 자기 의를 증명할 수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된 적이 없어요.

물론 교회 떠나는 것은 기도응답 때문에 떠나는 그러한 순수한 이유가 아니에요. 교회 떠나는 이유는 돈 문제입니다. 내가 밀어준 목사가 차기 목사 안 되고 다른 목사가 오면 떠나버리죠. 왜? ‘그동안 그 교회에 돈 갖다 부은 게 얼만데 적어도 나도 지분이 있는데 왜 내 발언권 무시하느냐? 그러면 나 그 목사하고 같이 교회 안 다녀. 나중에 목사 나가고 난 뒤면 그 목사 나가고 갈게.’ 그런데 그 목사가 나갈 때 계엄을 선언하고 나간다면? 그럼 슬슬 한번 나도 나가볼까, 정계에?

이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 잘남, 내 발언 잘남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 절에, 우리 성당에 신상 진리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신상 진리 확보되어 있습니다. 오셔서 우리 설교 듣고 믿기만 하면 진리에 의해서 진리의 나라 천국갈 수 있습니다.’ 그걸 선전해대는 거예요. 그걸 쉽게 말하면 ‘우리 교회는 역사적 정통성이 있습니다.’ 그거 비슷하게 하는 거예요. 절도 마찬가지고요.

성철 스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할 때, 앞에 있는 ‘산’은 실체 있는 산이고 뒤에는 그걸 언어로 표현할 때 산으로 표현한단 말이죠. 이 두 개가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이래서 성철 그 사람이 미쳐버린 거예요. 흐르는 물과 내가 표현하는 물이 같은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왜?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수시로 변하는 세상의 세밀한 변화를 담을 수 없고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 사랑이 뭔데?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뭔데? 계속해서 그 단어를 표시하는 기표가 의미와 결합하려고 애를 써도 그 의미는 적절한 표현에 달라붙질 못하고 오래 가지 못하고 또 미끄러지고 다른 것을 또 요구하는 거예요. 처음에 결혼할 때 “나 당신 사랑해.” 해놓고 한 십년 뒤에 또 “사랑해.” “아이, 지겹다. 뭐 다른 표현 없나?” “좋아해.” 그 ‘좋아해’도 한 십년 가다가 “또 없나? 계속해서 좀 더 더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란 말이야.”

자꾸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내가 붙잡을만한 적절한 단어가 자기에게 들려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 단어 듣기를 만약에 못하게 된다면 슬프죠. 그래서 장례식 치를 때 울잖아요. “아이고, 당신이 벌써 가면 안 되잖아.” 왜 가면 안 되는데요? 나의 잘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고 날릴 수 있는 당신이 먼저 당뇨 걸려 죽어버리면 내가 좋은 여자라는 것을 누구한테 들어요?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그것 때문에 섭섭해서 우는 거예요. 자식도 소용없다. 자식은 왜 소용없죠? 자식은 남편처럼 그렇게 ‘엄마, 좋아해.’ 이걸 다정다감하게 못하니까. 타인이 없으면 나도 없으니까 미치는 거죠, 이제. 제발 내가 진리대로 사는 의로운 존재라고 누군가가 제발 좀 나한테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제발. 참.

인간이 사물과 일치되지 않는 이유는 언어에 인간이 손질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손질을 하느냐 하면 인간은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두 가지를 합니다. 언어표현에 있어서, 하나는 포개는 방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바꾸는 방식이 있는데 바꾸는 방식을 전치(displacement)라 하고 포개는 방식은 압축(condensation)이라 합니다.

전치, 압축 이게 평소에는 잘 안 나와요. 어디서 나오느냐? 꿈에서 나옵니다. 꿈에서. 압축하는 것을 은유(metaphor)라 하고 전치는 환유(metonymy)라고 이야기해요. 은유, 환유라고 언어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왜 이렇게 나오느냐? 압축하고 전치하는 이유가 나의 허점, 나의 약점을 꼬깃꼬깃 누구도 찾지 못하게 깊숙한 곳으로 감추는 양상으로 내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 데리고 다이아몬드 파는 보석상에 갑니다. 여러분들 그런 경우가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골라. 오늘 당신 생일이니까 당신 원대로 해봐.” 다들 열 번씩은 그런 경험 있죠? “아니, 가격 따지지 말고. 당신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 한도 없이 무한대로 해. 나 수표 긁을 준비되어 있어. 준비되어 있다고.” 그래서 “이거.” 한다고요. “이거 뭐? 얼마짜린데, 이거? 아이고, 오백만원짜리? 그것도 보석이야? 내가 쓸 때 한번 크게 써.” 그래서 딱 잡았는데 보니까 이억오천만원짜리다.

“여보, 내가 너무 무리했지? 미안해. 당신이 그렇게 큰소리치니까 한 거야.” 이렇게 아내가 이야기할 때, 아내는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하는 겁니다. 상황 따라서 그 동일한 문장이 동일한 문장이 아니에요. 내일모레 이혼할 사람 같으면 ‘빨리 돈 쓰고 빨리 갈라서자.’ 이럴 수가 있지만, 그게 아니고 남편을 너무 아낄 것 같으면 ‘내가 이거 샀다 치고 나중에 물러야지.’ 똑같은 문장이라도 그 속마음은 압축과 전치로 숨기는 방식을 사용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이미 아담의 후손으로 자기 약점을 갖고 있는 이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사랑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챙기기 바빠가지고 할 수가 없어요. 오늘 안양강의에 연세가 좀 되시는 어떤 집사님이 ‘아이고, 나 같은 것은 보청기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데 잠이나 자고 밥만 먹는데 내가 이번 수련회는 안 갈란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때 갑자기 주의 말씀이 탁 떠오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전하는 말씀 그대로 한번 써볼게요. 주의 말씀이니까. 상당히 공손하게 쓰겠습니다. 간증을 하시니까. ‘네가 듣는 자냐?’ 다시 말해서 이걸 좀 풀이하면, ‘네가 언제 내 말을 듣고자 했던 자냐?’ 그분이 이렇게 풀이해서 설명해줬어요. ‘네가 듣는 자냐?’ 이 말은, ‘네가 귀 밝을 때 귀 좋을 때도 언제 내 말 듣고자 했는가?’에요. 그럴 때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그거 뭐 보청기 끼고 앞자리 앉으면 될 걸 괜히 안 들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 자기가 핑계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이 간증이 옳으냐, 실제로 있었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현상입니까? 내가 의인 되었다가 죄인 되는 거예요. 죄인 될 때 뭘 느꼈어요?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가 느껴지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될 경우에만 다 이루심, 나의 잘남에 가리워졌던 주님의 다 이루심이 드러나면서 그때부터 나는 뭐냐? 내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증인으로 이미 채택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또다시 상기되고 환기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말은 감추기에 급급하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날선 검이 되어서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 잘난 맛에 사는 그 모든 본성을 완전히 수술하듯이 헤쳐서 주님의 증인, 사랑의 증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너는 책임도 못 질 지경에 빠져있는 죄인이다. ‘죄인이니까 잘하겠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 너 책임도 못 져. 하지만 그 화투짝, 시커먼 화투짝을 주님께서 뭐로 바꿨습니까? 의로 바꾼 거예요. 이 땅에서는 죽었지만 네 생명이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는 겁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이 성경말씀이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그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자, 요한일서 3장 성경에 나온 대로 봅시다.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둘로 분류됐죠. 둘로 분류된 겁니다.

이 대목을 전에도 설명했지만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난처해하고 당황스러운 것은, 가인이 악하고 아벨이 선한 것 같으면 하나님이 정말 아벨을 선하게 본다면 선한 사람답게 사전 예방조치가 있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아벨 죽을 때 가인보고 멈추라 하든지 칼을 뺏든지 천사를 보내서 조치를 해서 안 죽도록 해야 안 죽은 상태에서 ‘아이고, 죽을 뻔했다.’하고 아벨이 주님을 증거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죽고 난 뒤에 오면 아벨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무슨 위로가 됩니까? 죽고 난 뒤에 복수해봐야 산 사람이 복수한 걸 죽은 사람이 본 적 있어요? 보기나 합니까? 아무 소용없잖아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마귀한테 못 따먹게 조치하는 게 아니고 따먹히도록 자기를 내줬죠. 누가요? 하나님 자신을 마귀한테 내주신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온 거예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이다. 왜 내놓는가? 지옥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사탄이 죄지었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피해자 입장에서 지옥 판결을 내리시기 위해서 악마로 하여금 걸려들도록 만드신 겁니다. 걸려들도록.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기 위해서 악마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옥을 지옥답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악마는 개과천선을 못해요. 그리고 악마에 속한 자도 마찬가지고요. 인간 자체도 마찬가지죠. 본인이 스스로 반성해버리면 천국에 그런 인간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아무 기준 없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천국을. 왜냐하면 천국 자체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들의 노림수나 하나의 목표로서 천국이 되면 안돼요. 그러면 천국을 바라봤다는 것이 천국 들어가는 요건이 되어버려요. 그런 것은 안돼요.

주께서 생명나무로부터 추방시킨 것은 생명나무 먹는 것도 먹고 싶다고 해서 주지 않고 어느 누구도 생명나무에 대해서 먹고 싶은 게 아니고 오히려 생명나무가 왔어도 그들이 기피하게 만들어요. 아무도 생명나무 과일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결정되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주시는 겁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죠. 탕자. 어느 누구도 탕자 된 적이 없다고요. 날 때부터 자기 집에서 살았고 자기 집을 떠난 적이 없어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은 lost가 안돼요. 잃어버림이 안돼요. 자기 잃어버림을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가 안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탕자가 되어도 탕자 될 수가 없어요.

구원되려면 잃어버리고 되찾아야 되는데 인간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어서 되찾은 적도 없어요. 잃어버린 것도 주의 뜻이어야 하는 겁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 점을 알아요. 잃어버렸다가 얻었다 하는 것은 누구 코스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에 관해서만 국한된 코스가 되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얻는 것, 그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아들, 누굽니까? 이삭의 코스에요. 이삭은 잃어버려야 비로소 수풀에 있는 양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존재로서의 차기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초청합니다. 나랑 같이 잃어버리고 나랑 같이 얻자. 이게 바로 성령이 보내준 초대장이에요. 성령의 초대장입니다.

한번만 하면 됩니까? 아니. 매일 해야 돼요. 매일. 매일우유 있죠? everyday 매일같이. 연세우유 말고 매일우유. 매일같이 잃어버리고 매일같이 잃어버리고 얻을 때 그때마다 다 이루심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행동, 태도에도 변함없이 계속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 오히려 사랑이 적용되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사로로 하여금 무덤에서 나오게 했거든요. 나오게 할 때 이상한 것은 나사로가 걸어서 나올 때는 이미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몸에 꽁꽁 감겨진 헝겊을 몸을 움직여 풀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의 옷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 옷이 무슨 옷이냐 하면 ‘죽음의 옷’이죠. 죽음의 옷.

인간의 육신을 주님께서는 죽음의 옷으로 간주해서 이 육신을 성령에 의해서 나중에 벗겨주게 되면 우리는 영광의 부활체가 되죠. 육신을 새로운 옷으로 덧입는다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러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어디서 파생되어서 나온 거예요?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영광된 육신을 모델 삼아 거기서 나오는 일관된 모든 조치입니다.

예수님이 영광되면서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됐잖아요. 그러면 성령을 줄 때 성령에 무슨 내용이 있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영광을 얻는 그 순서 그 자체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주는 거예요. 이게 모호합니까? 이게 비구체성이에요? 구체성이 없는 겁니까? 이게 비실제적인 거예요? 가상적인 겁니까?

이사야 11장 6절 보겠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표범, 염소, 사자, 송아지, 살찐 짐승, 어린아이, 독사 이런 조합, 이런 동물들의 조합. 이렇게 조합할 때 인간들의 기존의 의미는 뭡니까? 독사는 독이 있다. 사자는 사납다. 인간세계에서는 그게 진리가 되죠. 진리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쓰는 단어를 갖고 와서 인간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이미 진리라고 구축되어있는 이상은 못 받아들이는 말씀내용을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예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이것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인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네가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도저히 못 받아들여요. 이 이사야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달달 외웠을 거예요. 언젠가 메시아 오면 말씀대로, 그들은 맨날 말씀대로라, 말씀대로 우린 이루어진다. 그동안 말씀대로 못 이루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본인의 육신이 그걸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을 못 잡는 거예요.

자기가 마귀 편에 서서 자기 나름대로의 분류를 한 겁니다. 나한테 유리한 것은 안에, 불리한 것은 밖에. 나한테 잘해주면 선, 나한테 못해주면 악. 이미 인간이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자기가 떡하니 중심을 차지하고 있단 말이죠. 그것을 무엇이 공격합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그곳을 향하여 성령이 그 지점으로 날아오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분이 있을 자리에 우리 잘남이 거기에 박혀 있으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이 와서 매일같이 그걸 공격하는 거예요. 사랑이 내 사랑을 공격하는 거예요. 뭐라고? “죽어라, 인간아! 죽어라.” 죽으면 사랑이고 안 죽으면 미움이고 그런 거죠.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까? 죽으라 한다고 죽을 인간이에요? 아니죠.

아까 조기죽음이 뭐라 했습니까? 말씀으로, 우리의 실상을 말씀으로 밝혀주죠. “아,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이 땅에 살고자 했지만 사는 이유를 모르고 무조건 살고자 했는데 살 이유가 없군요.”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간단해요. “살 이유도 없는데 왜 살려주십니까?” “그거는 바로 너를 살려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내 나무의 한 열매로 이미 합류되어 있다. 내 안에, 내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일서를 한번 쭉 읽어보세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3장 15절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보세요. 인간들끼리 통용하는 언어의 진리체제에서는 이게 어려워요. 미움은 미움이고 죽이는 건 죽이는 거고 그게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라는, 주님 쪽에서 제시한 해석에 근거하면 나는 살인자 맞습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기뻐 날뛰며 춤추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결론내리면, 감사하면 성령의 일이고 ‘예. 알겠습니다.’하면 악마의 일이고. “예, 앞으로 잘할게요.” 하면 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또다시 잘난 존재로 증명하고자 하는 그러한 끈질김이잖아요, 끈질김. 아주 지독한 끈질김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여러분들이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매사에 살 가치도 없는데 주께서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라고 계속 하루 사는구나. 랄라랄라 라~” 노래 부르면서 가죠. 가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식구 또 만나가지고 다시 예전처럼 한바탕해요. 삿대질하면서 “니가~” 또 이제 시작됩니다.

주께서는 왜 그렇게 하느냐? 예수 믿는 잘난 그런 나를 증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 복음 아는 잘난 내가 나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 이루심 자리에 내가 건방지게 거기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내가 올라갈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 이루심 때문에 그 순환 고리를 또 돌려버려요. 회로를 돌린다고요. 회로를.

21절 볼 텐데 먼저 17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다 같은 취지에요.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우리한테 허락할 때, 너는 감사나 하라. 감사하라. “내가 못한 걸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의롭지 않고 주님이 의롭습니다.”하고 주님의 사랑만 높이라 이 말이죠. 내가 하려고 덤벼들지 말고요.

자, 21절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원했던 문장 있잖아요, sentence, 문장. 문장을 그대로 사용해서 다 이루심을 경유해서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평소에 유대인들, 죄인들이 주님 앞에 자기 구원해달라면서 자기가 작성하고 자기가 생각해놓은 그러한 정답 같은 문장들이기 때문에. 지금도 종교단체 보면 이런 게 많아요. 책망할 것이 없고 담대하면 무엇이든 구하라. 주께서 들어준다고요.

그 계명은 바로 뭐다? 23절에 그 계명은 ‘사랑’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결국 오늘 강의의 결론은 뭡니까? 사랑에 두 종류가 있다.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랑의 두 종류는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다 이루신 사랑이 뭐를 친다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치면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 “고맙습니다.”

감사가 나오는 그러한 다 이루심의 구조 안에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분류체계 안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 지키겠다고 나서지 말고 왜 나는 이 말씀을 내 잘남에다가 맞추어서 지키고자 하는지, 이러한 죄 많은 육신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다시 다 이루심 앞에 설 때에 십자가 앞에 설 때에 같이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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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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