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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1212a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1212a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10절부터 24절까지 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돼 있죠.

요한일서 3장에서 24절까지 쭉 읽어보게 되면, 무엇을 나타내느냐? 이걸 나타내요. ‘현상’이라는 것.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러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분류를 할 때 사도 요한은 딱 두 종류로만 분류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 발상이 대단한 발상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1.사랑하는 관계, 또 하나는 2.사랑하지 않는 관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리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딱 두 개의 분류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개의 분류, 1번과 2번 두 분류가 나온다는 것은 이런 분류를 할 수 있는 그 토대, 근거는 단 하나에서 나온 두 분류죠.

이것은 쉬운 겁니다. 서울대학에 시험 치러 온 학생들이 결과적인 현상을 나타내는데, 뭐냐 하면은 합격한 자와 합격되지 않은 자. 그렇게 분류되죠. 서울대학교 시험 치러 온 학생이 고급차 타고 왔다 또는 걸어왔다. 고급차 타고 왔으니까 합격, 걸어왔으면 불합격, 이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서울대학에 합격, 불합격은 수능과 내신 뭐 그렇게 여러 가지 다른 거 합쳐서, 하여튼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죠. 하나의 기준. 그게 뭐냐 하면 단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단 하나의 기준.

그러면 사랑하는 자는 다른 걸 사랑하는 게 아니고요. 이 단 하나의 기준을 사랑하는 자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랑하는 자나 사랑하지 않는 자도 자기 집 식구나 자기 자식이나 손자 굉장히 사랑해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기에, 자기 식구나 자기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 이웃들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 돌보고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기부하고 아프리카에 우물 판다고 돈 주고 그렇게 할 수 있고 환경 문제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잖아요. 아프리카에 우물 파라고 돈 주면 하나님의 자녀고 돈 안 주면 마귀의 자녀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분류를 할 때 둘로 나타내는 것은 ‘서로 안 맞기 때문에 우리 따로 가자. 우리 섞이면 안 돼. 우리 가는 길이 달라. 화끈하게 고만 따로따로 놀자.’ 이래서 두 분류를 하는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온다.’ 그걸 기준으로 하게 되면 이 세상은 두 종류로 나눠져요. 아프리카에 우물 파는데 기부한 사람/ 기부하지 않는 사람 딱 그렇게 나눠지겠죠.

그런데 문제는 사도 요한은 아프리카 우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로 둘로 구분 짓는 그 단 하나의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그 단 하나의 기준이. 정답이 궁금하십니까? 그 기준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뭐 ‘궁금하십니까?’ 이러면 뭐 알려주겠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그 딱 하나의 기준이 뭐냐? 알려 드려야죠. 단 하나의 기준. ‘기준 없다.’에요. 단 하나의 기준: 기준 없다. 기준이 없는 거예요. 기준 없는 것이 한 사람은 천국가게 하고, 한 사람은 지옥가게 합니다. 환장하죠, 환장해.

기준을 하게 되면, 뭐 아프리카 우물 판다하면 아프리카에 돈 보내면 되잖아요. 우리의 행함을 추가하면 되거든요. 그 기준에 맞춰서 행함이 주어지면 되는데, 이 요한일서 3장에서 그리고 요한일서 전체에서 인간들이 추가적으로 보정하거나 버티거나 추가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답은 뭐냐? 기준 없음으로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는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오케이? 쇼킹하지요. 쇼킹합니다. 서울대학교 시험 치는데 “자, 60분 동안 문제 푸세요.”라고 문제지를 줬어요. “자, 이름 쓰시고 문제 푸세요. 시작!” 했는데 문제가 없어요. 이름 기재하는 건 있는데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문제가 없는데, 어떤 애는 탈락되고 어떤 애는 합격했어요. 그럼 정답은 뭐냐? “‘문제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제시된 문제는 아예 없었습니다.’가 그게 기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건 뭐 합격이죠.

하나님께서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면서 사람에게 기준을 왜 제시하지 않냐 하면은 모든 인간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한테는 죽었다는 사실 그걸로 주님께 충분해요. 그런데 죽었다는 그 인간이 뭔가 내세우고 뭐 구원받기 위해서 행함을 시도한다면 그 자체가 뭐냐? ‘나 안 죽었다’라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이론대로라면 우리는 죽은 채로 있어야 하느냐?” 여러분, 죽은 채로 한번 있어 보죠. 뭐 한 일주일 동안 죽은 체 하는데 일주일 이후에는 몸이 근질근질 할 거예요. 못 참겠다! 이렇게 나올 수 있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죽은 체 하는 겁니까? 언제까지? 벌써 내가 일주일 동안 죽은 체 했는데 아직도 모자랍니까? 앞으로 뭐 몇 개월 더 해야 돼요?” 그럼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구, 살았네. 죽은 척은 하는데 실제로는 살았다고 의식하면서 죽은 자가 구원된다 하니까 죽은 척한 행함을 네가 지금 아주 야무지게 실시했구나.”

주님의 이 기준 없음에 대해서 인간은 처음에는 따르려고 애를 쓰지만 나중에는 ‘더는 못 참는다!’ 이게 불룩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더는 못 참는다. 참을 수가 없다. “내 미래다, ‘내’ 미래. 내 미래, 내가 천국 가냐 지옥 가냐 하는 것은 내 미래인데 내 미래에 내가 왜 관여를 못해? 이거는 부조리하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내 미래다, 내 미래. 아니, 내 미래인데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내가 어느 정도 어떤 지분을 가져야 되지 않느냐? 내 미래를 일방적으로 타인이 결정하지 말고. 내 문제인데. 뭐 내 의견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의견을 왜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합니까?’ 그런 발언하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른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 결정은 나한테 묻지 말고 아빠 엄마가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그런 것은 ‘어른스럽다’의 반대가 되겠죠. 이게 뭡니까? ‘어린아이 같다’ 이렇게 되죠. 어린아이 같다. 자기의 자율권, 결정권 다 넘겨버리는 거예요. 다 넘겨 버리는 거. 어린아이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죠. 여러분 잘 아시죠. 어린아이를 예수님이 딱 세우시고, 앞에 쫙 12명의 누가 있겠습니까? 어른들이 있죠. 어른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무리한 요구인지를 여러분 아시겠죠. 그 현장에 있다 치고 아시겠죠. 이미 제자들은 어린아이 시절을 지났어요. 어린아이 시절이 지났는데 그 시절 지난 이후에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조건 걸기를,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너희들 다 잘렸어. 너희들 다 끝났어.”라는 일방적 선포로 들릴 수밖에 없지요.

너희들은 못 간다. 너희들은 못 간다. ‘너희들은 못 간다’ 이걸 제가 다른 말로 표현할게요. ‘내 힘으로 못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못 간다. 이제 와서 내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힘자랑 하는데 천국에 가게 되면 누가 높은 자리 앉느냐 힘자랑 하는데, 그런 것은 힘을 신봉하는 세상 권세자들이나 할 짓이다. 권세자들이나 할 짓이다. 너희도 한 통속이고 세상 권세자도 너희와 똑같다.” 그 다음에 이야기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마치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요청하는 것처럼 느끼게 될 거예요.

오늘 요한일서 3장 전체 내용 다 읽어보셨죠.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뭔가 요청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요청하는 것‘처럼’. 사실 요청한 게 아니에요, 요청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처럼 하고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시고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게 아니고 섬기려 하심이라”(마 20:28, 막 10:45)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자들이 좀 머리가 있으면 딱 알아들어야 돼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 선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가능을 분명히 확정지어 놓고, 그다음에 불가능한 족쇄가 어떻게 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가에 관해서 제자들 너희들이 할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족쇄는 풀렸다.

“어린아이 같이 되지 못해서 지옥 가야 마땅한 그 지옥의 족쇄가 풀렸다면, 너희들은 누구를 주목해야 되는가? 아직도 네 행함, 네 가능성을 주목해야 되는가? 아니면 누구를 주목해야 돼?”라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나를 대속물로 주러왔다. 이것이 세상 권세자와 반대 방향으로 가시는 주님의 길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자들 가운데 끼어있다면 여러분의 태도는 어떤 식으로 여러분의 태도를 정리 정돈해야 될까요? 어떤 식으로? 만약 여러분이 끼어있다면? 이렇게 정리 정돈하시면 됩니다. ‘아, 주님께서 뭘 하실 모양이다. 하실 모양이다. 주께서 주님만 하는 남은 일이 뭐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관여하지 못하고 주만 하시는 무슨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다음에, 그 주께서 하시는 일, 이 땅에 오셔서 하고자 하는 일,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될 거예요.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다 이루었다.

그런데 그 다 이루었다는 것에 여기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죠. 다른 사람은 어른스러우니까. 주님의 뜻과는 배치되는 내용이 막 튀어나오니까. 그럼 다 이루었다면 나를, 제자들을 배제하고 다 이루었잖아요. 제자들을 배제하고. 구원될 자가 주님 일에 협조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님이 다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 이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겠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가지 못한다는 내용, 그것도 다 이루었겠죠. 그것도 다 이루었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이미 어른이라서 어린아이로 돌아가질 못해요. 돌아가지 못하면 지옥행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걸 전제로 해서 다 이루었다면, 주님께서 그다음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다 이루었다의 공로와 혜택을 줄 때에 제자들은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어른 상태가 아니고 자기의 가능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유치원생 어린아이가 되겠죠. 그럼 열두 제자는 뭐가 됩니까? 유치원생, 유치원에 같이 다니는 같은 동무들이 되겠죠.

같은 동무들 이들의 공통점, 이들의 특징은 모든 일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모든 판단을 하지 않는 상태에 돌입하는 겁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그 지독한 악마가 심어준 그 선악체계.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악체제에 적용받지 않는 세계가 형성됩니다. 순진무구하게 모두가 어린아이같이 되는 그 상태가 됩니다.

덧붙여서 마태복음 7장 산상설교의 일종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 비판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것도 뭐냐면 판단에 관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어린아이에게는 이런 게 없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이런 게 없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환경을 그냥 즐기는 것뿐이에요.

만약에 판단하게 되면 인간은 어떤 판단을 하느냐 하면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걸 판단한다고요. 그런데 어린아이한테는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에요.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게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이거는 이미 어린아이 시절을 지나간 거예요. ‘엄마 회사가 너무 잘 됐대. 나 그러면 용돈 타겠네.’ 이건 어린아이가 아니죠.

엄마가 무슨 사업을 하든 사업이 부도가 나든, 현재 나의 판단을 하지 않는 여기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사업이 잘됐다고 해서 ‘내가 판단을 똑바로 했다.’ 이런 생각을 어린아이는 가질 필요가 없어요. 부모 사업이 잘되든 못되든 간에 ‘엄마, 아빠만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뭐 이렇게 나오는데 사업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이것을 한번 점검해 봅시다. 어떤 것을 점검해야 되냐면, ‘사랑으로만 과연 세상의 전체 일어나는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느냐?’ 사랑으로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전부다 체계화시키고 조직화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다 이루었다’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여러분들이 설명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놀랄 일이 아니죠. 왜냐하면 모든 놀랄 일은 ‘다 이루었다’로 이미 선점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다 이루었다’를 받쳐주기 위해서 부속적으로 파생된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에 전부다 다 연계돼 있으니까 ‘다 이루었다’를 정점으로 해서 모든 것은 그 안에 하부 조직으로 다 체계지어 있으니까 놀랄 만한 일이 없지요.

“할머니는 당뇨가 심해서 앞으로 3개월까지 못 삽니다. 놀랍지요?” 병원에서 이렇게 하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게 뭐 놀랄 일입니까? 예? 의사 선생님은 아직까지 놀랄 일을 경험도 못해봤어요. 그게 놀랄 일이에요?”

가스 불 안 끈 채로 성경공부 간다고 나왔는데 성경공부 쉬는 시간에 전화가 왔어요. 홀라당 이층집 다 탔대요. “어머님, 빨리 오세요.”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야, 천천히 간다.” “아니, 왜요?” “그게 뭐 놀랄 일이고, 그게?” “개집도 탔는데.” “개집이 타든 그게 뭐 놀랄 일이야.”

“집사님 애가 사고 쳐가지고 지금 유치장에 있는데 피해자가 3억에 합의보자 합니다. 놀랍지요?” “그게 뭐 놀랄 일이야, 그게? 그게 무슨 놀랄 일이야.” 그러면 형사가 “아니, 그게 놀랄 일 아닙니까?” “형사님 잘 들어보세요. 그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위해서 우리 아들이 동원된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지금. 그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룸하고 네 아들 구치소 가는 거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평소에 그 연관이 왜 안 짜였어요, 그래? 미리미리 짜시지. 미리미리 짰어야지. “아이쿠, 이러면 안 되는데.” 뭘 이러면 안 돼요? 무슨 놀랄 일이 있어요?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놀랄 일은 이미 마감됐는데. 더 이상 접수 안 받아줍니다. 더 이상 놀랄 일 접수를 안 받아줘요. 다 끝나버린 거예요.

지금 표정들 보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네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아, 나는 빨리 육신을 벗어버리고 주님께로 가고 싶다.” 그러니까 뭐 주위 사람들이 “아휴, 더 사셔야 됩니다.”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에요. 그럼 사도 바울이 죽겠다 하는 게 그게 놀랄 일입니까? 그래서 옆에 사람이 말려서 ‘더 사셔야 돼요.’ 이래야 돼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빨리 육신을 벗고 싶다는 것은 사도 바울 입장에서 무엇과 관련된 일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와 다이렉트로 연결된 이야기거든요. 다이렉트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육신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다 이루었다’를 훼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기에 나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빨리 육신을 벗어서 주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게 빌립보서 1장에 나오고(“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1:23)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5:8) 이야기입니다. 죽기 전에 내가 해야 될 뭐 여러 가지 리스트 있잖아요. 버킷 리스트. 사도 바울보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건 뭡니까?” “빨리 죽는 거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빨리 죽는 거. 그런데 주님께서 그걸 지금 안 들어줬지요.

“아니, 그거 말고. 사도 바울님, 살아서 일단 살았다 치고 산 상태에서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뭐 골프를 잘 치고 싶다든지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어떤 뭐 다이아 반지를 선물로 받겠다든지 뭐 좋은 차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겠다든지 뭐 그런 거 없어요?” 하게 되면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만있어 봅시다. 그 좋은 차, 집 사고 하는 그것과 다 이루었다와 지금 연관이 있는가를 조사해보니 다 이루었다의 조직표에 그게 안 들어 있네요.” 이렇게 될 거예요.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이루었다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고, 세상, 그게 마귀 자녀죠, 세상과 연결된 조직에서 나온 거죠. 세상에 연관된 조직. 조직의 맛을 한번 보실래요?

그러니까 tree, 나무가 두 개 있는데요. 사도 요한은 나무 두 개를 해놔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딱 둘로 분류가 되는데 하나는, 다 이루었다. 하나는, ‘다 이루었다’를 극렬하게 저지하고 방해하는 것. 그런 거 듣지도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그쪽. 마귀 쪽의 트리. 조직표.

트리라 하는 것은 조직표를 그리면 이게 꼭 나무 같거든요. 정점으로부터 밑에 내려와서 파급된 것. 모든 현상까지 다 긁어모은 하나의 정점이 있는데 이 정점이 예수님의 정점과 딱 두 개가 있다는 것이 요한서 3장 11절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각각 거기서 그들은 현상을 나타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 같으면 자녀다운 현상, 마귀의 자녀 같으면 숨길 수 없는 마귀의 자녀의 현상이 나타나죠. 이 현상이든 저 현상이든 인간 자신의 자율성이라든지 자기의 행함을 여기 조직표에 자진해서 끼워 넣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두 조직표 두 tree, 나무 중 어느 한 쪽에 속해 있지, 자기가 여기 두 나무 사이에 따로 나와가지고 ‘보자, 보자. 내가 어느 쪽으로 가게 되나?’ 자기가 골라잡을 그러한 존재가 아니에요.

왜? 인간은 마귀보다 힘이 약하고, 인간은 예수님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힘센 마귀나 힘센 주님이 인간을 자율적인 외톨이로 그냥 방치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situation, 현 상황이에요. 소속이 딱 두 소속으로 벌써 딱 분류돼 있어요. 뭐 죽어서 분류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미 분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요한일서도 없었을 거고 이런 사실을 어느 인간도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그때 유대 나라에는 뭐가 있었는가? 유대나라 신학, 유대교 신학이 있었지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열심히 추진한 일이 있습니다. 그건 그들 나름대로의 분류를 하는 거예요.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자와 율법을 모르고, 알더라도 율법에 대해서 열심으로 매진하지 않는 하층민들. 저질스러운 질 낮은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 율법에서 가르치는 그 정결법에 참여하기가 곤란한, 시간상 여건상 곤란해서 율법적인 죄를 그때그때 때마다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그걸 덤터기 쓰면서 그냥 밥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분류하죠.

멀리서 찾을 거 없죠. 천주교 보면 되죠. 자, 성당에 가면 신부들이 고해성사 하는 데 있죠. 방을 만들어 놓고, 이쪽은 신부가 앉아 있어요. 열혈 사제가 앉아 있어요. 열혈사제 알아요? 전직 특수부대 요원인데 지금 한창 이 드라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남길인가 삐딱하니 앉아 있고. 저쪽 편에는 김홍식, 마약사범이 옆에 또 있어요. 그러고 이제 고해하는 거죠.

이 분류를 보세요. 이쪽 사제는 항상 성당 안에서 고상한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에 묻은 때, 묻은 먼지가 좀 적어요. 왜냐하면 수녀들이 깔끔하게 성당 내부를 청소해가지고요. 깨~끗하게 청소했기 때문에 때가 없는데, 여기에 세상에 아주 노동의 강도가 센 그냥 육체노동에 찌든 그런 사람들이 올 때는 벌써 알아서 기어오잖아요.

“그동안 잔업 한다고 성당 두 번 빠졌습니다. 성찬식도 빠졌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사제가, 신부가 처방전을 내려줘요. 처방전을. “식후 30분에 주기도문 두 번 하고. 주기도문 외우시고 성경 하루에 두 장 읽으시고.” ‘식후 30분’은 내가 집어넣은 거고요. “주무실 때 우선 꿇어앉아서 천주님께 기도하시고, 집에 가서 주기도문 좀 이렇게 외우시면 됩니다. 그다음 사람!” 바쁘다. 줄섰다, 지금. 나 빨리 점심 먹으러 가야 돼. 빨리, 그다음 사람! 내과 의사도 아니고 이건 뭐… 간호사! 그다음 사람 보내. 그다음 사람 들여보내.

이게 뭡니까? 이 자체가 뭡니까? 분류잖아요. 자기가 트리의 정점에 서 있잖아요, 자기가. 누구든지 바리새인처럼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 간다?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 천국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인간들은 그거라도 그들은 원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미래는 내가 결정하고 싶고 내 자율성을 결정하고 싶은데 내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 행함으로 거기에 관여가 되면 내 미래가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는 근원적인 궁금증이고 이거는 근원적인 내 불안에서 유래된, 이거는 꼭 해답을 얻고 싶은 요소입니다. 자기의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죽음 이후에 자기 사정에 대해서.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은 필수적이죠.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어떤 것을 몰랐냐 하면, 자기들에게 행함을 요구하고 율법 잘 지킨 자가 의로움과 경건함의 가중치 그것이 자꾸 높아질수록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는 그 가르침이 악마가 그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그 바리새인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앞잡이 되어서 유대인 전체를 마귀의 자녀로 다 만드는 그 현상들을 자아냈죠. 그러면 그 유대인만 그러냐?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됩니까? 물어볼 것도 없지요.

만약에, 만약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께서 아까 제자들한테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그런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정점으로 해서 예수님이 가르친 그 산상설교를 정점으로 해서 하나의 트리를 만들어 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트리에서 제일 꼭대기가 예수님이면 이게 다 이루었다가 되겠죠. (벌레가 자꾸 날아다니는데 이건 무슨 현상입니까? 무슨 관련된 현상입니까?)

다 이루었다가 되면 다 이루었다를 정점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있잖아요. 38년 된 병자, 간음한 자 용서, 물이 포도주 되고, 물 위를 걸으시고, 물고기 배에서 꺼내어 세겔 주는 거. 그 모든 것이 여기 하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딸랑딸랑 방울처럼 전부다 연결돼서 매달리겠죠. 매달려 있겠죠. 방울처럼 모든 말씀과 행하심이.

그럼 여기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다 이루었다’라는 그 확연한 사실에 대해서 무엇을 어떤 내용을 다 이루었는가를, ‘다 이루었다’로부터 해서 요런 말씀들을 거쳐서 다시 ‘다 이루었다’로 올라가면 되겠죠. 이게 바로 십자가로 인한 성경해석이죠. ‘다 이루었다’부터 출발해서 그 ‘다 이루었다’가 알알이 어떠한 이슬과 열매들을 가지고 톡톡 터지듯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우리한테 들려주느냐.

예를 들어서 ‘비판하지 말라’하는 그 말씀 같으면, 전에는 우리가 ‘아, 이거 행해서 구원 받아야지.’ 이렇게 나왔다면 다음에 이제 성령 받고 난 뒤 다 이루심을 알고 보면, 그 다 이뤘다는 내용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과 관련성 있게 이렇게 연관성 있게 다시 십자가만 드러내는 해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만 드러내는 해석.

그럼 절망적이에요, 절망적이 아닙니까? 어때요? 절망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로마서 6장 같은 경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다 이루심,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하여 같이 죽은 자는 그리스도가 살아나시매 같이 살아났다(롬 6:4, 6:3-11)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어떤 사람이 손 들고 “사도 바울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에게 네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그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으이구,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듣네.

어린아이 같이 된다 하는 것은 그건 주님의 요구 사항인데 거기에 대해서 너희 쪽에서는 이미 불가능한 걸로 결론지어졌잖아요. 그 불가능함, 불가능하다는 그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돼요. 다 이루었다 표현으로 바꿔치기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참 쉽죠? 너무 쉽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전도하라. 어떻게? 무시로. 무시로 무시로~ 전도하라 했잖아요. 그럼 그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방금 예를 들었는데 응용문제 나가면 하여튼… 수학 정석 다시 봐야 돼. 응용문제 내면 또 못 맞추고…. 네가 무시로 무시로 전도하고 또 쉬지 말고 기도하고 뭐 어떻고 있잖아요. 사도 바울 편지에 쭉 나오잖아요. 있는 것으로 족하고 있는 걸로 만족하고 돈을 사랑하지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그 말씀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킵니까?

그럼 사도는 뭐라고 해요? 뭘 지켜, 지키기는! 뭘 지켜. 나 같으면 ‘다음 사람, 다음 사람’ 부르겠는데. 뭘 지켜? 왜 본인이 분류를 해, 본인이. 지킨 나와 안 지킨 나. 뭐 아로나민 골듭니까? 먹는 날과 먹지 않는 날이 확실히 다른. TV를 봐야 뭐 이해가 되지.

무슨 말씀을 지켜요? 아니, 말씀을 왜 지킵니까, 우리가? 우리는 다 이루었음을 확인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죄인을 여기다가 심어놨는데 지키긴 뭘 지켜요? 있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는 이 모습. 그래서 나는 내 힘으로 만약 이걸 지키려는 자체로 나는 죄인이 된다. 이 사실이 바로 타인에게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도 못 지키는데 네가 천국을 가?”라고 하면 뭐라 합니까? “그런데 가.” “뭐 무슨 기준인데?” “기준이 없어.” “뭐 그런 게 다 있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어.” “네가 미쳤구나.” “그래, 내가 사랑에 미쳤다.” ‘사랑에 미쳤다’가 오늘 요한일서 3장 아닙니까. 사랑에 미친 거예요.

어디 미치지 않고서야 요한일서 3장 16절, 미치지 않고서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떻게 형제를 위해 목숨은 버릴 수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예를 들면요. 동서끼리 같은 교회 다니는데 동서 아들이 신장암 걸렸다. 그래서 쓱 보니까 형님네 DNA하고 맞는 것 같은 느낌 들어서, “그거 두 개 있어서 한 개는 떼 줘도 산다는데, 그거 한 개 떼 주시렵니까?”라고 한다면 1번, 화낸다. 2번, 곰곰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본다. 3번, 떼 가라고 한다. 4번, 멱살 쥔다. 몇 번입니까? 정답은 ‘너 죽고 내 죽자’입니다. 너 죽고 내 죽자.

“네 새끼 살리는데 내 새끼가 왜 동원되어야 되는데? 내 새끼가 나한테 얼마나 귀한 자식인데.” 그러면 저쪽에서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쳤는데….” “시끄럽다! 내가 아브라함이가?” 그 현상을 보고 사도 요한이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그게 ‘다 이루었다’에서 파생된 현상입니다. 파생된 현상이에요.

인간은 말씀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척하지만, 한 순간도 어느 순간도 어느 쉬워 보이는 말씀 하나 지킨 적이 없습니다. 괜히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왜 우리 힘으로 못 지키냐? (벌레 하나도 못 쫓아내는데.) 다 이루심을 경유해서 말씀이 완성되는데, 인간은 다 이루심을 경유 안하고 ‘아, 요거는 내가 지킨다’ 그런 구절 보이거든요.

그런 구절 중에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온 구절도 있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딱 보면서 사람들은 뭐를 자신하느냐 하면 “원래 우리 집안 DNA가 양선과 온유는 끝내줘. 아버지 순하지, 엄마 순하지, 자식이 안 순할 수 없어.” 그걸 지 마음대로 양선이라 하는 거예요. 양선. 그게 무슨 양선입니까? 반드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 될 때, 그게 온순함과 온유함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해석은 그건 주께서 안 받아주는 해석입니다.

지금 아까 그 질문이 아직 유효하니까 또 물어보겠습니다. ‘사랑으로만 과연 모든 세계의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습니까?’ 제가 물었죠. 그러면 답변은 예와 아니요, 예스, 노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쪽입니까? 네? 제가 뭐 어떤 속임수를 씁니까? 한두 번 쓴 거 아니지만. 예스에요, 노에요? 예스가 되지요.

이게 바로 성도로 하여금 아직도 세상을 살게 하는 이유입니다. 다 이루심이 네 몸뚱아리 거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가운데서 네가, 다 이루심과 십자가와 전혀 관련성 없는 것들이 어떻게 관련성 있게 나타나는지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되는 순간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과 조직화가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정점에 있는 자기 트리를 평생 동안 현재 수립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 여기 있음’을 정점으로 해서 그다음에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나’가 있고 나에서 자기만의 세계가 형성되게 되면 여기서 두 분류가 생겨요. 두 분류가 생기는데 그거는 뭐냐? in과 out. 안과 밖이 생깁니다. 안과 밖.

저 사람은 내 편, 저 사람은 내가 배척해야 될 내 바깥으로 내보낼 자, 이건 내 안으로 거두어드릴 자. 이게 안과 밖이에요. 인간들이 이런 짓을 한다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어떻게 될까요? 똑같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녀, 마귀의 자녀. 그 작업을 주님께서 완벽하게 다 현재 완성시켰습니다. 예수님 안이냐, 예수님 밖이냐. 그것으로써 의롭다, 악하다 모든 성경개념은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로 분류가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 입장에서는 이미 성도도 인간이잖아요. 인간이라서 인간 같으면 어떤 위치에 있다 했습니까? 나를 정점으로 세워서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불리한 사람이 안과 밖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냐 하면 내 중심의 안과 밖 이것을 예수님의 다 이루심으로 이걸 바꾸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

너 어떻게 구원할까 하는 문제, 이건 아니고요. 우리의 구원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고요. 예수님의 안에 있으면 구원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면 이미 성령이 임했고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구원된 사람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증인돼야 된다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증인이 뭐냐?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느냐?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부터 하죠. 내 중심으로부터. 내 중심으로 하는 이 고집이 있는데 이 고집이 어떻게 돼요? 성령님의 강력한 그 힘에 의해서 내 중심이 뭐로 바뀝니까? 나 있던 자리가 주님의 뭐로 침투 공격 받아요? 다 이루심으로 공격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 중심은 나 중심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나의 사랑이죠. 그렇죠? 그러면 이것을 주님께서 다 이루심으로 공격하잖아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할 때 이 사랑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앞에 있는 사랑을 성경에서는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같은 경우에 ‘나의 질투심으로’. 나의 질투심으로.

나의 너를 향한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질투성을 띈 사랑이기에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인 줄 알아라. 나의 사랑인 줄 알아. 상당히 허황되어 보이고 비구체적이고 비실제처럼 보이죠. 비실제적인 것처럼 보이고 너무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이 실제로 이 역사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거는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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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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