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6a 울산강의-역대기하(9강) 10장 16절 : 좁혀진 길
20241206a 울산강의-역대기하(9강) 10장 16절 : 좁혀진 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0장하겠습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1절) 이렇게 돼 있어요. 세겜은 어디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보다 북쪽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가 있다면 사해와 같은 지점에 있어요. 요단강이 있는데 세겜은 이쪽에 중간쯤에 있습니다.
세겜은 현재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 요단강 서쪽)에 포함돼 있습니다. 주위에는 장벽이 쳐있고요. 하마스는 이쪽(가자지구Gaza Strip, 지중해연안)에 있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둘로 쪼개져 있어요. 서안지구는 상당히 온순한 데고, 하마스는 과격한 데고. 과격한 데가 이스라엘한테 작살났습니다. 서안지구는 주로 올리브 농사짓고 산다는.
예루살렘은 유다지파고 위에 벤야민지파, 그 위에 므낫세, 에브라임 두 지파가 세겜 땅입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서. 거기에 르호보암이 전체 이스라엘이 왕이 되기 위해서 그 열두 지파의 의견들을 모으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평소부터 다윗 때 세바의 난이 있었거든요. 그쪽의 열 지파와 밑에 베냐민+유다(유다가 주종이죠), 이미 이질성을 갖고 있었어요. 세바의 난 때 요압이 평정을 했고, 그래서 그게 잠잠한 줄 알았는데 평정한다고 잠잠하진 않잖아요. 불만들이 있지요.
‘열두 지파인데 어떻게 왕이 계속해서 한 지파가 독점하느냐? 기분 나쁘다.’ 그런 거죠. 권력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왕이라 합니다. 그러면 왕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은 집중되고 있는 왕의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된다는 데서 자존감이 상하지요.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말이죠. 그래서 평소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감정들이 많았던 겁니다.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이 그걸 알고 좋게 해서 유다지파에서 솔로몬 이후에 내가 후계자니까 그냥 왕으로 계속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협상하기 위해서 세겜에 올라간 겁니다. 르호보암의 이 말은 솔로몬 이후에 백성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자기는 전체 숫자의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모든 많은 숫자로부터 추대 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갔는데 여기에 솔로몬 때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어요. 여기 열 지파를 자칭 대표하면서 유다 지파가 왕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반란을 꾀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역대하 10장 2절에 나오는데 여로보암이에요. 발음이 비슷하지요. 남쪽의 유다 왕 솔로몬의 후계자는 르호보암이고, 북쪽의 자칭 대표자로 여기는 자는 여로보암이고.
여로보암이 솔로몬한테 찍혔습니다. 왜 찍혔느냐 하면 열왕기상 14장에 보면 이 여로보암에게 아히야 선지자가 찾아가서 예언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걸 하란 말이 아니고 네가 하나 안 하나 그대로 된다는 이야기에요. 큰 차이입니다. ‘예언이 이러니까 네가 실행하라’ 이게 아니고, 네가 실행하든 안 하든 이미 미래는 결정돼 있다는 사실을 여로보암에게 언급한 이야기가 열왕기상 14장 6절에 나옵니다.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선지자)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흉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8절에,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여로보암이 어떤 반란기가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고요, 반란했으면 똑바로 반란해야 되는데 반란했던 너도 마찬가지로 망한다는 그러한 안 좋은 소식을 여로보암의 처에게 언급해서 네 남편한테 이야기하라고 아히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예언대로 계획대로 그냥 다 진행해요. 진행하는데 그 예언을 만약에 안 듣는다, 또는 예언을 잊어버린다, 예언을 무시한다, 관심 없다 하고 예언 떼놓고 그 뒤에 인간들끼리 너 잘났느니, 나 잘났느니 한바탕 해버리면 그들이 어떤 활동을 하던 나중에 예언과 맞춰보면 예언대로 돼가요. 그것 참 희한하죠. 예언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예언을 무시해도 예언 바깥으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예언, 예언은 말씀이죠. 말씀 안에서 못 벗어난다.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예언의 진척과정이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언은 인간들을 갖고 사용한다. 인간의 생각, 활동보다 말씀이 우위에 있다 이 말이에요. 예언은 인간들을 갖고 사용한다. 이걸 다시 이야기하면 예언은 인간들을 사용하고 버린다.
이것을 충분하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알게 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구원은 핵심부분이 이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다.’ 이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거예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문장이 모순되지요.
버림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선 뭡니까? 구원되지 못했잖아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를 버림받았다는 거예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를 경험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소위 신앙이라는 것을 기초부터 처음부터 다시 놔야 돼요.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무슨 생각으로 구원 생각하고, 무슨 생각으로 죽어서 천국 가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 내용을 건성으로 알고 그냥 대충 알고 자기 구원 욕구는 아주 강렬했고. 빡세게 성경 알면 구원 되겠지, 한 거예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차용해요. 성경이란 그 내용을 자기한테 긁어모아서 이 정도 긁어모으면 구원되겠지,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성경 보면서 내게 필요한 걸 다 수집하는데 근본적으로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뜻은 모르고 성경을 너무 건성으로 함부로 알았던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달리 이야기하는 것보다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저녁 잡숫고 슬슬 잠이 오니까 질문을 갖고 설명해야지요.
다음 중 어느 것이 심각한 일이고, 어느 것이 사소한 일인가? 두 가지 문항을 하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일, ②나의 일. 어느 것이 심각한 일이고, 어느 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질문을 꼭 안 다그쳐도 다 아시죠? 심각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 밑에 인간의 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주셨고 그 안에 인간들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인간들을 쓰고, 그다음에 뭡니까? 갖다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케이’하면 구원이고, ‘안 돼요’하면 저주에요.
하나님이 쓰고 날 버리는 것에 대해서 안 돼요,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보다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 순식간에 그걸 노출시킨 거예요. 자기 속마음을 그냥 터뜨려버린 겁니다. 제가 여태껏 신앙생활 몇 년 했는데 이제 와서 버림받으면 내 수고가 다 허사로 끝나지 않습니까? 구원보다도 일상의 생활, 내가 이만큼 인생 살기 위해서 내 인생 구축하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이 결국 이거는 버려지기 위해서 한 아무 쓸데없는 짓거리만 끌어 모았단 말입니까, 에 대한 반감, 불만, 분노 그런 게 나오지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언급한 게 한 게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근거를 내세울 수 없다는 것, 이 자연세계에서. 내가 있다는 것을 이 자연세계, 과학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속에 들어있는 본성은 하나님을 죽이는 것, 하나님을 죽이는 본성이에요.
세 번째, 네 번째는 구원된 자에게 해당되는 건데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이 두 개의 차이를 겸하여 양면성을 다 갖고 있는 사람. 왜? 하나님의 일이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우리한테 복제가 돼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구원받으면 누구 일 돼요? 하나님의 일 돼요, 내 일 돼요? 자기 일 되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한다는 양면성, 겹쳐지지 않는 이질성을 같이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네 번째 마지막은 그런 사람은 주님 가시는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이 땅에서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게 돼 있다. 강남강의에서 그렇게 설명했어요. 혹시 들은 사람 기억납니까? 돌아서만 다 잊어버리고, 또 그런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줄 알고 몇 번 강조했는데….
오늘 이스라엘의 왕 뽑는 문제에 대해서 르호보암이 나이 많은 선임자, 솔로몬의 신하들한테 묻고 자기와 같이 성장했던 젊은 친구들한테 묻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백성들한테 순하게 해주세요.’ 이거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이고,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백성들 숫자도 많은데 솔로몬의 차기인데 전자보다 못하다면 되겠습니까? 전임자에 대해서 백성들이 존경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솔로몬 왕이 완력으로 통치했다는 뜻인데 그 솔로몬보다 더 대단한 왕으로 인정받으려면 솔로몬보다 더 세게 백성들 다루어야 됩니다.’ 이게 젊은 사람들의 조언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쪽을 택합니까, 르호보암이? 늙은 사람 말 듣는 게 아니고 젊은 사람 말 들어서 세게 나오다가 여기서 어떻게 했습니까? 세게 나오기 위해서 계엄 선포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난 너희와 안 논다 해서 그때 여로보암이 등장해서 이쪽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 딴 나라 되고 아래 두 지파는 르호보암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는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단일 나라가 되어야 야곱의 축복이 계속 연속적으로 주어지는데 이 나라에 갑자기 왕이 몇 명 됩니까? 두 명 되었지요.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결정적인 것,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백성들이 악하다는 거예요. 왕이 악한 것은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왕이 악하다. 백성들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악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악하게 해서 나를 두 조각으로 해서 이도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예언대도 되게 한 이유는, 중요한 게 계속 나와요. 구원이 없다가 아니라 구원이 있어요. 있는데 구원의 통로를 하나로 좁히기 위해서예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요 할 때 ‘나’라는 몇 분입니까? 단 한 명이죠. 하나로 좁히기 위에서예요. 하나라 좁히기 위해서 나는 거기서 떨어져나가야 돼요, 안 떨어져나가야 돼요? 떨어져나가야 돼요.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되지요. 낄 데 끼란 말이죠. 낄 자리가 아니에요. 건방지게 이 땅에 태어난 나라는 인간은 구원의 통로에 낄 자가 아닌 거예요.
구원의 통로에서 떨어져나가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구원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고 다 구원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써 구원의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였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기는 떨어져나갈 때 그럴 때 내 이름으로 내가 구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확정된 결정된 뜻이다. 이게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이름으로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그것을 솔로몬은 몰랐어요. 솔로몬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왕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백성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이 아는 것을 솔로몬이 몰랐던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다윗언약은 있지만 솔로몬언약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언약의 취지를 인수인계 받아서 그대로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는 말씀이 뭐예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 이야기했지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아니하면 무엇이 없어요? 구원이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범죄 해놓고 자기의 범죄 했다는 그 죄가 뭔지를, 범죄는 했는데 그래서 보편적으로 죽어가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내내 범죄 했다는 내 죄가 뭐지?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어요.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도대체 내 죄가 뭐냐, 내 죄가? 알려들어요, 죄가 뭔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하는 게 죄에요. 선악과 따먹은 주체에 마땅히 버림받아야 되는데 버림받지 않으려고 버티는 게 죄란 말이죠. 그 버티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있기 때문에 받쳐주기 때문에 잘하면 구원된다고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마귀가. “네 자신이 아깝잖아. 그동안 애쓴 게 아깝잖아.” 이런 식이에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전부 다 말씀 안에 있다 했지요. 다 버려져야 돼요.
말이란 말은 뭐냐? 인간이 말을 하잖아요. 인간이 말을 할 때는 그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확보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해요. ‘나 잘 키운 애 둘 있다’ 이런 것, ‘아파트 있다, 펀드 넣어둔 것 많아, 통장이 수두룩해, 나 차 태워줄 든든한 내 남편 있어’ 이럴 때 뭐가 나와요? 말이 나와요. 사람들이 누구한테 이야기할 때 이야기 하는 이유는 뒷배가 있어 그래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퇴직해도 연금 있는데 뭐, 이럴 때 말을 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욥에게 무엇을 빼앗아 갔습니까? 그 뒷배를 다 날렸어요. ‘아이고, 재산 날려도 몸 하나 튼튼하면 내가 막노동해서라도 벌지’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욥은 일할 수 있는 건강까지 어떻게 했습니까? 빼앗아 갔어요. 남은 것은 껍데기, 욥에게 남은 것은 껍데기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껍데기만 남아 있어도 기 안 죽으려고 욥이 껍데기 안에 그동안 자기가 했던 자기 의로움이 들어있어서 친구들한테 안 지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식으로 했지요. 그런데 욥기 마지막에 누가 찾아옵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왔지요. 그때 욥이 뭐라고 고백해요? 입이 있어도 제가 입을 다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딱 설 때 내 것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내 것이라는 게 가능하냐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에게 너 잘못한 것, 다시 말해서 욥의 친구가 뭡니까? 욥에게 쏘아댄 것은 자기 건강 있고 자기 재산 있기 때문에 그것 믿고 자신만만하게 욥에게 충고랍시고 신앙이랍시고 하나님 운운하면서 해댄 거예요. 그래서 욥의 세 친구 불러다가 너희 잘못한 것을 사과하고, 사과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욥이 너를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리면 그제야 네 죄는 없어질 것이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이게 욥의 친구에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이거는 하나님 앞에서 욥의 죄를 사하는 방법을 욥의 친구를 동원해서 욥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동안 내가 의롭고 내가 바르게 살았다는 그것이 내가 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이.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에 그동안에 네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욥은 뭐냐? 자꾸 내가 했다는 거예요. 내가 바르게 했고 내가 착하게 살았고 내가 죄 안 짓고. 앞에 자꾸 ‘내가’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에게 욥에게 하라 이 말은, 이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밖에 몰랐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속물을 고대해야 될 입장에서 욥은 선지자입니다.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선지자에요.
우리가 지금 역대하 10장을 보면서 이거는 이스라엘 역사의 정치에 관한 문제구나,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봐야 돼요. 구원을 한 통로로 모으기 위한 작업, 같은 뜻인데 좁혀지기 위한 작업. 중요한 것 해놓고요. 제가 창세기 19장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일어난 거죠.
일단 질문을 던질게요. 소돔과 고모라에 왕이 있다면 그 왕이 있음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유황불 안 떨어집니까? 떨어지지요. 왕이 있든 없든 떨어지지요. 그러면 다시 역대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왕이 있다는 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소용없는 거잖아요. 왕이 있으나 없으나 유황불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인데 왕이 왜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왕이 있으나 없으나 유황불 떨어진 것이 이미 정해진 일이고 확정난 일이라면, 확정난 일이 아니고 확정난 일이죠. 확정됐어요, 유황불. 나중에 지옥에 가면 지옥 불 기다립니다. 있는 입장에서 사람들 백성들의 관심사가 왕이 있니 없니 차기 대통령 누구니 하는 이 자체가 뭡니까? 유황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 다음 누가 되느냐, 그것에 왜 관심을 두지요? 그것도 온 국민이.
얼마나 인간이 악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시답지 여기는 겁니다. 차기 대통령 잘 뽑아서 우리나라 잘 되죠. 우리나라 잘 되면 유황불 안 떨어집니까, 지옥 안 갑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개무시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왕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 내의 왕 문제를. 정해진 예언의 말씀, 확정된 예언의 말씀은 신경 안 쓰고 그들이 백성들이 다룰 수 있는 것, 인간들이 어떻게 조종할 수 있고 변경시킬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그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다 몰입하고 있어요.
르호보암의 잘못은 나이 든 사람들 말 안 듣고 젊은 친구들 말 들은 게 문제가 아니라 르호보암의 잘못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솔로몬의 잘못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살아서 하나님께 버림을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게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남은 죽어도 자기는 꼭 살아남겠다는 거예요.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왕도 마찬가지고, 백성이나 왕도 똑같지.
단 한 사람 아히야는 그 시대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죽일 꼬만 생각한다는 것이 아히야 선지자의 취지에요. 어떻게 살릴 꼬가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튀겨 먹을까, 볶아 먹을까, 구워 먹을까, 말아 먹을까? 인간을 어떻게 사용해서 버리고 죽이느냐? 선지자의 관심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선지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아~무 생각이 없어요. 자기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건강하고 잘 사는데 나 살 동안에 평화로운 세상 되기를, 윤택하고 번성한 세상 되기를, 나 잘 살고 덤으로 남도 잘 사는 세상이기를 그것만 추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것을 예언대로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혹시 참석하신 분 중에서 살려고 참석하셨는지 모르…….
여기서 우리가 열왕기상 11장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서 솔로몬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26절에,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이고 쭉 나오지요. 27절에,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지나가고,
32절에서 왜 아히야 선지자가 열둘 지파를 찢는 이유가 나옵니다.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될 것은 왜 솔로몬이 재산이 모라랍니까, 부귀영화가 약했습니까?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하나님을 버렸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 버렸을까요? 이건 뭐 솔로몬뿐만 아니고 우리들에게 다 공히 해당되는 이야기죠. 그것은 인간이 산다 할 때 그냥 숨 쉬고 사는 걸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자가 자기가 자기한테만 영향력을 주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살아 있으면서 뿜어 나오는 그 힘이 남들에게 파급되기를 기대하면서 인간은 살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지 당신이 나 인정해줘, 인정 안 해줘?”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 있는 겁니다. 특히 솔로몬 같은 경우엔 뭐냐 하면 자기가 왕이잖아요. 교회 교인수가 이천 명인데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어떻게 목회하다가 천 명이 되었다. 그러면 당회장 목사는 기분이 막 좋습니까? 전에는 영향력이 이천 명이었잖아요. 이천 명 대표의 당회장이잖아요. 지금은 반 토막 난 교회의 당회장일 때 그 사람은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이천 명 되는 나에요. 천 명 단위의 나는 이건 나가 아니란 거예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왜 우상을 섬기니까?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골고루 자기가 왕이란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춰준 거예요. 왜? 자기는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이스라엘이 쪼가리 나고 사분오열되어 얼마 안 되는 그런 왕은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윗에게 주어졌던 인수받았던 그때 그 영광의 왕 됨이 나기 때문에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거기에 걸 맞는 나임을 계속 지켜내려고 한 겁니다.
육신은 하난데 나의 영향력의 그 범주는 그만큼 육신보다 훨씬 큰 거예요. 나의 영향력이 크다보니까 아까 성경말씀대로 우상들 수입해서 모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지금 소중한 게 누구에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여기 존재함에 곧 그자체가 가장 소중한 것이 이미 결정 난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로 가장 소중한 것은 이의 걸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결정 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솔로몬 자리 앉았다 해도 마찬가지고 제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그럼 근원적인 문제점이 어디한테 있습니까? 바로 나에게 있지요. 건축을 벌이는데 어떻게 벌였다? 강압적으로 했다. 여기 오늘 역대하 10장에 보면, 왕의 부친이 멍에를 무겁게 했다고 하잖아요, 4절에. 그리고 11절에,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솔로몬)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하리라 하소서” 채찍보다 전갈이 더 따갑다 이 말이죠. 전갈로 내가 너희들을 통치하겠다.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
열왕기상 11장 계속 봅시다. 11장 34절에,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다음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36절,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그러면 다윗 이후에 내리막길로 간다는 뜻이거든요. 다윗 이후에 솔로몬부터 이거는 망하는 길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하면 망할수록 다윗의 등불이 빛나겠지요. 이게 바로 구원의 원칙이에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가 제일 소중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누가 소중해요? 내가 제일 소중하잖아요.
그럼 내가 소중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한 통로로 모으는 작업을 좁히기 위한 작업에 의해서 주님께선 누굴 제거해야 돼요?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제거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바로 그 원칙이라니까. 나를 제거해야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신약에서 세리와 창기, 강도 그 사람들 하나님께서 배척했습니까, 구원했어요? 구원했지요. 특히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요. 두 강도 가운데 한 강도가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 강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주고받는 대화를 보세요. 그 대화를 보게 되면 그 강도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어요. 절대적으로 주님에 의존적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힘없이 자기와 똑같은 신세로 아버지께 버림받아서 죽어가고 있는 입장이에요.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분을 의존한다? 돈 빌려줄 때는 담보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신용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무슨 신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신용적이에요? 신용이 많은 분입니까? 예수님께 많이 얻어먹은 게 있어요? 예수님께 받아 챙긴 게 많아요? 주님은 주시는 분이 아니고 있는 것도 빼앗아 가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믿어요? 더 빼앗기려고? 내 소중한 것, 내 영향력 다 빼앗아 가라고요?
사람들이 저한테 가끔 묻는 게 있어요. ‘요즘 와서 신앙이 많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요즘 와서 은혜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는데 그거는 자기 자리를 떠나서 그래요. 우리 자리는 어디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바로 옆의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우리 자리가 십자가 그 옆에 그 자리 가야 구원되는데 그 자리 있지 않고 세상에 소풍을 나왔어. 소풍을 나와서 너무 많이 챙겼어요.
오디오 챙기고 김치냉장고부터 공기정화기, 아파트까지 차까지 너무 많이 챙겼어요. 남에 대한 영향력, 남이 나한테 오는 존경, ‘대단해요’ 이런 거요. 이런 것에 너무 길들여졌어요. 그 정도보다 더 많아져야 내가 생각하는 나답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성도의 본모습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후딱 빨리 주님이 십자가 진 그 옆자리로 가야 돼요.
그래서 신앙생활 잘하려면 남한테 호감 얻고 돈 잘 벌고 주식 대박 나더라도 후딱 어느 자리 가야 돼요? 십자가 옆자리에서 대박 난 돈이나 세고 있으면 돼요. 그 자리에요, 그 자리.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자리, 이제는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은혜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지금 엉뚱한 자리에서 미아처럼 헤매고 있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요즘 신앙생활이 잘 안 돼요. 은혜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긴요. 다시 십자가 찾아가야 되지요. 성령이 이끄는 대로. 빨리 올라와. 성령은 자꾸 올라오라하는데 우리는 기존에 내가 노동해서 얻은 그 자리를 포기 못하고 있어요. 그럼 어떻게 포기해서 그 자릴 가느냐? 10분 뒤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