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1122b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41122b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끝부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에요.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만났을 때 이 지상에서 그 말씀에 의해서 본인이 작살 난 사례를 보여라. ‘내가 이 땅에서 부모로부터 아담의 계통으로 태어난 그것이 죄였다.’라는 것을 보이면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그냥 ‘죄였다’라고 했는데 그게 성경에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21장 38절에 나옵니다. 포도원 농부 이야기인데 세 받으러 온 종을 농부들이 죽였죠. 38절에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뭡니까? 지금 쿠데타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남녀공학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잖아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동덕여대 부동산이 누구 거죠? 누구 소유로 되어 있습니까? 지금 그 학생들 소유는 아니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치과를 운영하다가 장사 안 되니까 산부인과로 바꾸겠다 하는데 치과 다니는 환자들이 점거농성하면 어떻게 돼요? 그거 어떻게 됩니까? 치과 부동산 소유주가 누군데, 왜 환자들이 점거농성하냐 이 말이죠.
노량진 학원가에 학원이 지금까지 경찰공무원 수강생 가르치다가 경찰공무원 손님이 없으니까 중년들을 위한 부동산 중개업으로 바꾸겠다 할 때에 경찰공무원 수강생들이 점거농성하면 어떻게 돼요? 기밀 부수고 하면 안 되잖아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부동산이 누구 건데요? 수강생들은 돈 주고 배우면 되지, 그들은 더 이상 권한이 없죠.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에 있는 땅. 땅 누구 겁니까? 하나님 거죠. 육신도 우리 하나님 거죠. 하나님 건데 그걸 불법으로 점거농성한 것이 뭐냐 하면 다니엘에 짐승들이에요. 그냥 바다에 죽치고 앉아있지, 바다에서 왜 기어올라 와서 하나님 땅을 점거하느냐? 이게 뭐냐? 쿠데타에요. 쿠데타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이건 반란군에 해당됩니다.
그 반란군의 일원이 누구냐? 최고의 피라미드 위에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를 반란군의 아들로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주기도문에 내 죄를 사해달라 할 때, 회개하는 마음이 뭐에요? ‘나는 내 몸속에 반란군의 피가 지금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거 인정하는 거잖아요. 그거.
예를 들어서 하늘나라에 출입국 심사하는 입국심사대가 있다 합시다. 천사가 와서 이제 천국으로 보내주는데, 손을 내밀며 “여권!”이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거기 들어가려는 사람이 “제가요. 신앙생활을 너무 잘했고요. 부모님 잘 섬겼고요. 교회생활 봉사 많~이 했어요.”하니까 천사가 “여권 내놓으세요. 여권. 아니, 여권을 내라니까.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가 문제가 아니고 여권을 내놔.” “여권이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살난 거! 그래서 작살난 그 구멍에 예수님 피가 묻은 여권 내놓으세요! 피 묻은 말씀 내놓으라고요, 피 묻은 말씀!” 말씀해석 내놓으라고요. ‘이렇게 내가 죄인입니다.’ 그거 내놓으라는 거예요. 있어야지. “다음 사람!” 보내버리죠.
마태복음 21장 38절에서 반란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이는 상속자니 이 아들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누구 것이 된다? “내 것이 된다” 포도원 원래 주인이 따로 있잖아요. 동덕여대 학생들이 동덕여대 부동산 소유주 아니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저한테 맡긴다면 간단하죠. 동덕여대는 폐교처리하고 동덕대학교로 바꿔버리면 되죠. 학생들한테 54억인가 다 물어내라 하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반발하겠죠. 왜 반발하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꿈 때문에. 무슨 꿈? ‘나는 동덕여대 출신자’라는 꿈. ‘그때 그 시절이 좋았었어.’ 라는 꿈. 그러나 졸업생이 거기에 동조하고 그러면 안돼요. 왜냐하면 새싹 유치원 출신이 유치원 안 하고 다른 거 할 때, 유치원 졸업한 지 45년 된 사람들이 점거농성하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그럼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교회. 유럽에 그런 교회 많아요. 교회가 장사가 안 되니까 나이트클럽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럼 교회 교인들이 점거농성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때요? 아, 문제 어려워요? 점거농성할 수 있어요, 교인들이? 역시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재산이 기독교 재단회 소속인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 보세요. 이 세상에서의 정당성은 어디서 옵니까? 돈에서 나와요. 소유주가 누구냐?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가진 것, 내 정당함이 뭐를 막아요? 진짜 현실, 천국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내 가진 것에서 꿈이 나왔으니까 내 꿈,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이 뭘 막아요? 천국을 막아요.
천국을 막는데 여기서 제가 말을 주의 깊게 하고 있습니다. 뭘 주의 깊게 하느냐? 내가 나의 꿈을 막는다, 아닙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막는다, 아닙니다. 내가 나의 천국을 막는다,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나는 천국을 막는다. ‘내가 나의 천국을 막는다.’와 ‘나는 천국을 막는다.’의 차이점이 뭡니까? 뭐가 들어갔어요? ‘나의’ 천국이죠.
나의 천국은 우리가 안 막습니다. 못 막습니다. 내가 없어져야 되죠. 우리가 하는 짓은 왜 죄가 되느냐? 예수님의 나라를 막기 때문에. 나의 천국을 안 막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주여’ 하는데 무슨 자기 천국을 막아요? 나의 천국이 진짜 천국을 가로막죠.
그럼 그런 예가 과연 있느냐? 오늘 ‘꿈과 현실’에서 메인(main, 주된), 오늘 본 내용 다 포함된 거예요, 중심 성경구절을 지금부터 보겠습니다. 사사기 20장 1절,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미스바에 법궤가 있었던 모양이죠.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아까 첫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어요? 보통 이 땅에서 적의 적은 나잖아요. 내 적의 적은 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우리의 적은, 너의 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적이 되는 거예요.
현재 사사기 19장 끝에서 한 레위지파가 첩이 죽고 난 뒤에 열두 토막 내가지고 ‘우리 이스라엘 땅에서 있을 수 없는 범죄가 일어났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 말씀대로 율법대로 정의를 다시 일으켜야 된다. 정의를 유지시켜줘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도모하게 되었죠.
레위지파 그 사람이 토막 내서 보내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동조해서 회의해서 소위 정의를 외쳤습니다. 정의라 하는 것은 악에 대한 처벌이 뒤따르는 것을 정의로 본 거예요, 그들은. 악이 있고 악을 저지르지 않는 쪽에서 정의로운 자가 처벌하면 정의가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적의 적은 본인이에요. 적의 적은 본인이고 적은 악한 자가 된다면 나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악을 처벌하겠다는 나는 의로운 자가 되죠. 이게 바로 인간 현실의 난맥상, 문제란 말이죠. 첫째 시간부터 했잖아요. 인간은 자꾸 뭔가 붙들고 싶은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자기는 의로워지고 싶어 하죠. 내 속에 있는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존재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사력을 다하여 결사적으로 인간은 정의를 유지하려해요. 그 『법 앞에서』단편소설처럼 그냥 들어가도 되는데 꼭 물어서 들어가려 하는 것은 초반부터 뭐를 지키려하는 겁니까? 법을 지킴으로서 그 법이 나의 존재의 정당성을 계속 지켜주고 유지할 만한 유일한 환경이라고 본 거예요. 법 앞에서. 그런데 정확하게 해서, 법 속에서. 법 속에서 법으로 무장되었을 때 정의를 유지하려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는 40만 모였죠. 그렇다면 거기에 악한 일을 행했다는 베냐민 지파는 몇 명 모였느냐 하면 이만 육천 명이에요. 15절,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이만 육천이죠. 그다음 “그 외에 기브아 거민 중 택한 자가 칠백인데” 칠백 명 이 사람들이 특수부대 출신이에요. 우크라이나 간 그들하고 달라요. 하여튼 대단해요.
그럼 합해서 26,700명. 이쪽에는 400,000명. 그럼 어떻게 돼요? 400,000÷26,700. 뒤에 다 떼어버리고 40대 2. 몇 분의 몇입니까? 정의 쪽에 20, 악한 쪽에 1. 이래서 이제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겁니다.
17절에 보면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칼을 빼는 자의 수는” 몇 명인가?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그러니까 이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편에 서서 모처럼 이스라엘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스라엘에 뭐가 흐른다? 정의가 흐른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의가 뭘 망치는가? 하나님의 정의를 망칩니다. 왜? 인간의 정의는 가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인간의 정의에 의해서 망쳐진 정의가 진짜 현실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끝까지 자기 자신의 존재와 현실을, 잘 들으세요, 일치시키려고 애를 써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나는 의로워지고 싶고, 의를 유지하고 싶고, 남한테 좋은 소리 듣고 싶은데 거기에 꼭 필요한 현실적인 조직이나 구성이나 그런 집단이나 나한테 이런 뜻을 옹호해줄 사람은 어디 있지? 그걸 찾아다니는 것이 평소 인간들이 늘 행동과 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드디어 그때가 왔어요. 그때가 왔습니다. 오늘은 노래 세 개나 돼요. 할 게 많습니다. 자, 노래는 자꾸 들으면 가요교실 되기 때문에 듣기는 듣지만 길게는 안 듣겠습니다. 가사를 주목해보세요. 첫 번째, 하는 가사를 보세요. 가사를 음미해보세요.
대중가요 가사라 해서 참 천박하게 논다 욕하지 마시고 이겁니다. 천박이고 뭐고 간에 피라미드와 미로 관계에요. 지금 이 대중가요는 피라미드가 아니고 미로에요. 여기 조항조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노래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소향도 아니고. 뭐 하나님을 위해서 노래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여기 노래가사가 보면 전부 다 미로에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라고요. 일상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만나보면 전부 다 이런 이야기에요. 가사를 한번 봅시다.
남자라는 이유로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당신 앞에 어떻게 서 있습니까? 멍하니. 가사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멍하니. 안 들키게, 이런 마음이죠. 멍하니.)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그러니까 속으로 간직했는데, 어떤 여자 앞에 나오니까 이제 더는 못 참겠는 거예요. 그 여자 앞에서는 터트리고 싶은 거예요. 왜? 마음에 뭐가 있다 했어요? 마음에 상처가 있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왜? 마음에 뭐가 있어요? 상처가 있죠. 상처 왜 생깁니까? 어릴 때 그 나를 자꾸 뒤에서 밀어내는데, 밀려나간 사회는 어릴 때 나를 칭찬해주길 원하던 그 사회가 아니었어요.
사회는, 직장생활이라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분질러버리는 곳이에요. 나를. 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래서 직장생활하면 돈 좀 정기적으로 따박따박 오지만 내 꿈이 날아가 버렸잖아요. 차라리 그거 하지 말고 태권도나 하고 합기도나 하다가 안 그러면 독서실 하든가. 내 사업. 돈은 몇 푼 되지도 않지만 수입이 들락날락하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남자거든요.
특히 남자가 사업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데 아내가 어떻게 해야 돼요? ‘몰라, 나는. 니 마음대로 해라. 나는 너한테 언제 기대한 적 없거든. 실망했어.’ 하지만 그 아내한테 뭡니까? ‘사실은 내가 직장생활 이렇게 힘들었다. 합기도하면서 이렇게 힘들었어.’ 하면서 이제 마음껏 우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피라미드입니까? 이게 하늘나라입니까? 미로입니까? 미로죠. 그다음 보세요. 2절 가사가 괜찮아요.
저마다 처음인 듯 사랑을 하면서도 (전부 다 돌아온 솔로처럼 내숭떨고 있는 거예요. 저마다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 앞에선 미소를 짓네요 (내 앞에서는 뭘 짓는다고요? 아이고, 미소를 짓네.)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이 밑에 가사랑 차이가 나요.)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언제한번 그런 날 올까요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울어 울어 볼 날이 (여기 ‘울어’가 두 번 나옵니다.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거 잠깐 듣고 가시겠습니다. 왜 아내가 필요한지 아시겠죠?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내가 참고 있었다는 이 의로움을 의로움이라고 제대로 점수를 매기고 평가해줄 사람 당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럼 아까 천국은 무엇이 있어야 들어간다 했어요? 빵꾸나야 되죠. 자기 그 정당성이 구멍 나야 돼요. 그것도 말씀에 의해서 피 묻은 게 있어야 돼요. ‘나 이 땅에서 그렇게 사업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그것가지고 천국에 안 넣어줘요. 그건 자기 천국이에요. 천국 가서 자기 자랑할 사람들이에요.
천사 특징이 뭐가 없다 했습니까?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계약대로 언약대로 피가 없으면 안 넣어줍니다. 자, 이러한 남자에게 여자가 화답을 해야 되잖아요. 화답이 라는 노래에요. 가사를 먼저 보겠습니다.
슬퍼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나에게 말을 해줘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속 시원히 말을 해줘 (제대로 지금 여자 쪽에서 반응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세상 모두가 변한다고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너에게 나를 준 걸 후회는 안해 이대로 함께 있을께 (다독거려주는 겁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해
서로 후회하지 않도록 너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너를 지킬 테니까 (여자 쪽 이야기입니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해
가슴이 아프지 않도록 차라리 그것이 속 편한 거야
이젠 슬퍼하지 마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해 서로 후회하지 않도록
너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너를 지킬 테니까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해
가슴이 아프지 않도록 차라리 그것이 속 편한 거야
이젠 슬퍼하지 마
이 세상에 (그다음에 제가 큰 글씨로 해놨죠. 뭡니까?) 남자는 너 하나 뿐인데
슬퍼하면 나는 어떡해 네가 힘이 들면 내게로 와
내가 널 사랑하겠어
이젠 슬퍼하지 마 이 세상에 남자는 너 하나 뿐인데
슬퍼하면 나는 어떡해 네가 힘이 들면 내게로 와
내가 널 사랑하겠어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남자, 여자가 오랫동안 서로 사귀고 좋은 친구처럼 사귀었는데 여자 쪽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안 해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남자는 꿈이 있어요. ‘나 봐. 얼굴 잘생겼지. 허우대 좋지. 성격 좋지. 그런데 나한테 너 같은 게 가당하겠어?’
너는 파트너로는 괜찮은데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 험한 직장 때려치우고 이 잘생기고 허우대 좋고 하는 여기에 부합되는 큰 사업체 사장, 아까 피라미드는 뭐라 했습니까? 재벌이죠, 그렇게 되는 데에 필요한 조건으로 내가 결혼할 여자는 첫째, 예쁘고 두 번째는 집에 돈 많고. 딱 두 가지에요. 뭐 더 욕심내지 않아요. 이것도 욕심이지만 딱 두 가지입니다. 예쁘고 돈 많고. 그래서 이 잘생긴 허우대와 성격에 처가 쪽에서 반해가지고 ‘자네 꿈 이루게.’ 하는 거예요. 지금 초기 자본이 없어. 그러니까 여자는 애인으로 사귀되 결혼은 그런 여자하고 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럼 여자 쪽에서 그걸 먼저 결혼하자 하면 어떠냐? 여자는 또 자존심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너 같은 게 어떻게 나한테 결혼감으로 가당하겠어?’라는 그런 굴욕적인 말을 차마 듣기 싫어해요. 그거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왜 듣기 싫어해요? 무엇 때문에? 첫째 시간 초반에 했는데. 마음의 상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게 피라미드가 아니고 무슨 세계에요? 미로의 세계에요. 미로의 세계 특징은 불확정성. 전부 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남녀관계가 전부 다 자기 의, 자기의 정의를 유지하면서 미로에서 벗어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너 내 장래, 내 꿈 방해하지 마.’ 참 진짜…
이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그래서 이 남자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 번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둘이 만났거든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이게 바로 피라미드의 위치가 아니고, 미로에서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 인간들이 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꿈꾸는 그 세계, 그것이 바로 세 번째입니다. 이 세 번째 노래가 라는 노래인데요. 여기 가사를 한번 보게 되면,
고맙소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아까 상처 이야기했죠. 상처 이야기했잖아요. 상처를 받는다는 자체가 이 사람은 지금 현실도 아닌데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말이거든요. 자기가 반란군인 줄 모르고)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 (야, 이 말이 맞죠.)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아까 남녀 둘이 만났죠. 밑에 두 번째 가사를 보세요.)
술 취한 그날 밤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자,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여자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손을 감싸며 괜찮아 울어준 사람 (야, 이거…. 여러분 술은 먹지 마시고요. 음주운전 주의해야 되고.)
세상이 등져도 나라서 함께 할 거라고
등 뒤에 번지던 눈물이 참 뜨거웠소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못난 나를 만나서 긴 세월 고생만 시킨 사람
이런 사람이라서 미안하고 아픈 사람
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남겨진 세월도 함께 갑시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이거 한번 들어봅시다. 제가 왜 이런 거 하느냐 하면 백날 복음 들어도 돌아서면 이 세계에요. 이 세계. 누가 날 위로 안 해주는가? 그거 뭐, 잘했다 칭찬 한 마디 해주면 될 걸가지고, ‘다 죽여 버릴래’ 이런 말보다도 칭찬 그게 뭐 어렵다고, 이런 거요.
둘 다를 알아야 돼요. 피라미드도 알아야 되고, 피라미드 제일 위 하나님의 관점도 알아야 되고 밑에 우리의 타고난 본성, 그저 남이 나를 칭찬하고 잘했다 하면 진짜 뭐든지 다 해줄 것 같은 이 본성. 이거 어쩔 건데요? 어쩔 건데.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게 그렇게 나빠요? 내가 이 땅에서 사는 게 나빠요? 주의 뜻은 나쁘다는 거예요. 네가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반란군의 심보로 사는 게 그 자체가 나쁘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요?
자, 여기서 사사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멍내버립니다. 구멍 냈기 때문에 열두 지파가 몇 지파 되었죠? 열한 지파 되었죠. 사사기 20장. 그때 사사시대가 누가 없을 때? 하나님의 왕 되심에 합당한 왕이 없을 때에요. 없으니까 하나님의 뜻이 차단된 겁니다.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 뒤에 보면 “각각 그 소견에” 그다음 나오는 말이 “소견에 옳은 대로” 그대로 “행하였더라” 왜? 꿈을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서 자기 옳은 대로 행했더라. 내가 옳은 대로 행한 그게 나빠요? 탕웨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게 나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만만하니? 뭐 하나님이 품격 있다고? 그 품격은 자부심에서 나온 거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자부심에서.”
사사기 20장 계속 봅시다. 그렇게 해서 그 뒤에 여러분들이 전에도 들은 적 있지만 21절에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사십만 중에서 이만 이천이 하루 만에 죽었어요. 이만 육천 칠백 명이 이만 이천을 죽였다 이 말이죠. 그다음 25절에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몇 명입니까?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일만 팔천 명이 없어졌죠.
합해서 몇 명입니까? 4만 명이죠. 십분의 일이 날아갔죠. 이게 어느 편입니까? 정의로운 편이죠, 정의로운 편. 소위 정의를 부르짖는 그들이 불의한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럼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죠. 이걸 이스라엘이 이해 못한 거예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왜 이해를 못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어요. 하나님께 그냥 통보만 할 뿐이었죠. ‘우리가 정의를 행사할 테니 하나님은 영광 받으세요.’ 이렇게 들어간 거예요. 쪽수도 많겠다. 그런데 십분의 일, 사만 명 죽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그들이 누구한테 갑니까? 26절에 벧엘로 올라가서 누구한테 묻죠? 여호와께 묻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 27절,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까는 언약궤가 미스바에 있었는데 그때는 벧엘에 있습니다. 자, 언약궤에서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가? 언약궤에서 말하는 정의.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오늘 제일 중요한 거니까. 언약궤가 말하는, 하나님이 말하는 정의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 여기서 뭐가 나오죠? 죽음이 나오죠.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이 지상의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 죽음인데 하나님의 언약이 받쳐주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출발된 언약에 대한 죽음이에요. 언약에 대한. 언약 자체의 죽음이에요.
아까 그 취지를 알아야 돼요. 인간들은 처음에 가정에서 태어나죠. 가정에서 태어날 때 부모가 자식보고 죽으라고 명령을 합니까, 살라고 지시를 합니까? 너 오줌 거기 누면 안돼. 화장실에 가야 돼. 밥을 가려서 먹어야 돼. 여러분 이거 설명하면 좀 걸리지만 설명해야 되겠어요. 표정들 보니까 지금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데….
인간이 자연에서 인간이 문화로 가잖아요. 문화로 갈 때 여기에 언어가 도입돼요, 언어가. 이 언어가 뭐냐 하면 ‘구분’입니다. 구분인데 내가 살기 위해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될 것. 버섯과 독버섯의 구분이죠.
그리고 내가 가져야 될 여자와 갖지 말아야 될 여자.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근친상간 금지. 금지죠. 내 쪽의 여자는 어느 쪽에 시집보내야 돼요? 남의 집에 가야 되고 남의 집 여자는 내 쪽에 와야 되고. 이게 가치교환의 법칙이에요. 교환함으로써 결속이 되는 겁니다. 의로운 집단, 우리 집안 의롭다가 교환을 통해서 사돈끼리 합쳐서 자식을 통해서 다 같이 의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게 상견례에요. 바짝 긴장되는 상견례. 무슨 말이 오갈지는 상상도 안 되는 상견례.
레위기 11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때 먹을 것과 안 먹을 걸 줬죠, 율법으로. ‘돼지고기는 먹지 마라.’ ‘소고기는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받을 때 어떤 자세로 받았습니까? 이것 먹고 시키는 대로 하면 ‘산다’가 돼요, 시키는 대로 하면 ‘죽는다’가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산다 쪽이죠.
아직도 자기 자신이, 율법과 자신의 만남이 자기에게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옛날 이 존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주님의 하늘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폐기처분하고 밀어내고, 장차 올 메시야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하나님의 언약궤 원칙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살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율법 앞에서 당치도 않은 거예요. 들통 난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이 전쟁하는 이유가 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우리가 여기서 정의를 실현해야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을 계속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라고 생각해서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런데 그 땅은 자기들이 살 땅이 아니에요. 그 땅엔 누가 살아야 되느냐 하면 언약궤가 있어야 될 땅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될 땅인데, 그들은 당연히 자신이 백성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는 주님 앞에 쓸모짝 없다는 것을 내비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를 당해야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베냐민 지파, 불의한 쪽이, 베냐민이 잘했다는 소리 아닙니다, 불의한 쪽이 두 번 이겼어요.
세 번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자, 물었으면 그들은 이제 자기 정의로 나갑니까, 하나님의 정의로 나가요? 하나님의 정의로 나가죠. 그래서 28절에 보면, ‘우리가 가리이까 말리이까’에요.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형제를 치지 않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거예요.
지금 그 정도 되면 이스라엘 존재의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있게 된 거예요. 바로 그것이 천국의 여권이에요. 천국의 여권이라고요.
우리가 모르는 하늘의 현실이 이 땅을 차지해왔고 그 현실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뭣도 모르고 우리는 내 현실, 내 잘남, 내가 훌륭하게 사는 것으로 천국 가겠다 하는 것과 대충돌을 일으켰죠. 그런데 충돌을 일으켜준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안다면 이게 바로 복 받은 거죠. 이게 복 받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쟁했고 전쟁의 방법은 매복 방식으로 전쟁을 해서 그때 35절에 “베냐민 사람 이만오천일백을 죽였으니” 처음에 베냐민 사람 몇 명이라 했습니까? 이만육천칠백 명이죠. 그런데 이만오천일백을 죽였으니까 전멸이죠. 그냥 전멸이에요. 44절에 보면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일만 팔천이니 다 용사러라” 일만팔천 명이 죽었네요. 이만오천일백 죽이고 또 44절에 일만팔천 죽이고 46절에 이만오천 명 다 죽었고. 그러니까 베냐민 사람 다 죽였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열두 지파가 되어야 될 야곱의 언약이 야곱언약대로 안됐죠. 열한 지파가 되었으니까 야곱언약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가 돼요? 빵꾸가 난 거죠. 구멍이 생긴 거죠.
끝으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22장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렇게 읽으면 돼요. 동일한 목소리 크기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이 아니라, ‘아브라함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이삭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야곱의(작은 소리로) 하나님(큰 소리로)이요’
하나님이 밀어붙인 존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에이, 죽어라.”하고 밀어낸 거예요, 뒤에서. 언약으로. 밀어내는데 그 밀어낸 분이 누구시냐 하면 바로 주님이 밀어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 했잖아요. 거기서 생기는 것이 마태복음 22장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삽니까? 어떻게 죽었다가 삽니까? 사람은 죽었다가 살지를 못해요. 못하는데 살았다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가 바뀐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부활에.
결국 인간은 지옥 갈 사람도 저주스러운 부활이 되지만 그건 일단 더러운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로 간주하지 않아요. 마가복음 9장 48절을 보면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게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 현실은 인간세계에서는 안 받아주는 현실이에요. 왜 안 받아주느냐? 밀리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에 의해서 밀리지 않으니까 턱하니 이 세상에 내 자리다, 하고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이미 경험했죠. 내가 육신 안에 있는 것은 내 무덤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육신은 나에게 무덤처럼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욥이 알게 된 겁니다. 나중에 욥이 더 예쁜 딸도 얻고 재산도 배나 얻었을 때에 그 많은 재산과 자식을 자기 거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거라고 생각합니까? 장차 오실 하나님이 주실 복을 미리 당겨서 ‘이게 복이야’라고 보여준 거죠.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복을 욥은 자기가 파괴되고 난 뒤에 말씀이 주는 복 안에 미리 소속되어 만나게 된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일단 죽이고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에서 열한 지파 되었죠. 그러면 이 한 지파만 채우면 됩니까, 아니면 열두 지파 다 새롭게 해야 되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지금 열 하나도 문제 있죠. 열 하나에 문제인데 한 지파 채워봐야 똑같이 문제 있어요. 그러면 채워지는 마지막 이 이스라엘을… ‘왕이 없으므로’라고 했잖아요. 왕이 없으므로. 없으므로 본인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했죠. 그러면 옳다, 옳다, 옳다, 옳다의 열두 지파는 백날 해도 이건 원래 하나님 언약의 맞춤 이스라엘이 될 수 없죠.
그럼 새로 외부에서 누가 오면 되죠. 누가 오면 되죠? 왕이 오면 되죠. 왕. 언약적인 왕이 오면 되죠. 그다음부터는 율법의 레위언약 시대가 아니라 이제 왕 언약, 다윗언약의 시대가 바로 룻 시대에 주께서 룻이라는 여자, 다윗의 증조할머니를 준비해서 펼쳐집니다. 룻 안에서 이방인 안에서 외래인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을 언약적으로 조성할 왕이 여기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숨겨진 하나님의 꿈이요, 현실입니다. 우리의 꿈은 개꿈. 우리의 꿈은 개꿈이죠. 개꿈인 것을 감사한다면 그 사람 존재 뒤에는 주님 계십니다. ‘주여, 제가 반란군입니다. 제가 쿠데타 했고 내 것도 아닌데 데모했습니다. 점거농성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인간밖에 안됩니다. 주여, 저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앞에 나가면서 우리가 할 존재의 사명이 바로 그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이 현실이 아니었고 다 엉터리였고 하늘의 현실만이 참된 현실인데 우리는 사적인 미로 같은 세상에 살면서 사적인 내 꿈을 이루고자 평생을 다 낭비하고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께서 십자가 피의 사건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존재를 세상을 향하여 전면에 내세우니 우리 뒤쪽에는 더 이상 마귀가 아니라 주님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음을 또다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