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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41122a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사사기

광주강의20241122a 사사기 20장 1절(구멍 난 현실)-이 근호 목사

『기독교와 허상』 교재 p.128 . ‘꿈과 현실’인데 인간적 입장에서 볼 때는 ‘현실과 현실’이에요. 인간이 꿈이라는 것도 인간은 현실로 이해하고, 인간이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꿈에 불과한 겁니다. ‘꿈과 꿈’ 하든지 ‘현실과 현실’ 하든지. 이 세상에서는 인간적 관점에서 꿈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꿈이든 현실이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은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꿈을 거론하거든요. 그래서 인간에게 꿈이라는 것은 예비 된 현실로 간주됩니다. ‘이 꿈은 언젠가 현실로 바꾸어놓을 거야.’ 그래서 현실과 꿈이 떨어진 게 아니고 이 현실에 충실하게 되면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 안에 점차 녹아진다. 꿈이 현실 안에 녹아진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을 꿈이라고 이야기하고 지금 현실에서 노력하게 되면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로 바뀌는 그것, 그렇게 되면 ‘내 꿈은 현실적으로 정당했다. 내 꿈은 현실로 옳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꿈, 계획이나 기대, 목표는 누구나 다 있어요. 결국은 현실로 바꾸어서 지금 있는 현실 안에 같이 더 보탤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 인간은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꿈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시는 데에 적당할 거예요.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인데, 피라미드에는 여러 가지 미로가 들어있죠.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내 앞길은 어떻게 될까?’ 미로같이 불확실해요. 불확실한데 ‘이 불확실한 게 꼬이고 꼬이고 하다가 언젠가는 미로에서 나왔던 모든 것을 위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때가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피라미드는 세상을 전체적으로 다 볼 수 있는 안목이 피라미드 안목이고, 그 안에 자기가 지금 현재는 미로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꿈은 뭐냐? ‘인간의 꿈은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갖는 것’ 이게 인간의 꿈이라 할 수 있어요. 내가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서 전체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피라미드 위에서 전체를 보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왕, 재벌, 성직자 또는 유명한 전문가들, 교수나 전문가. 집안에 우리 애가 말을 안 듣는다. 미로에 빠졌죠.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 돼요? 사자머리 정신과의사한테 가야 되겠죠. 그 사람이 전문가죠. 피라미드의 위치에 있다는 거예요. 항상 꿈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여러 가지 능력까지 내가 언젠가는 차근차근 밟으면 올라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피라미드는 미로로 구성된다.’ 피라미드는 미로로 구성된다는 거예요. 지금의 미로 생활의 완성이 피라미드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피라미드에 있다고 여긴 그 사람도 또 더 큰 피라미드를 꿈꾸고 있다면, 지금까지 기대한 게 헛수고될 수가 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꿈과 현실을 일단은 나누지만, 따지고 보면 아직까지 도래하지 않는 현실을 꿈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꿈이란 이름으로 먼저 걸쳐놓고 그 꿈이 현실로 변할 수 있도록 해야 지금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이가 60돼서 퇴직해도 꿈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그냥 직장 퇴직이 아니고 인생 퇴직이 되어버리죠. 꿈이 없으면 ‘에게, 이 현실이 전부란 말인가? 여기가 끝이란 말인가? 내가 더 이상 도달할 건덕지가 여분의 것이 없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인생의 의미가 생기지 않죠.

일을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타인의 평가가 주어지는 공간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타인의 평가가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일을 하지 않으면 뭐가 없어요? 타인의 평가가 없는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관심도 없죠. 그러면 지금까지 일을 해왔다는 것은,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현실로 본 겁니다. 타인이 내 속에 왔어요.

타인이 내 속에 와서 ‘일 똑바로 안해?’ ‘어? 일 잘하네.’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그게 나를 구성해왔는데 내가 퇴직해서 일을 안 해버리면 내가 집구석에서 놀든지 말든지 전에 있는 직장동료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들은 그들 일하기에 분주하죠. 그러면 내 속에 타인이 죽어버리면 나도 같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일을 해야 그쪽이 ‘아이고, 퇴직하셔도 건강 좋아서 열심히 일하시네요.’라는 평가가 계속 주어짐으로써 남들의 평가로 구성된 현실이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계속 살아있게 돼요.

그러한 예가 이라는 영화에 있어요. 그 에 나오는 대사가 이런 대사입니다. 남자 형사가 범죄자 여자 탕웨이 중국 사람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언젠가 나보고 참 품격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품격은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요?”라고 형사가 여자에게 물어요.

“품격은 ‘자부심’에서 오는 겁니다. ‘품격 있는 형사네요’할 때 그 품격은 이 형사 일에 내가 자부심을 갖는 거예요.” 벌써 여자가 그 형사에 대해서 평가를 했죠. 평가를 한 순간, 그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나는 품격 있는 형사가 꿈인데 타인이 그 꿈을 현실화시켜서 이루어졌거든요.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데 다음에 다시 만났어요. 보니까 그때 나를 평가했던 그 여자가 점점 자기와 멀어지고 차갑게 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형사가 그 범죄자 중국여자한테 갑니다. “만만하니?”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이 말이죠. 왜냐하면 전에 그렇게 ‘품격 있는 형사다. 형사는 참 저래야 돼.’ 라는 평가를 했는데 말을 함부로 하니까 이제는 마음이 교류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만만하니?” 이렇게 했어요.

그때 탕웨이가 중국의 여물어지지 않은 어눌한 발음으로 “사랑이 그렇게 나빠요?” 사랑이 그렇게 나빠요? ‘사랑하는 사이에 만만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품격 있는 형사, 품위 있는 형사가 범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휴대폰을 “다시 찾지 못하게 바다 깊은 속에 던져버려요.”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그 둘이 만나서 뭘 얻고자 하느냐? 저 여자와 사랑하는 게 내 꿈인데 그 꿈이 놀랍게도 현실로 바뀌었죠. 그럼 그 현실은 본인 단독으로 해서 구성될 수 없는 현실이에요. 현재 이 기분 좋은 현실이 되려면 그 여자가 체포되지 않고 이제는 범죄자 아닌 자유자가 되어서 자기와 계속해서 같이 있어줘야 그게 가능하다 이 말이죠. 그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꿈이 현실로 변했다고 할 때 인간의 꿈, 내가 가진 이 꿈이 진짜 현실이고, 꿈이 현실로 변했다 하는 이것은 가상이에요. 이건 억지라니까요, 억지. 내가 꿈이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 세상에 변수가 있지만, 그 변수 가운데서 일방적으로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본인 쪽에서 내가 선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꿈과 현실이 아니고, 현재 확보된 현실과 확보된 현실에 추가할 수 있는 현실, 그 두 가지 현실밖에 없죠. 이 세상에는 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현실에서 더 추가되는 현실뿐입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인간들 이야기고요. 그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현실은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인간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다 막혀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기중심인 거예요. 자기중심주의.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뜻이 곧 현실화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자기 뜻이 있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하나님 뜻이 만만하냐? 하나님 복음이 만만해?” 그럼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내 중심으로 사는 게 그렇게 나빠요?” 이런다고요.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꿈을 펼치는 게 그렇게 나빠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 그러면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하나님 뜻과 인간 뜻이 같은 현실로 섞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떻습니까? 없죠. 그냥 없다 하지 말고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돼요. 없었던 증거가 뭐죠? 한쪽은 내치고 주님 하는 쪽은 버림받고. 각자 다른 현실이 있었던 겁니다. 다른 현실.

다른 현실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인간중심주의, 이것을 현실로 본단 말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중심의 현실부터 먼저 생각하고, 상당히 복잡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보잔 말이죠. 분명히 틀어지니까. B가 인간 뜻이고 A가 하나님 뜻인데 A와 B가 틀어진다면 먼저 인간 뜻부터 보잔 말이죠. 우리가 인간 뜻부터 살펴서 인간들은 자기 꿈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는지, 그 절차와 순서와 내용을 살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어느 대목에서 안 맞는지를 보시라 이 말입니다.

지금 그 순서를 아시겠죠? 인간중심의 뜻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는지 이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조금 이야기했는데 계속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꿈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냐 하면 타인이 필요하죠. 타인이 있어야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파악하니까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 이미 타인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들어갔고 타인이 들어가 있단 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인간끼리 만난다.’ 인간은 인간끼리 만나요. 인간끼리 만나고, 인간끼리 만날 때는 말을 하는 거예요. 말, 언어. 가만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만날 때는 서로 만나자 이야기하고 서로 대화가 될 때 만나거든요. 그런데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따지고 보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2x=7. 2x=7이라 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건 이거에요. x=3.5 이렇게 되죠. 사람들은 이걸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뭘 주의해야 되느냐 하면, 언어를 연구하고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오늘날 공통점은 x=3.5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같다)’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특히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언어를 통해서 사물과 같다는 것이 인간세계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늘 잠재적인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같지도 않은데 자기 일방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으니까 내가 생각한 그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하고 연구를 많이 했어요. 도대체 같다는 게 뭐냐? 이게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같다는 것. 같다는 것은 이쪽, 저쪽 다 알아야 성립하는데 인간은 자기 생각만 알아요. 자기 생각만 알고 이 생각은 자기도 조절 안 돼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자기가 떠오르는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 다른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니까 ‘아, 내가 옳은 모양이다.’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현실에 있어서 내 육신이 여기 있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이게 참 이상한게요, 칼로 누가 내 다리를 찌른다든지 배를 찌르면 내가 아프잖아요. 그때 내 육신이 아프죠. 그럼 마음이 아프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칼 들고 설쳐야 됩니까? 칼에 찔리면 육신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려면 외부로부터 뭐가 날아와야 됩니까? 말이 날아와야죠, 말이. 학자들은 그걸 체크한 거예요.

말이라 하는 것은 칼이 아니고 화살도 아니에요. 돌멩이도 아니에요. ‘비 맞은 장닭’ 이게 칼입니까, 도끼입니까? 아니죠. 아니잖아요. 그런데 으윽, 왜 마음이 아프죠? 이게 왜 마음이 아프죠? 그걸 연구한 겁니다. 사람들은 깊이 연구를 했어요. 연구해보니까 뭘 알아챘느냐 하면, 인간은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내용은 뭐로 채우는가? 말로 채운다는 거예요. 아빠, 엄마, 동생, 형이나 내 가정에서 말로 내 내용이 다 채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말로.

그래서 부모로부터 강요를 당했어요. ‘내가 말한 대로 똑바로 하게 되면 사탕 하나 더 줄게.’ 이러잖아요. ‘내가 엄만데 네가 나 시키는 대로 하면 네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탕 하나 더 줄게.’ 할 때, 엄마의 지시와 내 행동이 같다, 안 같다는 평가를 본인이 내립니까, 엄마가 내립니까? 말을 준 저쪽에서 내리는 거예요. ‘잘했어, 잘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참 잘했어.

그럼 걔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미 엄마의 지시와 명령에 종속되어버린 거예요. 옳고 그르고가 엄마의 지시에 맞냐, 안 맞냐에 따라서 내가 착한 아이냐, 나쁜 아이냐 이미 결정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라는 아담의 자손에게 내려오던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대물림하게 되죠. 대물림.

여러분, 솜사탕 때리면 아픕니까? 안 아프죠. 그런데 말이 사람을 아프게 하죠. 말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게 이런 겁니다. 칼에 찔리면 병원에 가서 밴드 붙이고 후시딘 연고 바르면 낫는데, 이 마음의 상처는 오래가요. 수십 년 갑니다, 수십 년. 어릴 때 상처는 수십 년 가요.

도대체 인간 안에 뭐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아프냐? 아프다는 말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아니었다는 걸 티내는 겁니다. 그럼 인간의 주인은 누구죠? 인간의 주인은 누구죠? 기존에 있던 부모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부모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모만 만나지 않잖아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커서 학교 친구 만나고 여러 가지 만나게 되면 거기서 뭐가 유입됩니까? 계속 말이 유입되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놨던 말과 새롭게 유입되는 말 사이에서 자아를 구성하게 되면 이제는 엄마가 생각하는 착한 아이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죠. 유지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유지해버리면 친구들에게 추가적으로 더 받는 보상이 날아가니까요. 그걸 쉽게 말해서 ‘나 너하고 안 놀아줘.’ 이거거든요. 나 너하고 안 놀아줘. “같이 놀자.”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럼 늦게 가야 되는데?”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같이 더 놀자. 한번 용기를 내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이것이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만나게 되는 아주 난해한 이야기에요. ‘내 존재가 나를 밀어낸다.’ 옛날(前) 존재가 지금의 내 존재를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것. 쇼트트랙 선수들이 경기할 때 밀어내요, 선수가. 중국하고 한국하고 시합할 때 뒤에서 밀잖아요. 내가 내 존재를 밀어내는 거예요. 새로운 현실을 위해서. 현실은 말로 구성되죠. 새로운 칭찬과 새로운 보상이 기다리는 새 세계, 꿈의 세계를 향하여 내가 나를 밀어내고 나는 기존의 존재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가죠.

지난 수요일에 제가 소개했던 카프카의 단편소설 있었죠. 『법 앞에서』. 그 단편소설이 굉장히 짧아요. 짧은데 처음이고 끝이고 그렇지만 시골에서 온 소시민이 문지기한테 자꾸 나보고 들어가라고 허락을 하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들어가면 되는데 왜 허락을 맡고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인간은 타인의 좋은 평가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앞으로 밀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 문지기가 들어오라 해서 들어왔다! 나 정당하지, 그치?” 자기 정당성이에요. 자기 정당성. 어디 가도.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 모임에?” “예, 우리 아는 옆에 친구가 여기 댄스교실 살 잘 빠진다고 소개해서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게 뭐에요? 소개해서 왔죠. 이미 그 모임에 정당성이 보장됐잖아요. “어떻게 왔습니까?” “그냥 왔어요.” 안 놀아줘. 저 아줌마 자칫하면 도둑일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자.

인간은 벌써 부모로부터 자기 의가 되지 아니하면, 쉽게 말해서 자기 마음이 상처받지 않고 더욱 더 빛을 발하려고 하면 칭찬, 칭찬, 잘했다, 잘했다,가 계속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옳은 존재라 하는 것을 보다 깊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제가 하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없고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카프카의 그 단편소설에 보면 문지기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지금 당신은 나한테 허락 맡고 자꾸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 문을 통과해도 앞으로 계속 나오는 문에서) 나보다 얼마나 더 센 문지기가 있는지 나도 몰라요. 나도 감당 안 돼요.” 그런데 시골에서 온 그 사람이 들어가지도 않고요. 결국 못 들어갔어요. 늙어죽을 때까지 못 들어갔어요. 딱 보니까 빛이 거기서 나오는 거 같아. 그 법 안에서 어떤 빛이 나오는 거 같아요. 막 들어가고 싶어요.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을 해줘야 들어간다는 거예요.

나중에 끝부분이 이렇게 끝나요. 늙어가면서 문지기가 의자 치우고 “나도 집에 갈랍니다.” 하는데, 자기가 1년, 2년이 아니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가 입구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거기서 늙어죽는 거예요. “마지막 할 말이 있는데요.” 둘이 키는 비슷했는데 너무 오래 있다 보니까 쪼그라들었어요. 문지기가 “예, 소원이 뭡니까? 답변해드릴게요.” “그런데 이렇게 앉아 기다려도 왜 나만 기다리고 오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러니까 “이 법은 당신을 위한 법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 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법 해석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식으로 늘 실험만 혼자 집구석에서 하다가 죽는다.’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거예요. ‘남들이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방어해야지. 저렇게 공격하면 저렇게 방어해야지.’하다가 의자에 앉아 늙어죽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를 공격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식으로 살다가 죽는다.’ 이 점을 여러분 잘 유의하세요. 그럼 자기를 공격할 때 칼로 활로 공격하는 게 아니고 뭐로 공격한다 했습니까? 언어. 말로 공격하죠. 사회는 언어와 말로 공격해요. 언어와 말로 공격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정답을 알면 너 넣어줄게.’ 정답을 알면.

그런데 아까 2x=7 했을 때, 사람은 정답인 x에 관심 있잖아요. 그런데 애초부터 2x=7에서 같다(=)는 건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바로 연사와 계사라고 이렇게 표현해요, 프랑스 언어학에서. 프랑스 언어학을 제가 자꾸 소개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보고 원어로 하면 더 진리가 나타난다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언어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성경에 인간의 뜻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단 한 단어도 없고 한 글자도 없어요. 인간은 같지 않습니다. 왜? 일방적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의로움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부터. 내가 의롭다는 현실을 유지한 채 거기다가 꿈이라는 말로 이 의로운 내가 어떻게 더 의로운 존재로, 두 자로 아까 뭐라 했습니까? ‘미로’를 가다가 모든 걸 아는, 네 자로? ‘피라미드’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다시 말해서 ‘천국에 어떻게 가는가? 어떻게 내가 구원받는가? 내가 어떻게 온전한 자가 될 수 있는가?’ 그걸 시도하는 자들이에요, 인간은.

그런데 미로에서 피라미드로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출발부터 나의 정당함이 나와 equal, 등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등식이 성립 안 된다고요. 당신이 옳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증명 못합니다. 인간은 자꾸 스스로 연습하는 거예요.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답변하고 연습을 해보는데 그 연습하는 중에 빠진 게 있어요.

이렇게 묻고 이렇게 답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들의 그 짓이 얼마나 헛된 짓인가가 바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드러납니다. 스핑크스가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하고 있잖아요. 스핑크스 괴물이 그냥 가만있으면 오래 살았어요. 수수께끼 답을 누구한테 요청 안하면 됐던 거예요.

그런데 지나가는 어떤 사람보고 묻기를,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정오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뭐게?” 물으니까 오이디푸스가 “그거? 딱 보니 사람이네.” 그걸 듣는 순간 스핑크스가 죽어요. 답을 푸는 순간 ‘아, 답 풀었네. 아이고, 훌륭하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가 아니라, 답을 푸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신(神)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주는 대로 그냥 살지 신에게 묻지 말라는 거예요. 신에게 물어서 만약에 답변이 오게 되면 그 답변이 물었던 나를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왜? 답은 누구만 알아야 돼요? 신만이 알아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알아야 되기 때문에.

왜 신만 알아야 됩니까? 신이 아는 정답을 알아버리면 더는 그 인간이 인간이 아니므니다. 신과 같은 레벨이 되어버려요. 여기서 창세기 3장, 2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죽으리라”에 대해서 마귀는 뭐라고 해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그다음부터 인간은 뭘 추구하게 되었어요? 정답이 뭐냐? 정답이 뭐냐를 추구하는 겁니다. 생긴 대로 살지, 정답은 왜 찾느냔 말입니다.

제가 10대 때 국민학교 5,6학년 때부터 대구 비산동 중앙에 달성공원이라고 하는 공원이 있었는데요. 옛날에 동물원도 있었던 달성공원이 있는데 그땐 학원도 없고 해서 학교 끝나면 달성공원에서 아이들이랑 장난치고 놀았어요. 그런데 늘 마음에 있는 것이 그 달성공원 앞에 보면 각종 노인들, 갖가지 노인들이 거기 죽치고 대낮부터 하루 종일 있어요. 아침부터 갈 때까지 모여 있다고요, 노인네들이. 입에서는 낮술, 낮 막걸리 먹어서 냄새 풀풀 풍기죠, 옷은 담배 냄새에 찌들어있죠.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게 저 노인네들은 인생을 저만큼 오래 살았으면 뭔가 지혜가 있을 건데 그들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볼까? 50년, 60년 살면서 뭘 깨달았을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었어요. 나 국민학교 때. 쉽게 말해서 ‘나는 저 나이 되면 나는 어떤 정답을 가질 수 있나?’ 그게 궁금했고, ‘그걸 또 미리 당겨서 저 사람에게 듣게 되면 미리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사람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서 들어보면 전부 다 뭐 박정희 이야기, 리승만 이야기 그런 이야기겠죠.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인을 감추고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에 그걸 감추는 용도로 뭐 이야기합니까? 박정희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하고, 거기가 경상도니까 전라도내기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하죠.

그러나 이걸 아셔야 돼요. 적의 적은 ‘나’가 아닙니다. 적의 적은 하나님이에요. 이걸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다니엘의 주제도 그렇지만,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거예요. 쿠데타. 인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인간들은 이 반란군 속의 하나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사함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그러면 인간이 사함을 요청하는 그 죄는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위 조건에 맞추면 뭡니까? ‘내가 하나님께 대든 반란군의 일원이었습니다.’를 회개하는 거예요. 반란군의 일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에 보면.

그런데 달성공원 할아버지들은 이런 거 몰라요. 자기도 누군 줄 몰라요. 말은 해요. 말은 하는데 자기의 정당함을 확인하는 말을 해요. 어디 우리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험담해? 박정희 대통령과 한 패가 되는 게 뭡니까? 달성공원 노인 집단에서는 그게 의로운 게 돼요, 의로운 게. 광주에서는 뭐가 의로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집단에 속해서 내가 계속 의롭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쪽에서 통용되는 단어에 대해서 내가 옳다, 옳다고 계속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를 감추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의 피라미드는 또 하나의 미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미로.

실컷 부모에게 태어나서 가정에 살다가 잠깐 세상생활 했다고 해서 직장은 다니고 이제 퇴직하고 했는데 그렇게 했던 자기 인생의 미로 있잖아요. 미로 다 끌어 모아봐야 별 큰 피라미드 아니에요. 소소한 피라미드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죽으면 화장터에 들어가서 그냥 보내버린단 말이죠.

언어학자들은 뭐를 분석했느냐 하면 인간의 말과 사실 또는 사물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절대 일치되지 않는 거예요. 말≠사실, 사물. 그게 연사(連辭)와 계사(繫辭) 때문에 그렇다. 연사는 뭐고 계사는 뭐냐? 계사는 계속해서 단어를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을 계사라 합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게요. 중국음식집에 갔습니다. 메뉴를 보세요. 메뉴를 보게 되면 ‘면류’, ‘요리류’ 나올 거예요. 이게 연사에요, 연사. 면류에 보면 짜장면, 우동, 짬뽕 줄줄 나옵니다. 이걸 계사라고 해요. 그러니까 바꿀 수 있는 것은 계사, 이걸 하나의 분류로써 함축할 수 있는 것은 연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라는 것이 어디서 통용되느냐 하면 내가 소속되어 있는 그 범위에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통용되는 한계.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권사님이 길에 가다가 약간 자빠졌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아이고, 아버지여’ 또는 ‘주여’ 이렇게 나오죠.

그게 뭡니까? 그쪽 세계에서 많이 들었던 거죠. 들었던 것이 의식에 들어가지 않아요. 무의식에 들어가요. 무의식에 들어갔던 것은 우리 손으로 손가락 집어넣어서 이걸 빼낼 수가 없습니다. 의식은 ~인 체 하면 돼요. 아닌 척하면 되는데 무의식에 이미 들어온 것은 인간 손으로 빼낼 수 없어요. 그래서 정신병이라 하는 것은 고치기 힘들어요. 무의식의 문제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하느냐? 아까 못 빼낸다 했죠. 못 고친다 했죠. 그럼 성경의 말씀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땅이 아니고 인간세계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왔죠. 하늘나라에 성도의 타인이 있죠. 누구냐? 주님이죠. 하나님인데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이 땅에서는 우리의 타인이 되죠.

구약에서는 그 타인을 보내실 것을 예비했어요. 신약은 이미 오신 주님이 오시면서 뭐를 던졌느냐 하면 말을 던졌어요. 말씀. 성경말씀을 던졌단 말이죠. 던진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정당성이죠. 하나님의 정당성이에요. 그럼 우리의 정당성 아니죠. 우리의 뜻하고 아무 상관도 없죠.

그 뜻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못 고치잖아요. 못 고치는데 끝까지 우리 존재를 파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 존재에 빵꾸가 나죠. 양말 오래 신으면 빵꾸가 나잖아요. 우리 존재에 구멍이 나죠. 그 구멍 난 지점에 성령이 바람처럼 우리에게 불어 닥치죠.

불어 닥치면 누구 존재입니까? 주님의 존재죠. 주님의 존재가 기존의 인간에 구축된 내 존재를 쇼트트랙 하듯이 뒤에서 바깥으로 확 밀어버립니다. “내 증인이나 되어라!” 밀어버리죠. 이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전부 다 어디에 기원돼요? 전부 다 말에 기원되죠. 말에.

어떤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휴, 목사님, 저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잘하고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잘하고 있는 걸 묻는 게 아니고, 어제는 어느 말씀에 대해서 빵꾸나가지고 그 말씀이 이런 뜻이라고 그 성경구절을 이야기하면 나도 은혜 받고 좋겠는데, “아휴,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잘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정당성이 거기서 왜 나와요? 정당성이 나왔다는 말은 뭡니까? 지금 빵꾸가 안 났다는 뜻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제가 왜 건드려요? 말씀이 건드리죠. 인간은 스스로 못 고쳐요. 고칠 수가 없어요. 성경공부 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언어가 와서 우리를 밀어내야 돼요.

이 대목보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야고보서 3장을 전에 한번 한 기억이 나긴 하는데, 야고보서 3장 6-9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지옥 불이죠.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이에요. 우리는 꿈속에 사는데 우리의 현실은 현실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불사질러버리죠.

그다음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그다음 8절 보세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 배후에서 누가 인간에게 말을 해왔다는 겁니까? 마귀가 그 짓을 했다는 거예요. 마귀가.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를 장악하는 마귀가 아담을 다루었듯이 똑같이 우리가 출생하면서 우리에게 이걸 집어넣은 거예요. ‘너는 정당해야 돼. 어디가도 정당하고 너는 칭찬받아 마땅해. 너는 마음에 상처 입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해왔던 거예요.

그래서 9절 봅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쓴 물, 단 물 말고 단 물만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빵꾸 나야죠.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꿈이 아니에요. 이왕 나온 김에 한 구절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욥기 17장 14절,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자, 욥이 말하기를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라. 구더기가 어디 있습니까? 무덤 안에 있죠.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고 욥에 대해서 자꾸 엉뚱한 소리하는 이유가 뭐에요? 욥의 현실은 뭡니까? 지금 어디 안에 있다? 산 채로 무덤 안에 있는 거예요. 산 채로 무덤 안에. 죽음만이 현실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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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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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