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1114a신31장26절(율법의 경로)-이 근호 목사
안양20241114a신31장26절(율법의 경로)-이 근호 목사
오늘은 . 신명기에서는 첫 번째 나오는 제일 첫 문장에 “신명기는 받은 율법을 재천명함으로서 율법을 그동안 받은 것을 재천명한다.” 이거하고, 다시 외치는 그 지점이 요단강을 바라보면서 외쳤거든요. 요단강을 바라보면서 모세가. 여기서 구분을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다시 외쳤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까? 그렇게 두 개의 문항을 만들 수가 있어요. 얼른 보면 같아 보이지요. 첫 번째는 뭐냐, 1번, 율법을 다시 전했는가, 아니면 2번,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는가, 이 두 개가 같아 보이지요. 두 개가 같아 보일 겁니다.
요단강 앞에서 외쳤던 것이 율법을 전했다고 해서 신명기인데,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 하고 두 개가 같아 보이지만 달라요. 왜냐하면 되돌아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과거에 이러한 잘못한 것도 있고, 이러한 실수도 많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자. 하는 것은 2번. 역사에 대한 회개지요.
그런데 율법을 다시 전한다는 말은 그 과거에 했던 그 오류가 미래에 대해서 그 오류보다 더 센 오류로 이렇게 미끄러져 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다시 전한다는 말은 예언이 담겨있다. 과거 역사를 돌아봐서 그걸 거울삼아 우리는 정신 차리자.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니가 한 그 과거의 오류는 너의 속에 이미 암세포처럼 박혀 있어가지고 그게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젠 전신에 다 이스라엘 전체에 퍼질 것이다. 따라서 너는 오류 덩어리가 될 것이다. 너가 오류 덩어리가 될 때 그 너에 대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파멸이 일어나거든 이것은 인간은 달라져도 말씀은 달라지지 않는 사례인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교회 다녀서 정신 차려서 바르게 살면 내 미래는 펼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 갈 것이다.” 라는 이 사고방식은 애초에 성경 속에 없는 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내가 말했지. 너희들 흙이라고.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희들 가운데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다 망한다고. 너희들 안 믿지? 하지만 내가 너희들 믿게 해줄게. 네가 아무리 말씀대로 살아봐야 점점 더 니가 원치 않는 좋은 것이 아니고 망하는 쪽으로 갈 것이다.” 하는 거예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쁜 결과를 원해서 행동하는 법은 없어요. 다 좋은 결과를 상상하고 기대하기 마련이잖아요. 그걸 종교와 결합할 때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보느냐, 이렇게 표현해요. “영적인 것을 아시면 당신을 행복해질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아시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럼 영적인 세계는 무슨 용도에요? 내 행복하기 위한 필요한 지식의 확보란 말이지요.
이미 영적인 세계를 관심을 가질 때, 그냥 빈 마음으로 가지는 게 아니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영적 세계의 문을 두드리게 되지요. 그러면 문을 두드리면 누가 열어줍니까? 예수님이 열어줍니까? 마귀가 열어줍니까? 마귀가 열어주지요. “잘 걸렸다. 인간아! 니 행복을 원하지? 내가 행복 줄게. 그 대신 니는 지옥이야.” 그리되는 겁니다.
말씀은 스스로 말씀이 어떤 식으로 완료되고 완성되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말씀이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수모당하면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굳굳하게 말씀은 자체 완성이 되었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 말씀을 율법을 따라서 요단강 앞에서 신명기에 전합니다. 그 전하는 내용안에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나도 약속의 땅 구경도 못했다.” 이게 내용이 포함되는 거예요. 모세가 멀쭉이 서가지고 못 들어가지요. 여기서 이제는 모세는 이스라엘과 함께 작별의 순간이 옵니다. 그 작별의 순간에 앞두고 모세의 예언 속에는 요단강 건너가서 벌어질 상황을 요단강 건너갈 때는 이러한 입국 절차를 밟아야 된다. 그것까지 알려줘요.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는 광야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약속의 땅에 갈때에 약속의 땅 입국 절차를 밟는데 그 밟는 절차가 뭐냐, 여호수아의 앞부분에 나와요. 돌에다가 말씀을 새기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뭐냐, 지금부터는 이 새겨진 말씀 외에 새기는 것도 외치는 것도 다 포함이 됩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외치는 것도. 이것부터는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다 죽는다. 다 죽는다. 그리되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온 거예요. 무시 무시한 곳에.
미국에서 만든 스릴영화, 괴기영화에 보면 이런 영화들이있잖아요. 절대로 소리내면 외계인들이 덮친다. 외계인을 만나더라도 사이언스, 침묵을 하게 되면 산다. 여러 가지 컨셉들이 있어요. 외계인 만났을 때의 컨셉들. 마찬가지로 그게 뭐냐 하면, 외계세계가 UFO가 침략했을 때는 그 지역은 내가 살던 고향이 아니에요. 더 이상. 이미 외계인에 의해서 접수된 땅이거든요. 주님은 그걸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은 너희가 살기 위한 용도의 땅이 아니고 내가 접수했다.
따라서 접수할 때는 이 땅에 사는 조건도 어느 쪽에서 제시하겠어요? 접수한 그 분 쪽에서 약속의 땅 조건을 제시하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그 정도에서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 모세는 비록 그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경계선에서 바라보면서 120살 때 죽는데. 그 죽으면서 그 땅의 원칙이 이 땅에 차지한 이스라엘 전체를 녹여버린 거예요.
녹여버리면 녹여버린 원리원칙만 그 땅에 고스란히 남겠지요. 약속의 땅에 산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다 죽었다. 그게 이스라엘이 점차 역사를 다하면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강한 햇빛에 눈 녹듯이 녹아가면서 말씀의 실체는 비례해서 이게 공개되는 겁니다. 사적으로 얼마나 말씀을 지켰다. 그런 건 사적인 것은 안 통하고요, 환경적으로 이미 말씀으로 결정난 환경이 약속의 땅입니다.
살 수 없는 땅. 어느 인간도 살 수 없는 땅. 그런데 우리가 살 수 없는 땅인데 왜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미리 우리한테 이야기하지요? 우리가 알아도 살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사실을 왜 미리 알려주는 겁니까? 이게 신비로운 거예요. 이 점을 신명기에 먼저 알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타인이라는 것을 바로 말씀을 전달받는 그들에 의해서 그들이 못 들어가고 그들이 망하면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에 아예 안 들어간 게 아니고 들어갔는데 못살겠더라, 라는 말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그들을 통해서 드러내는 용도로 이스라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신명기를 대하기 전에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대할 때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이어야합니까? 이렇게 마음가지면 됩니다. ‘저는 안 들어가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만 하면 저는 족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명기를 대해야 돼요.
왜그러느냐 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수요 말씀대로 변질되고 난 뒤에는 하나님 자체에 관심이 없어졌어요. 하나님 자체가. 왜냐하면 하나님 관심보다 우선되는 관심사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게 누굽니까? 본인이.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내 존재가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는 식으로 인간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말씀을 접하면서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내 존재를 녹여버림으로서 그 배후에서 지금껏 내 존재를 꾸역 꾸역 계속 하루 하루 살게해주신 그 분의 주체성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관계와 회복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지요.
하나님 만나고 다시 자기 이익 얻겠다고 “그럼 언제적 구원하실 건데요?” 이런 식으로 따지지 마시고요. 구원받겠다는 나를 이제는 주께서 놓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원받겠다는 욕망과 욕심. 내 손에서 떠나지 않던 이 탐욕을 구원에 의한 탐욕을 이제는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시장 갈 때 그 어린 아들 손잡고 가게 되면 어린 아들들이 얼마나 까불락 까불락 합니까? 엄마는 단단히 한다고 손잡다가 엄마도 “요새 고등어 얼마하나요?” 하다 보면 그 때 어떻게 돼요? 엄마 손에서 아들 손이 어떻게 빠지지요? 슬그머니 빠져버리지요. 슬그머니 빠져버립니다. 실컷 계산하고 보니까 애가 없어요. 교회 가서 구원받겠다고 말씀을 보고 야무지게 필기하고 그랬는데 그만 김장한다고 그러다보니까 슬그머니 주님의 관심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어요. 빠져나가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여주는 이러한 일상의 모습을 우리의 선배 되는 이스라엘이 다 보여줬고 심지어 예수님 앞에서도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귀찮게 생각했는가, 그 귀찮게 한 이유가 뭐냐, 자기의 집착되어있는 자기 구원의 방식으로 인하여 본인이 본인을 안 놔준 거예요. 놓지를 못한 거예요. 끈질기게. 끊질긴 자기에 대한 사랑. 집착이지요. 자기 연민.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다 그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율법 줄 때 그들은 그걸 몰랐어요. ‘야, 율법 줬으니까 이제 이거 지키면 하나님 만난다!’ 이러고 있었다 말이지요. 첫 번째 율법 줄 때 이미 그들은 실패를 했어요. 신명기1장3절에 보면, 제 사십년 십일월에 이렇게 되어있지요. 무슨 광야에서 40년을 돌아다닙니까. 아하, 참, 40년. 십일월 그 달 초일일에. 41년째 다 돼가요. 그럼 광야에 놀이동산 있어요? 뭘 본다고. 뭘 볼 게 있다고 40년을 돌아다녔습니까? 그 긴긴세월 소비된 이유가 인간의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그 다음이 중요해요. 유일한 타자. 유일한 남. 남으로 찾아온 주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유일한 타자, 유일한 남이라는 표현을 제가 쓴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인간은 나 중심이잖아요. 인간. 육신이 있으면 육신은 원래 하나님이 준 거고, 여기서 삐져낸 것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만들어진 것이 ‘자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가 생긴 거예요. 이 ‘나’가 생기면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나’는 타인을 의식하고 후딱 자기 방어체제에 돌입해요. 인간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전부 다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본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카페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상대방과 눈 마주하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가끔, 가끔 정도가 아니고 아주 자주 ‘나 지금 잘 있지. 지금 선방하고 있는 거지. 지금. 그다지 지금 내가 상대로 인하여 지금 내 마음에 흉터 나지 않았지? 그지.’ 늘 점검하면서 상대와의 대화에 조절하게 되어있어요. 행동도 마찬가지고. 몇 살 때부터? 한 살 반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어떤 대목을 보면, 어린아이들은 살려주는 대목이 나와요. 어린아이들은. 아직 자아가 미성숙할 때는 주께서는 노골적인 공격으로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타인에 대해서 방어체제를 갖춘다는 말은 인간의 궁극적인 사는 목적이 자기 존재 사수에 있음을 우리 주님은 아시지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타인은 나 지키기 위한 용도로 이해되는 타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타인으로부터 몽땅 한 무리가 집단적으로 분리되어서 탈출이 된 사건이 바로 애굽에서의 출애굽 사건이에요. 민족 단위로 하나의 대규모 자아체라면 민족단위로 하나의 덩어리. 한 사람처럼 덩어리라면 히브리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은 애굽은 뭐가 되겠어요? 타인이 되는 거예요. 타인.
그리고 출애굽 당시에 그 타인으로부터 히브리민족이라는 그 이름 때문에 노예생활 고생 많이하니까 그들끼리는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 저 쪽 애굽 사람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의식이 고취되겠지요. 하나로 뭉쳐지겠지요. 개인적으로 티격태격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저쪽 타인이 권력 쥔 타인이 우리들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 생각하는 그 인식을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할당받고 있는 거예요. 조금씩. 뭉쳐보면 애굽사람에 비해서는 우리는 뭐냐, 노예가 되어야 마땅한 하나의 큰 덩치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 애굽이 뭐가 돼요? 타인이 되는 거죠. 그 타인으로 경유해서 나는 애굽사람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자의식이 집단적으로 공통적으로 갖추게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바로 남자들이 어디에 갑니까. 나이 스무살 되면 어디 가지요? 군에 가지요. 군에가면 전문용어로 군발이라고 합니다. 군발이 맞은 편에 타자가 뭐냐, 사회인이에요. 왜냐 군에서 계속 강요하는 것은 “이게 어디서 사회에서 하던 행세를 해? 우리는 군인이야.” 무슨 뜻입니까?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집단 대 집단으로 분류시켜서 저 쪽이 우리를 바라보는 타인이고, 우리도 저쪽의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하여 제대했습니다. 제대하게 되면 집에서 다시 옛날에 했던 사회로 돌아와야 되는데, “어머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뒷말 올림)?” 또 뒤에 붙는 전문용어 있잖아요. 뒤에 또 붙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거. 제가 안 했습니다. 말입니다. 이런 거. “야, 야, 제대했어. 말 고쳐.” “하루 아침에 안 고쳐집니다. 말입니다.” 이런 거. 그러다가 제대하고 난 뒤에 한 몇 년 지나면 없어지겠지요. 그런데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비군 훈련 가보세요. 지나가는 아가씨 휙~~ 불고. 그 때는 모자를 삐딱하니 써줘야 돼요. 지가 뭐 초월자 좀 되는 줄 알고. 자크도 안 올리고 있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왜? 타인이 만들어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애굽전체를 통째로 날려보냈어요. 그리고 그 애굽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나님 본인이 오십니다. 하나님 본인이 와요. 본인이 딱 오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위 히브리인 속에 이스라엘 속에 뭐가 남아있는가, 애굽을 타인으로 여겼던 자의식이 남아있었던 거예요. 그거 없애는데 40년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작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러한 백성이 되어야 될 텐데 이 인간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인들이 만들어낸 그 자아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나 새사람 됐다고 우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교회 바깥에서 세상 사람을 자꾸 만나요. 만나게 되면 이미 그 전에 교회 나올 때부터 굳어져 있는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하는 것.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으려고 하는 의식. 남이 싫어하는 일 내가 안해야지. 하는 타인을 의식하는 그 자아상. 그 자아상으로서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 타인 자리에 개입해서 우리하는 그 자아상을 깨부수는 일들이 일어나요.
그런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사님, 교회 나왔는데 하는 일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믿고 복음 알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판정내리는 겁니다. 타인이 내려준 기준에 준해서.
그런데 그 성도에게 준 타인이 아까 신명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지요. 그럼 오늘날 성도에게 준 타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몰골이 어때요? 상상한 대로 대단합니까. 아니면 연약하고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별볼일 없는 흠모할 것도 없는 어떤 모습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흠모할 것이 없지요. 누가 무시해도 무시할 만한 핏기 없고 초췌한 그 분이 타인이고, 타인이 주님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도 이게 진짜 하나님 모습이고 메시아라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성도가 그 전에 세상으로 살았던 방식은 전부 다 좌절시키는 식으로 천사를 보내가지고 환경조정에 나섭니다. 다 바꿔놔요.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돼요? 힘들고 괴롭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난리도 아니에요. 맨날 하는 소리가 “어쩌란 말입니까? 이것마저 날린다면 그럼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맨날 이런 식이에요.
애굽으로부터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애굽으로부터 흉터 아픔이 있잖아요. 오늘날 주님으로부터의 아픔과 흉터가 발생되겠지요. 이런 식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반항들을 하는 겁니다. 그 반항들을 주님께서는 자기 몸으로 다 끌어당겨요. 다닙니다. 해놓고 자기 아픔을 도로 성도에게 내뱉지요.
자, 이건 불신자도 해당되지만, 성도에게서 고민을 추정해서 말씀드리면, 성도, 사람, 인간, 불신자 어떻게 사는가, 중요한 거 나올 때는 좀 적으세요.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 마음을 누가 유도하는가, 주님이 유도해 버려요. “그래, 죽여라. 내가 이 일을 내가 유도했어. 나를 죽여. 그런데 니한테 묻겠다. 니가 나를 죽이고 니한테 얻는 이익은 뭐냐? 니가 나를 없애고” “나, 이제 예수하고 안 놀아.” “그래, 좋아 놀지 마! 그렇게 했을 때 그 결과가 니가 만족스럽냐” 묻습니다.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것은 아담에게 심어준 악마의 마음이지요. 문제는 이 악마의 마음에서 어느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성도로 하여금 악마 품에서 죽게 만들어요. 그냥 죽게 만들어요. 그냥.
그래서 제일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녹는다고 했지요. 우리 자신이 녹아져야 이 모든 일을 꾸민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거예요. 나한테 가리워졌던 주님의 화면이 내 화면이 사라지면서 배후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거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몇 년 거렸다고요? 40년 걸렸습니다.
보람찬 하루, 나올 때는 신났어요. 찬양 부르고.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 약속의 땅까지 했으니까. 우리 가자. 약속의 땅. 했지요. 모세도 못 들어가는 땅이에요. 어딜 저들이 넘봐요.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타자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을 줌으로서 그들이 비로소 애굽에서 알던 나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도 못 들어가는 나라고 새롭게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혀주는데 40년 걸렸습니다.
신약에 와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한 기간이 몇 일? 40일 걸렸어요. 40일 걸리고 인간은 왜 악마로부터 못 빠져나오는가를 악마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게 밝혀졌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그러니까 떡으로 산다는 생각은 바로 신명기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광야에서 모세에게 달려들었는데 그게 떡달라고 달려든 거예요. 떡. 물달라고 기본 생존은 보장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게 달라고 한다는 말은 이런 말이에요. 약간 어렵게 이야기해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속에 이런 고백입니다. “내 안에 애굽있다.” “내 안에 애굽 살아있다.” 이겁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은 떠나왔지만, 그 애굽의 요소는 그들의 몸에 실려서 광야에 들어온 거예요.
광야는 결국 걸러내는 겁니다. 애굽에 있다는 사실을. 내 속에 애굽에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애굽의 요소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애굽의 요소는 뭐냐,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인정 받기를 위해서 자아가 재구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조건. 이런 관계망 속에서 인간은 자아가 형성된다는 거예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요. 어릴 땐 누가 이야기했어요? 아버지, 엄마가, 우리 형이, 누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이 지보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먼저 태어난 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찍이 엄마, 아빠가 죽게 되면 인간은 허하지요. 그만큼 통곡을 하지요. 통곡을 왜 하느냐, 아직도 내가 내 스스로 신이 되기 전에 당신들이 왜 죽습니까. 내가 나를 신으로 만들어놓고 죽어야지 신이 되기 전에 왜 죽습니까.
고아원 보모들 교사하고 부모하고 차이점이 확연하게 나요. 그 사람은 돌봐주는 사람이지요. 돌봐주는 사람이고 부모는 뭐냐, 나의 자궁이에요. 나의 온천이라고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환경이고 그들은 태어나고 난 뒤에 밥 먹어라, 공부 시켜주고, 고아원 나오면 약간의 돈 주면서 생활터전, 또는 임시거처비 주지만 나의 나 됨은 그들이 아니고 부모에요. 부모 안에서 내가 태어났잖아요. 부모를 전제로 해서 부모 닮기, 아버지처럼 되기, 엄마처럼 되기가 바로 나라는 말이지요. 이걸 가지고 거울 관계라 해요. 거울 관계.
데이트폭력이 왜 일어납니까. 데이트폭력의 헤어진다고 죽이는 이유가 상대에게 너무 반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대가 이야기하는 것이 내 자아에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들어왔던 거예요. 그대 있음에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좋은 남자 생겼어. 우리 헤어져. 커플 반지 가져 가! 얼마 안돼. 가져 가!” 했을 때, 니가 없으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거기에 나오는 구구한 노래 가사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존재의 이유.
아, 남자들 듣고 울지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테니. 내가 있는 존재 이유는 너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가사에 나오거든요. 너가 있기 때문이야 친구집 중국집 배달하면서 썼던 가사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테니. 잠잘 때도 그냥 안 자요. 그녀의 사진 쥐고 잤어요. 만약에 김종환 부인이 “우리 헤어져.” 그러면 아마 기절할 거예요. “내가 죽여버릴 거야.” “니 죽고 내 죽자. 사는 의미도 없어.” 이럴 거예요.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 말은 평생 갑니다. 평생 가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뭐냐 하면 교체입니다. 교체. 옛사람과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미리 준비된 마련된 내가 예상 못한 내가 미처 모르는 나와 교체 작업에 주님이 개입하고 있어요. 우리는 뭐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 죽는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지금. “비트코인 값 내려가면 나 죽을 거야. 나는 더 이상 못 삽니다. 죽을 거야. 정말. 주식값 내려가면 나 더 이상 안 살 거야.”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을 알아라.” 요새는 한국에는 거지도 먹는 거 입는 거 보장됩니다. 최저 생계비 주니까. 나는 나답게 살아야지. 그건 다람쥐 모이주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사는 거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기도하는 거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니는 그 정도도 안돼” 광야에 집어넣어서 죽어봐야 속이 시원하지. 항상 인간은 자기 편이고, 항상 주님은 말씀 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경유해서 어떤 식으로 말씀이 자체적인 완성을 구성하고 꾸리는가, 교체지요. 자, 이 교체를 신명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겁니다. “너의 스토리를 나의 이야기로 바꿔라.” 그러면 아, 이제는 내 일기 안 쓰고 주님 하신 거 써야지. 아니 쓸 필요 없어요. 왜? 나의 이야기가 성경이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은 과거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고 미래까지 한다, 하지요. 이 성경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이라서 똑같은 거예요. 아담의 자손의 마지막 아담 우리 주님이 어떻게 미리 개입하셔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바꿔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인간은 못 바꾸지요. 왜? 마귀가 쥐고 있으니까. 내 앞길 막으면 다 죽여버린다. 그러면 죽음을 당할 뻔 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세와 아론이었어요. 광야에서. 민수기에 나오지요. 모세와 아론. 신명기는 이제 그 세월이 다 지나고 40년 지나고 요단강 바라보면서 했기 때문에.
민수기에 보면 모세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모세한테 반란을 일으켰잖아요. “니만 대장질 하나, 우리도 대장질 좀 하자.” 심지어 모세의 누나 미리암까지 모세에 대해서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지요. 그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늘 생각해야 될 것은 왜 미리 개입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미리. 미리 개입을 해버리면 내 식대로 내 교체에 나서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는 구원될 자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진리에 대해서 니가 미리 알면 아는 진리를 내가 꼭 붙잡고 내가 구원받겠다.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진리는 우리한테 붙잡히지도 않고요, 우리가 다룰 대상도 아니에요. 진리를 다루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믿겠습니다.” “믿지 마!” “믿음을 니가 뭔 줄 알아? 믿음도 모르면서 뭘 믿어? 그냥 있어. 내가 믿음 줄게.” 주님이 믿음을 줘요. 우리는 내 믿음과 주님 믿음 사이에 거리가 있고, 이게 다르다는 것을 중첩된 인식 속에서 그걸 느껴지는 거예요.
나의 관심사는 따로 있는데, 주님의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양쪽 관심사를 한꺼번에 안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비록 두 눈이 너무 거리가 멀어서 사시가 된다 할찌라도 그 때는 안과에 교정 받으면 될 거예요. 물론 성령이 교정 받을 때 좀 심하게 아주 난폭하게 다루실 겁니다.
그래서 ‘나의 스토리 바꾸기’ 이게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요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빨간 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 이게 신명기 이야기죠. 그런데 여기 나라고 했잖아요. 요거 나는 집단 속의 나에요. 한쪽의 광야에서는 홍해 건너왔던 사람들 집단적으로 다 내보냈어요.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애와 아까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남았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새로운 우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기존의 우리는 다 작살났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이 어디를 가느냐,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데,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어요. 약속의 땅과 만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광야에서 죽었던 사람과 더 유리한 조건이에요? 불리한 조건이에요? 더 불리한 조건이에요. 못 들어가고 죽는 거나, 들어가서 망해서 쫓겨나는 거나 기분 업됐다 마는 그 기분 속에서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악마성의 실체는 더 깊이 폭로당하지요.
그래서 성도가 되어서 오래 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일찍 죽을 생각은 너무 과한 욕심이고요. 과한 욕심이에요.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있어요. “목사님, 꽉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어디서 호강을 누릴 생각을 하고 있네. 무슨 자격으로 호강을 당겨서 누리려 합니까. 그만 복음 알고 그냥 눈 감은 김에 꽉 죽고 싶습니다. 뭘 잘한 게 있다고 그런 호강을. 일찍 죽는 호강을 누립니까. 뭐했다고.”
가만두어라. 가라지는 일단 뽑고 가자. 우리는 주께서 다루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 그게 하나의 주님의 레시피가 따로 있고, 우리는 레시피를 위한 시장에서 막 함부로 사온 식재료들이에요. 식재료. 양배추, 고추, 무사리는 거, 무 사리다가 예배도 못 보고 하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다루는 식재료입니다. 니 속에 말씀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박혀있는지 자기 집어넣은 부속품 확인하는 과정이에요. 그거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구원에 주체로 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체가 아니에요.
자, 그러면 이스라엘은 너무 안됐잖아. 너무 슬프잖아. 뭐 이런 생각도 하게 되겠지요. 모세야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좋겠다 마는. 다른 백성들. 그럼 약속의 땅에도 못가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아쉽잖아. 이리 되는데. 노을은 어두움만 남기고 사라져요. 반짝하지요. 우리 인생은 노을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다 간 자리에는 어두움은 짙어요. 우리의 모든 기억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사용해서 인간과 말씀을 개입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는 것은 모든 인류가 인간이 이런 운명에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그 죽음의 힘에 벗어날 자가 없어요. 인간을 탁 깨면 그 안에 죽음이 들어있지요. 탁 깨면. 캡슐에 든 약 있지요. 딱 깨물면 안에 죽음이 나오듯이.
하나님 쪽에서 그 이스라엘을 볼 때, 항상 성경에 불쌍히 여겼다. 하나님쪽에서 불쌍히 여겼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 그런데 그 불쌍히 여김을 누가 찼습니까? 우리 내부에 있는 마귀에 편승해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차버린 거예요.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 보다도 나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해 주길 원합니다. 왜? 우리는 내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살아왔기 때문에. “아이구, 대단해요!”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아이고~~ 불쌍해라.” 이건 진짜 내 앞길을 막는 죽이고 싶지요.
여러분, 이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추운 날에 어떤 할머니가 골목길 모퉁이에서 밤늦도록 국화빵 굽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 불쌍하다 생각 들지요. 그런데 국화빵 한 번 사보세요. 그 불쌍한 생각 싹 가십니다. 원가 계산 다 해도 절대로 그 조그마한 것 300원이상 못 받는데 천원을 받을 때 “에이, 이 도둑아 잘먹고 잘 살아라.” 갑자기 조금 전까지는 뿌연 외등 밑에서 손님도 없는데 이렇게 하는 거 보면 세상에 소설을 막 쓰고 싶지요. 자식한테 버림받고 남편하고 이혼하고, 이러고 있는데 나중에 조금 있으면 대충 국화빵 굽고 난 뒤에 자가용 몰고 집에 가요. 우리의 환상이 다 깨지지요. 저렇게 폭리해서 잘먹고 잘사는구나! 동정을 밑천으로 돈벌이했구나! 그게 어떻게 그 할머니만 국한되는 일일까요?
시장 다 그렇습니다. 모두 다. 장사하는 사람이 다 그런 거 아닙니다만. 말 실수할 뻔 했다. 난방 판다고 다 그런 건 아닌데. 모든 인간은 바로 자기 위주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