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a-이근호 목사
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장 120명이 모여서 같이 기도했다는 15절 120명쯤 기도했다. 방향이 바깥쪽이 아니고 안쪽이에요. 바깥쪽이 구심점을 갖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바깥에 있는 자기 가족들이나 자기 앞으로 사업 스케줄 이런 거 오늘 집에 가스 불 안 끄고 왔네 주차 잘못해서 차 끌고 가는 거 아닌가? 이런 것이 아니고 마음을 전혀 같이 해서 뭐냐? 어떤 구심점을 모으고 있어요. 구심점을. 참 희한하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구심점으로 한데 모여 있는 거죠. 구심점으로 모여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아니고 그들은 시작부터 내가 아니고 우리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우리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왜냐 하면은 구심점은 여럿이 아니고 마음을 하나로 모은 거예요. 옆 사람이나 이쪽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집중되어있어요. 그 하나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슨 하나를 포기해야 됩니까? ‘나’라는 하나를 생각하지 말아야 되지요. 아주 특이한 일이죠. 성령은 그 다음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구심점으로 모였다. 각자의 나는 의미 없지요. 내 집에 개 사료 안 줬는데 이런 거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집에 개 사료 주는 것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신경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신경 안 쓰지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과 내 마음은 하나로 안 모였지요.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상하게 사람은 각자 각자 120명인데 120명이 뭐가 됐어요? 하나가 되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하나가 되게 했는가? 이게 뭔가? 구심점에 있는 게 뭔가? 예수님의 약속이죠.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의 약속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결론부터 반대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는 어떻게 차이 나죠? 하나님의 약속 있는 자는 뭐가 날라간다? ‘나’가 날라가죠. 그러면 이 말은 나하고 하나님의 약속하고 어느 것이 크단 말이죠? 나보다 약속이 더 크다. 부등식이 이렇게 되겠지요. 나보다 약속이 더 우선된다 내 인생에서 더 다급한 문제다.
그러면 그 약속 앞에서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다가 되요. 그러면 여기서 보통 나에서 뭐가 나옵니까? 구원이 나오지요. 나에서 나의 구원이 나오잖아요. 약속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우리들 일을 시키는 겁니다. 일을 시키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을 내가 시킬거야 라는 게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걸 다시 끄집어내는 거예요. 구원보다 뭐가 더 월등합니까? 주님의 시키는 일이 더 월등하겠죠.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주님의 일이 무엇의 구원보다 더 우선된다? 나의 구원보다 더 우선 된다는 말이에요. 이 논리 잘 따라오고 있지요?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내 구원을 챙기는 사람은 뭐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그게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약속 앞에서는 그거는 엉터리죠. 잘못된 겁니다. 주님 저한테 무슨 일을 시킬 거예요? 이게 우선 돼야 되지. 저 일 시키는 대로 하면 저 구원해줄 거예요? 이거는 아니예요. 이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가 있으면 뭐가 우선이에요? 내가 있으면 남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싶어 하는 이게 우선이 된단 말이죠. 벌써 성경에 사도행전 1장부터 성령 오시기 전부터 이미 분위기가 나 중심이 아니라는 분위기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제가 일반화시키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일반화시키느냐? 이렇게 일반화시킵니다. 주일날 약간 언급했는데 인간의 삶은 자기가 자신에게 신뢰할만한 자인가를 점검하는 기간.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신뢰할만한 자인가를 점검하는 그 기간이 우리 인생입니다. 신뢰하려면 나의 결정 나의 선택 나의 행함이 나의 예상대로 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나를 신뢰할만하죠. 신뢰할만하다는 말은 내가 나를 꾸준히 지켜온 것이 참 잘한 일이다라고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삶의 보람. 아닌 경우가 없지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때 그냥 지키는 게 아니고 나는 말이야 나는 나를 믿고 싶어 라는 식으로 자기를 사수하고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이 얼마나 오늘날 현실 속에서 실감나게 실제적인가 예를 들겠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금 사기, 남편한테 얻어맞기. 금 사기는 뭐냐? 금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저 금 도매상인데 지금 사시면 시세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한 달 받는다면 지금 시세보다 더 좋게 쳐주겠습니다. 만약에 두 달 후에 금을 한다면 더 좋게 시세 쳐서 더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금 시세를 낫게 하는 이유는 가공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데보다 금 시세가 낫습니다 해가지고 금은방 수십 군데가 사기 당했어요. 처음에는 물건 좀 주고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금을 얻기 위해서 목돈을 해서 사기를 당했습니다. 사기 치는 것, 사기 당하는 것 이게 당사자에게 얼마나 불행입니까. 돈 수천 만원 날렸으니까. 불행이죠. 이게 행복이 아니잖아요. 아 미치겠다 너무 좋아 이런 게 아니잖아요. 왜 불행합니까? 어디서 손상이 일어났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 그 나에 대해서 내가 신뢰도가 확 떨어진 거예요. 신뢰도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남는 것은 자살밖에 없어요. 더 이상 마지막 믿고자 하는 것이 결국 나였는데 그 ‘나’가 신뢰도가 내가 믿을 수가 없어. 그때는 차라리 내가 사는 것보다 내 손으로 거두는 것이 마음의 고통을 덜 한다 해서 죽는 수밖에 없지요.
그다음에 두 번째 경우 남편한테 얻어맞기. 남편한테 얻어맞고 남편은 사과하고 얻어맞고 사과하고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 했는데 경찰도 대충 처리하고 격리를 안 했어요. 세 번이나 해도 경찰이 막지를 못했어요. 결국 남편에 의해서 아내가 옥상에서 떠밀어서 죽었습니다. 어제 사건이에요. 그때 아내가 친정집에서 엄마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따라와서 여자보고 옥상까지 데려가서 폭력을 행하고 아내를 죽였어요. 자, 이 여자 이 남편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끝까지 자기에 대한 신뢰를 포기를 못한 겁니다. 내가 때린다고 해서 이혼해버리면 내 인생 어떻게 되는데 이거거든요. 내 인생 신뢰하는 인생인데 네가 이혼해버리면 나는 이혼한 남자가 되잖아. 나 그게 싫은 거야. 그러니까 잘 해줄테니까 이혼하지 말고 친정집 가지 말고 같이 살자. 같이 살면서 계속 패는 거예요. 패는 거예요. 여자는 적극적으로 대응을 못해요. 왜? 자기가 좋게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왜 좋게 해결하죠? 남편이 개과천선해서 달라지게 되면 그때까지 살아 온 정이 있어서 붙어 살라고 추이를 바라보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성령 나오지요. ‘성령’. 성령의 존재는 딱 하나입니다. 이것은 꼭 기억해야 돼요. 성령이 오신 이유는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를 인간은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이 적절한 겁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께요. 성령 받아서 변했다 하지 마세요. 인간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고는 어떻게 하느냐? 원래 내 모습은 지금 내가 신뢰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아는 거죠. 워낙 개판이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는 거예요. 내가 나를 신뢰해? 미쳤어. 자살한다고? 너 자살할 권한도 없어. 자격도 안돼. 왜 인간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느냐 하면은 인간은 세월에 따라 조금씩 자신의 가치를 더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기서 보람을 느낍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를 꼬집으라면 이겁니다. ‘세월’.
인간은 시간이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 인간의 시간은 제자리 뛰기입니다. 맨날 시간이 흘러가도 분명히 뛰었는데 성장하기 위해서 분명히 애썼는데 제자리예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고전 사극 보면 물레방아 가는데 여기에 사람이 올라가가지고 발 딛고 하는 거 있죠. 뭔가 움직이는데 자기는 제자리에 있어요. 제자리. 인간은 달라진 적도 없어요. 처음도 끝도 달라진다고 착각하지요. 그만큼 가치에 가치를 더하고 성장하고 보람 있다고 하지만 시간에 따라서 시간이 있어줘야 조금씩 조금씩 더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돼요? 시간 자체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뭡니까? 인간은 변한 게 없다가 되겠지요. 성령 안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성령 안에는. 성령이 온다는 것은 네가 있던 모든 시간은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성령오심은 종말의 시작입니다. 종말의 시작. 종말이 시작되려면요 시간이라는 직선으로 표현하면 안돼요. 시간은 과거부터 현재, 현재로부터 미래로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 현재가 두 개가 되었어요. 두 개가 되면서 인간에 있던 과거든 현재든 인간의 미래든 전부 다 예수님의 현재 안으로 회수됩니다. 소환됩니다. 마치 욕조에 물 빠지는 것 같아요. 이것으로 다 빠져요. 주님의 현재로 다 빠져요. 그러면 주님은 심판주죠. 심판주입니다.
복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세상은 멸망한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미 끝’. 더 줄이면 ‘끝’. 무엇의 끝? 심판의 끝, 구원의 끝. 끝났어요. 애쓴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한다고 구원 안 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 되고 안 되고가 이미 끝났어요. 십자가로. 어떤 사람이 생명책에 구원되느냐 하는 것은 현재로부터 솟아나올 거예요. 현재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 이거는요 인간이 살아봤자 현재도 내일되면 과거로 변하잖아요. 이 모든 것은 현재로 와서 다시 시간 속에 뱉어내어버리면 우리는 아직도 미래가 남아있는데 복음 안에서는 네가 백날 앞쪽으로 100m 200m 달려봐야 그것은 뭐냐? 어디를 가도 이미 멸망의 흔적만 네가 감지될 뿐이지 어떤 희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뭐냐? 세상은 멸망이에요. 대구강의에서도 했지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말씀 모든 것은 심판아래 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복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평화로 오셨다. 이상한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평화로운 분이고 그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인간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자꾸 주려고 해요. 왜? 기쁜 소식이니까. 기쁜 건 주님이 기쁘지요. 주님 혼자 기뻐요. 기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현재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쏟아질 때 비로소 내가 예상한 기쁨이 아니고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을 억누르면서 새롭게 주어지죠. 그게 뭐냐? 내가 구원받은 게 기쁜 게 아니고 나에게 주님의 일이 덮쳐졌다는 게 기쁜 거예요. 내가 감히 주의 일을 하다니. 이게 말도 안돼. 천하의 이기주의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 내가 주의 일을 하다니. 이건 불가능해. 그렇습니다. 불가능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얼추 비슷하게 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건 다 실패로 갑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내가 지독하게 하기 싫었었었다. 내가 지독하게 하기 싫었다. 이게 불가능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이제는 누구 차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공격할 차례죠. 우리가 하나님을 왜 죽였습니까? 이사야 53장에 주님은 인간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죠. 모든 인간이 주님을 싫어한 겁니다. 아니 모든 인간에게 싫어버린 바 된 모습으로 오셨죠. 어느 인간도 주님을 좋아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구원은 따로 있었는데 그거는 내가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 진짜 주어지는 구원은 우리에게 불가능으로 오거든요. 그 예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부자 청년이 왔을 때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본인이 밝혔어요. 왜 찾아왔나? 영생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영생을 싫어하지 않고 영생을 좋아합니다. 그다음에 뭐에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이 부자청년의 논리 매치를 한번 보세요. 나는 구원을 좋아하고 구원 얻기 위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뭔가 나름대로 했다? 나름대로의 율법을 지켜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영생을 왜 좋아합니까? 십계명 지켜서 영생을 얻게 되면 누가 신뢰하는 대상이 됩니까? 내가 나를 실망하지 않고 이제는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기는 기뻐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기쁨이에요. 내 원대로 뜻대로 내가 소원하는 대로 영생을 지니게 된 존재로 달라졌다는 것이 평소의 소망이었습니다. 싫어버린 바 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부자청년은 왔는데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난 뒤에 예수님 따라다녔습니까? 근심하고 갔습니까? 보낼 때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언급했지요. “네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 갑자기 훅 들어왔죠. 뭐가 훅 들어왔습니까? 불가능성이 훅 들어온 거예요. 왜냐하면 부자인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죠? 그 많던 돈이 하나도 없을 때 싫어. 그런 내가 싫은 거예요. 그런 내가. 그런 내가 짜증나는 거예요. 나는 나한테 반하는 재미로 살고 싶어. 멋있는 나. 그런데 돈이 없어? 아 그런 나를 상상도 못해요. 안돼! 그건 안돼. 내 인생에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그때 같이 놀랜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현장에 안 가봤습니다만은 얼굴색이 파랬어요. 파랗게 됐을 거예요. 벌벌 떨면서. 주님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게 불가능이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걸 가능성으로 바꿨지만 그 가능성이 더 미워. 불가능보다 더 쎈 불가능이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 분명히 가능 이야기하는데 불가능보다 더 쎄게 불가능 이야기해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보다 어렵다.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사람은 못한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람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낸 결론은 이겁니다. 이중에 성령도 안 받고 믿음도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공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원에 실체가 없다. 사기꾼. 실체가 없는 게 사기예요. 금 없는데 금 있다고 속이고 돈 받아먹었잖아요. 자기 자신을 괜찮은 남편이라고 자꾸 하면서 아내를 팼잖아요. 그러면 아내 입장에서 남편하고 결혼생활 유지하려면 언젠가 개과천선할 것이다 그게 여자 입장에서 자기 남편의 실체이어야 하는데 그 실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내 입장에서도 저 남편을 선택한 자기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리죠. 저 남자한테 뭐 당했다? 사기 당했다. 사기 결혼. 이 가운데서 지금 성령 받지 않은 사람 있다면 구원 자체가 실체가 없다. 사기거든요. 바로 모든 해석은 어디서 시작하느냐?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요. 왜? 인간은 항상 불가능성보다도 가능성부터 한 발자국 내딛기 때문에.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불신자가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 그 사람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은 아담의 똑같은 아담의 마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죠. 구원 있는지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있다고 치고 예수 믿자 이럴 수 있잖아요. 그걸 왜 애써 감추냐는 말이죠. 그걸 까발려야죠. 까발릴 용기도 없어요? 그런 자신감도 없어요? 천국은 애초부터 없었고 예수님은 죽어서 끝났고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낸 자기 여망 희망 있었으면 좋겠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받았을 때에 여러분들은 반격할 거예요? 아니면 속으로 아멘할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이 나의 착함에 도움 된다면 없는 하나님이라도 만들어서 믿겠다는 것. 그거 인간의 아담으로부터 온 본성 아니에요? 뭐 다른 본성 받았어요? 그거 받았잖아요. 항상 성경을 볼 때는요 나는 어느 정도 믿고 알고 이렇게 하지마시고요 가장 악랄하게 복음을 반대하는 그 자리에서 늘 새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늘 새로 시작해야 돼요.
자, 그럼 오늘도 마찬가지로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새로 시작해봅시다 이제부터. 다 같이 합죽이가 됩시다가 아니라 다 같이 철저하게 악랄하게 불신자가 됩시다. 그럴싸하게 불신자가 됩시다. 벌써 불신자의 시작을 벌써 제가 아까 말씀 드렸어요. 인간의 시작은 뭐부터 한다? 자기 신뢰성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 신뢰성할 때 여기서부터 어디까지 가느냐? 자기 신뢰성부터 해가지고 하나님께 접촉하는 거예요. 바벨탑이 따로 없지요. 하나님까지 도달하겠다. 이 과정을 누가 친절하게 자세하게 그 과정을 다 말해주시면 좋겠다라는 분이 있지요. 있어요. 그 분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자기 신뢰성을 다져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누구냐 하면은 칸트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 칸트라는 사람이 뭐를 주장했느냐 하면은 모든 것은 나의 인식론에서 나온다. 진리 또는 거짓 착함 악함 이것은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내 마음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감각적인 것을 철저하게 나 위주로 조립해서 나온 결과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말씀대로 삽시다 이런 것. 이거는 컵이다. 컵이죠. 칸트는 사과를 예를 든 것 같은데 저기 사과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사과 있기 때문에 사과 있다. 아니야. 사과가 있음에서 오는 감각이 내 쪽에 조립을 해요. 나의 인식에서.
그래서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동그라미 세 개로 설명해드리겠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은 사물, 사과든 컵이든 사물. 사물이 이것은 우리 또는 나. 인간. 사물이 인간에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뭔가 중간을 거쳐서 오게 되어 있다. 올 때 인간은 바로 마중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쏘아대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이 사물에 올 때는 경험이 되는 거예요. 촉감이 되니까 경험이잖아요. 그런데 인간 속에 경험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게 있다는 거예요. 선경험. 선경험에서 경자를 빼면 선험. 선험적 태도를 갖고 있다. 외부에서 오는 모든 감각이라도 내 마음이 선험적 이것을 편집한다는 거예요. 이걸 칸트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이걸 잘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와서 밝혀졌어요. 뭐냐 하면은 바로 두뇌작용. 두뇌작용은 눈에 보이는 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두뇌에 미리 와 있는 고참들이 있어요. 그게 기억이에요. 고참들이 내 전체 몸을 관리할 때 내 몸의 생존에 유리하냐 불리하느냐에 따라서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분리한 것은 내뱉던지 아니면 분리한 것도 유리하게 조작을 해서 내 기억 속에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내 기억 속에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남의 자식 까부는 것은 욕하고 자기 자식 까불어도 욕 안하지요. 그렇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 애가 아니잖아 이러는 거예요. 이 애는 나의 애잖아. 이게 뭡니까? 우리 머리에 나는 내가 지키는 거예요. 이게 본성화 되었어요. 생물학적으로 본성화 되어있어요. 나를 내가 지키겠다. 현재 뇌 과학에서. 그러니까 똑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내뱉고 있는 그 고백이 다 달라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 없는 경우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경우를 설명해야 설명이 왔을 때 어떤 차이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없는 경우 생각 안하고 설명해버리면 그건 선경험 앞에 걸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이 사물이 있다로 안 보고 뭐로 보느냐? 그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이걸 가지고 현상이라고 합니다. ‘현상’.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 그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현상으로. 현상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만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인데 감동이 되는 게 아니고 뻔한 이야기 되죠. 맞는 이야기인데 뻔하지요. 철학자들은 맞는 이야기만 해요. 그런데 문제는 뻔한 이야기만 한다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칸트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칸트는 이렇게 합니다. 자연은 그냥 분주하게 무심한 일을 해요. 분주하게 활동성이 있어요. 분주하게. 어떻게? 기계적으로. 그런데 인간이 자연을 볼 때는 기계가 아니고 목적론적으로 봐요. 이건 뭐냐? 이 자연을 내가 나를 생존하는데 유리하게 어떻게 써먹을 거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목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럼 칸트는 말합니다. 자연의 목적이 있느냐? 자연에 무슨 목적이 있어요. 없지요. 목적이 없어요. 목적이 있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인간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냐? 아니면 자연 밖에 있느냐? 그것은 뻔합니다. 인간은 자연이에요? 자연 밖에 나가있습니까? 자연이요. 그러니까 이 말이 틀려먹은 거예요. 자연이 목적이 있다 없다.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칸트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목적에다가 자연을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우리가 아는 자연은 그냥 현상이고 현상 바깥에 보면 현상계 말고 더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 그걸 가지고 사물 자체, 사물자체 세계는 우리의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다. 신의 세계다. 따라서 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자연은 모르지만 인간하고 연결되어있다. 인간한테는 어떤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뭐냐? 무조건적인 도덕심이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내가 도덕적이어야지 이전에 들어와버린 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이게 칸트 이론의 전부고 결론입니다. 어떠십니까? 칸트의 의견에 대해서 여러분 한 표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트럼프에게 한 표 하시겠습니까? 어디에 한 표를 던지겠습니까?
자, 아까 강의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 칸트에 대해서 제가 분명히 전제를 달았어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 아주 간편하고 그것도 포괄적으로 못 빠져 나오게 이게 전부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성령 받은 티를 내야지 반박을 해야죠. 반박을 어떻게 합니까? 이 논리에 대해서. 반박할 자신 있습니까? 사물 또는 사물 그 자체가 들어왔을 때 인간은 선험적으로 편집해서 만들어낸 것이 형식이고 이 형식이 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성이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공간, 공간 있음 그 자체. 시간은 인간이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그냥 막으나 안 막으나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이런 형식을 주게 되면 우리는 나타난 것, 다시 말해서 현상만 받아들일 뿐이다. 여기 사과 있네 이렇게 되지요. 사과 있네. 여기에서 여러분 반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반박은 이렇게 됩니다. 둘로 나누면 돼요.
칸트의 이야기는 내가 이런 것 하고 싶다. 나는 이런 것 하고 싶다로 나를 규정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거 하고 싶어. 나 무조건 착하고 싶어.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싶어. 칸트가 성경을 다 아니까요.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너는 누구냐? 하고 싶다와 누구냐의 차이에요. 인간은 그냥 가만있지 않아요. 자꾸 뭘 하려고 해요. 하려고 하면서 뭘 가려요? 내가 누구냐를 가려버려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돼요?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아버지께 버림받았죠. 그럼 나는 누구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나는 뭘 해도 어떤 칸트 주장을 해도 어떤 철학을 주장해도 그게 뭐냐? 버림받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저주받은 모습이에요 그게.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노래교실. 제가 어렵게 칸트 언급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칸트가 우리를 대변했다고 보면 돼요. 대신한 거예요. 대신 했다고 보면 됩니다. 대신 했으니까 칸트 말고 칸트 류, 칸트 같은 사고방식이 오늘 세상에 어떻게 돼요? 차고 넘치겠죠. 모든 사고방식이 칸트 같은 사고방식이 차고 넘치는 거예요. 칸트가 주장하는 게 뭡니까? 나는 나를 신뢰할만한 식으로 살고 싶다 잖아요. 내가 누구냐가 아니에요. 그딴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되 내가 스스로 나를 신뢰할만한 그런 인간이 되어 살고 싶다로 꾸준히 밀어붙이는 겁니다. 첫 번째 노래 가사 들으면서 그 가사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An empty street, an empty house텅 빈 거리, 텅 빈 집
A hole inside my heart마음에 난 구멍
I'm all alone, the rooms are getting smaller홀로 있는 이 방은 자꾸만 작아져만 가요
I wonder how, I wonder why어떻게, 왜 그런지
I wonder where they are어디 있는지 궁금해요
The days we had, the songs we sang together. Oh yeah우리가 함께 한 날들, 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들 말이에요..
And oh, my love오, 내 사랑
I'm holding on forever나는 영원히 기다릴 거예요
Reaching for the love that seems so far멀게만 보이는 사랑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So I say a little prayer그래서 난 기도 드려요
And hope my dreams will take me there그리고 나의 꿈이 나를 인도해 주길 바래요
Where the skies are blue파란 하늘 아래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도록요, 내 사랑
Overseas from coast to coast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요
To find a place I love the most내가 가장 사랑했던 곳을 찾기 위해서요
Where the fields are green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만나도록 말이에요, 내 사랑
I try to read, I go to work책도 읽어 보고, 일도 해 보고
I'm laughing with my friends친구들과 웃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But I can't stop, to keep myself from thinking, oh no당신 생각을 떨쳐 내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요
I wonder how, I wonder why어떻게, 왜 그런지
I wonder where they are어디 있는지 궁금해요
The days we had, the songs we sang together. Oh yeah우리가 함께 한 날들, 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들 말이에요..
And oh, my love오, 내 사랑
I'm holding on forever나는 영원히 기다릴 거예요
Reaching for the love that seems so far멀게만 보이는 사랑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So I say a little prayer그래서 난 기도 드려요
And hope my dreams will take me there그리고 나의 꿈이 나를 인도해 주길 바래요
Where the skies are blue파란 하늘 아래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도록요, 내 사랑
Overseas from coast to coast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요
To find a place I love the most내가 가장 사랑했던 곳을 찾기 위해서요
Where the fields are green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만나도록 말이에요, 내 사랑
To hold you in my arms당신을 제 품에 안기 위해서.
여기까지요. 이 가사를 보게 되면 좋았던 옛날 사랑이 그리워서 그 사랑이 바다 건너 끝까지 가고 싶단 이야기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 내가 뭘 하고 싶으냐.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나는 내가 하고 싶어의 노예가 되어있어요. 이게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는 거예요. 왜? 칸트는 내가 편집한 내 마음을 자기가 정당화하거든요. 그래야 내가 끝까지 나를 신뢰하고,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도덕성까지 내 안에 있으니까 그야말로 나는 나를 믿을만하고 나를 신뢰하고 싶은 거예요. 칸트 철학의 일부라 할 수 있죠. 그다음에 두 번째 노래 보겠습니다. 박건호 작사, 박인희 작곡.
모닥불 피워놓고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재를 남기고
말없이 말 없이 사라지는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어떻습니까? 여기 가사의 이야기는 마주앉지요. 인간은 항상 누굴 찾아요.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재가 되어서 끝날 때까지 인간은 계속 누굴 찾습니다. 안 그러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인간들의 이야기를 계속 찾아요. 교회 와서 내내 인간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비록 모닥불은 타다가 없어져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는 겁니다. 아까 같은 경우에는 누굴 이렇게 자기 사적으로 누굴 찾는 반면에 이 이야기는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목소리 힘이 없지요. 결국 인생은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니까 남는 것은 우리 수다 떠는 것만 남아있다. 그러니까 수다 열심히 떨자 그 이야기입니다. 이 노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세 번째 보겠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여기 보면 2절에 ‘끌리도다’ 왜 끌리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험한 십자가에 왜 끌려야 됩니까? 그냥 십자가 알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끌려요. 구심점이라고 했지요. 구심점. 구심점에 갈 때는 뭐를 버린다? 나보다 더 쎄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에 끌리는 거예요. 왜? 이유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나의 뭘 하느냐가 아니고 내 존재도 아니고 주님의 존재가 내 존재보다 구심점을 형성한다는 것, 그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