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1114b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1114b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자아는 상대와 결합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 자체가 남과의 통합에 최대 장애물이 돼요.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느냐? 회계하는 거, 계산하는 거, 장부 정리하는 거. 이것이 자아 속에 이미 들어있는 이유는 자아형성과정에서 나한테 손해되는 것은 멀리하고 이익 되는 것만 누적되어서 자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저 사람 만나서 나한테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를 늘 재죠.

그래서 통합이 안 된다니까요. 너는 나의 쫄따구가 될지언정… ‘쫄따구 될 용의 있거든 나와 같이 일해보자.’ 이런 식이지, ‘내가 네 속에 들어갈게.’ 이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했을 때는 사실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은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하여튼 3장 16절이 유명해. 요한복음도 그렇지만 요한일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본문만 등장하게 되면 그다음 우려 섞인 걱정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형제를 사랑하되 목숨 바치기까지 사랑 안하면 그럼 우리는 구원 못 받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 못 받죠. 왜? 원래부터 구원이 안 되니까. 사랑하나 안하나 원래부터 구원이 안돼요.

우리 문제가요.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문제는,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른다.’ 이게 문제에요. ‘어이!’라든지 이름을 부른다든지 ‘아빠!’라 부른다든지 타인에 대해서 호칭을 하는 거예요. 호칭을 하는 이유는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필연적으로 간주하고 호칭을 하기 때문이에요. ‘이름을 부르는 나는 여기 살아있다.’ 이걸 전제로 해서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이름을 왜 부릅니까? 그 타인이 내가 여기 확고히 있는 ‘내 살아있음에 알아서 합류하라’ 이런 뜻이거든요. 합류하라는 거예요. “여보, 나 지금 빨래 돌리느라 바쁜데 설거지 좀 해줘.”할 때, 방금 뭘 불렀죠? ‘여보’를 불렀죠. 여보. 이름 왜 불러요? 호칭을 왜 합니까? ‘여보’ 하든지 ‘오빠’ 하든지. 집에 오빠가 왜 그리 많은지… 그걸 왜 불러요?

당신이 당신 일 중지하고 내 일에 합류하라 이 말 아닙니까. 그래, 합류하면, 합류해서 뭐? 얻을 게 뭔데요? 그러면 살림살이 나아진다는 거예요. 빠른 시간 내에 빨래, 설거지 다 하니까. 살림살이 나아지면 누가 이득인데? 우리가 이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한다고 남편 변비 걸렸는데?

이게 이득이라는 말은… 이득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그 조건, 그 요소는 아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세계관이에요. 자기 세계관을 규모 있게 꾸리는 데에 있어서 늘 설계를 생각하는 거예요. 설계, 프로젝트를 생각한다고요.

무심코 보니까 남편이 TV보고 있다 이 말이죠. TV보는데 무슨 TV보느냐 하면 여자 연예인 나오는 프로보고 있는 거예요. 수요일에 한다는데. “여보, 설거지 해줄 수 있어?” “나 지금 TV봐야 돼.” 이렇게 되게 되면 살아있는 아내는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오죠. 짜증이 올라온다고요. 그럼 자기가 했던 계획에 차질이 일어났죠.

그래서 2.공격받지 아니하면 인간은 사랑을 못 느낀다. 공격받지 않으면 인간은 사랑을 못 느끼는 겁니다. 지독한 자기사랑에 준해서 외부의 타인들이 내 계획에 따라 움직여줄 때 ‘내 뜻대로 당신이 해주면 나는 맛있는 된장찌개를 해줄게.’라는 보상을 이렇게 내세우는데, 이 모든 잘못이 뭐냐 하면 내 존재(성) 안에 ‘나’라는 요소가 들어있음을 티내는 거예요.

육신은 그냥 있는 거예요. 있는데 그 안에 ‘나’라는 요소가 그 육신을 점유하고 있는 거예요. 돈도 안 내고. 점유하고 있으니까 이 요소가 말썽이 되어가지고 사랑이라는 건 순 거짓말이고 일방적으로 주변을 내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통치를 시도하려는 이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했던 그 버릇을 그대로 복제해서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을 자기 똘마니로 삼겠다는 그 심보에요. ‘하나님 저 사랑하죠? 사랑하면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이거 무슨 깡패도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아까 세 자로 된 단어 이야기했죠. 뭡니까? ‘무가치’. 이걸 몰라요. 악마에 속한 자체가 가치가 없어요. 가치가 있어서 구원해주는 게 아닙니다. 가치 없는 자를 구원해요. 가치 없는 자를. 가치 없는 자를 구원하니까 이걸 기쁜 소식, 복음이라 하는 거예요.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왜 그런 이야기합니까? 자기 자신을 뭐로 봐요? 무가치한 걸로 보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봐요? 무가치하게 본 거예요.

어떤 마을에 죄인으로 평가받는 여자가 향유를 팍 깨는 게 뭡니까? 내가 향수라는 걸 소유하는 자체가 남들 보기에 자아의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딴 짓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알고, 주님의 가치와 자기 가치를 비교해서 자기 가치를 주님 앞에 무가치한 존재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여자보고 뭐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 “죄 사함이 많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

사랑이란 단어를 이야기해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고 그게 끝이라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살아있음, 임재하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에요. 내가 이 땅에 있어서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어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아라는 요소를 누락시키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그걸 살찌우길 원했던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어떤 율법을 지켜야 율법을 다 지켰다 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누굴 위한 율법이에요? 본인 구원받기 위한 율법으로 전제를 깔고 하는 거예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뭘 지켜야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싸가지하고는, 정말. 영생은 못 얻어요. 못 얻게 되어있는 게 영생, 생명나무에요. 그런데 율법 줬으니까 율법 따라가게 되면 율법 지키게 되면 영생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 부자 청년은. 돈은 많은지 모르지만 청년이잖아요, 청년. 시건머리 없다 이 말이죠. 차라리 ‘솔로’나 나가라.

길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은 없어요. ‘나는 이렇다’. 모든 인간의 자아가 이런 구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다. 내가 내세울 것은, 내가 보여줄 것은 이렇다. 나 이런 식으로 산다.’ 여기 ‘나’라는 이 요소, 원소가 그대로 살아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해서는 마귀의 밥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작전을 하느냐? 일단 주님께서는 이방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했어요. 아, 의미심장하죠. 이방인의 고을로 가지 마라. 나는 이스라엘에게만 간다. 내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그러니까 선교, 전도 외치는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상당히 당황스러워 해요. 실제로 제가 총신 다닐 때 차영배 교수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선교특강을 했을 때 특강 다하고 질문하라 했어요. 내가 질문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없는데, 질문을 한 것 같기도 해요. 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 5-6절,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방금 이 말씀 나오는데 이 말씀은 지금 교수님 특강, 그때 한 50분 특강했나, 특강하고 내용이 안 맞네요.”라고 질문했어요. 제가 총신 때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교수가 답변을 못했어요. “빨리 끝냅시다.”

이방인들을 배제한 전도를 주께서는 지시했는데 왜 교수님은 이방인에게 전도가 된다고 이야기했는가? 그 교수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쪽수 채우는 것 그게 하늘나라 확장이라고 경솔하게 생각해서 그래요.

전도는 주님만 하십니다.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일을 복제해서 자기가 택한 존재에다가 하나님의 예수님 있음을 집어넣는 게 전도에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죄인 속에 있다가 빠져나왔기 때문에. 일반 악마의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존재는 결합이 안돼요. 연합이 안돼요. 부부는 한 몸이라 하지만 한 몸 될 수가 없어요. 헤어져도 이혼이고 같이 있어도 이혼이에요, 그거는. 그러니까 결혼을 하시라고요. 어차피 이혼인데 못할 거 뭐 있어요.

존재와 존재가 연합이 안되고 결합이 안돼요. 안되는데 유일하게 되는 경우가 뭐냐? 이 세상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경우에요. 악마의 일을 멸하신 분이 여전히 악마 속에 있는 인간에게 와서 예수님 자신의 존재와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조건은 뭐냐? 그 인간의 자아를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냥 있게 만들어요.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내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거든요. 고린도전서 6장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냐? 그 근거가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냥 외치는 게 아니고 근거가 있단 말이죠. 근거가 뭐냐 하면 6장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랬잖아요. 값 주고 사신 거예요, 값 주고.

그럼 그 전에 인간이 악마 속에 들어있어서 못 빠져나갔던 이유가 값을 치를 가치 있는 값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무가치를 가치로 바꿀 수 있는, 개입될 가치 있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악마한테 무작정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본문을 위해서 요한복음 14장을 봐야 돼요. 아까 우리가 본 것이 14장 28절이죠.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존재에서 부재, 부재에서 어떻게 된다 했어요? 존재에서 부재, 부재에서 존재가 안돼요. 임재가 돼요, 임재.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어디 가든지 같이 있는 거예요.

처음에 존재가 될 때는 인간들이 겪는 시공간의 한계를 같은 존재로 오신 예수님도 같이 겪었어요. 같이 시공간의 한계를 가졌던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끔 뭐 물 위를 걷고 했지만, 늘 ‘너희들은 여기서 걸어 온나. 난 구름타고 갈래.’ 뭐 이런 거 없었거든요.

항상 인간이 가진 존재의 시공간적 한계를 주님도 대부분은 같이 겪으면서 했고, 부재가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임재 할 때는 시공간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주어집니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주님, 그게 바로 성령이죠. 성령이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를 성사시킵니다. 그 상태를.

그런데 우리가 봐야 될 게 뭐냐 하면 14장 18절, 19절이에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 고아 될 거야’란 말이에요, 그게. 너희 고아 될 거야. 그럼 한번 이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고아입니까, 고아 아닙니까? 그걸 고아라 하지 않고 세대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데 뭐 고아라는 말을 하느냐? 그런데 어느 날 소식도 몰랐던 아버지가 수소문해서 찾아왔어요. 보통 소식 모르던 아버지가 찾아올 때는 전부다 아버지가 병들었거나 돈이 궁할 때 성공한 자식한테 와서 돈 뜯어먹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달리합시다. 그게 세상이지만 이건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니까요.

아버지가 큰 재벌 되어서 뒤늦게 찾아와서 굉장히 미안하다는 식으로, “네가 모르게 네 앞으로 내가 너한테 유산을 76억 남겨 놨다. 그것도 모자라지만. 뭐 더 필요하면 더 줄까?” 이런 식으로 왔단 말이죠. “그래서 네가 아들이라 하려면 내가 며칠 간 같이 살아야 된다. 며칠 살다가 내가 미국에서 사업하고 뛰기 때문에 바쁘니까 내가 또 미국 가야돼. 그렇지만 널 고아같이 남겨두지 않겠다.” 이게 뭔 뜻이에요?

나 혼자 살던 아파트에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서 네 앞으로 유산 76억 있다 해놓고는 다시 떠나면서 고아같이 너를 두지 않겠다는 말은, 그 전부터 비록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선택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는 마귀를 선택했으니까 빼버리고 나머지 열한 제자는 내가 선택했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했다는 그 약속에서, 그건 너의 요소가 가미된 선택이 아니고 임의로, 다시 말해서 내 육신 안에 나가 살았다는 이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산에 넣지 않고 임의로, 그냥 우연으로, 그냥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방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거예요.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이 이 말씀을 그 당시에 이해했겠어요, 이해 못했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봤으니까. 메시야로 보더라도 스승, 랍비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메시야로 봤단 말이죠. 랍비가 뭐냐? 위대한 스승. 내가 추종해야 될 분이죠. 따르면 된다.

자, 따를 때 베드로는 자기가 그냥 있습니까, 살아있는 겁니까? 살아있죠. 그 점을 한번 보잔 말이죠. 여러분들이 좀 복잡하더라도. 오늘 좀 복잡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새 계명이 왔습니다. 이 말씀 딱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한다고요? ‘그럼 사랑 안하면 우리 구원 못 받습니까?’ 생각이 딱 들죠. 든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있는 게 아니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요. 그다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입각해서 그다음 36절에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그 계명을 주시고 우리와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 새 계명을 주시면서 주님은 자꾸 제자들 곁을 떠나고자 한다 이 말이죠. 아니, 계명을 주시면 주시는 거지, 왜 굳이 필수적으로 계명 줬다는 것 때문에 반드시 떠나야 되는가. 그 이유가 베드로의 머리에서는 조화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 크게 벌여 재벌 되어가지고 내 몫으로 76억을 줬다면 “그럼 아버지 나하고 같이 사시죠.” “아니야, 떠나야 돼.” “왜? 왜 떠나야 되지?” “그런데 걱정하지 마.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아버지, 저 원래 고아에요. 아버지 없었어요.”

아버지도 없는데 뒤늦게 아버지라고 찾아와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고 하면, “아버지, 그러지 말고 새 계명 주셨으니 같이 삽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네, 서로 사랑할 테니까 떠나지 마세요.” 이럴 수도 있는데 사랑주고 “사랑 줬다. 이제 떠난다.” 이게 뭐냐?

그 새 계명은 누가 다시 와야 새 계명이 유효하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다시 와야 새 계명이 유효하다는 말이에요. 지금 기존 계명도 못 지키는 주제에 거기다 추가해서 새 계명 줘버리면, 있는 계명 다 지켜야 되고 거기다 또 새 계명 사랑까지 줘버리면 제자들이 감당 못합니다.

따라서 떠난다는 것, 너희와 헤어진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 당시에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계명도 좋지만 같이 있읍시다. 주님 가신다면 제가 따라 붙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이제 모든 퍼즐이 다 풀렸네요. 현재 네 존재는 나(예수님) 존재와 연합될 수 없다. 네 존재가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걸 이제 알았나, 이런 뜻이겠죠.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랍비여” 호칭했죠? 호칭 부르지 마. 호칭 부르지 마. “랍비여, 저는 랍비를 사랑합니다.” “그 소리 하지마라.”

그게 13장 38절이에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네가 관계없는 자로 네 입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너와 관계있는 사람이다. 네 마음에 드는 예수 상, 이미지를 유지하는 한 진짜 예수는 네 이미지하고 전혀 다른 존재다. 전혀 다른 존재에요.

그러니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 어제 수요 설교에 의하면 이게 얼마나 실용적입니까? 하나님의 실용성이에요.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이에요, 실제로. 닭까지 거론하시는 모양이에요. 닭 우는 것까지.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한 번, 두 번, 세 번. 꼬끼오~

얼마나 정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해요. 여기 매직 있잖아요. 몇 바퀴 돌릴까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에잇, 열 바퀴 돌아라. 이런 것 하나까지라도 주께선 이미 주님의 계획 안에 다 들어있는 거죠.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 말은 현재 내 아버지 집에 너희들이 거할 곳이 1도 없다.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은 지금 오해하기를 살아있는 내가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살아있는 나를 주님이 구원해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죽여서 구원하지, 살아있는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에서 살아있음을 빼버리고 그럼 존재만 있죠. 그 존재가 (예수님) 자신의 살아있음, 마귀로부터 벗어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있음과 결합이 될 때 우리는 아버지 집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 합류된 것이 요한복음 14장 20절,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멘.

이 계획이 제자들이 원했던 계획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이죠. 제자들은 이걸 원하지 않았어요.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상도 못했어요. 주님은 우리의 예상 요소를 빼버렸으니까. 우리가 뭘 예상한 줄 아시고 그걸 피해버렸으니까. 그래야 우리의 자아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통보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계획하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전혀 하늘나라에 가치 없는 것들이에요. 하늘나라에 가치 없는데 누구한테 가치 있어요? 마귀한테는 가치 있겠죠. 마귀한테는. 마귀한테는 가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자기의 가치를 북돋우고 그걸 증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남을 부르죠. 뭐라고? 여보. 또 뭐 일 시키려고. 여보.

내가 남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을 부르면서, 부른다는 말은 부린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필요한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 부르지만, 이건 절대로 임의적도 아니고 우연적도 아니고,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절대화시킨다면 그 절대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의 절대적 행동이죠.

그래서 인간은 고독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못 받아들입니다. 남이 없으면 나도 죽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절대적인 고독이죠. 예수님 기도할 때 세 명 데려갔잖아요. 제자 세 명하고 같이 갔잖아요. 합해서 네 명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합해서 네 명이 아니고 기도할 때 예수님 따로. 세 명은 주무시고.

세 명은 기도를 왜 못했습니까? 기도를 못한 이유가 기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기도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기도할 이유도 없고 가면 잠잔다는 것을 아시고 세 명을 데려간 이유가 지금 이 시대, 예수님 보시기에 밤이 된 시공간의 시대에서 인간들은 깨어있어야 될 밤인 줄 모르고 자고 있다는 것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시간에 세 명과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신 겁니다. 인간은 정신을 어떤 식으로 차려야 될지, 정신 못 차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떤 식으로 차려야 되는지 그 조차도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알 바를 몰라요.

예수님의 고독, 따로 떨어져 나오심과의 반대말이 인간의 외로움이죠. 외로움과 고독은 서로 반대말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인간의 외로움은 괴로움이고 이것은 정신병 같은 거예요.

사람이 쉬고 싶다 하잖아요. 혼자 쉬어보세요. 못 쉽니다. 누굴 불러다가 술을 먹든지. 오다 보니까 먹자 골목에서 맥주파티하고 있죠. 왜 자기 집에서 맥주 안 먹고 여기서 하느냐? 맥주가 그리운 게 아니고 외로움이 아파서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맥주라는 매개를 통해서 핑계를 대고 만나는 거예요.

젊은 애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 뭔가 축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축제가 뭔가? 할로윈 데이. 뭐 하나 덮어쓰고. 얼굴 덮어쓰니까 부끄러움이 사라졌죠. 자기 시선이 가려졌으니까. 그거 하다가 낑겨 죽었잖아요. 이태원에서. 까불다가.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났는데 결합이 됩니까, 결합이 안 됩니까? 결합이 전혀 안돼요. 따로 놀아요. 그런데 서로 아는 사이라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 친구 아이가~ 이러고 있다고요. 뭐 친구가 돈보다 귀하다고? 좋다고? 아이고, 그 노래 자체도 사기다, 정말. 나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요? 나보다 귀한 게.

그걸 아시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니라” 했죠. 자,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 왔고 그 사랑이 그다음에 형제사랑으로 이어지죠. 순서가 그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임재가 먼저 있어줘야 임재한다는 그러한 증상으로서 형제사랑이 주님에 의해서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13절에, 사랑이 뭐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되어 있어요. 더 큰 사랑이 없는, ‘그 더 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이게 새 계명이다 이 말이죠. 옛 계명도 감당 안 되는데요. 옛 계명도 감당 안 돼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 만나고 다시 자기 집으로 갔지만.

여기다 새 계명까지 주어졌는데 그 새 계명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으냐? 너는 그냥 있음이어야 돼. 살아있음은 안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형제는 살아있음으로 만나는 관계가 아니고 있음과 있음으로 만나는 관계에요. 뭘 빼야 돼요? 살아있음이 빠져야 되죠. 그 빠지는 방식이 뭐냐? 마태복음 8장에, 주님을 도입하는 거예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어떤 집사님이 오셔서 같은 집사님끼리 만났는데 “집사님은 왜 저를 사랑합니까?” “집사님은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걸로 보입니까? 나 당신 사랑 안 해요. 주께서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화를 왜 내지? 화 낼 문제가 아닌데. “주께서 형제라고 인정하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선 거지,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보고 돈 빌려달란 소리하지 마세요. 사랑 핑계대고 다 우려먹으려고 하는 불순한 생각은 아예 차단해버리세요. 나한테 돈 빌려달란 소리하지 마라고요! 예? 아시겠어요? 옛다 100만원.” “아니, 100만원 급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라하니 한 겁니다. 지금 제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죽은 인간인데 무슨 내 돈이 있습니까? 주의 돈이죠.” “이왕 주는 거 100만원 더 쓰지….” “이게 어디서 사랑을 빙자해서 등쳐먹으려고!”

새 계명의 실현성, 일상성 또는 실용성은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에 나오는 새 계명, 14장에 나오는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는 그것이 지금 성도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 안에 전부 다 압축되어서 발현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10절 다시 보겠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이 대목입니다. 지금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같은 형제들이 거처를 같이해요. 거처가 뭐냐 하면 거처가 성령이에요. 거처가 성령이거든요. 그럼 그 거처 안에 누가 들었어요? 아버지 들어있고 아들 들어있고 그다음에 형제 들어있죠. 그걸 한꺼번에 담는 거처가 뭡니까? 성령이에요. 아버지+아들+형제=> 성령.

적십자 심볼인가, 팔 벌려서 사람들 모아놓은 그런 심볼 봤죠? 적십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공익단체나 이런 데, 종이로 팔 벌린 손 만들어서 서로 이어져 둥그렇게 감는 거. 성령 안에는 성령만 계신 게 아니고 오히려 성령은 없고 성령은 보듬어주고, 성령은 주님의 부활의 영이거든요, 아버지, 아들,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가 성령 안에서 그대로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형제까지 그대로 이어지면 모두가 하나 된 거죠. 모두가 하나. 연합이 가능한 거예요.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죠? 지금 믿는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들 성령께 맡기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고, 이해는 하시겠죠? 성경구조를. 그럼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이렇게 될 경우에 특징이 뭐냐? “목사님, 이해합니다.” 아니 아니. 그게 성령 받은 게 아니고 마귀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는가가 비로소 눈에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마귀의 자녀.

12절 봅시다. 요한일서 3장 12절,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참, 이 말씀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아우를 죽이기 전에 악한 자입니까, 아우를 죽였기 때문에 악한 자입니까? 아우를 죽이기 전에 악한 자였어요. 그러니까 잠복된 악함이 있었는데 아우를 만나서 잠복된 것이 발현된 겁니다. 발현된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이래요. 성격 좋고 착하고 뭐 교회는 안 나가지만 사람 인간성 끝내준다. 이거 아직까지 계기를 안 만나서 그래요. 계기를 안 만나서. 십계명 있죠. 십계명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다 그 계명 하나하나에 위반자입니다. 부자청년은 뭐 지켰다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고요.

열 가지 계명을, 그 계명뿐 아니라 모든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오해해서 그래요. 원래 계명은 예수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나타난 건데, 예수님의 십자가, 다시 말해서 너는 이미 죽은 자이다, 죄인이다 하는 그 사실을 빠뜨리고 ‘나는 현재 가치 있게 살아있다’라는 것부터 전제해서 계명에 들어가니까 누가 가만 안 있어요? 계명이 가만있지 않아요.

그럼 다른 계명 지켰어? 이 계명 지켰으면 다른 계명 지켜야지. 하나 어겼어? 그럼 너 저주받을 거야. 계명은 주님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계명 앞에서 온전함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럼 왜 온전하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죄 지을 타이밍을 못 만나서 그래요. 그런 환경을 못 만나서 그래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맏딸이 결혼했는데 사위를 만났어요. 사위한테 김치를 해줬는데 그 사위가 외국 사위에요. 네덜란드 사윈가. “아이고, 김치 너무 맛있죠. 장모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눈치코치 없는 둘째 딸이 “그거 엄마가 한 거 아니고 홈쇼핑에서 산 건데?” 하니까 사위가 하는 말이 “좋은 물건을 고르는 것도 장모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사위가 말할 때 네덜란드어 통역해서 얘기가 오갔는데 김치 대접했던 그 장모님이 자기 딸보고 “주문도 네가 했다는 건 통역하지 마라.” 이랬대요.

인간의 육신은요. 주님께서 가져가게 되면 전에 죄 있는 육신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주님의 피 흘리심이 유일한 가치로서 거룩의 근거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만약에 죄가 안 나타나면 피가 유일한 근거가 못돼요. 피도 믿고 너도 착하고 이렇게 되면 근거 자체가 개판되어 버립니다. 마귀판 돼요.

‘피만이 거룩이 된다. 예수님의 피만 죄 사함이 된다.’를 위해서 우리는 들추어져야 되는 거예요. 들추어지기 위해서 주께서 그러한 상황을, 외국 사위를 만나는 그러한 상황을 주님께서 유발시킨 겁니다. 빨리 아들 커서 그런 외국 며느리를 본다든지 해야 그때서야 잠복된 내 죄가 나오죠. 한국말 서툰 외국여자가 “아이고, 시어머니. 음식 솜씨가 땡큐에요. 너무 좋아요.” 주문했다는 소리 안하고 “그래,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뭐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에 어긋나죠.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속속들이, 마치 더러운 스웨터를 오래 입다가 벗을 때 거꾸로 뒤집으면 두두둑 보풀이 다 피잖아요. 양모 털이. 안쪽으로 숨긴 죄들이 두둑두둑하면서 피어날 때, 바로 우리의 육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의 그 현장에서 발생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그 사랑이 있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있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까짓 거 얼마든지 나 같은 거 욕 얻어먹고 누락될 수 있지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뭐 있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여보, 설거지.”하면 “예~” 죄인인데 뭐. 오늘 있음이 이 일을 위함이다, 하면서. 설거지를 해놓으면 아내가 설거지한다고 좋아합니까? 어떻게 돼요? 그다음에 또 반전이 있죠. “설거지하는 꼬라지 하고는. 내가 이것 때문에 당신이 하면 두 번 해야 돼. 시킨 내가 바보지.” 그렇더라도 그런 잔소리하는 아내가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냥 있음이 되어야 될 이 원칙을,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께 갈 때까지 가면서도 끝까지 이 거처의 가치를 위해서 이 죄인에게 일어날 피의 깨끗함을 주께서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새 계명, 네가 사랑했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죠.

끝으로 마태복음 25장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걸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께 옷을 입혔습니까? 제가 뭘 했습니까?” “네가 한 게 아니고 있음이 했다. 있음을 내가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용했어. 너는 어떻게 하든 간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런 사람으로 성령께서 너를 말씀이 완성하게 내가 사용했다. 됐냐?”

그럼 후딱 면류관 벗어서, 이거는 제가 쓸 쨉이 못 됩니다. 주님 쓰셔야 됩니다. 이미 천국 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 겪어야 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냥 존재인데 우리는 마귀한테 현혹되어서 내가 나로서 살았다고 계속 우기고 있을 때 십자가 지신 십자가 능력이 우리를 후려치면서 주님께서 네 죄를 위해서 이미 사했다는 그 기쁜 소식으로 우리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가운데 십자가 피의 고마움이 더욱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347 자유게시판 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b-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4-11-18
8,346 자유게시판 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4-11-18
8,345 자유게시판 겨울수련회 교재 - 최고관리자 24-11-18
8,344 자유게시판 129강-예레미야 30장 18~24절(야곱의 장막)241117-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4-11-17
8,343 자유게시판 42강-히브리서 8장 5-6절(십자가의 그림자)241117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24-11-17
8,342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엘리야 승천 / 241117 - 최고관리자 24-11-17
8,341 자유게시판 4강-열왕기상 2장 1-4절(언약의 마네킹) 241113 - 이 근호 목사 열왕기상 최고관리자 24-11-16
열람 ➜ 자유게시판 서울강의202401114b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24-11-16
8,339 자유게시판 서울강의202401114a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24-11-16
8,338 자유게시판 수요설교(241113)요약 열왕기상 2장 1-4절(언약의 마네킹) 열왕기상 최고관리자 24-11-14
8,337 자유게시판 20241111b 부산강의 : [시편]72(56:8)-공백의 세계 시편 최고관리자 24-11-12
8,336 자유게시판 20241111a 부산강의 : [시편]72(56:8)-공백의 세계 시편 최고관리자 24-11-12
8,335 자유게시판 겨울수련회 안내 - 최고관리자 24-11-12
8,334 자유게시판 128강-예레미야 30장 12~17절(상처)241110-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4-11-10
8,333 자유게시판 41강-히브리서 8장 3-5절(모형)241110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24-11-10
8,332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베드로의 탈출 / 241110 - 최고관리자 24-11-10
8,331 자유게시판 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b-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4-11-10
8,330 자유게시판 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4-11-10
8,329 자유게시판 ◐ 11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 장소, 시간 변경 ◑ 시편 최고관리자 24-11-09
8,328 자유게시판 3강-열왕기상 1장 11-14절(성전을 위한 왕) 241106 - 이 근호 목사 열왕기상 최고관리자 24-11-07
8,327 자유게시판 487강-YouTube강의(생명의 종류 레위기 11:13)20241105-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24-11-06
8,326 자유게시판 486강-YouTube강의(줄 것과 받을 것 전도서 12:9)20241105-이 근호 목사 전도서 최고관리자 24-11-06
8,325 자유게시판 영적전쟁(에베소서) 독후감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24-11-06
8,324 자유게시판 20241101b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 최고관리자 24-11-04
8,323 자유게시판 20241101a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 최고관리자 24-11-0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