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1114a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401114a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8절부터 하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이 뭔지를 알아야 멸했다는 주님의 하신 일이 뭔지도 알겠죠. 마귀의 일이 먼저 전제되고 그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면, 마귀의 일과 예수님 사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요한일서 3장 8절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겠죠.
3장 8절, 죄 짓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이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작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라고 했으니까 그것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봅시다.
‘죄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 이렇게 되어 있죠.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죄 짓는 자라 했습니다. 죄 짓는 자(者), 이건 인간입니다. 마귀와 인간이 관련성 있다. ‘마귀는 자기 일을 나타낼 때 인간을 통해서 나타낸다.’ 그런 뜻이죠.
그러면 이제 찾아봐야 되죠. 마귀의 일을 하는 인간을 찾아보면 된다 이 말이죠. 마귀와 관련성 있고 마귀 일을 하는 그 자. 그 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10절에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오, 여기 이제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요. 떼로 나타났다 이 말이죠. 마귀 잡으러 가자 이 말이죠. 가는데 그 마귀의 자녀들이 뭐냐 하면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마귀 일을 하고 있는 마귀에 속한 자고 그들이 뭐냐? ‘죄 짓는 자’에요. 방금 했던 이 말은 사실 이 자체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대비가 있어야 돼요, 대비. 그러면 죄 안 짓는 자는 죄 안 짓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에요. 죄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고, 죄 안 짓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11절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극한 대비를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이 단박에 이런 의문점이 들 거예요. ‘형제사랑 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 그럼 갑자기 얼굴에 다크써클 싹 끼면서, 지금까지 복음 안 거 다 헛 거였어. 헛 거였어. 소용없었어. 오늘 본문을 보니까 난 때려죽여도 형제사랑을 못 하겠는데. 아, 난 끝났어. 끝났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부지런히 복음 따라왔는데 아, 여기서 끝이네요. 막 편지 보내야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 굉장한 위로가 되는 말씀이 뭐냐 하면 9절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뭐가 됐습니까? 내가 죄 짓고 싶으면 내가 죄 지을 수 있고 내가 죄 안 짓고 싶으면 죄 안 짓는다,를 하나님이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까 질문이 뭐냐? ‘목사님, 형제사랑 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라는 질문은,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형제사랑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았고, 만약에 형제를 사랑 안하면 내가 형제를 사랑 안한 것 때문에 나는 지옥 가는구나.’ 이러한 기우, 염려, 걱정 이런 것들이 막 발생될 수가 있죠.
연세가 많아도 계속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 행함에 따라서 지옥이냐 천국행이냐 결정된다는 이 의식, 생각. 그럼 이 생각이 어떻게 됩니까? 이 생각의 발생이 9절과 정면으로 안 맞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죠. 벌써 방향이 다르죠.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여기에 자신의 결정, 선택, 각오, 의지, 열심, 행위 이런 걸 막 투입시키는 거예요. 투입시켜서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투입했으면 얼추 하나님 가까이 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지가 혼자 그렇게 해놓고 또 혼자 생각하는 거예요. ‘뭐? 모자란다고요? 그러면 십일조를 덧붙이면 되겠습니까? 그게 안 된다고요? 그럼 십에 이조는요?’
자기가 자기의 법을 만들어요, 법률을. 내 행함을 살리는 쪽으로 법을 만들어요. 내가 해낼 수 있는 법을 자기가 만들어서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예요. 뭐 오징어 게임합니까? 상금 몇 백억 놓고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 겁니까?
자, 이렇게 게임하듯이 구원되는 게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되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아주 잡아놨어요. 뭔가 현혹을 시켜놨다고요, 마귀가. 그건 바로 마귀 들린 자한테 그 모습을 찾으면 되겠죠.
특별히 또 하나님께서 친절하시게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크레파스 통에 크레파스가 쭉 들어 있잖아요. 열두 가지 색 중에 시커먼 색깔이 하나 들어가 있는 거예요. 가룟 유다. 왜 알록달록한 색깔에 시커먼 색깔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를 마귀 들린 자로 심어놔서 그 마귀 들린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의 차이를 보게 하는 거예요. 차이를. 어떤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
가룟 유다가 마귀 들렸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가 ‘나 마귀 들렸다!’ 이런 소리했던가요? 전혀 그런 행동을 안 보였죠. 그럼 안에 마귀 들어있는 가룟 유다가 평소에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에서 주님과 다른 제자들에게 뭐를 발설했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존재에서 나온 생각을 발설한 거예요. ‘예수님, 제 생각에는요.’ 이런 거. 그건 뭐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가룟 유다는 마귀가 들렸지만 마귀의 특이한 특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에요.
“제 생각에는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갖다 허비할 게 아니고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호감도가 높아질 거고 예수님이 하는 하늘나라 전파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걸 이미 아시고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겼겠죠. 돈 쓰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단 말이죠. 다른 사람도 신경을 쓰는데 회계 당사자는 아니니까 가룟 유다보다는 신경을 덜 쓰고, 가룟 유다가 집중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게 나오는 겁니다. ‘살아있다’하고 ‘있다’하고 어떤 차이가 날까요? ‘살아있다’와 ‘있다’. ‘살아있다’는 ‘있다’에 대한 인간의 평가에요. 그게 ‘살아있다’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보기에 어떤 식으로 있는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여기에 있다,가 돼요.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평 또는 인간의 느낌, 자의식적 감각이 돼요. 그런데 ‘있다’는 누구한테 속하는가? ‘살아있다’를 빼고 그냥 ‘있다’는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있다’를 못 느껴요. ‘살아있다’를 느끼지, ‘있다’를 못 느낍니다.
살아있는 가룟 유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하니까 살아있는 것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을 죽어있다는 것으로 자기가 개입했죠. 그 말은 뭐냐? 평소에 ‘나는 안 죽었어.’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안 죽었다. ‘나 있기는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 채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관계없이 ‘거기 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에요. 네가 마귀에 속하든 네가 나에게 속하든 하나님의 관점은 ‘있다’에요.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것, 그 있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작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는 대상으로 그냥 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은 내가 있음을 내가 다루겠다는 것이 살아있는 거예요.
‘아이고, 형님. 살아있네!’ 이렇게 하잖아요.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이 큰 고기 낚으면 ‘오, 형님 살아있네!’ 이렇게 하잖아요. 그때 어느 인간이 ‘살아있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있음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런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걸 굳이 구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접근하는 이유는, 인간의 있음은 살아있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이미 ‘마귀에게 속한 있음’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미 간파하시고 그냥 있음으로 접근해가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때 주님은 앞에 이것까지 포함시킵니다. ‘악마가’ 살아있다. 악마가 너희에게 살아있다. 모든 인간은 벌써 출생 자체가 죄 짓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있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을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속한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뭐밖에 나올 게 없습니까? 죄 짓는 것밖에 나올 게 없는 겁니다.
따라서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오셔서 이 마귀의 일을 멸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의 마귀에 속함에서 자진해서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살아있음’, ‘악마가 살아있음’을 제거해버리고 그냥 ‘있다’만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끄집어낼 위인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형제를 사랑한다 했어요.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는데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난데없이 형제가 어디서 툭 튀어나왔겠습니까, 형제가? 이 형제는 예수님께 속한 자가 예수님의 형제고 가족입니다.
“누가 내 누이고 누가 내 모친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너희들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고 모친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이 말은 형제의 존재성, 또는 존재는 이미 소속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예수님께 소속되어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지는가? 사랑에서 뭐가 빠지는가? ‘내가 살아있다’가 여기서 빠지고, 존재(성)와 존재의 만남이 바로 사랑이 되는 거예요.
너 한 달 수입 얼마야? 너 공부 잘해? 이런 조건을 따지는 게 아니고, 거기 있네. 거기 있음. “어? 거기 있네.” “아, 당신도 거기 있네. 그럼 당신 보기에 나는 어때?” “너도 거기 있네.” 이렇게 될 때, 둘 다 뭐가 빠졌어요? 내가 빠졌죠. 내가 빠질 때 그 관계를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빠질 때. 있음 자체를 인정해주는 게 사랑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있네. 어? 주님이 거기 계시네. 임재죠. 주님이 거기 계시네. 그럼 그 주님과 나 사이 관계가 뭡니까? 사랑이 되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서로 공유되는 관계. 공유된 공간을 마련할 때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요모조모 따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따진다는 것은 내가 남을 사랑할 때 따지는 거예요, 내가. 내가 누락이 안 될 때, 내가 제거가 안 된 상태에서는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그 사람을 상대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평가하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 사랑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은 누구 사랑이에요? 살아있는 나에게서 나온 사랑이 그 사람한테 가겠죠. 그게 바로 마귀에 속한 죄 짓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지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거기에 합류를 했죠. 주님께서 합류했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려야 되는데, 모든 인간이 옹기종기 전부다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마귀에게 속했는데 여기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뛰어들었죠. 뛰어들었으니까 색깔을 약간 달리해서 칠해보겠습니다.
뛰어드시고 그다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뛰어드시고 그다음 빠져버렸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빠져버렸죠. 그럼 여기 뭐가 생겼어요? 예수님(이 뛰어들었던) 자리에 빈 공간이 생겼죠. 빈 공간. 마귀 세계에서 갑자기 마귀의 권세를 유일하게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 빈 공간이 생긴단 말이죠.
그동안 인간들이 마귀에 속해서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식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나는 뭘 해야 구원받느냐 이런 식으로 살아있다. 그러면 이 빈 공간은 뭐가 됩니까? 마귀에 속하지 않는 분이 들어왔다 남긴 이 자리는 ‘살아있다’가 아니라 그냥 ‘있다’가 돼요. 그냥 있다.
내가 ‘살아있다’에서 ‘있다’로 갈 때, 이게 갈 수가 없어요. 살아있다⇏있다. 왜냐하면 마귀가 철벽수비를 하기 때문에. 마귀는 김민재에요. 철벽수비를 하기 때문에 ‘있다’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마귀의 권세를 이긴 자만이 ‘살아있다’에서 그냥 ‘있다’가 되는 거예요. 자꾸 ‘살아있다’가 되면 내가 나를 평하게 돼요. 내가 나를. 나는 살아있는데 어떻게 살아있을까?
주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무가치’한 겁니다. 무가치하거든요. 지금 성경말씀은 사랑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두 개를 연결시켜봅시다. ‘어떻게 무가치한 것 속에서 사랑이 나오는가?’ 이거 뭐 해결책 있어요? 가치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들끼리 만나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사랑이 나온다고요? 무슨 사랑이 나옵니까? 사랑은 얼마나 고귀한데 가치도 없는 것끼리 무슨 사랑이 나와요.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 대신에 인간이 도입한 것은 뭐냐 하면 육적인 사랑이에요. 육적인 사랑이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얘기하는 것은 무슨 사랑입니까? 성령에 의한 영적인 사랑이 나오죠. 육적인 사랑에서 영적인 사랑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니까요, 이게. 육적인 사랑⇏영적인 사랑.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 율법사가 예수님한테 “성경을 압축하면 그거 맞습니까?” “그래, 맞다. 너 그렇게 살면 되잖아.” 그 율법사가 하는 말이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 뭐 어떻다고?” “이웃이 누굽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이웃도 모르면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뭔가 해보려고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웃이 누굽니까? 이웃은 누구냐 하면 자기가 누락된 사람이에요. 자기가. ‘저기 강도만난 사람 있네?’ 그다음 ‘나 있네?’ 나 살아있음이 빠지고 있음과 있음이 연결될 때 그게 사랑이라 이 말이죠.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만난 사람 도와줄 때, ‘무엇을 노리고 도와줬습니까? 왜 도와줬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그 사마리아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질문하는 사람 자체가 자기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어떤 사랑을 베풀고 어떻게 행하면 나의 가치가 지금보다 더 강화되고 내 사랑이 커지겠는가? 더 풍성해지겠는가?’ 이 생각하겠죠. 그럼 강도만난 사마리아 사람은 그거 노리고 했습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겠지.’ 이거 노리고 했습니까? 그런 거 없죠.
강도만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만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있음이에요. 강도만난 사람이 있음 같이 강도를 만나든 안 만나든 그냥 있고 자기 자신도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있어요. 그냥 있다고요.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아버지에 의해서 여기 인간세계에 그냥 와계신 거예요.
너희들도 있는데 너희들이 예수님께 올 수가 없어요. 왜? 마귀에게 속해서 살아있다고 우기거든요. 살아있다는 말은, 있음 앞에 살았다는 말을 붙였다는 건 뭐냐?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가치 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가 벌써 단정 짓고 있는 거거든요.
“형님, 살아있네~” 이거 뭡니까? 욕입니까? 격려하는 거잖아요. 대단하십니다! 이런 거란 말이죠. “형님, 있네요.” “이거 뭐… 방금 그거 무슨 뜻이야? 나 있잖아, 그래. 뭐 가치 있게 있다는 말이야, 가치 없게 있다는 말이야? 그거 분명히 해보라.” “형님, 가치를 논할 입장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는 마귀에 속했든지 하나님께 속했든지 둘 중 하나지, 그 자체로서 내놓을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기는 있는데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때 비로소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겠죠.
주님께서 인간세계에 왔어요. 마귀에 다 속한 인간입니다. 열두 제자 다 마찬가지고요. 마귀로부터 빠지지를 못해요. 벗어나질 못합니다. 주님께서 벗어나서 남긴 곳이 이 빈 자리죠. 이 빈 자리에 만약 누가 들어오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비로소 이 능력의 자리, 예수님이 빠져나갔던 그 자리에 누가 들어온다면 이 사람도? 그다음 차례는~? 이 사람이겠죠. 예수님 먼저 빠지고, 그다음 차례는 여기 들어가면 또 빠지고, 다른 사람 빠지면 또 다른 사람 들어가서 빠지고. 그래서 열한 제자가 그런 식으로 다 구원받는 거죠. 가룟 유다는? 이 안(빈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한번 봅시다. 13장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그다음 뭡니까? “다는 아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두고 깨끗하다 해서 마치 전부가 깨끗한 것처럼 이야기하시는데 뒤에 단서를 붙이죠. 다는 아니거든.
다는 아니라는 이 말을 잘 들어보세요. 잘 들어보셔야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발 씻어주러 먼저 왔잖아요. 그럼 예수님께서 발 씻기시는 행위가 없었더라면 열두 제자 몽땅 다 그냥 더럽죠. 무가치한 거예요. 그냥 더러운 거예요. 깨끗함이란 열두 제자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사항 없습니다. 다 깨끗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으로써 주께서 앞으로 하실 일이 택한 자 너희들 몽땅 다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깨끗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는 아니라는 말은 여기서 갑자기 염색이 잘못 돼서 얼룩 덜룩이 생긴 거죠. 옷에 염색을 해야 되는데 “염색이 잘 됐나?” “잘 됐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이거 무슨 말입니까? 죄 씻음이라는 염색약이 안 묻은 게 남아있음으로써 확연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 차이를.
그 차이는 가룟 유다가 앞으로 행할 일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아주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탄이 가룟 유다를 다루게 할 때, 주님께서 “네 할 일 해야지.” 가룟 유다보고, 마귀죠, 네 할 일 해야지. 그 차이를 극단으로 가게 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의 가치가 확 드러나요. 가치가.
이 세상은 주님 보기에 가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유독 예수님이 오시고 빠짐으로써 비로소 없던 가치가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없던 가치가 새롭게 발생되는 것을 요한복음 12장 23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온다. 아, 이거 신비롭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이르느냐? 요한복음 12장 20절부터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빌립은 준제자, 준사도입니다. 빌립은 나중에 집사 된 사람이죠. 일곱 집사.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누굽니까? 예수님의 제자에 속하죠.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헬라인이 이방인이거든요. 갑자기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자고 연락 왔을 때 예수님의 반응이 뭐냐? 드디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는 거예요.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유대사회에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질 못합니다. 왜? 더럽기 때문에. 그럼 유대사회에서 깨끗한 자는 누굽니까? 육신에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양보 못 하는 두 가지의 원칙이 있어요.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육신의 할례를 행해야 돼요.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 백성 아니라 하는 것은 에스겔, 또 그 앞에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사야, 에스겔. 특히 에스겔에 많이 나오고요.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리고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시간관으로서 유대인들만 이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돌아오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건 뭐냐? 모든 시간의 완성은 바로 유대인,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할례를 받았던 우리들에게 집중해서 시간이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시간의 시작과 끝이 우리, 할례 받은 이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만 구원받는데요, 아브라함 자손이냐 아니냐는 뭐로 구분되는가? 창세기 17장에도 나오죠. 하나님의 할례가 없으면 계약 자체가 성립이 안 된 걸로 간주해요. 계약 자체가. 여러분 차표를 예매할 때 실컷 해놓고 나중에 구매 버튼 안 누르면 어떻게 돼요? 예약 안 된 거죠. 최종적인 것인 할례를 행하고 모든 이 세상 일어나는 일은 내 몸에 할례행한 이것과 관련되어서 일어나고 있다. 왜? 요지부동 하나님의 계약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창세기 한번 봅시다. 17장 9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 조항이 변경됩니까? 아니,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 이게 변경된다고 이게 무효 된다고 그들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안 했겠죠.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한 거니까요. 지상의 인간에게 천상이 찾아와서 맺은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거예요.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고 제시한 언약이 뭐냐? 할례죠.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이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자기 아들 할례 안 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다지고 다지면서 내 할례 언약 안 잊어버렸지? 그치?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져야 될 건 뭐냐? 간단하죠. 자기 몸에, 우리 가장의 몸에 뭐만 유지하면 돼요? 할례 행하고 아들 낳으면 하나님 뜻에 따라서 할례 행하면 구원 끝. 구원 끝난 거예요.
유월절에 하나님이 당부한 것은 어린 양의 피도 있지만 조건이 있었어요. 할례를 행하고 어린 양의 피를 발라라. 할례 행하고. 심지어 할례 행하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자는 언약의 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할례 행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건 소용없는 거죠.
유월절 양의 피, 인간 외부의 사건이죠, 외부의 사건이 인간 속에 새겨진 할례, 내부의 사건과 연관 지어서 양쪽 다 두 개 있어줘야 언약이 완성되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성사시킨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양보하고 싶어도 뭐 인간 마음대로 양보 못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유대인들은 꿈쩍도 안 한 이유가 뭡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라 해서 안식일 지키잖아요. 안식일 기억하고. 아니, 기억하죠. 오늘은 무슨 요일? 금요일. 내일은 무슨 날? 안식일. 옳지. 그거 지키고, 또 하나는 뭡니까? 할례를 행하고.
그럼 골로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설명할 때 뭐를 건드렸습니까? 절기, 안식일 건드렸고요. 그거 다 끝났다는 거. 그다음에 또 뭘 건드렸어요? 몸에 할례 하는 거. 로마서 2장 29절.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몸에 행하는 할례 그걸로 되나? 몸의 할례를 고수하는 것은 애써 십자가를 믿기 싫어서 그 짓하고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것하고 바꿔라 이 말입니다. 할례 행하는 것하고. 이게 바꿔집니까? 뭘 믿고 바꿔요? 그걸 어떻게 바꿔요? 너희들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은 할례를 통해서 충분히 거룩하다는 것이 보장되었다는 이 사실을 본인들은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하든지 안식일을 지키든지, 행함이잖아요, 행함은 내가 ‘있음’에서 오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살아있음’에서 오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러니까 너는 마음의 할례를 못 한다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는 칼날로 인하여 내 자아 자체가 그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 자체가.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은 살아있음이 누락된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 그래서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를 행동으로 옮기면 이런 고백이 됩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에요. 그러면 백부장 그 사람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살아있으면 자아가 살아있으면, 자아가 가만있지 않고 자기 쪽에서 주님께로 나아가려고 노력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떤 지시를 따라도 그건 주님의 지시가 아니고 내가 나한테 지시를 내린 게 돼요. “사랑하라.” “뭐 사랑하지.” 그게 사랑이 됩니까? 사랑이 안 되는데요.
아까 우리가 한 게 요한복음 13장이었죠. 다는 아니라 했죠. 그러면 이제 가룟 유다는 빠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빠지고 나머지 열한 제자가 있죠. 그 열한 제자,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14장 2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존재하시다가 부재하시다가 그다음에 임재가 되는 거예요. 재(在)가 세 개 있는데 앞의 글자가 다르죠.
주께서 존재하시다가. 어떻게? 제자들의 있음과 예수님 있음이 같이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만 있음에서 없음이 돼요. 영광을 받기 위해서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없는데 다시 오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럼 뭡니까? 임재가 돼요, 임재.
옛날 존재하는 방식으로 계신 게 아니고요. 나 있음, 있음이 아니라 나의 있음을 본격적으로 예속시키고 다루시는 분으로 우리가 어디 가든지, 미국 가든지 필리핀 가든지 어디 가든지 간에 같이 있는 임재로 오시는 거예요. 임재로. 부재를 거쳐서 임재가 된다니까요. 존재→부재→임재.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있다’가 되면 이 자체가 마귀의 임재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있다는 식으로 미국을 가나 러시아를 가나 우크라이나를 가나 거기는 항상 마귀와 더불어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육적인 사랑이에요. 자기 자신의 자아가 누락되지 않는 사랑이에요. 자기가 빠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간세계에 살아있음에서 빠졌어요. 빠질 때 그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 유대인들 보기에 자기는 안식일 지키고 할례 지키잖아요. 그럼 안식일 없고 할례 없는 사람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백 프로 어디 갑니까? 지옥 가죠. 저주 받죠. 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으니까. 모든 율법의 완성은 할례와 안식일이거든요. 할례 받은 자가 지키는 안식일, 이러면 하나가 되죠. 할례 받은 입장에서 지키는 안식일, 이게 율법의 완성이라면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죠. 율법이 없다는 말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없어요. 언약 밖이고 축복의 밖에 있어요.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헬라 사람이 예수님 뵙고자 왔을 때 바로 이 자리, 유대인들은 안 가는데 갈 수 없는 저주받은 이방인들이 이 자리를 채울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임재하는 기능이 발휘되는 그 영광으로 주님이 드디어 영광 받을 때이고 그게 하나님 뜻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나갔죠. 나갔는데 낮이었어요, 밤이었어요? 밤이죠(“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나가고 난 뒤에 아까 이방인 경우와 똑같은 경우죠.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가룟 유다가 할 일이 예수님 존재를 이 세상에서 팔아먹어 죽여 없애는 그 기능이죠. 마귀가 그 기능을 해요. “아저씨, 좀 나가주세요. 여긴 아저씨 낄 자리가 아니에요.”하고 죽여 버렸는데, 예수님이 일단 들어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깥으로 나가든 말든 예수님의 자리가 마련된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 마귀에 속한 인간들 끼리끼리의 그 영역에 예수님 본인이 다녀가셨다는 그 자리가 발생된다고요. 그 자리가 사랑의 자리에요. 그게 살아있음이 아니고 있음의 자리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의 그냥 있음을 보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우리의 아무것도 보지 않아요. 강도를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찾아오시면 그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자, 마지막에 이거 질문하고 첫째 시간 끝내봅시다. 우리 모임에서는 뻔한 질문이지만 오랜만에 오신 집사님이 한번 답변해볼까요? 둘 중 어느 게 맞는가? 1.남을 공격해야 내가 산다. 2.남에게 공격받아야 내가 산다. 어느 게 맞습니까? 답변하기 민망하십니까? 어느 쪽이에요?
2번이 맞죠. 남한테 공격받아야 돼요. 왜? 예수님이 영광 받은 방법은 공격을 받은 방법이에요, 공격을. 그런데 1번은 뭐냐? 마귀가 형성한 이 공간에서는 남이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살 길이 없어요. 내가 패 죽여 버려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돈을 번다는 것은 사기 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갖은 엄살을 다 떨어야 약간의 수입이라도 추가됩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하는 것은 예상한 돈만 나오지만 여기서 아주 동정어린 모션을 취해야 돼요. ‘아휴, 요새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갖은 엄살을 다 떨어야 푼돈이라도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엄살을 교인들이 누구한테 합니까? 주님한테 해대죠. 그럼 주님의 답변은 뭡니까? “그냥 죽어, 인간아. 엄살떨지 말고. 나도 죽었어. 네가 뭔데? 네가 통뼈도 아니고. 내가 죽었는데 너 무슨 통뼈야? 너는 왜 안 죽어야 돼? 나 공격받아 죽었어. 너도 공격받아 죽어.” 10분 쉽시다. 더 민망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