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a-이근호 목사
강남-사도행전 1장 3절 (소진되는 존재) 241022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1장 오늘부터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게 유효하기 때문에 과연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는가? 없지요. 왜냐하면은 예수님은 홀로 승천하기 때문에 아무도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데오빌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붙인 호칭이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데오, 하나님 빌로 친구 또는 빌로 하니까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친구'.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에서는 '각하'라고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장 3절에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복음 누가 썼느냐 하면은 누가가 썼어요. 누가복음 누가 썼게요? 누가. 누가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의 비서입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는 의사로 되어 있고 안디옥, 지금은 시리아 쪽이죠. 시리아 터키 그쪽에 있는 사도 바울의 비서죠. 사도 바울의 비서라는 존재는 있느냐? 사도 바울의 비서는 있어요. 직책이기 때문에. 누가라는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직책을 받은 사도 바울의 비서라는 영적인 직책을 받아버리면 복음을 쓴 누가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가 나에게서 나에게로 가는데 여기 말씀의 힘이 주입되죠.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면 나에게서 나예요. 나에게서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왜 그리 먼지. 아담에 속한 나에게서 예수님 안에 있는 나에게로 돌아오려면 말씀의 힘 또는 말씀 완성의 힘이 여기 개입이 되어야 돼요. 말씀이 없으면 이 나는 끝까지 나로 갑니다. 하나의 나로 가요. 또 다른 예수님 안에 있는 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약 시편 69편을 잠시 보겠습니다. 69편 28절요. 나에게서 나에게. 그 앞에 나는 나만 있고 나는 나밖에 없어요. 또 다른 나는 없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너 이건 모르지? 너는 너밖에 모르지? 이거 있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세계를 펼쳐주니까 나에게 있는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었던 거예요. 시편 69편 28절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생명책이 여기 등장해요. 생명책이 나오고 생명책을 보게 되면 여기 탈락자가 생기는데 시편 69편 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편 69편 25절의 말씀은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바로 피 밭, 가룟 유다의 '나'가 죽었던 그 장소가 피 밭이고 시편의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는 거예요.
여기서 제자가 12명중에 11명 밖에 없잖아요. 11명 밖에 없는데 제자 채우기 위해서 뽑으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가룟 유다다. 가룟 유다가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너희들, 너에게서 너에게로 가룟 유다의 자리를 공유했던 너가 생명책이라는 다름으로 빠져나와요. 구원이 뭐냐 하면은 나에게서 나에게로가 구원이잖아요. 나에게서 또 다른 나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갈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떤 자는 제거되고 배제되고 어떤 자는 생명책에 생각지도 못한 예상치도 못한 예수 안에 있는 나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예요.
데오빌로라는 것은 없지요. 없는데 "데오빌로 각하여" 어떤 직책? 어떤 관직? 어떤 고유적인 인물? 그 인물 이름이 하필이면 데오빌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전에 있는 데오빌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데오빌로로 달라져야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전달 대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초장부터 어렵지만 성도는 대상 없는 자화상이다. 성도는 대상, 상대한다 또는 싸운다 뭐 다 같은 말이 될 수 있어요. 대상이 없는 것과의 싸움. 내가 나 아닌 것과의 싸움. 벌써부터 '나'가 아닌 나와 싸움. 이미 나에서 떠나버린 그 새로운 '나'가 옛날 나와 싸우는 그 싸움. 옛날 나는 없는데 자꾸 이게 내 몸에서 올라오고 있어요. 이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나인데 그 나와 싸우는 대상이 되는 것.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싸우는가? 옛날 나에서 지금의 나로 바뀌면서 무엇이 거기 들어왔지? 말씀이 들어왔어요. 그럼 말씀 가지고 싸워야지요. 말씀에 보니까 옛날 나는 내가 아니고 새로운 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 보니까. 왜? 말씀의 능력이니까요. 그러니까 나에다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는 게 덮쳐진 그들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듣는 여러분들은 지금 말씀없던 그 시절에 대해서 내가 준 말씀하고 싸우세요 그 이야기에요. 이렇게 이야기 되어야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이제 말씀 안 봐도 된다 이런게 용납이 안되잖아요. 전에는 내가 있고 구원받기 위해서 뭘하면 되지? 이렇게 됐는데 이제는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예상한 구원에 내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뭐냐 하면은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바로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는 실패자잖아요. 그건 실패하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우리를 장악해서 말씀 보니까 그 안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내가 예상한 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새로운 '나'가 말씀 오면서 같이 동반해서 같이 주어진 거예요. 그럼 나는 아낌없이 나는 나를 포기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소진하는 존재. 전문 용어로 다 떨어먹는 존재. 탈탈 다 떨어먹지요. 나이 목숨 그거 다 소비하고 갑니다. 다 떨어먹고 갑니다. 많이 남은 사람은 고생을 좀 많이 해야되요. 그런데 연세가 머리 희어지고 염색해도 안되고 화장빨도 다 떨어져나가는 이런 사람은 콩그레이츄레이션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하지 말고 죽는 날을 축하해야 돼요. 죽는 날을. 아이고 이 지긋지긋한 날을 털털 털어도 없어요 이제. 나이고 건강이고 다 떨어졌어요. 에너지 다 떨어졌어요. 병원에서 주사 맞아도 감기 낫지도 않아요. 약빨도 안 받아요. 이제 남은 것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말씀 밖에 없어요. 남한테 자랑할 것도 없지만 남한테 말씀 이야기 외에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왕년에, 왕년이고 뭐고 소진됐는데 뭐. 더 없잖아요.
그래서 현재는 뭐냐? 현재는 시간의 첨단. 시간의 바늘. 현재에서 인간은 찢어져야 되지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야 됩니다. 인간이 시간을 갖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인간을 찢어버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짼다 같은 뜻이에요. 현재는 가지는 게 아니고 현재에서 내 존재가 찢어지는 순간이 현재입니다. 순간순간 현재는 기억은 있지만 그 기억 어디 써먹을라고? 아무 써먹을 데 없어요. 시간에 휘둘리고 시간에 의해서 나 다움이 용납이 안 되고 맨날 변해요. 맨날 달라져요. 달라지지 않기 위해서 억기로 자아를 붙잡는 것이 뭐냐? 맨날 술이야. 맨날 술 먹으면서 나 이런데 나 이런데. 자기 기억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술을 먹거든요. 그런 사람들 술 안먹으면 정신 혼미해지지요. 술 먹고 잃어버린 나를 다시 한번 정리정돈 할려고 술을 먹는 거예요. 나 이 정도야 이런 거요. 술 한 잔도 먹어본 적 없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지요. 시간이 와서 현재를 찢어버리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현재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은 말씀이 있죠.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데오빌로여 할 때 어제도 데오빌로여 나보고 데오빌로래. 오늘도 데오빌로여. 내일되면 또 데오빌로여. 날마다 구축되는 이 자아를 날마다 찢어내기 위해서는 데오빌로로부터 시작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지요.
누가복음 1장 2절에 보게 되면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누가복음 1장 3절이 적용되고 비 오는 오늘도 누가복음 1장 3절이 적용되고 내일되면 또 예수님의 말씀의 근원이 내일되면 내일 또 작용해서 내일의 자아를 또 둘로 찢어버리죠. 이미 없어진 나와 지금 분명히 말씀 안에 있는 나, 그 나로 둘로 쪼가리내는 거예요.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인데 그 가짜 진짜의 틈에서 말씀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주님의 살아계심이 나오는 거예요.
그 틈에서. 가룟 유다는 주님을 버렸습니다. 말씀이 안 들어오게 되면 말씀 제껴버리고 내 기억이 있으면 그거 옛날에 알고 있는데 가룟 유다는 사단이 되어서 지옥 갔다는 거 아는데 그걸 왜 굳이 내가 오늘날 왜 알아야 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팔아먹었느냐? 팔아먹은 그 동기는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동기하고 똑같아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동기.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아라" 무슨 천국가는 길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쉽고 어떻게 보게 되면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아라. 아까 제가 말한 겁니다.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합니까? 둘로 쪼개고 찢어버리죠. 과거는 기억용이 아니고 간증용이 아니라 현재를 없어진 나와 현재 분명히 말씀안에 있는 나를 두조각 내는데 용도로만 과거가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과거를 뒤돌아 보지 말란 말이에요. 과거를. 성도는 뭐하고 싸운다? 누구하고 싸워요? 성도는 날마다 대상없는것과 싸웁니다. 대상이 없는데 이미 그 나는 내가 아닌데 육신을 갖고 있는 성도는 맨날 이미 없어진 대상과 싸우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소진하는 나와 싸우고 있어요. 새로운 '나'가 소진하는 '나'와 싸운다. 우리가 뭘 소진한다고 했습니까? 내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목숨, 내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모든 것 명예 건강 그 모든 것은 뭐하는 중입니까? 소비되고 소진되고 있습니다. 소비라는 것은 사용해야 된다 라는 뜻이지만 소진된다는 말은 가만 있어도 저절로 시간 따라서 내 허락도 없이 그냥 없어지는 것. 가만 있는데 없어지는 것. 여러분의 지갑이 만약에 만원 짜리가 두둑히 있었는데 오만원 짜리도 몇 장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만원 짜리 하나 없어졌어요. 그 다음날 보니까 오만원 짜리 없어졌어요. 그게 무슨 현상입니까? 소진 현상. 우리는 난리도 아니에요. 누가 가져갔느냐고. 누가 가져간 거예요? 시간이 가져간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간직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은 우리 허락도 없이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갑니다. 소진시켜요. 왜? 왜 소진시키느냐? 말씀이 그러니까요 말씀이. 말씀에 의하면 시간은 직선으로 달리다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이게 추락합니다 시간이. 시간의 추락 또는 시간의 몰락. 시간이 뚝 떨어져요. 그래서 종말은 가속화 됩니다. 갈수록 종말이 더 종말 속도가 더 빨라져요. 왜? 추락하니까. 물리적으로 봐서는 중력 가속도가 작용한다고 하는데 물리학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갈수록 종말이 가속화 되어있어요. 다급하다 얼마 안 있으면 온다 그렇게 점점 더 그걸 강조하고 있어요. 시간이 뚝 떨어져요. 축구에서 무슨 킥 합니까? 회전 먹은 슛 하듯이 골키퍼 앞에서 뚝 떨어지는 거예요. 또는 야구선수 투수가 공 던질 때 슬라이더 뚝 떨어져가지고 헛스윙 유도하는 것 이처럼 시간이 뚝 떨어진다고요. 왜 뚝 떨어지느냐 하면은 이쪽 시간은 누구의 접촉을 받느냐 하면은 인간의 의식에 따라서 시간이 오다가 예수님 오신 후부터는 누구 의식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의식을 표현해주는 시간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해버리면 시간은 어떻떻습니까? 시간은 이제는 자기의 목을 숙일 순간이 온 거예요. 이제는 시간은 시간 없다. 시간 흐름이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겁니다. 그럼 무의미하다면 그러면 이 세상은 시간이 뚝 떨어졌다면 이 쪽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은 시간과 관계 없이 떨어짐과 관계 없이 이 세계가 바로 성령의 세계입니다. 이 성령의 세계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몇 일 못 있어서 주겠다. 시간에 살던 인간이 어디로 이동합니까? 성령으로 이동하는 순간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순간, 성령을 받는 순간 시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럼 시간에 옛 자아가 있다면 성령 안에는 무슨 자아가 있습니까? 새로운 자아, 너희라는 것이 있어요. 너희. 주기도문 같으면 뭡니까? 우리가 있어요. 우리, 너희. 우리 너희는 누가 정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는 뚝 떨어질 때 옛 자아와 더불어 옛 자아가 눈에 띄고 있는 나름대로의 우리가 있고 저희가 있고 너가 있고 '나'가 있잖아요. 이거는 다 무효가 돼요. 이거는 시간이 뚝 떨어지면서 무효가 된다고요. 이건 어디서 형성되는가? 시간의 흐름, 과거, 현재, 미래에서 과거의 기억에서 기억이 묶어져서 자아라는게 자아가 있으니까 너가 있고 내가 있고 나끼리 모여있으면 우리가 되고 그런 거죠. 이런 것들이 시간이 뚝 떨어지면서 드디어 고개를 숙이고 자기 시간의 의미가 없어지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마라고 했으니까 시간 자체가 뒤돌아 볼 시간이 없어요. 여기서는 미래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니까요. 미래의 근거는 뭐냐 하면은 과거가 있을 때 미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의 첨단, 시간이 있으면 뾰족한 것, 뾰족한 현재라는 시간이 나로 하여금 여기서 두 조각 만들어버리죠. 시간 안에 계속 질질 끌려갈래 아니면 시간으로부터 벗어날래? 이것을 말씀이 와서 시간을 통해서 성령안에 새로운 자아를 확인시키는 겁니다. 그게 누구라고요? 데오빌로. 데오빌로라는 것은 말씀에 대해서 감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근원부터 했던 모든 일이 응 그랬구나 그랬구나 비로소 알아먹는 사람, 그 사람은 시간 안에 있는 사람은 못 알아듣지요. 시간밖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막을 안단 말이죠. 그러면 전에 있는 우리 자아는 알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에 있는 우리도 같이 병행해서 알아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사도행전 1장 3절에 "해 받으신 후에 또 저희에게" 나오죠. 예수님께서 해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해를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해를 받았으면 하나님께 해를 끼친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잊을까요? 안 잊을까요? 안 잊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 받은 것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건져낸 사람을 하나님이 잊을까요? 안 잊을까요? 못 잊지요. 하나님께서 잊지 못하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을 성령 안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의식으로 현실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이 모든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옛날에 나 살던 사고방식과 지금 성령의 사고방식이 말씀에 입각해서 어떤 차이가 난다는 것에 대해서 드디어 감 잡았어. 벌써 알게 된 거예요. 알게 된 겁니다.
옛날에 성령 오기 전까지는 유대인하고 똑같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지켜서 천당 가야지. 자기 생각 뿐이었죠. 이게 제거 대상인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자기한테 계속 투자를 해왔어요. 기도, 헌금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씀은 없고.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서 내가 지킨 말씀이 나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럼 그 구원은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내가 똑똑하고 착한 내가 현재 나를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모순이죠. 착하고 똑똑하면 구원 될 이유가 없지요. 착한데 왜 구원을 해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죄인 되어서 그렇다. 죄인 같으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그건 죄의 일부가 아니예요? 그것도 출처가 죄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본인이 죄인이라면 그것도 전적인 죄인이라면 그러면 의로운 것 하나도 없고 다 죄뿐이라면 그 죄인에서 구원받겠다는 아이디어도 죄 일종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의가 돼요? 내가 구원 받겠다는 것이 그게 무슨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의입니까? 지옥 갈 죄죠. 욕심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구원 받겠다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성령 안 받은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구원 받겠다고 열심히 했던 그런 나도 알고 그거와 관계 없이 성령이 임해서 구원 되는 나, 두 개의 나를 둘 다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을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처럼 성령이 온다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인간이면서도 누굽니까? 그냥 인간이 아니고 죄인이죠.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이잖아요. 이중이잖아요. 죄인이면서도 의인. 예수님이 죄 졌다는 것이 아니고 죄인된 육신의 몸으로 왔으니까. 죄인이면서 의인이잖아요.
성도도 똑같지요. 죄인이면서도 의인. 죄인되는 나와 의인 되는 나 두 개를 같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의인이기에 내가 성령 받기 전에 나는 철저한 죄인이었다라는 사실을 현재 내 육신이 지니고 있다. 그 육신 안에 옛날 나의 행세와 본성이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의인이에요. 의인.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의인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아는 것이 의인이에요. 사도 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안다고 해서 의인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의인이에요 그게. 그렇게 해놓고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의인이란 말이죠. 두 개 다를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죄 밖에 안 나오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죄 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 율법을 그럼 안 지키면 되겠느냐? 인간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율법의 감시 하에 있다는 것, 현재 처지는 똑같아요. 나 율법 안 지킬거야 하면 율법이 율법에 의하면 너 죄인인데! 나 율법 안 지킨다고 했잖아. 그래도 죄인인데!
그러니까 이건 좀 무리한 예이지만 예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합니다. 어떤 이쁜 아가씨 처녀가 수정과를 들고 가요. 들고 갈 때 어떤 남자가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가죠. 나중에 자기 집 앞에서 왜 우리집까지 따라옵니까?! 물론 공익광고에서는 당신 옆집에 살아요 하는데 저의 예에 의하면 수정과 냄새가 좋아서요. 무리하다고 했지요. 무리한 예인데. 계피향 수정과 향이 좋은데 사람들은 자기가 이뻐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옛날 자아 생각을 갖고있는 거예요. 성도끼리 좀 봅시다 하면 안 보여줘요! 이러거든요. 아니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 왕 되심을 보여달라 이거거든요. 뭐라고들 착각들을 하고 있어. 말씀이 당신에게 왕으로 지배하는 그걸 보여달라니까요. 같은 성도라고 수작 거나. 작업 거나. 작업 거는 게 아니고 왕을 보여달라고 왕을. 당신을 다스리고 있고 당신 안에 들어와서 십자가의 용서를 해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한번 봅시다 하는데 난 또 뭐라고. 사람들이 어디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예수 믿고 성경 공부하게 되면 나는 품위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이쁨 받는 품위로 내 자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달라진 멋진 나를 자꾸 보여주고자 하고 때로는 이걸 아껴서 안 보여주려고 하는데 지금 그거는 완전히 오해입니다. 오해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할게요. 존재의 단면. 이거는 예수님의 이미지. 복음의 이미지, 예수님의 이미지 같은 말이에요. 우리 속에 뭐 있나? 우리를 잘라버려요. 단면. 말씀으로 우리를 쪼갠다 이 말입니다. 쪼개면 우리 성도를 쪼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나와요. 가룟 유다가 나온다고요. 가룟 유다가 빠지면 제자가 몇 명이죠? 11명이죠. 그러면 한 명을 더 채우는 그 작업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 바깥에 있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결정과 의식을 포기하는 입장에서 제비를 뽑아버려요. 제비 뽑는데 여기 최종 후보가 두 명 올라왔어요. 조건은 뭐냐? 예수님 부활할 때부터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 11제자 말고 늘 따라 다녔던 사람. 그 중에서 두 명 뽑습니다. 23절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자, 둘 중에 어느 사람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한 인사였던가? 요셉이라는 사람은 할 말이 많아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이름이 세 가지나 돼요. 그만큼 많이 친근하고 알려졌어요. 그런데 맛디아는 맛디아 하나 뿐이에요. 최종 면접 봐서 두 사람 중에 뽑는데 이거는 한 쪽은 들러리 같은 느낌 들고 이미 다 정해놓은 취직 자리에 자기 아는 사람 다 결정해놓고 형식적으로 한 사람 더 곁들인 들러리로 하나 뽑은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뽑아보니까 누가 됐습니까? 맛디아가 됐지요. 맛디아가 됐다고요. 이게 신날 일입니까? 기분 좋을 일입니까?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한 사람을 택해야 될 거기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입장이냐 하면 가룟 유다 입장이 되어야만 가능해요. 가룟 유다 입장 되어야만. 12제자를 선택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12제자 하나하나 중에서 주님의 선택이 들어가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은 어떻게 자기 뜻이 아니고 뭡니까? 주님의 선택이죠. 주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은 가룟 유다는 죽었지만 자리는 남아있어요. 내가 선택했다는 자리는 남아있지요. 그러면 그 자리를 보궐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보궐 재선거로 들어간다. 보궐로 들어갔다는 말은 가룟 유다의 자리에 그 맛디아가 들어가는 거예요. 맛디아가 들어가버리면 나머지 11자리 조차도 가룟 유다와 진배가 없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바로 뭐냐? 12제자가 12제자로 자신을 알았던 그 시절은 시간 속에 있던 자리였어요. 시간이 추락하면서 그들은 맛디아를 뽑음으로서 12제자는 우리의 옛 사람의 옛 자아에 놓인 위치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위치의 그 차이점이 말씀 자체에서 다 이룸과 능력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는 겁니다.
참새가 전선에 앉아 있는데 하나 둘 씩 다 떨어져요. 참새와 더불어서 이제 시간없다 시간 자체가 없다 다 떨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 새롭게 뽑힌 맛디아를 통해서 12명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활동해야 될 사람이에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존재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육신이라는 것, 옛 자아예요. 옛 자아가 품고 있는 육신, 옛 자아 입장에서 새 자아는 없는 겁니다. 마치 그들에게 예수님은 안 보이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이 소진되어야 돼요. 이 옛 자아는 있다 해도 얼마 안 있어서 없어져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없어지면서 있음은 있음으로 드러날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의 자아는 드러날 겁니다.
따라서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가 성립되어버리면 옛 자아는 자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버려요. 주인공이 되는데 이 새 자아는 어떤 형식을 드느냐 하면 옛 자아 육신이 여기 있잖아요. 있어요. 이 있는 자아가 없음이 돼요. 대신 뭐가 나오느냐? 안과 밖 뿐이에요. 안과 밖. 멸망 당할 세상과 새로운 세상의 경계선에 자아가 여기 꽂혀서 증거하는 겁니다. 책받침 있지요. 책받침 보면 사각형 보이잖아요. 바로 세워보세요. 책받침은 거의 안 보이고 책받침 이쪽과 저쪽만 보이죠. 경계 짓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새로운 자아는. 새로운 자아를 내가 꼭 볼 필요가 없어요. 내가 새로운 자아를 보겠다는 것은 옛 자아에 있던 그러한 행세입니다. 내가 증거할 것은 복음인 것과 복음 아닌 것. 이 세상은 살아있어도 지옥이고 죽어있어도 지옥이라는 것과 우리는 살아있어도 천국이고 이미 천국 왔고 죽어서도 천국이라는 것, 두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대표적인 인물이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는 사람 취급을 거의 못 받았지요. 개도 사람 취급 안 했으니까. 개도 얼마나 똑똑한지 자기 주인이 사람 취급 안 하니까 자기도 사람 취급 안 하고. 그러니까 있어도 없는 존재.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외치는 것은 내가 이렇게 거지가 되고 몸이 아파도 나는 지금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천국이다 이런 거. 그럼 사람들이 네 걸 내놔. 네가 내놓을만한 걸 내놓으라고. 그럼 거지 나사로가 없다! 몸이 아픈데 뭘 내놓고 돈이 없는데 뭘 내놔요. 없는데. 그 없음이 바로 나를 기준으로 해서 이쪽과 천국 그 두 개만 보여주는 그 기능과 그 직책 그게 바로 오늘날 거지 나사로를 이어 받은 성도의 위상입니다. 성도의 위상이에요.
신앙생활 되게 쉬워요. 지옥이 뭐고 천국이 뭐고 그거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는가? 마태복음 16장 시몬. 시몬 있고 교회를 시몬 위에 세웁니까? 베드로 위에 세웁니까?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운다 할 때 시몬 위에요? 베드로 위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몬입니다. 시몬이 베드로 위에 교회 세워지는 것을 모르고 시몬 위에 현재 나 위에 교회 세워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시몬이 조금 후에 책망받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반석이 되느냐? 시몬에서는 반석이 안나와요. 시몬에서 반석 나올려면 시몬은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반석이니까 베드로 위에 다시 말해서 베드로 안에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뒤에 얼마 안 있어 베드로는 눈에 보이지만 베드로 안에 있는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베드로 안에 있겠지요.
2장에 보면 오순절날 성령 받으니까. 있겠지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3장에 여러분 다 체험하고 알고 있는 이야기죠. 사도행전 3장 12절 베드로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 요한이 눈에 보이니까 육신이 있으니까 12절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죠. 당신 주목 안하면 누구 주목하는데요? 그럼 누굴 주목할거에요? 그 현장에서 봤는데 cctv한번 까?! 블랙박스까지 다 봤어. 다 봤는데 왜 당사자 본인들이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거죠. 그리고 앉은뱅이도 정작 나은 앉은뱅이도 우리를 주목 안 했다는 거예요.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우리를 주목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실제로 살아계셔서 앉은뱅이를 낫게하는 것은 16절에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앉은뱅이 속에 들어가서 앉은뱅이 예수님 때문에 걷게 되었지 앉은뱅이 걷는 것에 우리는 하등 도운 적이 없습니다. 이 말 듣는 그 사람들은 데오빌로가 아니라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지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령 받아서 이중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한테나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요. 성경 백날 백독했다 백일독 했다 백만하나 백만두번 해도 이건 소용 없는 거예요.
가룟 유다 자리는 멸망자리지 구원자리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생명책에 누가 들어있는가는 우리가 몰라요. 주님만 알고 주님만 아시고 주님만 아는 명단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명단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준 거예요. 노벨문학상 후보자 자기들끼리 비밀이 되가지고 아무도 몰라요. 상을 주니까 아 그 명단에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뒤늦게 추론해서 아는 거예요. 아 명단에 있었구나. 언론사가 짐작해도 소용이 없고. 생명의 면류관 줄 명단은 누가 아느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컨닝할 수 없고 뺏어서 미리 개인정보 알아도 소용 없어요. 성령이 오니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오니까 옛날 내 모습을 아는 거예요. 옛날 내 모습을. 내가 어떻게든 천당 갈라고 발악을 했는지 비로소 헛짓 한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때부터 이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내가 시간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알아요.
이거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벌써 또 성령 받기 전이기 때문에 계속 시간 안에서 자기가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프로젝트를. 7절에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구원이 너의 일이 아니고 구원이 예수 나의 일이고 아버지의 일이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