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1b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20241101b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해봅시다.
지혜 자체는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기 때문에 어떤 부정적 요소가 없습니다. 왜? 도달할 걸 다 도달했기 때문에. 지혜 자체가 완제품이라. 생명이니까. 생명나무 과일을 따먹는다, 이거는 선악과 과일을 따먹으려 할 때 범죄한 게 아니고 선악과 구경한다고 죽은 게 아니고 따먹으려고 만질 때 죽은 게 아니고 선악지식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그냥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은 굉장히 슬프게 들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똑같이 생명나무는 따먹으려고 애쓴다고 생명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먹으면 돼요. 그러면 누가 뭐래도 그건 영생이에요. 선악과와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께선 과일로 표현한 거예요. 생명나무 과일 만졌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게 아니고 먼지 닦아준다고 영생 얻는 게 아니고 그냥 속에 들어가면 돼요. 따먹으면 돼요. 내 살과 내 피를 그냥 마시면 영생이에요. 그게 마지막 언약이고 최종 언약이고 새 언약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아담이 살아 있을 때 따먹었잖아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인간이 죽었을 때기 때문에 죽은 인간에게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의사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따먹으라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와 같이 죽은 자가 되셔서 본인이 아버지로 부활되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그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그냥 거저주시는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명령한다고 생명 되는 게 아니고 아예 친절하게 생명을 우리 속까지 집어넣어준 거예요. 이게 최종적인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곧 지혜에요. 그걸 한 번 보고 다시 구약 돌아가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2절부터 보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다음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유명한 구절, 고린도전서 1장 19절, 20절, 21절, 24절. 19절부터 보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고 돼 있지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해놓고 24절엔 뭐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랍니다. 누구한테?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율법과 상관없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줘도 못 지키는데, 우리도 줘도 못 지켜요. 율법과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지혜가 되는 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이미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 신약에 이렇게 나오면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필요치 않는 이야기냐? 신약에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끝나는 이야기인데 왜 구약이 이렇게 두껍냐? 구약에 왜 그렇게 할 말이 많으냐? 그것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는 방식, 또는 이방인에게 지혜를 주는 방식에 대해서 신약적인 최종적인 방식을 구약에서도 이미 미리 실시를 한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욥기에 나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지혜는 사탄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주어지지 않는다. 율법의 완성이 지혜라 했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이 주어져서 율법이 부정적 기능을 해요.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자신의 죄만 노출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 있잖아요. 그 제사에서 나오는 희생 제물에 시선을 빼앗기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 다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땅인 줄 알고 이방 바알 섬기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공중 급유시켜서 생명을 주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바알의 특징은 율법이 없어요. 바알이 하는 제자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제사기 때문에 율법과 관련 없는 제사를 드린 거예요. 누가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읽어보세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됐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제사가 하나님께 하는 제사가 아니고 귀신에게 하는 제사라고 돼 있지요.
그런데 제사하는 이방인들에게 물어봅시다. 그들이 지금 누구한테 제사한다고 하죠? 신에게, 조물주에게, 하나님께 제사한다 하지요. 여러분 조상숭배가 누구한데 제사하는 겁니까? 아아 어려운 말이다. 불신자들이 추석 때나 설에 제사하고 성묘 가서 제사할 때 누구한테 제사하는 거예요? (귀신한테…) 그거는 우리 쪽 이야기고 저쪽 이야기 제사하는 본인들한테 물어보자.
①조상한테 하는 것이다. 아니면 ②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몇 번입니까? (조상한테…) 아니죠. 하나님께 하는 거죠.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조상을 부탁하게 되면 조상이 잘 되면 자기가 잘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없어요. 하나님 없는 인간이 없다고요. 왜 불신자들은 조상이 잘 돼야 되느냐? 자기가 죽으면 합류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 올리는 것도 누구한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상한테 하는 것으로 해서 본인이 장차 합류할 그때를 위하여 본인이 본인한테 제사하는 셈이 되지요. 연옥에서 빨리 빼달라고. 이걸 사도 바울은 뭐라 합니까? 이제 우리 편으로 넘어옵시다. 그게 그들의 제사는 귀신한테 하는 것이다.
조물주여, 우리 조상 잘 되고 나도 조상 만나러 갈 때 귀신 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것 귀신한테 하는 거죠. 신에게 하는 거예요. 그걸 간추려서 조상한테 제사하면 우릴 도와준다고 하는데 좀 더 분석해 들어가게 되면, 조상이 우릴 안 도와주는 걸 다 알고 있어요. 다만 조상을 죽게 만들어서 보강하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신이 지금 조상에게 잘하라고 제사하는 나를 잘해달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조상이 죽으면 귀신 되잖아요. 그런데 귀신들이 있는 곳에 그 장소제공, 모든 관장하는 귀신보다 더 높은 게 있는데 불신자는 그걸 모르지요. 그들이 아는 지식의 한계는 죽어서 조상들이 어디에 갔다. 그걸 누가 만들었지? 몰라. 모르는데 뭐가 있어. 우리도 거기 합류할 거야. 내가 거기 가면 내 자식들이 날 위해서 조상 잘 되게 해주면 나는 죽어도 귀신 돼도 좋은데 극락 갈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몸 어려울 때, 치매 걸리고 요양병원 갈 때 돈 대고 간호하는 것은 딸이 다 하지만 재산은 누구한테 남깁니까? 아들한테 남기지요. 왜? 내가 죽어서도 제사 덕을 보려하면 제사 지내는 아들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요. 지금 사태가 이렇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누구 말대로 믿으셔야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려도 그거는 귀신한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는 방법은 욥을 없애는 거예요. 욥을 없애려면 여기 누가 동원되는가? 사탄이 개입돼야 돼요. 인간이 자기를 그냥 없애려 하면 없어집니까? “내가 괜찮은데 왜 자꾸 없애려고 하지? 나 괜찮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날 없앨 리는 없을 거야. 괜찮으니까 아마 계속 유지하려 하실 거야”라는 생각을 욥은 안 해봤겠어요? 욥이 했겠지요.
욥이 자기가 얼마나 엉터리란 사실을 누구의 개입으로 비로소 알게 됩니까? 사탄이 찾아와서 자기를 다룰 때 욥은 자기의 실체를 알게 된 거예요. 악마가. 사탄이 들어와서 욥과 지혜 사이를 이걸 잘라내는 거예요. 욥은 결코 완전한 최종적인 영생을 받을 위인이 못 되는 거예요. 뭐했다고 영생을 따먹어요? 지가 뭐 한 게 있어요? 욥은 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욥에게 사탄을 보내서 욥이 가진 모든 것, 건강까지도 몽땅 다 빼앗아버렸죠. 그러나 빼앗아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욥에게는 그 목숨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제한을 걸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선지자거든요. 이방인으로서의 선지자에요. 이방인의 선지자란 뭔 뜻입니까? 율법의 노선에 관계없이 지혜와 통하는 선지자.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했잖아요. 이방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욥 같은 경우가 욥에게 부정적인 사태를 발생시킨 거예요. 나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건 누구 탓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애꿎은 나에게 힘든 일과 건강 앗아가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건 영어로 쓰겠습니다. 욥이 지금 난처한 것은 이거에요. 딜레마dilemma에 빠진 거예요. 딜레마에 빠진 욥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뭐냐? “죽여주옵소서.” 차라리 이렇게 힘들 것 같으면 나로 출생하지 않았음이 더 낫겠습니다. 이걸 신약에선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한 거죠? 예수님이 가룟 유다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차라리 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 말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살아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 만들겠다. 차라리 안 태어난 게 더 낫고, 차라리 죽는 게 형편이 더 나을 정도로 그렇게 본질에 너를 접근시키겠다는 거예요. 딜레마에요. 욥은 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왜 합니까? 고민한다고 해서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절망이 자기에겐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그래요. 차라리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되잖아요. ‘나 없다’가 되니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예 없다가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선지자로 삼는데 뭐냐? 하나님의 생명과 없애짐, 죽음 사이의 경계선으로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누가 개입하고 협조합니까? 사탄이 협조하는 거예요. 악마가. 악마가 와서 욥으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뜨릴 때 비로소 욥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내가 결단코 아니었음을 압니다. 내가 생각한 나 따로 있고, 내가 생각 못한 다른 나를 겨냥해서 그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지요.
그런데 그 다른 나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소연만 할 뿐이에요. 그 하소연 중에서 한 마디를 우리가 봅시다. 욥기 28장 12절,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지금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타나는 진리 그 자체, 최종적인 것, 완전하고 완벽한 것, 모든 것의 모든 것 그거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13절에,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이게 바로 선지자의 기능 아닙니까? 인간의 한계, 인간세계 사회의 한계, 이 땅의 한계를 지금 욥이 대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욥의 세 친구와 차이 나는 점이에요. 욥의 세 친구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댑따 하나님만 거론해요.
실제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탄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세 친구는 지혜를 말하는 게 아니고 뭘 말해요? 지식을 말하는 거예요. 신학을 이야기해요. “욥아, 잘 들어봐.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고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 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따라서 니가 할 것은 내 죄가 뭔지 알아서 회개하게 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어디 다단계 차릴 일 있습니까. 니가 잘 될 거야.
이 욥의 친구의 허점은 뭐냐? 이게 지식이죠. 지식의 허점은, 모든 세상 학문의 허점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모른다. 이게 지혜가 도달한 사람이 아니고 성경 백독 읽고 도달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경 백독했다, 나는 신학교 나왔다, 나는 목사다.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그 이야기가 결국은 뭐냐? 자기가 자기 방어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어 작전이에요.
“혹시 물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일반가정에 들어가서 운을 떼놓고 결국 내미는 것은 ‘도를 아십니까?’에요. 요새는 길바닥에선 안 되니까 물 한 그릇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면서 언술을 푸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신을 믿으면 되고, 어떤 신학을 갖추면 되고, 어떤 책을 읽으면 되고, 또는 철학자 같으면 성경 이런 것이 나를 지키지 못한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란다, 물리학을 하란다, 화학을 하란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산이 거기 있기에 산에 간다, 엄홍길. 자기가 하는 내가 수고한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내가 자식한테 잘해주면 자식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말로는 자식 필요 없다, 해놓고는 아프면 전화라도 황공하고, 나이 들면.
결국은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욥도 마찬가지고 그동안 하나님을 나를 지키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몰랐지요. 그런데 친구는 아직도 내가 하나님 믿는 것은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본인이 모르면서 하나님 운운하고 있고. 욥은 하나님이 허락한 사탄이 개입해서 들통 나고 보니까 결국 나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그게 틀어졌다는 거예요. 그게 불연속성이다.
하나님이 오는 그 뜻을 받아서 나는 이런 것 받았다고 내밀어야 되는데, 그래야 서로 통하고 영생 얻는데 하나님이 의롭고 나도 의로운데 환란 앞에서 내가 내놓을 게 없네. 내놓으려면 지혜를 알아서 이것 때문에 환란 주셨군요, 해야 되는데 뭘 도무지 알 수 없느냐? 왜? Why me? 왜 하필 나에게 이런 환란을 주는지 차라리 내가 죄가 뭔지 알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욥기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내가 옆집 과부를 탐을 냈습니까, 내가 도둑질했습니까, 어린 고아를 학대했습니까? 오히려 평소 행동은 그 반대였어요. 혹시 고아 있으면 도와주고, 어른들 잘해주고, 자식들 위해서 잘못하지 말라고 기도해주고. 매사에 자기 보기에 완벽 그 자체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랬던 욥이 욥기 40장에 어떻게 됩니까? 40장에 보면 욥이 이걸 알아요. 내가 지혜를 알았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폭풍 가운데 오신 하나님을 내가 만났데요. 38장 1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전에 하나님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하고 마음 준비했는데 막상 하나님 딱 만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재를 뒤집어썼지요. 그리고 말이 쑥 들어갔습니다.
영생은 내 쪽에서 하나님 뜻을 알아서 내가 쟁취하는 게 아니고 만남 그 자체에요. 영생은 만남 그 자체, 내가 예상치도 못한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된 그 자체. 하나님을 예상 못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알던 나를 이제는 기꺼이 버리리라. 왜? 가짜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있든지 없든지 죽든지 살든지 어떤 상태라도 의미 없음. 따라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의식하는 그 자체에서는 몽땅 다 거짓말만 나와요. 나를 의식하면서 나오는 모든 말들과 행동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걸 받는 게 아니고 망하게 된 자에게 도달한 하나님의 자기 말씀을 도로 받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목걸이에다 하나의 구슬로 꿰서 데려가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그렇게 데려간다고요. 생명 속으로 가져가요. 그 예가 나오는데 41장 33절, 지금 리워야단 우리 번역엔 악어로 돼 있지요.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란 말이죠.
괴물인데 특징이 뭐냐? 33절에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이게 뭐냐 하면 영적 존재는 이 지상에 인간들 사는 동네에 있었어요. 영적 존재는 겁이 없어요. 자기 동네 아니니까. 인간들은 매사에 두려움과 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동네가 내가 살 동네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적 존재는 산다, 죽는다가 의미가 없어요. 존재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뭐가 주어졌습니까? 육신의 죽음이 주어졌지요. 아담보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했으니까. 흙이 될까봐 두려워서 인간세계에선 두려움뿐이에요.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거예요.
이래도 두렵고 안 해도 두렵고 해도 두렵고. 모든 행동이 두려움으로 둘둘 감은 채로 매사를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두려움 속에서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두려움 속에서 미리 걱정하고 두려움 없는 한 순간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팔자에요.
그러니까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발견한 건 뭐였습니까? 최고였지요. 모든 걸 알지요. 스바 여왕이 바로 우리 인간으로서 모든 걸 알게 되면 그다음부턴 완벽하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두려움이 없지요. 스바 여왕은 그 점에서 뭔가 크게 오해했습니다. 오늘 방금 보았던 것은 욥기였지요. 욥기에서 욥의 친구와 욥의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기 42장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엘리후는 빠져요. 세 친구한테만 해당됩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니 정당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보고 앞에 욥기의 엘리바스나 빌닷 그 친구들한테 이야기한 것 보세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벽하게 신앙인들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가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인간의 지혜로 볼 때 도대체 이들의 허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논리가 정확하게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오늘날 캘빈주의 같아요. 캘빈주의보다 더 나아요.
그런데 욥기 42장에서는 정당하지 못하다. 욥보다 도리어 정당하지 못하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욥기 이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욥이 한 이야기 나열하고 욥의 친구 네 명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세요.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상해요. 심지어 욥의 친구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욥이 이야기해요. 근데 하나님이 보는 관점은 달랐어요. 욥은 정당하고 친구들은 정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욥이 정당하다면 하나님이 욥을 나무라지 말아야 되는데 하나님은 엘리후도 나무라고 욥을 되게 나무래요.
그러니까 지금 욥기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정리 정돈해야 될지 예선전과 본선이 다른 모양이죠. 예선전 욥이 욥의 친구 이기고, 본선에 가선 하나님과 욥에선 하나님이 이기고 그런 셈이 돼버리지요. 왜 하나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는가? 그 뒤에 8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들 죄가 사해진다 이 말이거든요.
욥에게 뭐가 주어졌느냐? 자, 여러분 욥에게 아까 사탄이 주어졌지요. 그러나 사탄은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은 다 생각이 있었어요. 뭐냐? 사탄이 공격할 때 메시아적인 환란을 욥을 통해서 제공하게 만든 거예요. 장차올 예수님의 환란을 욥에게 제공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사탄은 신나서 욥에게 고난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고 사탄으로 하여금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시험하게 했지요. 그 방식이에요.
사탄은 신이 났어. 바리새인, 사두개인 신이 났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더욱더 메시아 되게 만들었어요. 메시아가 메시아답다는 말은 그분의 제사로 말미암아 죄인이 영생을 얻는 다리가 되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떠밀렸고 사람이 원치 않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이 주어지는 공중 급유가 가능한 율법의 완성, 지혜 그 자체입니다. 지혜가 곧 생명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여러분들이 환란을 스스로 만들지 말라 이 말입니다. 환란은 누가 줘요? 사탄이 줘요. 사탄이 어떻게 줘요? 시선 분산, 자기에 대한 치중, 집중, 자기에 대한 몰두, 연민, 내 것 내가 지키기 그런 식으로 살 때 불신자 같으면 관계없어요. 성도라면 그게 그렇게 괴로워요. 그게 딜레마에요. 어찌할꼬? 해결책이 없어 어찌할꼬?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았지요. 뭐냐 하면 요새 같으면 니 모습과 십자가 달린 예수님 모습을 대조하게 만드는 말씀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줘버리면 말씀 안에 십자가 들어있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나를 다시 한 번 쓰레기로 세우게 만드는 거죠.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 같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성전에 하나의 벽돌이죠. 이게 욥이에요. 이게 지혜에요.
이제는 뭘 보느냐 하면 솔로몬 봅시다. 솔로몬에게 이방인 스바 여왕이 ‘똑똑하네. 많이 아네.’ 그걸로 끝나고 지 가진 것 많은 보화를 솔로몬에게 주었습니다. 자, 문제는 솔로몬이 메시아냐 하는 문제에요.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니에요. 왜 메시아 아니냐? 메시아적인 고난이 솔로몬 자신에게는 그것이 나중에 주어지지요. 그것도 자기 이름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어지지요. 그걸 전도서 1장에 봅시다.
전도서 1장에 제일 먼저 뭐가 나오지요? “다윗의 아들” 다윗의 복제판, 다윗의 반복, 다윗의 연속. 다윗이 가졌던 그 죄, “나는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다” 그것에 대한 반복이 다윗의 언약적 아들 솔로몬에게도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전도서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은 나 전도자, 언약의 전도자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받았던 언약의 증인으로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 딱 들으면 사람들은, “뭐야, 뭐야. 뭐가 헛된데? 당신은 많이 알았잖아. 당신은 여러 가지 부자였잖아.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그 당시론 장수한 사람이잖아. 당신은 많은 여자를 거느렸잖아. 화려하게 살았잖아. 당신은 모르는 게 없이 모든 걸 알았잖아.” 여러 가지 이야기 나올 거죠.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솔로몬이 할 말이 있는 거예요. 책을 많이 읽어도 피곤하고 많이 의롭고 많이 똑똑하다 할지라도 모르는 사람과 똑같은 인생길 갑니다. 다 헛되고 헛된 길 갑니다. 솔로몬 자체 내의 부정성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파먹고 자기가 스스로 붕괴됨, 파멸되는 것을 대단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허풍이었다는 이것을 다윗언약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받았던 그 언약이 내 위에 작동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전도서에 대해서는 희망이 나오겠지요. 희망 보기 전에 우리가 마태복음 25장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1절) 이렇게 돼 있지요. 그대로 써볼게요. 천국은 열 처녀와 같다, 이 말 아닙니까? 천국을 설명하고 표현할 때 내가 열 처녀로 설명해줄게,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 이야기만 들으면 열 처녀 전부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오해할 수가 있지요. 예수님은 천국을 표현하는데 열 처녀가 필요한데 천국 들어간다고 이렇게 오해할 수 있지요. 천국은 열 처녀와 같으니, 그 뒤의 말 전혀 모르고 열 처녀는 다 훌륭해서 천국 갔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 뒤에 줄줄 이어져 나올 것 같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열 처녀를 하나로 봐야 돼요. 왜냐하면 신랑이 몇 명입니까? 신랑이 열 명이었습니까? 여섯 명, 여섯 명 붙는 거예요? 솔로 예능프로 하는 거예요? 아니지요. 신랑은 하나잖아요. 그러니까 맞선프로 솔로, 남자 한 명 나와야 돼요. 여자 몇 명 나와야 돼요? 여자가 여섯 명 나오든지 열 명 나오든지 관계없어요. 그러면 얼마나 재밌게요.
조건을 열 명 쪽에서 달겠어요, 한 명 쪽에서 내밀겠습니까? 한 명 쪽에서 조건을 내밀겠지요. 신랑 쪽에서 조건을 내미는 거예요. 열 처녀가 중간에 쪼개집니다. 쪼개지면 여러분 수학 잘 아니까 몇 대 몇? 5:5로. 4:6, 3:7, 8:2로 쪼개지지 안하요. 5:5로 쪼개진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똑같다. 그 여자 인물, 키, 학력, 성격 일체 안 봐요. 그걸 천국은 인간에게 나오는 조건을 일체 보지 않는 블라인드 면접 멋지지, 뭐. 일체 보지 않음.
자, 이번에 봅시다. 열 처녀가 왔다. 열 처녀가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지요. 한 명의 신랑과 혼인하기 위해서 열 처녀 왔지요. 그러면 열 처녀가 이렇게 있다면 열 처녀 전부가 정열해서 한쪽만 바라보겠지요. 동물에 그런 게 있지요. 미어캣인가 한쪽만 바라보는. 한쪽만 바라보니까 그들을 열 명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거예요.
하나로 보는데 신랑 쪽에서의 조건이 뭡니까? 완전히 두 조각나버렸지요. 내부적으로 두 조각났습니다. 신랑과 반드시 이번에 혼인한다, 전부 다 똑같은 심정으로 왔는데 이게 두 조각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뭐는 살아 있어요? 신랑과 반드시 결혼해야 된다는 것은 하나같아요.
그러니까 하나같은 그쪽을 중간에 쪼개는 것은 그들 자체로 “우리 쪼개자. 숫자 너무 많다. 쪽수 많으니까 다섯 명으로 하자.” 자체 회의 의논한 게 아니고 신랑 쪽에서 조건 걸어버리니까 자체적으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두 부류로 갈라져버린 거예요. 갈라지면서 오늘 지혜와 관련돼 있는 게 뭐냐 하면 이쪽 다섯 명을 슬기 있는 자, 다시 말해서 지혜 있는 자고 반대쪽은 어리석은 자 되지요.
그러면 잠언에서 지혜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지혜 없는 자는 죽음뿐이죠. 생명이 없지요. 천국이란 것은 이 쪼개짐에 의해서 천국의 본질이 쪼개짐 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이란 것은 쪼개짐 없는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들이 마음의 결심이라든지 우리끼리 가위바위보 하는 게 아니고 조건 거는 것은 오실 신랑이 조건 걸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쪼개버리는 겁니다. 뭐로? 슬기 있느냐? 지혜 있는 자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 저 서울대학 나왔는데요, 전부 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지식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혜 있는 자가 뭐냐? 결혼식을 밤에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열 명 다 알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슬기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지식수준에서는 슬기 있다, 어리석다가 판정나지 않습니다. 똑같아요.
그러면 양쪽 다 신랑 올 때 기름 준비해야 된다는 지식은 있는데 슬기 있음, 지혜 있음은 누가 결정하느냐? 신랑이 자체적인 타이밍으로 결정해버려요. 생각도 못했는데 출제가 나왔어요. 킬러문항이라. 딱 보고 그러니까 기름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열 명 다 똑같은 동일한 생각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오느냐는 누구 소관입니까? 신랑 소관이죠.
그렇다면 여기 신랑과 혼인한 그 여인들은 자신이 슬기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부 못해요. 왜? 슬기 있다는 그 규정은 신랑의 일방적인 타이밍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던 슬기로 구원된 게 아니죠. 아아,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타이밍, 시간에 관한 문제지요.
마지막으로 전도서 다시 와서 12장 1절 봅시다. 그러니까 전도서 12장 1절 오기까지 전도자 솔로몬은 자기 나름대로의 그동안 인간세계에서 갖고 있던 지혜를 다 풀어요. 다 풀어냅니다. 다 풀어내면서 결론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어떤 인간의 지식이나 행위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헛됨에서 와서 모든 게 헛됨으로 돌아간다. 1장의 해도 그렇게 모든 바닷물도 그렇고 그냥 빙글빙글 돈다. 빙글 도는 거예요. 갑자기 나미 생각이 나는데 나미가 선지자인가요? 똑같이 빙글빙글 돌다가 그냥 몰락하는 거예요.
그러면 빙글 도는 이것을 솔로몬은 어떻게 했느냐? 이걸 시간의 직선화시키는 거예요. 이게 뭐냐? 12장입니다. 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기름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을 네가 늙을 때 준비하지 말고 청년보고 준비하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네가 태어날 때부터 지혜를 줬다는 겁니다. 주었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헛되게 사라진다는 것은 감히 생각 못해서 ‘나는 존재한다, 멋있게 존재해야지, 나는 여기 있다, 대단한 존재가 돼야지’ 이러다 보니까 관심사가 어디로 갔어요? 시선이 자기 잘 되는데 몰두해서 미리 준비할 것을 준비를 못한 거예요. 전도서 7장 봅시다. 아하, 내일 결혼식 가야 되는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1절) 이게 지혜자 이야기에요. 그럼 지식자 이야기는 뭡니까? 죽는 것보다 돌잔치가 훨씬 낫다. 이건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고. 지혜자 이야기는 죽는 것이 낫다. 그럼 왜, 왜, 왜 물을 거잖아요. 답변이 뒤에 나와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어느 집에 있고?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생각해보세요. 거지 나사로의 관심사는 아브라함, 하나님의 지혜 완성의 세계, 부자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나한테 같이 파티 참석하는 같은 인간들, 너보다 낫잖아, 하는 그러한 인식들 아무것도 말씀이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어요. 십자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은 지옥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면서 나는 영생 쪽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가 이미 이 땅에 활동하고 있음을 성령이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지혜를 놓치지 말고 십자가만이 지혜인 것을 지혜의 완성인 것을 이제는 능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