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1031a 누가복음 7장 47절(용서)-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41031a 누가복음 7장 47절(용서)-이 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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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119 [용서]. 용서는 사람과 사람을 대상으로 이미 용서가 실시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죠.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용서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용서로서 유효하게 받아지겠는가?
주기도문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네가 남의 죄를 용서하면 내가 네 죄를 사한다는 말씀 있죠,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너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네 죄를 용서해준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대칭성(symmetry), 땅에서 일어난 일과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대칭성으로 이렇게 묘사해줬어요.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 하나님 세계에서의 용서 이렇게 대칭성으로 할 때, 순서가 주기도문에서는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가 먼저고 그다음에 하나님 세계에서의 용서가 2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다음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땅에서의 용서를 근거로 해서 하늘의 용서를 받는 걸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 보게 되면 ①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②땅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과 그 뒤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계시, 양쪽 다 예수님의 계시인데 왜 계시의 순서가 서로 다르냐? 주기도문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게 적용시킬 내용을 미리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한테 해코지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거고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섭섭하게 그렇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땅에서 같은 동료들로부터 여러 가지 죄와 죄의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제자들은 감이 오지 않는 거예요.
제자들 입장에서는 인간 대 인간들이에요. 인간 대 인간이고 여기에 예수님이 같이 섞여서 같이 관계한다는 것이 제자들은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우리 인간들끼리 용서하게 되면 하나님도 용서해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인간과 같이 레벨을 나란히 해서 입장을 나란히 해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 죄 짓는 일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친히 먼저 감수하신 거예요. 그걸 받는 겁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알죠. 우리가 예수님께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 용서라는 것, 대칭성을 통해서 예수님이 땅에 왔으니까 ‘예수님이 포함된 땅의 세계에서의 용서가 뭐냐?’ 그것부터 먼저 알고 ‘거기에 대칭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진다.’ 이런 순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가 뭐냐? ‘용서란 죄를 겨냥하는 것’. 용서가 먼저 있고 이 용서가 죄를 발굴한다, 이렇게 보시면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죄짓고 난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이라면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고 용서가 먼저 있고 죄를 발견하는 거예요.
용서가 먼저 있고 죄를 발견했을 때, 용서와 죄가 어떤 식으로 만나야 되잖아요. 그럼 죄는 뭐냐? 용서라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 죄가 뭐냐? 용서와 만날 수 있는 죄는 뭐냐? ‘죄는 스스로 자신을 파선(파산)에 빠뜨리는 행위’가 바로 죄가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파선 또는 파산에 이르게 하는 행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죠. 그러면 인간의 모든 권리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만드신 분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거니까. 인간은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가 만든 게 아니고 처음부터 내 인생은 내가 구축한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나를 파산에 이르게 하고 나를 엉망진창으로 스스로 몰아넣기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살다가 힘들면. 종이에 연애편지 쓰다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구겨버리죠. 편지 쓰는 당사자가 나니까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편지지를 내가 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내가 구길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습니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마귀가 개입해서 이제부터 네 인생은 네가 살아가야 된다고 그렇게 인간을 부추겨왔던 거예요. 인간이 내 인생 내가 살게 되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하나님의 준비된 용서가 불필요해요.
용서라 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그 불가능성의 영역을 따로 다른 분이 그 분의 권한으로 쥐고 있다는 것이 용서의 세계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할 도리 다했는데 스스로 우리는 어떤 한계에 봉착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모든 신변이나 나의 위상을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다.’ 그것이 확실해져야 돼요.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파산으로 빠뜨린다는 것은 뭔가 계속 시도해본다는 뜻이에요. 계속 시도해보면 어떻게 돼요? 시도해보면 결국 어디에 이릅니까? 계속 시도해보면 자기 파산에 이르죠.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인간이 열심히 살잖아요. 그 끝은 뭡니까? 자기 파산이에요. 자기 파산.
가룟 유다가 대표로 선두주자로서 잘 보여줬죠. 자살. 꼭 뭐 번개탄 안 피워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파산 과정이기 때문에 ‘자살의 과정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완전히 무너지는 과정에 놓여있으면서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지치지 않고 해보는데 지쳐요, 결국은. 나중에 눈에 핏줄 터지고. 외지에 가서 일이 생기면 안돼. 뭐라도 해봐야 돼. 뭐라도 해보는데 지쳤어. 힘들어요.
파산하지 않는 인간이 없습니다. 모조리 다 파산하죠. 그래서 주께서 준비해놓은 것은 뭐냐 하면 ‘잘해라. 열심히 하라.’가 아니라 ‘용서해줄게.’거든요. 그러니까 용서를 받으려면 내가 나한테 시도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파산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을 발견해야 주님의 용서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하는 그 모든 조치가 나를 더욱더 망치게 하고 망하게 한다는 이 사실에 눈이 떠져야 돼요. 눈이 떠져야 됩니다.
앞에서 죄와 용서에 대해 언급했던 문장을 다른 문장으로 하게 되면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이름을 못 놓는다.’ 어떤 경우라도. 자꾸 점검해요. 자기 형편에 대해서 수시로 점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자신이 지금 제대로 가고 있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늘 파악하기 때문에 뭐가 자꾸 관계없습니까?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내 이름은 어떤 경우라도 수치스럽지 않아야 된다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제가 설교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문장이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문장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일생이란 자아형성과정이다.’ 이것이 뭐 5살 뿐만 아니고 20살 뿐만 아니고 40살 뿐만 아니고요. 40살에서 자아형성이 마감되는 게 아니고, 70이 되고 80이 되고 90이 돼도 계속해서 자아형성은 쉬지 않고 계속 진행 중입니다. 자아형성. 나는 이래야 돼. 나는 저래야 돼. 나한테 이거는 고쳐야 되고 이거는 내가 유지해야 되고. 계속 다듬어나가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창조자’가 돼요. 악마의 마음입니다. 이게 악마의 마음이죠.
이럴 경우에 뭐가 계속 괴리현상으로 일어납니까? 뭐와 갈라져있습니까? 용서. 나는 용서 없이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용서 없이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겁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에서 비롯된 자기 이름이죠.
그런데 보통 5살 때, 20살 때, 40, 50대까지는 그냥 ‘오~ 강단 있네. 오~ 상당히 자의식이 강하시네.’ 이렇게 되죠. 이게 70을 살짝 넘어가면 이걸 두 자로 ‘고집’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집인데 정치계에서는 이걸 고상한 말로 했어요. 노욕(老慾). 늙은이의 욕심, 노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노욕이라면 고상하고 사실은 고집. 앞에 ‘똥’자 하나 붙이면 똥고집.
그런데 이 사람의 이런 자기고집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졌습니까? 언제부터 만들어졌습니까? 출생할 때부터. 출생할 때부터 모든 에너지의 집중이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어.’에 다 집어넣어진 거예요. ‘나’라는 주머니는 범위가 좁은데, 그 좁은데다가 계속해서 세월가면서 온갖 인생경험들-직장 다니다가 나왔다가 뭐 가정적으로 어떻고 뭐 장사하다가 말아먹고 잘되고 그런 것들 전부다-대통밥이죠, 대나무 통 안에 꼬깃꼬깃 밥알 집어넣는 것처럼 살아온 모든 인생을 좁은 데에 압축하는 거예요.
참깨 압축하면 뭐가 나와요? 참기름 나오죠. 참기름 짜듯이 거기다 꼬깃꼬깃 넣었는데 나중에 나이 드니까 어떻게 됩니까? 참기름처럼 완전히 꽉 짜여져서 바깥으로 나온 게 뭐냐 하면 고집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고집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것인데 인간은 이 고집이 나오더란 말이죠.
고집 안에 보니까 목숨 바쳐서 지켰던 것이 이 안에 들어있죠. 그게 뭡니까? 자기 이름이에요. 대통령 욕해도 아무렇지 않고 국가 욕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누구 욕할 때 갑자기 기분 나쁩니까? 자기죠.
경찰이 가면서 그냥 자기 볼일 보면서 가면 되는데 “Hey!” 부르면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하죠. 미국에서 누가 또 “Hey!”하고 안 부르던가요? “Hey! Just a moment. 잠.깐.만.” 내 이름을 부를 때 바짝 긴장이 되면서 안에 있는 방어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했던 일이 나 지키는 것 외에는 한 적이 없어요. 문제는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용서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은 자기를 지킬 권한이 없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지키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지켜도 주님이 지켜야지, 네가 만들지도 않은 너를 네가 뭔데 너를 지키냐 이 말이죠. 네가 지키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바보같이 등신같이 자기가 계속해서 자꾸 지는 거예요. 지켜야 돼, 지켜야 돼, 내 이름에 흠집나지 않도록 지켜야 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어요. 그 외에 없어요. 인간이 인간을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에요. 나를 지키는 방식 중에 하나였습니다. 저 사람을 용서하면 나중에 저 사람이 해코지 안할 것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서양에서 인사할 때 악수한다는 것은 ‘내 손에 권총을 쥐고 있지 않습니다. 칼을 쥐고 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당신을 해할 무기가 내 손에 없어요. 비어있습니다. 당신을 해할 의사가 없습니다.’ 이게 인사가 돼서 악수한다는 말은, 평소에 얼마나 손에 많이 쥐고 있었나. 짱돌이라도 많이 쥐고 있었냐 이 말이죠.
인간은 도대체 왜 지켜야 되죠? 인간이 자기를 지킨다고 해서 뭐가 없어요? 용서를 맞이할 마음자세가 없어요. 내 인생은 내가 지키면 되지, 누가 나를 건방지게 용서하냐 이 말이죠.
성경에서 사함 받은 사람의 여러 가지 사례가 있지만 누가복음 7장입니까, 울면서 자기의 향수를 내놓은 여인. 소문 안 좋은 그 여인. 예수님이 바리새인 집에 초청받았을 때에 초청받지도 않은 여인이 와서 자기가 눈물 흘리면서 가져온 모든 향수를 다 터트렸잖아요.
누가복음 7장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여기 보면, 내가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를 사했다는 말은 ‘죄짓지 말라’가 아니라 ‘인간아, 죄짓지 말라.’ 이게 아니라, ‘너 지은 죄 어떻게 할 거야?’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 죄가 뭐냔 말이에요, 그 죄. 그 죄가 뭐냐? 예수님 앞에 죄 없는 인간은 없잖아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죄는 뭐냐? 그게 마귀의 속성을 전부다 할당받은 거잖아요. 다 배당받고 있단 말이죠. 마귀의 마음가짐을 배당받고 있을 때 그게 선악인데, 그 선악지식을 배당받고 있으면 그 선악지식과 연계되어 있고 연결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에요.
자신의 이름은 뭐냐? 자아형성과정과 관련 있기 때문에 자아가 형성되면 형성될수록 자신의 이름도 같이 동행하면서 자기 이름이 참 대단한 이름인지, 가치있는 이름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이름인지를 자아형성 안의 내용을 통해서 바깥으로 정립되고 조성되겠죠.
그러면 용서를 받았다는 말은 이제 무슨 이름이 날아가버린 겁니까? 자기 이름 안에 있는 실상이 다 노출되었다는 뜻이에요. 들켰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이렇게 구축하면 받아주는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갈 곳은 지옥밖에 없고 그 지옥에 누가 먼저 가있느냐 하면 마귀가 먼저 가있습니다. 악마가.
[용서] 다음에 나오는 제목이 p.122 [악마]입니다. 오늘 [용서]와 [악마], 그 뒤에 있는 [남의 종교생활을 비판하지 말자] 세 개를 연달아 계속 할 겁니다.
일단 용서와 악마를 연결시켜봅시다. 자기 이름을 유지하게 되면 악마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 지옥불속에 합류가 돼요. 한통속이니까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기에게 마음을 준 그 악마와 상봉하는 시점으로 인간들은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조종해서 노선을 변경하지도 못하고 어쩔 수없이 본성 자체가 끌려가는 거예요. 본성 자체가.
이것이 바로 인간을 둘러싼 field, 장(場), 공간이에요. 또는 환경.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 성격 또는 지옥 성질화 된 환경 속에 출생해서 이 안에서 그냥 죽습니다. 여기에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아는 방법은 악마 바깥에 있는 주님께서 같이 이 지옥 환경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같이 뛰어드는 겁니다. 뛰어들어서 무엇을 외치느냐 하면 용서를 외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의 죄 사함 받으라.” 너의 죄. 너의 죄 사함 받으라.
“선악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네가 먹지 말아야 될, 알지 말아야 될 것을 네가 삼켰다. 그 죄에 대해서 네가 구원될 길은 나로부터 죄 사함 받는 것밖에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이 말을 이해했습니까? 이해 못했어요.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 못한 이유가 뭐냐? “네 죄 용서받으라.” 했을 때, 또는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그 이야기할 때 예수님 옆에 제자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 말을 성령받기 전에는 이해 못하는 이유가, ‘죄 사함 받는 방식이 나에게서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죄 사함 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준비하지? 죄 사함 받기 위해서 내가 할 게 뭐가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미 그것은 죄 사함에서 실패한 겁니다. 죄 사함에 실패한 겁니다.
예수님과 인간관계 같으면 “죄 사함 받으라.” “네, 받겠습니다.”하고 끝날 문제인데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권세, 힘에 둘러싸인 채 ‘죄 사함 받으라’가 딱 들어오니까, 인간은 ‘죄 사함 받으면 내 이름이 깨끗해진다 이 말이지?’ 이렇게 돼요.
‘죄 사함 받으면 더럽던 내 이름이 깨끗한 이름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악마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훈련을 잘 시킨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평소에 늘 집중한 것은 뭐냐? 죄 안 지을 수는 없고, 살면서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행동을 나서느냐에 대해 많은 연구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다른 백성들은 그 연구를 습득하고 교육받은 지침을 그대로 따르면 되고.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한테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악마가 바로 그런 교육을 시킨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거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미국 갔다 와서 죄 사함 받을 거 같으면 얼마든지 너도 나도 미국 가겠어요. 미국 간다고 죄 사함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미국 안 간다고 죄 사함 받는 것도 아니고.
죄 사함 받을 방법을 우리가 자꾸 구상하면 구상할수록 그것이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 되어가지고 마귀만 대따 좋아하는 거예요. 더 더 더 철저하게 용서받을 만큼 회개해야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끊어버리고 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오늘 강의는 죄 용서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장(field), 지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장, 마귀가 집어넣은 이 장이 어떻게 이 장 자체가 변화되는가?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이 장을 어떻게 흔들어버리는가? 그 점에 대해서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다만 우리가 속해있는 이 장의 기준축 또는 기준계 또는 기준좌표계를 새로 설정해야 돼요. 새로 만드는 겁니다. 골치 아픈 x,y 좌표. x,y 좌표에서 P라는 점이 있을 때. x,y 좌표에 어떤 점이 있다는 말은, 나라는 존재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x,y라는 나보다 더 넓고 큰 그런 환경이 먼저 마련된다는 이야기입니다(그림1).
그럼 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은 삐딱한, 그러나 그 사이가 똑같이 직각인 x′,y′축에 해당되는 어떤 존재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거예요(그림2).
기존의 x,y 좌표가 인간이라면 예수님은 삐딱하게 다른 좌표계 안에서 나타나가지고 이 두 기준틀(x′,y′)을 기존 좌표계에 합쳐버리는 거예요.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기존 x,y 좌표계에 우리가 P로 있을 때, x′,y′ 좌표가 겹쳐지면 예수님은 이 안에서 P′가 되죠. 그럼 P′(예수님)와 P(우리 존재) 사이의 간격, 이 간격을 없애서 합치면 되겠죠(그림3). 참 쉽죠? 되게 쉽죠. 뭘 바꾸면 된다? 세상 보는 기준틀을 바꾸면 되죠.
예수님의 기준틀은 하나님의 관점이죠. 그럼 우리의 기준틀은 뭐가 되겠어요? 악마의 관점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점이에요. 인간은 그냥 점처럼 놓여질 뿐이지, 우리가 속해있는 이 관계 원칙 따라 그냥 따라할 뿐이지, 우리 고유의 어떤 거라고 설쳐대 봐야 우리 고유라는 게 없어요. 남들 각자 각자 전부 다 마귀의 다양체, 마귀의 다양한 면, 여러 가지 경우에 그들은 놀아나고 있고 나는 나 나름대로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고. 거기서 태어났으니까요. 선악과 따먹고 선악지식이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이런 어떤 기준틀(x′,y′) 없이 같은 P, Q, R 같은 인간들 만나서 어떻게 해결해보려는 거예요. 훌륭한 목사님 만나고 바리새인 만나고 서기관 만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거. 지는 압니까? 이 틀 자체가 악마가 만든, 악마가 조성한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 입에서 기껏 나오는 한계가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당신의 이름은 가치 있는, 의미 있고 의로운 인간이 됩니다.’ 기껏 이 소리밖에 더 나올 게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 있잖아요. 긍정적인 희망. 기준틀이 틀린데 이거 뭐 백날 해봐야 소용없죠.
예수님(P′)과 그 당시 제자들(P)이라 합시다. 제자와 예수님 사이의 간격.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식사도 했거든요. 요한복음 21장 15절 뭐라고 되어있죠?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이렇게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뭘 하셨어요? 식사를 같이 했죠. 식사를 같이 했어요. 주님 쪽에서 원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은, 나는 너희를 버리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13절,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주님, 곧 P′ 되시는 분은 P와 식사를 같이 했는데 아직까지 제자들은 뭐가 안 바뀌었어요?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뀌지 않고 자기 관점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그냥 식사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한다 해도 ‘예. 고맙습니다.’했는데 용서가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왜 와 닿지 않습니까? 자기가 속해있는 환경 자체가 주님이 속해있는 환경의 좌표에 의해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하고 뭐 십자가 죽고 예수님 재림하시고 성경에 나오는 온갖 영적인 개념을 다 투입해도 그들은 그냥 지식으로 남아서 ‘내가 잘 되는 데에 이거 도움 되겠다.’ 그걸로 끝났지, 자기 자신이 정말 용서의 대상인 것에 그들은 미치지 못하죠.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용서의 대상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실 때 식사를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까지 들어오는 게 좋을까요? 어느 쪽입니까? 나 너와 식사했다, 또는 나 너를 이미 용서했다는 그 말씀이 그 사람 속까지 들어와 버리면 새로운 기준계 전체가 그 사람 속으로 들어와서 작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작동을 어떻게 하는지 제가 그림 하나 그리면서 하겠습니다. 인간은 그냥 홀로 있지 않고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아를 형성한다 했어요. 인간 평생 필생의 사명은 뭐냐?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구성하는 거예요.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고 국제 교육도 마찬가지고 영어 모르다가 영어 잘하는 나로 구성하는 거예요, 모든 게.
그러면 누구를 만나요? 같은 인간을 만나겠죠, 같은 인간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을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구간이에요, 구간.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사이에 구간이 남겠죠. 이 구간을 공간(field)면에 그대로 옮기면 mapping, 지도화. 지도를 map이라 하죠. 지도화 시키는 거예요. ‘이 구간에 작동하는 장, field 안에서 둘이 만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그림4).
이렇게 만나게 되면 이것을 ‘사건’이라 해요. 사건. 시간을 축으로 해서 위로 올라가게 되면, 만났던 구간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1년 하든 하루 하든 1초를 하든 괜찮아요, 어쨌든 또 하나의 mapping이 성립되겠죠. 그럼 시간축에 따라 (사건)구간이 각 field에서 mapping을 형성합니다. 시간 변화에 따라 각 장에서 성립된 mapping을 연결한 선을 세계선이라고 합니다(그림4).
(세계선(世界線, world line): 시공간을 통한 경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1864~1909)가 1908년 도입한 4차원 시공간(민코프스키 시공간Minkowski Spacetime)에서 특정 입자의 궤적을 나타내는 용어. 그림5참고)
만남이라 하지 말고 개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에요. 개인이 시간에 따른 경로도 세계선, 같이 만나서도 세계선이에요. 시간축에 따른 궤적을 그리며 하나의 연결선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mapping된 세계 속에 시간 따라 ‘올라간다’가 되겠죠. 시간축의 방향이 위쪽이니까.
그런데 주님은 시간의 시작인 동시에 시간의 끝이었어요. 인간은 그냥 점점(…)이에요. 시간의 끝을 몰라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을 마감시키는 주님께서 시간축의 방향과 반대로, 거꾸로 내려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아시는 분이 내려온다면(그림4에서 붉은 선) 시간의 끝이니까 이 모든 것은 파산이 되고 파멸이 되는 거예요.
끝까지 이어지는 세계선, 그 끝부분은 이미 심판으로 잘라져있어요. stop. 여기까지.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해, 하고 잘라져있다고요. 끝나는 겁니다. 이 말은 주님이 이미 완료된 시간가지고 거꾸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겁니다. 공수부대가 헬리콥터에서 내려올 때 어떻게 내려옵니까? 레펠(rappel, 로프를 타고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 합니까. 다리가 아래로 가게해서 내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헬기에서 내릴 때 머리부터 내려와요. 레펠하듯이 내려온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 만날 때 제자들은 같은 시간대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시간의 끝을 가지고 시간 속에 아직 있는 인간에게 찾아와 만나주는 거예요.
그럼 시간이 끝이 된다는 말은 심판을 의미하죠. 심판의 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인간과 만나게 되면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P′와 P의 만남이에요. 하나는 심판주요, 하나는 심판의 대상이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잘 해 볼란다, 어떻게 나를 변화시켜볼까 하는 게 다 헛수고에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냥 심판의 대상일 뿐이에요. 그냥.
그래서 누가복음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어떻게 했습니까? 부었죠. 향유를 그냥 부어버렸어요. 여자가 울었다 이 말이죠.
자기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함몰되어버린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솜사탕이라면 솜사탕을 납작하게 만들어서 자기를 없앤 채 그냥 자기가 가진 모든 향수를 예수님 것으로 돌려버리고 자기도 그 안에 같이 투신을 해버리는, 자기가 모았던 값진 향수와 더불어 자기의 눈물로 쏟으면서 예수님 앞에 같이 합류해버린 겁니다.
이럴 때 이 여인의 행동이 바리새인한테는 납득이 안돼요. ‘왜 저런 행동을 하지?’ 그것도 어떤 여자였어요?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한테 합류할 때,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 여기잖아요.
그러면 선악체계에서 죄인 여자가 만약 합류해버린다면 여인은 자아를 붕괴함으로써 뭐만 남아요? 자기의 죄만 남죠. 자기가 그동안 죄를 쥐고 있다가 자기 쪽을 뭉개버리니까 죄를 담은 그릇 자체가 없어지고 죄를 담은 그릇을 이제는 자기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이동하는 그러한 행위에요. 주께서 그 여자의 행위를 죄 사함으로 받아주는 이유가 앞으로 예수님이 하는 역할이 이 죄인하고 조가 맞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인간들과 만나잖아요. 예수님이 누구와 만났느냐 하면 죄인을 만났어요. 죄인과 만남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자기 고유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지금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에요. 여자의 일은 끝났어요.
자기가 뭉개졌으니까 납작하게 뭉개졌으니까요. 아코디언처럼 완전 납작하게 뭉개졌어요. 여자의 일은 없고 여자가 자기 일 버리고 예수님 일의 일부로 투입되고 합류가 되어버린 거예요. 주의 일이에요. 그게 용서에요. 용서를 받는 게 아니고, 자기를 뭉개뜨려서 더 이상 내 일은 없다. 나의 일은 없어요. 평생이 자기 자아형성과정이니까 없는 거예요.
시간에 따라 mapping된다 했죠. 이 mapping된 시공간에 예수님이 합류한다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도 한 인물로서 공간면에 한 점으로 표현될 수 있어요. 예수님은 혼자입니까, 누구를 만나러 왔어요? 누구를 만나러 온 거예요. 예수님의 역할을 위해서 죄인을 만나러 왔단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어떤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꿇어앉아서 엉엉엉 운다. 향수를 부으면서. 이것이 무슨 선이 되겠습니까? 시간의 끝에서 와서 끝으로 딸려가는 주님의 세계선이에요(그림6).
지금 진화론 같은 경우에, 창조과학도 마찬가진데 진화론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시초와 최후를 몰라요. 최초와 최후를 모른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건 관계가 평균적으로 균일하다는 조건 하에 진화론을 만들었어요. 균일하게 적용되는 과학원칙을 끝까지 확대하게 되면 이게 아마 시작이고 이게 아마 끝이라고 보는 거예요. 지구 역사는 47억 년 전, 우주 역사는 136억 년 전, 이것은 뭐냐? 시초, 시작을 모르고 우리가 아는 구간을 잘라서 구간에서 나온 원칙을 가지고 최초와 최후까지 억지로 잡아당긴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알파요 오메가잖아요. 최초요 최후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모든 행위나 모든 개념, 사랑, 용서 같은 모든 개념은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최초와 최후가 같이 함유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함유되어 있는 개념이에요. 10분 쉽시다.
** 강의 들어가기 전 언급되었던 그림과 강의 중 자료는 첨부파일을 다운받으시면 보이니 참고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