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4장 51절 (동행) 241008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4장 51절 (동행) 241008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마지막 24장 50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일단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게 한 마디로 무슨 뜻이냐면, 이런 뜻입니다. ‘세상은 없다’ 세상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없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은 없어졌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인간이 거주한다고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녀가심으로써 주님이 계신 곳이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 바뀌는 거예요. 이것은 관심사예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인간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다녀갔던 그 세계에 주님이 다녀가셔서 결과로 내놓는 그 세계에 하나님이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은 두 개가 되었는데 두 개가 되었으니까 한 쪽은 접자는 거에요. 한쪽은 없는 거예요. 한 쪽은 없고 한 쪽만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51절을 보면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그 다음에 뭡니까? “저희를 떠나” 라고 되어있지요. 떠났지요. 예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가 분리된 거예요. 예수님이 함께 있다가 분리될 때 이 세상에 예수님이 계시는 데 홀로 하늘나라 갔다가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고 ‘한 분에 의해서 세상은 새롭게 창조되고 세상은 새롭게 파멸된다’ 이 말이에요.
세상은 뭐가 필요하냐? 한 분이 필요해요. 세상이 존재한다 있다 할 때는 “세상이 있네” 이러면 안 되고 어떤 분을 포함해서 계시냐를 물어야 세상이 있는 거예요. 주님이 계신 곳은 세상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창조 세계고 주님이 안 계신 곳은 뭐냐 하면 이거는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세상에 속합니까? 주님에게 속합니까? 주님이 홀로 올라가셨잖아요. 그럼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남아있는 세상에 속하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가 되냐 하면 ‘인간은 없다’가 되죠. 인간을 없애는 거예요. 인간도 없고 세상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라고 항의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안 될 이유가 있어? 네가 굳이 있어야 돼? 네가 사는 세상이 꼭 있어야 될 이유를 대봐” 그래 되죠. 이게 무슨 생각이냐면 이게 바로 예수님 한 분에 의해서 세상은 만들어지고 한쪽은 없어진다 이 생각이 무슨 생각이냐면 ‘성령의 생각’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의 생각이에요. 성령은 누구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죠. 예수님의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는 뜻이 성령의 뜻입니다. 봐주기 없어요. 그냥 주님의 뜻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생각은 뭐냐 하면 간단해요. ‘인간 제거’ 인간을 제거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면 모나리자 그림이 있어요. 별로 크지도 않아요. 큰 대작도 아니고. 방탄으로 막아놨어요. 어떤 분이 모나리자에서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얼굴을 이렇게 갖다 대면 어떻게 합니까? 모나리자 설명을 하는데 사람들은 모나리자 그림을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막 들이대면 어떻게 해요? 좀 치우죠. 성령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앞에 인간이 얼쩡대잖아요. 그거 치우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고 일입니다. 근데 소위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면서 누가 얼쩡거리죠? 주님 앞에. “본인이~” 각자 본인이 주님 앞에 자꾸 얼쩡거리는 거예요. “제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서 천국가나요 지옥가나요” 그 두상 머리 좀 이렇게 치워버리는 거예요. “우리 교회 언제 어떻게 부흥 되겠습니까” “좀 치워” “내 자식은 어떻게 수능 얼마나 잘 치겠습니까” 그런 것들 이렇게 그리스도 앞에서 치워버리는 겁니다. 제거예요. 인간 제거입니다.
인간이 궁금한 것은 세상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세상에 본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꾸 모나리자 앞에 얼쩡거리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들이대는 거예요. 자기 아쉬운 것을 하소연해서 응답 받겠다고.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인간도 제거하지만 뭐도 제거해요? 세상을 제거하니까 세상은 결국은 성령 입장에서 세상은 없는 거예요. 교회도 없고 나도 없는 거예요. 풀 나무 그거 다 없어요. 성령 앞에서. 오직 주의 세계 밖에 없어요. 이게 성령의 생각이고 하실 일이에요. 괜히 인간 눈치 본다고 다른 것 주워 넣지 마세요. 깔끔합니다.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생각에서 좀 발전해봅시다. 어떻게 논리를 발전하느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어요. 성령의 생각은 인간의 세상 제거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땅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이 말은 이 세상은 다시 와서 치워줄게 라는 말이에요. 세상은 주님 떠나버리면 치워야 될 대상이지, 희망을 걸 대상은 아니에요. 세상에서 희망 걸은 너도 없애줄게. 다 없애줄게. 이거를 근거로 해서 그러면 다음에 질문을 한번 던져보겠어요. 은혜란 뭐냐? ‘은혜(선물)’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은사.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준다 한다면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한테 없는 게 뭐 생기고 나한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한테 잘 간직해라 하고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은혜는 뭘 주느냐 하면 은혜만 줘요. 은혜가 주는 내용은 제거 대상이에요. 몸이 아픈데 은혜를 받아 건강하잖아요. 그 건강 제거 대상입니다. 없애버릴 거예요. 그 건강도. 은혜는 은혜만 줘요 은혜만. 은혜만 주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안 줘요. 은혜를 준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동행, 예수님과 동행입니다.
이건 좀 억지 예 같은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면, 에어컨이 없어서 에어컨 기사 불러서 설치한다고 합시다. 에어컨은 소비자가 설치하기가 힘들어요. “아빠 더운데 에어컨 언제 오는 거야?” “오늘 오후에 온대” “LG야 삼성이야” “물론 삼성이지” 이런거.. 그러면서 에어컨을 이제 설치했습니다. 애들에게는 오늘이 오후에 집에 에어컨 드디어 들어오는 날이잖아요. 그런데 설치기사가 에어컨을 설치하고 집에 가질 않아요. “집에 가시죠” “나 여기 살랍니다” 억지 예죠. 지금 에어컨이 문제가 아니고 왜 아저씨가 우리 집에 같이 산다는 것이 골치 아프죠. 우린 에어컨을 원했지 당신을 원한 게 아니라고요. 에어컨 기사가 “나도 그걸 아는데 네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해서 산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성령의 뜻이고요. 그 다음부터 귀찮아 죽겠어요. 집도 작은데 남의 식구까지 들어서니 귀찮아 죽겠어요. 이제 본인이 주인이 아니고 누가 주인이에요? 에어컨 기사가 주인 행세할 판이에요. 그게 은혜입니다. 이게 은혜예요.
이걸 구약에서 뭐라 하냐면 동행이라 해요. 에녹과 노아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도 뭐 동행한 사람 많지요. 지금 왜 제가 갑자기 동행 이야기 끄집어내냐 하면, 여기 49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니” 무슨 기사? 에어컨 기사죠. 뭘 원하는지를 몰라요. 내게 원한 것을 온다고 생각했지, 나를 제거하는 분이 온다고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오는데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누가복음 오늘로 끝나고 다음부터 사도행전 합니다. 사도행전 이야기가 누가복음 후속편이에요. 똑같아요 흐름이.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능력이 뭐냐면, 성령이에요. 에어컨 기사. 물건이 아니고 내가 여전히 주인으로써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꾸로 되어가지고 오실 그분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를 다루는 거예요. 약속하신 성령이 이게 구약에서는 뭐냐, 에녹과 노아입니다. 동행하는 겁니다. 그 뒤에 뭐 엘리야 엘리사 다 동행했죠.
구약에 미가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무심코 교회 가면서 성도들이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해요. 내 쪽에서 뭘 가지고 나가고 뭘 하면 되고 어떤 마음 자세로 하면 하나님 받겠습니까? 무심코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마음 이런 인간을 덥석 포크레인 집게 가지고 물 듯이 그냥 물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집게 가지고 물어서 내 손아귀에 집어넣는 걸 하나님은 원하는 겁니다. 7절에 봐도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참기름을 원할까 들기름을 원할까 뭘 원할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야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맏아들을 바치는 이 정도로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맏아들 없으면 누구를 바쳐야 되나 맏딸을 바쳐야 돼요? 무남독녀 외동딸 바쳐야 돼요? 요새 아가씨 같으면 뭘 바치겠습니까? 강아지를 바칠 거예요. 고양이나 강아지를.
“뭘 바칠까” 8절에 “사람아” 우리 말로 앞에 “이” 하나 더 넣으면 “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나니” 주께서 구하는 것은 뭐냐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데 그 인자와 공의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뭡니까? 행하는 것, 동행하는 것. 그러니까 공의와 인자는 하나님 쪽에서 간직하고 있는 공의와 인자가 제공되고 제공된 것을 그대로 그냥 회수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누가복음 마지막에 그 능력이 외부 능력, 자기 능력 아닙니다. 외부 능력 동행하는 외부 능력이 그들과 함께 온다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라고요? 성령이라고요 성령. 은혜라고 하는 것은 뭘 받는 게 아니고 은혜는 그냥 은혜만 받아요. 그 은혜가 뭐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거예요. 그게 은혜예요. 결혼을 하지 않는 총각 보고 “요새 누구하고 같이 살아요?” “예” “나한테 연락을 해야지” “나 요새 성령과 함께 살아요.” 많이 맞을 수도 있는, 밉상거리 되죠.
그래서 이 능력이 함께 오는데 그러면 이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52절을 한번 보세요. 보통 어려운 것이 많은 게 아니에요. “저희가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여기 예루살렘 나오죠, 왜 시작을 예루살렘부터 하죠? 대마도, 제주도부터 하면 안 됩니까? 왜 예루살렘부터 해야 돼요? 무슨 말이냐면 왜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야 성령이 오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왜 시작을 예루살렘이냐 말이에요. 강의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 했습니까? 뭐는 없다? 세상은 없다 했지요.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없는 거예요. 세상 없으면 인간 제거, 나도 없어요. 주님 우리 놔두고 혼자 갔기 때문에 혼자 갔다는 것은 남겨진 것은 제거된, 내가 와서 쓰레기 치울게, 기대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없애는 거예요.
여기서 세상은 없는데 예루살렘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세상이 없어질 세상과 주께서 새로 만드실 세상, 주님이 포함된 세상 주님이 없는 세상으로 나눠주시고 그 접착 지점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정하신 거예요.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왜 시작을 예루살렘부터 하느냐 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아무 데나 하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과 관련된 사항이에요. 성령의 일은 인간과 대결하고 자연과 대결합니다. 인간과 대결하는 이 본문 찾아라 하면 갈라디아서 3장 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말은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반드시 육체의 일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안 받는다 하나님께서. 왜? 제거 대상이니까. “헌금 기도 했습니다.” “아니 안 받는다니까 안 받어.” “천천의 기름과 들기름과 참기름 드리고 나의 죄를 위해서 맏아들 바치겠습니다” “안 받는다니까 그거 안 받어” “제 헌신과 봉사” “안 받는다니까” “제 회개” “안 받어” “그럼 뭐 받습니까?” “아무 것도 안 받어” “이거 미안스러워서..” “너 그 미안한 것도 안 받을테야”
제가 주일날 이런 설교했어요. 로마서 1장 16절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했지요. 인간은 뭐를 부끄러워하느냐, 복음을 부끄러워해요. “요새 혼자 살아?” “아니, 난 성령님과 함께 살아” 이게 대외적으로 웃사스러운, 인간 세계에서는 발설해서는 반칙이 되는. 전부 다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이야기에요. 이게 복음 이야기가 되어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대구 강의에 얘기했지만 나도 살리고 하나님도 자존심도 살리는 방식을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제거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덧붙여서 내가 구원받는 나의 실제 이익을 챙기는 거,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죠. 종교 단체. 종교 단체는 자기 손해 보는 짓을 안 합니다. 기도도 노동이니까 노동한 만큼 뭔가 결과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기름값 써가면서 교회 갔다왔는데 자기에게 뭔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걸 노리고 하는데 주께서는 안 받아요. 육체의 일이 성령의 일이 되려면 그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은 제거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령은 누구랑 대결합니까? 인간이랑 대결하죠. 이게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이에요. 서로 이쪽이 힘을 주면 저쪽도 힘을 준다는 거예요. 뉴턴은 그런 걸 봤죠. 일반인들은 그걸 상상도 못해요. 내가 이 테이블을 막 치는데 “술 내놔라 말이야” 문재인 딸처럼.. 주먹으로 술집 테이블 쳤을 때 술집 테이블은 그냥 일반적으로 맞기만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잖아요. 뉴턴은 그리 안 봤어요. 치면 네 아프잖아 만남을 통해서 이쪽 힘이 위치에너지가 압력을 가해가지고 내 손이 아프다는 거예요. 엄마가 애 때리면 맞는 애도 아프지만 엄마도 아파요. 성령이 인간을 대결하기 때문에 인간은 맨날 성령의 일에 대해서 공격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놔라 말이야,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은 또 뭐냐면 자연과 대립되어있습니다. 이거는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불로 나타나요. 떨기나무. 떨기나무가 자연과 대립됩니다. 분명히 불붙은 떨기나무는 타야 되는데 자연이 타질 않아요. 자연을 활용하죠. 불은 붙는데 자연은 타질 않습니다. 자연이 그대로 있다고 해서 그 자체 활용도는 소용 없고 주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다루어져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연은 가만히 두면 만유인력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대자연을 통해서 성령의 일을 안다? 모른다? 모른다, 왜?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아무리 과학적으로 물리학 과학 생물학 백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신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과학은 그게 문제입니다. 창조과학은 신이란 절대자란 개념을 해놓고 성령, 십자가 이런 건 하나도 포함 안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이 자연을 통해서 증명됩니까? 성령의 불로 오심을 자연과학 가지고 증명이 돼요? 안되잖아요. 그런데 무슨 하나님이 있어요? 대립 관계인데 가짜 신을 이거 유신론 철학인데 가짜 신을 만들겠지요. 절대자, 그러나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알 수 없습니다. 왜? 대립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럼 대립 관계에 있는 성령은 뭐냐? 약속하신 거예요. 약속하신 능력은 인간과 나와의 대립 상태이고 자연과의 대립 상태예요. 인간이 요청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왜? 예루살렘의 확장이에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의 확장, 예루살렘에서 무슨 사건 있었죠? 바로 십자가와 부활 있었잖아요. 예루살렘은 분명히 자연에 속합니다. 지리적 공간이죠. 그런데 성령의 십자가 부활 사건은 자연과 새롭게 생긴 이 세상과 주님이 포함된 세상과의 접합점이 뭐라고 했어요? 예루살렘이라 했습니다. 접함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세상 멸망 당할 세상 위에다가 삼포 혹은 살포하는 거예요. 퍼뜨리는 거예요. 북한에서 보낸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고 그냥 살포 흩어버리는 것, 덮치는 것 그게 약속한 자에게만 가는 풍선이에요. 그럼 약속한 사람은 그걸 곱게 받는가? 곱게 안 받아요. 왜냐면 아까 한 것처럼 모나리자 앞에 가는 사람을 치워버리듯이 성령은 우리 자아를 제거하는 능력이 있어요. 왜?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여기다가 십자가 사건 자체가 고요하게 갖고 있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겁니다. 제거하기 위해서는 동행하면서 일단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고 나중에 죽을 때는 우리의 육신을 제거하고 이래 제거하고 저래 제거하고 “영구 없~다”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끼리 만났을 때는 상대방의 육신 그걸 통해서 뭐를 해야 되냐면 주님께서 성도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을 제거하고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성도니까 성도는 성령이 있는 사람이 성도예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을 성도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실험해보세요 서로 부부끼리. 당신은 이야기할 때 자신의 뜻이 성령에 의해서 제거되고 제거되고 난 뒤에 나에게 주신 성령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이거를 보라고 각자 배우자한테 한번 이야기해봐요. “여보 당신이 갖고 있는 주님의 뜻을 한번 내보라” “곗돈 날짜가 언제였지?” 왜 제가 이 말을 드렸냐면요. 주님과의 동행은 날마다 주님 앞에 얼쩡거리는 나를 치워버리는 일을 해요. 주님과의 동행 있지만 무슨 동행 있냐면 인간과의 동행 있어요. 이거는 치워버리는 게 아니고 그냥 붙잡아요. 나를 떠나지마 제발 나를 버리지 마. 그런 식으로 붙잡는 거예요. 이번 15일날 곗돈 타는데 날 버리지마. 그래 되겠죠.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딸 붙들고 뭐라 합니까? “니 나 버리면 안된다” 아버지 유산은 다 큰 아들 이미 넘겨줬지만 너는 딸이니까. 그냥 붙드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붙드는 게 아니고 혹시 하나님 믿는 사람 있는가 붙들어요. 득 보자고.
그거는 그 사람 붙드는 게 왜 그러냐면 내가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이에요. 그 사람 덕 봐서 이용해서 나한테 손실이 없도록 발악을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을 의지하지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사건이죠. 예루살렘 그 주민들이 유대인들이 뭘 했습니까? 그들은 집결했고 단결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들이 괜히 그냥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미가 4장 1절에서 2절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몰리는 데 그 장소가 어디냐?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산이 어딘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서 나옵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잖아요. 예루살렘이 유대인에게 이거는 못 버리는 거예요. 전쟁하고 있는 지금 수도가 어딥니까? 텔아비브 아니에요. 예루살렘으로 옮겨놨어요. 미국 대사관도 예루살렘에 있다고요. 몰랐어요? 예루살렘이 지금 수도예요. 왜? 미가 4장에 지금 말씀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주님 한번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부터 나온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미 나왔잖아요. 예루살렘에서 일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지요. 그 다음부터 예루살렘에서 나올 건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에요. 그거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마가의 다락방부터 120명 모여서 기도할 때. 왜? 성령께서 이 미가 말씀을 달성해야 되니까요. 이 스케줄대로 따라야 되니까.
52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어디로 간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베다니는 뭐냐? 예루살렘의 근처 언덕이에요. 언덕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그 감람산 위에 가면 승천교회라고 예수님이 승천한 자리에다가 교회 세워놨어요. 그리고 거기서 축복 받고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 속으로 돌아간 거예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되어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과는 비록 헤어졌지만 이 멸망 받을 세상 인간 위에 주님께서 뭘 바가지처럼 붓는 게 있겠죠. 그게 약속하신 능력이 그들에게 부어진다는 거예요.
아직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게 중요한 게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선택’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능력이 임한 것은 선택된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갔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이방인들은 관련성이 있습니까? 관련성이 없어요 이방인들은. 이게 상당히 어렵진 않은데 복잡해요. 예루살렘은 여기 분명히 아까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에서 다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면 본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예루살렘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그걸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시작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하니까요.
말라기 1장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하는도다” 여기서 이방인이 끼어듭니까? 안 끼어듭니까? 이방인이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자기한테 적용시키려 하는데 이거는 반칙이에요. 이거는 이방인들은 해당이 안 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되어있어요. 이것은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 말을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사랑한 자만 사랑하고 그 외에는 미워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어렵지요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날 사랑하고’ 이렇게 하니까 성경 말씀이 전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버림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안되는 겁니다. 특별히 사랑한 거예요. 특별히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버렸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사랑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군의 자손은 좀 빠지세요. 단군의 자손은 중국 계통이나 일본에.. 좀 빠지라고 그런 사람들은 해당 사항 없어요. 필리핀 사람도 마찬가지고. 말라기 이거를 자기한테 적용시켜가지고 말라기 3장 7절을 한번 볼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간다 그 말씀 나오잖아요. 이게 이방인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하나님과 자기들 이야기라니까요 우리는 해당이 안돼요. 이거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자.” 남의 종교에 왜 돌아가요? 우리는 단군의 하나님 있는데.. 물론 지옥 가지만.
그 다음에 이르기를 3자 7절에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잖아요. 말라기를 제가 펼친 이유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로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은 그 자리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 이방인들은 여호와께 못 돌아갑니다. 왜? 어두움에 있는 자가 무슨 수로 어두움을 뚫고 여호와를 믿어요? 인간은 하나님을 못 믿는다니까요? 하나님을 만들어내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들어내지 돌아가지 않습니다. 돌아갈 거 뭐 있어요? 지가 만들면 되지요. 엄마는 아이에게 인형을 못 만들어줘요 돈 주고 사면 돼요.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갑니까? 쫓겨났는데. 못 돌아가요. 그래서 그 당시에 이미 제사장 언약을 위반한 유대인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 방법이 나와요. 그거 때문에 제가 말라기를 펼쳤습니다. 4장 6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되어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죠? 바로 누구냐 우리 지금 오랫동안 누가복음 해왔죠. 누가복음 1장 17절 말라기에서 이제 누가복음으로 갑니다. 말라기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돌아오라 했는데 인간들이 뭐라 해요? 어떻게 돌아갑니까 했죠? 바로 세례 요한을 보내는 거예요. 그럼 이제 물어봅니다. 세례 요한 보내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한 하나님께 돌아오는 거예요? 아니면 예수님께 돌아가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세례 요한이 누구의 선지자예요? 세례 요한 뒤에 오실 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 아무도 못 알아보는 하나님. 아무도 못 알아보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말라기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겁니다.
이렇게 복잡해요. 누가복음 1장 17절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죠. 이게 말라기 예언대로 되었죠. 그런데 이게 뭐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라 되어있죠? 이 능력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세례 요한의 엄마에게도 성령이 임하고요. 아버지 사가랴에게도 성령이 임해요. 누가복음 1장 67절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이르되” 아까 처음 강의할 때 했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냐? 그 앞에 좀 치워라 하는 거죠. 사람은 입을 다물었어요. 갑자기 벙어리가 됩시다 합죽이가 되어버렸어요. 김희갑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이 있는 사람만 알아요. 갑자기 사가랴가 말을 못해요. 입은 있는데 말을 못해요 이게 성령한테 제거가 되어버린 거예요.
또 누구냐 하면 1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때 엘리사벳이 41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큰 소리로 축복하고” 마리아한테 애기한테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증거하는 건 뭡니까? 약속하신 분은 따로 있다. 우리의 육신으로 우리가 말씀을 지킨 게 아니다. 약속 모든 걸 다 이룬 분은 따로 있어서 주님께선 그 세계에 내가 너를 넣어줄게 너는 그와 합류되면서 지금부터 너는 나와 함께 가는 거야 그냥 가는 거야 동행하는 거야. 이 동행의 티, 동행하는 그 구현하는 모습 이것을 바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이것이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