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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1017b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1017b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존재의 사건화’라 했어요. 존재의 사건화. 이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했거든요. 인간들이 미워한 것을 모아서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인간들이 미워했음에 대해서 그걸 미움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극한적인 미움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걸 만들어버렸죠.

피조물이 하는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은 그걸 극단화시켜버려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돼요.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철조망 쳐놓으면 될 걸 가지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약을 실컷 올려놓고 따먹었다고 내쫓고 그거 반칙 아니냐?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나중에 십자가 지시고 그런 골치 아픈 절차를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으로 처음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든지, 안 그러면 아예 심어놓지를 말든지 그러면 인간들은 안 망하고 하나님과 평화롭게 살 수 있는데 왜 선악과 따먹게 해서 이렇게 노출되게 했느냐?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는 일을 하나님 안에서 극단화시켜버려요. 하나님 스스로. 조금 미워해도 ‘절대적으로 미워했다’로 해석해버린단 말이죠. 그건 피조 존재를 하나님 자신이 희생당하는 십자가 사건에 필요한 소스, 재료로 끌어당겨서 그래요.

인간은 조금 미워했지만, 하나님은 많이 미움 받은 걸로 그렇게 간주를 해놓으셨다는 말은 이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요.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도 나오죠. 여기 사랑이란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11절에 나오죠. 사랑이 나온다고요.

십자가 상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이 주님을 미워했다. 미워한 거 맞잖아요. 미워했으니까 돌아가셨죠. ‘우리가 미워했는데 주님은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건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개별적인 존재가 천국에 들어오는 이런 불상사가 생겨버립니다. 천국에서 우리 이름은 주의 이름에 예속된 이름이 되어야 돼요. 주의 이름의 일부가 되어야 되지, 내 이름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내 존재는 주님 존재에서 뻗어 나온 가지다. 이 가지 하나하나가 사건화 되어서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주님의 이름만 찬송하고 받은 면류관도 주의 이름 앞에 던지게 되는 계기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자신이 받은 미움을 극대화시켜버리면, 여기서 나온 능력도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상처 주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주님을 밉게 하는 일로 해석이 우리에게 도달되어야 되겠죠. 그런 해석이.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 이거 담당이에요. 인간을 사건으로 전환하는 담당자가 옵니다. 그걸 보혜사, 성령이라 하죠. 성령이 오게 되면 요한복음 16장 8절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뭐한다? “책망하시리라”

책망한다는 것은 앞으로 잘하라는 게 아니고, 죽을 때까지 책망을 받는 거예요. 성령으로부터. 왜? 이미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책망도 사랑은 그 책망을 너끈하게 능가하는 죄 사함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우리는 책망 받으면서 기쁨과 감사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책망 받으면서 나오는 것은 감사죠. 책망 받음에서 나오는 것은 감사입니다.

그럼 책망은 왜 하느냐? 인간의 존재성 때문에 그렇죠. 존재를 사건화 만들기 위해서. 이 사건의 적은 뭐냐? 내 존재를 존재라고 꽉 움켜쥐는 것, 이게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미움으로 그렇게 간주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주님, 오늘은 어느 쪽을 먹어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 ‘너 죽을래?’

네가 뭘 먹든 그게 십자가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이 말이에요. 아무거나 먹어. 아무거나. 네가 아무거나 먹고 네가 뭘 해도 너에게서 나올 것은 나에 대한 죄밖에 안 나온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먹어. 짬뽕 먹고 죄 지을래, 짜장면 먹고 죄 지을래? 뭘 먹어도 나오는 것은 한결 같이 죄이기 때문에 네 마음대로 잡수세요. 네 마음대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내가 유럽에 가는데 독일 갈까, 프랑스 갈까, 영국 갈까? 아무데나 가. 어디가도 죄니까. 네가 프랑스 가면 내가 찾아갈 거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거야. 독일 가도 마찬가지야. 독일 가도 마찬가지에요.

요한복음 16장 9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존재가 개별자가 되고 개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모든 선악은 본인 존재를 존재로 유지하기 위해서 환경과 조율하면서 그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주는 거예요. 반응을.

한국에 있으면서 김정은이 나쁘다 하는 인간을 김정은이 초청해서 ‘목사님, 우리 평양에 오시렵니까?’ 평양에 가니까 호텔에 여자 넣어주고 그다음부터 용돈도 주고 쇼도 해주고 하니까 갑자기 김정은에 대해서 어떻습니까? 남한에 있다가 어디로 갔어요? 환경이 북한으로 바뀔 때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사진도 같이 찍고 하죠. 그거 왜 그렇습니까? 내 존재가 존재로 환영받고 유지되는 이것이 선이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김일성, 김정은 욕하는 것이 표를 많이 얻는 내 선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늘 이렇게 회까닥하는 거예요. 상황 봐서 그때그때 달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인간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존재는 근거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음’ 그것뿐이고, 왜 있음? 모르겠음. 너는 오늘 왜 있었는데? 모르겠음. 내가 왜 있는지 모르겠음.

아무 이유도 없이 무의미한 채로 그냥 시간만 소비하고 있어요, 그냥. 모든 인간이 다. 계속 시간 소비하고 있어요.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 내년되면 또 바뀌는데? 떡국 먹고 한 살 또 바뀌는데?” 늘 바뀌어요. “도대체 당신이 42에요, 43이에요?” “올해는 42이고 내년에는 43이고.” “어느 게 맞습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나중에 죽게 되면 그다음부터 나이가 중지돼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것은 중지되는 나이에 대한 예비단계죠. 예비단계에요. 종결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종결된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종결된 적 없고 그냥 무작정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데, 그 미래가 점선으로 되어 있거든요. 실선으로 가다가 점선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점선에 대한 무지, 모름. 모른다는 말은 앞의 실선도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이것도 몰라요. 노벨상 타고 그 다음날 자살했다. 이거 뭐에요? 노벨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게.

나의 일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진짜 근거 있는, 영원한 근거 있는 존재자, 주님의 사건화 된 사건의 모습으로 나는 하루하루 주께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살려주셨다 이 말이죠.

그럼 십자가 사건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십자가 사건 다음에 주께서 하신 일이 뭡니까? 부활이죠. 십자가 사건에서 부활이 나올 때, 모든 인간이 십자가 사건에서 사건화 되어버리면 여기서 두 가지의 부활이 나와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처럼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또 하나는 뭡니까? 심판의 부활로.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로 나왔으니까 단독적 인간, 개인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죠. 주님의 십자가 사건화 된 인간들만 있고 두 부류로 나뉘어져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어요. 골라잡아 잡아, 할 것도 없어요. 이미 다 분류가 된 상태의 두 종류 인간만 부활되기 때문에 이 부활을 다시 거꾸로 십자가 안에 집어넣으면 십자가 사건은 심판이고 구원입니다. 심판이고 구원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심판과 구원은 일방적으로 하나님 권한이에요. 뭘 통해서? 피조물에게 일어났던,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마귀도 포함됩니다, 피조물을 통해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선 그걸 자기 사건화시켜 버립니다. 자기 사건화. 일방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근거에다 그들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일서에 아까 성령 이야기 있잖아요. 요한일서도 성령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보혜사가 너희에게 찾아왔으니”라고 되어 있다고요. 보혜사가 찾아왔다는 것은 네 존재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새로운 환경이 생명의 부활이라는 환경이 너를 덮쳤다는 거예요.

너를 덮쳤으니까 더 이상 네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서 네가 관심 둘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관심 둘 이유가 없고, 이 행동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꽁꽁 묶겠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일도 십자가 사건과 관련지어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일도. 성도한테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죄 사함의 능력이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자체가 영원한 근거가 도달했다는 거예요.

불신자한테는 성령이 안 오잖아요. 그들은 뭣도 모르고 개인위주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책망을 누가 해요? 자기가 환경보고 선과 악을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남한에 있을 때나 북한에 있을 때 자기가 어느 것이 내 존재를 유지할 수 있고 존재를 건사할 수 있고 존재를 지킬 수 있을까. 그것만 통밥 굴리면서 계산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해에 보면 보리암(菩提庵)이라는 절이 있답니다. 암자라 할 수 있어요. 보리암이니까. 남해 보리암이 유명한데 대구 갓바위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경치도 좋을뿐더러, 경치가 아주 좋대요, 또 기도가 그렇게 잘 된다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불교 신자가 자기 죽은 조상, 그것도 불자(佛者)를 여기다 맡겨서 사십구재 장례를 치렀어요.

맡겨놓으니까 그 보리암 주최 측에서 이야기하는 게 그냥 사십구재 예배 드려주고 제사 드리면 되는데 이 죽은 영혼이 사십구재 떠돌다가 이제 구천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날 목욕을 하고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목욕비를 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목욕비를 냈죠. 목욕비를 내니까 이번에는 그냥 가지 말고 말 타고 가야 죽은 세상에서 대우 받는다고 말 타는 비용을 내라는 거예요. 뭐 놀이동산도 아니고.

지금 이 보리암이라는 불교 처세, 행동에서 근원적인 문제점이 뭡니까? 여기 불자라는 사람이나 중이나 모두 다 개별자에요. 개별자.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본인들이 신이에요. 자기 존재를 위해 저 사람을 이용해서 얼마나 빼먹는가,에 모든 걸 다 쏟죠. 상대의 약점을 노리면서 죽은 귀신 붙들고 이용해가지고 돈만 빼먹고 자기 존재를 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외에는 없습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해야지, 저들은 뭐 하나님도 안 믿고…. 그럼 교회는 하나님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죠. 자기의 기도를 믿고 자기 헌금을 믿잖아요. 무슨 십자가를 믿어요? 십자가를 믿으려면 능력이 와야 돼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그 책망은 아주 극단적인 책망이에요. 자기는 짬뽕만 먹었을 뿐인데 짬뽕 먹은 것도 죄가 되는, 그것 또한 주님에 대한 미움이 되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리는 거예요. “왜 먹었어? 왜 먹었어!” “배가 고파서 먹었어요.” “네가 배불러서 뭐하려고 하는데? 네 존재를 확고히 하려고 한 거 맞지?” “맞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사건화 되라 했어, 안 했어? 네가 이미 부활에 들어갔다는 걸 알아, 몰라? 응?”

나는 너에 대해서 탓하지 않아. 하지만 네 속에 십자가의 정신과 위배되는 것은 놓치지 않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나님 하시는 걸 내 것으로, 내 존재를 강화시키는 보험 들어놓는 식으로, 나를 사수하고 지키고 보호하는 식으로 성경말씀 인용하고 그걸 자기에게 끌어당기는 것, 그건 주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에이, 목사님. 그건 복음 모르는 불신자들이 하죠.” 우리는 돌아서면 불신자 돼요. 말씀들을 때는 또 이상하게 pretend, ~인 척 이렇게 되죠. as if, ~인 것처럼. 그러나 돌아서면 전부 다 불신자 돼요. 불신자 된다고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화를 위해서 구약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중심의 일들이 어떤 경로로 주님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낳았는지 구약 한 구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구약 사사기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사사기 19장 29절. 19장 25절 한 절 읽고 그다음 29절 읽겠습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27, 28절에 그 주인이 보고 떠나자 했는데 여인이 죽었으니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29절,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열두 토막 살인사건이에요. 레위인이 자기 첩 시체를 열두 토막 내어서 각 지파마다 택배로 다 보낸 거예요. 새벽탁송으로 다 보내버렸어요. 왜? 바로 정의구현을 위해서. 20장은 없다 치고 19장까지 딱 봤을 때, 그 다음 이야기는 한강 작가한테 맡겨야 돼요. 자, 이럴 경우에 어떤 조치가 있는가? 한강 작가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내용이 20장에 나옵니다.

누가 정의래? 누구야? 누가 정의를 외쳐? 피해 입었다고 정의를 외칠 권한이 있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피해자가 되었다고 정의를 외칠 권한이 있어? 다시 말해서, 도대체 이 세상에 피해자라는 게 성립이 되냐 이 말입니다. 피해자라는 게.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사사기 21장 25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소견이 되려면 소견은 어디서 나오는가? 개인이 개별자일 경우에만 소견, 개인의 의견이 나오는 거예요. 개별자에서 나오는 거예요.

피해를 입었으니 복수를 해달라고 열두 지파에 호소를 하는 것은 이게 정의의 이름처럼 들리죠. 그리고 그 택배를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탄식하고 개탄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율법이 살아있는 나라가 이 지경으로까지 윤리 도덕이 나락으로 떨어졌는가. 이것은 참으면 안 되지. 다 같이 분기 내어서 일어나야 돼. 그리고 그 범인을 색출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다수가 여기에 대해서 손을 봐야 된다.’

이건 뭐냐? 집단주의죠. 개인주의가 합치면 집단주의 되고 집단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다 모여 있죠. 개인의 집합이 집단이에요. 집단의 부분집합이 개인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전부 다. 개별자 의식이 공유되면 집단이 되는 거예요. 바벨탑처럼. 여기에는 뭐가 흐르는가? 각자 개인이 갖고 있던 힘의 논리만이 작동합니다. 힘의 논리만이.

그런데 사사기 20장 내용 다 아시죠. 정의를 외쳤던, 누가 봐도 정의의 심판자로 자처해도 충분히 무방한 베냐민 지파 외에 나머지 지파들이 베나민 지파한테 아주 작살납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개별자에서 끄집어내는 그러한 정의, 그러한 공의는 하나님 앞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정의를 정의라고 받지 않아요.

사사기 21장 25절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할 때, 여기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 소견대로 했다면 왕이 있다면 이건 어떻게 됩니까? 왕이 있다면 개인의 소견대로 행하지 못할 환경이라는 거예요. 왕이 있는 새로운 환경이 오게 되면 왕의 의견 앞에서 더 이상 개인 의견은 성립될 수 없는 환경을 미리 여기서 내다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심판이에요.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 대한민국과 똑같아요. 이 세상 82억 인구와 똑같아요. 각자 소견대로 해요. 소견대로. 군에 가도 탈영을 하지 않나. 북한군 이야기입니다. 김정은이고 김일성이고 없어요. 자기가 죽을 판인데 도망칠 수밖에 없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뭐가 없느냐? 품이 없어요. 포근하게 안기는 품이 없어요. 품에 대해서 시편에 잘 나옵니다. 시편 131편에 보면 1절부터 3절밖에 안되니까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어때요? 이 시가 한강 시보다 훨씬 낫죠? 한강 시는 뭔가 해답을 얻고자 하는 거고 이것은 이미 해답을 얻은 이후에 평화로움 속에 나오는 시잖아요. 찬미잖아요. 찬미. 3절에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제넘게 내가 끼어들지 말게 하옵소서. 이미 근거 있는, 철회될 수 없는 확정된 그 일, 사건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 늘 움직이고 있음을 감사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시편에서 비슷한 내용인데 숫자가 서로 바뀐 게 있어요. 하나는 시편 37편과 또 하나는 시편 73편. 외우기도 쉬워요. 삼칠, 칠삼. 우선 시편 37편부터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아까 분명히 제가 언급했습니다. 영생의 부활이라는 집단, 그리고 심판의 부활이라는 집단, 두 개의 집단화된 그 집단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능력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거기에 모인 거예요. 사건들이. 다수의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의 존재로 인해 발생된 사건의 혜택, 은택을 입은 선물 받은 자들, 은사를 받은 자들의 집합이 영생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에요.

성도끼리 존재를 다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코가 눈더러 눈이 발더러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발은 발대로 하는 일이 있고 코는 코대로 하는 일이 있는데 네가 왜 탐을 내느냐.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 이야기할 때 그렇게 된 거예요.

키 큰 DNA로 키 큰 사람, DNA상 키 작은 사람 다 있는데 키 컸으면, 맨날 키 컸으면 하고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거예요. 키 커서 뭐할 건데? 그게 일대 일로 비교하고 자꾸 대조를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모든 정신병은 대조에서 오는 거예요.

누구의 대조?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나의 대결 중에 거기서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상처 입은 것이 크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아버지면 아버지지, 나를 왜 학대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아버지니까 나한테 꼼짝 마라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아버지의 명예를 위한 희생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내가 아버지 같은 인간되면 내가 진짜 죽는다. 아버지를 원한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아버지가 나중에 치매 걸려가지고 ‘야, 나 아프다.’ 연기하면서 올 때, 연기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지만. ‘나 너 아니면 못 산다.’ 이러고 기어들어오거든요. 혼자서. 그때 복수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잘해주면 되죠. 드디어 난 아버지 자리를 빼앗았어. 아버지가 이제 나한테 빌빌거려. 그걸 또 아버지가 눈치 채서 안다고요. 개코도 돈도 없으면서 또 아버지라고 큰 소리 친다고요. ‘너 나 무시하지?’ 가끔 술 한잔 먹고 들어와서 ‘너 나 무시하지?’

이건 뭐 끝까지 아버지의 위세와 권위를 유지하려 할 때, 도대체 남한테 보탬이 안 돼. 도움이 안 돼. 일평생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자기 개별자 때문에.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그 개별자 의식 때문에 그래요. 왜? 자기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외에 다른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의 나 됨의 유일한 근거가 내가 남한테 밀리지 않는 그 근거.

그래서 여기 37편에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존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심판의 대상, 저주의 대상으로 나중에 사건화 되고 발각될 거예요. 존재를 존재로 보지 말고, 사건이 뭉쳐져 있다고 봐야 돼요.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건이 아, 저런 모습이구나.’ 그걸 그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73편. 73편은 아주 노골적이에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뭘 깔아놨어요? 왜 미끌어져요.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그다음 뭡니까? “질시하였음이로다” 질시했다. 질투했다는 거예요.

질투라는 것은 대비하고 대조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는 좋은 인삼 뿌리 먹고 나는 이게 뭐야? 무 뿌리 먹고 이게 뭐야? 4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거 우리의 소망 아닙니까? 이런 게. 돈 되고 건강 되고. 나이 많아서 돈 되고 건강 되면 재앙 없고 말썽 없고 다복하고 행복하고. 더 뭐 집어넣을 내용이 없죠? 뭐가 없습니까? 책망, 성령의 책망이 없죠. 잘 되니까 잘 된 만큼 자기가 잘 된 것 가지고 단독자, 개별자, 개인으로 나설 때 그걸 교만이라 해요.

교만이 목걸이가 된다. 6절, “교만이 저희 목걸이”가 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목걸이가 있는데 안에 글자가 있어요. ‘교만’. 나 대단해, 이거. 교만이에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자기의 안정됨에서 뿜뿜 뿜어져 나오는 그 힘으로 자기 옷을 해 입고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눈 튀어나온 것도 문제다, 그쵸?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자, 이것이 구약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한계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개인이 개인적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본인이 기준을 만들어요. 정의로움, 사랑, 자비 이 모든 것이 개인이 잘 될 때 그게 선이고 그게 잘 될 때 그게 정의로운 일이며, 본인이 못되면 그건 불의한 거라는 인식. 이 개인의 인식을 아까 그 사사기 마지막에, 그들이 뭐가 없으므로? “왕이 없으므로” 생긴 마땅한 결과는 소견대로 사는 거예요. 개인플레이를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즘은 왕이 계십니까? 소문 듣기는 그리스도가 왕이라면서요. 소문에. 그런데 행동하는 거 보면 개인플레이잖아요. 어디가 잘못된 거예요? 왕이신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뭔가 전달되는 게 없어 그래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요한복음 16장 그 대목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같은 말. ‘너의 개인적인 죄 인식으로 인하여 주님이 결정해놓은 죄가 가리워진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결정한 죄’는 뭐냐? 주님이 결정한 죄는…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한테는 새삼스럽게 선과 악이 없습니다. 선해도 그것 또한 죄고 악해도 역시 죄고. 이게 주님이 보시는 결정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속에 자체적인 선악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선악기준은 어떻게 만들어냈습니까? 환경 따라 그때그때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면서 선악기준을 삼으니까 이건 구차한 핑계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요. ‘아주 악하진 않았잖아. 우리 자식새끼 먹여 살리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나?’ 이런 식으로 자꾸 변명조로 나오는 거예요.

그 개인적인 죄 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을 때, 주님의 죄 의식으로 이것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것을 책망한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죄 의식으로 책망 받는 거예요. 책망 받는다면 이미 이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제가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자기한테 관심 두는 것이 죄라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것이 의다. 내가 잘했다, 못했다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주님 주신 선물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죄 사함의 선물이에요. 책망조차도 선물이에요. 감사하죠.

흉년이다. 뭐 어쩌라고? 배추 값 올랐다. 뭐 어쩌라고? 배추 값 오르면 배추 안 사먹으면 되지.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사업이 안 된다. 무슨 개인적인 사업이 어디 있어요? 주님 십자가 사업밖에 없죠.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나한테 또 달려들 거야? 나를 또 미워할 거야? 이렇게 되죠.

그다음에 “의에 대하여” 다 같은 말이에요. 죄나 의나 심판은 전부 다 한 사건에서 파급되고 파생된 거예요. 십자가 사건에서 파생된 겁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뭘 해도 죄인이다. 왜? 나만이 아버지한테 가니까. 사요나라. 잘 있거라. 바이바이. 너희들 놔두고 나 혼자 간다. 너희들은 아버지와 합류할 수 없어. 죄인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의에 대하여 책망하는 거예요. ‘그렇죠. 주님만 의인이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을 심판했던 그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 자, 임금 나와요. 아까 사사기 마지막에 뭐가 나온다 했어요? 왕 나오죠. 이제 그것만 설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왕.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은 자. 이스라엘에서에요. 이방나라 임금 말고 이스라엘에서 왕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모든 개인은 왕에게 종속, 예속됩니다. 예속되는 방법은 어떻게 되느냐? 왕이 없을 경우와 왕이 있을 경우 어떤 차이인가? 왕이 없을 때 하나님과 통했던 것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있을 때는 대제사장이 왕 밑에 가요.

그 말은 대제사장, 레위 언약의 결과가 각자 자기 소견대로 나와 버렸어요. 그만큼 이 제사장이나 레위지파에 대한 대우가 시원찮았다는 거예요. 관심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사사기 시대에 이방나라 따라 하기가 너무나 유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나라 따라 하기.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섬기는데 그들은 아주 매진했어요. 경쟁적으로 바알을 섬겼습니다. 경쟁적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새로운 환경이 주는 새로움의 매력을 고사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에요. 새로움이 주는 매력. 그럼 어떻게 돼요? 레위 제사법은 다 구닥다리다. 옛날식이다. 지겹다는 거예요. 제사도 지겹고 다 지겹다.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개인 의식, 개인주의 의식에서 발생된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뭐 기쁠 것도 없는데 무슨 하나님을 기쁘게 해. 그러니까 점점 더 기쁜 것을 향하여 가는 거예요. 기쁜 것은 어디서 제공했는가? 바알 종교에서 기쁜 것을 제공한 거예요. 그 종교는 내 행함에 대해서 보람을 주는 종교거든요. 빌고 바치면 나한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는 뭐냐?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는 거예요. 양들을 죽이니까. 율법에 의해서 죄 지으면 와서 양 잡아라. 양이 계속 죽어나가는 겁니다. 짜증나는 거예요.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사사시대에 엘리멜렉 가정이 자기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갔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나라가 이러니까 인간 중에 왕이 있어요, 없어요? 왕이 없어요. 왕이 없으니까 왕을 수입해야겠죠. 어디서? 모압에서. 모압에서 여자를 수입합니다. 수입한 여자가 누굽니까? 바로 “룻에게서”. 룻에게서.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나오잖아요. ‘기생 라합에게서’.

다윗 왕의 특징은 뭐냐? 이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의 선악기준을 무효로 돌리고 독단적인 새로운 선악기준으로 제사직을 장악하고 제사직에 관여해버리죠. 제사를 관여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양 잡고 소 잡고 형식적으로 염소 잡는다고 이게 지금 제사의 취지가 사는 게 아니에요. 취지가 살지 않고 이 양이 아니라 양을 대신한 인격자로서 기름 부은 왕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 거기에 따라서 제사와 상관없이 이 왕 나라는 외세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요시아 또는 히스기야 같이. 왕 하나 잘되니까 보세요. 여호사밧 같이. 왕 하나 잘되니까 나라가 태평하잖아요. 솔로몬의 경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발생돼요, 유다 나라에서. 솔로몬 하나 잘되니까 나라가 부강하기를 극한에 이르렀죠. 이 언약이 다윗 언약이에요. 왕 하나 제대로 돼서.

그러면 이 왕 자리에 제사의 취지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왕이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돼요, 왕이. 단독입니다. 단독. 단독으로 서게 되면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심판하시고, 왕은 그 심판 앞에서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 관계에요.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하나님께 용납이 되는 왕.

어제 수요일에 말씀한 것 있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다음에 뭡니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이에요. 이 철회할 수 없는, 철회되지 않는 영원한 확정된 구원의 근거에서 성령이 와버리는 거예요, 성령이.

그러면 왕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으로서 모든 죄 사함이 되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화목제물이 되니까 죄가 해결되죠. 죄가 해결되고 난 뒤에 해결된 상태에서 그 상태의 능력이 임해버렸어요. 그럼 이건 예수 안에 예수 사랑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생긴 거예요. 환경이 생긴 거예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는 죄가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 되죠. 예수 안에 죄가 성립되어버리면요, 예수님 십자가는 헛되이 죽은 거예요. 이쯤해서 여러분 볼 대목이 있죠. 갈라디아서 2장 21절.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크게 외쳤다 하는데 우리도 다른 데 방해되지 않는 한 크게 한번 외쳐봅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네가 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건드리느냐? 네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간 존재된다는 그것이 얼마나 십자가를 모독하고 가리고 건드리는 일인 줄 네가 아느냐, 모르느냐?’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여기 “율법으로 말미암으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율법에 대해서 시편 119편을 봅시다. 119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율법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죠. 5절,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절에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쭉 나오고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그다음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게 전부 다 뭡니까? 하나님이 요구하는 율법이죠.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이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아까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뭐를 헛된 것으로 돌린다? 십자가죠.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율법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주님 십자가에 관련이 없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이 와서 책망한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게 없다는 거예요. 죄든 의든 심판은 누구 담당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 담당으로 이미 다 확정된 거예요. 철회되지 않는 근거가 있는 거예요. 철회되지 않는 근거.

그럼 성령이 찾아온 우리는 뭐냐? 그 철회되지 않는 근거 위에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그 품에 안기어~ 그 품에 안기면 되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푹 안기듯이 주님 품 안에서 십자가의 그 은혜 안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 바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3:6)

이 말은 그리스도에 속한 부류가 있고,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으면 마귀에 속하죠. 마귀에 속한 자, 처음부터 그들은 뭘 해도 죄가 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되어 있어요.

이 요한일서와 쌍둥이처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같은 뜻을 전하는 요한복음 3장 이 본문 읽고 마치겠습니다. 3장 20절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그다음에 어디서 행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이 하신 존재의 사건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 믿는다 하는데 도대체 뭘 믿었는지. 하나님을 안다 안다 하면서 무슨 근거를 알았는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근거를 우리가 만들지 말고 성령에 의해서 그것이 파괴되고 십자가만이 철회되지 않는 영원한 근거로서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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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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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