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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1017a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1017a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3절부터 하겠습니다.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하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지금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서 이 말씀을 성도한테는 굳이 줄 이유가 없이 되어버렸어요. 이 말씀 내용자체가.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깨끗하고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는데, 성도라는 자가 만약에 죄를 짓고 깨끗하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에 위반되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방치했다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죄 짓지 않게 했으면 죄 짓지 말라는 말을 성도한테는 굳이 할 이유가 없죠. ‘네가 열심히 하라’ 지금 이런 쪽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네가 범죄하지 않도록 내가 조치했다.’ 그럼 성도는 ‘고맙습니다.’하면 끝나는 문제죠. 뭐 깨끗하라든지 죄 짓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고요. ‘형제를 사랑하라’ 이런 말도 필요 없어요. 주께서 형제 사랑하도록 해주시겠지. 내 일 아니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이걸 한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무리에요.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켜줘서 죄 짓지 않는다는데 왜 굳이 깨끗하게 살아요?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말을 성도가 들으면 “저보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쪽 가서 이야기하라고요. 우리는 해당사항도 안되는데 왜 굳이 우리보고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앞뒤 논리가 그래요. 논리가.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오케이. 범죄 안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잔소리하지 말라고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로 알 테니까 우리한테 그렇게 잔소리할 필요 없다. 죄 짓지 말라는 이야기도 우리한테는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안 듣겠습니다. 우리가 죄 지을 가능성이 있으면 이 이야기를 듣겠는데, 죄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이 이야기를 성도보고 할 이유가 뭡니까?

더 심하게 말해서, 성도는 죄 짓고 싶어도~ 죄 짓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죄가 안 되도록 자꾸 조치를 했으니까, 죄 짓고 싶은 성도의 희망과 뭘 해도 죄 안 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께 적용시킨다면 여러분들이 이래야 돼요. 목사님, 죄 지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서 ‘네가 방금 한 행위는 죄 아니다!’ 이러고 가니, 죄 짓는 나는 할 맛이 안 난다 이 말이죠. 죄 좀 지어보려 하면, 이건 분명히 죈데 주님께서 나타나서 ‘그거 죄 아니다~ 내가 죄 아닌 걸로 조치해놨어.’ 이렇게 된단 말이죠.

학교에서 재벌4세가 같은 반에 있는 좀 어리버리한 애를 쥐어 팼어요. 학교 폭력이 되니까 교무실에서 ‘너는 퇴학이야. 교육청에서 와서 너 문제 삼을 거야.’ 했는데, 그날 오후 아버지가 다녀가고 난 뒤 담임선생님한테 ‘저 죄 많이 지었죠?’ 했더니 ‘너 죄 아니다. 끝났어.’ 아버지가 아마 사립학교 후원금을 많이 낸 모양이에요. 애는 피투성이 돼서 지금 병원 가 있는데 다음 날 깁스하고 왔는데 죄 아니래.

그러면 이런 정황이 재벌4세에게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무슨 의미냐? 이 의미입니다. ‘개인은 없다.’ 개인은 없다는 거예요. 구약부터 신약까지 하나님은 개인을 개인으로 다룬 적이 없어요. 개별자를 개별자로 다룬 적이 없습니다. 개별자를 다룬 것은 누가 했냐? 마귀가 와서 그때 생긴 인식이 나는 개인이라는 인식이에요.

개인이 생겨버리면 그 개인에게 관심사가 주어지겠죠?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는 자기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뭐냐? 나에게 무관심한 것,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러한 관점을 여러분 장착하시고 요한일서 3장을 다시 보시면 죄라는 이 사실이 개인이 잘못을 했을 때 죄가 되는 게 아니고요. 죄란 개인이 자기에게 관심 두는 것이 바로 죄라 했습니다. 자기에게 관심 두는 것. 자기 영광에서 인간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자기 영광에서 못 벗어나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한테 관심 두게 되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철회할 수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철회할 수 없어요. 개인이 자기 영광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여러분들이 성도니까 이게 뭔가 싶어서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성도 아니라면 주무셔야 돼요. 성도 아니면 주무셔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일이 상상을 초월해요. 인간이 24시간 자기에게만 신경 쓰고 관심 두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선악 기준은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 바짝 긴장하면서 하루 종일 살아가거든요.

인간의 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에게 관심 있기 때문에 자기 실수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게 죄에요. 자기 실수에 대해서. ‘아차!’ 이러든지 ‘내가 등신같이 왜 그런 짓을 했지?’ 이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환경’에서 나와요. 환경. 환경 자체를 두고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 자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도 그렇듯이 창세기 2장부터도 이미 인간은 환경 속의 인간이에요. 개인적인 게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은 뭐했죠? 잠잤잖아요. 잠을 잤다고요. 인간이 잠자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한테 관심이 없어요. 잠은 인간을 존재에서 무(無)존재로 바꾸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잔다. 내가 잔다, 내가. 남이 자는 게 아니라 내가 잔다, 잔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백오십 여섯 마리,… 백만 이천 마리, 하다가 자버리면 꼴까닥 자는 그 순간에는 자기 존재가 날아가버려요. 자기 존재가 날아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너는 잠이나 퍼질러 자거라. 잠자라. 네가 너 된 것은 잠자고 있을 때에 조성된 환경이고,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네가 마주 대하는 것은 환경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인간인데, 인간들은 그걸 자기 개인으로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어떤 사람인데 인간은 환경을 나중으로 여기고 내가 먼저 있고 ‘내가 그때그때 반응을 나타낼 환경은 어떤 환경이지?’라고 자기가 환경에 대한 평가나 거기에 대한 감각을 갖게 돼요.

그래서 인간의 선악기준이라는 것은 환경과 조율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선악기준이 달라져요. 환경과 조율하면서. 조율 아시죠?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하는 노래. 하늘이여, 조율 한번 해달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때 상황 따라 반응을 나타내면서 자기 자신, 개인이 잘했다 못했다를 판정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칙이죠. 이거는 엉터리입니다. 그거는 벌써 마귀가 만든 건데 그걸 저는 마귀의 새로운 피조물이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마귀한테도 적용됩니다. 마귀가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아담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아담의 후손이고.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라는 환경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조성한 아벨이라는 환경을 어떻게 했습니까?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제거하는 작업을 했어요. 내 제사는 하나님이 안 받는데 네 제사는 왜 받아? 없애버려야 되겠다. 없앤다는 것. 자기 자신, 개인이 유지되면 그것은 선(善)이거든요. 자기에게 계속 관심이 유지되게 되면 자기는 선이고, 반대로 자기에게 관심 없어버리면 하나님이 내 제사에 대해서 관심 없어버리면 가인은 그걸 악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입장에서 계속 선하기 위해서는 누굴 없애야 됩니까? 동생을 없애야 돼요. 동생을 없애고 난 뒤에 하나님이 찾아왔잖아요. 그때 가인이 하는 말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나는 내 개별자, 나 개인만 지키면 되지, 내가 동생이라는 환경까지 신경 써야 되겠습니까?”(창 4:9) 이런 이야기해요.

그럴 때 하나님이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이 핏소리가 하늘까지 왔는데? 핏소리가 들렸는데?”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가인은 ‘나는 개별자입니다.’ 그거 주장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환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러니까 가인과 하나님 사이에 선과 악을 정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요. 틀리다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돼요? 나한테 관심 있는 것을 나한테 무관심으로 돌릴 때 이것은 악에서 선으로 바뀌었다 할 수 있죠. 그럼 어떻게 하면 온통 24시간 나에게만 관심 두고 사는 내가 전혀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떤 환경이 오면 그렇게 되는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에게 죄가 없으면 죄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우리 죄도 없이 하려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분이 죄가 없이 왔는데, 우리는 마귀의 피조물이 되어 우리한테 관심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라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자기한테 관심 있으니까 새로운 주님의 환경을 덧입혀서 나한테 관심 두는 우리 환경 자체를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주면 되겠죠.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바꾸는 것은 윤리 도덕이에요. 윤리 도덕은 백날 해봐야 여전히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요. 인간이 이 괴로운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더 부풀게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자기 의롭게 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외부의 상황이나 내부의 상황가지고 계속해서 탐색을 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선악기준은 환경에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자꾸 기준을 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제대로 알게 되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다음에 ‘아니야, 아니야. 환경만 알면 안 돼. 내가 누군지 내 내부를 탐색하고 내 내부를 분석해서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그 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보다 나를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시도를 누가 많이 하죠? 작가들이 하죠. 인간의 내부 탐색. 여자들 갖고 다니는 파우치 또는 주머니. 주머니를 만드는 바느질 기법이 또 있어요. 홈질(running stitch, 바늘땀을 위아래로 드문드문 성기게 꿰매는 바느질법으로 옷의 터진 곳이나 구멍난 곳을 꿰맬 때 혹은 주름을 잡거나 솔기를 붙일 때 주로 사용) 겉을 만들고 창구멍으로 뒤집어버리면 하나의 동그란 주머니가 생기잖아요.

인간 내부를 탐색해서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이게 작가죠. 인간 내부가 이렇다. 그럼 그게 자유입니까? 그게 구원이에요? 파우치의 안과 밖을 아무리 뒤집어도 자기 속을 뒤집어내도 그게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전히 자기한테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거기에 없어요. 인간은 거기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있습니다. 인간은 ‘있다’가 해당되지 않는 존재에요. 인간은 ‘있다’가 해당되지 않는 대상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여기 있다. 그런데 잠자게 되면 잠자면서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어요? 잠자면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잠을 잠으로써 이미 자기 생각에서 자기가 철회된 거예요. ‘잠을 통해 인간은 철회 당한다.’ 있다가도 없는 걸로 철회당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럼 잠 안 잘 거예요, 그래서? 버틸 겁니까? 계속해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해도 나중에 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버틸 때까지 있는 것 같지만 잠잘 때는 없죠. 잠깨면 또 있잖아요. 있음이라면서 뭐 그런 게 있어요? 있다가 없다가 없다가 있다가. 그게 뭐 있는 거예요? 계속 있어야지요.

인간은 철회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잠이라는 환경 속에 빠질 때, 잠 속에 빠질 때 인간은 철회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있다, 없다에 대해서 생각 못해요. 이 잠이라는 환경 속에서. 잠은 아담 뿐 아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계시를 줄 때 그렇게 잠을 자게 하셨어요.

창세기 15장 12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깊이 잠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잠들게 해요. 왜? 인간은 자꾸 환경과 조정을 하기 때문에. ‘조율 한번 해가지고 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립해보자.’ 자꾸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더욱 더 단단히 인식하게 되면 나는 그만큼 더 자유롭고 많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러면 내 힘으로 내가 버틸 수 있다.’ 자꾸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의식이 사라져야 되는데 자꾸 자기 의식을 공고히 해요.

자기 의식에 더 천착하고 자기 의식을 공고히 하는 직업이 바로 작가입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오락으로 봐요. 자기가 자기와 갖고 노는 오락. 오락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조가 되면 노벨 문학상 타는 거예요. 구원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락 쪼가리에요, 오락 쪼가리.

나는 내 내부를 이렇게 탐색했는데 너는 네 내부를 어떻게 탐색했냐? 남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오락과 즐거움에 돈 한 만원, 이만 원씩 주고 소설책 사보잖아요. 소설책 사들고 아파트 테라스에 할 일없이 다리 꼬고 원피스 입고 앉아서 커피 향기 음미하면서요. 그땐 홈드레스 원피스 긴 걸로 쫙 입어야 돼요. 그래야 우아하니까. 우아가 아니고 악이에요, 그거! 악이라니까요. 자기 영광, 자기 찬미, 자기 찬양, 자기 만족, 그런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잠잘 때 사다리 내려왔잖아요. 물론 요셉도 마찬가지고요. 꿈을 꿨으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에 대해서 인간은 어떠한 근거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잠을 자고 있는지를 확정할 수 있는 자기 근거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여기 있다는 근거를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일은 철회가 되지 않는다는 근거만 이 환경 속에 담아준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나는 철회되고, 나는 잠을 자고 치매 걸리고 나는 죽을 수도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철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를 성도되게 보장하는 근거요, 환경입니다.

성도는 그 환경이 우선이에요. 환경이 먼저 있고 그 환경에 의해서 조율당하는 자가 성도에요. 왜 십자가지? 이렇게 되죠. 성도는 ‘왜 십자가지?’ 이렇게 되고, 불신자는 ‘왜 내가 여기 있지?’ 이렇게 되고. 성도는 ‘십자가가 뭐냐’를 탐색하고, 불신자는 ‘내가 누구냐’를 탐색하고요. 나는 채식만 먹고 살았다, 뭐 이런 거. 자랑이다, 그거!

광주 5․18때 사람들이 죽었다. 그거는 심각한 문제다. 그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철회할 수 없는, 하나님이 광주 때 사람을 죽게 한 그것이 십자가와 무슨 관계 있는가 그게 중요한 문제라니까요! 왜 선악을 본인이 결정해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나쁜 거고 그걸 위로하고 보듬어주면 착한 거고. 왜 본인이 결정하느냐고요, 인간은.

본인이 최종적으로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그래놓고 나중에 나이 70, 80되면 치매 걸려 죽어요. 70돼서 치매 걸렸다는 말은 40대는 뭔 뜻입니까? 치매의 예비단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90에 죽었다면 70대에 걸린 치매는 뭡니까? 죽음의 징후죠. 90대에 죽은 그 노인네가 2살 때 뭐했습니까? 태어났다. 응애거린다. 그게 뭡니까? 죽음의 징후요, 치매 걸리기 전(前)단계죠.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 자아가 없어요. 자아가 있으면 환경과 조율하게 돼버려요. 자아가 있으면. 그걸 알고 아빠, 엄마가 애 하나 놓고 묻잖아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다고요. 네가 조율 해봐라. 지금 네 환경에서 네가 조율 잘 할 때, 네가 이익 얻으면 선이 되고 네가 손해 보면 너는 악이 되는 거야. 선악기준을 아빠, 엄마 함께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스스로 배우면서 자아가 돈독해지는 겁니다. 자아가 절대화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 누가복음 15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있다고 인간이 아니고 잃었다가 얻을 때 인간이 돼요. 탕자. 이 교회 이름이 뭐죠? (탕자교회). 잃었다가 얻을 때 인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인간이 아니에요. 그거는 마귀의 피조물들이 주장하는 거고,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잃었다가 얻어야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유산을 미리 달라 해서 갖고 가죠. 그때 둘째 아들이 성공할 것을 기대했습니까, 폭삭 망하기를 기대했겠어요? 성공하기를 기대했죠. 그럼 앞으로 자기가 기다리는 환경은 자기의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말하는 성공은 누구 성공입니까? 하나님 성공입니까? 아버지 성공입니까? 누구 성공입니까? 자기 성공이에요. 이게 전형적인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그 아들이 밖에 나갔어요. 나갔는데 이건 누가복음 15장 한 대목 봐야 돼요. 누가복음 15장 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왜 갑자기 자기의 꿈꾸는 사업이 안 됐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기서 뭐가 들었죠, 14절? “그 나라에 크게” 그다음에 뭐가 들었어요? “흉년” 이거 누가 잘못된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흉년이 들어요? 난 아버지 유산 받아서 지금 사업벌이고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코로나는 누구 마음대로 코로나에요? 중국? 중국 식품 시장에서 시작된 코로나? 중국 시장에서 발생시킨 거예요? 도대체 코로나는 누가 발생시켜가지고…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 경제가 다 망했어요. 아직 경제회복 안 됩니다. 코로나 시기에 돈을 너무 많이 버려가지고 코로나 이후에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해요.

애 적게 낳아서 소비 안하지, 코로나에 경제적인 충격이 너무 많아서 ‘야, 이거 돈 쓰면 안 되겠다. 나중에 무슨 일 또 터질지 모르니까 미리 예비하자.’ 해서 돈 꽉 쥐고 있으니까 경제가 안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가질 않는 거예요. 그럼 사업 벌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코로나 이후에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나을 줄 알기는 뭘 나을 줄 알아. 코로나는 3년이지만 자영업자 경기 안 좋은 건 지금 몇 년째 가고 있는지 몰라요.

그러면 코로나가 선입니까, 악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코로나가? 선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 보기에는? 개별자 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 보기에는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에요. 어려운 이야기 아닙니다. ‘내가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가’ 지금 이 문제에요. 내가 있다는 것은 근거가 없고요. 내가 있다-근거 없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근거 있음이에요. 왜? 십자가 사건이 있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현재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느냐? 내가 여기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일 것이다. 내가 있으려면 창조주가 있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거든요. 창조주 하나님 믿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무슨 짓했습니까? 그 하나님을 어떻게 했어요? 죽여 버렸죠.

창조주 하나님 믿는 자가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렸으니까 어느 근거가 선이에요? 하나님이 인간한테 맞아죽은 이것이 진짜 하나님 됨의 유일한, 오직 하나의 근거에요. 다른 근거는 없어요. 유일한 근거가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근거가 된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구원의 근거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도록 만들었다는 이 이야기가 결코 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조성한 환경이에요. 내가 나를 선한 인간으로 하기 위한 환경이에요.

신약 때, 구약 때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께서 모조리 흉년을 내렸어요. 흉년을 내리니까 인간은 위기가 찾아왔죠. 개별자적 위기에요. 위기가 찾아오면서 여기서 그들은 환경 바꿈을 생각해야 될 판이었어요.

나갈 때는 단독자로서 나갔잖아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단독자로 나갔다가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갈 때는 어떻게 됩니까? 단독자가 아니고, 아버지의 환경 안에서 새롭게 탕자로 들어오는 내가 되죠. 그럼 나는 아버지의 환경에 개별자가 아니고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 내가 나에게 전부가 아니라, 나는 일개 부분이 돼요. 전부는 아버지가 전부가 되고 아버지의 본질, 본성,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particle, 부분이 되는 거예요. 내가 부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집에 와도 개별자하면 안되죠. 게다가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꽁꽁 묶었죠. 왜? 반지를 끼워줬으니까요. 아들이 까불면 “야, 이리 와. 그 반지 누구 거야? 너 전에 먹은 소고기 다 게워내. 잔치 벌인 거 게워내.” 안되잖아요. 그 반지 끼우고 소 잡고 동네방네, 내 아들 돌아왔다 했어요.

돌아왔다 하니까 그 생각나네요.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월남에서 돌아올 때는요. 탕자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TV, 카메라 사들고 돌아왔다고요. 그 당시 우리나라 월급의 100배가 넘으니까. 성공해서 돌아왔죠. 그러니까 그건 인간된 적이 없죠.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은 개별자로 있으면 절대로 자기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치매 걸려도 자기를 안 잃어버려요. 그런데 원래 환경 입장에서는 인간은 잃어버린 자가 된 겁니다. 잃어버린 자. 내 환경에서 너는 집 나갔어. 집 나갔단 말이야. 너는 너 스스로 인간인 줄 알지만 아버지 환경에서 너는 사람 아니야. 그냥 잃어버린 자였어요.

잃어버린 자니까 이 탕자는 뭘 해야 돼요? 자리. 누구 자리?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절대화 시켜 만든 자리가 아니고 ‘내가 만들지 않은 자리’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 이것이 바로 선(善)입니다. 이게 선이에요.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의 근거는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철회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마귀가 지배하는 환경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절대로 영원히 철회되지 않는 절대 기준을 작성하는 데에, 만들어내는 데에 하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승리에요. 근거 없다고 이야기하지 마. 내가 만들었어. 이 예수님이 근거를 만들었어요. 인간은 개별자, 절대자, 단독자 일체 허용하지 않고 그것이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절대 근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 방금 이야기한 것을 딱 한 자로 이야기하면 어떤 글자가 적당한가? 오늘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크게 쓰겠습니다. ‘품’. 탕자가 어느 품에 안깁니까? 아버지 품에 안기죠.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에게 하나님이 만든 자리가 있어요. 자기의 자리, 거지 나사로의 자리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어디 가죠? “품에”. 그런데 부자는 품이 없어요.

살아있을 때 부자라고 행세하던 그 행세가 그대로 이어져서 지옥가도 행패부리고 있어요. 물 달라고. 물 좀 주소! 물 맡겨놨나, 왜 물 좀 달라 해요. 우리가 목마르니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세요. 왜 너한테 물을 줘야 되는데? 목마르거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물을 줘야 돼? 진작 네가 거지되고 아프지. 그럼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데.

자꾸 혼자 살라고 하는 거예요. 마귀의 피조물이니까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꾸 혼자 살게 만들었어요. 혼자 탐색하고 연구하고 개척하고. 개별자로. 그러니까 아까 요한일서 3장을 보면서 보는 사람마다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를 개별자로 여기고 ‘아이고,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노?’ 걱정이 늘어졌어요, 걱정이.

불법을 행하지 마라. 깨끗케 하라. 그다음에,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 10절에.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이 성경보고. 괜히 봤어, 괜히 봤어.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 동서나 올케가 와서 행패부리면 미워하고 싶은데 요한일서 3장 10절이 생각나가지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자꾸 자기 나이를 갈구는데 참을라 하니까 공황장애 올 판이고. 이거는 우울증 걸릴 판이고. 성질낼라 하니까 요한일서 3장 10절이 또 가만두지 않고.

심지어 요한일서 3장 16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큰일 났어, 큰일 났어. 큰일 났어요.

시험을 치는데 앞에 같은 교회 다니는 학생부 애가 있다. 자기도 학생부인데 언뜻 보니까 시험 시간에 몰라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시험지가 거의 백지다. 그럼 형제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너 내 이름 써라. 네 이름 내가 쓸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게 마땅하니라. 시험지를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장렬하게 자기는 꼴찌하고 형제는 그 반에서 1등 하게 만들고. 어떻습니까? 장하십니까?

이런 의식이 전부다 개별자에서 나와요. 개인의 착함이 나 개인을 구원시킨다는 의식이에요.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뒤에 오신 분들을 위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죄란 자기한테 관심 두는 걸 죄라 해요. 의란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것.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게 의에요. 자기한테 관심이 없어요. 탕자 주제에 뭐 이쁘다고 관심을 둬요? 탕자 주제에.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한테 무관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늘 잠자면 되죠. 늘 잠자면 돼요. 그걸 신약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말입니다.

환경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지 않는 환경으로 바꾸어준 것이 주님의 철회할 수 없는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존재에서 사건으로’. 또는 ‘존재의 품에서 발생된 사건화 된 나’. 나는 내 존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사건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부분으로서 살아갑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협조해주시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필요할 때마다 계속 살려내신다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야곱이 잠잘 때, 꿈꿀 때, 아브라함이 잠잘 때, 아담이 잠잘 때 그런 경우죠.

그리고 아벨 같은 경우는 잠을 너무 오래 자. 죽어버렸으니까. 형한테 맞아죽었으니까 오랫동안 잠을 자죠. 그러나 아벨이 비록 죽어서 잠들었다 할지라도 그 환경, 피가 발생된 환경은 하나님이 챙기고 가인에게 찾아가죠. 그러면 됐죠. 원래 아벨은 자기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제사 받아준 것에 대해서는 그건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로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믿음이라 하죠. 자기한테 관심 없으니까 자기 믿음도 없어요.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또는 믿음의 부분. 예수님 믿음의 한 조각. 파이 한 조각. 예수님이 벌여놓은 파이 중 한 조각이 아벨의 입에 들어간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들어가고 이삭에게 들어가고. 각자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의 단면을 모자이크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에요.

그러니까 개별자 또는 단독자라는 자체가 성경에서 성립 안 되는 이유가 근거가 없어 그래요.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어요. 나중엔 치매 걸려 죽어버리니까 없어지니까 앞에 있던 것은 없어지기 위한 예비단계이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어요. 영원히 있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 있음 존재의 근거가 될 뿐이지, 있음이 죽음의 근거는 아니에요.

인간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죽어요.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다 알고들 있는 이야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 드는데요. 왜 본인이 시건방지게 죄 지었다고 하느냐? “너 왜 수업시간에 자? 이리 나와. 손들어.” “선생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느그 조상 아담이 죄 지었다. 됐냐?” 지금 네가 말한 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자체가 죄야, 인간아! 그게 단독자잖아, 단독자. 아담의 연약한 육체를 받아서 국어시간에 막 졸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선생님은, 네 조상 아담을 깨우기 위해서 내가 정신 차리라고 벌 세웠다.

논법이나 논리가 간단하잖아요. 또 다시 이야기하지만,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성도한테는 쉽고, 불신자한테는 뭐가 되겠어요? 미움이 되겠죠. ‘사랑은 미움에서만 주어진다.’ 만약에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개별자 내 사랑이 또 살아있게 돼요. 이거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나한테 관심이 없으려면 내가 기껏 주님한테 한 것은, 지독하게 미워했을 뿐이에요. 주님에 대한 미움 같은 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사업 벌이려 하니까 갑자기 코로나 터지는 거. 사업하려 하니까 갑자기 흉년이 드는 거. 누가복음 15장에. 왜 자꾸 나만 못살게 굴어? 이런 거요. 왜 자꾸 나만 못살게 굴어.

환경 자체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게 주님에 대한 미움입니다. 내 쪽이 미워할 때, 내 쪽이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미워할 때 비로소 그 미움을 근거로 해서 그 미움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요. 그러면 십자가가 철회될 수 없는 최종 근거는,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나는 네 미움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일체 탓하지 않겠다.’ 하는 사랑으로 오죠.

실컷 미움을 다 받아놓고는 그 미움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걸 사랑으로 죄 사함으로 갚아주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 사했다는 근거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놓은 거예요. 자기 목숨을 내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강력한 내 존재 위주의 삶을, 아예 근거 자체를 박탈하고 내가 강력하게 나는 여기 있다고 여겼던 그 근거에다가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 사건을 박아 넣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가능하지,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느냐?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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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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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