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4b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
20241004b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솔로몬이 한 것은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고정점을 상용화해서 매일같이 죽음을 번제를 반복했거든요. 오늘 본문 역대하 8장 13절에 보면, “모세의 명을 좇아” 모세의 명이라 했어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세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을 하느냐, 라고 할 수가 있어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껌뻑 죽었다는 이런 자세로 보면 안 되고요. 시비 거는 쪽으로 성경을 보세요.
왜? 우리의 자율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있으니까. 그냥 겸손한 척, 순종하는 척하지만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그 아래층에는 뭐가 있느냐? 헤즈볼라 사령부가 있어요. 주께서는 그걸 겨냥한다고요. ‘네가 뭔데’에요. 모세는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이에요. 특이한 죽음 속에서 나온 사람이고 특이한 불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뭘 경험했느냐 하면 인간의 극단적인 죽음의 형편을 먼저 체험한 사람이에요. 목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그 죽음 안에서 인간은 완벽하게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죽는 게 아니고. 인간은 못 죽어요. 그냥 우리 옛날에 할머니 하는 말처럼 “아이고, 눈 감으면 되지” 스카치테이프 발라도 안 돼요.
인간은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교회 다니든 절에 가든 알라신 믿든 상관없어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채로 무시무시한 죽음을 체험하게 돼 있습니다. 그걸 누가 먼저 체험했어요? 모세가요. 거기서 모세가 체험한 것은 뭐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그게 해결책도 아니고 대책도 아니라 항상 인간이 죽든 말든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언약만을 하나님이 살려낸다는 사실을 모세는 알아냈던 겁니다.
그러면 그 모세의 명에 따라 솔로몬이 중앙시스템을 만들었어요. 특이한 죽음의 상용화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산 채로 죽을래, 죽은 채로 살래? ‘산 채로 죽을래’ 이걸 가지고 역사 앞면, ‘죽은 채로 살래’ 이건 뭐냐 하면 역사 뒷면. 이번에 겨울수련회 제목은 입니다. 솔로몬 시대가 끝나면 역사 전면과 후면으로 이게 쪼개져요.
아까 노래 가사처럼 점점 둘이 멀어져가요. 역사 뒤쪽과 앞이 점점 더 멀어집니다. 멀어지면서 역사 속에 있던 성전은 이제는 그 성전의 취지가 역사 뒤쪽으로 넘어가면서 앞의 성전은 불태워져버리고 맙니다. 역사 속에 등장한 솔로몬 성전은 역사 뒤쪽으로 완성될 성전의 관계는 슬픈 인연이에요. 서글픈 인연입니다.
그래서 역사 뒷면이라 했는데 이것을 아까 강의와 연관시키면 역사 앞면은 인간들이 연속성을 외친다. 역사와 전통, 유구한 역사, 연속성이죠. 시간의 연속성을 외친다. 연속성을 부르짖는다. 그러면 역사 뒤편은 뭐냐? 이것이 연속성이라면 이쪽은 뭐가 되겠습니까? 불연속성 되겠지요.
역사 앞면은 담당이 누구냐 하면 다윗의 혈통적 왕조가 담당해요. 솔로몬 이후에 우리나라처럼 북쪽과 남쪽으로 쪼개집니다. 북쪽은 그들은 연속성을 주장해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었어요. 쉽게 말해서 신당동 떡볶이 전통을 그대로, 신당동 떡볶이 할머니 돌아가셔도 우리는 간판을 ‘신당동 떡볶이’로 그냥 하는 거예요. 앞에 ‘원조’ 붙여야 돼요. ‘원조 신당동 떡볶이’ 연속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저 뒤쪽에 역사 뒤쪽으로 불연속성은 뭐냐 하면 불연속성적인 요소를 그걸 새로운 기조로 삼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 우리는 이렇게 솔로몬의 나라가 쪼개졌다는 이 사실을 붙들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에요. 북쪽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파 열 지파가 거기 가 있고 남쪽의 유다는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약간의 시므온 지파도 있는가, 그렇게 나눠졌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유다 지파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이스라엘과 끝났다. 이 끝났다는 사실이 귀하다는 거예요. 왜?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으니까. 역사는 끝났는데 역사보다 더 센 것, 하나님의 언약의 끈질긴 줄기는 다윗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유다에 촛불이 그대로 켜지게 돼 있습니다.
다윗의 등불은 인간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냐?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관리하고, 역사는 누가 관리하느냐? 인간적인 임금이 왕이 이걸 관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만 알아야 돼요, 둘 다 알아야 돼요? 둘 다 알아야 됩니다. 제가 둘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둘 다 설명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나오는 내용이 여기서 벌써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게 될 거예요. 연속성과 불연속성, 역사의 이면과 역사의 앞쪽 둘 다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의 앞쪽/전면의 특징은 눈에 보인다. 그러면 역사의 뒷면은 눈에 안 보이느냐? 역사의 뒷면도 눈에 보여요. 앞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권력 서열, 위계 서열이 인간들 속에 감지가 됩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였잖아요. 그런데 사무엘 아들들이 변변치 않으니까 장로들이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달라 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여호와는 눈에 안 보이니까 보이지 않는 왕보다도 보이는 왕을 믿고 싶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친근해지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뭘 갖고 있느냐? 천연성, 내추럴한 것. ‘천연’가죽 이런 것 있지요. 인조가죽 말고 천연가죽. 날 것 그대로, 생 것 그대로, 그 자체, 이걸 천연성이라 해요. 자연적인 것, 이 천연성이 다윗의 등불과 갈라져 나왔지요. 북이스라엘 갈라져 나왔지요. 갈라져 나오면서 이게 육신이잖아요.
천연성을 지닌 육신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짐승으로 바뀝니다. 이 짐승은 처음부터 인간의 육신 안에 무슨 요소가 있다? 인간의 자연성, 천연성은 무슨 요소가 통제하고 지배했다? 짐승이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니엘서에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자, 여러분들이 짐승이라 하니까 쉽게 이해되실 거예요. 짐승의 특징은 이성보다 뭐가 더 셉니까? 인간의 본능, 충동이 더 센 게 짐승이죠.
먼저 이스라엘부터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통치 방법은 내부적으로 치안입니다. 외부적으로 국방이에요. 치안과 국방. 왜 사무엘 선지자 당시에 사람들이 왕을 달라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두 개가 되려면 이 둘을 다 책임질 수 있는 하나로 집중이 권력이 있어줘야 돼요. 그 권력자를 왕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왕을 달라, 이 말은 뭐냐? 우리의 내부의 치안이나 국방을 책임질 책임자를 눈에 보이는 인간 중에서 하나 뽑아 달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치안과 국방을 담당할 왕이 없었단 말인가? 없었지요. 사무엘 당시까진 없었어요. 그럼 없었으니까 국방과 치안은 누가 담당했는가? 서로가 담당한 것도 아니에요. 그럼 한 사람이 담당했어? 한 사람이 담당한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담당했어요? 율법이 담당했지요, 율법이. 그냥 율법대로 제사 지내면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뭘 살린다? 하나님이 자기의 율법과 언약을 살리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하실 일이기 때문에 비록 왕이 없지만 성급하게 덤벼들다가는 그들이 난데없는 대재앙을 만나 망하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이 해왔다 이 말이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계역할한 것은 사무엘 같은 선지자, 또는 제사장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대로 왕 없이 율법대로 다스리면 되잖아. 그런데 왜 왕을 달라 했을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사무엘이 사사 시대 말기입니다. 사사 시대는 인간들이 믿음도 없고 왕도 없으니까 자기 소견대로 무슨 본심을 앞세웠습니까? 짐승적인 충동을 일으켰지요.
그러니까 나라 치안이 엉망이 된 거예요. 힘 센 자가 깡패들이 대장질하는 그런 시대가, 요새 아이티 같은 나라. 뭐 정부가 없으니까 레바논 같은 정부가 없으니까 헤즈볼라가 왕질하고 있잖아요. 온 잡족들이 나라고 정부고 국민은 관계없는데 굴러온 잡족들이 레바논을 쥐고 있다니까요. 헤즈볼라가.
그런데 이건 뭐냐 하면 어떻습니까? 뭔가 치안을 담당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짐승 같은데 이 짐승 힘보다 더 센 힘을 누구한테 부여해서 그쪽이 경찰권을 가지고 음주운전, 이런 것 단속하고 교도소 만들어서 거기 집어넣고, 상식에 어긋나는 개돼지 같은 그런 짓하는 사람은 강제로 격리조치하고 사형시킬 건 사형시키고 그렇게 해야 이게 무슨 꼴이 됩니까? 나라꼴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는 나라 있잖아요. 그 나라가 이방나라에요. 그런데 깡패가 나라 안에만 있어요? 나라 바깥에도 깡패가 있잖아요. 그건 또 뭘 담당해야 돼요? 국방을 담당해야 되지요. 그래서 사무엘은 말하기를 니들이 왕을 세우게 되면 너희들은 그 왕에게 세금 내야 된다. 그리고 그 왕에게 많은 토지를 바쳐야 되고 십일조 바쳐야 되고, 너희들 딸을 궁녀로 사용해야 되고, 너희들 갖고 있던 이것은 내 것이야 했던 것을 왕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야 되는데 그래도 좋으냐, 하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하는 거예요.
왜 왕에게 권력을, 자기 소유를 빼앗겨도(다 빼앗기지는 않겠지만) 좋다 하느냐? 왕이 있는 것보다 빼앗겨서 왕이 가져가는 것이 차라리 왕이 없던 그것보다 훨씬 덜 불안하다 이 말입니다. 왕이 없는 것이 더 불안해요. 하도 깡패들이 난무한 세계니까. 이런 이방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왕이 좋은 게 아니고 결국 누가 좋단 말이에요?
본인의 방식으로 본인의 것을 못 지키니까 어떤 법을 만들어서 나라 같은 나라 만들어서 내 것을 다른 나보다 못된 짐승 같은 인간에게 덜 짐승인 내 것이 빼앗기지 않도록 뭔가 법적인 질서를 잡아 달라, 그래서 왕을 달라했단 말이죠. 그걸 사회계약설이라 하는 거예요.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말하기를 사회계약설을 처음으로 이야기한 이 사람이, 이 세상은 전부 다 중국 무협소설에 의하면 뭡니까? 강호의 세계, 힘세고 무술 잘하는 인간들이 설쳐대는 이런 세계에서는 인간이 개인적으로 자기를 지키기에 지치지요. 못 지키지요. 지킬 수가 없어요.
이런 국가를 ‘야경국가’라 합니다. 개인의 재산은 개인이 갖되 나라에 치안의 권력과 국방의 권력을 일부 줘서 그쪽이 하는 일은 뭐냐? 밤에 야경 되는 것. 어두운 밤에 술 먹고, 남의 것 도둑질하는 것 있잖아요. 그런 것 소극적으로 치안만 담당하고 나머지 경제활동은 각자 국민들 자기 자율성에 맡기는 그런 나라, 그게 가장 이상적인 나라라고 한 시대가 바로 야경국가입니다. 19세기에 한 거죠. 야경국가, 그 정도만 되도 괜찮지요.
야경국가 잘하고 있는 나라가 있어요. 서울에서 북쪽으로 사십 킬로 가면 있는 나라, 무슨 나라지요? 북조선인민공화국. 다 같이 뭐가 됩니까? 치안은 좋은데 다 같이 뭐가 돼요? 거지꼴은 못 면하지요. 왜 거지 됩니까? 치안은 잘하는데 왜 거지가 되지요? 대외와 무역이 없으면 나라가 꼴아 박게 돼 있어요. 대외적으로 관계가 없으면 나라가 꼴아 박게 돼 있습니다. 일종에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나라, 우리 김일성 어버이의 …, 그 자폐증으로 몰락하는, 일종의 종교단체가 되는 거죠.
그러면 현대는 어떻게 하느냐? 야경국가 이래서는 나라꼴이 안 되지요. 야경국가에서 뭘 시도하느냐 하면 국력의 증대를 가져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몸짓을 부려주는 대통령을 왕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가 수출드라이브 장사해서 남은 이윤 가지고 도로 깔끔하게 놓고, 휘발유세 막 감면해주고, 남아도는 달러로 여러 가지 어린이집 만들고, 노인들 운동하는 기구 더 만들고, 무상으로 교육 다 시켜주고, 의료보험제도 만들어서 하는 나라, 그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부강한 나라 되지요.
그럼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게 뭐예요? 치안에서 뭘 원합니까? 우리나라를 국력을 키워주는 대통령을 원하는 거예요. 그 대통령이 누구냐? 박정희 대통령. 갑자기 이상한 동네 돼버렸네.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이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치안을 잘해서 그렇게 경상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습니까,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지지리도 못사는 우리를 잘 살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나라 보세요. 이방나라가 야경국가에서 몸집을 키워주는 우리가 미국처럼 잘사는 맨날 국민소득으로 서열화 시키는 전 세계가 뭡니까? 권력의 서열화, 위계의 서열화. 못 사는 나라에서 와서 우리나라 젊은이는 가지도 않는 아주 험한 생산 환경에다 집어넣고 돈 벌어서 네팔에다 돈 보내고, 캄보디아에 돈 보내고 하지요. 그것도 고생인줄 모르고. 왜? 그래서 월급 1년만 벌면 집 사기 때문에. 시집하고 친정집 다 보내고. 죽으라고 고생하면서 돈 보내면 필리핀 저쪽에 잘 사니까. 옛날에 우리나라가 멕시코에 사탕수수농장에 취직하는 것처럼 하와이 가는 것처럼 똑같은 일을 달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삽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살지요? 마 이 정도 사니까 여기서 경제성장 멈출까요,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경제를 스톱시키는 대통령 뽑을까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를 더 잘 살게 하는 대통령 또 원하지요. 부자 같으면 더 살게, 가난한 사람 같으면 제발 소득분배가 이뤄지는 다 같이 잘 사는 다 같이 귀족이 되는 그걸 원하겠지요. 그럼 뭐는 원하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3장 봅시다. 솔로몬 나옵니다. 솔로몬이 두 개로 찢어졌어요.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두 겹으로 된 게 찢어졌단 말이죠.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 솔로몬이에요. 솔로몬에서 성전을 지었잖아요.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있었던 다윗언약은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돼요. 보이지 않는 분이 왕이 돼요.
그런데 솔로몬 아들 있잖아요. 르호보암 그때부터는 솔로몬의 육신적 요소, 솔로몬의 짐승적 요소, 솔로몬의 내면의 죄악된 요소, 이 나라를 그 강한 나라로 솔로몬이 어쨌든 만들었잖아요. 나는 우리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강대국이 되겠다고 하는 솔로몬의 보이는 육적인 이방나라적 사고방식을 이어받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등장, 유다고 이스라엘 둘 다 마찬가지에요.
근데 유다는 왜 일찍 안 망했는가? 아까 뭐가 있다 했습니까? 다윗의 등불.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있던 그 다윗언약이 여전히 유다에서는 약간은 오래갔어요. 밧데리가 오래갔다고요. 르호보암 북쪽은 초기에 날아가 버렸고요. 이야기가 복잡해서 미리 말씀드린다만 불연속성, 역사의 뒷면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그것도 참된 선지자죠.
선지자에 두 종류가 있어요. 국가의 백성들의 종교를 안정화시켜서 현재 통치자인 보이는 왕에게 굴복하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선지학교에서 월급 줘서 고급공무원으로 양성한 자들이 있어요. 독일의 정책이 그거였습니다. 가장 공부 잘하는 엘리트 뽑아서 공무원제도를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어요. 가장 뛰어난 사람만. 그리고 그 충당은 전 국민에게 1퍼센트를 종교세를 받아요. 천주교든 기독교든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종교세 받아서 그것으로 엘리트 목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한 거예요.
그러면 목사들이 공부를 많이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똑똑하니까 최고 엘리트니까 공부를 많이 했지요. 그 공부 많이 한 게 뭐냐? 성경은 그냥 편집된 거다, 이런 연구나 하고. 자유주의, 성경은 다 째고 합편한 거다, 이런 식으로. 워낙 공부를 많이 하니까. 믿음은 하나도 없고 공부만 했어요. 고급공무원 되기 위해서. 목사란 공무원 밑에 하류 공무원 있어요. 그게 전도사에요. 전도사는 월급 얼마 안 돼요, 모든 권력을 목사가 쥐고 있어요.
그럼 아까 이방나라에선 무슨 서열? 권력의 서열, 위계 서열. 뭘 유지하기 위해서 무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국가 자체, 역사 속의 우리가 살아남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질서가 하나로 통합돼야 되고, 그리고 외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힘을 길러야 된다는 일반적인 통상적인 이방민족을 추구하는 것이 북이스라엘, 남유다였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북쪽이나 남쪽에 누가 활동했다 했습니까?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 및 많은 선지자들이 이거는 다윗언약에 어긋난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참된 선지자들이 많이 죽었지요.
그러면 열왕기상 3장을 왜 보자 하느냐? 거기에 솔로몬의 재판이 나와 있어요. 3장 16절,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여러분 다 알지요. 두 여자가 동시에 애를 낳았는데 자다가 뒹굴다보니까 한 애기가 질식사했단 말이죠.
나쁜 여자가 자기 아기 죽었는데 깨기 전에 바꿔치기했는데, 그때는 CCTV가 있었습니까, DNA 검사가 있었습니까?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인 시대에 바꿔놓고 보니까 엄마는 알잖아요. 내 아기인데 저기 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솔로몬이 한 그 재판이에요.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 누가 죽음(잃어버림)을 자초하는가? 지금 아기는 이미 죽었잖아요. 아기 둘 중에서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면 소송을 한 사람은 저 살아 있는 아기가 내 애니까 돌려달라고 소송을 건 겁니다. 그럴 때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의 재판이에요. 하나님의 재판 속에는 바로 언약적 그러니까 성전의 제사의 번제의 취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만 이게 인간 재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재판이 돼요. 그럼 성전은 매일같이 뭐한다 했습니까? 번제를 드리지요.
번제는 홀라당 다 태워 죽이는 거예요. 그 취지를 담아서 솔로몬이 재판한 거예요. 둘 중에 자기 자식이 죽을 사람 손들어봐라, 이런 재판을 한 거예요. 죽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뭐라 합니까? 잘 됐네. 아기 둘로 쪼개자. 쪼개서 반으로 가르면 균등하고 공평한 재판이 된다.
이 재판을 솔로몬이 했잖아요. 그런데 솔로몬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하나님이 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로 재판하는 자리에요. 지혜로 재판하려면 어느 것이 진짜냐, 가짜냐 드러나려면 반드시 어떤 작업이 있어야 되는가? 쪼개지는 작업이 선행돼야 되죠. 쪼개지면 뭐가 날아가느냐?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게 날아가 버리죠. 그걸 원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게 재판이에요.
진짜 엄마가 이렇게 하지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잃어버린 쪽으로 하겠습니다. 내 애가 죽었다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은 뭐냐? 애를 쪼개라는 판결이에요. 그러면 쪼갠 것을 각자 엄마가 받으면 둘 다 뭘 받게 돼요? 산 걸 받게 돼요, 죽은 걸 받게 됩니까? 죽은 것을 받게 되지요.
그러면 진짜 엄마는 내가 소송을 걸었던 그 취지로 인하여 솔로몬의 판결과 이어지게 될 때 내 소송이 내 아기를 죽게 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내 쪽에서 내 아기가 없다고 치고 소송을 안 한 걸로 취소하겠습니다. 소송 안 할 걸로 치면 아기를 쪼갤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살아 있는 아기는 누구 아기입니까? 진짜 엄마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이 되겠지요. 다윗언약, 다윗계약의 취지가 담겨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번제를 요구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을 만들어놔서 인간의 매일 삶이 모든 소송과 모든 원한관계의 문제점이 하나님은 쪼개져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위 하나님 백성으로 주장하는 인간은 멀쩡하길 원할 때 그렇게 되면 번제 드리라는 이 취지가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바쳤는데 소위 예수 믿는다는 인간들은 자기 피나 찍어 바르면서 지는 예전처럼 멀쩡하길 원할 때 그게 번제냐, 아니면 그게 구경꾼이냔 말이죠. 그거는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 말씀을 이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진해서 죽어서 날 데려가세요, 자진해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지요. 그래서 이 솔로몬 이후에 성전이 깨어집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등장해서 성전을 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없어요. 인간치고 구원받을 인간은 없습니다.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들었는데 인간구원은 마귀구원과 똑같아요. 지옥 없는 셈이 되지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어디에 활용하는가? 인간을 이렇게 활용합니다. 사라진 것에 대해서 대결상태에 모든 인간은 놓여있습니다. 사라졌다함은 보이지 않는 것. 그러면 신약에서 사라진 분은 누구지요? 이 땅에 오셔서 잠시 얼굴 보이시고 구름 타고 사라진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뭘 했는가? 번제 드리고 올라갔잖아요. 자기 모든 걸 다 바치고 올라갔잖아요. 예수님은 사라진 것이다. 그 사라진 것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슨 상태? 대결상태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뭐냐? 짐승의 상태에요. 교회가 되던 절간이든 그런 건 뭐 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모든 것이 짐승의 세계에요. 그래서 처음에 제가 첫 번째 강의 때 아까도 물어봤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게 되면 복음을 기피하면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복음을 외면하고 피하는 의도가 뭐냐? 도대체 뭘 얻고자 복음을 안 들으련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뭐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치워버려라. 십자가 치워버리고 부활이나 믿겠어. 죽은 다음에 괜찮게 되는 그걸 믿겠어. 십자가는 치워버리고 싶은 거예요. 실패하기 싫어하고 망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우리 일이 아니에요. 구원은 누구 일이냐? 주님의 일입니다. 이런 대결상태를 형성해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걸 대조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럼 대결상태기 때문에 우리 속에 짐승의 심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를 지키고 나를 버티는 식으로 살아가요. 그게 뭐냐 하면 소위 교회 다니고 장로나 목사라 하면서 맨날 뭘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저 우리나라 지켜주옵소서. 아까 이방나라 있잖아요. 우리나라 몸집 키우는 나라 지켜달라고 통성기도하지요. 구국의 기도해서 여의도광장에 모여서, 요샌 광화문에 모이는구나. 태극기 휘날리는 부대. 동성애 반대, 이런 것.
왜 혼자 하지 여럿이 모입니까? 살아 있는 것들이 모여서 힘이 된다는 그런 공식 같은 게 있어요. 혼자 이야기하는 것보다 여럿이 모여서 합심하면 그게 천지를 진동한다나 뭐 그렇데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죽어, 그냥 죽어. 그냥 죽어버려. 인간이 시위한다고 구원해줍니까? 구원은 누구 일이에요? 우리 주님 일입니다.
그 주님이 뭡니까? 주님 찾아온 건 뭐냐? 하나님, 우리나라 지켜달라는 그것이 바로 뭐냐? 사라진 주님에 대한 대적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주장이란 것을 이렇게 같이 묶어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입니다. “니가 죄인이야, 니가. 니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지 않아. 왜 자꾸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는 거야?”
이런 성령을 통해서 이게 오게 되면 아까 말씀드렸지만 성도지요. 성도는 두 개 다 있어요. 못돼먹은 자기 자신, 자기 가치, 또는 자기 잘남이죠. 자기 잘남이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내가 세상에서 일구어낸 모든 성과는 악마의 미끼였다. 개척교회 몇 개를 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강의를 여러 군데 다니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뭡니까? 악마의 미끼에요.
그러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성도가 고백하는 것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겁니다. “왜 저를 자꾸 구원하십니까?” 이 고백에서 구원의 근거가 자기한테 있어요, 없어요? 자기한테 구원이 없지요. 지금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라진 것이 옴으로써, 사라진 것은 주님의 성령입니다. 만약에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사라진 성령이 십자가가 오니까 졸지에 뭡니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결국은 잘난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나의 짐승적인 본능이 계속해서 나한테 집요하게 그걸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다음에 나오는 고백이 뭐냐?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을 왜 자꾸 구원하십니까, 라고 한 것은 바로 사라진 것에 압도된 상태, 십자가에 압도된 십자가의 죄용서와 그 사랑에 압도된 상태가 될 때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못돼 처먹은 저를 왜 자꾸 구원하십니까? 아나 사랑이나 먹어라, 인간아. 이게 사랑이야.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어요. 내가 해준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그걸 선물이라 하잖아요. 내가 선물 주겠다잖아. 니는 받기만 하면 되잖아.
갑자기 가사가, 왜 자꾸 노래 가사가 나오는지 몰라.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그저 받기만 했을 뿐이죠. 화장을 지워가면서 왁스가 불렀던 노래, 그런데 사라진 것이 와서 계속 발굴해요. 꼭 고고학 발굴하듯이. 계속 어디 있는지 검침하듯이 발굴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의 짐승성, 나의 짐승적인 본성 이걸 계속 또 찾았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성 또 찾았네. 이것 봐라 하는 거예요.
마지막 중요한 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표제부터 먼저 던지겠습니다. 주제부터. 왜 하나님은 천사보고 번제 드려라 하지 않는가? 천사 시키는 대로 잘하잖아요. 천사는 시키는 대로 잘해요. 뭐 죄 짓고 이런 것 없어요. 마귀 빼놓고. 그럼 천사가 알아서 제사 드리면 받으시면 되잖아요. 왜 그걸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는 죽어도 자기를 못 놓고 인간보고 번제 드리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제단을 보고 집중하라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이겁니다. 주님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올라가면 구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은 아들로 왔지만 죄인의 모습의 아들이 죄 없이 죄 된 모습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구원되는 것을 바로 주님의 구원이에요.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원형이 됩니다.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자에게 자신이 육신으로 했던 모든 업적, 그 성과가 같은 죄 된 육신을 갖고 인간에게 같은 육신 때문에 효과를 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죄? 내 알지. 범죄한 것? 내 알지. 나도 죄 있는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알지. 네 과거 엉망진창 다 알아. 다 안다고.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피로써 없애주는 데 없애주는 조건이 뭐냐? “너 나한테 와. 없애줄게.” 이게 아니에요. “너 날 믿어. 없애줄게.” 이게 아니고 주님이 먼저 죄 있는 육신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물속에 먼저 세례 받으신 거예요. 주님 쪽에서 먼저 손을 쓴 거예요. 우리보고 오라 한 게 아니고 우리는 못 가요. 왜냐하면 마귀가 가만두지 않으니까. 마귀 안에 있는 우리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 에스라, 느헤미야 보면 성전을 다시 지어요. 느헤미야는 중건하고. 성전을 중건할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뭐하는 사람이냐? 율법을 가르쳤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성전이 성전 되는 유지가 되는 조건이, 너희들 인간이 율법과 무엇의 만남? 인격의 만남이 성사가 될 때 성전도 온전하고 그 성전에서 번제가 온전하고 그때 너는 죄 사함이 된다, 라는 조건을 달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건 뭐 거침없이 율법대로 살기를 원했는데 그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에스라 10장 10절, 11절 여러분 들어보시면 이건 진짜 놀랠만한 이야기입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이혼해, 이혼하라는 거예요. 뭐 꼴보기 싫은 여자 이혼하라면 대번에 이혼하죠. 그게 아니고 지금 여기서 미워도 다시 한 번, 신파극 나와야지요. 엄마, 엄마 붙들고 있는, “엄마 없이는 못 살아. 아빠 미워, 미워.” 가슴팍 때리는 그걸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애한테 정을 줘서 엄마만 따르는데 단지 엄마가 이방여자란 이유 때문에 갈라서, 이혼하라는 거예요.
이 법 오래 가겠어요. 묻는 내가 나쁘다. 이 법 오래 가겠습니까? 오래갈 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 지나고 난 뒤에 시마이 됐어요. 성전이고 뭐고 다 날아갔어요. 없어요. 왜 구약의 마지막 모습이 율법대로 해야 성전 된다, 성전을 붙들어야 하나님 오신다는 그걸 왜 강조하느냐? 전에 성전이 왜 망했고, 그리고 동시에 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가?
그 사실을 전제로 해서 거기에 누가 뛰어드는가? 우리 같은 연약한 육신으로 뛰어들어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을 주께서 해내시면서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다. “네가 알아서 구원을 받아? 안 돼. 그런 것 없어.” 주의 일은 인간의 안 됨을 전제로 해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주께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은, 구원했다는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고요, 죽은 데서 살아난 분의 영이 성령이거든요.
그 능력으로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아까 뭐라 했습니까? 사라진 것에 대한 대결상태, 또는 반박, 반란, 대듦 이런 요소를 사라진 분이 이들을 껴안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여러분 잘 아시는 십자가 지신 분이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냥 주님이 아니고 십자가, 번제로 막혀있는 주님만 해낼 수 있는 주님만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양쪽 다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어디에 관심 두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살펴주시고 우리가 세상에 마음 빼앗겼다는 것을 제대로 지적하시는 그 주님의 성령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그것마저 감격 가운데 기뻐하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