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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41004a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자유게시판역대하

20241004a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8장 12절,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모세의 명을 좇아 매일에 합의한 대로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그렇게 돼 있지요.

어디서 드리는가? 여호와의 단. 뭘 드리는가? 번제. 이 일을 누가 시켰는가? 하나님. 이 짧은 이 문장에서 13절에 사람 한 분 등장합니다. 그 이름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명을 좇아서”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물어야 될 게, “모세, 니가 뭔데?” 니가 뭔데 우리에게 명령질이야, 이것부터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자율성이 있어요. 자율성이 있어서 내 행동의 명령과 지시는 내가 내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명령을 한다? 이건 용납하지 않지요.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애라도 부모가 강제로 교육적 차원에서, “그것 먹지 말고 이것 먹어야 돼. 그건 몸에 해로운 거야”라고 할 때 애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순순히 따라줘요.

그런데 애들 맘속에 원한 쌓입니다. 부모에 대한 원한 차곡차곡 쌓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이란 껍질에 불과하고 인간 속에는 악마가 집어넣어준 악마의 자율성이 있어요. 악마의 자율성.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미 지시받는 쪽에 있다고. 이미 누구로부터 지시받고 있어요. 여기에 대한 명쾌한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답변을 해보세요.

복음을 버림으로써, 또는 복음을 기피함으로써, 또는 복음을 외면함으로써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인간은 뭘 얻고자 복음을 거부해요? 여러분들이 정답을 생각했지요. 복음을 버림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로 인한 나의 완전함’이에요. 악마가 추구했던 건 독자적인 자기 완전함이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나 신약에 나오는 모든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죄라는 것을 굉장히 간단하게 규정했어요. 죄가 뭐냐? 복음을 기피하는 것. 복음을 기피하는 게 죄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기피하는 바리새인, 유대인 보세요.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순수함을 추구합니까?

바리새인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데모한다면 오직 그들이 외칠 것은 뭐냐 하면 “순수, 순수, 순수, 순결, 경건!” 이것만 외쳤을 거예요. “저 개 같은 세리, 창기, 저 더러운 것들은 가라!” 적어도 우리정도 돼야 우리 그룹에 들어올 수 있다. 오직 순수, 순결, 경건.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완전함이에요, 나의 완전함.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죄라는 것은 십자가를 기피하는 게 죈데 너희들이 십자가를 기피하는 죄다,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가요. “너희들은 십자가를 기피하게 돼 있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희들 마음대로 안 되니까. 자율성, 자율성 하지만 사실은 인간 속에 마귀의 자율성만 있을 뿐이지 인간은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시키느냐 하면 복음은 외면하라. 복음을 외면해야 네가 너다울 수 있다는 거예요. 네가 만약에 십자가 복음을 보는 순간 너의 너다움을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선택지를 주지요. “네가 너다운 완전을 추구할래, 아니면 쪼다 될래? 네 자체가 남한테 내세울 게 없는 쪼다가 될래, 안 그러면 그럴싸한 내세울 게 있을래?” 그걸 매일같이 언급하지요.

오늘 역대하 8장 12절에 보면,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린다 했잖아요. 이 번제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길을 막아버린 게 번제에요. 인간이 순수, 순결, 순진, 정결 데모하듯이 몰려가는데, 어디로? 하나님께로 가는데 그걸 차단시키고 막아버리는 게 번제입니다. 번제란 다 태우는 거예요. 순결이고 순수고 믿음이고 소망이고 몽땅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너 없다. 여기서부터 너라는 존재는 없다가 돼요. 이게 번제요. 태워버리니까 없지요. 없애려고 태우는데, 태우는 이유가 없어지라고 태우는 거예요.

올림픽이라든지 아시안 게임할 때 릴레이 경기하잖아요. 세 번째 주자가 열심히 따라와서 바톤 하나 넘깁니다. 그럼 네 번째 주자가 바톤 받고 뛰잖아요. 그 네 번째 주자가 마지막 구간을 뛸 때 세 번째 주자 어디 있지요? 세 번째 주자 어디 있습니까? 카메라에 나타납니까? 없어졌어요. 없고 세 번째 주자가 전달할 게 있어요. 바톤이죠. 바톤을 네 번째 주자가 들고 결승점에 골인하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율법 실천이 바톤이 어디로 넘어가느냐?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넘어갈 때 이제는 너는 여기서 바이바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넘겨. 언약이나 넘겨줘. 내가 쥐고 달릴 데니까 너는 여기서 화면에서 사라져. 번제의 희생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습니다. 번제란 것은 차단, 또는 불연속성, 단절, 쉽게 말해서 막힘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럼 오늘 역대하에서 앞에 쭉 나옵니다만 성전의 모든 제도와 조직을 구비했다는 것, 역대하 8장에서 성전의 모든 게 마무리됐다는 내용이거든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그 취지가 뭐냐?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었어요. 제도부터 확립을 했습니다. 그것과 모세와 무슨 관계있는지 봐야 돼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솔로몬의 업적, 역할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재판의 상용화, 또는 상시화, 또는 고정적 공간에 대한 확보 이걸 솔로몬이 한 거예요.

성전이란 걸 완공시켜서 놔두고 그 성전에서 번제를 드린다. 번제는 보통 세 가지로 나와요. 상번제, 매일 드리는 것. 그리고 월초에 드리는 것. 그다음에 뭐냐? 3대 절기 때 드리는 것. 월초 또는 다른 말로 안식일. 3대 절기도 안식일에 포함돼요. 이럴 때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는 달랑 번제만 드리지 않아요. 반드시 그 앞에 뭘 드리느냐 하면 속건제나 속죄제를 먼저 그리고 난 뒤에 번제 드려요.

그러니까 속건제, 속죄제는 예비제사입니다. 고급식당에서 촌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울 호텔 같은 데는 한 끼에 십만 원 넘잖아요. 십만 원 넘는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멀건 죽 하나 내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촌사람이 이것 먹고 집에 가자. 아직 제대로 본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어요. 먼저 수프 보고 양송이수프만 달랑 나왔는데 그것 먹고 집에 가면 안 되잖아요. 진짜 안 되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그래요. 예배드리고 집에 가요. 죄 용서받았다고. 지금 뭐가 남아있습니까? “주님, 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들아, 집에 가자. 1부, 2부 다 끝났다 집에 가자.” 주님께서 잠깐만, 불러요. “너 어디 가는데?” “내 집에요.” “니 집이 어디 있어? 다 바쳐야지, 나한테.” 방향을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집에 간다는 것은 단절, 막힘, 차단 이것이 없는 곳으로 가요.

그러나 주께서 구원은 항상 차단, 단절된 곳을 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구원이 나의 일이 안 되고 누구 일이 되겠어요?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바톤을 주의 일로 넘기는 겁니다. 맨날 교회 오십 년 다니면서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교회 갔다, 예배드렸다, 집에 가자. 다음 주일 날 오면 되잖아. 오늘 오후에 놀러가자.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기 일만 했지 주의 일로 넘어가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끄는 그 길은 이미 주님 가신 길로 확정 났습니다. 노래도 나오잖아요.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왜 주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줬느냐 하면 딱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딱 그 길밖에 없어요. 주님 가신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근데 주님은 아버지께 다 바쳤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주님 가신 길 관람을 했어, 관광객들. 여기서 주님 십자가 돌아가시고, 여기 빈 무덤 보이지. 부활하셔서. 너무 안 됐다, 그지? 주님 사랑이 넘친다, 그지? 실컷 구경하고 집에 가는 거예요. 그 길을 가질 못합니다. 왜? 주님 가신 길의 특징은 뭐냐? 인간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본인, 나의 일로서의 구원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일로 여겼던 그 구원이 늘 실패를 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십니다. 내 식대로 사는 그것은 구원에 매일같이 실패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논리가 뭐냐 하면 주님 가신 길은 바톤을 인간에서 어디로 넘어갔습니까? 주님 쪽으로 바톤을 넘겼잖아요. 인간이 감당이 된다, 안 된다? 감당이 안 되지요. 그런데 인간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율성이 있지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자율성이 있잖아요. 그 자율성은 모든 일은 뭐로 끝나야 됩니까? 항상 실패로 끝나도록 조치를 해주는 겁니다, 실패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다면 죄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됩니다. 그러면 뭐를 실패하지 않느냐? 자기 구원에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게 죄가 돼요. 참 쉽지요. 바톤을 넘기란 말이야, 바톤을 네가 바톤을 쥐고 마지막 코스까지 달릴 생각하지 말고 바톤을 주님께 맡기는 거예요.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뭐냐? 번제물로 들어가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옵니다, 이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들이 산 제물로 주님께 그냥 넘겨버려라. 왜냐하면 마지막 주님 가신 코스에서는 우리의 싸움,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대결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선 감당할 수가 없어요. 마귀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 해. 주님께 바톤을 넘겼다니까요.

주의 일 안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나의 자율성 때문에 나의 일로 머물기 때문에 주께서는 나를 거듭거듭 실패하게 하신다는 그 대상자가 주의 일에 포함이 돼 있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실패하면 되는 겁니다. 실패도 못합니까? 그 쉬운 걸. 세상에 성공하려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힘들지 실패하는데 뭐 그리 힘들어요?

오늘 아침 뉴스에 올해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 암이에요, 암. 당뇨도 아니고 심장병도 아니고 암이 일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밑에 있던 순위가 5등까지 치고 올라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살이에요. 5등까지 올라왔어. 자살을 왜 하지요?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겠다는 것, 실패하지 않겠다는 게 죄가 되는 거죠.

실패하니까 본인의 자율성이 자기 안의 마귀가 용서를 안 하는 거예요. 막 책망을 하는 거예요. “왜 등신같이 실패했어. 내가 성공하라 했잖아.” 자기가 자기를 막 책망하니까 이게 서럽다고 실패하고 사기 당했다고 담배에다가 술을, 벌써 제가 담배 안 피우는 걸 알지요. 폼 보면 알잖아요. 술을 바가지로 마시면서 서러워서. 처음에는 술, 나중엔 마약….

“나는 안 돼, 안 돼.” 주님 뭐라 합니까? “원래 안 돼.” 안 되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면 구원에 실패하지 않으려는 게 죄라면, 그러면 주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 구원에 실패하지 않겠다는 게 죄가 된다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고백을 하겠어요? “왜 자꾸 저를 구원해요? 구원 안 돼야 되는데 왜 자꾸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구원이 나의 일이다, 주의 일이다? 이미 주의 일 된 거예요. 껍데기는 나를 사용하되 구원은 주의 일이 돼요. 왜냐하면 주님 가신 길은, 주님이 아버지와 함께 했잖아요. 그거는 어떤 인간도 주님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 적 있습니까? 열두 제자가 도와줬습니까? 못 도와줬지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구원받는데 인간이 끼어들지 못했지요. 그러면 내 구원에 내가 끼어듭니까, 못 끼어듭니까? 끼어들면 안 되지요. 그거는 마귀 나라 가지요. 지옥 가지요. 내가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지 못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은근히 노리는 내 구원을 실패하게 하는 겁니다. 끼어들지 않게 하면서 구원이 되었으니까 내뱉어지는 고백은 뭐냐? “왜 자꾸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늘 이것 한 가지만 알고 다 주무셔도 괜찮아요.

보통 교회 가면 내가 구원에 대해서 자기 나름 애를 쓴 것을 남한테 드러내요. “나는 구원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았다, 이것까지 용납했다, 내가 사업이 망해도 구원은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데 이런 고백은 뭐냐 하면 벌써 자기 일이 아니에요. 주님의 구원은 아버지의 손에 있는 것처럼 나의 구원은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의 손, 주님의 능력으로 넘겨졌을 때나 가능한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내 자율성이 그걸 용납 안 해서 문제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솔로몬이 한 업적이 뭐냐, 역할이 뭐냐? 그거는 성전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이공원 만드는 건 다 이유가 있지요. 장래 나라의 기둥이 될 어린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어린이공원. 독립기념관은 뭐 때문입니까? 지나간 아픔과 슬픔을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고자 독립기념관을 만들지요. 독립기념관이 어디 있지요? 천안에. 서울에 하나 더 짓는답니다. 그거는 다 인간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누구한테 필요한 겁니까? 주님에게 필요한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 구원하는데 필요하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성경이 그다음부터 해석이 복잡해지게 되는 거예요. 왜 복잡하냐 하면 이스라엘의 자율성이 끼어든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에 성경은 따지고 보면 간단한데 이게 성경해석에 잡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다 속아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 거예요.

구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전 지었을 때 그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이 우상을 섬겨서 성전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구원에 힘들고 그들은 망했다. 아주 그냥 편하게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해석의 기본 논조가 벌써 잘못됐어요. 어떤 논조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그렇게 애썼는데 이스라엘 쪽에서 차버렸다. 이런 논조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썼었다는 건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건지지요. 구원하지요, 말씀의 완성을. 여러분 라면 끓일 때 생라면 먹고 스프가루 따로 입어 털어 넣고 이렇게 라면 먹습니까? 그렇게 라면 안 먹지요. 라면을 뜨거운 물에 왜 적셔요? 라면다운 라면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죄인을 왜 찾아옵니까? 본인 라면 먹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본인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해석 하면서 이스라엘이 잘했으면 구원할 텐데, 이러거든요. 여러분,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잘했습니까? 잘했지요. 히스기야 왕 때 유월절보다 더 큰 유월절은 없었다고 했어요. 그다음에 요시아 왕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율법 책을 발견하고 율법대로 살았잖아요.

그러면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아 왕이 그만큼 잘했으면 우리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이스라엘은 안 망해야 되잖아요. 그렇게 훌륭한 성군이 나타나서 했으면.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요시아 왕부터 해서 꼴아 박았습니다. 요시아 왕, 훌륭한 왕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전사했어요. 하나님이 그 왕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잘한 히스기야 왕은 나중에 바벨론 사자가 왔을 때 창고 다 보여주면서 ‘우리 집에 냉장고 있다, 우리 집에 차 세 대 있다’ 이러고 있다 홀라당 다 빼앗겼습니다. 금까지 다 가져갔어요, 바벨론에.

뭔가를, 그 당시 인간뿐만 아니고 오늘날 앉아있는 우리들도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 오해가 어디서 온 오해입니까? 하나님 이용해서 내가 천국 가려는 그러한 욕구, 그러한 탐욕이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나 완전해야 돼. 나 죽어서 고생하면 안 돼. 나 내가 너무 아까워.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 거기에 대한 우리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까?

성경에 창세기 3장 보세요. 우리가 구원받을 권한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쳤습니다. 생명나무 따먹지 말라고 내쳤어요. 오늘날은 생명나무는 관심이 없고 교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우기고 있어요. 생명나무는 없어요. 줘야 먹지 뭐 생명나무 어디 있어요.

생명나무, 여러분 먹고 싶습니까? 생명나무, 여러분 갖고 싶어요? 말씀드릴게요, 생명나무. 생명나무 없이는 그렇게 천국에 못 갑니다.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저만큼 치워놨잖아요. 손 탈까 싶어서. 그런데 인간은 생명나무 빼놓고는 다 갖췄어요. 교회 있지, 제직회 있지, 성가대 있지, 교인들 많지. 목사, 집사, 장로 다 구비돼 있지, 선교사까지 파송하는 구색은 다 맞춰놨어요. 사업하는데 이것저것 찾을 때 그때마다 줘야 되거든요.

생명은 어디 있는가? 생명을 주께서 주실 때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생명은 죽음 안에 있어요. ‘특이한 죽음’ 안에 있습니다. 번제라는 죽음, 번제 드리는 제물의 죽음. 솔로몬이 하는 역할은 그것을 상시화, 또는 상용화, 상시가 적당하지요. 한 장소에 매일같이 그 특이한 죽음을 반복을 하는 시스템, 확정된 시스템을 솔로몬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건물 짓고 그 안에서 제사장, 그다음에 성가대, 그다음에 문지기. 이건 다윗이 만든 제도에요.

제사장+성가대+문지기, 24반을 운영하면서 1년이 열두 달이잖아요. 한 달에 교대로 2주 일하고 다음 차 들어가고. 제사장이 1년에 2주 일하는 거예요. 스물넷 교대근무 들어갑니다. 이걸 정규직이라 합니다. 역대상 27장 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이 그렇게 다 정해놨어요. 제사장, 성가대, 문지기 이들이 왜 필요하지요? 이스라엘 나라에 이들이 왜 필요하냔 말이죠?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1923년도 미국의 사회상은 남성 위주였어요. 세계1차 대전 끝나고 난 뒤에 그 시기에 그전부터 남성 위주지요. 왜 남성 위주냐? 그때는 산업화가 고도로 본격적으로 발달되기 전인데 그때 인간들은 토지와 관련된 직업이었습니다. 그걸 농경시대로 보면 돼요. 공장과 기술과 관련된 것 말고 토지와 관련됐는데 미국 서부는 양이나 소를 쳤어요. 특히 소를 쳤단 말이죠.

그걸 카우보이라 합니다. 전부 다 자기 양떼, 소떼 지키려고 권총 들고 그냥 쏘는 거예요. 여성들은 그냥 애만 낳았지요. 애를 낳아야 딸 낳을 확률도 있지만 아들 낳을 확률도 있기에 넓은 초원에 많은 소떼와 양떼를 대를 이어서 업무를 넘길 수 있기 때문에 바깥일은 남성들이 했습니다. 그 시대에 여자들은 교육해야 되고 컴퓨터 배운다는 이런 인식 자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옛날부터 인간의 모든 일은 토지, 땅 위해서 본인의 생존과 관련된 일을 했다 지금 그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서 인간 같은 인간은 남성, 가장밖에 없어요. 그런데 1923년 지나고 1939년 세계2차 대전 되면서 갑자기 전쟁무기 만든다고 산업화 됐잖아요. 이거는 상식이니까 잘 들어놓으세요.

가족중심에서 남성 외에 다른 가족들 여자, 자식들 있잖아요. 자식들은 뭐가 없느냐 하면 주체라는 게 없어요. 그 당시에. 그래서 맨날 우리 아버지는요, 우리 집안은요, 우리 할아버지는요,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소 쳤어요. 양 쳤어요. 큰 옥수수 밭, 면화 농사지었어요. 이런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집안이야기, 옛날 전통 이야기했다고요.

그런데 산업화가 되면서 이 가족들이 도시에 나가서 취직을 하게 됩니다. 취직을 하면서 주체를 누가 주느냐 하면 이 인간사회에서 이걸 시민사화라 하는데 시민사회에서 뭘 주느냐?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주체를 할당을 해요. “너 할 줄 하는 게 뭐 있어?” “이것 잘합니다.” “그래, 그게 네 모습이야.” 주체는 가족이 주는 게 아니에요. 사회가 주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 같은 경우에 가족에서는 주체가 없지요. 근데 그 여자가 나중에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변호사가 돼버리면 그 여자는 뭡니까? 누구 집 딸이었던 그 여자가 뭐가 돼요? 우리 캘리포니아 주의 훌륭한 검사님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곳에 주체가 힘을 발휘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개인주의죠.

그러면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역대하 시대에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어디 있습니까? 역대하 시대에 솔로몬이 성전 지을 때 주체, 나는 누구냐? 그런 것, 나는 누구냐가 왜 거기서 튀어나옵니까? 이스라엘 시대에. 나는 누구냐가 없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중요하지 나는 누군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다, 주체로서 자기를 들어내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습니까? 역대하 8장을 보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성전 왜 필요하지? 제사장, 성가대, 문지기 이게 우리한테 왜 필요한데요? 쓸데없는 것 왜 필요하지? 그만큼 우리가 주체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시 농사지을까요? 카우보이 할까요? 카우보이는 이방나라고 이스라엘 속에 어떤 식으로 들어가느냐 이 말입니다. 말씀세계 속에서 우리가 이미 나도 한 가닥 하는 내가 한 가닥을 버리고 어떻게 역대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느냐 이 말이죠.

솔로몬이 한 게 바로 그겁니다. 침묵의 죽음 곁으로 모든 백성을 단일화시켰습니다. 이게 솔로몬이 한 일이에요. 침묵의 죽음, 아무소리하지 않고 죽은 그 번제의 제물 중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로 모은 겁니다. 근데 그게 번제지요. 매일 드리는 번제를 뭐라 했습니까? 상용화된 상번제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매일 죽어나가는 그 공간으로 모든 백성을 일체화시키는 그 작업을 솔로몬이 했다 이 말입니다. 침묵의 죽음이죠. 이것으로 이방나라를 이긴 거예요. 큰소리치는 영웅적인 왕을 이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백성들은 어디를 쳐다봐야 되지요? 매일같이 죽어나가고 죽어나가는 번제를 드리는 그 성전을 향하여 바라봐야 되지요. 중심을 바라보는 이걸 역대하 6장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역대하 6장을 보게 되면 18절,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나님의 성전도 용납 못하는데 이렇게 거하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들어주세요, 해놓고 22절,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산 자가 통치하는 나라에요,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죽음 안에 계신 분이 통치하는 거예요? 죽음 안에 계신 분이 통치하죠. 이게 바로 생명나라에요. 이게 생명입니다. 생명은 의외로 죽음 안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산 자가 살아 있는 내가 생명을 내 것 만들려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요. 나 영생 얻어서 천국 갈래, 이게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바톤을 특이한 죽음에 넘겨야지 살아 있는 내가 바톤을 쥐고 있으면 하나님께선 그걸 안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할 자를 내가 쥐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실패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이 내 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실패로 만드는 축복을 해주시는 거예요. 아까 죄가 뭐라 했어요? 실패하지 않는 게 죄잖아요. 실패를 안 하게 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인데 우리가 죽은 자를 만나러 가는데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만나 줄 리가 없지요. “제가 철야했잖아요. 금식했잖아요.” 안 만나줍니다. “금식한 네가 살아 있잖아, 철야한 네가 살아 있잖아.” 안 되지요. 할 수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 저 하나님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 받아줍니까? 실패는 주님 쪽에서 실패해야지 지가 알아서 실패한 것은 안 받아줍니다. 이게 어디서 꼼수부리고 있어.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속에 이미 모순된 요소가 들어있어요. 마귀가 지금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율성을 자기 손으로 뽑아내질 못합니다.

옛날 농경시대 때는 아버지가 나를 대표했기 때문에 내가 주체가 없더라도 아버지 하나 든든하면 그냥 묻혀갔어요. 그게 이방나라지요. 이방나라는 아버지 이름으로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나고 각자도생하는 이 시대에 자기가 주인공이 된 이 시대에 죽음이란 건 터무니없지요.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실패해?” 그러니까 정신병자들이 흘러넘치는 거예요.

인간의 내부에 어떤 모순점이 있는가? 이것 말씀드리고 10분 쉬겠습니다. 어떤 노래에 그 모순점을 잘 묘사한 가사가 있어요. 여러분, 제가 가사를 읽어드리면 아하 그 노래, 하고 다 아시는 노래에요.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빨라서 잘 몰라요? 이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하는 거예요. 이별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겁니다. 이별은 이별이지만 그전에는 얼마나 달콤했었느냐. 그 많은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어떻게 잊을까, 해놓고 뒷모습 바라보면서 헤어져놓고 나 외로워서 미치겠다, 이러고 있어요. 그럼 헤어지질 말든지. 헤어져놓고 헤어지면 안 되는데 그럼 나 외로운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럼 다시 합치든지. 다시 합치려면 그 사람이 아마 못 잊어서 다시 올 걸.

그런데 다시 오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러고 있다고. 왜? 다시 사랑하게 되면 앞으로 다시 만나서 사랑하는 가운데 재회하면서 앞으로 눈물 흘릴 일만 남아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또 견딜 수 있을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럼 뭐 어쩌라고? 그 원인이 뭐겠어요, 여러분? 인간은 왜 그래요? 여러분 이야기해보세요. 왜 이렇게 잘라낼 때 잘라내 놓고 자기가 섭섭한 건 섭섭하고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모순점이 있는 거예요? 이 노래 여러분 다 알지만 그래도 기분상 안 들어볼 수 없어요. 강의가 노래교실이 돼버렸어. 여러분 가사를 보세요.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여기까지. 노래교실 아니니까. 자, 원인이 뭐냐 하면 가사에 보면,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가 들어가요.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그다음에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또 나가 들어가요. 언젠가 헤어졌던 그 남자가 나의 곁으로 다시 올 거야. 그래놓고 마지막 또 나와요.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지금 이 모순의 원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자율성, 아까 말한 나는 어떤 경우라고 실패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 누가 집어넣었어요? 마귀가 집어넣었지요. 이거는 사랑도 그렇지만 구원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내 구원을 포기하지 않겠다. 난 주님을 붙들 거야.

주님을 붙든다 해놓고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되는지. 이 노래가 인데 일본노래에요. 슬픈 인연의 가사에다가 신앙 그대로 다 집어넣어도 이게 가스펠송이네, 이게 복음성가네. 아까 다 들을걸.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미련의 주인공으로 뽑아내야 우리가 속이 시원해요. 누구한테 넘겨줘?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정말 내가 망해도 나의 가치는 포기할 수 없다. 아아, 이거….

그러니까 이런 인간에게 아까 처음에 제가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버림으로써 얻고자 하는 건 뭡니까? 정답은 절대적인 나.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고 복음도 안 듣고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그냥 교회에 놀러나 오지 아무것도 안 해요. 왜?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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