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912b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
안양20240912b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존재를 고정화 시키려고 끊임없이 두뇌의 감각을 해마에서 조정하고 선조체로 보내면서 자기 안정화를 추구하지요. 그 안정화 추구하는 그 방식이 전에 있던 먼저 선조체에 들어있던 자기 이미지와 이렇게 다툼없이 껄끄러움없이 수용이 되는 수납이 되는 쪽으로 계속 모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으는 방식에 그 방향성 특징이 뭐냐,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문학을 하든 과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신학을 하든 인간의 마지막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에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이성적으로 아무리 뭘 꾸며도 인간의 본성은 대인적으로 대인관계에서 나 이쁘지 그지? 탐스럽지 그지? 내가 보암직스럽지 그지? 이리 되는 거예요.
나무과실은 그냥 나무였는데 이게 나무 선악과가 인격화가 돼요. 움직이는 선악과에요. 나 어때? 이쁘지 그지? 이쁘기만 한다면 돈이 얼마나 들던지간에 나는 성형수술, 성형수술만 하면 괜찮지. 정형수술까지 해요. 성형수술 정형수술해가지고 내 이미지에 맞는 얼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모습과 이게 차이가 나니까 짜증스러운 거예요.
내 선조체에 있는 이미지하고 거울에 비친 내 눈으로 보는 내 감각에 하고 이게 틈이 생기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 그 분노를 타인에게도 때리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자책해요. 그동안 니 뭐하고 있었냐? 하고 내가 나보고 막 나무랜다고요. 그러면 지가 지한테 스스로 이야기해요.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 잘할게요. 이게 뭐냐, 내부대화거든요.
끊임없이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쉬지도 않고. 추궁하고 나무래지요. “내가 원하는 내가 되라는 말이야. 이 바보 등신같은 너야! 뭐하고 있냐? 열심히 해! 내게 만족스러운 내가 되라는 말이야!” 하고 채찍질하고 나무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속에 간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 왜? 자기가 자기를 자꾸 못살게 구니까요. 못살게 구니까, 하니까 장이수 생각나네. 자꾸 자기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행복은 없어요. 그걸 무의식에서는 그걸 욕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욕망. 욕망은 의식은 해마에서, 무의식은 선조체에서.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 소비가 적으면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무의식. 운전할 때 신경 안 쓰잖아요. 운전 오래하면. 그런데 의식은 이게 해마에서 하는데 의식은 해마에서 해가지고 계속해서 힘들게 내 존재 자체를 아름다운 존재로 변형시켜야 돼요.
시키는 방법은 뭐냐, 내 아름다움에 흠집 되는 것을 빨리 조치를 내서 털어버려야 되지요. 공부 많이 하고, 건강해야 되고, 돈 좀 있어야 되고, 친구 많아야 되고, 누구한테 늘 칭찬받고 사랑받는 것. 그런 게 있을 때 내가 흡족하지요. 내가. 특히 여자분들은 그런 기회가 며칠 후에 옵니다. 추석 때. 전 부치는 솜씨 한 번 보자. 냉장고 열어가지고 집구석 살림 하는 꼬라지 하고는. 검사받는 시간돼요. 그동안 시집와서 뭐했노. 친정에서 이것밖에 안했나. 친정에서 이런 거 배웠나? 이런 거요. 그러면 중년쯤 되면 어머님, 열심히 할게요. 이렇게 하고. 젊은 애들은 내 배째라. 이리 나오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스트레스 받아야 하나.
인간의 욕망은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은 신이 되는 거고, 신의 본 내용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아름다운 것.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그렇게 만든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게 바로 죄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이미 예언이 완성된 입장에서는 수정 불가에요. 어떻게 합니까? 죄에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끄집어내면 그게 자기 백성 돼요.
자기 백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죄에서 끄집어낸 사람이 자기 백성이 되는데 자기백성을 끄집어낼 때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어떻게.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그게 바로 레위기에 나옵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쪼개 뿐다. 쪼개 버리는 거예요.
쪼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쌍둥이 나오지요. 쌍둥이. 야곱과 에서. 쌍둥이가 나와요. 쌍둥이. 창세기15장에 설교시간에 얼마전에 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선조체 장기기억에 들어있는 거예요. 창세기15장10절,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자, 요것을 알기 위해서 9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여기 몇 년입니까? 삼년, 삼년, 삼년. 삼년이라는 숫자가 붙어있어요. 삼년암소, 삼년암염소, 삼년수양, 클래스가 높다. 계층이 있는데 높은 계층의 고급제물은 암컷이고 그 낮은 계층의 제물은 뭐냐 하면 숫양이 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으로 왔다는 그 약속이 아브람의 언약 속에 스며들어서, 아브람 언약 속에 스며든 그것이 구체적으로 아브람을 통해서 제사 드릴 때 그 제물을 통해서 어떻게 삽입되어서 표현되는가, 표출되는가를 보는 거예요. 클래스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Order. 질서에요. 클래스 어떤 계층의 질서. 반차라고 합니다. 반차.
히브리서7장에서 Order. 멜기세덱의 질서체계. 하늘의 질서체제와 지상에 있는 육적인 반열. 족보와 차별되기 위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새로운 Order(오더)를 하는 거예요. 그러한 질서체제를 따로 구분하는 거예요. 클래스가 다른 거예요. 수준이 다르고 계층을 달리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이게 예언이다 말이죠. 예언.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성취가 됐거든요. 성취가 되면 뭡니까? 수정 불가지요. 그냥 위에서 결정한 대로 그냥 따라갈 뿐입니다. 결정한 대로.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요 단어 하나로 다 끝나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현상이에요. 현상.
세상은 모든 것이 현상이에요. 왜냐하면 수정이 불가하니까요. 현상이 되는 거예요. 두 차이 나는 오더. 차이 나는 질서. 그 질서가 각각 다른 현상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긍휼의 그릇, 한쪽은 치니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고, 한쪽은 퉁 치니까 주님에 대한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가 나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쪽이 나를 건드렸잖아요. 그 쪽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 뭡니까? 니쪽 따로 있고, 내쪽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서로 관여하지 맙시다. 그냥 당신은 당신대로 노시고, 나는 나대로 놀 테니까. 그쪽, 이쪽이 되어버려요.
그 귀신이 예수님 두 청년 쫓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왜 벌써 왔습니까? 우리가 아직 멸망할 때도 아닌데 왜 왔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마귀는 알아요. 마귀는 뭐냐, 그쪽과 이쪽이 다르다는 것. 그걸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못하지만, 뭐라고 했습니까? 현상은 숨길 수가 없어요. 나타난 현상을 어떻게 숨깁니까. 나타난 현상을. 못 숨기지요.
결국 뭐냐 하면 무엇이 현상이다? 십자가. 또 무슨 현상입니까? 십자가 + 부활. 죽었다가 살아난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전파의 핵심입니다. 논리를 따지는 게 아니고 현상이라니까요. 수정 불가. 끝났음. 창세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이 다 드러났음. 이건 뭐다? 너희들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나타난 현상이다. 그 현상을 보이면 돼. 안 보이면 이쪽 저쪽이 되겠지요. 그냥 현상이에요.
옛날부터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동네에 머리에 해바라기 꽂고 다니는 미친여자가 있었어요. 그 때 미친 여자도 참 많았어요. 이상하게. 많은데 사회에서는 그 미친 여자를 고칠 생각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까요. 어떻습니까. 고칠 생각을 안했어요. 지켜보기만 했어요. 왜? 그건 인간이 고칠 영역이 아니거든요. 클래스가 다는 세상이에요. 고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고치느냐 하면, 이쪽의 의미가 저쪽의 의미로 소통이 될 때는 고침이 돼요. 약드시고요, 잠 푹 주무시고요, 식사후에 30분 후에 꼭 드셔야 합니다. 빠뜨리지 마시고. 이게 어떤 의미 있게 들려야 약을 먹든지 뭘 하든지 하잖아요.
그런데 미친 사람은 의미가 소통이 차단되어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정신병원이 멀면 말로 안 되고 그냥 밧줄이 제격이에요. 밧줄. 그냥 침대에 밧줄을 묶던지 되는 겁니다. 침대에 밧줄을 묶을 때 그 정신과 의사들은 그 사람을 뭐로 보느냐,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동물 짐승으로 보는 거죠. 개도 말을 듣는데 개보다 더 못해. 말을 안 들어요. 가만히 있어. 하면 말을 듣잖아요. 고양이는 말을 듣습니까? 약간 듣겠지요. 그런데 미친사람은 개보다 고양이보다 더 못해요. 그렇게 한다 말이지요. 그 때는 뭐가 딱이에요. 그냥 현상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잡아죽이려고 했지요. 잡아죽인다는 말은 설득한다든지 그게 아니고 니가 율법을 잘못 해석해서 예수님이 훌륭한 분은 맞지만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시체를 훔쳐가 놓고 제자들이 보았다고 사기치는 거야. 생각 좀 해봐. 머리 어디에 놔뒀어. 머리를 쓰라고. 머리 안에 뭐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전피질 뭐 들어있어요? 이미지 관리가 들어있지요. 이미지 관리는 뭡니까? 다수성이에요. 다수성. 각자 각자 나름 신이지요.
신들의 세계. 다수성의 세계 아닙니까. 다수성의 세계잖아요. 이 선조체 안에 들어있다 말이지요. 이미지로 관리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조사를 많이 했어요. 조사를 많이 하고, 예수님께 조언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말을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안 들었지요. 왜? 미쳤으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보고도,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완전히 미쳤구나! 저 미친 말을 누가 듣겠어. 아무도 안 듣지요. 12제자도 안 들었어요. 도망갔어요.
미쳤기 때문에 이용가치는 있을 수 모르겠지만, 믿지는 않지요. 믿는 말을 해야 믿지. 말 자체를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언은 못 믿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은 못 믿습니다. 아이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이걸 어떻게 믿어요. 이걸. 오른쪽 찍는 것 보다 더 못 믿는 것이 누가 너희보고 돈 달라하면 거저주라.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 깡통 차려고. 삼성그룹 회장한테 가가지고 돈20억 거저주세요. 하면 누가 줍니까? 이 세상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말이지요. 지성적으로.
아, 예수를 이용하는 건 좋아요. 혹시나 부활 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믿지는 말아요. 믿는다는 것은 내가 같이 똘아이 되는 거니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건 부득불 전하는 건데 왜 이게 뭐기 때문에? 이건 주님이 사건을 독점으로 사건을 만들고 사건은 반복이 안돼요. 반복이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반복을 해버리는 것도 이건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예요. 풍랑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도 주님만이 하시잖아요. 죽은 사라의 태를 살리는 것도 주님만이 하시지요.
오늘날 주님이 하시는 게 뭐냐, 같은 사건을 반복하는 거예요. 같은 사건을. 이순신 장군 반복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남해가보세요. 꼭 이순신이 보인다. 그건 미친 사람이지요. 죽어서 없어요. 정신 차려. 없어. 예수님은 이미 고인입니다. 좋은 말씀 많이 남겼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겼는데. 남겼을 뿐이지 살아있지는 않잖아요. 마태복음28장20절에 뭡니까.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럼 그 이야기듣고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봤어? 봤냐고? 봤냐고?
다시 말해서 이 두뇌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서 시각을 통해서 감각이 들어오지요. 그럼 두뇌에 시각을 담당하는 층에서 처리가 되어야 돼요. 처리가 돼서 전피질에 모여서 내 이미지 구성에 이게 재료가 된다고요. 예수님 보여주면 뭐할게? 믿을게. 그게 그 이야기아닙니까. 보여주면 믿을게. 환청이라도 들려주면 믿을게. 그거잖아요. 없어요. 그런 게 없다고요.
인간의 진리? 오늘 이야기가 많이 어려운데 오늘 레위기 다 보고 싶은데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구조적으로 모델을 만들지요. 나를 나답게 하는 구조를 자꾸 짜는 거예요. 세상에서. 짜는데 여기 구조에 중심은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지요.
그러면 내 맘에 맞는 모델을 하기 위해서 이 범위를 공부를 많이해서 어떻게 돼요? 더 넓혀야 되고 더 넓혀야 되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넓히고 넓혀봐도 내가 커진 만큼 이 구조의 테두리도 프레임도 같이 커지기 때문에 이 구조에서 못 빠져나갑니다. 지평선을 누가 잡습니까? 내가 빨리 가면 뭐도 빨리 달아나지요? 지평선도 빨리 달아나잖아요. 지평선도 빨리 달아난다고요. 천문학자들의 딜레마가 그거에요. 새로운 샛별.
새로운 별을 지금껏 나오지 않는 새별을 찾기 위해서 수조원 들여서 망원경을 만들고 공중에 허블 우주 망원경을 띄우고 하잖아요. 그래서 새별 해가지고 체크 했잖아요. “야! 새로운 별 발견했다. 이름 내가 지을 거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 달 뒤에 새별 또 나와요. 그럼 별의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많아진 동시에 내가 안 만큼 나의 한계도 그만큼 멀어지는 겁니다. 나의 한계도.
인간은 어디에 빠졌습니까? 인간은 어디에 빠져있지요? 자신의 모델에 빠져있지요. 그럼 방법은 뭐냐, 이걸 외부로 나가면 실패했지요. 아무리 관찰해도 도망가니까. 내부로 들어왔어요. 내부로. 내부로 가보니까 인간속에 뭐가 있다? 내부로 가는 게 정신분석학이에요. 내부로 가니까 욕망이 있는 거예요. 욕망.
욕망 속을 또 들어가봐요. 인간은 못 참아요. 기어이 알아야 돼요. 욕망 속에 들어가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내 욕망이 아니었어요. 엄마, 아빠 타인의 욕망이었습니다. 타인의 욕망을 내가 붙잡고자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타인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요. 타인의 숫자가. 내가 공부한 만큼 점점 늘어나요. 나 저 사람만 뛰어넘으면. 저 사람 뛰어넘었는데 또 뛰어나와요. 저 사람만 뛰어넘으면. 또 뛰어나와요.
저 사람이 제일 많이 안다. 그런데 알고 저 사람 아마추어라.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어요. 세상에 모든 책을 다 읽어도 계속 저자만큼은 따라잡아야 된다. 따라 잡을 게 계속 생겨요. 그동안 몰랐던 것은 초보도 정복을 못했기 때문에 뒤에 준비된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나를 가리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타인의 욕망이 끝도 없어요. 끝도 없는데 여기서 실망이 나타나는데.
나는 저 사람을 따라 낼 거야. 했잖아요. 자, 내가 저 사람만큼은 내가 공부를 더해서 저 사람만큼 될 거야. 했는데, 그 사람이 아는 것이 헛방이에요. “에게게~ 이 정도!” 다 알고나니까 에게게~ 이 정도밖에 안돼요. 바둑18급이 바둑9급을 복구했는데 9급되고 난 뒤에 보니까 9급이 아이구, 9급 바둑이 기껏 바둑 두는 거라고.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이 이 사람이 9단이 된다. 신진수처럼 세계에서 바둑 제일 잘 뒀다. 신진수가 내가 바둑의 도사입니다. 했어요? 바둑 누구한테 졌지요? 신진수 누구한테 집니까? 인공지능한테 져요.
재미있는 모순이 뭐냐, 인공지능은 뭐보다 똑똑하다? 자연지능보다 똑똑하지요. 자연지능보다 인공지능이 똑똑하잖아요. 그런데 인공지능은 어디서 베껴왔습니까? 어디서 모방했습니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연지능의 일부분 밖에 안돼요. 그러면 등호가 인공지능이 커야 되는데, 자연지능이 더 큰 거예요. 더 크다는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커 더 버리면 인공지능에서 나온 자아가 자연지능을 의지합니까? 인공지능을 의지하는 거예요? 인공지능을 의지하잖아요. 큰 것이 작은 것에 의존하고 의지하고 충성하고 숭배한다. 이게 내부에 뭐가 생깁니까? 모순이 발견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타인에게 걸쳐있는 타인이에요. 허함. 나도 허함. 허함과 허함끼리 만나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남 속에 내가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 내가 내 모델이 된 최종모델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이 되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공백이라 하는 거예요. 공백. 이걸 수학적으로 말하면 내 내부 안에 무한이 들어있다. 그 무한은 뭐냐, 끝없는 공백과 공백으로 연결되어있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 제 책에 나와 있어요. 갈라디아 속의 그리스도 에 나와 있어요. 이 내용이 다 들어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빠져나가야 되지요. 빠져나와서 바라봐야 되지요. 그런데 누가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와요. 성경은 바로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모든 예언이 완성이 되면서 나는 하나의 완성된 분의 현상으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갖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예수님 경우와 똑같아요. 예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는데 그 본질은 뭡니까. 이 구조의 바깥의 구조지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빌립보서2장에서. 십자가 죽기까지 했지요. 여기서 주님께서는 예언 속에다가 쌍둥이를 집어넣은 거예요. 둘 다 현상인데 한쪽은 뭐냐, 인간의 육적인 자의 대표자가 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대표자가 야곱. 한쪽은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 한 쪽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 그게 바로 뭐할 때냐, 갈라디아서 할 때 나오잖아요. 갈라디아서. 에 나온 내용이에요. 다시 한 번 집에 있거든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떻게 하늘에 우리 엄마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갈라디아서4장 26절, 하늘에 우리 엄마가 있다는 거예요. 땅의 엄마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추석 때 오지 마라. 하늘에 있는 느그 엄마나 찾아가라. 이럴 거다 말이죠. 쌍둥이를 해놓고, 쌍둥이를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뭐냐, 수정 불가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확정적이에요. 내가 뭐 되겠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현상대로만 피조물인 인간을 나는 사용하겠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현상을 말로 달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현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정해진 방향대로 질주합니다. 그냥 혼자 가면 지옥가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현상을 보여주는데, 인간은 성도는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길 자체가 소멸됐어요. 인간은. ‘나, 요쪽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야지. 앞으로 요 계획대로 살아야지.’ 이게 성도한테는 용납이 안되고 허용이 안됩니다.
그러나 지옥 가는 사람들은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미 다 예언이 완성된 현상을 못 보여주고 마귀가 잠식되어서 나는 아름답다에 미쳐버린 자기가 자기한테 매료된 자의 현상은 방향이 있어요. 내가 신이 되는 방향. 다시 말해서 어떤 흠집도 뜯어내는 미흡한 것을 늘 보완하고 보충하는데 온 진력을 다해요. 나 요거 모자르잖아. 나 요것만 하면 완성될 것 같은데. 완성될 것 같은데. 구조 안에서 내게 적합한 모델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신으로 신봉하기 위해서 계속 어떤 시도를 하는 거예요.
제물이 쪼개짐.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내가 왜 쪼개져? 쪼개지면 뭡니까? 나는 다루어짐이 되고 이 제물이 있을 때는 명칭이 있잖아요. 소, 염소가 되는데. 쪼개지면 이 제물이 다루어짐이 돼요. 다루어짐. 쪼갠 분의 다루어짐이 되고, 내 고유의 이름은 날아가고 없어요. 그러니 자기가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만날 때, 아비멜렉 만나기 전에, “여보, 당신 누이동생할게.” 이런 계획 없어요. 딱 현장에 있으니까 살아야 되겠다. 그냥 여보라고 하지 말고 내 동생이라 해라. 했을 뿐이지요. 아브라함은 언약의 백성이니까. 언약이 이 스트레스 받는 두뇌에 선조체 해마라는 육신에 본능을 인간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그런데 언약이 더 세요. 언약이 더 세다니까요. 우리는 죄인이 맞아요. 그런데 복음이 더 세요. 죄사함이 더 세다고요.
야곱이 형한테 안 지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센 게 뭐냐, 밤중에 찾아온 여호와의 언약의 하나님이잖아요. 복이잖아요. 복. 나를 조지는 복. 나의 모든 길을 다 없애는 복이에요.
그럼 여기서 불신자들의 어떤 길이 있는데, 그 길을 한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말로 하는 것보다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노래 한 동안 안 나왔잖아요. 임재범의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나는 흉내도 못내겠어요. 소프라노 돼가지고.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여기서 나온 단어. ‘감히’ 영어로 하면, dare.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뜻은 뭡니까? 이겁니다. 너희들이 뭔데. 그쪽이 뭔데. 감히 나를. 감히 나를 왜 건드려! 신이 뭔데. 예수가 뭔데. 당신이 신이면 신이지 왜 누굴 건드려. 감히 나를 왜 건드려. 이거에요. 이게 뭐라고요? 그 사람이 나쁘다? 악하다? 아니지요. 임재범이 나쁘다. 아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두 자로. 현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현상.
분노가 나오는 거예요. 분노가. 그 분노의 결과는 뭐다? 십자가 사건의 현상이 나오지요. 스가랴에 보면 레위언약을 완성한 십자가 지기 직전의 스가랴 예언서가 있다고요. 스가랴 예언서의 특징이 뭐냐, 뭐를 중점으로 하느냐, 성전을 왜 안 짓고 있어? 그 이야기라고요. 성전.
그럼 성전을 지었으면 됐다. 이게 아니고 성전을 지었냐? 아니야. 앞으로 올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령에 의해서 성신에 의해서 성전이 있을 것이다. 항상 내용은 성전중심이에요. 그럼 성전은 어느 언약의 법칙에 적용 받느냐, 레위언약에 저촉을 받습니다.
레위언약은 뭐냐 하면 죽은 제물의 죽은 사건을 그것을 고정화시키고 그걸 시스템화시켜서 그 다음부터 계속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하는 거예요. 그 뿌리는 뭐냐, 태가 죽었는데 이삭이 생겼잖아요. 아까 창세기15장 봤지요. 아브라함은 언약에서 레위언약이 나와요. 그게 히브리서7장에 보면 바로 아브라함 위에는 멜기세덱이 있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칠 때 그 안에 허리에 누가 들었다? 허리에 레위지파가 들어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다는 말은 그 안에 장차 임신될 레위언약을 받을 레위지파도 이미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안에서 만나고 있는 거예요. 러시아 인형 같아요. 인형 속에 인형이 있고, 인형 속에 인형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속에 사도바울있고, 예수님 속에 우리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건은 지나간 거다.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이고, 언약 사건은 지나간 게 아니고 언약 사건은 그걸로 수정 불가에요. 완전체가 돼요. 완성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사건 안에서 계속해서 뭐가 일어나는 거예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현상이. 제목을 바꾸고 싶다. 현상으로.
현상인데, 이 현상은 반드시 짝이 있어요. 쌍둥이 짝을 만나요. 쌍둥이인데 그 쌍둥이가 뭐냐 하면, 니가 내고, 내가 너에요. 그쪽이라 하는데 그 쪽이 내 쪽이고, 내쪽이 그쪽이에요.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육신의 본성과 똑같은 선조체, 똑같은 해마. 똑같은 대뇌피질, 똑같은 에너지의 능률화, 똑같아요. 다같이 죄인들이에요. 죄인들. 누굴 구원하고, 누굴 구원 안하고, 그런 조건이 인간 쪽에서는 전혀 구비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그런 조건 없어요. 똑같아요.
항상 속에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경계를 갖고 있어요. 내 쪽이 형성되니까 저쪽이 있는 거예요. 모두 75억인의 신들. 그것을 아까 한 다양성, 다수성. “서로가 다 다르잖아.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허튼소리 하지 말고.” 하지요.
이 다양성과 다수성에 뭐가 투입되는가, 레위언약이 주어집니다. 레위언약이 주어지면서 뭐라고 하느냐, 죽자. 다 같이 죽자. 십자가는 다 같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만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사는 것이 아니고 다같이 죽는 거예요. 죽자.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서 여기서 쌍둥이를 배출합니다. 쌍둥이.
죽기는 죽는데 특이한 죽음, 특수한 죽음을 일반속의 죽음 속에서 따로 빼내주지요. 그게 부활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고, 저주받아 죽는 건 동일한데 그 저주받아 죽는 죽음 가운데 한 분을 빼내지요. 특별히 부활로서 빼내버립니다. 그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그 대목을 한 번 봅시다. 부활로 빼내는 대목을. 아 참, 스가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스가랴를 보게 되면, 성전을 향하여 성전 구조가 두 개의 하나님의 이루어지는 것을 두 노선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요. 1 → 2 → 1, 1이 2가 되고, 2가 하나되게 해요. 성전은 하나잖아요. 내용을 보면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제사장이고, 하나는 왕이고. 왕과 제사장으로 분리되면서 이게 통합이 되어서 도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고, 왕이라 하는 것은 통치를 의미하지요. 세상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왕께서 심판 중에서 자기 원하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기능. 요 두 가지 기능이 바로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거죠. 그 점을 일단 아시고.
요한계시록 11장이 바로 스가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11장3절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그 다음이 뭡니까? 두 증인이지요. 한 증인이 아니고 두 증인이에요. 예수님의 증인이 한 명이면 되는데 왜 두 명이냐, 왜 둘이 되어야 되느냐, 왜 두 증인이 되어야 되는가, 그건 4절에 보면 뭐냐, “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이게 어디에 나온 내용이냐 하면 스가랴에 나온 내용이에요. 스가랴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스룹바벨은 왕이고 총독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입니다. 두 사람이 뭐 세워라? 성전 세우라고 촉구했어요. 그 시대에. 그 두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8절에 보면,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그 증거하는 그곳에 십자가의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그 동네가 애굽이라 하고 8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되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돼요? 죽지요. 죽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은 끝냈다고 좋아하잖아요. 11절에 봅시다. 삼일반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그들이 두 발로 일어섰지요. 12절에 어디로 갑니까? 그 두 사람이 어디로 가요? 구름을 타고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로 올라가지요. 이게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십자가 사건이 새로운 그 사건으로 존재의 세계에서 모든 새로운 사건이 등장함으로서 존재라는 구조가 바깥에 의해서 허물어지는 거예요. 이제는. 이 세상이라는 구조가 구조 바깥에서 빠져나오신 분에 의해서 이 구조가 드디어 완전히 무너지는 거예요.
13절에 그 때 지진이 일어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자가 칠천이라. 무너지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건의 여파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정 불가할 정도로 모든 것의 예언을 완성한 효과가 되는 거예요. 완성한 효과.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은 이 땅에서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거예요. 십자가 반복. 십자가 반복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기 성도가 필요한 거예요. 주의 증인이 필요한 거예요. 주의 증인은 바로 예수님의 두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 땅에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시고 승천함으로서 심판주가 되시는 제사장과 왕직을 두 개다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 성도가 이 땅에서 살면 안돼요. 그럼 왕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말씀이 안 들어오고 말씀이 지겹고 한 이유가 뭡니까?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누구로 살고 싶어서? 나로 살고 싶어서. 나로. 내가 죽기가 싫은 거예요.
이제 다시 제물로 봅시다. 창세기15장 제물로. 제물이 어떻게 돼요? 둘로 쪼개졌다 했지요. 나라는 자체가 둘로 쪼개지면 나가 없어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쪼개졌어요. 이삭은 자기가 밀었던 에서와 자기가 밀지 않았던 야곱은 쪼개지고, 야곱은 남은 열한 아들과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이름이 뭡니까. 요셉이지요.
요셉의 특징은 꿈이 현실을 지배한다. 또는 통제한다. 꿈이 현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이게 요셉이에요. 그런데 요셉은 언약을 아는 아버지입장에서 요셉은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가 현실을 국무총리로 지배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본인은 요셉도 자기가 그렇게 국무총리 될 줄도 몰랐어요. 왜? 요셉이 자기가 알고 있던 선조체, 알았던 해마, 자기가 알았던 꿈만 알지 꿈이 어떻게 스스로 펼쳐진다는 것은 요셉도 꿈의 흐름에 그냥 딸려갈 뿐이지요.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다만 요셉이 아는 것은 뭐냐, 나보다 뭐가 세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보다 뭐가 세다? 꿈이 더 세다는 거예요. 이게 성도 아닙니까.
성도가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성도가 계획이 없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똑같아요. 성도 안에는 두뇌 없고, 선조체 없고, 해마 없습니까. 자기 대뇌피질 없어요? 칭찬받기 싫어해요? 누가 싫어해요. 다 좋아하지요. “아이고, 전 굽는 거 봐라. 완전 달인이네. 달인. 니가 이거가지고 장사해도 되겠다.” 이런 칭찬 받아보세요. 두 개 굽고, 세 개 굽고 그러지요. “왜 이렇게 맛깔스럽게 너희 집에 옛날 제사지냈나? 어디 교회 다니면서 아버지 장로면서 맛은 이렇게 잘했나?” 그거 보고 “아, 제발 좀 그쪽하고 나가세요.”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편!
“시어머니 뭐 추석하고 나중에 시어머니 백화점가가지고 선물 사드릴까요?” 이리 나온다 이 말이지요. 자기 좋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그거보다 뭐가 더 셉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더 센데 어떻게요. 더 센데. 일단 기분은 좋지만, 십자가가 그 기분을 아주 조질 날이 올 겁니다.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두뇌를 갖고 있잖아요. 두뇌를 갖고 있으면 구조를 갖고 있어요. 구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구조. 구조에서 나는 뭐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고 싶다. 헤겔이 이야기한 건데, 헤겔은 그 많은 책을 하면서 인간이란 뭐냐, 인정받고 싶어서 투쟁하는 존재. 이게 인간입니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왜? 인정받지 못하면 내가 인정하는 것은 짜증나거든요.
내가 스스로 있다 하는 것은 억지다 말이지요. 내가 지리산 속에서 혼자 해봐야 알아주지도 않고 남이 안 알아주면 혼자 알아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아! 나 훌륭하다. 나 착하다. 말의 씨가 된다고 나는 훌륭하다. 훌륭하다고 하면 나는 훌륭해지는 거야.’ ‘백날 해봐야 니 혼자 훌륭해. 니 혼자.’ 안돼요. 정말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서 남들이 와서 “형님, 형님” 할 때 기분 좋다 말이지요. 식구들이 뭡니까. 칭찬하는 존재 아닙니까. 칭찬 못하고 싸울 거 같으면 그거 뭐 식구라 할 수 있어요? 웬수지요.
그런데 이 사랑받고 싶은 이 구조. 이 구조를 주님께서 날마다 십자가로서 이게 쪼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쪼개짐을 당하는 현상으로서의 주님의 십자가라는 제물이 되는 겁니다. 산 제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싱긋이 웃는 사람이 성도에요. “나 요즘 망했어. 그런데 이 망한 건 수정 불가라. 내가 나는 죽을 거 같아. 그런데 이 죽을 거 같은 것이 전에는 죽으면 안 돼! 가 나왔는데, 지금은 내가 지금 죽는다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이것도 수정 불가다.” 하고 싱긋이 웃는 겁니다.
끝으로 그 대목 보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빌립보서 4장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얼마나 진짜 대단한 존재인 것을 좀 새삼스럽게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성경보다가 잠 주무시게 하고 나도 그 정도 되겠다. 이리 나오시면 안돼요. 잠만 온다 하면 안돼요. 여기에 보면 빌립보서4장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웃는다. 다시 말해서 내 실수한 거 보고 웃고, 내가 혹시 잘한 거 없지만 잘한 거 있다면 그것도 웃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나는 철저하게 망가지는 것도 보고 웃고, 풍부에 처한 것도 웃고 그건 당연히 웃지요. 뭐 여유롭고 느긋한데 안 웃을래야 안 웃을수 없지요. 신났지요. 어떤 형편에 있던지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있더라도 일체 비결은 뭐냐, 내가 웃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 나는 이 형편에 대해서 기뻐한다. 왜? 나는 현상이니까.
이미 내 운명은 결정 났으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약 올라서 “니 어디서 배웠냐? 니 어디서 그런 마음을 가졌지? 너는 어떤 대목에서 은혜 받았지?” 이럴 거잖아요. 그것은 이미 나는 죽었으니까. 이게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이에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그동안 나 자꾸 뭘 잊어버려. 나 죽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내 나름대로의 비전과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 어떤 내가 방향을 잡아서 어찌합니까? 이러면서도 어찌합니까? 이것은 협박과 공갈이에요. 내 쪽에서 하나님의 저쪽을 향하여 공갈, 협박하는 거예요.
“이리 나오는데 나 안 건질 거요?” 이런 거요. 웃음이 없어요. 웃지를 않는다니까요. 그게 잘됐다, 잘못됐다, 수정하라, 수정이 문제가 아니고 그게 웃음이 안 나오고 이게 진지한 거예요. 진지한 거. 심각한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왜? 맨날 대화하니까. 조금만 더 참아라. 웃을 날이 올 거야. 웃을 날이 있는 게 아니고요. 망가지고 죽는 날이 그게 웃을 일이에요. 왜? 아브라함이 먼저 웃었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웃을 차례라니까요.
“이번 사태가 이렇게 나한테 26억이 온 것은 이건 내가 일으킨 사태가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태입니다. 허 허 허” “니 방금 웃었어?” “네 웃었습니다.” “왜?” “못 미더우니까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25억을 받습니까. 못 믿겠습니다.” “가져가. 가져가든지 말든지.” 내가 25억 들어온 것만 예를 들었는데 25억 나간 걸 차마 예를 못 들겠어요.
웃을 수 있는 그것은 성령께서 성령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게 쪼개져야 되는데, 아하~ 쪼개지지 않으니 내가 나의 노예고 나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나를 닦달내고 나를 못살게 굴고 그래놓고는 다 남 탓하고 하나님 탓하고, 예수 탓으로 돌리는 거 주여, 이것마저 하나의 현상이라면 웃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고 이 웃을 때 이것이 바로 죄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