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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40912a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240912a창15장10절(현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72페이지 . 레위기는 예언에 속하지요. 그런데 (한국)교회. 중간에 ( )를 없애버리면 나머지는 교회지요. 레위기는 구약에 해당되는 겁니다. 교회는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신약에 보면 등장해요.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예언이라 하는 것은 뭘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현실로 바뀝니다. 현실로 바뀝니다. 한 가지 예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가 옵니다. 세 명의 천사. 한 분은 하나님이고, 두 분은 천사 이렇게 봐도 되는데. 세 명의 천사가 찾아오지요. 아브라함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언을 이야기합니다. 내년 이맘쯤에 니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내년 이 맘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자, 예언한 그 시점에 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들이 없지요. 예언한 그 시점에 아들이 없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아들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지요. 그러면 예언은 뭐가 바뀌었어요? 하나님의 예언은 현실로 바뀌지요. 현실로 바뀌면서 예언이 값을 한다. 예언이 값을 한다.

예언이 값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아기 이름을 뭐라고 짓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에는 이삭인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브라함이라면 사라라면 여러분들이 뭐라고 이름을 짓겠습니까?

그 이름에 긍정적 이름을 짓겠습니까? 자기 부정적인 이름을 짓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긍적적으로 짓겠지요. 축복, 은총, 한나, 은혜 보답 이리 하는데 이름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름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농담입니다. 농담. 왜냐하면 웃었다 이 말이지요.

언제적 이야기에요? 1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년 전에 예언 앞에서의 인간의 자세, 인간의 태도가 여기 예언과 인간 사이에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요. 단절되어 있는 상태가 뭐로 들어오는가, 이름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예언의 성취자는 인간일 수가 없지요. 이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우리는 하등 우리는 끼어들 수 없었다가 이름이 되어버린 거예요. 예수. 예수에 대해서는 그 당시 흔하고 흔한 이름이 예수에요. 구원자 예수아 또는 여호수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마태복음1장21절에 보면 설명을 해놨어요. 설명을. 예수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을 해놨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리 되어있지요. 11자지요. 11자를 압축을 한 번 시켜 봤어요. 이게 뭐가 나와요? 예수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안 나오지요. 예수 안 나오지요.

예수라는 자체는 그냥 구원자.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여호수아. 모세 그 다음에 여호수아. 그냥 여호수아 이름이 너무나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자식 낳을 때 여호수아라고 이름을 붙인다 말이지요. 그 여호수아는 구원자에요. 아무리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붙여도 여호수아 이미지 바깥으로 못 나와요. 왜? 여호수아가 모델이기 때문에. 원형이기 때문에.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름을 예수라 해놓고 간단한 이름을 해놓고 설명이 너무 길어요. 자기 백성을, 그냥 백성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의 자기 백성. 구원을 죄에서 건져놓고 백성으로 규정하는. 추후에 규정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의 일을 선행하려면 일단은 1번, 백성은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야 백성이 발생되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백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동안 유대 백성들이 자기 구약 성경을 가지고 백성이라고 우기는 것은 이것은 바로 예언과 본인 사이에 단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을 우리가 잘 안다. 우리가 지키면 우리가 예언대로 우리가 구원받는다.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에요. 예언 자체가 인간하고 단절되어있고 예언의 성취는 인간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언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이 레위기는 예언이에요. 이 레위기를 딱 보면 왜 우리는 레위기를 못 지키고 주님만이 할 수 있느냐, 요런 쪽으로 흘러가야 돼요. 왜 우리는 못하는가.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첫 번째는 백성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몽땅 죄의 세상이 되어야 돼요. 몽땅. 이게 두 번째입니다. 백성이 없어야 되고 몽땅 죄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야 돼요. 죄에서 누구 하나 지가 거기서 기어 나오면 그 사람만큼은 죄가 아닌 셈이 되니까 이건 안돼요. 말이 안돼요. 구원 받은 백성도 죄 속에 있어야 돼요. 죄 속에 있어줘야 돼요.

전에 대구강의에서 죄라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게 죄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을. “그냥 지켜. 그래. 너 자신을 지키라고” 여기 중요한 문장 하나 붉은 걸로 쓰겠습니다. ‘현실이(현 세상이) 내가 생각한 Model과 안 맞다.’ 내가 생각한 현실이, 현실에 대한 설명이, 내가 생각한 모델과 안 맞다면 내 생각의 모델을 맞추기 위해서 현실을 재해석하게 되겠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이 없을까”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생각한 나의 모델과 실제가 안 맞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생각한 모델과 나는 맞춰야 되겠어.” 맞추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가 알던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도입하게 되고 현실을 내가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 현실은 누구 현실 되지요? 내게 맞춤 현실이 되겠지요. 내게 맞춤 현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결과가 뭐냐, 이거에요. 다양성. 지난번에 강남 강의할 때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복음을 알지만 우리가 복음을 알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라 그랬어요. 다르다. ‘다르다’가 기다리고 있어요. 세상은 뭐를 거부하느냐 하면 틀리다를 거부해요. 맞고 틀리다를 용납하지 말고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다양성, 다수성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자, 이 세상이 그렇지요.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를 이 빨간 거로 쓴 거예요. 이유가 뭐냐, 나는 여기 있고, 세상은 내가 원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그러한 모델에 맞춰야 되는데 이게 세상이 안 맞출 때는 내 쪽에서 바뀌어야 합니까? 아니면 세상을 재해석하고 싶어요? 세상을 다시 재해석하고 싶은 거예요. 세상을.

우리 인간사는 거 굉장히 간단해요. 내 쪽에 문제 있다가 아니라 세상은 다양성에 있으니까 거기서 내가 나를 긍정할 만한 요소를 따로 뽑아서 꽃다발처럼 이렇게 재료를 모으면 되잖아. 나는 내가 모아놓은 그 세상 현실 속에서 내가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세상 뭐있어. 그거지. 그게 바로 다수성이고 다양성이에요.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뭡니까? 틀리다는 말을 나한테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뭔가 다르다는 말을 하라는 거예요. 다르다. 얼마 전에 강남강의에서 요걸 짧게 요 이야기만 한 거예요. 모델 이야기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거고. 모델.

계속 모델 찾기에 나서는 거예요. 모델 찾기. 예수님이 제시한 모델이 마음에 안 맞다면 그 다음에 뭐하면 돼요? 부처 찾으면 되잖아요. 부처라는 모델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내게 맞는 내 욕망에 맞는 내 모델은 모델에 맞추기 위해서 부처가 하던, 예수가 하던, 공자가 하던, 거기에 내가 만들어내는 나만의 맞춤 현실을 내가 만들어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보겠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변화 시도.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 보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증명할. 여기 제일 먼저 뭐가 나왔어요? 나의 모델 할 때, 뭡니까? ‘나’가 나오지요. 그런데 다시 봅시다. 예수님은 예언의 완성이지요. 자, 예언의 완성은 어렵기 때문에 일단 예언으로 갑니다. 자, 예언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끼어들 수 없다 했지요. 그리고 예언은 인간과의 단절을 전제로 해서 주어지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언의 성취자가 누굽니까? 예언을 던진 언약을 던진 그 분이 스스로 성취해 나가지요.

여기서 무서운 이야기가 있어요.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기 때문에 제가 뜸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예언이 성취가 되면 이건 이미가 돼요. 이미. 이미가 되게 되면 수정이 불가합니다. 이것만큼 인간에게 무서운 게 없어요. 수정이 불가한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예언이 그동안 안 들키고 있다가 예언이 성취되는 자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에 의해서 꾸준하게 하나님은 예언을 수정한 적이 없고 똑바로 예언 성취만 노리면서 진격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예언이 이미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되고 완성이 되어버리면 수정이 불가해요.

수정이 불가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고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내 운명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까 인간이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모델을 찾지요. 존재에서 뭘 찾는다 했어요? 존재에서 뭘 시도한다? 변화지요. 변화의 내용이 뭡니까? 그 속 내용이 뭐예요? 내게 맞춘 세상에 대한 내가 생각한 내 모델에 맞춘 현실에 대한 해석거리를 수집하는 거죠. 채집, 채취.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쉽게 말하면 긁어모으는 거예요. 긁어모을 때 “나는 안 돼!” 이거 하려고 긁어모읍니까? “나는 행복해야 돼!” 그것 때문에 긁어모으는 거예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 긁어모으는 겁니까? 자기를 긍정해서 긁어모으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분명히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잖아요. 구원은 뭐냐 하면 강제로 헉 헉 허덕이고 있는데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지옥에 간 부자를 아브라함이 끄집어내는 경우, 아브라함은 그런 일이 없지만, 그건 예언의 경우에서는 그게 예언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그게 가능해요.

그러나 예언이 성취가 되어버리면 건질 자는 건지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는 거예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자비의 긍휼의 그릇이라고요. 그걸 로마서9장, 로마서1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끝났다는 거예요. 모든 게. 끝났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이상 이삭을 믿을 이유는 없어요. 비록 이삭이 태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이걸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기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나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이삭 이름. 니는 하나님의 이름을 농담으로 웃음거리로 봤잖아. 이름을 웃었잖아!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웃는 것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웃던 울던 그게 무슨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요. 니 아들의 이름이 우습다는 말은 이제는 아들의 존재를 놔두고 니는 이제 거기서 니 존재라는 아들 존재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당하는 거예요.

내 중심의 모델을 찾는다는 자체가 헛수고가 되는 거예요. 내 중심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삭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기 때문에 내 중심의 그 앞에서 내 중심의 내게 맞춘 내 모델의 인생, 내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 같은 것은 이것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아브라함은 그 현실을 이삭의 예언된 성취된 현실을 수긍하지요. 받아들이지요. 그게 시험에 통과한 거예요. 그게 시험에 통과한 겁니다.

시험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참여된 것에 시험이에요. 참여한 것. 참여해서, ‘나 위주의 현실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용하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었구나!’ 하고 그걸 소급해서 되돌아보면서 파악하는 거예요.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뭘 해야 되는가, “이삭의 하나님이 누구시지?” 같은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아브라함이 자기가 주인공 있을 때는 아브람의 하나님 생각했는데, 자기 예상 밖의 일. 자기 예상을 거치지 않고 다른 노선으로 이삭을 줘버릴 때, 이삭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삭의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돼요?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없어요. 뭡니까?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예수님은 누구시냐는 거예요.

자, 갈릴리 바다에 파도가 일었습니다. 파도가 일었을 때에 12명의 제자들의 관심사는 파도입니다. 저 파도를 이겨야 돼요. 배속에 물들어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물 퍼내야 돼요. 어떻게 든 이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이 현실이 자기한테 비극적이고 불행스러워요. 이 풍랑이. 이 갈릴리 바다 복판에서 풍랑이 인다는 자체가 그럼 살아왔던 자체가 모든 자기의 기억과 과거가 물속에 빠져서 다 날아갈 판이에요.

열심히, 열심히 나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뭘 하지요. 물 퍼낸다든지 하지요. 그럴 때 결국 하다 하다가 안돼서 누굴 깨웁니까? 그 때까지 계속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있었어요. 그 말은 제자들의 하는 일에 나서서 조언해서 이리해라, 이리해라,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마치 없는 존재와 같아요. 제자들에서는 풍랑일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는 존재고, 예수님은 그걸 알고 내가 없는 존재 될 게. 하고 주무셨고.

그들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깨울 때 제자들은 뭐냐, 우리가 안 되는데 우리는 쪽수가 12명 아닙니까. 12명이 해도 잔잔하지 않은데 예수님 하나 그러면 13명 되지요. 13명이 한다고 풍랑이 잔잔할 리는 없을 거 아닙니까. 그냥 답답해서 깨운 거죠. 답답해서. 어떤 노림수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우리 죽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에게 통보하려고 깨울 수도 있는 문제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없느냐” 했어요. 너희들은 믿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제자들이 믿지 않았을까요. 바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뭐하는데 바빴습니까? 내 힘으로 내 과거를 지키는데 내 존재를 지키는데 바빴던 거예요. 예수님은 뒷전입니다. 24시간 내 가치 지키는데 몰두하고 열중하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착실할 수 없어요. 개근상을 줘야겠어요. 자기 일에는 그렇게 충실하고 충성하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자기 한 몸한테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깨울 때에 예수님께서 먼저 믿음 없다는 걸 먼저 했어요. 사태를 해결하는 게 아니고 믿음 없다는 걸 먼저 질책한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믿음 없다는 사실, 예수 나와 너 사이에 끊어져 있다는 관계가, 같이 옆에 있어도 끊어져 남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풍랑이 동원됐지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해내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풍랑과 바다도 꾸짖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천사가 태가 뭔가 가능성 임신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애 놓는다는 말은 우리를 질책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믿음이 있은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은 인간을 피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인간을 피해서.

지금 하나님의 작전이 믿음 없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이 믿음 없음으로. 신나지 않습니까? 믿음 그 따위 거 준비할 필요 없어요. 믿음 없이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믿음 있어버리면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건 자기 자신을 신봉했던 그것을 그냥 견지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날아가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요. 지옥가지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옥 갈 자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이 뭐냐, 그들의 믿음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풍랑과 파도를 꾸짖을 때에 그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뭐냐, “누구세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옆에 있는 예수님이 내 모델에 맞춘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토록 몰랐던 거예요. 내가 생각한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던 겁니다. 내가 생각한 다른 예수님이 내게 있었던 거예요. 내 모델에 맞춤 예수님이 아니었어요. 내 모델 나와 나의 모델 모든 걸 다 부정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이삭 아들가지고 사용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12제자에서는 뭘 가지고 사용했습니까? 풍랑과 바다가지고 사용했지요. 오늘날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뭘 사용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 받은 계시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계시에 의해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의 계시의 핵심은 그거였습니다.

아까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태가 죽은 데서 살았고, 없는 데서 아들이 생겼지요. 풍랑 같은 경우에는 갑자기 풍랑이 일어가지고 옆에 있으면서도 낯선 예수, 내 사유, 내 생각에 의해서 연결된 예수가 아니고, 내 사유를 끊어버린 예수님 쪽에서 내 사유를 모든 생각을 끊어버리는 예수님이 등장했지요. 풍랑을 통해서.

그럼 오늘날에는 뭘로 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핵심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요. 로마서4장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서4장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 분이 죽은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함이요, 그 분이 살은 것은 우리의 의를 인함이라. 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로마서4장25절.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그러면 그 말씀대로라면 죄라는 것도 인간은 그동안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 자체도 진짜 죄의 개념은 끊어져 있고 의라는 개념도 진짜 의라는 개념과 끊어져 있지요. 왜냐하면 죄와 의는 누가 독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었다. 인간이 죄라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인간이 의라고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죄가 나오고 예수님이 살아남을 기초로 해야 비로소 의가 새롭게 정리되고 개념이 확정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단독적이라 말이지요. 예수님이 단독적. 한 번 적어볼게요.

사도바울이 구원받았잖아요. 아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십니까? 이거지요. 갑자기 관심사가 자기가 아니고 누굽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도바울이 거기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질문을 던지고 거기서 해답 받은, 주님께 받은 해답은 쫙 나열하면 사도바울의 편지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와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겁니다. 그전까지 인간이 아는 죄와 의는 다 거짓이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독단적이에요. 의미를 품은 자. 또는 의미를 그 다음에 독단적으로 품은 분. 의미를 독단적으로 품은 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모든 진실과 비밀이 다 나오는 거예요. 이것을 구약과 연관시키면 예언의 성취가 되지요. 아까 중요한 거, 예언이 성취되면 무엇이 불가하다? 수정 불가. 하~ 이거 제목으로 하고 싶다. 수정 불가.

수정 불가해요. 수정 불가의 특징은 인간의 어떤 변화를 시도해도 소용없는 짓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독단적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나서서 거기서 애걸복걸하고 요 좀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게 성립이 안돼요. 수정이 안 된다니까요. 변경 불가에요. 주님은 예언대로만 실시했고 그게 아버지 뜻으로 다 이루었고 다 이루었다는 말은 수정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못 고쳐요. 합격, 불합격을 이게 고칠 수가 없어요. 이게.

야곱은 사랑했으면 못 고쳐요. 에서는 저주 받았으면 에서가 아무리 사정해도 안 되지요. 그게 이삭의 하나님이에요. 이삭이 평소에 자기 큰 아들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이건 완전 둘째 아들한테 축복이 몰빵갔지요. 오죽했으면 큰 아들에 뒤늦게 와가지고 뭘 요청합니까. 남은 축복이라도 없습니까?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게, 도대체 에서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에서가 잘못한 게. 일도 없어요. 에서가 잘못한 게 일도 없다고요. 그걸 이삭이 알아요. 착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나쁜 짓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나쁜 짓하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착한 일하면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이걸 쳐버리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언입니다.

이 의미를 독단적으로 품었다. 수정 불가.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왜 전하느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사도바울 니는 왜 설치느냐, 니는 입 다물고 있어. 주님이 다 했다며. 니가 안 설쳐도 안 외쳐도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고,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잖아. 그런데 왜 니가 복음전파를 왜 해.” 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오늘 레위기와 굉장히 중요한 관계가 있어요.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존재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서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있다로 말미암아 놓치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사건입니다.

존재의 세계에 우리가 놓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건입니다. 레위언약은 제사지요. 제사. 제사는 사건을 고정화시키는 체제입니다. 사건을 고정화시켜요. 이건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어요. 사건이란 지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사건 지나고 그 현장에 보면 사건 없어요. 그냥 사건의 벌어진 흔적들 이런 거만 있지, 사건 자체는 없어졌어요.

옛날에 찬송가 부를 때 은혜 받았다. 그 찬송가 불러보세요. 은혜 받는가. 안 나오지요. 안 나와요. 사건이 없이 존재만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그 때 그 사람과 똑같이 모아가지고 똑같은 행동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수학이에요. 5년 전에 2+3=5였습니다. 5년 후에 2+3= 얼마입니까? 5지요. 똑같이 나오잖아요. 한국에서 2+3=5입니다. 미국가면? 2+3=5지요. 똑같잖아요.

변화 속에서 이 변화를 존재로 전환하기 위해서 학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수학, 과학, 철학, 내 존재를 동질화시키는데 보탬이 되는 아이디어. 아이디어들을 이 세상의 학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 존재를 오늘 이 존재를 내일 되도 내가 되기 위해서 한 달 뒤에 내가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를 붙잡고 나를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애쓸 때 그것은 나를 완전히 포장화시키는 적절한 모델꺼리를 찾아다녀서 그것으로 나를 입히는 거예요.

이걸 부산강의에서는 이걸 세자로 했습니다.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튀김 할 때 튀김옷 입히잖아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세자로. 이미지. 인간은 이미지에 죽고 이미지에 살지요.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원하는 내 모델에 맞는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자살해요. 밥 못 먹어 자살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있긴 있겠지만 거의 없어요. 빚이 많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빚이 많아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나는 빚져서는 안 된다는 나의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이미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두뇌에서 전피질이 있고요. 여기에 선조체가 있고 여기 해마가 있어요. 해마는 단기기억이에요. 단기기억. 그런데 단기기억을 계속 해마가 붙들면 전체 두뇌의 에너지가 많이 소비가 돼요. 이 두뇌의 에너지는 신체 20% 차지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에너지가 과다한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 주입된 에너지와 소비된 에너지가 균형이 안 맞으니까 모든 내장기구 다 망가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에너지가 망가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해마가 업무량이 너무 과다한 거예요. 그래서 어떠냐, 기억에 온 거 가지고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된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 가만히 있어도 자동으로 되는 운전한지 오래된 거, 자전거 타는 거, 헤엄치는 거 이런 거. 수영하는 거, 오래된 것은 선조체에다가 이걸 저장을 해버려요. 장기저장은 선조체에서 하고 해마의 단기기억 가운데서 전체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전에 있는 선배되는 기억에 저장이 되어버리면 에너지 효율을 줄일 수 있잖아요. 에너지 압박을 줄일 수 있잖아요. 그게 인간의 육신의 본능이다 말이죠. 본능.

그러면 여기에 선조체에서 나와서 형성된 게 이게 동영상 시청, 청각, 이런 동영상 이걸 담당하는 두뇌에서 집합에서 여기서 상징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상징. 이 전피질이 상징을 한다고요. 나는 지금 이 모습일 거라. 그럼 내가 이 모습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외부에서 감각이 들어오는데 그 외부감각이 어떤 외부에요? 외부가 어떤 외부입니까? 타인이겠지요. 타인. 남.

어릴 때부터 남들로부터 계속 선조체에 누적된 “너는 이게 맞아. 너는 이 모습이야. 너는 이래야 돼!”라는 것을 계속 들어왔잖아요. 들어왔으면 그것을 자체적으로 그것을 해마라는 기억을 통해서 선조체로 옮기면서 자기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의 에너지를 최소화시킬 수 있고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자기의 이미지의 특징이 뭐냐, 이게 선악과를 닮았어요. 뭐냐 하면, 아름답다.

아름답다가 뭐냐 하면 진리가 되고, 아름답다가 뭐냐 하면 선이 돼요. 진, 선, 미. 삼위일체에요. 삼위일체. 진, 선, 미, 아름답다는 겁니다. 모든 각자의 이미지의 공통점이 뭐냐, 나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름다움이 깨졌을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아름다움이 깨진다면. 이 선조체에 문제가 있지요. 그럼 선조체에 문제가 있으면 이걸 억지로 누가 동원되어야 돼요? 해마가 동원되어야 되겠지요. 새로운 기억들을 계속해서 채취해야 되지요. 수집해야 되겠지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나는 뭐하다? 아름답다.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아름답다. 바로 아름다움의 절정은 바로 청년 때에요. 청년부터 인간은 이제 자포자기에 들어갑니다. 왜? 선조체가 많이 피곤하면 안 되니까. 아이구, 아름다운 것도 다 귀찮다. 뭐 젊을 때는 다리 내놓고 미니 입지만, 나이 팔십 넘은 사람이 미니 입어보세요. 욕합니다. 치마 길게 해가지고 발톱도 안 보이게 해놓고, 나는 뭐든지 피곤하면 짜증 나.

분노는 어디서 나온다? 나의 에너지 체계에서 외부 압력이 강하게 공격하게 되면 선조체에서 분노하지요. 분노하면 밀어내지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마라.” 1번, “저리 가” 2번,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마!” 3번, “먼저 너가 나를 건드렸잖아.” 이걸 뇌 신경조로 하면 뭐냐, 선조체의 반응이지요. 해마, 선조체의 기억. 기억이 자아니까요. 기억된 것이 상징화 이미지로 남으니까요. 어때요? 인생 간단하지요.

나라는 인생이 몇 분 걸렸어요? 몇 분 안 걸렸지요. 해마, 선조체, 피질, 가는데 다 끝났지요. 간단한 거예요. 에너지의 활용? 끝. 그러니까 노인들 보고 교회가라 하지 마라 말이지요. 피곤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어머님,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교회 나가야 되지요.” 하면 “왜 자꾸 교회 나가라고 하느냐”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 니가 뭔데?” 누가 먼저 건드렸어요? 예수가 나를 건드렸잖아요. 나를. 예수가 나를 먼저 건드렸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나온 불신자의 반응은 뭐냐 하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 그 쪽. 그 쪽이라는 말.

자, 차가 이렇게 가다가 접촉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부주의 한 사람이 86살 먹은 노인네 운전사가 문 열고 나왔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쪽에는 22살 먹은 애가 운전하다 나왔다. 그러면 둘 다 선조체가 정상적이고 해마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어떻습니까.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운전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겠지요. 그런데 젊은 애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스트레스가 뭐냐 하면, 새롭게 주어진 그러한 감각이 내 나의 이미지에 손상 갈까봐 이 두뇌에서 본능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죠. 갑자기 할아버지라는 말을 안 하고 나이 세배나 많은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쪽하지요. 그쪽. 그쪽이 잘못해서..., 갑자기 그쪽이라 하는 것은 내쪽, 그쪽은 대등한 사회 통념상 대등할 때나 내쪽 그쪽이지 나이 많을 때는 그쪽하면 아니잖아요. 너무 성질나서 그쪽이. “그쪽이 나를 건드렸잖아요.”이러지요.

그러면 자기의 모델을 찾는 사람에게 예수는 뭐가 됩니까? 예수님 하다가 뭐가 돼요? 그쪽이 나를 먼저 건드렸잖아. 그쪽이. 신이 나를 건드렸잖아. 신이. 신 그쪽이. 그러면 그쪽이라는 것은 밀어내는 거죠. 그쪽 말고 이쪽은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죠. 나는 뭐예요? 나는 신이죠. 내가 신인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은. 아름다운 나를 안 건드렸으니까 지금 예수를 믿은 거 같지요. 그러나 나는 어떻다? 나는 아름다운 존재에요. 왜? 선악과가 뭡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존재거든요. 악마는 선악과의 모습을 그 이미지 아름다운 모습을 인간 속에다가 악마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제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지만, 그 악마가 집어넣은 선악과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우리 자신은 이 세상 천하보다 나보다 귀한 존재는 없어요.

내가 신이 될 때 에너지 효용이 가장 적게 되고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될 때. 두뇌의 소비의 양이 적어지니까. 전기세가 적게 나온다 말이에요. 전기세가. 지금 낮 기온이 21도가 되고 저녁 기온 17도 되어보세요. 에어콘 틀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전기 값 적게 나오지요. 그럴 때 우리는 날씨가 선선하게 불 때 우리는 뭐합니까? “아휴, 왜 이리 행복해.” 하지요. 그게 육신이에요. 에너지 효용이 아주 작게 드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범죄 할 때부터 인간은 그랬었어요. 그런데 그런 인간들 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뭘 줬습니까? 레위기를 통해서 구약에서 뭘 줬어요? 하나님의 예언을 줬지요. 예언을. 예언을 주신 거예요. 예언을.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을 듣고 물었지요. 왜? 아름다운 나를 더 아름답게 해 줄 거라고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수치라고 되어있어요. 치욕. 수치스럽게, 치욕스럽게.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아이고, 이스라엘아, 니가 믿던 하나님한테 니가 당할 줄이야. 아이고, 껄껄껄. 고개 흔들면서. 너희들 참 안됐다. 여호와가 뭔데 여호와가 다 해줄 거라고 그걸 그렇게 믿나? 이 바보야! 우리 봐. 자유롭잖아. 좀 본성대로 놀아. 본성대로. 억지 부리지 말고. 너 육신에 맞게 해. 니가 신이야 바로. 니가 신이야.” 그게 부처입니다. 그게 부처에요.

이거 덤으로 이야기하는 건데요. 불교의 부처의 주장이 이거에요. 부처는 흰두교에서 나왔거든요. 흰두교가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잠깐 하면. 흰두교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대책이 없어요. 왜? 죽고 난 뒤를 모르니까. 그래서 흰두교의 대책은 뭐냐, 죽은 조상의 영혼 붙들면 된다는 거예요. 왜? 죽은 사람 다 모여있으니까. 모일 때 괜찮은 모임. 지옥 안 가고 낙원에 모여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부처는 그걸 반대했어요. 그리하려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늘 제사를 드려야 돼요. 누구한테? 선배한테. 선배는 누굽니까? 죽은 조상한테. 살아서도 헤어지면 안 되고 조상은 죽어서도 헤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흰두교에요.

왜? 사람은 육체는 죽지만, 뭐는 남아있기 때문에. 골치 아프게 영혼은 남아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영혼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이에요. 살아있을 때는 육체라고 하지만, 죽고 나기까지 괴롬이 있으면 이건 보통 골칫거리 아니잖아요. 그건 흰두교고. 부처가 하는 말은 그것의 반대에서 석가모니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 조상한테 묶이지 말고 해방하자. 그걸 해탈이라고 하고. 그 해탈을 바꾸면 뭐냐, 내가 곧 모든 의미를 하는 독자적인 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부처이야기입니다. 내가 신이다.

그게 우리한테 맞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제사도 필요 없고, 기도도 필요 없고 오직 깨달음만 필요한 거예요. 내가 신이다. 깨달음 내용이 뭐라고요? 내가 원래부터 신이었어.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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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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