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912b 요한일서 3장 1절(세상)-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40912b 요한일서 3장 1절(세상)-이 근호 목사
인간 쪽에서는 못 만납니다. 인간은 왜 못 만나는가? 인간은 이미 악마에 빙의되어 있어요. 악마에 빙의.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악마.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악마에요. 이걸 현대 용어로 바꾸면 ‘기계’입니다. 인간은 없고 기계뿐이에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요.
기계이기 때문에 이 기계가 작동하는 이 공간을 ‘환경’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환경을 신약 성경에서는 ‘이 세대’,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할 때에, ‘이 세대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도 되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도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환경을 둘로 나누는 겁니다. 한쪽은 악마에 빙의된 환경이 있는 반면 그 반대말이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기름 부음이.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뭐냐? 바로 매개죠, 매개. 성령. 예수님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거든요. 그러면 예수님만 성령 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 해당되는 사람들도 기름 부음1, 기름 부음2, 기름 부음3, 기름 부음4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럼 ‘우리’가 되겠죠. 매개가 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1번 타자로 죽은 데서 부활하잖아요. 그다음에 2번 타자, 3번 타자,…. 예수님이 샘플이 되어 그게 표본이 되어서 계속 그 뒤에는 예수님께 일어나는 현상이 그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 이건 성령에 빙의된 사람들이죠. 기계죠.
이 성령의 기계들을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노예’라 해요. 의의 노예. 그런데 악마에 빙의된 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노예’라 합니다. 노예는 자율권 갖는 게 없어요. 그냥 기계라니까요. 노예는 기계입니다. 자기 의사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그게 주인과 노예 관계에요.
인간의 주인은 악마에요. 빙의되어 있죠. 이런 것을 전제로 해서 주의 매개가 작용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러니까 쉽게 하면 무슨 뜻이냐? 모든 성경을 볼 때에 악마의 매개되었을 때 나오는 성경 해석부터 시작하자는 거예요. ‘마귀가 성경을 보고 마귀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아이고, 마귀가 성경을 해석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까? 있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3종 세트 아닙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바리새인적 해석, 사두개인적 해석, 서기관적 해석.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믿음, 소망, 사랑은 없어요. 없고 착함이 있잖아요. 착함은 있는데 매개가 없어요. 여러분 어느 것 할래요? 착하시렵니까, 안 그러면 매개와 더불어 있을래요? 좀 더 잡숴야 되나? 빵 더 잡숴야 답변이 나오는가. 착함으로 구원받으렵니까, 아니면 매개로 구원받을 겁니까? 중보로 구원받을 겁니까?
그러면 뭘 포기해요? 진짜 중보로 구원받는다면 뭘 포기해야 됩니까? 착함을 포기해야죠. 그 착함이 어디서 나온 착함이냐? 착함, 악함이란 인식을 누가 심어준 거예요? 하나님이 심어줬습니까? 하나님이 네가 바르게 살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착함, 악함 그런 건 알 필요조차 없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왜? 기계여야 하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알아서 뭐 할 건데? 뭐 에덴동산 수리할 거예요? 제가 에덴동산 관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뭐 할 거예요? 그냥 누려! 그냥 누려. 그냥 살아. 뭔 짓 하지 말고 그냥 살아.
그런데 뭔 짓 한 게 뭐냐? 악마가 뭔 짓 하게 만들었잖아요. 모든 걸 해야 되는데 하나가 결핍될 때 여기서 살짝, 모든 걸 가졌다는 것보다 더 센 유혹으로 다가오죠. 모든 걸 가졌다는 여유보다도 하나를 놓쳤다는 이것이 더 짜증나게 만드는 거죠. ‘그것마저 알면 드디어 신으로 승격되는데 고게 빠져서 신으로 승격 못되니까 네가 따먹으면 신 된다? 이제부터 너는 독립해서 살 수 있어. 독자적으로 될 수 있어.’
그 독자적인 걸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뭐다? 나는 나다. 더 이상 붙일 필요 없어요. 나는 아름다운 나다. ‘아름다운’ 빼도 괜찮아요. 나는 대단한 나다. ‘대단한’ 빼도 괜찮아요. 그냥 나는 나에요. 부처 말대로 석가모니 말대로 나는 그냥 신이에요. 그걸 꼭 문장으로 불교로 이야기해야 됩니까? 태어나면서 다 그런데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잖아요. 모든 인간은 악마에 빙의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 해석하면서 ‘나는 하나님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성경 해석하는 거, 이거는 그렇게 해석 안하는 사람이 이상하죠. 모든 인간은 그렇게 해석하죠. 그게 스타트입니다. 출발점이에요, 모든 해석의.
“요새 왜 성경 안 봅니까?” “뭐 알만큼 아니까.” 알만큼 안대. 많이 먹었다 이거죠. 알만큼 안다 이 말이죠. 알만큼 아니까 나오는 고백이 뭡니까? 나는 나다. 악마에 빙의되었네. 빙의. 병신인지 빙의인지 모르겠지만. 악마에 빙의되었어요. 뭐 꼭 작두 올라타야 그게 귀신 들린 겁니까? 뭐 흔들어야 귀신입니까? ‘나만 편하면 되지.’ 여기서 뭐가 빠졌어요? 매개 빠졌죠. 중보자 다 빠졌죠. 동행 다 빠졌죠. 성경 말씀 전부 다가 빠진 거예요.
성경 해석을 할 때, 아까 후딱 이야기했는데 다시 하면, 중요하기 때문에 적어보겠습니다. 진짜 이걸 신학교에서 이야기해야 되는데… 물론 그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겠죠. 마귀에 빙의되어 있으니까 반발할 수밖에 없죠. ‘모든 성경 해석은 필히 피를 경유하고 나와야 한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사귐은 피 아래서 사귀죠. 피가 매개죠. 매개를 경유해서 나오는 해석이어야 한다. 이게 사도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야 피 가운데 사귐이 되니까. 아버지와 자기 백성과 예수님과 사귐이 되니까.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피만이 매개가 되고 모든 이 세상의 해석이나 모든 활동은 피를 경유해서 나와야 된다. 이건 뭐 짐승 피 말고 누구 피요? 예수님. 하나님의 피.
피 흘렸다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고 하나님은 죽었다, 이렇게 되죠.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문제는 어디서 죽었느냐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은 거죠. 인간들이 그토록 떠나지 않으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마저 죽었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이 세상에 희망이 없죠. 그게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죠. 그게 사랑이고. 이 세상에 믿음이 없죠. 그래서 그게 믿음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악마에 빙의된 우리를 향하여 믿음 없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믿음 없이. 누구 믿음? 이 자아의 믿음 없이, 자아의 소망 없이, 자아의 사랑 없이 구원하기를 작정하신 거예요. 그게 바로 매개자이고 그 매개에서 만남이 성사됩니다.
매개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필히 믿음이 없어야 되고 필히 소망이 없어야 되고 필히 사랑이 없어야 돼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전제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요구할 것은 일체 모든 것이 거부당한다는 뜻이에요. ‘저 구원해주세요.’ 그런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까? 안되죠.
사도행전 2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 있죠. ‘누구든지’라는 말을 한 것은 피를 경유했을 때 인간들의 다양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동질한 존재이고, 동질한 존재로 본다는 겁니다. 각자 개성이 있어서 나는 너하고 다르고 나는 너하고 달라. 다르다는 모든 것을 일체 묵살해버리는 겁니다.
누구든지, 똑같은 인간들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뭡니까? 피 흘린 매개자잖아요. 매개자 없이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됩니까? 악마에 빙의되었으니까 안 되죠. 악마는 매개자를 가려버려요. 매개자를 가린 상태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풍성하게 착함으로 영글어내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이야기는 이거에요. ‘인간이 인간되었으면 인간답게 살아야지.’ 이게 악마의 호소입니다. ‘이거 뭐 짐승도 아니고 사람다워야지. 짐승도 그런 짓 안하겠다. 인간답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이런 거. ‘어떻게 어미가 되어서 자식을 내버리냐? 짐승도 그런 짓 안한다. 그러니까 어미가 되었으면 자식을 잘 돌봐야지.’ 지금 이 주장, 뭐를 경유 안했습니까? 매개를 경유 안한 거예요. 매개를.
너라는 1부터 시작해서 너라는 1로 계속 살다가 그 1로 너한테 돌아오라, 이걸 지금 악마가 인간에게 시킨 거예요. 인간은 1로부터 시작한 자기가 만든 치마를 자기가 꼭 쥐고 거기다 온갖 훈장들을 달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자기 목숨이 없어지는 순간까지라도 자신은 자기 자아를 지켰죠.
자아를 지키면서 그 인간이 목숨 끊어지는 순간까지 날린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언어라는 거예요. 말. 평생 동안 사용했던 그 말이 자아와 함께 운명을 끝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살아있는 한 자기 말, 자기 썰만 내뱉으면서 자기 말만 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이 자아 됨을 본인이 증명해온 거예요.
그 말 속에 매개를 경유한 말은 안 나옵니다. 악마의 강력한 방해공작에 의해서 매개 위주, 예수님 피 위주의 이야기가 안 나와요. 피의 해석으로 완결된 해석이 안 온다니까요. 예수 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악마가 그 이야기는 얼마든지 하게 하죠. 매개를 훼방한다면 어떤 신학적 용어도 다 동원시키는 것이 악마의 이야기인데요. 예수 피로 내가 구원 받는다,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우리 자아를 왜 구원합니까? 우리 주님은 매개에 대해서 우리를 죽이는 거죠. ‘나랑 죽자.’ 이거지, ‘너 살려줄게.’가 아닙니다. 나랑 죽자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는, 혼자 죽으세요. 왜 멀쩡한 나를 죽입니까?
자, 예수님이 죽자 할 때, 주께서 오늘 밤에 죽자는 거예요, 내일 죽자는 겁니까? 언제까지 죽자는 겁니까? 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죽자는 거예요. 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99세까지. 99세에 죽을 때 누가 죽이는 거예요? 주님이 죽이는 거예요. 99세 죽는 사람은 98세에 죽으면 안돼요. 못 죽어요. 주께서 죽도록 놔두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죽일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죽이십니다. 왜 죽이십니까? 뭐 개뿔도 없으니까.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동렬이도 없고 아무도 없어. 뭐 없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손흥민도 없고 이강인도 없고 무슨 축구를 합니까? 김민재도 없으면 축구 뭘 해요?
인간은 자기에게 살만한 동력을 주는, 살만한 요건을 제공하는 그것을 자기 치마에다 계속해서 장식해놓는 거예요. 옷은 뭐냐? 내 자아의 표상입니다. 내 자아의 휘날리는 깃발이 뭐냐? 그것이 성경에는 옷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옷.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아주 확연하게 율법 없는, 매개자가 없는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을 차등화 시켰어요. 애굽에서부터 같이 살지 말고 강제로 나오게 하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 재앙을 준 이유가 뭐냐? ‘앞으로 내 백성 건드리지 마라’ 이것 때문에 준 게 아니고, ‘같이 살 사람 아닌데 바로 네가 왜 붙들고 있냐? 이젠 좀 놔줘라.’ 그것 때문에 열 가지 재앙 준 거예요.
이 말은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애굽 사람들은. 다시 말해서 어린 양의 피가 묻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건 인간도 아니고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거예요. 없는 존재로. 심판대에서 출석부를 때 “김광수, 누구, 누구, 누구” “저는 왜 안 부르는데요?” “너는 피가 없잖아. 건너뛰고.” “저 착한데요?” 착함보고 주는 게 아니고 피보고 매개보고 그냥 출석체크해서 천국 보내는 거예요. 피보고.
천국 가니까 거기에 선배들, 고참들이 있죠. 장로들이. “어디서 왔는고?”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어디서 왔는고?” “이 세상에 살다 왔습니다.” “어째 이렇게 왔는고? 옷이 왜 이렇게 희어졌지? 왜 이렇게 하얀 거야?” “어린 양의 피로 하얘졌습니다.” “아이고, 우리 편이다. 어서 들어와!” 이럴 때 드루와,에요. 드루와, 드루와. 이리 들어와.
이게 무슨 깊은 신학이 필요하고, 여기에 무슨 헬라어, 히브리어가 왜 필요합니까? 이게 왜 필요하죠, 세상 학문이? 세상 학문은 이미 어린아이처럼 그 피를 알고 난 뒤에 세상 학문이 필요해요. 공부를 해야 돼요. 무엇 때문에? 내 육신은 악마에 빙의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육신을 악마가 다루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욥기에요. 욥이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죠. 욥은 선지자에요. 신약에 보면 욥을 거론하고 있어요. 선지자에요.
선지자인데 사는 꼬라지하고는… 욥기 대부분의 이야기가 하나님하고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그래요? 때리는 것은 좋은데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 하나님은 때리기만 하고 침묵하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요. 침묵해요. 욥이 이야기하도록 시간을 허락해요. 욥이 내뱉는 이 모든 이야기는 매개를 거치지 않을 때 육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지혜에요. 그것이 욥을 통해서 다 나옵니다.
그 지혜의 본질은 선악체계였어요. ‘내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까지 기도하면서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뱉어요. 매개, 매개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조져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다 나오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욥이 서서히 메시아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억울한 희생물이 이러한 원망을 거쳐서, 어느 날 친구를 위해서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중보자 입장으로 욥이 그 자리에 자기가 놓여있음을 하나님께서 규정해버렸어요. “내가 욥을 보고 저 친구들 용서해줄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을 보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동행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늘 찬양하고 감사한다고 동행이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대들고 하는 것, 그게 동행의 모습이에요.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21장. 뭐 우리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워낙 사람들이 점잖아가지고 내가 도대체 하나님께 원망한 기억이 없어. 나는 시키는 대로 범사에 감사하니까. 속에는 분노가 끓고 있으면서, ‘차라리 죽여 주옵소서’ 이러고 있으면서, 남들 보기에는 아닌 척 밝은 조커의 미소를 활짝 띠고 있죠.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걸로 베드로하고 예수님 이야기는 마감이 되어야 돼요. “나 너 죽일게. 그런데 너 죽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야.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내가 죽일 때 그건 네가 원하지 않는 죽음이야.”
이 말은 베드로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일체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피를 매개로 하면 그건 당연한 조치죠. 베드로의 자아까지 높여주면서 일을 시킬 수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제 양을 치는 목자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양이 아닙니다. 목자입니다. 목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양이 새롭게 등장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목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 나타난 목자에게 합당한, 걸맞는 양도 따로 나와야 돼요. 그래야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알고. 그 목자에게서 그 양을 악마의 권세라도 빼앗기지 않는 단속과 든든함이 제공됩니다.
양으로 하여금 목자를 믿게 만들면 안돼요. 믿음, 소망, 사랑 있으면 안돼요. 왜? 그러면 나중에 어려울 때 다 목자 배신하고 도망가 버리거든요. 목자 쪽에서 시작을 해야 돼요. 목자가 선물로 준 사랑, 목자가 선물로 준 믿음과 목자가 선물로 준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양으로 하여금 자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나는 어디까지나 양이라는 것을 감사케 하는 거예요. 양은 목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양이 있지, 양 드러내기 위해서 양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목자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김 양, 최 양, 박 양 전부 다 목자를 드러내는 거예요. 목자를.
그럼 우리 상식으로는 이야기가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을 죽을 때 짜증내지 말고 ‘아, 이것도 주의 예언대로 합당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라.”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20절에 왜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갑자기 질문을 누가 던지느냐 하면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을 왜 하느냔 말이죠. 이게 아직 베드로가 죽기 전이라는 뜻이거든요. 뭐가 살아있어요? 악마에 빙의된, 악마한테 허락된 육신이 그대로 살아있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원치 않는 죽음을 죽지만 저 제자도 나처럼 원치 않는 죽음을 죽는 겁니까?” 질문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래, 그도 너처럼 원치 않는 죽음을 죽는다.” 하면 베드로가 얼마나 기분 좋을까요. ‘됐어. 그러면 나 죽어.’ 이렇게 되는데, 답변이 그게 아니고 주님 하신 말씀이 아주 냉철합니다. “너는 네 일이나 신경 써! 네가 무슨 상관있어? 어떻게 죽든지.” 그래서 주님께서 약을 올리듯 이야기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안 죽어. 됐냐? 이제 속 시원해?”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님 오신대. 예수님 죽음을 보지 않고 주와 함께 하늘로 가는 모양이다.’ 또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닙니까.
23절에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이야기하는데 자꾸 사도 요한을 끼워 넣으니까 사도 요한은 빼고 상관없이 빼고, 끝까지 주님은 베드로보고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말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뭘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 24절에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여기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 12분의 1이에요. 이거 뭐 찍기 해도 잘 몰라요, 12분의 1이니까. 뭐 둘 중의 하나 같으면 잘 찍으면 찍히는데, 수능 같으면 다섯 개 중에 찍는데 이건 열두 명이라.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판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무슨 생각합니까? 나? 나? 나? 예수님 품에 있는 저 사람? 사람들이 ‘나는 일단 아닐 거고 그럼 나 아니면 내 라이벌 저 사람인가? 사도 요한인가?’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팔 자가 한 명도 없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팔 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제는 팔 자를 만들어요. 어떻게 하느냐? 떡을 하나 가지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뭡니까?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빵 하나 주세요. 여기 가룟 유다가 있다고 하면 이제 예수님께서 팔 자를 정하는 거예요. 나 자신을 팔 자를 예수님이 정하는데, 빵을 팔 자에게 건네주려다 안 주면 옆에 있는 사탄이 들어가려다 못 들어가죠. “맞춰. 보조 맞춰. 타이밍 잘 맞춰. 응? 왜 급해?” 역시 악마도 예수님의 종이에요. 주는 척하고 빼니까 악마도 들어가려다 움찔하는 거예요. 줘버리니까 악마가 쏙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모든 세상은 세상의 모든 권세자는, 악마까지 모든 권세자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 이걸 누가 아느냐? 육신은 몰라요. 육신은 이미 자기 한계에 갇혀서 몰라요. 육신은 악마에 빙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나다, 하는 식으로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악마에게서 누굴 놓아주고 누굴 풀어주고 악마에 계속 갇히게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로 매개자에게 있어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매개자, 예수님의 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악마를 이긴다고요? 악마를 이긴 내가 구원받아요? 아니죠. 악마를 이긴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 자체가 악마의 생각이죠. 왜? 무엇을 경유 안했어요? 피를 경유하지 않은 이해에요. 자기 구원에 미쳐가지고, 뭐 하면 구원받습니까? 예수 피 믿으면 됩니까? 이것은 악마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다. 모든 것이 주의 권세 안에 있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셨다.’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방금 제가 첫 번째 이야기한 게 뭐에요? 1.구원의 권한은 중보자, 예수님한테 있다 이 말이죠. 두 번째는 2.이점이 취소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10장 봅시다. 그러니까 요한일서 하면서 요한복음 자주 볼 수밖에 없어요. 같은 거니까.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유보다 크시다는 말을 하면서 같이 연결해서 나오는 것이 빼앗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되죠. 빼앗기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 소유물 되면 안 되죠. 우리는 이 더러운 육신, 이 육신을 누구한테 맡겨야 돼요? 그냥 주님의 손에 맡겨야 돼요.
더러운 죄 있는 육신과 피의 만남. 그래서 그렇게 맡긴 자는 특징이 뭐냐 하면 매개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피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못 맡긴 사람은 결국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내가 피 믿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피가 나를 장악해야 되는데 내가 피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매개자를 이용한 것밖에 더 됩니까? 이용은 마귀의 주특기니까.
피를 위해서 오늘은 밥을 먹었고 빵을 먹은 거예요. 피를 위해서. 피 때문에 애 키우고 예수님의 피, 그 매개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매개 때문에. 무엇을 탈락시키기 위해서? 나의 착함을 탈락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악함도 의미 없어요. 나의 악함도 의미 없고 착함도 의미 없고. 선악은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착함도 의미 없고 악함도 의미 없어요.
욥기에 나온 욥의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저 친구는 나보다 악한데 왜 내가 벌을 받습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악한데 더 착한 내가 벌을 받느냐 이 말이죠. 그걸 세상 사람한테 이야기해보란 말이에요. 어떤 대답이 돌아옵니까? 세상은 악마에 빙의되어 있죠. 그럼 답변이 뭐라고 돌아오겠어요?
‘네가 모르는 죄가 있을 거다.’ 이게 바로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했던 거예요. 네가 모르는 죄. 그러니까 회개를 좀 깊이 해봐라. 건성으로 회개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회개해봐라. 새벽 기도할 때 5분 기도하고 일어서지 말고 적어도 50분은 해봐라. 비로소 네 죄를 알거다. 그 다음 날 50분 했겠죠. 그 다음 날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50분에 50번을 해야지.
그러면 결국 불교잖아요. 백팔 번뇌. 백팔 가지고 안 되죠. 천 번을 해야 돼요. 천 번해도 안돼요. 이천 번 해야 되죠. 루터는 무릎으로 베드로 성당 계단 다 올라갔잖아요. 관절 다 나갔죠 뭐. 관절 나가도 천국만 간다면 그까짓 관절이 문제겠습니까. 문제는 관절 나가도 나를 부정 못하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를 없앨 수는 없어요. 그러나 피가 나를 부정케 하거든요. 피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하나님이 죽었거든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그리고 죽은 분을 인간이 ‘아저씨, 일어나세요.’ 예수님보고 아저씨,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난 게 아니에요. 마리아가 살려준 게 아니고 누가 살렸습니까? 살린 분이 누구죠? 아버지가 살렸죠.
인간은 뭐했습니까? 뭐했다고 천국을 가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잘 죽었는지 아닌지 그 뒤에나 삼인조 마리아가 가서 들여다봤지, 부활은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부활된다는, 성령에 의해서 부활된다는 그걸 왜 인간은 고백 못합니까? 악마가 다 컷트해서 고백 못하는 거예요. ‘쪼다같이 네 힘 가지고 해. 자꾸 누구 의지할 생각 말고.’ 이런 식이라. 내 속에 마귀가 수시로 자꾸 우리한테 그걸 독촉해요.
지금 우리가 마귀한테 꼼짝 마라 붙잡힌 이유가 이 구원 문제 때문에 그래요. ‘천국 가야 되는데.’ 천국 가야 되는데. ‘뭐 갔겠지.’ 이러고 있다고요. 구원 받았으면 ‘피로 끝났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인데요.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이게 요한일서 이야기잖아요.
내 믿음으로 구원 안 되죠. 내 소망으로 구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내 사랑으로 구원 안돼요. 그러면 앞에 ‘나’를 지웁시다. 믿음으로 구원 안 되죠. 소망으로 구원 안 됩니다. 사랑으로 구원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육신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에요. 우린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범죄한 그 자리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주께서는 만남이에요. 만남은 뭐로 만납니까? 매개를 통해서 만나요. 그 매개가 뭐에요? 사도 요한에 의하면 ‘피’로 만나요. 피.
다시 요한일서 돌아옵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피가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5장 6절 봅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물과 피로 임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자, 물과 피는 예수님의 육신에 관한 문제죠.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린 것은 마귀 때문에 흘린 거죠.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필히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와야 돼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실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천사가 아니고 모호한 유령도 아니고 실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물이 있고 피가 있다는 말은 실제로 이 땅의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보통 죄인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동질성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한 분이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천국에 간 거예요. 인간이 아는 천국 말고.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그 나라에 주님께서 가신 거예요.
그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피 흘리게 해서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천국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마귀한테 되돌려주는 거죠. 마귀야, 네가 수고했다. 천국도 아닌 걸 천국이라 하느라 수고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은 일단 예수님만 가신 곳이에요. 부활의 첫 열매니까. 부활의 첫 열매에요. 그전에 에녹같이 안 죽은 경우도 있지만, 부활의 첫 열매는 그전에 에녹이고 엘리야고 가지 못한 세계에요. 그들은 음부에 갔지, 천국에 간 게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최초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이름이 예수의 나라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야,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비로소 생기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지금 성도가 가는 곳이 인간이 아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나라에 가요, 예수의 나라. 예수의 나라는 인간 세계와 절단된 거예요. 끊어졌어요. 끊어졌으니까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물론 거기에만 영생이 있어요.
그러면 매개라는 것은 결국 들여보낼 자만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못 들여보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피에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 되느냐? 피를 흘린 이유를 대죠. 피를 흘린 이유가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 인간들을 사도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쉽게 말해서 ‘너희들 가운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손 들어봐라.’ 이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땅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죠.
그런데 말이 되든 안 되든 하나님 쪽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렸다는 말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끊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너희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그건 모르겠고 무조건 끊어진 것은 확실하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결국 무슨 이야기냐? 이미 끊어진 저쪽 세계에서 뭔가 와야 돼요. 그게 뭐냐? 성령의 기름 부음이에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와야 돼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해도 ‘우리’에 속해요. 우리. 오늘 본문 3장 1절.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끼리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의 모임을 ‘우리’라 하거든요. 우리.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는 절대로 세상은 모르는 이야기만 우리끼리는 주고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귐이고 만남의 뜻입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되느냐? 바로 세상에서 하고 있는 악마에 빙의된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착하면 천국 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어떻고 이야기하죠.
그것과 반대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하고를 전부다 반대로 하면 뭡니까? 주님이 뭘 하고 주님이 뭘 하고 주님이 뭘 하셨고 이렇게 되죠. 나의 믿음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나의 소망 아니고 주님의 소망, 나의 사랑 아니고 주님의 사랑.
이런 말로 서슴없이 우리 입에서 나올 때 그건 내가 한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지속적인 예수님의 활동 차원에서 우리를 통해 말하게 하죠. 왜? 우리는 기계니까. 우리는 주님의 의의 종이니까 기계니까 노예니까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만큼 이야기했으니까 실제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응용문제 내니까 제가 질문할 때 여러분들이 답변 한번 해보세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렇게 나오죠.
자, 질문합니다. 천국 문은 있어요, 없어요? 천국 문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 천국 문 나오니까 있죠. 천국 문 있죠. 율법이 천국 문이니까 있죠. 있는데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는 일이 뭡니까? 천국 문에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들도 못 가게 막죠.
이제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50분씩 100분 동안 했어요. 그들이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객관식으로 해야 되는데 주관식으로 해서….
뭐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끝까지 쥐고 있으려 했던 게 뭡니까? 자아죠. 자존심이죠. 자긍심. 아, 마귀가 집어넣어준 것, 인간의 힘으로 못 뺍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자아를 피로 경유해버리면 ‘저 때문에 예수님 죽었습니다.’는 피 이야기가 나오죠.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신. 나밖에 모르는 육신, 나만 챙기는 육신, 나만 배부르고 나만 인정받고 행복하면 그만인 육신, 이 육신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육신을 통해서 왜 피라는 매개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가를 더욱 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