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9b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20240909b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이 순환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인간들은 자기 폐쇄적이죠. 순환구조,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소설의 주인공. 그런데 주님의 언약은 특징이 뭐냐? 시작과 끝이 있어요. 시작과 끝이 연결돼 있습니다. 알파고 오메가고 내가 시작했다, 내가 끝을 내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니까 이걸 둥글게 말아보자. 시작과 끝이 이렇게 동그랗게 되죠. 또 하나의 안에 순환구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안에 시작과 끝이 스스로 계신 분이 스스로 만든 언약을 이루어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전설의 주인공을 이것으로 여기에 들어와야 돼요. 시작과 끝에 들어온다고요. 들어오게 되면 들어오는 이 지점이 바로 시편 54편에서 땅이에요. 땅의 명칭이 ‘십’이라고 하는 땅이 있어요. 광야. 광야 찾아보면 사해 동쪽이 아니고 서쪽에 십이라는 땅인데 다윗이 땅과 땅 사이를 돌아다녀요. 사울을 피해서 돌아다닌다고. 구약을 볼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둬야 돼요. 땅이란 것을 이뤄진다. 염두에 두고 함축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초가 되기에 모든 환상을 잡아먹는다.’ 앞에 순환구조, 인간은 자기가 기초가 돼요. 여기 자기가 육신에서 나왔지요. 기초가 되기에 모든 환상을 다시 기초 쪽으로 다 수용해요. 역시 나 하나 살아남는 이것 건지면 다 건진 거다. 근데 제가 방금 시작이라 했지요, 끝이라 했지요. 여기에 뭐가 흐릅니까? 시간이 흐르지요. 시작부터 해서 요이 땅 마지막까지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그러면 자기 폐쇄적인 인간이 주님의 언약에 들어오려면 뭐부터 자르면 되느냐 하면 간단해요. 자기 육신에서 자기 나이를 빼세요. 자기 나이를 지워버리세요. 뭐만 남겠습니까? 사십, 오십, 육십 내가 몇 년 살았다는 것을 지워버리세요. 자아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굉장히 간단해요.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 나이 없어요. 그냥 육신만 있어요.” 이거는 세 살 때도 육신이었고, 열 살 때도 육신이었고, 나이 팔십 되도 육신이에요.
근데 어릴 때부터 육신이었고 지금도 구십 되도 육신인데 그동안 세월이 나한테 조작해준 이 자아가 진짜 육신이라는 진흙, 육신이라는 허약한 것을 그동안 커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가려왔던 거예요. 그걸 치우질 못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행동과 태도가 말하는 거나 생각, 사유하는 이 모든 것이 육신이었음을 어제도 육신이고 오늘도 육신이고 앞으로 육신에 불과한 것을 아닌 척하면서 전부 다 가려온 겁니다.
그 가린 것이 뭐냐? 환상이죠. 환상이란 말하니까 잘 안 떠오르지요. 그럼 떠오르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미지. 나라는 이미지, 자아라는 이미지. 인간은 육신으로 나와서 육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육신에서 피어나온 이미지를 위해서 평생을 자기는 이미지에 몸 바쳐 살아온 겁니다. 그걸 이미지 관리라 하죠. 체면, 위신, 나를 보는 타인의 평가,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평가.
그런데 타인을 볼 때 육신으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타인을 볼 때 ‘흙아’ 이렇게 보면 될 걸 ‘각하님’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육신을 가리는 조작된 가면 같은 이미지에게 우리는 아낌없이 나의 이미지가 굴복해요. 이거는 둘 다 속고 속는 세상이에요. 모든 걸 버려도 심지어 내가 자살할 순간이 온다할지라도 까짓것 자살하지, 뭐만 남기고? 그동안 괜찮은 이미지만 남기고 자살해요. 밥 못 먹어서 자살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자기 이미지 때문에 죽지요.
벌써 인간이 자기 이미지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 그 이미지를 위해서 누구한테라도 언제라도 굴복할 비굴하게 살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심지어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떠올릴 때 예수님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육신을 겨냥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착함과 선함을 본받으려하는 거예요.
인간은 백날 그렇게 해도 이미지 동원해도 자기의 육신 됨은 변하지 않습니다. “계란이 왔어요.” 이 계란을 삶으면 오리 됩니까? 이게 오리 알 돼요? 삶아먹는 볶아먹든 뭘 해도 본질은 한결같은 계란이죠. 달걀이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게 닭의 육신이라 보는 겁니다. 육신은 육신으로 피어난 자아와 이미지가 육신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께선 아십니다.
택한 백성에 어떤 조치를 내렸는데 그 조치가 뭐냐? 그 조치를 제가 한 문장으로 쓰겠어요. 인간은 이것밖에 안 되니까, 자기 이미지에 미쳐 사니까. 그러니까 이 다윗이 난데없이 사울에게 쫓겨서 십 광야까지 쫓겨 가는 그 다윗의 일대기가 여정이 딱이에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뭘 보냐? 왜? 다윗이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상대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죽이는 이유를 본인이 알 길이 없어요. 죽이려하니까 자기는 피해서 도망가는 겁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공격하는 이유는, 사울 왕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다윗에게 이미 넘어갔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왕의 이미지를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되찾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를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사울이 악신 걸렸지요. 악신은 마귀지요. 마귀가 오늘날 우리 각 개별자에게 개인에게 하는 것은 내가 준 이미지를 충실히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네 평생의 업무다. 네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 네가 해야 될 필생의 사업이다. 이걸 악마가 계속 우리한테 부추겼던 겁니다. “네가 어때서? 너 잘났잖아.” 근데 혼자 잘났다 하면 안 되잖아요. 나보다 잘난 사람 있으면 안 되지요. 망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예쁘고 잘 생기고 얼굴 작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런 잘 생긴 남자배우들, 그보다 상대적으로 쳐져있는 인물도 아닌 그 앞에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게 있어요. 그 연예인들 제발 좀 이혼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기 때문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전화 들고 나오는 모든 대화의 바탕은 나의 이미지를 위해서 네가 내 앞에서 이미지 좀 줄여주면 안 되겠니? 그 사이를 무슨 사이? 친구 사이. ‘친구야’ 그게 친구에요. 지난 한주동안 너한테 있었던 일보다 나한테 있었던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두 시간 반 동안 전화한다는.
악신 들린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을 공격합니다. 공격하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본인의 이미지 관리를 안 해요. 여기서 나온 것이 시편 내용입니다. 시편 내용은 악신 들린 일반인과 뭔가 차별되는 차이 나는 다윗, 이 격차에서 이 차이에서 신앙의 본질이 나와요. 다시 말해서 계시가 나온다고. 약속이 나온다는 거예요. 다윗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다윗이라는 독특한 특수한 인물에게 골리앗 죽이는 사건을 입혀서 하나님의 특수성과 아담의 일반성과의 그 격차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나오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시편 내용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도 포함되는 거예요. 두 개의 차이 남을 통해서 그 차이 속에서 번지는 겁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절) 다윗이 안 쫓기면 이런 고백이 안 나와요. 이 땅에서 굳이 이미지 관리를 해선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 미리 다윗에게 덮친 거예요. 같은 인간인데 이미지 관리를 안 해. 이게 도리어 정상인들이 이상히 여겨요.
언약궤가 들어왔다고 다윗이 좋다고 옷 벗어젖히면서 춤을 췄어요. 다른 백성들은 왕의 낮아짐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고 있었는데 단 한 사람, 아내 미갈은 그걸 보고 그런 옷 벗는 짓은 내 앞에서 하지 나보다 계급상 서열상 저 밑바닥에 있는 궁녀들 하녀들 앞에서 고귀한 당신의 이미지 관리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쓰는 내가 당신한테 퍼붓는 그 정성은 하루아침에 춤추면서 다 날아갔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걸 보고 하나님이 미갈을 참을 수 없어서 애를 못 낳게 했어요. 저주받는 여인 됐어요. 네가 건드릴 자를 건드려야지 네 자신은 안 건드리고 모든 의미가 나한테 다 소급돼야 된다는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내가 이미지 관리했기 때문에 그 열매는 나한테 돌아온다는 거예요. 이 모든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됩니다. 마귀가 인간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 보세요. 간단해요.
인간은 창조물입니까, 창조입니까? 인간은 창조자에요, 창조물이에요? 창조물은 하나님 뜻이고요, 창조자는 마귀 뜻이에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해야지 누구한테 맡기느냐? 니 인생은 니가 창조하는 거야. 육신은 변변치 않지만 이미지는 네가 창조할 수 있잖아.” 노력 여하에 따라서.
온 세상이 마귀 세상입니다. 마귀의 말은 그렇게 쉽게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마귀의 말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어요. 왜? 이미 한 통속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없어요. 마귀는 나의 이미지 관리해주고 내가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 마귀의 것을 왜 우리가 마다하겠습니까? 인간이 마귀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마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귀 같은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친구야, 밥 한 번 먹자.” 맨날 그런 노래하는 사람 있어요. 밥 먹어서 뭐할 건데? 밥 좀 먹자. 김성환인가 하는 배우하다 가수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맨날 밥 먹자 해. 옆에 아침부터 술 먹는. 너도 네 창조자고 나는 내 창조자니까 서로 통하는 게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인간은 마귀에서 못 벗어납니다.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 가운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주는 게 마귀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힘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인공이 누굽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유대인들은 여기에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 성경해석이에요. 오늘 그 해석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무슨 요소를 집어넣느냐 하면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서 육신을 육신대로 그냥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방법이 뭐냐 하면 계시가 왔다가 사라지는 방식. 다윗의 때는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사무엘이 해요. 25장에서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28장에서 사울이 사라진 그 계시가 공터가 되었습니다. 빈자리가 되었어요. 이미 악신에 의해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미쳐있는 사울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는 사무엘이 25장에서 사망하고 난 뒤에 그 허한 빈자리를 뭐로 채웁니까? 엔돌의 신접한 여인으로 채우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첫째 시간에 구조의 중심이 있지요. 우리는 그 한 가운데 중심으로 보고 중심에서 퍼져나갔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구조 밖에 대해서는 무지해요. 무지몽매합니다. 그래서 구조 밖까지 알려면 이 중심자리가 하나님께서 중심자리를 점선으로 공터가 빈터가 되게 만들어요. 이 구조가 무슨 구조냐 하면 성경구조입니다.
내가 중심에 있어야 되는데 내가 중심이 되려면 나 중심으로 구조가 같이 병행해서 붙여줘야 내가 중심이 돼요. 친구 열 명이 있는데 자기가 친구들한테 잘해줘서 친구들이 총무해라, 회장해라 해서 됐어요. 그런데 십 년 후에 자기 빼놓고 열 명의 친구가 군에 가고 유학 가고 이리저리 다 가버렸어요.
그러면 자기 구조는 어디 있습니까? 자기를 회장이란 이미지를 설정해준 규정해준 그 규정에서 그 구조가 있어야 내가 중심이 돼요. 구조가 해체돼버리면 뭐도 없어요? 자기가 어떤 중심됨이 없지요. 그런데 이미지는 남아있고 나를 으샤으샤 해준 그 구조물은 없어질 때 내가 나답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교통사고 난 뒤에 부모가 죽고 싶은 이유가 그동안 자식 키운다고 스물 몇 살까지 수억 들여 키웠던 그 자식이 갑자기 음주운전 사고로 죽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본인이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자기 이미지를 보충해줄 주변의 증거물들이 없어지니까 이건 나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교착상태, 모순상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시키는 대로 골리앗을 이겼고, 그냥 가만있는데 백성들이 나서서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했단 말이죠. 자기가 원했던 거예요? 자기가 부탁한 겁니까, 대선에 나가려고? 가만있는데 사울 쪽에서 그래도 나는 천천, 기분 좋았지. 그런데 다윗은 만만, 자기 열 배나 했을 때에 저걸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이게 마귀와 결탁돼서 죽으라고 나라는 안 돌보고 블레셋과 전쟁할 생각은 않고 다윗 잡을 전쟁만 한 거예요. 블레셋은 멀리 있는 적이고 가까운 적은 뭐냐? 다윗이에요.
그걸 사자성어로 ‘내부총질’이라 하는 거예요. 이준석이. 교회 목회는 이런 것 없는 줄 압니까? 신천지가 괴롭혀요? 안 그러면 설교 잘하는 부교역자가 나를 괴롭혀요?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조직이 내 이미지로 하여금 나한테 지정된 위치를 줬다고 하는 겁니다. 조직에서 나는 당회장이라는 위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 다 나가도 당회장이에요. 참 골치 아픈.
한 번 생성된 이미지를 못 버리는 이유가, 내가 선택해서 내가 만든 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창조물 있어야 내가 창조주 행세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은 뭐냐? “네가 스스로 신이다.” 이거에요. 신이 되려면 내 창조물들이 주위에 그득하게 읍소해야 돼. 엎드리고. 내 수확물, 내 결과물이 풍성할 때 나는 그 조직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진정은 이 중심이 바로 나의 구조 밖에서 이 공터 된 나와 구조 밖의 나와 싸움, 전투, 전쟁을 벌일 때 진짜 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발견됩니다.
다윗은 지금 뭘 보여주느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사라졌음을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무엘이 25장에서 죽어요. 그동안 계시를 줘왔어요. 사울도 사무엘을 존경했어요. 사울이 왕 되는데 있어서 사무엘이 기름 부었잖아요. 자기가 왕 되는데 주례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과 사울 사이에 중매자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나라의 왕이 되었다면 나의 왕이라는 이미지는 누가 보증해줘야 돼요? 사무엘이 살아서 보증해줄 때 누가 뭐래도 나는 왕입니다.
여러분들의 만약에 회사를 한다. 창업할 때부터 고생고생해가면서 몸소 영업 같이 뛰면서 회사 망할 때 사장님, 몇 푼 안 되지만 부도 난 것 이걸로 급한 불 끄세요, 해서 처갓집에서 25억 빌려서 자금 대주고 그렇게 했던 그 부장, 그런데 결국 회사 망했을 때 그 부장이 사장님 저도 떠나겠습니다, 할 때 사장이 뭐라고 하겠어요? 브루투스 너마저? 너마저 가버리면 나 어떻게?
이혼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픈 거예요. 좋든 싫든 옆에 붙어있을 때 내 이미지는 보증이 되는 거예요. 가족이라는 보증이 되는데 자식은 있는데 둘이 갈라서버리면 재정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적으로 나 누구지? 도대체 내가 누구야? 그동안 나를 누구라 했던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울 왕의 처지입니다. 사울 왕의 형편이에요. 사울 왕이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죽자 사자 따라다닌 사람이 누구였다? 다윗이었죠. 그런데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하면서도 알고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미 내 편이 아니고 다윗 편이란 걸 아는 거예요. 악마가 이미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를 멸하려 왔지요. 알고 있으면서도 죽어라고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했어요. 이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사는 인간들의 세계의 본질이고 형편입니다.
사울의 잘못은 어디 있느냐? 땅에 있었습니다. 이게 구약의 한계입니다. 그냥 땅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고 보는 거예요. 성전도 땅에 있지요. 복을 받아도 땅에 복을 받지요. 땅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놀랍게도 그 시대에 땅을 떠난 존재로 삼습니다. 땅은 땅에서 살라고 다윗을 붙들고 다윗도 그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 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요.
그렇게 어떤 인간도 빠져나올 생각을 못 먹고 있는 그 땅이란 것, 인간의 육신, 흙이 살 수 있는 것은 땅 밖에 없어요. 땅에서 땅을 파고 거기서 농사를 지어야 그나마 흙이 될지언정 살 수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이 개입해서 다윗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떠나는 방법은 땅을 전부 원수의 통제, 원수의 지배받는 형편으로 만들었어요. 이게 시편 54편에 나오는 줄거리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편 54편 1절, 아까 봤지요. “하나님이여”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뭡니까? “주의 이름으로” 자, 땅의 세계는 이름이 붙어서 활동하는 세계에요. 땅 치고 이름 없는 자가 없어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땅에 왔을 때 뭐가 붙는다? 이름을 불러요.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부를까요? 땅에 내려왔다는 거예요. 하늘에 그냥 팔짱끼고 계신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왔다는 거예요. 땅에 내려왔으면 이름을 가지는 겁니다.
이름을 가지는데 그 주의 이름이 다윗으로 하여금 땅에 합류하고 땅을 누구한테 인수인계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마귀죠. 마귀한테 인수인계하고 그냥 주의 이름을 떠나버려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여기 애굽이 있는데 홍해가 있어요. 히브리인들에게 모세가 찾아옵니다. 모세가 어디서 찾아왔는지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어디서 애굽에 왔어요? ①가나안 땅에서 양 치고 있다가 애굽으로 왔다. ②떨기나무에서 왔다. 몇 번입니까? 떨기나무에서 왔지요. 모세가 이쯤해서 나도 민족해방해불까, 이렇게 온 게 아니죠. 모세와 하나님과 함께 한 공간에서 왔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줬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불이 타는 곳에 모세가 신발 벗고 불타는 그 음성을 유일하게 듣고도 살아남은 게 모세에요.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사십 일 동안, 나는 양식 안 먹었다는 건 이해되는데 물도 안 마셨다는 건 도저히…. 물도 안 마시고 양식도 안 먹고, 사십 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던 모세가 애굽으로 왔습니다. 여기 히브리인들은 애굽 땅에서 살았어요. 모세가 이야기한 건 이 땅 말고 다른 땅이라고 했어요. 다른 땅인데 뭐가 붙어요.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의’ 땅이에요. 이 땅에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빈 땅이 아니에요. 가나안 토착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땅 자체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이게 광야로 막혀버려요. 막히니까 애굽에 살던 사람들이 땅만 생각하는 거예요. 광야가 좋을까, 애굽 땅이 좋을까? 애굽 땅이 좋지요. 그래서 열 번이나 유턴해서 돌아가자고 한 거예요. “모세 치우고 다른 지도자 뽑아서 돌아가자.” 이 이야기를 민수기에서 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살던 기억을 잊지를 못하거든요.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내가 복음 알기 전에 살던 그것이 어디에 저장돼 있어요? 우리 육신에 저장돼 있습니다. 육신은 육신을 보는 게 아니에요. 육신에서 뭐가 피어나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이미지가 피어나는 곳이 육신이에요. 육신은 옷으로 감추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채색 옷을) 참 정답을 이렇게 말해주니 너무 고맙습니다. 옷이라는 것은 내가 너를 보는 평판이에요. 특별하게 보는 거예요. 사랑하는 독자에요.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항상 사랑하기에 잃어버려요. 딴 사람은 안 다쳐요. 내 사랑이 다 담기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도 설교했지만 마태복음 6장 21절입니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해서 그 앞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보물을 땅에 둘래, 하늘에 둘래?’ 주님께서 묻지요. 우리한테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이 말은 네 육신에 덮인 이미지를 알아, 이런 뜻이에요. 네 육신은 온통 땅으로 가득하게 두껍게 덮여있다.
그러니 산상설교 내가 준 말을 어느 누구도 지킬 위인은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땅에서 출세하고 남 보기에 괜찮은 이미지 관리하는 게 우리 평생의 필생의 사업이 되기 때문에. “나 신앙 좋아요, 기도 잘하지요, 헌금 많이 하죠.” 이게 교회에서 하는 짓이 그 짓이잖아요. 내가 이만큼 잘된 건 다 주님께 충성 잘해서 복 받은 거라고. 우리는 그걸 남들에게 남발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지 관리하고 싶은 거예요.
자꾸 육신을 가리는 거예요. 마귀가 그 짓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마귀한테 고맙게 여겨야 돼요. 나는 네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를 네가 나한테 들킨 것에 대해서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환장한 존재가 마귀에요. 육신을 가릴만한 요소를 다 우리한테 허락한 것이 마귀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갈수록 난관입니다. 결국 홍해 건너온 사람들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어요. 정탐꾼 보냈지요. 모세가 정탐꾼 보낸 것을 허락함으로써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딱 두 가지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는 정탐꾼 허락한 것,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아주 사소한 건데 이 백성 어떻게 관리하란 말입니까, 하고 성질나서 두 번 친 것.
참 하나님도 일부러 모세를 못 들어가게 했어요. 왜냐하면 칠 때 ‘스톱, 스톱 그냥 가리켜’ 이렇게 친절하게 했으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모세의 본질이 이미 유령적 존재에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사십 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모세에게 약속의 땅이 고향이 아니고 모세에게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요.
모세가 먼저 갈게, 이래 되는 거예요. 너희들은 같은 땅을 봐라. 그게 약속의 땅일까요? 약속의 땅인데 약속의 땅일까요? 결국은 약속의 땅은 날아가 버려요. 사울이 약속의 땅을 배려먹었고 그 뒤로 왕들도 마찬가지고요. 약속의 땅인데 뭐냐? 주님을 핍박하는 땅으로서의 약속이죠. 왜? 격차 때문에, 차이.
다시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볼 때 이 점까지 고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울과 다윗, 다윗이란 특이한 존재가 사울 왕에게 일반인입니다. 보통 사람입니다. 이미지 관리죠. 경쟁자 나타났습니다. 핍박하죠. 미운 걸 밉다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냥 미운 거예요. 내 창조주를 증명하지 못한 거기 때문에 미운 거예요.
처녀로 결혼했는데 남편이 이미 아들을 갖고 있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에 미쳐서 당신 애라도 내 애처럼 키우겠다고 해놓고 막상 결혼해보세요. 내 창조물이 아닌데 그게 예뻐할 리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잘 키우다가 너무 마음이 안 당기니까 “여보, 나도 내 애 갖고 싶다. 그러면 당신 아들도 잘 키우고 내 애도 잘 키울게” 했는데 막상 자기 애를 낳고 보니까 더 미워. 이건 이스마엘이라. 내 쫓고 싶어.
인간의 마음은 악마의 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통제가 안 돼요. 미운 걸 밉다 하는데 그걸 어떻게…. “그러면 안 된다. 처음에 약속했지 않냐.” 약속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그때 약속이지 뒤에 무슨 약속이 있어요. 어느 인간이 약속할 수 있는 위인이 됩니까? 그때 기분 따라 하는 게 약속인데. 도대체 내 통제가 안 된다니까요. 통제 안 되는 인간에게 말씀을 지키라?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어떻게 말씀을 지킵니까? 내가 내 통제가 안 되는데.
여러분들이 처음 교회에 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보고 뭐라 해요? 죄인이라 했지요. 누가 죄 짓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죄 짓게 해놓고 인간보도 죄인이라?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선악과 잘라버리든지, 치워버리든지, 전기 담으로 해서 탐스럽기도 하지만 아예 근처도 못 가게 만들든지. 그냥 따먹으세요. 보암직도 먹음직도 해서 따먹었어요. “따먹었지? 너 죽었어.” 이게 뭐예요? 그것보다 불교가 합리적이죠. 윤리도덕이 합리적이죠. 이게 뭐예요?
“너는 창조주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냥 창조물일 뿐이야.” 그런데 주께서 죄 짓게 해놓고 죄 지었다고 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네가 창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창조자의 지혜와 지식을 갖추었다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네 속의 악마의 소리기 때문에 그렇다. 악마의 평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럼 차라리 세리와 창기 되면 안 돼요? 강도 되면 안 됩니까? 그게 딱이잖아요. 우리한테 딱 맞아요. 저 아직 강도 아닌데요, 이러는데 그건 아직 안 굶어봐서 그래요. 아직 강도질 형편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몇 명 죽었어요? 18명 죽었지요. 얼레리꼴레리 도대체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저렇게 졸지에 죽을 나이도 안 됐는데 죽었겠냐? 주님께서 “지금 누구 말이에요?” “망대 무너져서 죽은 사람 말이에요.” “니가 지금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죽었어.”
주께서 죽은 자를 구원하는 거예요. 죽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됩니다. 왜? 주님의 격차에 나오는 계시가 활용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죽어서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는 거예요. 주님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내가 죽었다’부터 이야기를 해야 되지 살았는데 예수 믿고 천당 갔다, 그거는 바알종교지요.
주님의 절차가 우리 철차에 반복시키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죽었던 주님이 부활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미 죽어있었다, 이래 돼야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어떻게 죽이는데? 말씀으로 죽이거든. 말씀으로 죽이니까 죄 아닌 게 없데. 이게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합당한 우리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인들, 이 세상은 불신자 밖에 없어요. 그 불신자들의 보통 생각은 마귀의 생각이고, “살아 있는 나를 한 번 건져봐 믿어줄게” 십자가 옆에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하는 발언을 지금 우리 속에 잠재돼 있습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예수님한테 듬뿍 십일조 하겠습니다. 이런 발언들이 우리 속에 자생해서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우리의 문제점으로 들추지 않고 문제점을 가리는 식으로 그동안 평생 살아왔다는 것을 들통 내는 거예요.
좀 더 진행해보겠습니다. 다윗과 사울 사이에 격차가 있잖아요. 차이가 있어요. 오늘날 ‘사울 같은’ 우리와 그리고 사울, 마귀죠. 사이에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사울 같은 것이 드러나요. 다윗처럼 구원은 받았는데 사울 같은 우리를 사울과 다르게 그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땅에서 떠난 분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아버지로 갔잖아요.
다윗은 다윗 시대에 시범으로 보여주고 오늘날 이 시대 2024년도는 우리 시대에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이 땅을 버리고 이 땅에서 할 것 다하고 다시 하늘로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해야 될 인생 고백입니다. 그냥 불신자로 살면 놔두면 되는데 그냥 나밖에 모르는 사울 같은 인간, 사울과 다윗 두 개를 다 겪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복음을 받게 되고 믿게 된 성도의 특징입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님 언약이죠. 이걸 돌돌 말면 이렇게 되지요. 시작과 끝이 맞물린다. 주께서 시작하시고 끝이 됐다. 이게 동그라미 돼버리면 예수 안이 돼요. 예수 안이 나 안에 있는 나에게 와서 예수님 자신과 우리 사이의 격차, 차이점을 밝히면서 우리를 데려갑니다. 데려갈 때 시편 54편의 말씀으로 데려갑니다.
시편 54편 4절, 5절.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그다음에 6절에 보면 무슨 제 나옵니까? 낙헌제 나오지요. 낙헌제는 회목제의 일종인데 이거는 나를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기꺼이 계속 저를 사용해주시옵소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세상과 차이 남이 내 속에서 계속 나오게 되면 나는 주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창조 자체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창조주로서 능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저를 마음껏 사용하옵소서. 그게 바로 낙헌제에요.
낙헌제의 특징은, ‘낙(樂)’의 뜻이 뭡니까? 기쁨이죠.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여러분 자녀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녀가 있다면, “엄마 이번에 성적 좀 올랐지. 내가 컨닝을 했거든.” “기뻐, 성적 올라서 너무 기뻐. 이 자식, 네가 낙헌제야.”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통제, 컨닝하고 싶은 충동을 내가 컨닝을 안 한다할지라도 안 한 쪽을 선택했더라도 그 선택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왜? 마음속으로 간음한 무슨 죄죠? 간음죄. 마음속으로 남 미워하면 무슨 죄? 살인죄. 우리는 내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이미 마귀가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통제 안 되기 때문에 그 통제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컨닝하는 현상을 통해서 그걸 으윽 하고 바깥으로 현실화시켜놓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이번에 문장이 길었지요. 간단한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 내가 남한테 내세울 게 일도 없는 존재인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지요. 세리가 나와서 감히 얼굴도 못 들면서 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십일조 이야기할 때 세리가 한 번도 십일조 한 적 없다는.
끝으로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5절 다 같이 해봅시다. 하나님의 원수가 얼마나 우리한테 달라붙었는지 시편 54편에 나오는 원수 있잖아요.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왕, 자기 이미지 관리하는 그 사울 왕. 사도행전 19장 15절, 이거는 큰소리로 다 같이 해봅시다. 이게 이미지 관리와 관련돼 있으니까 꼭 찾아보라고.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와 고맙다, 마귀야. 마귀가 알아요. 우리 교회 당회장 다 속아 넘어가고 집사, 장로 다 속아 넘어가는데 마귀는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왜? 자기편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네가 위선자고 거짓 신앙인이란 것은 마귀가 딱 알아요.
그런데 마귀가 말하기를 예수는 알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마귀가 뭘 안다 했습니까? 마귀가 누굴 알지요? 예수 다음에 세상에 마귀나라에서 악마의 나라에서 바울이 요주의 인물이 된 거예요. 이거는 뭐냐? 바울은 원래 우리 편인데 예수님한테 빼앗겼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요? 동네방네 귀신은 다 알아요.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이거 MBC뉴스에 안 나옵니다. 이게 뉴스시간에 안 나와요. 뉴스는 전부 다 인간의 이미지 이야기만 하고 이런 이야기 안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 말은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몰래 엔돌의 여자 무당한테 갈 때 여자 무당이 알잖아요. “당신은 우리 쪽이라고, 우리 쪽. 당신은 우리 쪽이야. 당신 악신 걸렸어. 같은 편끼리 왜 이래. 선수끼리 왜 이래.” 이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는 선수끼리 다 통해요. 스스로 위선자인지 다 아는데 뭐. 신앙인척해도.
해답은 땅입니다. 땅에서 떠날래요, 땅에서 이미지 관리할래요? 사도 바울의 소원은 땅에서 떠나는 거예요. 이제는 나의 본질의 모든 내용은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부모형제가 아니라 위에 계신 분이 현재 내 모습의 모든 것을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게 뭐냐?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이상하게 복음 나오는 현상, 사람들은 안 듣습니다. 듣던 안 듣던 그건 내 소관 아니죠. 그냥 복음이 흘러나오는 흘러넘쳐 나오는 이 현상은 귀신도 통제 안 되지만 귀신보다 더 세도록 통제 안 되는 것이 귀신은 귀신대로 하되 복음은 그걸 뚫고 통제 안 되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저와 여러분에서 늘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를 우리가 관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의 소유물이고 주님께 드린바 낙헌제 제물인 것을 우리가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현상을 피우면서 늘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