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9a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20240909a 부산강의 : [시편]70(54:1)-전설의 주인공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54편입니다.
시편 54편의 성경말씀을 대하면서 성경은 항상 뭐부터 하느냐 하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한테 물어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똑같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 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다음에 가인이 동생 죽고 난 뒤에도 가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마찬가지에요. 계속해서 주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나한테 문제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취지가 질문하시는 것은, 너한테 문제점이 있다는 거니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한테 먼저 가지 마시고, 신을 상상해 가지 마시고 문제점으로 가면 돼요. 문제점에 있으면 주의 질문이 들어올 거고, 문제점이 있다는 질문을 하실 거고 그 질문 따라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가 있는 겁니다.
이창섭 목사님 아버지 돌아가셨잖아요. 내가 이창섭 목사 아버지라고 이야기하고, 누구도 자식한테도 아무에게도 이야기 안 했겠지만 이런 질문을 해야 돼요.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라고, 부친은 평소에 살고 싶어 했어요. 그렇잖아요. ‘빨리 죽어야 되는데’ 그거는 남한테 과시용이고 본심은 살 때까지 계속 더더 살아서 호강하고 싶은 겁니다. 건강한 채로. 그것도 비실비실 말고 우사스럽고 치욕스런 모습은 보이기 싫고 대단한 모습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할 때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것은 바로 문제의식이에요. 나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으면서 내가 죽느냐는 그 의식이 죽음보다 더 소중한 겁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말릴 수 없는데 내가 왜 죽어야 돼, 라고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돌아가는 것과 내 의견과 지금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살고 싶은데 육신은 망가졌단 말이죠. 왜 내가 이런 처참한 대우를 받아야 되는가, 라는 식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이 자리에 들어야 되는 겁니다. 이 자리에 들어가면 무슨 순환구조가 기다리는가? 순환구조란 뺑뺑이 도는 거죠. 시간방향이고 반대방향이고 상관없습니다. 오른쪽으로 돌리고 가끔은 왼쪽으로 돌리고, 이거는 뭘 비벼도 괜찮아요. 하여튼 순환구조에요.
순환구조의 특징은 폐쇄적이다. 구조 보세요. 동그라미잖아요. 그냥 질문이 질문을 낳고, 질문이 질문을 낳고 그 질문 자체에서 뺑뺑이 도는 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현재 이 현실 속에서 뭐가 되느냐? 현실은 나에게 비극이라는 것. 뭐 물어볼 사람이 없어요. 구름보고 묻습니까, 별보고 묻습니까, 달보고 묻습니까?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칠성각에다 별보고 물었어요. 북두칠성보고 물었어요. 부처한테 묻지만 부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시답지 않고 부처 뒤에 뭘 모시는가? 칠성각을 모셨어요. 그래야 절이 장사가 돼요. 왜? 별은 인간보다 오래 가니까. 밧데리가 오래 가요. 부처 지가 뭔데? 부처를 믿으면서 부처는 기껏 그냥 쇠락하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니까. 부처보다 더 센 것 그게 칠성각이라.
캄캄한 밤하늘에 절망적인 밤을 보란 듯이 빛나는 일곱 개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이집트에선 태양을 섬겼어요. 왜? 태양이 우리를 먹여 살리니까, 곡식을 자라게 하니까. 태양신. 그래서 이집트는 영원한 것은 태양이다. 왕을 쇠락케 하고 죽는 왕을 무엇의 아들로 봤겠어요, 옛날 이집트에서? 허약하게 죽어가는 왕을 누구의 아들로 봤습니까? 태양의 아들로 본 겁니다.
그런데 그 태양이 깜깜하게 된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태양을 깜깜하게 만드는 그러한 계기가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모세. 열 가지 재앙 중 제일 마지막 재앙 그전의 재앙이 태양이 사흘 동안 깜깜해졌지요. 깜깜해지고 모든 조명이 꺼져버려요. 조명이 꺼지면서 캄캄한 배경 안에서 등장하는 것이 인간들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목가지 날리는 죽음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그 날이 왕의 대가 끊어지는 날이에요. 왕뿐만 아니고 모든 집안, 귀족집안, 천한 집안 상관없이 모든 집안의 대를 제사 드릴 아들을, 그냥 딸 말고 시집간 딸 말고, 맏아들을 맏이를 전부 다 죽여 버렸어요. 심지어 옥에 갇힌 죄수의 맏이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고 아무 죄도 없는 가축의 맏이까지 다 날렸어요.
이게 바로 무슨 세계냐? 어두움의 세계.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어두움을 누락시키고 죽음의 세계를 고려하지 않고 밝음의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의 순환하는 논리를 구성해왔던 겁니다. 밝음의 세상이 계속 가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인간은 맹목적으로 살아온 거예요. 의미도 없이 살아온 거예요. 살다 살다보니까 무엇이 나를 살려주느냐 하면 시간이 나를 살려줬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살려주는데 시간이 나의 피부에 주름이 끼게 만들고 모든 내장과 심장에서 이게 쪼그라들게 만들었어요. 점점 더 시간이 흘러가면 이거는 내가 나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세가 육십 넘으면 사진을 잘 안 찍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자기를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꿈속의 내 모습과 현실적으로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차이 나도 너무 격차가 나요. ‘꼬라지 이래 될라고, 이 꼬라지 볼라고 그렇게 나를 지켜왔던가?’ 거기서 유명한 네 자 나오지요. “찍지 마라!” 아버지고 뭐고 간에 찍지 마라, 동영상 찍지 마라. 부끄럽다 이 말이죠.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선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잠깐 살려두고요. 질문해보겠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인가, 내가 선택당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 진리에요? 내가 선택하는 겁니까, 선택당하는 겁니까? 당하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자연이 있음으로써 내가 산다고 했는데 자연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연이 시간을 동원해서 나를 쇠락시켜서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자연을 의지했는데 자연마저 나를 이렇게 완전히 부서트린다면 정말 내가 의지할 믿을 구석은 어딥니까? 없지요.
결국 그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믿고 살고 싶은데 나를 둘러싼 환경, 자연마저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겁니다. 자연 속에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인간은 늙는데 해와 달과 별은 늙지도 않아요. 이거는 불공평한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식물은 겨울에 다 죽는 것 같은데 봄에 다시 살아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나는 한 번 죽거든 살아남이 없느냐? 어떻게 이 자연의 힘이 나를 살려주면 안 되겠느냐? 그런 신을 우리가 믿자, 해서 나온 신이 바알 신이에요. 바알 신은 부활의 신이에요. 부활의 신, 소생의 신, 자연을 모방해서 만든 자연의 일부의 신. 모든 자연은 겨울 되면 없어지지만 봄 되면 다시 소생하잖아요. “나 저렇게 소생하고 싶어. 나도 저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소생하고 싶어.”
그럼 자연 배후에 신이 있죠. 자연을 다스리고 죽은 자연을 다시 살리시는 그 신을 나도 거기에 끼어줘. 나도 들어가게 해줘. 믿고 싶어. 이게 뭐냐? 무슨 신이요? 바알 신인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순환구조. 지금은 비극이지만 비극 이전에 뭐가 있는가? 신화가 있지요. 전설입니다. 신화이니까 무슨 이야기에요? 신의 이야기에요.
내가 믿고 싶은, 출발은 여기서부터 합니다. 비극적인 몸 아프고 완전히 다 망가져서 이제는 없어질 것만 있는 비극적인 내가 마지막 붙들 수 있는 것은 뭐냐? 신화에요. 과학이 발달하고 뭐 로켓을 올리고, 로켓 올리기 전에 뭐합니까? 고사지내요. 진화론이 어떠니,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영화 만든 사람이 촬영하기 직전에 고사지내지요. 중소기업 개업할 때 그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운동선수가 징크스 스스로 만드는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아이 낳을 때 고사지내지요, 죽고 난 뒤에 고사지내지요.
우리 동네 절에 보면 벌써 광고 있어요. 추석날 제사 맡기실 분 맡아줍니다. 우리가 제사 할 테니까 돈만 내세요. 음식 차려드립니다. 추석이 절의 대목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절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다? 칠성각이 있다. 부처 그것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믿을 게 못 되고 별은 영원하니 믿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의 문제, 생로병사의 문제를 신화적인 것, 신화를 알려주는 사람, 또는 신화적인 존재로 가서 순서가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나를 새로운 창조물이 되고 싶은 이 폐쇄적인 순환 고리를 형성하는 것, 이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종교 있든 무종교가 됐든 그건 상관없어요. 전부 다 이 비극 신화, 그리고 내가 원하는 나다움을 창조하고 싶은 이 모든 것을 고리 속에 인간이 놓여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그러니까 폐쇄적인 자체적으로 이 고리에 대해서 어느 인간에게나 물어보세요. 이게 여기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자체에 어느 인간에 물어도 없지요. 나에요. 나를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새로운 내가 된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과 접했던 이방민족이죠. 이방민족은 뭐가 없느냐?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고, 언약이 없으면 그냥 인간들만 있는 거예요.
인간들에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의 집합체가 바알종교입니다. 뭐가 없다고요? 언약이 없어요. 그냥 인간들의 생각만 있어요. 그 생각들 그것이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기를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전제로 해서 말씀, 십계명 줬습니다. “나를 믿어라.” 이게 십계명의 1계명입니까? 아니지요.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이 이미 유통되고 있었던 거예요.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비극을 행복으로 만들 신을 인간 나름대로 장착돼 있었던 겁니다. 종교를 가진다, 나는 천주교다, 알라 이슬람이다, 불교다. 그 딴 거 아무 의미 없어요. 똑같아요. 교회도 마찬가지로 똑같아요. 나 잘되게 해주는 이 신화적 존재가 다시 내가 태어나게 되면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내가 새롭게 창조됐다 치면 이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신화로 가지요. 신화에서 나는 뭐가 된다? 나는 이 신화, 전설의, 전설이란 소설의 주인공이에요.
헤밍웨이의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는데 고기 하나 걸려들었어요. 고기 맛있다, 고기를 시장에 팔면 남는다. 그 노인은 그 딴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큰 고기를 낚았다는 그 자체의 자부심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끌고 오면서 상어 떼한테 다 뜯어 먹혔어요.
그러면 그 노인의 자부심이 소진될까요, 그대로 있을까요? 그대로 있어요. 왜? 주인공은 고래도 아니고 주인공은 바로 내가 뭐로 거듭나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에요. 따라 해봐요. 전설의 주인공. 이것 때문에 교회 오고 이것 때문에 예수 믿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라니까.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는 거예요. 몸 아프다. 여기서 쓰러질까, 죽고 싶다. 아니에요. 아픔에서 거뜬하게 일어나는 내 모습에 더 자극받는 겁니다. 누가 보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보란 듯이 나 이 정도야. 까불지 마.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내가 주인공이야. 어린왕자.
이 세상에 유명한 명작들, 소설과 드라마에 주인공이 잘되는 게 모티브에요. 핵심이에요. 주인공이 못 됐는데 많이 알려진 명작 있습니까? 없지요. 신데렐라, 백설 공주부터 해서 그 뒤에 노벨문학상 받은 모든 것은 결국은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가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최고 권위의 US오픈 여자골프대회에서 승리할 때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란 노래 뜨면서 끝내 이기리라. 태국의 아마추어 골프선수를 이기고 우승한, 온 국민이 그 힘든 IMF시대에 용기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있어. 끝내 이길 수 있어.” 이 말은 뭐냐? “그래, 내가 쭈그리가 아니야. 나는 이제는 들러리가 아니야. 내가 내 인생 소설의 주인공이고 나는 전설의 주인공이야.” 이걸 불신자들은 술 한 잔 먹으면서 그걸 바깥으로 내뱉는 거예요. 제가 지하철 타고 내려오면서 코스 보게 되면 아침부터 교회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술집 있어요. 여름 되면 문 열어놓고 술집 하는데 보면 아침 아홉 시에요. 술집에서 술 먹고 있어요. 낮술 정도가 아니고 아침 술 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 또 취한 모양이라 해장술 하는.
왜 술을 먹습니까? 왜 담배를 피워요? 왜 술 먹고 담배를 피웁니까?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새벽기도 왜 나옵니까? 나를 잊어버리면 모든 의미를 잊어버려요. 이 순환고리에서 폐쇄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전설의 주인공이죠.
그러면 이젠 문제는 던져놨어요. 인간은 귀신한테 매여 있다. 절망을 겪고 뭐 어떻게 인간 승리 백날 해도 전부 다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공통적인 신화구조 아래서 벗어날 수가 습니다. 더구나 이 신화구조의 중심은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이죠. 이게 바로 모순이라는 거예요. 왜 모순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약간 살짝 어려워지기 시작하는데 주무실 분은 미리 주무시는 게….
이게 구조입니다. 사각형 구조. 아까 우리 자신이 전설의 주인공이죠.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구조를 만들기 시작해요. 소설의 주인공이 원래 그래요. 소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6‧25가 나든 IMF가 터지든 항상 이야기의 화제가 어디에 집중됩니까? 나한테 오지요. 인간은 어떤 모습이 있느냐 하면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여기서 바깥으로 발산한다. 확장시키는 거예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인생을 오래 안 살아도 자기가 주인공인줄 알고 있어요. 아빠가 엄마가 뭘 사주고 난 뒤에 2초도 안 지나서 좀 줄래, 하면 안 줍니다.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니까. 발산하는 거죠. 인생을 살면서 20대에 누굴 만나고, 40대에 누굴 만나고, 결혼을 누구와 하고, 60대에 누굴 만나든 그 의미는 내 쪽에서 나간 의미로 구성을 해요. 이 구성은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돼요.
그런데 뭐가 문제냐 하면 발산된 의미가 그냥 날아가 버리면 휘발되면 안 되잖아요. 다시 나한테 오는 거죠. 이걸 수렴이라 합니다. 발산, 퍼지는 것. 수렴, 채취하는 것. 나로부터 멀어졌던 의미를 다시 나한테 끄집어 당기는 거예요. 이걸 긁어모으기. 금 모으기가 아닙니다. 뉴스를 보던 영화를 보던 카페에서 누굴 만나든 전부 다 뭐냐? 의미 채취에요. 그 의미는 뭐냐? 역시 한결같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 그게 내 마음대로 됩니까? 지가 여호수아도 아닌 게 해를 멈추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럼 이거는 뭐냐 하면 ‘국지적인 형태 갖추기’에요. 국지적인 짜임새 갖추기, 이게 인생이에요. 이게 타인에게 소용 있어요, 없어요? 타인에 소용 있는 정도가 아니고 타인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타인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줘요. 그런데 여기에 제가 뭐라고 썼느냐 하면 짜임새에요. 시스템, 구조 짜기입니다.
어떤 아들이 나이 많은 홀로 사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집에 들어왔어요. 집 명의는 어머니 명의고. 아들이 어머니 모신다고 자기 아내까지 들어왔어요. 괜찮은 집이에요. 그런데 그 아들이 틈만 나면 자기 장모 부르고 할 때 그 엄마가 내린 조치가 뭐냐 하면 아들 여행 갔을 때 가방 다 들어내고 거기다 세입자 들였어요. 비밀번호가 안 맞아. “너희들 쫓겨나갔어. 니 방에 세입자 들어왔어.” “제가 어머니 모시려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네가 날 모신 게 아니고 날 등쳐먹은 줄 분명히 알아라. 어머님 모실게요, 하면서 내 등쳐먹었잖아. 내가 널 버려놓은 같아.”
이게 뭡니까? 자식은 부모를 섬긴다 해도 부모는 절대로 자기가 섬김 받았다는 것을 대외적 용도로 사용해요. 노인정에 가서 우리 아들 그렇게 착하다. 하지만 그거는 위선이고 실제로는 항상 뭘 하느냐 하면 선택을 해요. 여기 선택이 어려워요. 선택이 예상보다 어려워요.
옳고 그름 사이를 선택합니까, 아니면 선택과 비선택 사이를 선택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이거는 옳다 그르다 그렇게 선택하는 게 아니고 나 이제 아들 안 본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옳고 그름은 혼자 있을 때 하는 거예요. 남한테 일단은 “나 너하고 상대 안 해.” 왜? 나는 이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무섭지요, 인간. 인간은 본인 선택 외에 다른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종교가 무슨 종교에요? 바알종교에요.
바알종교의 특징은 바알신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선택했다는 요소가 내가 당신을 신으로 인정했다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게 바알종교에요. 그럼 바알종교라는 그 개념을 네모로 만들고 거기다가 삼위일체. 예수, 하나님 다 집어넣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예수에요? “내가 당신 선택한 것 당신 알지?” 그 내용이 있으면 그거는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바알종교에요.
그런데 오늘 시편 54편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특히 다윗 같은 경우에 다윗이 평소에 이렇게 살겠어요, 안 살겠어요? 다윗도 아담의 후손,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겠지요. 사는데 다윗에게 다른 경험치가 계속 발생돼요. 그게 뭐냐 하면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요. 환장할 지경이에요. 본인을 자꾸 궁지에 몰아넣어요. 궁지에 몰아넣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찾아와요. 궁지가 없이 절망적인 상황이 없도록 해주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다윗에게 위기를 초래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 선악과 따먹지 마라 이후에 주께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그거에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그것을 신약적 입장에서 해답을 내려야 돼요. 네가 어디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어디 거주하는가? 인간이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땅입니다, 땅. 땅은 위험한 곳이에요. 인간은 위험한 곳에 살면서 그 위험을 알아야 되는데 거기서 살려고 하고 있어요.
왜 위험한가?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흙으로 만드는 그런 조건들로 가득 차있는 곳이 땅이에요. 저주가 가득 차있는 곳이 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땅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한국이 싫다. 뉴질랜드 이민 가면 돼요. 뉴질랜드 싫으면 미국에 이민 가면 되고. 가봤자 땅에서 땅으로 폴짝폴짝 뛰는 거예요. 다른 대안은 없어요.
그러니까 점쟁이들 찾아가서 “도사님, 어디 가서 살면 땅값 오르겠습니까?” 세상에 점쟁이한테 가서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 집을 살까요, 말까요? 팔까요, 세 놓을까요?” 이런 이야기에요. 인간의 기초가 뭐냐? 그냥 땅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무슨 싸움? 땅 싸움이에요. 푸틴이 하는 것도 땅 싸움이고,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도 땅 싸움이에요. 죽기 살기로 땅이 있어야 살아요. 그걸 하나님이 아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하지요. 너 살던 땅 말고 네가 경험치 않은 땅 줄게, 라고 하지요. 그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이에요.
바알과 여호와의 차이점은 뭐냐? 바알은 뭐가 있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바알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당신을 믿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이 당신 안에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알신이에요. 인간의 만들어냈으니까 인간이 창안해냈으니까, 그때 그 내용이 내가 무엇의 주인공? 내가 신화의 주인공, 전설의 주인공.
“내가 당신을 믿어줄 테니까 전설의 주인공으로 굳건하게 유지시켜 달라.” 이런 조건 하에 그 신을 믿어요. “예수여, 내가 나의 주인공으로 번듯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 당신이 나를 도와주고, 여호와여 도와주옵소서.” 이게 바로 바알종교 아닙니까.
그러면 기존에 모든 땅을 가진 인간들은 바알 신을 섬길 때 전쟁을 할 때 우리가 침략하는 땅은 앞으로 우리 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앞에 깃발 세우고 했어요. 전쟁할 때. 마르둑 신은 마르둑 신의 깃발을. 블레셋과 이방 아람, 에녹 모든 민족은 자기 신의 깃발을 내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차이점은, 여호와는 뭐냐 하면 인간의 전설의 주인공 내용을 일체 용납하지 않고 다른 분이 모든 이 세상의 자연과 해와 달과 천지창조의 주인공임을 집어넣는 내용이 바로 약속이란 이름으로 들어가 있어서 그 약속을 스스로 알아서 실현시키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죠. 다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굴 찾아왔어요? 모세를 찾아왔지요.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 한쪽은 아담, 아담이란 이름 안에 예속돼 있는 모든 다양성 있는 이름들, 그 다양성 이름을 전부 다 아담이라는 흙이라는 이름에 종속된 하부 이름들이에요.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담 또는 흙. 남자든 여자든 이름은 하나로 통일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갖고 있든 우리 속의 아담 노선을 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두 개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개의 이름이 중요한데 두 개의 이름이 결국 뭐냐? 하나의 이름 중심으로 전개시키는 거예요. 두 개가 있는데 한쪽에 편향된 이름으로 다른 이름이 끌려가는 식의 전개가 이뤄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아담 이름, 누구 중심으로 전개되겠어요?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요.
시편 54편 1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됐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네 이름 포기할래’라고 묻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부추겨서 나를 구원하는 것 포기할지 묻는 거예요. 이것이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특이사항을 주지 아니하면 다윗이 밥 먹을 때 주의 이름으로 밥 먹게 한다, 이러진 않는다 말이죠.
평소에 하던 일을 이것은 내 이름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들만 있다면 굳이 하나님의 이름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이런 난관 정도는 미리 예상하면 거기에 대비해서 내가 어떻게 한다, 이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다윗에 이런 시편이라는 기도가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은 이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특이한 일들이 일어나서 그래요.
여기 시편 54편 본문 들어가기 전에, “다윗의 마스길” 마스길은 트롯이냐 탱고냐 보사노바냐 째즈냐 그런 가락 이야기고요.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렇게 돼 있어요. 다윗은 본인도 전설의 주인공이고 싶어요. 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데 전설의 주인공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되지요.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의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나는 바른 걸 선택하고 내 앞길을 이렇게 제대로 지혜롭게 선택해서 헤쳐가야지, 라는 자세가 원천봉쇄 돼버려요.
아까 순환구조 이야기했지요. 순환구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복습해봅시다. 제일 출발점을 뭐라 했습니까? 비극. 누구의 비극? 나의 비극. 나는 대단한 존재인데 사는 꼬라지하고는 왜 이러냐. 비극에서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이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유가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전설 또는 같은 말로 신화.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게 되면 어디로 갑니까? 본래 나는 이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어서 내가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 순환구조에서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지요. 항상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 자기가 어떤 결과를 갖는지 예상하고 나오는 겁니다. 이 비극적인 것이 한 바퀴 돌게 되면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재창조가 되어서 이거는 희극적인 내가 만족스런 존재로 다시 순환한다는 구조에요.
이 신을 무슨 종교라 했습니까? 부활의 종교죠. 부활의 종교는 우리 인간은 변해도 자연은 튼튼하고 한결같은, 해와 달, 별. 따라서 자연을 주관하고 있는 신, 자연을 주관하는데 이 지상에서 어떤 형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더라? 부활로.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 겨울 되어 죽었는데 봄 되면 어떻게 돼요? 땅에 다시 싹이 올라오지요. “그 부활에 저 끼어주면 안 돼요? 자연을 다스리는 자연의 신이여, 나도 자연의 일부로서 그 부활에 들어가면 안 되겠어요? 내 당신을 믿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주변의 토착민들이 믿던 바알종교에요.
이 논리구조, 이 바알종교의 특징은 부활은 있는데 뭐가 없어요? 인간의 자기 부정이 없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없어요. 왜 자기 부인이 없느냐? 부활될 때 부활의 나가 현재의 나와 동일 되는 나기 때문에 그래요. 동일시되는 나에요. 목사님 아버지 돌아가셨습니다. 근데 아버지 돌아가신 것과 감히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가 죽은 것과 대비시켜봅시다. 마르다, 마리라. 지금 욕하는 것 아니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잖아요. 마르다, 마리아는 그걸로 끝이지요. 그걸 끝이라고 봤습니까? 더 이상 오빠는 그 집안에 전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데 그게 아픔이고 눈물로 쏟아지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참 좋은 기억을 줬던 오빠에요. 기둥 같은 오빠에요. 오빠를 의지한 겁니다. 근데 그 의지한 오빠를 죽였어요.
그럴 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붙들고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내가 예수님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몹쓸 짓을 했기에 우리 집안의 전설의 주인공이 난데없이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아플 때 언질 줬잖아요. 빨리 와서 우리 기둥 같은 오빠 살려달라고. 그런데 노리듯이 죽고 난 뒤에 오셔서 어쩌라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원했던 것은 바로 논리 순환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주님이 시도한 거예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폐쇄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나를 믿느냐? 믿고말고요. 예수님께서 특히 마르다에게 한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너희 오빠 죽고 난 뒤에 사는 것과 내가 죽어서 사는 것과 너 어느 쪽을 믿을래? 기둥 같은 오빠 죽고 사는 걸 믿을래, 내가 죽고 사는 걸 믿을래? ‘나를 믿을래, 오빠를 믿을래’와 똑같은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가 좋아, 오빠가 좋아? 같은 말로 내가 좋아, 네가 좋아? 네 자신이 좋아, 안 그러면 내가 좋아?
인간은 이미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좋아 수도 없고요. 어떻게 반 떼어 나눠줄 수도 없는 거예요. 좋아다는 게. 집중된 방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거는 한 방향이기 때문에 방향을 둘로 쪼갠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나 좋아하면 몰빵이에요. 예수를 믿던, 삼위일체를 믿던 전부 다 나 좋아하는데 집중하게 돼 있어요. 나 좋아할래, 너 좋아할래? 같은 말이에요.
신을 믿고 바알을 믿고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던 간에 그거는 자기의 방향을 꺾지 않겠다는 고집이에요. 왜냐하면 내 방향을 가는데 혹시 후원할 수 있고 혹시 도움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이게 마르다,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걸 예수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야 지금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날 믿는다고 위선 떠는데 네가 오빠를 생각해봐라.
오빠가 죽었다 살아난 당사자잖아요.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오빠가 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가 생각해 본적이 있냐?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나 사는데 보탬 되라고 예수 믿는 것하고 실제로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죽은 그 오빠가 다시 살아나는 선택 당함을 입은 오빠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부활입니다. 바알종교의 부활이 아니에요. 내가 다시 부활되는 게 아니고 흙은 죽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다시 사는 게 부활이거든요. 근데 흙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내가 전설의 주인공인데? 그동안 교회를 다녔는지 절에 갔는지 분명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수를 믿었는지 부처를 믿었는지 안 그러면 나를 믿었는지 분명히 생각해보라고요.
다른 사람은 다 속아 넘어가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목사님 아버지, 다시 부활됩니다. 지금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흙일 때 아는 그 아버지는 아닐 거예요. 정말로 성령 받아서 복음을 아시는 분이라면 흙을 재료로 해서 죄인을 재료로 해서 새로 만든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듬뿍 담긴 새로운 아버지로 부활될 겁니다.
그때 만나시거든 우리 집안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결정한 요소가 빠지고 내가 선택한 요소는 빠지고 일방적으로 주님한테 선택 당해버린 거예요. 선택당한 요소가 거기에 들어가면서 로마서 9장 13절이 나오지요.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주님의 일방적 선택이 담긴 새로운 피조물, 그것이 바로 부활의 세계에 모여든 집단의 공통점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