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강-예레미야 26장 20~24절(사랑의 경작)240908-이근호 목사
119강-예레미야 26장 20~24절(사랑의 경작)2409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20~2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을 쳐서 예언하매, 여호야김왕과 그 모든 용사와 모든 방백이 그 말을 듣고는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이를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 내어 여호야김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정말 이게 ‘아멘’할 이야기인지. 차라리 죽을 바에는 내 쪽에서 알아서 미리 기면 되잖아요. ‘나 복음 모릅니다. 나는 복음을 저주합니다. 나는 복음 전하는 사람과 같이 안 놉니다. 나는 그런 거 싫어합니다’라고 그렇게 미리 항복하면 자기 몸 하나는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분명히 일하신다고 하면서, 어떻게 자기의 복음 전하는 사람 하나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 않는 겁니까?
참, 이게 어떤 복음을 전할 의욕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거죠. 하나님과 같은 편이라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할 책임도 하나님께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일체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죽든 말든 너는 복음만 전해라” 그러니까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복음의 내용 안에 개인적인 것보다 더 월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네가 과감하게, 거침없이 죽음으로써 깔끔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가치 있는 복음을 전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예수님이고, 희생적인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찬미하고 찬양하세’라는 이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너, 잠깐 나와봐.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 나와봐. 방금 뭐라고 했어?” ‘주님은 찬미 받아 합당하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래? 그것이 하나님께 뭐가 된다고?” ‘영광이 됩니다!’ “그래? 그럼 너도 영광 한번 돌려 볼래?”
그러면 당장 경상도 말 나오죠. ‘어데에~~ 아니라에~’ 여기서 복음을 믿자는 생각을 사람들은 아예 안 하고요, 복음을 알자는 쪽으로 우리가 마음을 바꾸죠. 복음을 알자는 쪽으로 바꾸면서 거리두기를 하게 됩니다. 복음 때문에 나의 것을 잃는 것은 내가 용납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그래서 우리가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현장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과 동떨어졌는지 세계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밀어내요. ‘그래, 참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면서 밀어냅니다. 밀어내는 이유는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소중한데, 그동안 내가 구축한 내 인생까지 너무 가까이는 하지 말라는 거죠. ‘나는 그동안 수고하고 얻은 내 인생에 흠집 나기 싫습니다’라고 하는데 싫다고 하지 말고 두렵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싫은 이유는 뭔가 두려운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운 거예요.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나랑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언제든지 도와줄 것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은 “이 세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대’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뭉쳐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로 뭉쳐진 세계에는 그 안에 하나의 단지처럼 그 안에 같이 들어가 있어서 이 세대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을 때, 너도 충분하게 심판받을 건더기를 그동안 쏟아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를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유대민족은 한통속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한통속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유대민족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시편이나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특히 이사야 44장이나 45장을 쭉 보게 되면 이런 말이 나와요.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우리가 중립지대에 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이렇게 보게 되면,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라는 말이 쉽게 거뜬하게 믿음으로 들어올 수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 중간에 예레미야를 집어넣고 다시 이사야로 가보세요.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 전하다가 죽을뻔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본성적인 반응은 ‘나, 예레미야처럼 그렇게 죽을 지경까지는 말씀 안 전할래. 나는 알아서 내가 도피할래’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사야 본문을 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냐, 이사야 44장에 “나의 종 야곱아, 이스라엘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줄게”라고 쭉 나오고요, 45장도 마찬가지고, 44장은 완전히 그런 내용으로 덮여있어요. 이사야 43장 같은 경우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런 이사야 43장 1절에 있는 말씀을 ‘이제는 나 하나님과 거리 두고 살래. 나는 이제 매달리지 않을래’라는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했을 때, 이 말씀은 우리가 접근하지 못할 말씀이라고, 나랑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겁니다. 왜? 내 쪽에서 거부했으니까. 내 쪽에서 하나님을 밀어냈잖아요. 밀어냈는데, 그 뒤에 뒤늦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이미 내 쪽에서 거부했는데, 거부하고 난 뒤에 저쪽에서 치고 들어오면, 나의 거부성, 나의 마음 결정은 아주 우습게 되죠. 장사치 두 사람이 거래하는데, ‘이 건물 얼마 쳐줄래요?’ ‘아무리 봐도 낡았으니 5억 쳐줄게요’ ‘그렇게 나오시면 나는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20억은 받아야 할 건물 가지고 그렇게 말하니, 길가에 위치한 5층 건물인데 20억은 받아야지요. 아무리 이 동네 인구가 준다고 해도 20억은 받아야 하는데, 이 사람이 날 어떻게 보고 5억? 일체 난 당신과 이야기 안 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런 다음에 사려는 진짜 주인에게 전화가 와서 ‘우리 처남이 뭔가 잘못 전달한 것 같습니다. 30억 드리겠습니다’라고 나올 때, 이미 당신에게 어떤 연락이 와도 안 받겠다고 이미 마음에 다 결정했는데, ‘30억 쳐주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상보다 10억 더 준다고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서 ‘아이고, 진작 그러시지. 그렇다고 내가 뭐 꼭 안 팔겠다는 것은 아니고’라고 이렇게 나오면 내 꼴이 무슨 꼴이 됩니까.
성경 말씀은 우리 꼴을 완전히 좌절시켜 놓고 그다음에 이야기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본색을 다 드러내요. 이걸 가지고 예레미야 26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여기에 ‘경작(耕作)’이라는 말이 나와요. 경작. 토지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 밭을 갈아엎는 것을 경작이라고 하죠. 그냥 밭에다 씨뿌리는 것이 아니고, 이걸 갈아엎고 난 뒤에, 그걸 다른 말로 ‘기경(起耕)’한다고 해도 되는데요. 에스겔서 36장 34절에 보면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찌라”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은 할 일이 뭐냐. 땅을, 인간의 마음을 갈아엎는 사람이에요. 그들의 본마음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예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잠깐 이리 와보세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라고 묻죠. 그러면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네. 알았어요. 자, 이 사람 땅 기경합니다. 이 사람의 본마음은 뭘까요? 짜잔~~~’
말은 그렇게 하는데, ‘믿습니다. 복음 압니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본심은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기경, 경작시키는 이것이 우리 쪽에서 다가오는 말씀 해석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서 우리 마음에 와서 뒤집어 놓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확 디비뿌까?’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겁니다. 뒤집어 놓으니까 오늘 본문에 20절에 “또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이 사람은 말씀이 와서 뒤집어 놓으니까 사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면, 이집트로 도망갔습니다. 애굽으로 도망갔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것이 뒷부분에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선지자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제사장 묘실이 아니고, 그러니까 국립현충원이 아니고, 일반인 묘실에 그 시체를 던졌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말했으면 목숨 걸고 말해야지. 이건 뭐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고,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해놓고, 상대가 ‘너 방금 뭐라고 했어?’라고 물으니까, ‘우리 예레미야와 같이 이 세상은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듣고 ‘너 죽을래?’라고 하니까, ‘아니요’라고 나오는 거죠.
‘너 사형시킬까?’ ‘아니요’ 그날 밤에 ‘여보, 우리 애굽으로 도망가자’라고 한 거예요. 이게 뭡니까. 도대체 이게 뭐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야라는 선지자를 동원해서 예레미야와 비교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뭐 말만 하면, 복음 알고 나서 사랑하는 형제끼리, ‘와~우리는 형제’라고 말만 줄줄 신학적 말 나오고 복음 줄줄 나오면 그게 성도입니까?
우리 교회는 아예 해당 사항도 안 되는데. 우리 교회는 묵언수행 하느라 입을 다물었어요. 복음에 대해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어서 해당 사항도 안 되는 거 같은데.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그러니까 내가, 사도바울 내가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소음이라는 거죠. 소음.
‘쟁쟁쟁쟁~’ 무슨 무당 굿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산 뒤쪽에 무당집 있잖아요. 아직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운동하다 보면 시끄러워요. ‘챙챙챙~’ 꽹과리 막 치거든요. 꽹과리 치고 있을 때, 제가 지나가면서 이런 것을 묻고 싶어요. 이 꽹과리 소리가 무슨 의미냐? 좀 의미 있는 짧은 말 한마디라도, 그렇게 꽹과리 치지 말고 말로 해야지, 꽹과리 치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물론 책에 보면 그 의미가 나와 있어요. 인간이 귀신 들려서 혼란스러우니까, 혼란은 더 큰 혼란으로 인해 안에 들어온 귀신이 시끄럽다고 짜증 내면서 나가게 되면, 그 사람은 귀신이 나가고 멀쩡하게 된다는 그런 수법을 쓰는 거예요. 그러다 귀신이 나가는 게 아니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겠죠. 무당들이 그 짓을 하는데, 왜 똑같은 짓을 복음 아는 자들이 왜 그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울리는 꽹과리를 왜 하느냐.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도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나옵니다. 게다가 여기서 또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한다고 구제 좀 해놓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자기들은 바른 교회, 정통적인 옳은 교회다운 교회라고 선전해서 사람들 끌어모으려고 그러죠.
대구의 어떤 큰 교회는요, 쇠락해 가는 시골교회 돕는다고 14군데 교회들에 선교 헌금한다고 교회에서 광고해요. 그런데 각 교회 얼마씩 주는가. 꼴랑 5만 원씩 줘요. 무슨 거지 동량도 아니고. 그런 것은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거든요. 5만 원 정도는.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서 모아서 한다는 것은 이 어둡고 참담한 교회에 구제와 봉사를 해야 하는데 우리 교회밖에 더 있겠냐는 이런 자랑질을 하려고 그런 것인지.
3절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면 사랑은 뭐냐. 사랑이 뭐냐를 가지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이 뭐가 아니냐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일단 몸을 불사르게 구제하는 거 탈락, 복음 이야기하는 거 탈락, 그리고 신학 이야기하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 탈락.
그러면 사랑은 뭐냐. 사랑은 나를 경작시키는 것이 사랑이에요. 내 마음을 뒤집어 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 마음 이야기하지 말고, 남이 저렇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해수욕장 시즌에 보면 모터보트가 바나나보트 끌고 달리는 거 있지요. 쭉 달리다 보면 나중에 뒤에 바나나보트가 뒤집어져요. 그러면 바나나보트에 탄 사람들이 좋다고 바다에 풍덩풍덩 빠지죠. 좋다고. 모터보트의 사랑을 느낀 모양이라.
나를 완전히 빠뜨리고 뒤집어 놓는 거. 우리가 말씀 뒤에 탔는데, 말씀 지킨다고 타고 말씀 안다고 자랑질하는데, 말씀이 속도를 내니까 그 말씀 뒤에 바나나보트에 탄 우리들은 말씀에 의해서 남 이야기하지 말고, 나부터 말씀에 의해서 뒤집히는 거,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말씀 지식이 있는 우리아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했지만 나도 했다’라고 그런 자랑질 하고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죽을 각오했어요. 살 생각 없었습니다. 지는 왜 도망갑니까. 예레미야를 존경하면 같이 붙어 있어야죠. 이게 뭐냐 하면 예레미야는 진짜 선지자이기 때문에 뭘 아는가. 오늘 설교에서 제일 핵심 부분에 들어왔습니다. 뭘 아느냐 하면, 복음은 사적으로 내가 아는 게 아니고 복음은 환경입니다. 환경이에요. 내가 어떻게 손대면 안 돼요. 환경이 덮쳐서 복음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공부 많이 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설교 시간에 잠 안 자고 정신 차려서 복음을 안 것이 아니고, 그냥 덮친 환경이에요.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는다”라고 나옵니다. 예수에게 돌을 던지고, 예수를 부인하고, 방탕하고 타락하고 어떤 짓을 해도 용서를 받는데,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주께서 주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용서받지 못할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예요. 왜냐 하면 성령은 대상이 아니고 환경이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거예요. 내가 원한 체험이 아니고 그냥 나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체험이에요.
스스로 마음 뒤집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착한 척하기 때문에. 착한 척이고 이게 위선에 불과한 것을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뒤집어 놓을 때, 그 환경은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이건 너무 중요해서 한 번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또 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게 무슨 말입니다. 할례 행하고 안 하고는 내가 알아서 나에게 손질하고 손쓰면 되니까.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이것은 누구 몫이냐 하면 성령의 몫이고 주님의 몫이에요. 여러분은 어느 체험을 붙잡고 있을래요? 내가 열심히 하는 그 체험 붙잡을래요, 내가 할 수도 없는 체험을 붙잡을래요?
환경입니다. 구원은 환경이에요. 열심이 아니고 환경입니다. 그냥 덮쳐오는 거예요. 어떻게? 곱게? 아니요. 훌륭하게? 아닙니다. ‘저 구제 많이 했습니다’ “그거 사랑 아니야” ‘저 신학교 나왔는데요’ “너, 그거 사랑 아니야” ‘저 설교했는데요’ “너 설교하고 강의하는 그거 사랑 아니야. 네가 뒤집히는 거 그게 사랑이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사랑이야.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복음 전했는데 죽인다? 나의 구원을 주께서 하시듯이 죽는 것도 주의 뜻이겠죠. 제가 울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욕 얻어먹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내가 스스로 내가 구원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을 안 먹어야 구원받는 겁니까? 구원받는 것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나의 욕 얻어먹는 그것이 내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그 누구도 훔쳐 가지 못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마귀도 훔쳐 가지 못해요. 왜냐 하면 마귀를 이긴 분의 소식이기 때문에, 그게 환경으로 덮쳤기 때문에, 마귀도 복음을,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빼앗아 가지를 못합니다. 끝으로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참, 이 말씀이 너무나 소중한 말씀인데요, 여러분도 다 아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 “기록된바” 기록된 말씀입니다. 내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끝! 그러니까 사랑이 내 사랑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환경이 그냥 주어진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랑 환경에서 새롭게 만들어졌기에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도는 눈치채지요. 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랑해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왔기에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시기에, 우리는 그냥 무엇을 해도 사랑인 것을, 주님의 사랑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마저 사랑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