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4장 3절 (죽음 속의 죽음) 240716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4장 3절 (죽음 속의 죽음) 24071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4장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는 있음이죠. 있음은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항상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하는 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있음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확인하는 삶이 가능하죠. 나의 조건은 내가 여기 있을 때 확인할 수 있을 때 나는 내가 사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이 말은 사실과 진리를 일치시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곧 나에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내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사실과 진리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있음이죠. 있음을 확인. 사실과 진리가 일치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러면 뭡니까?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부정당하겠지요. 분명히 무덤에 시체가 있어야 돼요. 분명히 시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시체 있는 지 없는 지는 들으면 안 되고 내가 가서 눈으로 봐야 되지요. 시체 있다. 무덤 안에 시체 있다. 보니까 시체가 있음이 아니고 시체가 없지요. 시체가 없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확인하는 이유에 한계를 넘어서 버린 거예요. 이거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에요. 내가 확인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여기에 무덤 안에는 시체가 있다. 시체 없는 무덤이 어디 있어요. 무덤 안에 시체가 있을 때 그게 무덤이 되잖아요. 똑같이 적용하면 돼요. 무덤이란 뭐냐? 안에 뭐가 있을때는 무덤이 된다? 시체가 있을때는 무덤이 돼요. 무덤이란 시체를 넣어놓은 곳이니까. 그런데 그 무덤에 시체가 없다 이 말이죠. 시체를 넣어준 사람은 있는데 시체가 없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다. 그게 사실이고 그게 진리다 일치된다 라고 하는 모든 것이 일거에 다 무너지는 겁니다. 이 무너짐을 여기서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겠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못 믿겠다. 이거는 말이 안돼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기에 여기 있는 내가 보기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것은 항상 내가 여기 있고 그게 진짜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내가 있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거짓말일 수가 없다는 전제 하에 내가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누가 탓해?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데. 나는 여기 있단 말이야. 자꾸 없다고 하지 마 나 여기 있어. 자신만만해 라고 우기는 그것을 내가 여기 있는 조건이에요. 조건.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내가 하는 것이 뭐가 된다? 진리가 되는 조건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있으니까 확인되니까 그거는 진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는 믿겠는데 뭐를 못 믿겠다? 시체가 어디 가서 없어요. 십자가는 믿겠는데 부활은 도대체 이거는 확인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인간은 어떤 인간도 십자가 사건을 믿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 없게 만드는 조건이 뭐냐? 부활을 집어넣습니다. 시체가 없어졌네. 그걸 네가 당황한다면 네가 믿는 십자가도 십자가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됩니다. 보통 인간 보기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고 그 다음에 무슨 사건입니까? 부활 사건. 예수님의 죽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부활이잖아요. 우리 인간들 보기에. 왜냐하면 인간들은 순서로 보니까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몇 일 동안? 3일 있다가 부활 됐으니까 순서상 십자가 먼저고 그 다음 나중 사건은 부활 사건이 된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부활 사건 나중 사건 속에 초기 사건을 여기다가 나중 사건이 초기 사건을 유발시켜버려요. 초기 사건을 두고 나중 사건이 증명하는 게 아니고 부활 사건을 인간에게 주고 그 다음에 초기 사건인 십자가를 그 다음에 이야기함으로서 인간들이 십자가 믿는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고 그거는 믿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의 부활이에요. 참 어렵지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건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죽지 않고 부활이 있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인간 듣기에는 똑같은 소리지만 똑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죽지 않고서야 어떻게 부활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부활하겠지가 아니라 그것부터 출발하지 말고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가 분명히 죽였는데 어떻게 시신이 없어. 어떻게 그게 살아난 거야.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게 자기 죽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죽음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도대체 내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어버렸다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했느냐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묻고 있습니다.
15장 한번 볼게요. 부활이 없으면 나의 죽음도 없어요. 희한하죠. 부활이 없으면 나의 죽음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부활이 있든 없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는데 그 죽음은 우리가 잘못 생각한 죽음,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대로 된 죽음은 부활을 믿게 되어서 그로 말미암아 부활되신 분이 죽었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경유해서 그 다음에 그 다음 차례 내가 왜 죽지? 이렇게 되어야 이게 되어야 이게 사실과 진실이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가지고 자기 죽음의 이유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은 인간은 원래 죽는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왜 태어난 인간은 왜 다 죽어야 되는가? 죽는 게 왜 조건인가? 그 조건 도대체 어디서 온 조건인가를 죽어야 된다는 그 조건이 어디에 근거한 조건인가를 그 근거를 알아야 죽음의 근거를 알아야 제대로 죽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가수는 나중에 노래 못하면 어떻게 해요? 은퇴해야 되겠지요. 우리의 순서는 뭐냐? 가수는 노래 못해서 은퇴하고 은퇴 다음에 나이 들어 죽는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우리 상식이죠. 그런데 은퇴 없이 죽으면 어떻게 돼요? 가수가 은퇴하지도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 좀 이상하지요. 그런 사람이 누구지요? 현철. 현철 아세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한다는 현철. 봉숭아 연정.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외쳤던 현철. 그 사람 특징이 뭐냐? 은퇴 없이 죽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제 죽었어요. 인간은 죽어도 못 죽어요. 왜? 은퇴를 안 했으니까. 인간으로서 은퇴하고 죽어야 되는데 인간은 은퇴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은 왜 죽을 조건일 수밖에 없는가를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새삼스럽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게 되면 36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16절 한번 봅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죽는 것이 기정 사실이 아니고 부활하는 것이 기정 사실이라는 거예요. 죽는 것이 그냥 죽어버리면 인간을 죽게 한 하나님이 주신 조건이 살아나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너는 꼭 죽어야 돼' 라는 그 조건을 살리기 위한 부활이에요. 주님께서 끝까지 죽고 난 뒤에도 하는 거예요 인간을. 살다 보면 죽겠지가 아니라 너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왜? 내가 너희를 살려서 내가 너희를 살리는 목적 하에 네가 죽는다는 것이 조건으로 필히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죽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거 맞잖아. 아니 안 맞아 거짓이야. 네가 여기 있다는 조건은 뭐냐? 내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아니, 죽어서 살아있을 때 조건이 되어야 되는데 네가 살아있어서 살았다 하면 네가 죽는 이유가 안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거는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참 이 부활이 만만치 않지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지요. 어려운 문제 아니고 불가능한 문제지요. 어려워도 알면 다행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것하고 힘든 것하고 차이가 나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라. 아 이거 힘들지요. 힘들지만 할 수 있지요. 타박타박 걸어가면 한 달 걸리면 갈 수 있잖아요. 한 400km 됩니까? 하루에 한 4km 걸으면 100일 만에 가네요. 가다 맛있는 것 먹고 자고 할 수 있잖아요. 힘들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 나는 꼭 죽어야 된다는 이 사실은 죽었다가 사는 것하고 달라요. 죽었다가 사는 건 다르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는 조건이 내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조건이에요. 그 먼저 모델이 누구냐?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부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첫 열매가 돼요.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이 그렇게 했잖아요. 그럼 그 뒤에 천국 가는 사람들도 살기 위해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말투가 사는 것을 기정 사실을 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안 보는 인간들은 뭐냐? 인간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사는 게 어디 있느냐고 자꾸 뭐를 조건으로 삼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거니까 이거는 십자가도 못 믿을 뿐더러 부활조차도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부활을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 정식으로 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십자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내가 이해하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나는 필히 죽어야 돼 라는 마음으로 볼 때 비로소 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종속된 죽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종속된 죽음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내가 살아있다는 나는 모르고 뭐가 와야 돼요? 부활의 영이 임해야 돼요. 부활이 먼저 와야 돼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내가 살아있는 나의 이해력과 나의 모든 실력과 이성적인 능력과 학력과 모든 것은 부활의 접근 불가. 불가능성. 왜냐하면 무덤에 가니까 시체가 없으니까. 예상 밖이에요. 시체 없다 그냥 집에 가자 이게 문제가 아니고 그 시신이 예수님의 시신이 나라면 그 무덤 없음을 내가 사전에 그걸 알겠느냐 이 말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죽고 난 뒤에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있을 때 그걸 납득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아서 그걸 납득한다면 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거짓일 뿐이에요. 그리고 진리 조건은 내가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가 살려주신 그 분야는 누가 개입하느냐? 주님이 개입하잖아요. 주님이 진리에요. 주님이 진리라는 말은 나는 진리가 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진리가 아니에요. 이거는 거짓입니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나를 확인하는 측면에서 사실을 언급하거든요. 사실과 내 말과 일치시키는 것을 가지고 과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컵이 있다. 컵을 컵이라고 부르자. 컵은 색깔이 투명한 이것이 컵이다. 맞나? 틀렸나? 이렇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어요? 컵 맞네 이러잖아요. 사실과 뭐가 일치된다? 진리가 일치되지요. 그럼 사도 바울은 이 컵이 부활되겠느냐? 이렇게 물어요. 컵이 부활하겠느냐?
자, 이 컵을 컵 무덤에 넣을 테니까 사흘 뒤에 컵이 없어졌어요. 그러면 전에 알던 컵은 진짜 컵이에요? 가짜 컵이에요? 가짜 컵이죠. 그럼 실컷 교회 다니고 복음 듣고 했는데 이게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교회 가서 들었던 것은 뭐냐 하면은 나 옳지? 나 바르게 살지? 나 훌륭하지? 본인이 본인을 확인하는 거짓된 내가 내 조건을 따로 만들어가는 그러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초기 사건 십자가가 후기 사건의 부활이죠. 후기 사건의 선후가 바뀝니다. 부활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고 시체는 없으니까요. 십자가는 없으니까. 십자가 사건이 먼저가 아니고 부활 사건이 먼저 다가와서 부활 사건 안에 뭐가 들어있다? 비로소 진짜 십자가 사건이 부활 사건 안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부활의 영을 받지 않으면 뭘 모른다? 십자가를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언어를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 이 작업을 바리새인들이 했지요. 바리새인은 인간의 대표격에 해당되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 다 했으니까요. 언어를 진리에 일치시켜서 그들이 가진 것은 뭐냐? 권력이었습니다. 어떤 권력? 구원의 길을 장악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소경이 길을 인도한다고 했어요. 소경이 길을 인도하니까 뒤 따라오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거짓된 길로 갈 수밖에 없지요. 내가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설명했으니까 이것이 구원의 길에 천국 가는 길을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독점해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구원에 관한 권력자가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받아버리죠. 이 소경된 자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까 그 길이 옳을 수 있겠어요? 본인도 망하고 뒤따라오는 사람도 다 망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소경이 아닌 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 밖에 없지요. 예수님 본인 밖에. 본인만 소경이 아니에요. 그러면 제자들이 가보자.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까 가보자. 갔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앞으로 가이소 해서 갔는데 주님만 앞으로 가고 나머지는 다 빠졌어요. 코미디에 나오는 것처럼 "나를 따르라!" 하고 "저 고지를 쟁취하라!" 먼저 장군이 앞에 나왔는데 뒤돌아보니까 자기 혼자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 빠졌어요. 왜?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있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내 보존에 도움 되는지를 늘 확인해왔던 겁니다.
해보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주님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안 된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있음이 초기 사건이고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것은 나중 사건으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주님은 후기 사건이 앞의 사건을 먼저 땡기는 거죠. 부활하신 분이 뭘 소개합니까? 십자가를 소개하지요. 이게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우리는 나를 구원해달라는 식이에요. 나를 구원해달라. 나는 여기 있는 게 진짜니까. 주님은 은퇴 없이 돌아가셨어요. 현철같애. 우리는 이것저것 정리 다하고 죽어요. 가만있어보자 은퇴하고 난 뒤에 슬슬 재산 가지고 요양병원에 한번 들어가볼까. 자기 준비할 거 다 준비하고 주여 다 끝냈습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인간은 자기 임종을 누가 준비합니까? 본인이 준비하지요. 그래서 나온 게 보람상조 아닙니까? 본인 죽음을 본인이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시나리오를 누가 짜고 있다? 본인이 짜고 있는 거예요. 웃기지도 않아요 정말.
여기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이 부활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먼저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은 율법을 제시했어요. 율법. 율법은 쉽게 말해서 폭탄입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폭탄. 폭탄은 제가 점잖게 이야기했어요.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이 있는데 맹렬히 돌아가는 제재소의 목재 자르는 것. 윙~ 하고 모가지 잘라버려요. 날려버려요. 율법은 저주케 하는 거예요. 모가지를 날려버려요. 주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율법을 먼저 언급을 해버렸어요. 갈라디아서 3장 같은 경우에. 율법을 언급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예수님은 누구하고 공범이냐 하면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공범입니다. 예수님이 공범이 되어서 이 세상에 텍사스 전기톱을 가지고 왔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누구하고 공범이냐 하면은 악마하고 공범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전기톱 가지고 사정 안 봐주고 그냥 모가지를 저주의 율법으로 날려버려요. 죽여버린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겠습니까? 전기톱으로 윙~ 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주가 생성되겠지요. 저주가 생성되고 저주가 생성되는 그 재료는 이게 바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생각하기 쉬운 거예요.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 율법이 뭐로 되어있느냐 하면은 언어로 되어있어요. 언어. 언어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가지고 이게 일치가 될 때 언어에서 뭐가 나와요? 진리가 나오거든요. 언어에서. 진리가 나온다고요. 만약에 일치가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각오해야 되지요. 율법은 언어로 되어있고 언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다 실천 못하면 이거는 저주 받을 각오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물이나 사건, 이 사건을 율법 사건을 인간이 무슨 재주로 일치시킵니까? 일치시킬 수 있어요? 없어요? 사건을 우리가 일으킵니까? 일부러?
율법이란 언어, 언어를 제대로 일치시키는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아니면 율법대로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사는 거예요.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율법의 고유 기능이 뭐냐? 저주 기능이잖아요. 그 저주 기능을 예수님 자신 몸으로 옴팍 뒤집어쓰는 거예요. 율법을 지켜서 빠져나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쓰는 조건을 가지고 왔어요. 그게 뭐냐? 예수의 몸은 죄 된 몸이에요. 아담의 죄 된 몸이기 때문에 죄인끼리 필히 뭐가 발생돼요? 저주가 발생되어야 돼요. 그래야 율법과 진리가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돌아가셨잖아요. 십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십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무슨 영향을 줬습니까? 아무런 영향을 못 줘요. 오늘 강의에 첫 번째 중요한 겁니다. 십자가 죽음이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십자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났기 때문에. 그러니까 누가 살아났느냐 하면은 저주 받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거는 저주가 꿀렁꿀렁 살아나는 거예요. 온 천지 저주가 살아나는 거예요. 텍사스 전기톱이 살아나는 거예요.
십자가와 십자가 부활 사이에 있었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공모해서 만들어진 그 절차를 나름대로의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부활 통해서 이 세상에 알려주는 것은 뭐냐? 첫째는 순서, 두 번 째는 양립성, 세 번 째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1. 인간세계 조건에서 인간들은 나름 순서를 정해요. 인간은 모든 행동에 순서를. 왜냐 하면은 시간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선후, 어느 것이 앞서고 어느 것이 뒷선다. 그래서 앞선 것이 원인이고 뒷선 것이 결과라고 보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살아났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아까 고린도전서에서는 그게 반대지요. 죽었기 때문에 살아난 게 아니고 살아남을 위해서 먼저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2. 인간 나름대로 나름 양립성. 무엇이 옳고 무엇이 무엇이 그른가를 양립을 해요. 무엇이 나한테 유리하고 무엇이 분리한지를 양립해요. 3.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합니다. 선택이 가능할 때 이때 인간은 자기를 주체적으로 인식해요. 자기를 주체로 보는 겁니다. 내가 나의 주도권, 주인공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 이걸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누가 주인공이에요? 나에게 있어서 누가 주인공이에요? 선택은 내가 하니까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이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해서 그것을 뭐로 본다? 그것을 진리로 간주한다 이 말입니다. 진리로 간주하는 나에게 오늘 24장 보니까 무덤에 갔을 때 무덤에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시신이 있어야 되잖아요. 없어요. 무덤에 시체가 없어요. 무엇이 지금 사단 났습니까? 나름 순서, 나름 양립성, 나름 선택 이 모든 것이 와르르 다 무너졌어요. 무너졌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인간이 텍사스 전기톱에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유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이 저주성은 인간의 저주보다 앞선 저주가 있어요. 이게 순서에요. 예수님이 부활했지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인간은 뭘 느끼느냐? 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그 기능으로 오시는 겁니다. 순서상 부활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십자가가 부활을 앞장세우고 뒤따라가지요. 안에 내용으로 들어가지요. 그 중심부에 십자가가 들어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양립성은 뭐냐? 저주와 복이죠. 이걸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버려요. 저주 받을 자와 복 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선택합니다. 이 선택 작업을 인하여 부활의 영이 아무한테나 가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아무한테나 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게 되면 자기 백성은 비로소 자기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자체가 들통나고 들키게 되고 노출 돼요. 그러면 자기 선택? 이거 소용없고 내 양립성, 이거 소용없고 내가 나름대로 순서 잡는 것 이거 소용없지요. 이거 소용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저주가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저주가 나에게 미쳤고 나에게 덮쳐졌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저주가 나에게 덮쳐졌으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은 십자가의 효과라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게 아니고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1장 6장에 나오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은 이건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주님이 자기 순서와 양립성과 주님의 선택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리얼과 리얼리티'. 왜 이걸 일부러 나눠야 하느냐 하면은 리얼은 실재하는 것이고 리얼리티는 현실이에요. 현실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납득되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되고 해명이 되는 그게 리얼리티 현실 세계에요. 그런데 리얼리티 세계는 접근을 못해요. 실제 세계는 언어 밖의 세계, 언어로 해명이 불가해요.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함. 언어로 설명이 불가한 거예요.
인간이 이해되는 것을 studium이라고 하고 punctum 이라고 나눈 사람이 있어요. 기호학자인데 studium은 지식 전달이에요. 지식을 전달하는 거예요. 아까 말한 리얼리티에 관한 거예요. 그런데 punctum은 구멍, 상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상 밖에 벌어진 사건이에요. 내가 미리 원인자로서 파악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어?! 내가 예상하지 않은 사건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아! 그런 사건 있구나가 아니라 내가 그 사건을 빼버린, 예상 못했다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를 구멍 난 사람으로 전기톱에 목 잘린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난 상처가 뭡니까? 인간이 창으로 찌르고 못으로 찔렀잖아요. 그 십자가 사건을 보고 그 십자가에 대해서 영화를 찍은 사람들, 멜 깁슨부터 해서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십자가를 이해하느냐 하면은 살다보면 그럴 수가 있다는 거에요. 왜? 오해해서 무해한 사람 찌를수도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거는 무슨 세계냐 하면은 해명이 되는 세계에요. 사람 살다보면 억울한 일 생기지 뭐. 할 수 있나 우리는 우리끼리 살고 다 세상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야. 그냥 그대로 살기 마련이란 말이죠. 이태원 사건이나 무슨 사건이나 지나가면 그만이에요. 세월호 사건이나. 그걸 다 우리가 다 어떻게 관여해.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데. 현철이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란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현실 속에 그걸 저주용으로 찾아온다는 거예요 사건이. 나만 예전처럼 '내가 여기 있다 살면 그만이지' 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은 너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자꾸 리얼리티 현실 세계 속에서 언어하고 자기 행동하고 일치시켜가지고 뭐 하느냐. 인간은 자기를 정제하는 거예요. 정제하기. 순수하게 만들기. 반짝 반짝 빛내기. 자기 자신을. 빛을 내요. 자기 자신을 빛내는 방법들이 뭡니까? 어떤 방법이 자기를 빛내요? 자기를 치장하면 되지요. 명품가방 사고 좋은 옷 사고. 백화점에 손님들 왜 오지요? 권사님 백화점에 손님들 왜 옵니까? 저주 받기 위해서 옵니까? 정제하기 위해서 자기를 정화시키려고 오잖아요. 자기 치부를 가리고 나는 나답게 좀 꾸며도 괜찮을 자격이 있다. 그거하려고 오는 거예요.
인간은 가만 놔두면 인간은 정제해요. 자기를 정수처리 하는 거예요. 닦는 거예요. 더 우수하게. 왜? 나는 고귀하니까. 나는 고귀하다와 실제 고귀한 나와 일치시키는데 평생을 다 보내요. 평생을. 돈 수익도 없으면서 2천 만원 짜리 벤츠타고 다니고. 벤츠 타다가 테슬라 타다가 그것도 처분하고 이제 남은 처분은 본인만 처분하면 돼. 그 본인 처분을 주님이 해준다니까요. 주님이. 성령이 해줘요. 차는 처분해도 인간이 자기는 처분 안 하거든요. 왜? 내가 진리이기 때문에.
누가복음 24장에 보게 되면 13절에 두 사람이 나오지요.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25리 쯤 되는 10km 정도, 엠마오로 가죠. 엠마오. 엠마오를 본인이 간단 말이죠. 가면서 왜 갑니까? 이제 예루살렘에서 볼 일 다 본 거예요. 예수라는 그 분이 오셔서 하는 이벤트는 끝났어요. 이제는 예수님 끝났으니까 자기는 살아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진리니까. 가는데 여기 누가 동행했습니까? 주님이 동행했지요. 16절에 "눈이 가리워서 그인 줄" 알지 못했지요. 그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지요. 도대체 인간이 아는 게 뭐에요?! 개코도 모르면서 살아. 개코도 모르면서. 4절에 보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천사가 여기 또 개입하고 있어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강조한 게 뭐냐 하면은 천사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융통성. 천사는 인간의 감정, 자비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천사가 심판한다니까. 심판관이 뇌물 먹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런 심판관은 벌써 악마가 되어서 없어졌고 천사는 봐주는 게 없어요. 봐주는 게. 십자가 모르면 다 잘라요. 피 모르면. 그러면 십자가 피 알면 되지 않느냐. 십자가 피는요 부활의 영이 와야 알아요. 그전에는 몰라요. 내가 저주 받아 마땅함을 모를 때는 십자가도 몰라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모르면 십자가 피 믿고 십자가 피 찍어발라서 자기가 보람상조해서 천당 가려고 생각한다니까. 그것 때문에 율법이 먼저 왔다니까. 율법이 먼저 와가지고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 둬 버린 거예요.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율법을 못 지킨다는 말은 우리라는 존재가 진리하고는 정반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되는 거예요. 너는 저주받기 합당하다.
마태복음 12장 40절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속에 있었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웅크리고 있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고기 뱃속이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모르는 현 세대를 말합니다. 현 세대, 이 세대. 다른 말로 리얼리티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 세계의 전부에요. 인간이 현실 세계 전부를 이렇게 좀 노골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목욕탕 가봤습니까? 목욕탕 천장을 보게 되면 밑에 있는 공기가 차올라서 공중에 매달려 있지요. 공중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잖아요. 그래서 목욕탕에 이렇게 걷다 보면 탁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지요. 그게 어디서 떨어집니까? 올라갔던 것이 저주가 되어서 떨어지는 거에요. 걸을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지요 물방울이. 사우나 천장에 가면.
그러면 인간은 평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갇혀있는 물방울에서 뭐가 맺힌다? 저주가 맺힌 그 저주를 도로 받으면서 평생을 보내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요나는 물고기 속이고 예수님은 그게 자기의 무덤 속이에요. 이걸 예수님 말고 누가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 나오지요. 빠져나올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세상은 악몽이다. 이 악몽속에서 못 빠져나온다. 이 악몽 속에서 빠져나올까 싶어가지고 교회 와서 복음도 듣고 백날 해도 항상 자기 자신을 진리로 간주하고 자기 있음을 확인하려는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지요. 더 중요한 것은 빠져나오면 안돼요. 빠져나오면 안돼요. 그럼 무슨 수로 빠져나오는가?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