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711b히11장24절(하나님의 이벤트)-이 근호 목사
안양20240711b히11장24절(하나님의 이벤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출애굽이 하나님의 이벤트인데, 하나님의 행사에요. 행사. 이벤트. 돌발적인 행사. 그 누구도 예상 못했지요. 이렇게 돌발적으로 행사할 때에. 이것이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게 유인책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행사를 벌림으로서 인간들이 평소에 신에게 요구했던 것에 대해서 첫째는 감탄하고, 둘째는 기적을 요구하고.
히브리인들이 또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을 통해서 출애굽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유인책이니까. 평소에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기적을 하나님 앞에 은근히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잘 사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그냥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우리 가족끼리.
이 기적을 요구하니까 능력있는 하나님으로서 감탄하고, 이게 홍해바다 건너왔을 때 감탄했잖아요. 찬양 막 했다 말이지요. 미디안이 선창해서 찬양하고 누가 우리 하나님을 이길까.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러한 멋진 하나님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한다 했지요. 오골오골한다 했지요. 그런 하나님. 전지전능하고 모든 걸 이기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아쉬운 거, 필요한 거, 그동안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기대하고 기적을 요구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더러운 속셈이 다 나타나요. 다 드러납니다. 인간의 속마음이 다 드러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애굽사람하고 상대했지요. 애굽사람하고 상대하다가 그래서 출애굽에서 실제로 역사적으로 홍해 갈라짐. 장자가 죽음.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기적을 백성들이 요구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이 인간이 원하는 기적 말고, 다른 기적을 그들에게 줍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69페이지 밑에서 2번째 줄에 나옵니다.
하지 못해서 할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구출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참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한다. 마음 문제에요. 마음을 알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점을 우리가 오늘날까지 의미를 쫙~ 당길 수 있는 구절이 바로 주일 낮에도 했습니다만, 바로 고린도전서2장 11절 말씀이에요.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어떤 기적을 베푸느냐 하면, 하나님만 알고 있는 마음을 자기 백성에게 이전시키는 기적을 최종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걸 최종기적이라고 제가 단언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바로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다는 이 말은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의견조정과 다른 사람의 마음 알아주기, 서로 마음 통하는 거, 그걸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들에 비로소 눈이 뜨여져서 ‘아,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 저것도 하나님이 주신 거, 하나님께서 왜 주셨지?’ 라는 그런 마음에 자기 백성들이 합류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뭐냐, 그 마음은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몸으로 보여준 마음이 있어요. 그게 뭐냐, 9절에 보면 십자가에요. 십자가 사건. 온통 어리석어서 인간은 다 죽을 수 밖에 없어요.
어리석음 밖에 없는 이 인간세계에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아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의 한 일부가 아니라 유일하게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능력을 바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죽으시는 그 죽으심에서만 그게 근거가 되도록 토대가 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신구라는 그 사람이 광고했지요. “니가 게맛을 알아?” “니가 내 마음을 알아? 내가 죽는 이 마음을 알아? 내가 너를 위해서 죽는 이 마음을 니가 그 마음을 니 속에 있냐? 이 말이야.” 하고 묻는 거예요. 지금.
성령을 통해서, 은혜를 주어서 예수님 죽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36장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레미야3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레미야31장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전에는 율법을 돌판에 새겼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그 돌판을 누구를 사용하느냐 하면 성도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을 돌판으로 사용하여서 주의 마음을 거기다가 그대로 새겨 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뭐냐 하면 언약의 대상이 되어버리지요. 우리가 주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버리지요. 언약 조항이 새겨져 있어야 언약의 백성이지 뭐 언약 조항도 없는데 무슨 언약 백성이 되겠어요. 그렇게 새겨져 있으니까 그걸 인간의 힘으로 예수를 믿어서 내가 백성 되어버리면 내 마음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제끼고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 속에 주님의 돌판을 새겨놓으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이건 말릴 새도 없이 주님의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발산되고 있는 겁니다.
참, 세상에 이런 기적이 다 있어요. 자, 초반에 히브리인들이 바다가 갈라지니까 참 하나님 대단하다. 적들이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지니까 야~ 최고다! 이렇게 했지요. 그 때는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본인이 장악하고 있지요. 내 마음은.
본인이 장악하면서 참, 우리는 하나님께 잘해야 돼. 잘해 드려야 돼. 왜? 우리를 이렇게 애굽에서 구원해주셨으니 잘해줘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들의 생활이 어렵고 삶의 환경이 위기에 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뭐가 발산됐어요? 하나님 찬양이 아니고 원망이 터져 나왔지요.
따지고 보면 명쾌하게 말해서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식량 없으면 짐승 됩니다. 아무리 점잖고 예의 바르고 나는 뭐 연약한 여자라서 나는 어릴 때부터 곱게만 자랐다. 니가 돈이 한 번 없어봐야, 아~~ 진짜 돈이 있는 게 바로 고운거구나! 깨닫게 되지요. 돈 없고 양식 떨어지게 되면 사람은 발작을 하게 되어있어요. 거의 미치는 순간입니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인지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그런 것을 잘 모르는 이유가 집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좀 물가 높아가고 수입이 적어지면 그냥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고쳐쓰고 절약하면 밥이나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빚이 100억 있다 생각해 보세요. 빚이 100억 있고 한국에서는 살 수가 없다 할 때 어디 프랑스 갑니까. 어디 도피해서 살아야 돼요? 그럴 경우 되게 되면 정신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그냥 돈만 준다면 어떤 짓이라도 마약 운반 말고 킬러 사람 대신 죽일 수 있어요. 우선 살고 봐야 되니까. 내 양식 사고 봐야 되니까. 우리가 아직까지 그정도까지 집안형편이 망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점잖은 척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집단적으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도록 유도했어요. 하나님의 이벤트가 인간을 유인하는 거예요. 인간 속의 더러운 것들을 점잖게 내뿜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죽이는 그러한 격분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 또는 욕설, 저주를 퍼붓는 것. 마귀가 준비해 놓은 모든 것이 다 터져 나오도록 광야를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40년동안 이끌었습니다.
광야를 40년 이끌었지요. 거기에 숫자 맞추어서 주님은 40일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평소에도 참고 있지만, 사실은 어려울 때는 터트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수님은 악마와 만나서 세가지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걸 미리 보여준 겁니다. 미리 보여줬다는 것은 ‘아, 우리가 이렇게 죄인이구나!’ 안다고 해서 구원된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아무리 알아도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야 돼요. 주의 마음이 우리 마음앞에 있으면 안돼요. 그냥 쓱 우리 마음을 속까지 들어와 버려야 돼요. 우리 마음속까지. 말씀이 우리 마음 바깥에 머물면 소용없어요.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와 버려야 돼요.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바로 광야에서 원망했던 그 인간으로 돌변합니다.
그런데 돌변하는데 슬퍼서 돌변하는 게 아니고 짜증나서 돌변하는 게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변돼 있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게 왜? 이건 내가 예상 못한 기적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예상 못한 기적이.
다시 보면 처음에는 감탄했어요. 자기 주제파악이 안돼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이랑 동행할게요. 하나님 저 알지요. 제가 결심하면 제가 반드시 지키는 거 아시지요.”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자기 주제파악 안돼요. 그러고 난 뒤에 너무 하고 그 다음에 약간 어려움이 와요. 그 때 ‘아, 이 때를 위함이구나! 기도하자. 기도는 호흡이다. 기도를 멈추는 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기도하자.’ 내용은? 내용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우리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해준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 응답이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련회에 우리 수련회 말고 다른 수련회에 순서 중에 하나가 각자 나와서 간증 비슷한 거 돌아가면서 하면서 성경을 읽었으니까 누구를 본받고 싶어요? 저는 다윗을 본받고 싶어요. 용감한 다윗. 골리앗 나와! 한판 붙자. 나 돌린다. 슈웅~~ 맞았다. 나 다윗처럼 나는 기드온처럼 용감한 군사가 되겠어요. 나는 룻처럼 시어머니 잘 모시겠습니다. 수련회 아이들 좋은 평, 좋은 평가를 노리는 고백들을 하지요.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응답하는 것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아나리아와 삽비라. 헌금 반 숨겨놓고 하다가 사이좋게 죽어버린 것. 그리고 뭘 응답하느냐, 바리새인, 가룟유다, 나 당신을 저주합니다 했던 베드로, 이 말씀을 우리 속에 넣어주는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이 말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기도해서 얻는 게 아니고 이미 주어진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내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가룟유다 이런 존재와 동격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이게 기적이지요.
이런 주제파악이 그동안 안되어가지고 자꾸 찜찜한 거예요. 내가 요번에 일이 안되는 것은 기도를 적게 해서 그런가, 기도를 빡세게 더 해야 돼.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천하의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꾸 주님한테 뽑아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얻어낼 생각을 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끝은 뭐냐, 모방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뭐든지 모방해요. 예수님 모방하고. 어떤 좌담 프로그램 제목이 이거에요. “왜 제2의 예수는 안 나타나는가?” 이게 제목이에요. 이런 취지를 좌담하는 취지는 짐작하겠지요. 종교가 썩었는데 예수님처럼 훌륭한 분 나타나가지고 싸그리 정화하고 진짜 기독교가 기독교다운 깨끗한 기독교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그런 취지로 제2의 예수는 왜 안나타나는가, 이리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여러분이 잘 알지요.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자라고 했는데 그냥 작은 자가 아니고 내 형제 중에서, 아무나가 아닙니다.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뭐다?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내 형제에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실제로 사울이라 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을 때 나타나셔서 뭐라 했느냐 하면,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것은 예수님과 지금 사울이 잡아 죽이려는 그 성도와 주님이 지금 같이 한 식구가 되어있다. 같이 연결된 몸이에요. 몸으로 연결되어있다 말이지요. 이것 또한 기적아닙니까.
제2의 예수는 왜 안 나타나는가, 예수가 왜 없어요? 있어요. 제2의 예수 찾지 말고, 예수님의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예수님한테 한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한 분인데 예수님의 것은 지금 여럿이 되지요. 여럿. 다수가 돼요. 다수가. 많지요.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다수가 된다 말이에요. 따라서 이러한 제2의 예수는 왜 나타나지 않는가, 이건 뭐냐 하면 나를 두고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모방이지요. 그럼 제2의 모방에 의해서 나타난 제2의 예수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라 해요. 적그리스도.
인간이 은근히 기대하는 거, 이래야 예수답지 않은가, 이런 거. 온유하고, 겸손하고, 배려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거, 작다고 무시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얕보지 않고, 골고루 대자대비하면서 살려주는 거,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 죄용서받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 딱 뭐예요? 딱 악마지요. 뭐. 적그리스도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먹기 때문에. 알아보기 때문에. 인간은 모방 못해서 환장한 인간들에게 참으로 예수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한 자체가 예수가 가짜라는 생각은 못하고 본인이 가짜라는 것을 생각 못하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지요.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 이들은 어떻게 사는가, “내가 가짜입니다. 나는 내가 매일 모범인 것처럼 이런 내가 엉터리입니다.” 주님의 언약이 그 속에 침투하면 언약 자체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내부에서 일어나요. 외부에서 내가 요구한 기적이 아니고 내부에 이미 쓱 들어와버린 그 기적속에는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면서 그 십자가사건에서 누가 예수님 편이고, 누가 예수님을 찔러죽인 자냐, 할 때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찌른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왜? 십자가 사건이 매일같이 내 내부에서 반복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하니까 막상 소자들이 뭐합니까? “제가 언제 했습니까?” “언제 제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배고플 때 언제 줬습니까?” “내가 추울 때 언제 입혔습니까?”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하지요. 지극히 작은 자한테.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라 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지극히 작은 자니까 요거 이상 하면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이렇게 모방하는 게 아니고 결국은 뭡니까? 본인 자체가 예수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말씀의 결과물로 자기를 인식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결과물로.
자,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을 보면서 어려운 주제에 우리가 드디어 접근해 갑니다. 어려운 주제. 그게 뭐냐 하면 40일동안 원망했던 그들은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세한테 대들고 불뱀한테 물린 그들 지옥가느냐 하는 문제에요. 여러분, 그런 질문 안 생기던가요?
고린도전서10장7~13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지난 수련회가 갈라디아서했습니까. 했지요. 그 때 책이 나와있잖아요. 다른 복음을 가지고 무엇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가요? 다른 복음의 내용이 뭐였던가요? 거기에 보면 강조했고 여러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다른 복음이란, 나를 구원하는 복음이 다른 복음이에요. 나를 구원하는 복음. 내가 구원의 주인공이 되는 복음. 구원이라는 활동의 주인공이 되는 복음. 성경을 해석할 때 내 구원 위주로 해석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그러면 고린도전서10장에서 너희에게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고, 하면서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믿음직해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신다. 할 때 거기 감당하는 주체가 인간입니까? 주님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자체 연극 무대지요.
하나님께서는 아까 그걸 장이라고 했는데요. 장. 필드. 영역.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사건이잖아요. 사건을 이스라엘 내부에 확산을 시켜 놔요. 확산을 시켜놓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꾸 기적을 요구하는 거예요. 출애굽이 하나의 유인책이 되니까. 왜 기적을 원합니까? 본성이 우선 나부터 살아야 되니까. 사는 게 뭔데? 애굽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되니까. 애굽에서는 부추도 먹고, 수박도 먹고, 파도 먹었잖아요. 그런 거 먹어가지고 정력이 넘쳤다 말이지요.
그게 그들에게 산다의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왜? 남을 모방하니까. 애굽사람이 사는 것처럼 우리가 살면 사는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그들은 새로운 삶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어요. 죽는 과정이니까. 출애굽은 신약이 아니에요. 신약 아닙니다. 구약입니다. 신약 아직 안 됐어요. 산다는 게 뭔지.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그 마음이 그들 속에 안에 들어올 때 사는 거예요. 그걸 마음의 할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체의 할례 말고 마음의 할례.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출애굽 사건을 했느냐,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주의 마음을 끌었다가 내 마음속에 심어 넣을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고 그런 생각도 없어요. 이미 기본이 뭐냐 하면 그냥 애굽에 있던 채로 살래. 돈있고 양식있고 몸 건강하고 행복하고 나는 이리 살래. 이리 사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소!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도와주소! 하면 또 해서 안 좋아질까봐 도와주세요~~~ 그게 오골오골이에요.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게. 교회가는 이유의 한계에요. 성경듣고 복음듣고 백날해도 그 한계에 머물러 있어요.
이거하면 내 생전에 도움될까 싶어요. 몸건강하고 가정 행복하고 여유돈 많이 풍성해서 수입 매일 생기고, 그게 산다는 거 그거 어디서 배웠어요? 모방으로 배웠지요. 누가? 다른 사람 사는 거 보고. 이방민족 사는 거 보고. 그런데 거기서 누가 사라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없어졌거든요. 없어진 분을 모방으로 살아야 될텐데 없어진 분은 안 찾고 현재있는 같은 또래의 인간들 보면서, ‘아, 나는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주님은 빠져나왔잖아요. 주님은. 주님은 쏙 빠져나왔다고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그 분이 죽든 말든 자기는 그냥 고기 잡으러 가면 되니까. 평소대로 사는대로 환원되고 마는 거예요. 인간은. 베드로가 나는 목회해야지. 그런 거 없었어요. 그냥 고기잡는 거예요. 그냥. 목회는 주의 뜻이고 나는 내대로 사는 게 내 뜻이고. 우리 뜻대로 따로 삽시다. 이거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의 평소에 마음도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시고 나는 내가 잘하는 식대로 내가 살래요. 냅둬요. 그냥 내 둬요. 살던 대로 내비 둬요. 어려울 때 기도할 때나 도와주소. 그 외에는 그냥 나 살던 대로 그냥 잔소리하지 마시고 내비러 둬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이거는요, 구출은? 어디서 구출 됐지요? 구출된 적이 없어요. 애굽이 부러운데 어디 애굽에서 구출이 돼요? “아이고~ 혐오한다. 지긋지긋해. 나는 옛날 사는 식이 딱 질색이야.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안 살래.” 라고 외친다면 그러면 대안은? 그런 식대로 하면 뭐 할래요? 그냥 도포 입고 등나무 깎아서 줄기로 칡뿌리나 먹고 살까요? 그러면. 그럼 대안이 뭔데, 어떻게 사는 건데? 말씀으로 살 거야. 그럼 말씀 종이 찢어가지고 구겨서 물에 적셔가지고 이리 말씀으로 삽니까? 말씀 외울게. 말씀 외우면 결신 기도문이나 외우면 되겠네요. 결신 기도문. 사도신경 다 나와 있잖아요. 그거 막 외우면 사는 거예요?
실제로 그렇게 사는 시도한 사람들이 있어요. 독하지요. 정통 유대주의. 이스라엘 총리가 이제부터 너희들 다 군에 가. 예외 없어요. 법으로 정해버렸어요. 무조건 군에 가야 돼. 펭귄옷 다 벗고, 머리 깎고 수염 다깎고 군에 가야 돼요. 군복 입고. 십만명 데모를 했습니다. 우리는 군에 못 간다고. 그럼 너는 어떻게 살래. 우리는 말씀이나 공부하고 살래. 이게 쉐마 들으라, 하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 5장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옮길래. 그럼 우리도 유대인과 같이 합세해서 데모할까요. 그러면.
도대체 사는 게 뭡니까? 주님의 죽으심인데, 누구 손에 죽느냐, 바로 내 손에 의해서 죽으심이 이것이 생명의 장을 형성합니다. 나는 항상 죄인이고 예수님보고 “저리가 가주세요. 저리 나가세요. 나 싫어요.” 라고 하는 그러한 관계성이 계속해서 지속되면 될수록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천국에는 생명의 면류관도 반납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아까 모델이 된다는 고린도전서에서 구약이 모델이 된다는 말은 구약 성경이 이제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대목뿐만 아니고 광야생활 뿐만이 아니고 모든 대목이 이게 펄떡 펄떡 살아서 우리 내부에 신구약이 합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이 매일같이 해석이 벌어지는 상태, 그 상태를 말씀이 살았다, 그 말씀이 살았다를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말씀이 사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벌린 이벤트, 또는 연극무대가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거기에 한 역할. 역할도 허장강 있잖아요. 나쁜 역할. 누굽니까? 여로에 나오는 못된 사람. 달중이. 시대가 달라서 모르는 모양이구나. 장욱진이 나오는 여로. 옛날 드라마라서 모르지요. 시청률78% 나왔던 드라마. 그 사람이 진짜 맞았어요. 나쁜 역할해가지고. 동네 아줌마들한테. 그리고 실제로 일찍 죽었어요.
악한 역할에 흠뻑 젖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빌닷이 욥기8장 7절에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리라, 이것은 욥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욥의 친구 아무것도 모르는 빌닷이 이야기하지요. 그 빌닷이 이야기한 거 맞는데 그 빌닷이 나인데요. 우리는 뭐든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고 싶잖아요. 자영업할 때 나중에 꼬라박을까요. 손님 한 두명 오는데 할까요. 만약에 여러분들과 관계있는 사람이 목회한다면 개척교회해서 뭐합니까. 시작은 대단하나 나중에 꼬라박으리라, 이리 합니까. 반대로 이야기하지요. 반대로. 여기 축사하실 분. 개척교회 개업한 거 같아요. 축사하실 분. 그저 땅 사는 건 모르겠고 시작은 교인들 몇 명 안돼도 나중에 창대케 해주세요. 기도해주겠습니다. 창대하도록.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주께서는 우리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우리안에 주님이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십자가를 주제로 한 연극무대에서 선배 배우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역할을. 지옥 간 게 아니고 역할을 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성령으로 구원받습니다. 역할이야 뭐 아이 뭐 우리 출신 자체가 아담의 죄에서 나온 출신인데 뭐 나쁜 역할 따로 있나요. 전부다 나쁜역할인데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라 하지만 자기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지요. 똑같은 입장이니까요. 예수님 빼놓고 다 같은 똑같은 입장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왜 이 말씀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되느냐 하면, 저 사람은 나같은 신앙이 아니라고 해가지고 내가 어느새 나의 신앙에 표준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농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리새인, 사두인 서기관들이 그 역할을 했고 그 역할을 우리가 지금 인수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구원 안돼요. 끝까지 성령이 함께해야 되고, 끝까지 주님이 함께 해야 돼요. 그리고 끝까지 계속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니마음하고 내마음하고 달랐다는 겁니다. 주의 마음,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니마음하고 내 마음하고 다시 말해서 니가 성경해석하는 그 마음과 내가 성경해석하는 마음이 다르다.
나의 해석은 하나님 아버지의 해석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거고, 니가 하는 마음은 그 덕이나 보자는 마음, 그 심보, 그 더러운 심보밖에 없는데 뭐 같을 리가 없지요. 힘들고 나쁜 것은 주님이 하이소. 편한 건 내가 할께요. 이런 식이지요.
40년, 그들이 홍해 건넜던 선배들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가 신명기 초반에 나오지요. 신명기 초반에 나오면서 모세가 이런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야기한 이것은 그 때 선배들하고 세운 언약이 아니고 지금 너희들 보고 세운 언약이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말씀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자, 그러면 남은 시간동안 출애굽에 어떤 내용인가, 출애굽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이미 다 아시지만, 정리하는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애굽은 역사의 나라에요. 역사. 평평한 역사. 평평한 역사가 홍해를 못 건너네요. 홍해를 못 건너요. 그러니까 역사는 어디에 갇혀있다? 자연의 조건에 갇혀있어요. 홍해를 못 건너니까. 애굽군대가 홍해를 못 건너고 다 빠져죽었어요.
그런데 홍해를 건너오게 된 것은 자연을 이긴 초자연이지요. 초자연적인 능력이 이 히브리인, 이스라엘을 살렸잖아요. 살렸으면 이게 홍해라 말이지요. 애굽에 있을 때 유월절 있었지요. 홍해에서 초자연이 기적이잖아요. 이 초자연 기적이 어린양을 잡는데 어떻게 이것이 이게 그 내용으로 합류돼있는가를 우리가 이제 이해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 약속, 약속 빼놓고는 다 없앤다. 라는 원칙. 이게 출애굽의 1장부터는 모르고요, 뒷장에 시내산에 율법 받고 율법 알고, 1장부터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을 살리겠다는 것. 언약 위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을 이용한 게 돼요.
그래서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라고 물으니까 “나? 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 언약의 하나님이야” 그들에게 언약을 줬던 하나님.
사람 아니고 뭡니까? 언약이지요. 사람 아니고 언약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 지옥갑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언약 중에서 어떤 요소가 부각됩니까?” 하는 저주 요소가 부각 되는 거죠. 요거 이해 되시지요? 언약 가운데 복도 있고 저주도 있는데, 저주 요소가 부각되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인간은 언약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미 지옥가게 되어있어요. 지옥가는 거 당연하기 때문에 지옥 갔습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냥 있어도 지옥가고,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가는 거예요. 다만 복을 받게 되면 지옥에 안 가고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은 뭡니까?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요소가 투입되는 의에 경우에 한합니다. 의에 경우에 국한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특이사항이에요. 특이한 거예요. 특이한 거. 참으로 특이한 거예요. 특이하다는 말은 인간이 그걸 간직하거나 보관할 수 없어요. 인간은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까 고린도전서에서 시험을 감당하는 것은 주님의 역할 문제이지 개인이 자기 구원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내가 행동을 어떻게 처신을 어떻게 하는 그 문제가 아니에요. 구약에서는 아까 간음하다가 죽었다 했잖아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새로운 기적이 주어져요. 마음속으로 간음 품으면 간음이다. 이건 새로운 기적입니다. 어떤 기적? 모든 인간은 지옥 가야 마땅함을 알려주는 새로운 기적이 등장하지요.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진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면 어디가 틀린 게 아니고 맞는 게 없어요. 모든 성경을 볼 때마다 맞는 게 없어요. 주의 일인데 자꾸만 본인이 나서려고 해요. 왜? 모방하는 재주가 있어가지고. 흉내내는 재주. 그걸 발휘 안하고서는 그걸 못 견뎌요. 뭐든지 해야 안심이 돼. 뭐든지 해야. 자기가 덜 구덩텅이에 안 빠질 것아. 이미 빠졌는데. 이미 빠져버렸는데.
초자연적인 역사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개입됨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홍해앞에 섰을 때 그들은 홍해 앞에서 누굴 원망했습니까. 모세를 원망한 것이 얼마나 큰 죄였습니까. 자기 주제파악이 안됐던 거예요.
홍해바다 건널 때 그들은 “야, 놀라운 기적이다. 어떻게 어린양의 피를 발랐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목숨이 건재하지.” 뭔가 착각해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 초자연적인 것은 어디서 알아야 돼요? 드디어 그들로 하여금 시내산 밑에 잠시 중지시키고 모세가 위로 올라갑니다. 요거 1년 걸렸습니다. 요기까지. 시내산까지. 줄기차게 행진해가지고 시내산까지 온 거예요. 시내산에서 하나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이제는 거기서 그들은 받습니다.
시내산 위가 화산이지요. 불붙는 화산. 불붙는 데서 소리가 났지요. 그게 뭐냐 하면 자연을 이용한 초자연. 자연 속에 인간 있으니까 초자연은 자연도 이기지만, 누구도 이긴다? 인간의 마음도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인간은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 라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에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바르게 섬기고 싶어도 안 된다. 구원받고 싶어도 안 된다. 모든 것은 무엇은 된다? 주님은 언약대로 된다. 그러면 됐지요. 주님의 언약이 감잡히면 된 거예요.
이 세상은 내 위주의 세계가 아니라 언약 위주의 세계를 우리 속까지 확대시키고 퍼트린 거예요. 언약 세계가. 언약 세계 속에가 주께서는 아주 친절하게도 구체적으로 돌판을 줬거든요. 돌판을. 출애굽기32장에. 돌판까지 줬어요. 그만큼 돌판줬다는 말은 실제로 물체로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은 말이라는 관념이나 추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이 역사를 통해서 사건을 남기고 이 인류의 역사를 친히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알아야 된다고 해서 알까요? 그 다음부터는 실습에 나섭니다. 출애굽기17장8절에 보면 아멜렉 군대가 옵니다. 여기에 조연까지. 진짜 언약이 없는 민족까지 조연이 등장해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와야 구원받는데 그 구원 위주에 언약이 없는 민족까지 보조출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드라마 연극장에.
그러면 아말렉이 해야 될 것은 뭐냐, 죽여라! 이거 역할하는 거예요. 죽여라! 뭘 죽여라? 아말렉이 봐서는 뭐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이지요. 아무 힘도 없고 무기도 없고 매가리도 없는 이거 완전 밥이지요. 죽여라! 이게 세상사람들이 오늘날 성도를 보는 안목이지요.
이걸 이스라엘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언약이 없는 자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똑같지요. 뭐. 힘없는 자로 보겠지요. 그 실습을 시키는 거예요. 그 실습을 할 때 모세하고 여호수아장군하고 대비시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칼을 들고 설쳐봤자 모세가 든 지팡이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걸로 어떻게 돼요? 모든 전쟁은 승패는 지팡이에서 결정짓잖아요.
이게 뭐냐,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을 운용하는 거예요.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상해서 숨쉬고 있는 모든 것은 뭐다? 초자연적인 체험에 기회의 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뭐냐, 세자로 ‘미쳤다.’ ‘돌았다.’ 거기다가 네자까지 하면,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런 꾸중이 들어와요.
그 꾸중을 아말렉이 왜 우리보고 하게 합니까? 그 꾸중 들으면 우리도 모험을 해야 되니까. ‘정신차려. 정신차려. 양식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하지 그 딴 거 안 중요하지. 정신 차려 인간아!’ 성경 공부할 때는 참석할 때는 그 생각했다가 다 잊어버려. 주님의 아주 충실한 말씀의 세계가 우리 안에 열립니다. 악한 역할하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언약 위주로 사는 이 세계에 들어와서 언약대로 온갖 역할을 다 해보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놀라운 기적인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