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1. 자기 죽음 너머 낙원 또는 천국 2. 자기 심판 너머 천국. 2번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에요. 1번 이거는 종교에요. 유대교. 종교. 오늘날 한국교회 한번 보세요. 한국교회 목사설교 한번 보세요. 1번일까요? 2번일까요? 자기 심판 너머의 천국을 알려면 내가 자아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가 주님 앞에 곱상하게 굴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핍박이 나와야 되지 내가 그냥 곱게 예예 하고 순응할 수가 없는 거죠.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모든 역량을 다 거기에다 집어넣는단 말이죠. 아까 그것처럼 동생의 신발, 동생의 신발의 뜻이 우리 인생에도 신발같은 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존심, 자존감, 명예, 얼마 전에 할부로 구입한 차, 샀던 옷, 한정품 신발 이런 거. 우리나라에 몇 개 없는 옷 이런 거. 예를 들어서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엘레베이터에 있는 사람이 전부 다 홈쇼핑 옷을 똑같이 입고 있다고 보세요. 얼마나 뻘쭘하겠어요. 대번 집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자기 죽음 너머에 있는 이것을 고발하고 이걸 거룩으로 심판하고 자기 심판 너머의 세계를 알려주시는 그 기능이 무슨 기능이냐? 예수님의 선지자 기능이에요.
선지자 기능은 뭐냐 하면은 영웅시대의 종식이에요.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고만고만한 사람가운데 특출한 어떤 뛰어난 사람이 등장해서 이 혼란한 이 세계를 잠재우고 다시 평온한 세계로 전환시키는 그러한 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영웅이거든요. 이 영웅시대를 유대인들은 누구라고 했느냐? 메시아라 본거에요. 메시아. 그리스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의 이런 자기 죽음 이후에 천국 간다는 것을 이걸 얼마나 조롱하고 있는지 몰라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미를 갖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걸 주께서는 역으로 사용해버려요. 조롱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야?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가 아들인데. 너희들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야. 자꾸 그들이 하는 그들의 의미 체계에 주께서 위반을 해버려요. 위반을. 의도적으로 위반을 해버려요. 위반할 때 예수님은 하나의 존재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그냥 인구수가 만약에 28만 명이라면 예수님이 등장했다. 28만 명 더하기 한 명. 그냥 숫자로 28만 명 중에 하나일 뿐으로 그렇게 존재에 대해서 섞이는 존재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를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선으로 보죠. 선. 경계선.
아까 첫째 시간에 말한 것은 지평선.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따라잡을 수 없고 그것을 유지하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유한한데 무한한 분. 이 역설. 우리같이 보통 인간인데 무한한 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걸 설명하는 우리에게 문제 있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실패자고 내가 엉터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미워하고 아무리 부인해도 그 다음 대책이 없어요. 나 아니면 그럼 뭐?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나라도 붙잡아야 되는 거예요. 나라도. 성경공부해도 소용없다. 헌금해도 기도해도 전도해도 소용없다. ok ok ok 해놓고 그 뒤에 뭐가 남는데? 쉽게 말해서 우리들 있는데 여기 나도 있는데 주께서 여기 오셨다. 우리는 영접하자 이거거든요. 이게 아니고 예수님은 지금 볼링하고 계시고 우리는 볼링핀이에요. 스트라이크! 주님의 십자가는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려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단한명도 살리지 않고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볼링핀이고 주님은 그걸 다 쓰러트리죠. 진짜 이거 다 쓰러트리고 쓰러트리는걸 좋아하는 사람은 개 밖에 없습니다. 스로보니게아 개. 개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다. 너무나 간략한 문장 하나에요.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것도 이방인이. 주의 말씀대로 하옵소서. 백부장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주님이 무릎을 쳤는지 안 쳤는지 모르겠지만 무릎을 탁 치면서 세상에 이런 믿음 내가 처음 봤다. 천국 다 나가! 이런 사람이 천국을 채운다.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다른 것도 다 주님의 말씀이지만.
문제는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이것이 순수한 내가 아니라 고운 내가 아니라 발악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이 발악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주께서 조치를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영웅시대의 종식, 마감이에요. 영웅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웅시대를 마감한다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로 봤느냐 하면은 모험가로 봤어요. 정신적인 모함가로 봤어요. 밀어붙여서 안되면 죽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모험가의 특징 영웅의 특징이 있어요. 개개인마다 이런 게 다 들어있는데 그게 안 들켜서 그런데 여러분 들키게 해드리겠습니다. 모험가의 특징은 뭐냐? 모든 행동이 승리가 아니면 패배. 승리가 아니면 패배에요. 그래서 그 모험가는 뭐냐 하면은 무엇을 이기기를 원하느냐? 시련과 시험과 어떤 유혹도 극복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화 된게 뭐냐? 스카이다이빙. 2m에서 툭 뛰어내리고서 쨘!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릴 때는 할 수 있지요. 친구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3m 할 수 있어? 여자들은 모르겠는데 남자들은 그런걸 많이 했어요. 그때는 학원을 안 갔거든. 어딜 가느냐? 마을 집터 근처에 가면 공사장 보면 있어요. 보면 약간 높아 보이거든요. 여기서 이제 객기 오기가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허풍 같은 거. 정상익, 박태진 나와요. 커넥션에 나오는 애들 있잖아요. 드라마 안보니까. 어릴 때 학폭 하면서 어울렸던 그 객기가 커서 마약하면서 재벌과 관련되면서 자기들끼리 암투와 질투하는 거 있잖아요. 그게 커서 그대로 간다니까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어릴 때 경쟁상대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겁니다. 이쯤에서 동창생한테 전화 한번 해 볼까? 전화 왜 하는데? 요새 너 얼마 벌어? 그걸 전화 왜 해야 됩니까. 자기는 모험가거든. 모험가가 추구하는 건 뭡니까? 승자가 되는 거예요.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그건 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영자야, 애 너희 반에서 몇 등해? 몇 등하는 걸 왜 물어요. 왜 묻느냐고. 5등쯤 해? 우리 애는 1등 했다. 뭐에요? 승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 모두 모험가이며 그 승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시련과 시험은 자기 자아를 구성하는 스토리텔링이 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돼요.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까워서도 자기 부인이 안돼요. 그동안 살아온 고생이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든 거예요. 사랑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증오인데 그 증오가 사실은 사랑과 더불어 같이 있는 거예요. 이 모험가를 주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없앤다 했지요. 없애고 뭘 제시한다 했습니까? 선. 이 사건이 바로 무슨 사건이냐? 출애굽 사건. 홍해사건. 요단강 사건. 항상 뭐냐 하면은 선이에요. 어떤 선을 넘느냐 마느냐 예요. 어떤 선을. 하나님께서는 선을 주시고 그 선을 못 넘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어요. 누구한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럼 그 선을 넘으면 되지 않느냐. 막상 넘으려고 하면 갑자기 바다가 나온다든지 갑자기 홍수가 나가지고 건너가지 못하게 만들어요. 건너가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넘어가라고 할 때에 이것은 더 이상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뭐가 성사되지 않는다? 인간은 승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승리가 없다면 애초부터 인간은 뭐였습니까? 하나님이 제시한 그 기준과 선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패배자였던 거예요. 패배자.
그렇다면 패배자가 유지를 하게 되면 그 패배자에게 배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 공로만 남으니까. 인간의 허세가 끼어들지 않으니까 주께서는 함께 동행이 성립되지요. 동행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는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 주고 자비 입을 자에게 자비를 준다는 그 내용이 계속 유지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떠날 이유가 없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게 선을 넘어서 약속의 땅에 도달을 했어요. 약속의 땅에 도달해 놓고 여호수아 이후에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는가? 그 이후에는 선이 없고 갑자기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존재. 우리 잘 나서 들어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기. 이 사사기에 하나님이 고군분투 노력해요. 여호수아 때 정신을 사사기에 그대로 유지시킬라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그중에 기드온, 드보라. 드보라가 남자에요? 여자에요? 여자 사사 드보라. 이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투명한 전쟁이에요. 투명한 전쟁. 이건 제가 지어냈지만 그냥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서 제가 지어냈어요. 내장을 드러내는 전쟁. 겉모습 다 빼고 내장만 보여주는 거예요. 기드온, 여러분 기드온 보세요. 그 기드온이 군인 같아요? 군인 아닌 거 같아요? 어떻습니까? 기드온은 군인이라는 그 틀을 벗겨버리니까 투명한 내용물이 나오지요. 내장만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드보라. 전쟁은 누가 하게 되어있어요? 남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여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남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드보라 전쟁을 통해서 내부가 드러나요. 발락이 해야 될 전쟁을 여자가 하고 마지막 최후에 목을 따는 그것은 누구냐 하면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내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힘 없는 여자가 승리를 해요. 그것은 바로 기존의 존재 중심을 고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선이라는 것. 그 선을 지켜야 돼요. 선을 넘는 게 아니고 선을 지켜야 돼요. 선을 없애버리고 선이 존재처럼 그렇게 행세해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하고는 벌써 관계 끝난 거예요. 주님이 지정해준 선이 내부에 있어줘야 그게 성도에요. 십자가가 뭐냐? 선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의 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이야기해준 거예요. 네 힘으로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를 날마다 묻는 선. 네 힘으로 더 살 수 있냐고 날마다 묻지요? 뭐 좀 잘됐다고 까불거리면 너 길 가다가 또 68세 된 남자한테 찡겨봐야 사는 게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구나. 뭐 아들 은행 과장 됐다고? 시청 앞에서 한번 죽어봐야 내 기대와 희망과 내가 그동안 노력했다는 그것이 무산되봐야 우리가 또 선에서 뭐로 바뀌었어요? 존재로 바뀐 것을 우리가 파악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했다. 존재.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선지자 기능을 주께서 하신다는 그 내용. 구약에서 선지자 기능이 어떤 기능인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야 오늘 누가복음의 그 전체 내용이 파악이 돼요. 그리고 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야기했듯이 갈릴리 여자들이 향품과 향유를 예비했잖아요. 이게 추모기능이죠. 추모기능은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기존의 인간 세계, 인간 계층에서 하는 이 세상이 아직도 의미 있음 이라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기능이지 예수님 십자가 의를 충분히 담아낼 수는 없지요. 죽음 자체를 추모로 덮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죽음 그 날 것으로 그대로 나와야 돼요. 왜? 주님이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한 사람도 살 수 없음을 알려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선입니다.
이 선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22장부터 23장 24장까지 발람 선지자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나와있어요. 완전 이스라엘 선지자도 아닌데 이방 나라 선지자가 이렇게 길고 자세하고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선지자의 구조는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모든 지배로 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그 지배로 부터 벗어날 때 발람 선지자가 그 발락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제물이었어요. 제물. 민수기 23장에 보면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라고 했지요. 자, 여러분 우리가 차분하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발락은 모압 왕입니다. 왕은 모압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발람 선지자는 뭡니까? 제일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냥 자문위원이죠. 내가 왕이 필요할 때 자문해줘야 돼요. 목적은 이미 정해졌어요. 모압 왕이 하는 것도 목적은 뭐냐? 모압이라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모압의 선지자는 하는 일이 뭡니까? 어떠한 계시나 어떠한 신의 계시를 받더라도 누굴 위해야 돼요? 모압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해야 돼요. 일단은 그러한 조건 안에서 발락이나 발람은 모압에 소속되어있습니다. 모압 공동체.
신의 계시라는 것은 공동체 유지에 도움 될 때만 후차적으로 신의 계시를 공동체가 고백하고 인정한다. 보세요. 얼마나 인간들이 일방적입니까. 신의 주는 계시라도 선별하는 거예요. 우리 공동체가 잘 될 때는 신이 도왔다. 우리 민족을 지켜주고 돕는구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할 때만 이게 신의 계시로 인정하는 겁니다. 신이 도왔다. 누굽니까? 이순신 장군. 조선말기에 정말 아이큐 높고 공부 잘하고 과거에 급제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이완용. 아주 똑똑해요. 천재과에요. 똑똑합니다. 그보다 더 천재가 누구냐? 이등박문. 이거는 수재에요. 일본의 최고의 수재에요. 신의 계시입니까? 안중근한테 총에 죽은 이등박문은 일본 나라에서는 영웅이죠. 그리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한국에서 안중근은 뭡니까? 손바닥 팍! 차 뒤에 붙이죠. 대한국인. 이게 뭐냐? 영웅이죠. 뮤지컬 이름도 영웅이잖아요. 영웅. 영웅, 하나님의 도우심, 계시 이거는 뭐냐 하면은 역사가 그렇게 해석을 붙이는 거예요. 역사가.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뭡니까? 그렇게 붙인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게 주님입니다. 우리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주의 계시라니까요. 왜? 우리가 잘되면 주님을 잘못 되게 칭송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에. 우리 집안 잘되고 내 교회 잘되고 내 신상 잘 풀리기 때문에 주님 좋아요~ 세 번 네 번 좋아요 누르고. 내가 못한 것을 당신이 해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바로 이 사실을 이방 민족인 왕과 선지자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24장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광야 길을 가면서 마주쳐야 되고 약속의 땅에서 마주쳐야 될 그 이방민족의 의식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경험케 하는 거예요.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이런 관계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와 왕 사이에 선이 생겼어요. 경계선이 생겼습니다. 시키는 대로 제물을 갖다 줬는데 제물 갖다 줄 때에 그 모압 발락은 은근히 기대한 게 있었어요. 너나 나나 우리 모압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누굴 저주하고 누굴 공격하는 계시를 줘라?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는 계시를 해라 라고 왕이 압력을 넣었을 때에 발람이 선지자죠. 선지자는 뭡니까? 왕의 지배를 벗어나는 거예요. 왕이 있잖아요. 모압 공동체가 있고. 여기 발람 선지자가 있다면 발람 선지자는 둘 다 모압 선지자예요. 왕이 발람에게 조언을 부탁하죠. 명령을 하는 게 아니고 조언을 부탁할 때 선지자는 신의 계시에 의해서 모압을 위해서 봉사하는 거예요. 신의 계시에 의해서. 이게 이원체제는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나라의 권력은 왕에게 있기 때문에. 왕은 상설적이잖아요. 늘 있잖아요. 그러나 선지자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표현할 때마다 조언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이 선지자의 존재는 없음이 되죠. 상설적으로 없음이 돼요. 계시가 있을 때만 생겨나는 존재. 이게 선지자입니다. 민수기 22장 18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이 말씀을 보면서 모압 선지자가 완전히 이스라엘 선지자처럼 그렇게 오해할만하죠. 지금 발람 선지자가 어떤 자기 자존심 채우기 위해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21절 그 다음부터 보면 자기가 타고 있는 나귀는 보는데 자기는 못 봐요. 나귀가 누굴 죽이려고 발람 자기를 죽이려고 한 겁니다. 이 모순을 발람은 소화를 못 시키는 거예요. 자기는 말로서 여호와께서 주는 이야기만 은금을 줄지라도 돈이나 밝히는 선지자 아니야. 여러분 많이 들어봤지요. 여러분 기존 교회에서 많이 안 들어봤습니까? 그래가지고 교회 목회하려는 사람들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트럭으로 몇 트럭 될 거예요. 기존의 목사하고 내가 같냐? 나는 오직 말씀만 전하는 목사다.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인거에요. 왜? 이방인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민수기 22장 24장에서 뭐냐 하면은 선지자가 기존의 지배를 벗어났잖아요. 벗어났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파,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그 주변의 에너지가 이미 모압의 왕과 선지자를 어떻게 해요?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 선지자가 없으니까 모세밖에 없으니까 발람 선지자에게 압력을 가해가지고 전달하는 거예요. 내 길을 이스라엘 길을 막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렇게 전달하는 거예요. 그 중간에 발람 선지자가 갖고 있는 중간의 모양새를 보자. 모양새를 봤더니만 이 발람은 허수아비에요. 발람은 허수아비입니다. 발람이 허수아비라는 이 모습이 선지자의 실체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발람이 22장에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결국 이거는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을 어떻게 합니까? 발람 자체를 공격을 하지요. 발람을 공격하게 되면 발람이 이야기했던 내가 이렇게 선지자답다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돼요? 그게 아무 짝도 소용없고 무용지물이고 허세, 소위 기존의 의미 있는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기껏 끄집어낼 수 있는 위대한 선지자 상이라는 허세, 허깨비에 불가한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뭐냐 하면은 선지자는 죽어야 돼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선지자가 죽을 마음 없으면서 살아있으면서 온갖 자기가 듣고 아는 상식 있잖아요. 선지자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직 신의 계시만 말하고 다 맞죠. 다 맞는데 엉터리에요. 맞는 말을 하는데 그게 엉터리에요. 16장에 보면 13절에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런 평가 내리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면은 선지자는 이래야 마땅하다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있지요. 이제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으니까 좀 힘내세요. 뭐냐 하면은 우리는 이런 선지자를 선지자라고 제대로 규정하니까 우리가 산다는 의미도 하나님께서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답 맞잖아요. 정답을 내놓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도 옳다고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예수님이 이용하게 한 거예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레미야 또는 엘리야 또는 세례 요한. 좋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그들이 가짜라는 거예요. 예수님께 좋게 이야기하는 그것이 다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분명히 선지자라는 것은 이론상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외치는 것이 선지자다 알고 있습니다. 이게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단이 나느냐 하면은 이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나는 상당히 질적으로 우수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왜 죄인이고 이것조차 엉터리냔 말인가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거예요.
이제 민수기로 돌아가봅시다. 지금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축복을 했잖아요. 저주하라고 했는데 축복을 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발람 선지자에게 협조하거나 도와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이 축복한 발람 선지자가 결국은 뭐를 알았느냐 하면은 이걸 알았어요. 이스라엘과 언약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알게 된 거예요. 누가? 발람이. 발람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언약 안에 숨어 있는 이스라엘과 언약 받았다는 이스라엘과의 차이점. 안에 언약이 숨어있으면 숨어있는 언약이 발휘되면 그때 이스라엘은 필히 파괴되야 되는 거예요. 필히 부숴져야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건 꿈에도 생각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 받았으니까 우리는 지금 멀쩡한 게 당연하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발람 선지자에게 이스라엘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발람 선지자 입을 통해서 미리 다 계시를 해버린 거예요. 누가 그를 건드리랴. 그 발람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 축복한 대목을 한번 봅시다. 23장 8절에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하면서 누가 이야기했어요? 발람 선지자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발락이 화가 난거죠.
21절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죠. 이게 지금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유대 민족이 깨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위반의 선을 넘어서야 돼요. 다시 말해서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결국 발람 선지자 같은 인식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사람은 결국은 다 무너지고 깨어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깨트리는 거예요. 안다고 여기는 우리를 깨트리는 거예요. 그러면 깨트리면 우리 내장이 드러나죠. 속이 시원하죠. 속이 시원합니다. 목욕탕에서 옷 벗고 있으면 속이 시원하지요. 목욕탕에 외투입고 잠바 입고 들어가보세요. 답답하잖아요. 주님 앞에는 주님이 우리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허물을 우리가 감추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내놓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요? 허물을 보지 않는 나, 그 나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의 공격이 되느냐 하면은 바로 저걸 어떻게 꼬셔볼까 하는 바로 우상 섬기게 해볼까 하는 발람 선지자의 표적이 됩니다. 가짜 선지자들의 공격 표적이 돼요. 목사 나쁘다고 하지 마세요. 교인들도 못지않게 나빠요. 자기 정당성을 그냥 움켜쥐고 안 깨지려고 하니까 자꾸 그러한 날파리, 여름에 날파리 알죠? 산에 가봤죠? 날파리 얼마나 달려듭니까 날파리 예방하는 방법은 모자를 사되 양봉하는 그 모자 면포 내려온 그런 거. 날파리 달려들면 신나요. 앞까지 오는데 못 들어가. 우리 내부에 담겨있는 것을 위하여 깨어지는 것이 우리가 날파리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 정말 복음의 신나는 대목이에요. 이거 너무 감사해야 돼요. 내가 복음을 믿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나를 깨뜨려준다는 이 은혜. 따라서 예수님은 선을 넘은 거예요. 위반해서 선을 넘으신 거예요. 이게 사랑이고 긍휼이에요. 내 백성 어디 있나? 자기 백성 그런 식으로 찾아내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질문을 한번 던지면서 시작해봅시다. 질문은 이거에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복음과 무슨 관계있지요?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무엇을 알려준 겁니까? 갈라디아서 3장 1절, 2장 20절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남겨준 것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무슨 내용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의 내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선지자 기능은 본인이 죽는 거예요. 본인이 죽으면서 자기 백성을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자기 백성도 죽어요. 더 이상 마귀가 와서 죽은 인간을 유혹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죽어버렸는데. 죽었다는데 잘 하면 살 수 있어 그런 게 안 된다니까요. 죽고 새로운 백성을 뭐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생산해내면 되겠지요. 그러면 되겠지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 사건이 사도 바울의 몸, 성도의 육체, 육신 안에 사건이 들어옵니다. 사건이 들어오면 여기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 성립됩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몸이 필요해요? 필요 안 해요? 필요하지요. 필요한데 이거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까? 아니면 십자가 사건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예수님 죽었던 사건이 뭡니까? 이 예수님의 사건은 선을 위반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있으면 사회가 나를 지켜보고 기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여기서 의미가 생기지요. 우리가 내가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의미로 포장을 해서 의미를 몸에 부착해서 살자. 그 의미가 어디서 온 거예요? 살다보면 주어진 거잖아요.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로 있을 때 의미가 있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지요 그 모든 것이. 그런데 그게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안 거예요. 내가 내 몸의 의미 있고 의미를 붙인다 이 모든 것이 다 허깨비고 소용없는 짓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이 의미를 부수면서 우리를 저주 심판해버린 거예요. 저주 심판한 그 사건을 내 몸에 짊어짐은 성령이 와서 나에게 주어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내 의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지신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미로 나는 산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 전체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전체 내용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여전히 연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안 보이지만 살아계신 겁니다. 살아계신다는 말은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비를 내리든지 태풍을 하든지 전부 다 죽여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착실하게 자기 일을 지금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을 확장해나가는 십자가 사건을 확장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들아 내 머리에 덮쳐라. 주님을 애도한다고요? 애도해서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특히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발람이 제물을 얻었다는 것.
자, 제물을 얻었다는 말은 끝으로 이것만 기억합시다. 이방인이 제물을 달라. 왕이여 나에게 일곱 송아지 일곱 양 제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혼령을 달래는 거예요. 혼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죽은 자들까지 산 자가 죽을 자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이방 선지자의 특징이고 무당들의 특징이에요. 묘 한번 파볼까요? 이장해보고? 파묘. 우리는 기독교라 안하지만 그거 해서 만약에 자식이 잘되고 말기암이 낫는다면 해보고 싶어. 해보고 싶어요. 해보고 싶다는 말이 해서 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라 해보고 싶다는 자체가 나의 의미를 내가 포기하기는 싫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간에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의 의미를. 발람 같은 선지자를 오늘날 얼마나 교회에서 찾습니까. 뭘 해야 내 신수가 훤해지겠습니까. 교회에서 새벽 기도하는 거 7자로 뭐라고 했어요. ‘뽀빠이 살려줘요’. 맨날 기도가 뽀빠이 살려줘요. 남북통일이고 백날 딱 줄이면 살려달라는 거예요. 내 의미를 살려달라, 내 의미를. 주님은 선인데. 출애굽 할 때 선이거든요. 우리 그 선을 우리는 혼령을 다뤄서라도 죽은 자를 다루고 그리고 죽은 자의 신을 다뤄서 신의 계시로서 지금 나의 의미가 잃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발람 선지자고 그래서 발람 선지자는 자기가 안 당할라고 나귀를 친 거예요. 자기가 안 죽을라고 나귀를 때린 거예요. 나는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우리에게 저주라는 것을 복으로 바꿨구나 하나님 고마워요 끝이에요. 그 식대로 자기가 파괴되어야 자기 안에 자기가 죽인 예수님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성령님이 올 때까지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전체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그동안 몰랐는지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 이루면 내가 좋게 된다는 그런 헛된 망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예수님이 죽은 것을 우리가 짊어진 것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의미만 십자가만 자랑하고 의미를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